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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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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코르 와트는 12세기에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 건설된 캄보디아의 사원이다. 힌두교 신 비슈누에게 봉헌되었으며, 크메르 건축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앙코르 와트는 12세기 후반 불교 사찰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이후 16세기부터는 버려지지 않고 불교 사찰의 기능을 유지했다. 앙코르 와트는 199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캄보디아의 중요한 문화적 상징이자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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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
지도
기본 정보
메인 단지 정면
메인 단지 정면
다른 이름앙코르 와트 (Angkor Wat, Angkor Vat)

Ângkôr Vôtt (크메르어 로마자 표기)
위치캄보디아 시엠레아프
고도65m
면적162.6 헥타르 (1,626,000 m², 402 에이커)
길이5km
둘레3.6km
건축 양식크메르 건축 (앙코르 와트 양식)
건축 시기12세기 초 (1150년 경)
건축가수리야바르만 2세 시기에 시작, 자야바르만 7세 시기에 완공
문화크메르 제국
종교힌두교 (초기), 이후 상좌부 불교
기능유적
문화재 지정1992년 (제16회 세계유산위원회)
세계유산 번호668
세계유산 기준i, ii, iii, iv
세계유산 지역아시아와 태평양
건축 재료사암, 라테라이트
파사드 방향서쪽
언어별 표기
로마자 표기Ângkôr Vôtt
IPA (크메르어)/ʔɑŋkɔː ʋɔət/
IPA (영어)/ˌæŋkɔːr ˈwɒt/
웹사이트
공식 웹사이트앙코르 사원 가이드

2. 역사

수리야바르만 2세


캄보디아 구전 신화에 따르면, 힌두교 신 인드라가 아들을 위해 사람들에게 궁전을 지으라고 명했고, 이때 앙코르 와트가 세워졌다고 한다. 13세기 중국 여행가 주달관은 당시 사람들이 앙코르 와트가 신성한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지어졌다고 믿었다고 기록했다.

사원 설계와 건축은 수리야바르만 2세(재위 1113~1150년) 재위기인 12세기에 시작되었다. 앙코르 와트는 왕실용 사원이자 수도의 핵심 사원으로, 비슈누에게 봉헌되었다. 창립 연대나 건축 시기를 알려주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본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바라 비슈누-록(Varah Vishnu-Lok)'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수리야바르만 2세 사후 공사가 중단되어, 현재 앙코르 와트 일부는 장식이 미완성 상태이다.

1177년, 참파 왕국의 침략으로 크메르 제국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자야바르만 7세가 국력을 회복하고 앙코르 와트 북쪽에 새 수도 앙코르 톰과 중심 사원 바이욘 사원을 건설하면서 앙코르 와트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12세기 후반, 앙코르 와트는 힌두교 사원에서 불교 사찰로 점차 바뀌었다. 16세기 후반부터 완전히 버려진 적은 없었으며, 17세기 앙코르 비문에는 일본 불교 수도승들이 앙코르 와트 근처에서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일본 수도승들은 이곳을 기원정사로 착각했다.

1586년, 스페인 선교사 안토니오 다 마달레나가 앙코르 와트를 처음 방문한 서양인 탐험가 중 한 명이다. 1860년경 프랑스 식물학자이자 탐험가 앙리 무오가 탐험록을 출판하여 앙코르 와트를 서구 세계에 널리 알렸다. 앙리 무오는 '미개한' 크메르 인들이 이 정교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지 의심하여, 그리스 로마 문명에 의해 지어졌다고 추정했다.

프랑스는 앙코르 와트와 주변 유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여 1863년 8월 11일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삼았다. 1898년경 프랑스 정부가 유적 보존 예산을 대부분 삭감하면서 관리가 소홀해져 유적이 다시 정글에 묻히기도 했으나, 20세기 들어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1953년 11월 9일 캄보디아 독립 후에도 앙코르 와트는 계속 관리되었다. 캄보디아 내전크메르 루주 집권기(1970년대~1980년대)에 복원 작업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유적 자체는 상대적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앙코르 와트는 캄보디아의 국가적 상징이자 크메르 제국의 영광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캄보디아 외교와 국제적 위상의 자존심이다. 1863년 제정된 첫 국기부터 현재 국기까지 모든 국기에 앙코르 와트가 들어가 있으며, 캄보디아를 대표하는 이미지이다. 2000년대 들어 태국이 앙코르 와트 소유권을 주장하며 양국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2. 1. 건립 배경 및 초기 역사 (12세기)



앙코르와트 건설자인 수리야바르만 2세의 석조 부조


캄보디아의 구전 신화에 의하면, 힌두교의 신 인드라가 그의 아들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궁전을 지으라고 지시했고, 이때 앙코르 와트가 세워졌다고 한다. 13세기의 중국 여행가 주달관은 당시 사람들이 앙코르 와트가 신성한 힘에 의하여 하룻밤 사이에 지어졌다고 믿었다고 기록했다.

사원 설계와 건축 작업은 수리야바르만 2세(재위 1113~1150년)의 재위기였던 12세기에 시작되었다.[6] 앙코르 와트는 왕실용 사원이자 수도의 핵심 사원으로 지어졌으며, 비슈누에게 봉헌되었다.[4] 창립 연대나 건축 시기를 알려주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앙코르 와트의 본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비슈누에게 바쳐진 신전이었기에 '바라 비슈누-록(Varah Vishnu-Lok)'이라고 불렸을 가능성은 있다.[4] 수리야바르만 2세가 죽은 직후 공사가 중단되어, 현재 앙코르 와트의 일부는 장식 작업이 미완성으로 남아있다.[9] 수리야바르만 2세의 유명은 '파라마비슈누로카'인데, 이는 '비슈누의 세계로 떠난 왕'이라는 뜻으로, 수리야바르만 2세를 신격화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1177년, 수리야바르만 2세 사후 약 27년 뒤, 크메르 제국은 오랜 숙적이던 참파 왕국에게 침략당해 큰 피해를 입고 국력이 휘청거렸다. 이후 크메르 제국은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하여 세를 추스르고 국력을 회복하였다. 자야바르만 7세는 왕권을 과시하기 위하여 앙코르 와트 북쪽에 새로운 수도인 앙코르 톰을 건설하고, 제국의 새로운 중심 사원인 바이욘 사원도 함께 건설하였다. 이후 바이욘 사원이 국가 사찰의 지위를 획득하며 앙코르 와트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12세기 후반, 앙코르 와트는 힌두교 사원에서 불교 사찰로 점차 용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9세기 초 건립된 크메르 제국(앙코르 왕조)는 앙코르 주변에 도성을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다.

12세기 전반, 수리야바르만 2세는 기존 도성 대신 인근에 새로운 왕궁을 건설하고, 그 남쪽에 국가 수호를 위한 새로운 힌두교 사원을 건설하였다. 이것이 앙코르 와트이다. 앙코르 왕조에서 주류였던 시바파 대신, 이 사원은 수리야바르만 2세가 깊이 신봉하는 비슈누파 사원으로 건립되었다.[88]

앙코르 와트는 수리야바르만 2세 재위 중 30년이 넘는 세월을 들여 건설되었으나, 일부는 미완성으로 남았다.[89]

2. 2. 불교 사원으로의 변화 (12세기 후반~16세기)

1177년, 수리야바르만 2세가 사망하고 약 27년 후, 앙코르는 크메르의 전통적인 적인 참파에게 함락되었다.[10] 이후 크메르 제국은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복원되었고, 그는 북쪽에 위치한 국립 사원인 앙코르톰과 바욘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자야바르만 7세의 왕비인 인드라데비가 독실한 대승불교 신자였고 그를 개종하도록 장려했기 때문에 이 사원은 불교를 위해 봉헌되었다. 따라서 앙코르 와트 또한 점차 불교 사찰로 개조되었고 많은 힌두교 조각상이 불교 예술로 대체되었다.[8][11][12]

12세기 말 힌두교 예배 중심지에서 불교로 변모한 후, 앙코르 와트는 현재까지 불교 중심지로 남아 있다.[12] 13세기에서 14세기 사이에는 중국 사신 주달관과 여행가 정화가 앙코르 와트를 방문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정화는 사찰 건축을 연구했는데, 이는 나중에 대보은사와 갈라제드 탑에 통합되었다.[13]

앙코르 와트는 16세기 이후 대부분 방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버려지지 않은 점에서 앙코르 사원들 중에서 특이하다. 앙코르 지역에서 발견된 17세기의 14개의 비문에는 일본 불교 순례자들이 크메르 현지인들과 함께 작은 정착지를 세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4] 비문에는 또한 1632년 앙코르 와트에서 크메르 설날을 기념한 우콘다유 가즈후사에 대한 내용도 담겨 있다.[15]

16세기 중반, 앙 찬 1세(Ang Chan Ier)는 미완성이었던 제1회랑 북쪽 면과 그 주변에 조각을 새겼다.[93] 그의 손자인 사타 1세(Satha Ier)는 불교 사찰로 개조하여 본당에 안치되어 있던 비슈누 신상을 네 개의 불상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17세기 전반에는 수인선 무역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앙코르 와트의 존재가 알려졌지만, 당시 일본인들은 이 사찰을 기원정사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94] 당시 일본 순례객들의 묵서가 앙코르 와트 곳곳에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도 1632년에 일본인 모리모토 우콘다유 이부사(森本右近太夫一房)가 방문했을 때 벽면에 남긴 묵서가 널리 알려져 있다.[95]

2. 3. 일본과의 교류 (17세기)

17세기 전반, 수인선 무역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앙코르 와트의 존재가 알려졌지만, 당시 일본인들은 이 사찰을 기원정사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94] 1635년 해외 여행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일본에서 순례객들이 앙코르 와트를 방문했다.

당시 일본 순례객들이 앙코르 와트 곳곳에 남긴 묵서 중, 1632년(寛永 9년) 일본인 모리모토 우콘다유 이부사(森本右近太夫一房)가 방문했을 때 벽면에 남긴 "사찰을 목표로 수천 리의 바다를 건너", "여기에 네 개의 불상을 봉안하는 것이다"라는 묵서가 널리 알려져 있다.[95] 또한, 이때 일본 순례객이 앙코르 와트의 실측도를 작성하여 '기원정사도(祇園精舎図)'라는 이름으로 미토 도쿠가와 가(水戸徳川家)에 소장되었고, 현재도 미토 시(水戸市)의 도쿠가와 뮤지엄(徳川ミュージアム)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의 제작자는 나가사키 시(長崎市)의 통사(通詞) 시마노 켄료(島野兼了)로 여겨졌으나, 그는 실존하지 않는 인물이며,[96] 최근 조사에서 모리모토 우콘다유 이부사가 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다.[97]

2. 4. 서구 세계에 알려지다 (19세기)

중앙 사당 (1866년 촬영)


앙코르 와트 사진, 에밀 게셀(Emile Gsell) 촬영, 1866년경


앙코르 와트 스케치, 루이 델라포르트(Louis Delaporte)의 그림, 1880년경


16세기, 포르투갈 상인과 선교사들은 150년 이상 버려진, 북부 캄보디아 숲 속에 숨겨진 거대한 돌 도시를 발견했다. 이 도시에는 앙코르 와트를 포함한 사원들이 있었는데, 앙코르 와트는 이 유적지에서 가장 큰 종교 기념물이었다. 최초로 기록된 방문자 중 한 명은 1586년에 유적지를 탐험한 안토니우 다 마달레나(António da Madalena)라는 카푸친 수사였다. 그는 이 거대한 유적을 보고 감격하여, '이 유적은 펜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장엄한 건축물이다. 특히 이 유적은 세계의 그 어떠한 곳과도 다른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 지성이 보여줄 수 있는 극도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고 있다'라고 적었다.[16] 3년 후, 그는 자신의 관찰 내용을 포르투갈 인도의 공식 역사가였던 디오구 두 쿠투(Diogo do Couto)에게 전달했다. 두 쿠투는 자신의 역사적 저술에 수사의 기록을 남겼다.

1850년, 프랑스인 샤를 뷔이유보(Charles-Émile Bouillevaux, 샤를-에밀 뷔이유보) 신부가 앙코르와트를 방문하였는데, 이는 포르투갈인을 제외한 서구인으로서는 최초의 앙코르와트 방문이었다.[100][101]

그러나 앙코르와트가 본격적으로 서구에 알려지게 된 것은 1860년 프랑스인 앙리 무오(Henri Mouhot)가 현지인의 안내를 받아 사원을 방문한 이후이다. 무오는 자신의 탐험록을 출판하여 서구 세계에 앙코르 와트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무오는 이듬해 사망하였지만, 그의 기행문이 1863년 잡지에 게재되면서 서구와 세계에 이 사원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00] 무오의 저서는 1864년에 왕립지리학회(Royal Geographical Society)를 통해 사후에 출판되었는데, ''인도차이나, 시암, 캄보디아, 라오스 중부 지역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앙코르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다. 무오는 이 유적의 발견자 또는 재발견자로 소개되는[102] 경우가 많지만, 캄보디아에서는 전혀 잊혀지지 않았으며, 서구인조차도 그보다 10년이나 앞서 뷔이유보 신부가 방문했기 때문에 이것은 오류이다.

앙리 무오는 '미개한' 크메르 인들이 이와 같은 정교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의심하였고, 이 사원이 그리스 로마 문명에 의하여 지어졌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그는 앙코르 와트가 그리스 로마 시대와 동시대에 건축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연구는 당시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세를 뻗치던 프랑스 정부의 관심을 끌었고, 대규모 발굴 조사가 행해지게 되었다.

1861년, 독일 인류학자 아돌프 바스티안(Adolf Bastian)은 동남아시아로 4년간의 여행을 떠났고, 이 여행에 대한 그의 기록인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6권으로 구성되어 1868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들은 앙코르 유적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지만, 앙코르 유적의 그림은 없었다.[17]

앙코르 와트와 그 주변 유적들의 아름다움은 프랑스 정부의 큰 관심을 끌었고, 결국 프랑스는 1863년 8월 11일에 캄보디아 지역을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유적 폐허들의 소유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인근의 태국을 공격, 캄보디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로 인하여 캄보디아는 1351년 이래 태국에게 뺏겼던 북서부 영토를 태국에게서 되찾아와 캄보디아의 행정 구역으로 재편입시킬 수 있었다. 1863년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면서, 앙코르와트에 대한 프랑스의 조사가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루이 드라포르트(Louis Delaporte, 루이 드라포르트) 등이 이 시기에 조사를 실시하였다.[104]

앙코르 와트의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은 사원 복구 작업에서 회수하거나 출토된 비문들을 해독하는 것으로 주로 이루어졌다. 이 복구 작업에서는 다른 고대 유적지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조리 도구, 옷 조각, 무기와 같은 주거지에서 주로 발굴되는 유물들이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오직 사원과 종교와 관련된 유물들만 나왔다.[20] 프랑스 고고학자들은 주요 사원 건축물들의 스케치를 하고, 비문들을 탁본하고 이를 해석하여 앙코르 와트의 역사를 알아내려 시도하였다.

1878년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앙코르와트를 본뜬 인도차이나관이 세워지기도 하였다.[105]

2. 5. 프랑스 식민 통치와 연구 (19세기 말~20세기 중반)

1860년 경, 프랑스의 식물학자이자 탐험가 앙리 무오가 앙코르 와트를 방문하여 자신의 탐험록을 출판하면서 서구 세계에 앙코르 와트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앙리 무오는 '미개한' 크메르 인들이 이와 같은 정교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하였고, 앙코르 와트가 그리스 로마 시대와 동시대에 건축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21][22] 그의 연구는 당시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프랑스 정부의 관심을 끌었고, 대규모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앙코르 와트의 아름다움에 주목한 프랑스는 1863년 8월 11일에 캄보디아 지역을 보호령으로 삼았고, 유적의 소유권을 확보하기 위해 인근의 태국을 공격하여 캄보디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캄보디아는 1351년 이래 태국에게 빼앗겼던 북서부 영토를 되찾아와 캄보디아의 행정 구역으로 재편입시킬 수 있었다.[23][24]

1908년, 프랑스 극동학술원(EFEO)은 앙코르 보존(Angkor Conservancy)을 설립하여 앙코르 유적의 연구, 보존 및 복원 활동을 담당하게 했다. 1960년대에는 주요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19세기 말, 프랑스 고고학계는 고대 크메르 제국의 연대기를 완성하고 앙코르 문명의 역사를 어느 정도 복원해냈다. 그러나 1898년, 프랑스 정부는 앙코르 유적 보존 예산을 대부분 삭감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유적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다시 정글에 묻히기 시작했다. 특히 거대한 무화과나무와 열대 나무들이 유적의 돌 틈 사이로 뿌리를 내려 유적은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다.

20세기에 들어 앙코르 와트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면서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발굴팀은 열대우림을 벌목하고 유적 근처를 청소하여 수백 년 동안 정글 속에 잠겨 있던 사원들을 다시 드러냈다. 1931년 파리 식민지 전시회에서 앙코르 와트 모형이 전시되면서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서구 세계에서도 주목받게 되었다.

1907년 으로부터 앙코르를 포함한 시엠레압 주의 할양을 받고 앙코르가 프랑스령이 된 이후 앙코르 와트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같은 해 사이공에 있던 프랑스 극동학원이 앙코르 유적 보존 사무소를 설치했다.[107] 1908년에는 초대 앙코르 유적 보존관으로 장 콤아이유(Jean Commaille)가 부임하여 유적 내 사원을 이전하고, 토사와 수목을 제거했으며, 관광을 위해 유적까지의 도로를 건설했다.[109]

1909년에는 당시 시소왓 1세 왕이 앙코르 와트를 순행했고, 이후 캄보디아 왕실과 앙코르 유적과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110] 이듬해, 사원 내에 거주하던 불교 승려들을 퇴거시켜 살아있는 사원으로서의 역할은 약해지고, 유적 보호가 중요해졌다.[111] 1913년에는 건축학자 이토 춘타가 미토 도쿠가와가 소장한 『기온정사도』를 조사하여 이것이 앙코르 와트의 실측도임을 밝혔다.[94]

태평양 전쟁 시기인 1942년부터 1943년에 걸쳐 일본 정토진종 대화파가 파견한 동본원사 남방미술조사대가 현지를 방문하여 사진 등을 남겼다.[112]

캄보디아는 1953년 11월 9일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고, 이후 앙코르 와트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2. 6. 캄보디아 독립과 내전 (20세기 후반)

캄보디아 내전으로 크메르 루주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캄보디아를 장악하면서 앙코르 와트 복원 작업은 중단되었다. 크메르 루주 시대에는 앙코르에 대한 작업이 중단되었고 앙코르 보존은 1975년 해체되었다.[25] 크메르 루주 군대는 건물 구조물에 남아 있는 나무를 땔나무로 사용했고, 크메르 루주와 베트남군 간의 총격전으로 인해 몇몇 부조에 총탄 자국이 생겼다.[26]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에는 태국에서 활동하는 예술 도둑들이 이전의 복원물을 포함한 많은 조각상과 다른 구조물들을 잘라내 더 큰 피해를 입혔다.[26]

앙코르 와트에서 크메르 루주와 베트남군 간의 총격전으로 남은 총탄 자국


1979년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빼앗기자, 앙코르 와트를 상징으로 삼았던 그들은 이곳에 숨어들어 근거지를 삼았다.[117] 앙코르 와트는 종교 시설이지만, 성곽과 같은 구조로 진지를 설치하기에 적합했다. 해자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에는 누각이 있어 주위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캄보디아의 중요한 문화유산이기에 공격측은 중화기 사용을 주저했다. 당시 설치되었던 포대 흔적은 최근까지 확인되었지만(현재는 복원됨), 사당 각처에 있던 불상들이 파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내전으로 인한 탄흔도 복원되었지만 일부는 아직 남아있다.

캄보디아의 다른 고대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앙코르 와트도 식물 과다 성장, 균류, 지반 움직임, 전쟁 피해, 도난 등으로 인해 광범위한 피해와 훼손을 입었지만, 앙코르 와트 사원에 대한 전쟁 피해는 캄보디아의 다른 사원 유적에 비해 제한적이었다.[26]

1953년 캄보디아가 독립한 후, 앙코르 와트는 노로돔 시하누크 정권에 의해 민족주의와 강하게 결부되었다.[113] 1972년 캄보디아 내전으로 그로슬리에와 극동학원은 캄보디아를 떠났고,[115] 1975년에는 민주 캄푸치아(폴 포트 정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때 많은 봉납불은 크메르 루주에 의해 우상 파괴의 대상이 되어, 석판이 되었다고 한다.[116]

2. 7. 복원 노력과 세계유산 등재 (20세기 말~현재)

20세기에는 사원 건물에 자라난 식물을 제거하고 사원 단지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1908년 프랑스 극동학술원(EFEO)에 의해 앙코르 보존(Angkor Conservancy)이 설립되었다.[21][22] 앙코르 보존은 1970년대 초까지 앙코르에서 연구, 보존 및 복원 활동을 담당했으며, 1960년대에는 주요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23][24] 캄보디아는 1953년 11월 9일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 앙코르 와트를 관리해 왔다.

캄보디아 내전 당시 크메르 루주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캄보디아를 장악하면서 복원 작업은 중단되었다. 크메르 루주 시대에는 앙코르에 대한 작업이 중단되었고 앙코르 보존은 1975년 해체되었다.[25] 크메르 루주 군대는 건물 구조물에 남아 있는 나무를 땔나무로 사용했고, 크메르 루주와 베트남군 간의 총격전으로 인해 몇몇 부조에 총탄 자국이 생겼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에는 태국에서 활동하는 예술 도둑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혔는데, 이들은 이전의 복원물을 포함한 많은 조각상과 다른 구조물들을 잘라냈다.[26] 캄보디아의 다른 고대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앙코르 와트도 식물의 과다 성장, 균류, 지반 움직임, 전쟁 피해, 도난 등의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광범위한 피해와 훼손을 입었지만, 앙코르 와트 사원에 대한 전쟁 피해는 캄보디아의 다른 사원 유적에 비해 제한적이었다.[26]

앙코르 와트 입구로 이어지는 복원된 나가의 머리와 복원되지 않은 사자 조각상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인도 고고학 조사단이 사원에 대한 복원 작업을 수행했는데, 당시 프랑스가 캄보디아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7] 초기 프랑스의 복원 시도와 후기 인도의 작업에 대해서는 여러 화학 물질과 시멘트 사용으로 인한 석재 표면 손상에 대한 우려와 함께 비판이 제기되었다.[26][28][29]

1992년, 앙코르 유적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30] 동시에 앙코르 와트는 노로돔 시하누크의 도움 요청과 유네스코의 앙코르 보존을 위한 국제 사회에 대한 호소에 따라 유네스코의 위기에 처한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되었지만 (2004년 제외됨)[31][32] 1994년 앙코르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해 지역 구획이 지정되었고, 1995년에는 앙코르와 시엠레아프 지역의 보호 및 관리를 위한 기관인 APSARA (앙코르와 시엠레압 지역 보호 및 관리청)이 설립되었으며, 1996년에는 캄보디아 유산 보호법이 통과되었다.[33][34][35]

세계기념물기금의 앙코르 와트 보존에 대한 비디오


21세기에는 프랑스, 인도, 일본, 중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의 팀이 앙코르 와트 보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독일 앙코르 보존 프로젝트(GACP)는 사원을 장식하는 데바타와 다른 부조를 추가적인 손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이 단체의 조사 결과 부조의 약 20%가 주로 자연 침식과 석재의 열화로 인해,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이전의 복원 노력으로 인해 매우 열악한 상태에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36] 앙코르 와트에서는 미생물 생물막이 사암을 훼손시켰다.[37] 다른 작업에는 무너진 구조물 부분의 수리와 추가 붕괴 방지가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2002년에는 상층부 서쪽 외벽을 비계로 지지했다. 일본 팀은 2005년에 외곽 담의 북쪽 도서관 복원을 완료했다.[38][39] 일부 분실되거나 손상된 조각상을 대체하기 위해 복제품이 만들어졌다.[40]

3. 건축

앙코르 와트는 힌두-불교 사원 단지로, 고대 크메르 제국의 수도 앙코르 내부에 162.6ha 부지에 위치하며, ''기네스 세계 기록''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 건축물로 여겨진다.[42]

앙코르 와트는 크메르 건축의 대표적인 사례로, '앙코르 와트 양식'이라고도 불린다. 12세기 앙코르의 건축가들은 라테라이트나 벽돌 대신 사암을 주로 사용하여 건물을 지었으며, 이 때문에 현재 보이는 대부분의 부분은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벽이나 잘 보이지 않는 부분에는 라테라이트가 사용되었다. 석재들을 고정하기 위해 사용된 접착 물질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천연 수지나 수산화 칼슘 재질의 점착제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앙코르 와트는 조화를 강조하여 지어졌으며, 20세기 중반의 평론가 마우리스 글레이스는 '앙코르 와트는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재료들과 정확한 비율의 정제된 아름다움으로 인한 고전적인 완벽성을 띠고 있다. 앙코르 와트의 건축 양식은 힘의 건축, 통합적인 건축이다.'라고 평가했다.[52] 앙코르 와트는 거대한 산처럼 생긴 탑들과 이를 둘러싸는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서를 잇는 축을 기본으로 설계되었다. 신들이 사는 곳인 수미산(메루산)을 상징하며, 중앙의 5개 탑은 수미산의 다섯 봉우리를, 사원을 둘러싼 벽과 해자는 수미산의 산맥과 바다를 상징한다.[8] 평민들은 가장 낮은 1층에만 출입이 허용되었고, 가장 높은 3층에는 최고위 승려들과 왕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크메르 사원과 달리 앙코르 와트는 동쪽이 아닌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수리야바르만 2세가 앙코르 와트를 자신의 장례용 사원으로 사용하려 했다는 모리스 글레이즈와 조르주 코데 등 학자들의 추측을 뒷받침한다.[46]

앙코르 와트는 최대 1.5톤 무게의 사암 블록 500만~1000만 개로 만들어졌다.[59] 사암은 북동쪽 약 40km 떨어진 굴렌산에서 채취되어 운반되었다. 운반 경로는 톤레사프 호수를 거쳐 총 136km로 추정되었으나, 2011년 와세다 대학교 연구팀은 56km의 더 짧은 운하를 발견하여 크메르인들이 이 경로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61]

사원 단지는 1024m × 802m, 높이 4.5m의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벽은 30m 너비의 빈 공간과 190m 너비, 둘레 5km가 넘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53] 해자는 동서로 1.5km, 남북으로 1.3km에 걸쳐 있다.[54] 앙코르 와트 곳곳에는 압사라와 데바타들의 장식들로 가득 차 있는데, 현재 조사 결과 대략 1,796명의 압사라들이 조각되어 있다고 전한다.

3. 1. 설계

앙코르 와트는 거대한 산처럼 생긴 탑들과 이를 둘러싸는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서를 잇는 축을 기본으로 설계되었다. 앙코르 와트는 신들이 사는 곳인 수미산(메루산)을 상징하며, 중앙의 5개 탑은 메루산의 다섯 봉우리를, 사원을 둘러싼 벽과 해자는 메루산의 산맥과 바다를 상징한다.[8] 평민들은 가장 낮은 1층에만 출입이 허용되었고, 가장 높은 3층에는 최고위 승려들과 왕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앙코르 와트의 지도


앙코르와트 항공 사진


앙코르 와트는 사원 산과 동심원식 회랑 계획의 독특한 조합으로, 대부분 힌두교의 종교적 신념에서 유래되었다. 사원의 특정 특징과 천체적 의미를 고려할 때, 앙코르 와트의 건설은 사원의 동서 방향과 테라스에서 특정 탑이 일출 지점에 정확히 위치하도록 설계되었다.[43] 특히 중앙 탑은 춘분 때 태양이 떠오르는 위치와 정렬되도록 설계되었다.[44][45]

대부분의 크메르 사원과 달리 앙코르 와트는 동쪽이 아닌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는 수리야바르만 2세가 앙코르 와트를 자신의 장례용 사원으로 사용하려 했다는 모리스 글레이즈와 조르주 코데 등 학자들의 추측을 뒷받침한다.[46] 회랑에 새겨진 저부조들이 전통적인 힌두 양식과 반대인 반시계 방향(프라사비야)으로 배치된 것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브라만 장례식에서는 의식이 역순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44] 고고학자 찰스 하이엄은 중앙 탑에서 발견된 항아리가 유해를 담아 보관하는 장례용 항아리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다.[47]

그러나 앙코르 와트가 장례용 사원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앙코르 와트의 수호신 비슈누가 서쪽을 상징하는 신이기에, 비슈누를 기리기 위해 서쪽에 치우쳐 앙코르 와트를 지었다는 것이다.[8]

연구원 엘리너 매니카는 사원의 배치, 크기, 저부조의 내용을 바탕으로, 앙코르 와트가 수리야바르만 2세 치하의 새로운 평화 시대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태양과 달의 시간 주기를 앙코르 와트의 신성한 공간에 내장함으로써, 왕의 권력을 영속시키고 하늘의 신들을 달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이다.[48][49]

3. 2. 양식

앙코르 와트는 크메르 건축의 대표적인 사례로, '앙코르 와트 양식'이라고도 불린다. 12세기 앙코르의 건축가들은 라테라이트나 벽돌 대신 사암을 주로 사용하여 건물을 지었으며, 이 때문에 현재 보이는 대부분의 부분은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벽이나 잘 보이지 않는 부분에는 라테라이트가 사용되었다. 석재들을 고정하기 위해 사용된 접착 물질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천연 수지나 수산화 칼슘 재질의 점착제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앙코르 와트는 조화를 강조하여 지어졌다. 20세기 중반의 평론가 마우리스 글레이스는 '앙코르 와트는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재료들과 정확한 비율의 정제된 아름다움으로 인한 고전적인 완벽성을 띠고 있다. 앙코르 와트의 건축 양식은 힘의 건축, 통합적인 건축이다.'라고 평가했다.[52] 건축학적으로 앙코르 양식은 연꽃 봉우리처럼 생긴 끝이 뾰족한 탑, 통로를 넓히기 위해 지은 반회랑, 사원의 중심 축을 이루는 십자회랑 등을 주 특징으로 한다. 주된 장식 주제는 힌두교의 무희이자 여신들인 압사라, 부조, 힌두교 신들이나 영웅들이다. 앙코르 와트에 있는 조각상들은 동시대에 지어진 사원들에 비하여 훨씬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이는 조각들의 자세가 딱딱하고 표정이 절제되어 있으며 우아함이 덜하기 때문이다.[52]

측면에서 본 고푸람과 회랑


앙코르 와트는 크메르 건축의 고전 양식—앙코르 와트 양식—의 대표적인 예시이며, 이 건축물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건축학적 특징으로는 첨두형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연꽃봉오리 모양의 탑, 통로를 넓히기 위한 반회랑, 울타리를 연결하는 중심축 회랑, 그리고 사원의 중심축을 따라 나타나는 십자형 테라스가 있다. 전형적인 장식 요소는 데바타(또는 압사라), 저부조, 페디먼트, 넓게 펼쳐진 화환과 서사적 장면이다. 앙코르 와트의 조각상은 이전 작품보다 정적이고 우아함이 덜하여 보수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52] 탑의 금도금스투코, 저부조의 일부 인물에 금도금, 그리고 목재 천장 패널과 문 등 다른 설계 요소들은 약탈과 시간의 흐름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사원은 설계의 조화로 칭찬을 받았다. 모리스 글레이즈에 따르면, 이 사원은 "미세하게 균형 잡힌 요소들의 절제된 위엄과 정확한 비율 배치를 통해 고전적인 완벽에 도달한다. 그것은 힘, 통일성, 그리고 스타일의 작품이다."라고 하였다. 건축가 자크 뒤마르세는 앙코르 와트의 배치가 직각으로 만나 안뜰을 형성하는 회랑 시스템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앙코르 와트의 계획에 내재된 축 패턴은 동남아시아의 우주론과 주 사원을 나타내는 만다라가 결합된 것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6]

3. 3. 건물 구조

12세기 크메르 건축가들은 벽돌이나 라테라이트 대신 사암을 주 건축 자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앙코르 와트 대부분은 사암 블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라테라이트는 외벽과 보이지 않는 구조에 사용되었다. 블록 결합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천연 수지나 소석회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58] 앙코르 와트는 최대 1.5톤 무게의 사암 블록 500만~1000만 개로 만들어졌다.[59] 사암은 북동쪽 약 40km 떨어진 굴렌산에서 채취되어 운반되었다.

운반 경로는 톤레사프 호수를 거쳐 총 136km로 추정되었으나, 2011년 와세다 대학교 연구팀은 56km의 더 짧은 운하를 발견하여 크메르인들이 이 경로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61]

대부분의 표면, 기둥, 문틀, 지붕에는 인도 문학의 장면을 묘사한 부조가 조각되어 있다. 회랑 벽에는 약 1,000㎡의 부조가 장식되어 있으며, 앙코르 벽 일부의 구멍은 청동판으로 장식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사암 채석, 운반, 조각, 설치에는 수천 명의 노동력이 필요했을 것이며, 조각 기술은 7세기 유물에서 알 수 있듯이 수백 년 전에 개발되었다.[20][47]

앙코르 와트는 주로 사암라테라이트로 지어졌으며, 서쪽을 정문으로 한다. 경내는 동서 1500m, 남북 1300m, 너비 190m의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119] 회랑은 정교한 얕은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서쪽 참도는 540m에 이른다.[120] 사암 블록이 깔린 길이 239m, 너비 12m, 높이 4m의[121] 제방길로 해자를 건너 진행한다.[122] 조치대학 이시자와 요시아키 교수팀은 서쪽 참도 보존 복원 사업을 ODA로 채택받아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제1공구 보존 복원 공사를 완료했다.[123]

해자를 건너는 육교와 서쪽 대문


사암 육교는 우유 바다 휘젓기를 묘사한 뱀신 나가 난간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있었으나, 지금은 해자에 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제방길을 건너면 주벽과 서쪽 대문에 이른다. 주벽은 동서 1030m, 남북 840m로 라테라이트로 지어져 있다.[124]

전정 남쪽 경장


제1회랑 서쪽 면의 조각


서쪽 대문은 남북 230m 정도로, 삼탑을 이고 있으며, 중앙에 왕의 문과 좌우에 두 개의 문, 남북에 코끼리 문 두 개가 있다.[124] 왕의 문 좌우는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신 나가가 지키고 있다. 서쪽 대문을 나서면 참도를 따라 전정으로 나아간다. 전정에는 남북에 각각 경장과 성스러운 연못이 있으며, 북쪽에는 승방이 있다.

전정을 지나면 삼중 회랑으로 둘러싸인 5개의 사당이 솟아 있다. 제1회랑은 동서 200m, 남북 180m로, 많은 조각이 새겨져 있다.[125]

  • 서쪽 면 남쪽: 마하바라타의 장면, 판다바족과 카우라바족 군대 묘사.[126]
  • 서쪽 면 북쪽: 라마야나 설화, 라마 왕자와 원숭이가 랑카 섬에서 마왕 라바나와 싸우는 장면.[127]
  • 남쪽 면 서쪽("역사 회랑"): 수리야바르만 2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차.
  • 남쪽 면 동쪽("천국과 지옥"): 천국에 오른 사람들, 염마대왕과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 묘사.[128]
  • 동쪽 면 남쪽: 우유 바다 휘젓기 묘사, 신들과 아수라들이 큰 뱀 바수키를 끌어당겨 바다를 섞는 장면.[129]
  • 동쪽 면 북쪽과 북쪽 면: 16세기경 새겨진 것으로 추정, 비슈누 신의 화신 크리슈나가 괴물 바나와 싸우는 장면.[89]


제3회랑과 사당


제2회랑


제1회랑과 제2회랑 사이는 프리야 포안(천체불의 회랑)으로, 남북 경장이 있고 십자 회랑으로 연결된다. 프리야 포안에는 많은 불상이 봉납되었으나 크메르 루주에 의해 파괴되었다.[116] 십자 회랑은 네 개의 안뜰을 둘러싸고 있으며, 서쪽에는 모리모토 이치부사의 묵서가 있으나 판독이 어렵다.[130][131]

제3회랑의 여신


제2회랑은 동서 115m, 남북 100m로, 17단 돌계단을 올라 들어간다. 조각은 없고 몇 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제3회랑은 한 변이 60m로,[132] 제2회랑보다 13m 높고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간다. 네 귀퉁이와 중앙에는 수미산을 본뜬 사당이 있으며, 중앙 사당은 65m 높이이다. 중앙 사당에는 비슈누 신 대신 네 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133] 벽면에는 여신 조각이 새겨져 있다.

3. 3. 1. 외부

앙코르 와트는 거대한 산처럼 생긴 탑들과 이를 둘러싸는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서를 잇는 축을 기본으로 하여 지어졌다. 앙코르 와트는 신들이 사는 곳인 수미산을 상징하며, 중앙의 5개 탑은 수미산의 다섯 봉우리를, 사원을 둘러싼 벽과 해자는 수미산의 산맥과 바다를 상징한다. 평민들은 1층에만 출입할 수 있었고, 3층에는 최고위 승려와 왕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앙코르 와트는 다른 앙코르 사원들과 달리 서쪽에 치우쳐 있는데, 이는 수리야바르만 2세가 앙코르 와트를 자신의 장례용 사원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수호신 비슈누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앙코르 와트의 외벽은 가로 1024m, 세로 802m, 높이 4.5m이며, 해자에서 약 30m 떨어져 있다. 해자는 폭 190m, 둘레 5km이며, 동서로 1.5km, 남북으로 1.3km이다. 해자를 건너는 방법은 동쪽의 흙 제방과 서쪽의 돌 보도 두 가지가 있으며, 서쪽 석조 보도가 주 출입로이다.

각 방위에는 고푸람(Gopuram, 힌두 전통 양식의 탑)들이 있으며, 서쪽 고푸람이 가장 크다. 서쪽 정문에는 3개의 무너진 고푸람이 있고, 탑 아래에는 팔이 여럿 달린 비슈누 상이 있다. 탑들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푸람 양쪽의 문은 '코끼리 문'이라고도 불린다. 기둥 사이 천장은 연꽃으로, 벽면에는 춤추는 압사라들이 조각되어 있다. 특히 이 문에는 앙코르 와트 전체에서 유일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압사라 상이 있다.

앙코르 와트의 도서관


외벽은 820000km2의 면적을 둘러싸고 있으며, 중앙 사원 북쪽에 왕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350m 길이의 석조 보도가 서쪽 고푸람에서 중앙 사원을 이으며, 보도 양쪽에는 도서관과 인공 연못이 있다. 앙코르 와트 중앙 사원 앞에는 '명예의 테라스(Terrace of Honor)'가 있다.

''타 리치'', 원래는 여덟 개의 팔을 가진 비슈누


사원 단지는 1024m × 802m, 높이 4.5m의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벽은 30m 너비의 빈 공간과 190m 너비, 둘레 5km가 넘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53] 해자는 동서로 1.5km, 남북으로 1.3km에 걸쳐 있다.[54] 사원으로의 접근은 동쪽의 흙 제방과 서쪽의 사암 도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서쪽 도로가 주요 입구이며,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아마도 나무 다리를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

남쪽 탑 아래에는 ''타 리치''로 알려진 조각상이 있는데, 원래는 여덟 개의 팔을 가진 비슈누(Vishnu)상으로 사원 중앙 사당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탑 사이에는 회랑이 있으며, 고푸라 양쪽에 "코끼리 문"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두 개의 입구가 있다. 이 문들은 코끼리가 통과할 만큼 크다. 이 회랑들은 바깥쪽(서쪽)에 네모난 기둥이 있고 안쪽(동쪽)에는 막힌 벽이 있다. 기둥 사이의 천장은 연꽃 로제트로 장식되어 있다. 벽의 서쪽 면은 춤추는 인물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동쪽 면은 난간이 있는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춤추는 인물, 동물, 그리고 데바타로 장식되어 있다.

외벽은 203에이커의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데, 이곳에는 사원 자체 외에도 원래 도시 사람들과 사원 북쪽에 있는 왕궁이 있었다. 앙코르의 다른 세속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돌이 아닌 부패하기 쉬운 재료로 지어졌기 때문에, 일부 거리의 윤곽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으며, 대부분의 지역은 현재 식물로 덮여 있다. 350m 길이의 도로가 서쪽 고푸라를 사원 자체와 연결하며, 나가 모양의 난간과 양쪽에 바깥으로 이어지는 여섯 벌의 계단이 있다. 각 면에는 입구에서 세 번째 계단 앞에 각 주요 방향에 입구가 있는 도서관과 도서관과 사원 자체 사이에 연못이 있다. 연못은 나중에 추가된 것이며, 중앙 구조물에 이어지는 사자들이 지키는 십자형 테라스도 마찬가지이다.

주로 사암라테라이트로 지어졌으며, 서쪽을 정문으로 한다. 사원은 인근의 제철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경내는 외주, 동서 1500m, 남북 1300m, 너비 190m의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119] 신성한 장소를 장식하기 위해 회랑은 정교한 얕은 부조로 가득 차 있다.

서쪽에서의 참도는 540m에 이른다.[120] 사암 블록이 깔린 길이 239m, 너비 12m, 높이 4m의[121] 제방길로 해자를 건너 진행한다.[122]

조치대학 이시자와 요시아키(石澤良昭) 교수팀은 서쪽 참도의 보존 복원 사업을 ODA로 채택하게 되어, 제1공구의 보존 복원 공사(1996-2007년)를 완성했다. 1996년 현지에 해외 교사의 아시아 인재 양성 연구 센터를 설치하여 유적 보존 인재 양성을 하고 있다.[123]

이 사암이 깔린 육교는 옛날 우유 바다 휘젓기의 모습을 그린 뱀신 나가의 난간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해자에 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중간에는 돌계단의 선착장이 있다. 제방길을 건너면 주벽과 서쪽 대문에 이른다. 주벽은 동서 1030m, 남북 840m로 라테라이트로 지어져 있다.[124]

서쪽 대문은 남북 230m 정도로, 삼탑을 이고 있으며, 중앙에 왕의 문과 좌우에 두 개의 문이 열린다. 또한 남북에는 계단이 없고, 코끼리가 통과할 수 있는 코끼리 문을 두 개 갖추고 있다.[124] 왕의 문 좌우는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신 나가가 지키고 있으며, 인근 해자는 돌계단의 선착장을 갖추고, 라테라이트 벽으로 보호되고 있다.

서쪽 대문을 나서면, 큰 뱀의 난간으로 테두리를 두른 참도를 따라 전정으로 나아간다.

전정에는 남북에 각각 경장과 성스러운 연못이 있으며, 참도에서 벗어나면 성스러운 연못은 그 수면에 당우를 비춘다. 또 북쪽에는, 지금도 여기서 부처에게 기도를 드리는 승려들을 위해, 승방이 최근에 지어졌다.

3. 3. 2. 중앙 사원

앙코르 와트는 거대한 산처럼 생긴 탑들과 이를 둘러싼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서를 잇는 축을 기본으로 지어졌으며, 테라스에서 보았을 때 특정 탑들이 춘분, 하지, 추분, 동지 때 태양이 뜨는 위치를 가리킨다. 특히 중앙 탑은 춘분 때 태양이 떠오르는 위치와 정렬되도록 설계되었다. 앙코르 와트는 신들이 사는 곳인 수미산(메루산)을 상징하며, 중앙의 5개 탑은 메루산의 다섯 봉우리를 상징한다. 사원을 둘러싼 벽과 해자는 메루산의 산맥들과 깊은 바다를 상징한다. 평민들은 1층에만 출입할 수 있었고, 가장 높은 3층에는 최고위 승려들과 왕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앙코르 와트 외벽은 가로 1,024m, 세로 802m, 높이 4.5m이다. 외벽은 해자에서 약 30m 떨어져 있다. 해자는 폭 190m, 둘레 5km이다. 해자를 건너는 방법은 동쪽의 흙 제방과 서쪽의 돌 보도 두 가지가 있다. 서쪽 석조 보도가 주 출입로이며, 목재 다리를 대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 정방위에는 고푸람(힌두 전통 양식의 탑)이 있으며, 서쪽 고푸람이 가장 크다. 서쪽 정문에는 3개의 무너진 고푸람이 있고, 탑 아래에는 팔이 여럿 달린 비슈누 상이 있다. 이 상은 앙코르 와트가 힌두교 사원이었을 때 중앙 탑 아래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불교 사찰로 변모하면서 옮겨졌다. 탑들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푸람 양쪽 문은 '코끼리 문'이라고 불린다. 회랑은 바깥쪽(서쪽)으로는 사각 기둥, 안쪽(동쪽)으로는 닫힌 벽이 있다. 기둥 사이 천장은 연꽃 장식, 벽면에는 춤추는 압사라가 조각되어 있다. 특히 이 문에는 앙코르 와트 전체에서 유일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압사라 상이 있다.

외벽은 820,000 제곱 킬로미터 면적을 둘러싸고 있다. 이는 현재 앙코르 와트 중앙 사원 면적보다 넓으며, 외벽 내부에는 도시에 가까운 많은 건축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 사원 북쪽에 왕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나무로 지어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현재는 거리 잔해와 터만 있으며, 대부분 숲으로 덮여 있다. 350m 석조 보도가 서쪽 고푸람에서 중앙 사원을 이으며, 나가 난간과 계단이 있다. 보도 양쪽에는 도서관이 하나씩 있으며, 동서남북 입구와 대칭 인공 연못이 있다. 연못은 가로 50m, 세로 65m 직사각형이며, 왼편 우물은 항상 물이 차 있으나 오른편 우물은 마른 편이다. 도서관은 제사용 용기 보관용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앙코르 와트 중앙 사원 앞 십자형 테라스는 '명예의 테라스'라고 불리며, 나가 난간과 사자 조각상이 있다.

중앙 사원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3층 구조이며, 갈수록 높아져 맨 마지막 3층에 중앙 탑이 있다. 학자들은 이 층들이 왕, 브라흐마, 달, 비슈누에게 봉헌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회랑은 사면 정중앙에 고푸람이 1개씩 있으며, 2층과 3층은 모서리에도 고푸람이 있다. 사원이 서쪽을 바라보기에 건축물은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 왕이 들어올 때 잘 보이는 서쪽에 정교한 부조가 많다. 왕의 편의를 위해 서쪽 계단이 다른 방향보다 낮다.

1층 회랑은 가로 215m, 세로 187m이다. 2층과 3층 회랑과 달리 모서리에 고푸람 대신 작은 파빌리온이 있다. 회랑은 사원 외부와 뚫려 있으며, 사각 기둥이 받치고 있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것은 서쪽 십자 회랑('천 명의 신들의 홀')이다. 순례자들이 부처상을 새기거나 남겼으나, 현재는 몇 개만 남았다. 홀에는 순례객 선행 글이 많으며, 대부분 크메르어지만 일부 버마어, 일본어도 있다. 십자 회랑 사이 공간에는 물이 차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남북쪽 회랑은 도서관이다. 앙코르 와트에는 '중간단'이라는 구조가 있어 1층과 2층을 완만하게 연결한다. 2층 회랑은 가로 115m, 세로 100m이며, 메루산을 둘러싼 바다를 상징한다. 회랑에는 압사라들이 짝을 이루어 춤추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사면에 3단 계단이 있어 3층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경사가 가파르다. 이는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어려움을 표현한 것이다.

3층 회랑은 2층에서 높이가 약 40m로 경사가 가파르다. 정사각형 단에는 모서리에 2개씩, 중앙에 1개씩 총 12개 계단이 있다. 각 계단은 단이 40여 개, 경사 70도, 폭은 보통 계단의 절반이다. 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고개를 숙이게 되며, 크메르인들이 의도한 효과이다. 3층 기단 둘레는 60m이고, 모서리 계단 부분에 고푸람 1개씩, 정중앙에 가장 큰 고푸람 1개가 있어 총 5개 고푸람이 있다. 2열 기둥 장식 지붕 회랑이 외벽 역할을 하며, 십자형 통로와 연결되어 중앙 성소로 이어진다. 중앙 고푸람 높이는 지면에서 65m이며, 솟구치는 장식 때문에 더 높아 보인다. 본디 성소에는 비슈누 상이 있었으나, 불교 전래 후 부처상이 들어섰다. 1934년 고고학자 조지 투르베가 중앙 성소 아래 비밀 구덩이를 발견했으나, 도굴된 상태였다. 도굴꾼들이 챙기지 못한 황금 잎사귀 유물을 발굴했다.

앙코르 와트의 부조 장식


신들과 악마의 전투


사원은 담으로 둘러싸인 구역 내 높이 솟은 테라스 위에 있다. 중앙 탑으로 이어지는 세 개의 직사각형 갤러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층이 이전 층보다 높다. 두 개의 안쪽 갤러리는 방위의 모서리에 네 개의 큰 탑, 더 높은 다섯 번째 탑을 둘러싸고 있다. 이 패턴은 퀸컨스라고 불리며, 메루산을 나타낸다. 사원이 서쪽을 향하기에 특징은 동쪽으로 후퇴, 서쪽 각 구역과 갤러리에 더 많은 공간을 채운다. 같은 이유로 서쪽 계단은 다른 쪽보다 완만하다.

만니카는 갤러리가 왕, 브라흐마, , 비슈누에게 헌정되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9] 각 갤러리는 고푸라를 가지며, 바깥쪽 갤러리는 187m × 215m이며, 모서리에 정자가 있다. 갤러리는 사원 바깥쪽으로 열려 있으며, 기둥 있는 반 갤러리가 구조물을 확장, 지지한다. 서쪽 두 번째 담장에 바깥쪽 갤러리를 연결하는 것은 "프레아 포안"(천불 갤러리)이라고 불리는 십자형 회랑이다.[5] 순례자들이 붓다 이미지를 회랑에 남겼지만, 현재는 대부분 제거되었다. 이 지역에는 순례자 선행 관련 비문이 많으며, 크메르어버마어, 일본어도 있다. 회랑에 의해 표시된 네 개의 작은 안마당은 원래 물로 채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회랑 북쪽과 남쪽에는 도서관이 있다.

앙코르와트 외곽 갤러리 전경


두 번째와 안쪽 갤러리는 십자형 테라스를 통해 두 개의 측면 도서관과 연결된다(후대 추가). 2층 이상부터 벽에 데바타 이미지가 한 개 또는 최대 네 개의 그룹으로 나타난다. 2층 울타리는 100m × 115m이며, 원래 메루산 주변 바다를 나타내기 위해 범람했을 가능성이 있다. 각 면에 세 개의 계단이 있어 모서리 탑과 안쪽 갤러리 고푸라로 이어진다. 가파른 계단은 신들의 왕국으로 오르는 어려움을 나타낸다. "바칸"이라고 불리는 안쪽 갤러리는 60m 정사각형이며, 각 고푸라를 중앙 사원과 모서리 탑 아래 부속 사원과 연결하는 축선 갤러리가 있다.

갤러리 지붕은 뱀 몸체와 사자 또는 가루다 머리 모티프로 장식. 조각된 인방과 페디먼트가 갤러리와 사원 입구를 장식. 중앙 사원 위 탑은 지상에서 43m 높이로 65m까지 상승한다. 이전 사원 산과 달리 중앙탑은 주변 네 개 탑보다 높다. 원래 비슈누 조각상이 있고 각 면이 열려 있던 사원은 상좌부 불교로 개종 시 벽으로 둘러싸였고, 새 벽에는 서 있는 붓다상이 있다. 1934년, 보존가 조지 트루베는 중앙 사원 아래 구덩이를 발굴, 모래와 물로 가득 차 있었고 보물은 도난당했지만, 지하 2미터 위 금박 신성한 기초물을 발견했다.

3. 3. 3. 장식

앙코르 와트는 조화로움을 강조하여 지어졌으며, 20세기 중반의 평론가 마우리스 글레이스는 '앙코르 와트는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재료들과 정확한 비율의 정제된 아름다움으로 인한 고전적인 완벽성을 띠고 있다. 앙코르 와트의 건축 양식은 힘의 건축, 통합적인 건축이다.'라고 평가했다. 건축학적으로 앙코르 양식은 연꽃 봉우리처럼 생긴 끝이 뾰족한 탑, 통로를 넓히기 위해 지은 반-회랑, 사원의 중심 축을 이루는 십자 회랑 등을 주 특징으로 한다. 주된 장식 주제는 힌두교의 무희이자 여신들인 압사라, 부조, 힌두교 신들이나 영웅들이다. 앙코르 와트에 있는 조각상들은 동시대에 지어진 사원들에 비하여 훨씬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이는 다른 사원들에 비해 조각들의 자세가 훨씬 딱딱하고 표정도 절제되어 있으며 우아미가 덜하기 때문이다.

앙코르 와트는 거대한 규모뿐만 아니라 빽빽하게 들어찬 아름다운 장식물로도 유명하다. 대부분의 장식들은 부조의 형태이며, 압사라나 힌두 신화의 이야기들, 혹은 왕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들을 주제로 삼고 있다. 1층 회랑의 내벽에는 힌두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라마야나의 일화들을 새겨놓았다.

  • 서쪽 회랑: 랑카의 전투(라마가 악마 라바나를 꺾은 전투), 쿠루크셰트라 전쟁(카우라바와 판두바 가문이 격돌한 전쟁) 등이 묘사되어 있다.[55]
  • 남쪽 회랑: 수리야바르만 2세의 개선식, 힌두교 세계관에 등장하는 32개의 지옥과 37개의 천국들이 묘사되어 있다.
  • 동쪽 회랑: 가장 유명한 부조 중 하나인 '우유 바다 휘젓기'가 그려져 있다. 92명의 아수라들과 88명의 신들이 비슈누의 지휘 아래 거대한 뱀 '바수키'의 머리와 꼬리를 잡고 우유 바다를 휘젓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 1층 회랑 서쪽 면 남쪽: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장면이 있으며, 판다바족과 카우라바족 군대가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126]
  • 1층 회랑 서쪽 면 북쪽: 라마야나의 설화가 있으며, 라마 왕자와 원숭이가 랑카 섬에서 마왕 라바나와 싸우는 장면이 크게 묘사되어 있다.[127]
  • 1층 회랑 남쪽 면 서쪽("역사 회랑"): 수리야바르만 2세와 그를 따르는 왕사, 대신, 장군, 병사 등이 행차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 1층 회랑 남쪽 면 동쪽("천국과 지옥"): 천국에 오른 사람들, 염마대왕과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128]
  • 1층 회랑 동쪽 면 남쪽: 신들과 아수라들이 큰 뱀 바수키를 끌어당겨 만다라 산을 돌리고, 바다를 섞는 우유 바다 휘젓기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129]
  • 1층 회랑 동쪽 면 북쪽과 북쪽 면: 16세기경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며, 비슈누 신의 화신 크리슈나가 괴물 바나와 싸우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89]


앙코르 와트 곳곳에는 압사라와 데바타들의 장식들로 가득 차 있는데, 현재 조사 결과 대략 1,796명의 압사라들이 조각되어 있다고 전한다. 앙코르 와트의 설계자들은 30cm 크기의 작은 압사라 조각들을 천장, 벽, 기둥 등 곳곳에 붙여놓았고, 또한 95cm 정도의 크기의 데바타 상들을 사원 곳곳에 배치했다.

4.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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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현대 문화와 앙코르 와트

앙코르 와트가 그려진 캄보디아 국기


앙코르 와트는 전 세계적인 관심과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면서 캄보디아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1863년 최초의 버전이 도입된 이후로 앙코르 와트의 그림은 캄보디아 국기의 일부였다.[63]

그러나 역사적, 초국가적인 관점에서 앙코르 와트는 스스로 국민적 자부심의 상징이 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 식민 유산의 일부였다. 프랑스령 캄보디아(French protectorate of Cambodia)의 파빌리온이 프랑스 인도차이나(French Indochina)의 일부로 1889년부터 1937년까지 프랑스 식민지 및 세계 박람회(Paris Colonial Exposition)에서 파리(Paris)와 마르세이유(Marseille)에서 실물 크기의 앙코르 와트 복제품을 선보이면서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64][65] 이는 루이 델라포르트(Louis Delaporte)의 ''Musée Indo-chinois''라는 석고 주조 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이 박물관은 1880년경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파리의 트로카데로 궁전(Musée d'Ethnographie du Trocadéro)에 있었다.[66]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앞의 불교 승려들


1990년대 이후 앙코르 와트는 주요 관광지가 되었다. 1993년에는 7,650명의 방문객만 있었지만, 2004년에는 정부 통계에 따르면 시엠레아프 주에 56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방문했는데, 이는 캄보디아 전체 외국인 관광객의 약 50%에 해당한다.[71][72] 방문객 수는 2007년에 100만 명을 넘어섰고, 2012년에는 200만 명을 넘어섰다.[73][74] 앙코르 와트는 2013년에 200만 명이 넘는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했고, 2018년에는 260만 명에 달했다.[75][76]

이 유적지는 1990년부터 2016년까지 캄보디아 정부로부터 임대하여 소키멕스 그룹이 관리했다.[77] 관광객의 유입으로 인해 벽면에 낙서가 생기는 등의 피해가 발생했다. 부조와 바닥을 보호하기 위해 각각 로프와 나무 계단이 설치되었다. 관광은 유지 보수를 위한 추가 자금도 제공했는데, 2000년 기준으로 전체 앙코르 유적지 티켓 수입의 약 28%가 사원 유지에 사용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업은 캄보디아 당국이 아니라 외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팀에 의해 수행되었다.[78]

앙코르 와트의 관광객 수가 수년간 크게 증가함에 따라 유네스코와 앙코르 역사 유적지 보호 및 개발을 위한 국제 조정 위원회(ICC)는 왕실 정부 및 APSARA 대표와 함께 세미나를 개최하여 "문화 관광" 개념을 논의하고, 고품질의 숙박 시설과 서비스를 관광객에게 제공하고 캄보디아 정부가 경제적으로 이익을 얻는 동시에 풍부한 캄보디아 문화를 통합하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2001년, 이러한 유인책으로 전통 크메르 건축 양식을 기반으로 레저 및 관광 시설을 갖추고 다수의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는 고급 호텔을 제공하는 "앙코르 관광 도시" 개념이 만들어졌다.[79]

외부 연못에 비친 앙코르 와트


이러한 대규모 관광 숙박 시설 개발 전망은 APSARA와 ICC 모두에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이전의 관광 개발이 건설 규정을 무시했고, 이러한 프로젝트가 더 많아지면 경관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프로젝트의 대규모로 인해 인근 도시의 상하수도 및 전력 시스템의 질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관광 빈도가 높고 인프라 수요가 증가하면 지하수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앙코르 와트 사원의 구조적 안정성에 부담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79] 시엠레아프 지역 주민들은 또한 관광을 위해 도시의 분위기가 손상되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이러한 지역 분위기는 앙코르 관광 도시와 같은 프로젝트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에, 지역 당국은 지역의 가치와 문화를 희생하지 않고 미래의 관광을 성공적으로 통합하는 방법을 계속 논의하고 있다.[79] 아세안(ASEAN) 관광 포럼 2012에서는 보로부두르와 앙코르 와트가 자매 유적지가 되고, 각 지역이 자매 지역이 되는 데 합의했다.[80]

2020년,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여행 제한이 도입되어 캄보디아 관광 부문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결과적으로 앙코르 와트 방문객 수가 급감하여 평소 붐비던 유적지가 거의 황폐해졌다.[81][82][83] 앙코르 와트를 포함한 캄보디아는 2021년 말에 국제 관광객에게 재개방되었지만, 2022년 말 현재 팬데믹 이전의 몇 분의 일 수준에 불과했다. 2022년에는 총 28만 명의 관광객이 이 유적지를 방문했는데, 이는 2018년 260만 명과 비교된다.[84] 2023년에는 전년 대비 관광객 수가 증가하여 7월 말까지 4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방문했다.[85] 2011년 게임 시리즈 ''템플 런''을 재연한 관광객들이 2024년 중반 소셜 미디어에 올린 영상은 앙코르 와트의 구조물과 조각에 손상을 입힐 위험이 있고 문화적으로 무감각하다는 우려를 제기한 보존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다.[86]

앙코르 와트는 현대 캄보디아의 문화적 상징으로, 1863년 프랑스 보호령이 된 이후, 1992년부터 1993년까지의 UNTAC 통치 기간을 제외한 모든 캄보디아 국기에 앙코르 와트가 그려져 있다.[142] 또한, 앙코르 와트는 캄보디아의 민족주의와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2003년에는 캄보디아에서 "태국 여배우가 TV 프로그램에서 '앙코르 와트는 태국의 것이다'라고 발언했다"는 소문(실제로는 그러한 발언은 없었다)을 계기로 반태국 감정이 격화되어 태국 대사관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143]

캄보디아 내전 이전인 1960년에는 드라마 쾌걸 할리마오가 일본 TV 사상 최초로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으며,[144] 귀중한 영상 기록으로 남아 있다. 캄보디아 내전 중이던 1973년, 크메르 루주 점령하의 앙코르 촬영을 시도하다 희생된 전쟁 사진기자이자 언론인 이노세 타이조[145]의 서간집이 "지뢰를 밟으면 안녕"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1999년에는 영화화되었다.[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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