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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요시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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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는 무로마치 막부의 2대 쇼군으로, 1330년에 태어나 1367년에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가마쿠라 막부에 반기를 들었을 때 호조 가문의 인질로 잡혔으나 탈출하여 닛타 요시사다 군에 합류했다. 겐무 신정 시기에는 숙부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보좌를 받아 가마쿠라를 통치했으며, 간노의 요란 이후에는 교토에서 막부 정무를 맡았다. 1358년 아버지의 사망 후 쇼군에 취임하여 남조 세력과 대립하고 막부 내 권력 다툼을 겪었으며, 1367년 아들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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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요시아키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이름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일본어 표기足利 義詮
로마자 표기Ashikaga Yoshiakira
다른 이름센주오 (千寿王)
관직
쇼군제2대 쇼군
재임 기간 시작1358년
재임 기간 종료1367년
이전아시카가 다카우지
다음아시카가 요시미쓰
가계
배우자시부카와 코시
자녀아시카가 요시미쓰
부모아버지: 아시카가 다카우지
어머니: 아카하시 토시
생애
출생1330년 7월 4일
사망1367년 12월 28일
무덤
관위
관위종5위하, 좌마두, 종4위하, 근위부 좌근위중장, 종3위, 정이대장군, 정2위, 권대납언, 증 종1위 좌대신
가문
씨족아시카가 씨 (아시카가 쇼군 가문)

2. 생애

1333년(겐코 3년) 고다이고 천황 토벌을 위해 상경하는 아버지 다카우지를 따라 어머니와 함께 호조 가문의 인질로서 가마쿠라에 억류되었다.

다카우지가 단바국에서 가마쿠라 막부에 반기를 들고 교토로쿠하라 단다이를 공격하자, 어린 요시아키라(당시 아명 '''센주오'''(千寿王))는 가신들에 의해 가마쿠라를 탈출하였다. 이후 닛타 요시사다가 요시아키라를 받들고 가마쿠라 공격에 참여시켰다. 이때 요시아키라는 부친 다카우지의 대리로서 가신들의 보좌를 받아 가마쿠라 공격에 참여하는 무사들에게 군충장을 발부하여, 이후 아시카가 가문이 무가의 동량으로서 인식되는 단초를 만들었다. 겐무 신정에서는 숙부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보좌를 받으며 가마쿠라에 머물렀고, 다카우지가 겐무 정권에서 이반하자 가마쿠라에서 간토 지방을 통치했다.

간노의 요란으로 다다요시가 실각하자 요시아키라는 교토로 소환되어 막부 정무를 맡았다. 1351년(쇼헤이 6년/간노 2년) 8월, 다카우지가 다다요시 파에 대항하기 위해 요시아키라와 함께 남조에 항복하고, 11월에는 연호를 남조의 쇼헤이로 통일하는 쇼헤이 통일이 이루어졌다. 이듬해 남조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와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교토를 침공하자 요시아키라는 교토에서 도주하여 오미국으로 피난하였다. 그 결과 고곤 천황, 고묘 천황, 스코 천황 세 상황을 빼앗겼으나, 간노의 연호를 부활시킴과 동시에 병사를 모아 교토를 탈환하고 삼종의 신기가 없는 상태로 고코곤 천황을 즉위시켰다.

1358년(쇼헤이 13년/엔분 3년) 아버지 다카우지가 사망하면서, 그해 12월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고쿠 지방의 야마나 가문과 오우치 가문 등의 세력 판도가 불분명했고, 규슈 지방에서는 가네요시 친왕이 이끄는 남조 세력(정서부)이 여전히 강성했다. 요시아키라는 즉시 가와치국기이국으로 출병하여 남조군과 싸워 아카사카 성을 함락시켰다.[4] 그러나 막부 내부에서는 1361년(쇼헤이 16년/고안 원년) 호소카와 기요우지 ・ 하타케야마 구니키요와 대립하던 닛키 요시나가가 남조에 항복하고, 간레이였던 기요우지마저 사사키 도요의 참언으로 남조에 투항하는 등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6] 이 틈을 타 남조 측이 일시적으로 교토를 탈환하는 등 정권은 매우 불안정했다.

하지만 호소카와 기요우지와 하타케야마 구니키요를 제거하고, 1362년(고안 2년/쇼헤이 17년) 7월에는 기요우지가 실각한 후 공석이었던 간레이 직에 시바 요시유키를 임명했다. 1363년(쇼헤이 18년/조치 2년)에는 오우치 가문, 야마나 가문이 막부에 귀순하여 정권이 안정되기 시작했고, 닛키 요시나가, 모모이 다다쓰네, 이시토 요리후사 등도 막부에 귀순하며 남조와의 강화도 진전되었다. 같은 해, 요시아키라의 요청으로 19번째 칙찬 와카집에 해당하는 《신슈이와카슈》가 고코곤 천황의 윤지를 받았다. 1365년(쇼헤이 20년/조치 4년) 2월에는 산조보몬 마데노코지의 새 저택으로 이사하였다. 이 기간 동안 요시아키라는 소송 제도를 정비하여 효조슈·히키쓰케슈를 축소하고 쇼군의 친재권 확대를 꾀했다(고젠사타). 온조지와 난젠지의 분쟁에서는 이마가와 사다요에게 명하여 온조지가 관리하는 오사카 관 등을 파괴하였다. 1366년(쇼헤이 22년/조치 6년)에는 시바 가문이 일시적으로 실각하자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간레이에 임명하였다(조지의 변).

1367년 11월, 측실 기 료코와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 아들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에게 부탁하고 다음 달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38세였다. 죽기 이틀 전, 코피를 다량으로 쏟았다고 산조 긴타다의 일기 《고구마이기》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같은 해 3월 5일에는 동생 아시카가 모토우지가 요시아키라보다 먼저 사망했다. 요시아키라는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평소 존경하던 간린지의 구스노키 마사쓰라 묘소 옆에 묻어달라'고 하여 유언대로 마사쓰라의 묘 옆에 묘소가 건립되었다.[7]

2. 1. 쇼군 취임 이전

1333년(겐코 3년) 고다이고 천황 토벌을 위해 상경하는 아버지 다카우지를 따라 어머니와 함께 호조 가문의 인질로서 가마쿠라에 억류되었다.

다카우지가 단바국에서 가마쿠라 막부에 반기를 들고 교토로쿠하라 단다이를 공격하자, 어린 요시아키라(당시 아명 '''센주오'''(千寿王))는 가신들에 의해 가마쿠라를 탈출하였다. 이후 닛타 요시사다가 요시아키라를 받들고 가마쿠라 공격에 참여시켰다. 이때 요시아키라는 부친 다카우지의 대리로서 가신들의 보좌를 받아 가마쿠라 공격에 참여하는 무사들에게 군충장을 발부하여, 이후 아시카가 가문이 무가의 동량으로서 인식되는 단초를 만들었다. 겐무 신정에서는 숙부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보좌를 받으며 가마쿠라에 머물렀고, 다카우지가 겐무 정권에서 이반하자 가마쿠라에서 간토 지방을 통치했다.

간노의 요란으로 다다요시가 실각하자 요시아키라는 교토로 소환되어 막부 정무를 맡았다. 1351년(쇼헤이 6년/간노 2년) 8월, 다카우지가 다다요시 파에 대항하기 위해 요시아키라와 함께 남조에 항복하고, 11월에는 연호를 남조의 쇼헤이로 통일하는 쇼헤이 통일이 이루어졌다. 이듬해 남조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와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교토를 침공하자 요시아키라는 교토에서 도주하여 오미국으로 피난하였다. 그 결과 고곤 천황, 고묘 천황, 스코 천황 세 상황을 빼앗겼으나, 간노의 연호를 부활시킴과 동시에 병사를 모아 교토를 탈환하고 삼종의 신기가 없는 상태로 고코곤 천황을 즉위시켰다.

2. 2. 쇼군 취임 이후

1358년(쇼헤이 13년/엔분 3년) 아버지 다카우지가 사망하면서, 그해 12월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고쿠 지방의 야마나 가문과 오우치 가문 등의 세력 판도가 불분명했고, 규슈 지방에서는 가네요시 친왕이 이끄는 남조 세력(정서부)이 여전히 강성했다. 요시아키라는 즉시 가와치국기이국으로 출병하여 남조군과 싸워 아카사카 성을 함락시켰다.[4] 그러나 막부 내부에서는 1361년(쇼헤이 16년/고안 원년) 호소카와 기요우지 ・ 하타케야마 구니키요와 대립하던 닛키 요시나가가 남조에 항복하고, 간레이였던 기요우지마저 사사키 도요의 참언으로 남조에 투항하는 등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이 틈을 타 남조 측이 일시적으로 교토를 탈환하는 등 정권은 매우 불안정했다.[6]

하지만 호소카와 기요우지와 하타케야마 구니키요를 제거하고, 1362년(고안 2년/쇼헤이 17년) 7월에는 기요우지가 실각한 후 공석이었던 간레이 직에 시바 요시유키를 임명했다. 1363년(쇼헤이 18년/조치 2년)에는 오우치 가문, 야마나 가문이 막부에 귀순하여 정권이 안정되기 시작했고, 닛키 요시나가, 모모이 다다쓰네, 이시토 요리후사 등도 막부에 귀순하며 남조와의 강화도 진전되었다. 같은 해, 요시아키라의 요청으로 19번째 칙찬 와카집에 해당하는 《신슈이와카슈》가 고코곤 천황의 윤지를 받았다. 1365년(쇼헤이 20년/조치 4년) 2월에는 산조보몬 마데노코지의 새 저택으로 이사하였다. 이 기간 동안 요시아키라는 소송 제도를 정비하여 효조슈·히키쓰케슈를 축소하고 쇼군의 친재권 확대를 꾀했다(고젠사타). 온조지와 난젠지의 분쟁에서는 이마가와 사다요에게 명하여 온조지가 관리하는 오사카 관 등을 파괴하였다. 1366년(쇼헤이 22년/조치 6년)에는 시바 가문이 일시적으로 실각하자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간레이에 임명하였다(조지의 변).

1367년 11월, 측실 기 료코와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 아들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에게 부탁하고 다음 달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38세였다. 죽기 이틀 전, 코피를 다량으로 쏟았다고 산조 긴타다의 일기 《고구마이기》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같은 해 3월 5일에는 동생 아시카가 모토우지가 요시아키라보다 먼저 사망했다. 요시아키라는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평소 존경하던 간린지의 구스노키 마사쓰라 묘소 옆에 묻어달라'고 하여 유언대로 마사쓰라의 묘 옆에 묘소가 건립되었다.[7]

3. 통칭과 저택

산조보몬(三条坊門)에 저택이 있어 '''보몬도노'''('''坊門殿''')라고 불렸다. 또한 무로마치 스에아키(室町季顕)에게서 '화정(花亭)'을 사서 별채로 삼았다.[1]

4. 연대기

서력남조 연호북조 연호월일사건
1335년겐무 2년4월 7일종5위하에 서임.
1344년고코쿠 5년고에이 3년3월 16일정5위하로 승서.
3월 18일좌마두에 임관.
1347년쇼헤이 2년조와 3년12월 3일종4위하로 승서.
1349년쇼헤이 4년조와 5년다카우지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교토로 소환됨.
1350년쇼헤이 5년간노 원년8월 22일참의에 보임, 좌근위중장을 겸임.
1352년쇼헤이 7년간노 3년4월 5일기타바타케 아키요시, 구스노키 마사노리 등이 이끄는 남조군이 교토를 점령하였으나, 요시아키라가 탈환함.[4]
1353년쇼헤이 8년분나 2년7월마사노리와 야마나 토키우지가 이끄는 남조군이 다시 교토를 점령했으나, 8월에 요시아키라가 격퇴함.
1355년쇼헤이 10년분나 4년1월모모노이, 타다후유, 야마나 등이 이끄는 남조군이 다시 교토를 점령했으나, 4월 25일 다카우지와 요시아키라의 연합군이 교토를 탈환함.[4]
1356년쇼헤이 11년엔분 원년8월 23일종3위로 승서. 참의 좌근위중장 여전.
1358년쇼헤이 13년엔분 3년아버지 다카우지 사망, 요시아키라가 쇼군직 계승.[5]
1359년쇼헤이 14년엔분 4년2월 4일무사시노카미 겸임.
1362년쇼헤이 17년고안 2년호소카와 기요우지와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교토를 공격, 요시아키라 피신. 20일 만에 수도 탈환.[6][4]
12월 18일세이이타이쇼군 선하
1363년쇼헤이 18년조지 2년1월 28일대납언으로 전임.
7월 29일종2위로 승서. 권대납언 여전.
1365년쇼헤이 20년조지 4년고다이고 천황의 아들 가네요시 친왕규슈 장악.[6]
1367년쇼헤이 22년조지 6년1월 5일정2위로 승서.
12월 7일사망.
1368년쇼헤이 23년조지 7년12월 20일증 종1위 좌대신.


5. 진고지 3상과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진고지 3상 중 하나인 전(傳) 후지와라노 미쓰요시 상. 초상화의 실제 주인공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교토진고지(神護寺)에는 견본저색(絹本著色)으로 제작된 소쿠타이 차림을 한 세 명의 인물상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를 통칭 진고지 3상이라 부른다. 1951년 일본의 국보로 지정될 당시 이들 초상화는 각각 전(伝)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 다이라노 시게모리(平重盛), 후지와라노 미쓰요시(藤原光能)의 초상화로 비정되었다.[17]

1995년 일본 도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요네쿠라 미치오(米倉迪夫)는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초상화라는 새로운 설을 발표하면서, 다이라노 시게모리의 것이라 전하는 초상화와 똑같이 왼편을 향하고 있는 후지와라노 미쓰요시의 것이라 전하는 초상화에 대해서도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아들로 2대 쇼군이 되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것이라 비정하였다. 교토 등지원(等持院)에 소장된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목상과 해당 초상화의 얼굴이 흡사하다는 것이 요네쿠라 미치오의 근거였다.[12]

요네쿠라 미치오의 설에 동조했던 사학자 구로다 히데오(黒田日出男)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1345년부터 몇 년 동안 막부 내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아시카가 다다요시 형제의 이두정치가 이루어졌으나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으로 양자간의 관계가 붕괴하고 간노(観応) 2년에 아시카가 다다요시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이기고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일단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아시카가 다다요시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자신의 정치 파트너로 선택하고 새로운 이두정치를 시작하였던 점을 들어서, 이때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초상화(즉 다이라노 시게모리의 것으로 알려졌던 초상화)를 대신해서 새롭게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초상화(즉 후지와라노 미쓰요시의 것으로 알려졌던 초상화)가 제작되었다고 추론하였다.[12]

요네쿠라 미치오와 구로다 히데오의 설은 그때까지의 통설을 흔들어놓았지만, 역사학에서는 논거의 명확함으로 새로운 학설을 지지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것과 달리 미술사학계에서는 세 상의 화풍이 헤이안 후기-가마쿠라 초기의 것이고 양식으로 보아 남북조 시대의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우며 세 상의 성립을 남북조 시대까지 낮추어 볼 적극적 이유가 없다며 거듭 강조하는 등 양자간의 골이 깊다.[17]

6. 요시아키라에게 편휘를 받은 인물

요시아키라에게 이름 한 글자를 받은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요시(義)' 자를 받은 인물

이름비고
오우치 요시히로
이마가와 요시노리이마가와 료슌의 장남, 후에 사다오미로 개명
(※출생년도 및 원복 시기가 불분명하여 요시미쓰에게 받았을 가능성도 있음)
오야마 요시마사
롯카쿠 요시노부



; '아키(詮)' 자를 받은 인물

이름비고
아시카가 미쓰아키라친자, 요시미쓰의 동생
다카 시아키라다카 시게나오의 자식
아와하라 아키타네아와하라씨
아시나 아키모리
아라카와 아키요리
아라카와 아키나가아키요리의 자식
아라카와 아키노부아키요리의 자식, 또는 아키나가의 자식
이시카와 아키모치
잇시키 아키노리
잇시키 아키미쓰아키노리의 동생
잇시키 아키미쓰아키노리・아키미쓰 형제의 사촌, 아버지는 노리후사
우에노 아키카네아시카가씨 계 우에노씨 적류
우사미 아키스케미쓰히데
오구시 아키유키오구시씨, 막부 봉공중
오마타 아키우지아시카가씨 계 오마타씨
시바 아키쓰네이에나가의 아들로 여겨짐
시바 아키마사 (요시타카)
시라이 아키쓰네[http://www2.harimaya.com/sengoku/html/sirai_ak.html 안게 시라이씨]
다이죠 아키쿠니미쓰모토의 아버지
나카조 아키히데
토가시 아키치카마사이에의 아들
토키 아키나오
호소카와 아키하루
혼고 아키야스미마사카 토모치카의 후예
모모이 아키노부나오노부의 아들
유카와 아키미쓰기이국중, 오에이 기간에 봉공중, 처음에는 아키나오, 후에 아키하루
요시미 아키요리요시미씨, 막부 봉공중
몬주쇼 아키야스몬주쇼씨



; 보충 설명


  • '요시(義)' 자는 아시카가 가문의 조상인 세이와 겐지의 통자로, 통치에 있어서 그 자손임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인 '''요시'''미쓰 이후의 아시카가 쇼군가에서도 대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이 글자가 주어지는 것은 파격적인 대우를 의미했다.
  • '아키(詮)' 자의 독음은 요시아키라와 그의 아들 미쓰아키라는 ''''아키라'''', 그 외의 인물은 ''''아키''''라고 읽는다. 후자의 경우 ''''노리''''라고 읽기도 한다.
  • 동시대 인물이므로, 위에 언급된 인물 외에도 시바 '''요시'''마사・시바 '''요시'''타네 형제, 하타케야마 '''요시'''후카, 하타케야마(니혼마쓰) 구니'''아키라''' (니혼마쓰씨, 하타케야마 구니우지의 자식), 교고쿠 다카'''아키라''', 니카이도 유키'''아키라'''(유키요시) 등도 요시아키라에게서 이름 한 글자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7. 요시아키라가 등장하는 작품


  • 태평기 (NHK 대하드라마, 1991년, 배우: 이나바 요스케 → 모리타 유스케 → 가타오카 코타로)

참조

[1] 백과사전 足利 義詮 http://rekishi.jkn21[...] Shogakukan 2012-07-31
[2]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Google books
[3] 백과사전 足利義詮 http://rekishi.jkn21[...] Shogakukan 2012-07-31
[4]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5] 서적 Google books
[6] 문서 Lessons from History: The Tokushi Yoron
[7] 서적 Google books
[8] 서적 Google books
[9] 서적 Google books
[10] 웹사이트 足利義詮
[11]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三省堂
[12] 서적 国宝神護寺三像とは何か 角川学芸出版
[13] 학술 足利氏の肖像に就いて 東京文化財研究所
[14] 문서 足利氏の肖像 --宝筐院蔵足利義詮像を中心に-- 栃木県立博物館
[15] 학술 楠氏研究 https://dl.ndl.go.jp[...] 積善館
[16] 학술 嵯峨宝筐院の成立と泰甫恵通の動向
[17] 서적 足利尊氏と直義 吉川弘文館
[18] 학술 『次将装束抄』と源頼朝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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