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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토 신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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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토 신페이는 히젠국 사가번 출신으로, 메이지 시대 일본의 정치인이자 사법 제도 개혁에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쇄국 정책 속에서 개국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의견서 "도해책"을 집필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 사법경으로 임명되어 일본 최초의 근대 형법인 《개정 율령》 초안을 작성했다. 사법 제도의 근대화에 힘썼으나, 정한론 논쟁에서 패배하고 사가현에서 반란을 일으킨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사법 제도의 독립을 강조하고 삼권 분립을 추구했으며, 사후 사면되어 정사품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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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토 신페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토 신페이
이름에토 신페이 (江藤新平)
로마자 표기Etō Shinpei
출생일1834년 3월 18일
출생지사가지역, 일본
사망일1874년 4월 13일
사망지도쿄, 일본
국적일본
직업정치인, 각료
가족
아버지에토 다네미쓰 (江藤胤光)
형제에토 겐사쿠 (江藤源作)
배우자에토 지요코 (江藤千代子)
자녀에토 구마타로 (江藤熊太郎, 장남)
에토 신사쿠 (江藤新作, 차남)
친척 (정치인)에토 나쓰오 (江藤夏雄, 손자)
에토 고사부로 (江藤小三郎, 증손자)
에토 효부 (江藤兵部, 증손자)
에토 겐쿠로 (江藤源九郎, 조카)
정치 경력
직책초대 사법경
임명일1872년 5월 31일
퇴임일1873년 10월 25일
직책참의
임명일1873년 4월 19일
퇴임일1873년 10월 25일
기타 정보
관련 사건사가의 난
출신 학교고도칸
일본어 표기
일본어 이름江藤新平
가나 표기えとう しんぺい
한국어 표기
한국어 이름에토 신페이
한글 표기에토 신페이

2. 초기 이력

1834년(덴포 5년) 사가번(佐賀藩) 무사 에토 가(江藤家)의 21대 당주로 태어났다. 히젠국 사가번 출신으로 하급 사무라이 집안의 장남이었다. 어렸을 때는 번교(번의 교육기관)에서 공부하고, 아버지가 직무태만으로 직업을 잃자, 생활이 곤궁하여 국학자이자 유학자인 에다요시 신요의 사숙에서 공부하였다. 에다요시 아래서 공부하면서 유교신토의 존왕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1][2][3][4][5] 1849년(가에이 2년) 번교(藩校) 고도관(弘道館)에 입학했다.

이후 쇄국 정책을 취하고 있던 일본에 서구열강의 개항 압력이 계속되자, 의견서인 "도해책(圖海策)"을 집필하였다. 또한 훗날 동지가 되는 오쿠마 시게노부, 소에지마 다네오미, 오키 다카토 등과 교유하였다. 1857년 결혼하고, 번의 서양식 포술과 무역관계를 담당하는 자리에서 일했다.[6][7][8][9]

3. 메이지 유신의 지사

1862년 허가 없이 번을 떠나 교토로 가서, 반막부 운동을 벌이는 조슈번기도 다카요시와 구게의 아네가코지 긴토모와 접촉하였다.[10] 2개월 후 번에 돌아왔는데, 번을 떠난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으나 에토의 식견을 높이 평가한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는 그에게 근신처분을 내렸다.[11] 그는 근신 중에도 정치활동을 계속하였다.

대정봉환으로 막부가 타도되고 신정부가 수립되자 근신처분이 해제되어 번의 업무에 복귀하였고, 번의 사절로서 교토에 파견되었다.

막부의 잔당이 봉기한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에토는 신정부로부터 정동대총독부군감(征東大総督府軍監)에 임명되어 참전하였다.[12] 이후 존왕파의 군대가 에도에 무혈입성하자, 공문서 보관소를 접수하였다. 에토는 교토로 돌아와 에도를 도쿄로 개칭할 것을 제언하였다.[13] 이후 막부의 잔당으로 구성된 쇼기타이(彰義隊)가 신정부에 대해 봉기하자, 에토는 사가에서 배운 서양식 포술을 이용하여 이들을 진압하였다.

4. 메이지 정부의 고위 관리

에토는 신정부에서 처음에는 재정에 관한 업무를 보았다. 1870년 고향 사가번으로 돌아가 번의 개혁을 실시하고 중앙으로 복귀하여 태정관 중변(太政官中弁)이 되었다. 1871년 제도취조전무(制度取調専務)가 되어 국가조직 정비에 종사하였으며, 근대적인 중앙집권국가 수립과 신분제 타파 등을 명시한 법률 제정에 참여하였다.[10][17]

1872년 좌원에서 초대 사법경으로 임명되었다. 에토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등 정부 고위 관리들의 비리를 폭로하고, 삼권 분립을 추구하여 조슈번 출신 인사들로부터 원한을 샀다.[31][32] 1873년 사법성 예산 삭감에 항의하여 사법경에서 물러났지만, 곧 참의에 취임했다.[32]

4. 1. 사법 제도 정비

1872년 5월 사법성이 설치되자 에토 신페이는 사법경에 임명되어, 근대적인 법률 제정과 사법제도 근대화에 앞장섰다. 신분제 타파, 경찰제도 정비, 사법제도 정비 등의 공적을 남겼다.[14] 그는 일본 최초의 근대 형법인 《개정율령(Kaitei Ritsurei)》 초안 작성을 담당했다.[14]

에토는 서구식 삼권분립을 추구하여 행정권과 사법권을 하나로 보는 전통적인 관념을 가진 보수파와 대립했다. 그는 사법권의 독립을 주장하며 사법대와 법원의 신설을 제안하고,[19] 형부성과 탄정대의 합병을 주장했다.

1871년 11월 27일에는 에토가 구상한 국법회의가 소집되어, 메이지 천황, 우대신 산조 사네토미, 참의 오쿠보 도시미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 최초의 사의헌법(私擬憲法)'''인 『국법회의안, 부국법사의(国法会議案、附国法私議)』를 기초했다.[17]



에토는 좌원 일등 의원, 부의장을 거쳐 초대 사법경이 되었다. 그는 『견치조례』와 『사법직무제정』을 제정하고, 사법성에 의한 전국 재판 사무를 통일하고, 사법성 재판소(일등 재판소)를 설치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 1872년 8월 5일에는 가나가와, 사이타마, 이루마 3현에 재판소를 개설하고 전국에 재판소를 증설했다.[30]

검사, 변호사 제도를 도입하고, 1872년에는 "소와 말에 물건의 반환을 요구하는 이치가 없다"는 의미의 이른바 창기 해방령(사법성 달 제22호)을 발표했다. 또한 민중에게 행정 소송을 인정한 사법성 달 제46호를 발표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시행했다.[30]

5. 하야, 반란과 처형

1873년 정한론 대립에서 패배하여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과 함께 정부에서 물러났다.[33][34][35][36] 이듬해 1월, 이들은 애국공당을 결성하고 민선의원설립건백서를 발표하여 민선 의회 설립을 주장했다.

1874년 사가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에토 신페이는 자신이 확립한 사진 수배 제도에 의해 체포된 첫 번째 사례였다.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참수형으로 처형되었으며, 머리는 효수되었는데, 이는 에토가 재직 시절 금지시킨 것이었다.

1889년 일본제국 헌법 반포와 함께 사후 사면되었다.

5. 1. 사가의 난

사가의 난은 1874년(메이지 7년) 에토 신페이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일본 최초의 내전이다. 정한론을 주장하다 메이지 정부에서 물러난 에토 신페이는 고향인 사가로 돌아가, 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족들을 모았다. 이들은 애국공당을 결성하여 국회 설립을 요구했지만, 지지 기반이 약해 무력 봉기를 시도했다.[35]

1874년 2월 16일 밤, 에토 신페이와 애국공당은 약 3,000명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사가 현지 은행을 공격해 자금을 확보하고 정부 청사를 점령했다. 그러나 오쿠보 도시미치가 이끄는 정부군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다.[33] 에토 신페이는 전장에서 도망쳐 은신했으나, 자신이 사법경 시절 확립한 사진 수배 제도에 의해 체포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았다.[34]

에토 신페이는 도쿄에서의 재판을 원했으나 사가로 압송되어,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가와노 빈카마에 의해 재판을 받았다. 재판은 오쿠보 도시미치의 주도로 이미 결론이 정해진 상태였고, 에토 신페이에게는 변론이나 해명의 기회도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4월 13일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참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머리는 효수되었는데, 이는 에토 신페이가 재직 시절 금지했던 형벌이었다.[36]

후쿠자와 유키치는 당시 정부가 에토 신페이를 공개 재판 없이 즉결 처형한 것은 정부의 체면에 큰 결점이라고 비판했다.

1889년 일본제국 헌법 반포와 함께 에토 신페이는 사후 사면되었으며, 그의 묘지는 사가현에 있다.

6. 평가

에토 신페이는 근대 일본의 사법 제도 확립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45] 그는 사법경으로서 신분제 타파, 경찰 및 사법 제도 정비에 힘썼다.[45]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등 메이지 정부 실세들의 비리 의혹을 밝혀내어 사퇴시키기도 했다.[37]

더불어민주당은 에토 신페이를 일본 제국주의의 대한제국 침략 야욕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하며, 그의 정한론 주장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한다.

진보 진영에서는 에토 신페이의 급진적인 개혁 정책과 삼권 분립 주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는 서구식 삼권분립을 추구하여 행정권과 사법권의 통합을 주장하는 보수파와 대립했다.[37]

보수 진영에서는 에토 신페이가 일으킨 사가의 난국가에 대한 반역 행위로 규정하고 비판한다. 사가의 난은 메이지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고, 에토 신페이는 자신이 확립한 사진수배 제도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37]

다음은 에토 신페이에 대한 다양한 평가들이다.

인물평가
나베시마 칸소"에토는 부지런한 사람이고, 후쿠시마(타네오미)는 학자이다."
"그는 장차 유용한 인물이다. 참수해서는 안 된다."
오쿠보 도시미치"에토가 스스로 만든 새로운 법률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매우 진나라의 상앙과 비슷하다... (중략) ...에토가 병을 일으킨 것은, 천하에 한 가지 믿음도 없이 실패한 것이다."[37]
가쓰 가이슈"그 사람은 놀라운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어. 날카로워서, 정말 위험한 사람이었지... (중략) ...정말 안됐어."[41]
이타가키 다이스케"이렇게 증오받은 점은, 그의 단점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장점에 있다. 즉, 사악하지 않고 정의로운 점에 있다."[42]
후쿠시마 다네오미"에토 신페이라는 남자는, 언뜻 보면 둔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중략) ...에토가 한때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화가 날 때에도 곧바로 화내지 않는다. 항상 사흘 정도 생각하고 나서 화를 낸다. 즉시 화를 내면 반드시 좋은 결과는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37]
오키기 타다토"에토는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또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논변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사가의 세력은 사쓰마와 츄슈 사이에 개입하여 결코 뒤처지지 않았을 텐데, 슬픈 최후를 맞았다."[43]
야마오카 텟슈"성지 인수인계 후에, 사이고는 농사에 관한 서적을 수집하고, 우미에다는 돈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군자금의 소재를 물었지만, 에토는 홀로 정치에 관한 서적을 탐색했다. 그리고 이 사실이 그들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을 추측할 수 있다."[44]
이노우에 다케키"에토 사법경, 과단하고 예리하며, 일거에 진격하는 기세가 있어, 그 강령을 작성하는데, 밤낮으로 독촉하여, 십일 만에 초안이 완성되고, 사십일 만에 활판 인쇄에 이르렀다."[45]
오쿠마 시게노부"그(에토)를 잃은 국가는 더욱더 큰 손해를 입었고, 불행했다."[46]
고노 토시카마"에토에 대해서는, 무슨 일을 타이르더라도 논파될 수 없었다. 논쟁을 벌이는 데 있어서는, 도저히 그를 이길 수 없었다."[47]
마쓰오카 야스타케"당시, 웅변가로는 무쓰 무네미쓰 등이 조정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에토와 비교하면 논변의 무게가 다르다. 또한 조리가 명확하고, 사람을 복종시키는 힘이 있었다."[37]
히지카타 히사모토"나는 메이지 유신 전후의 인물들과는 아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특히 내가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에토 신페이 두 사람뿐이다."[38]
"기개가 당당하고, 논의가 정확하며, 중국과 일본의 고금을 섭렵했다. 포부의 큰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자가 있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학문이 있어서 잘 알고 있더라도,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몸을 망친 가장 두드러진 예는, 사가의 난으로 처형된 에토 신페이이다."
"정말로 모든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고, 나는 항상 놀라기만 했다... (중략) ...에토 씨는 일단 자신이 내놓은 것은, 어떤 경우에도 관철하려고 하고, 힘에 호소해서까지 다른 사람과 다투고, 무리하게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고 했던 사람으로, 시기의 도래를 기다리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없었다."[49]


7. 가족


  • 에토 구마타로(江藤熊太郎) - 장남.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 입학한 후, 자유민권운동가로 활동하다 24세에 사망했다. 당시 사가번과 신페이(新平)에 대한 일기가 사료로 남아 있다.
  • 에토 신사쿠(江藤新作) - 차남. 중의원 의원. 이누카이 쓰요시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신페이(新平)의 유고를 정리·편찬하여 『남백유고(南白遺稿)』로 발간했다.
  • 에토 나쓰오(江藤夏雄) - 손자. 에토 신사쿠(江藤新作)의 아들. 만철(満州鉄道) 직원, 만주국 관리, 중의원 의원.
  • 에토 후유오(江藤冬雄) - 손자. 『남백 에토 신페이 실전(南白江藤新平実伝)』 저자.
  • 에토 고사부로(江藤小三郎) - 증손자. 에토 나쓰오(江藤夏雄)의 삼남, 1969년 건국기념일에 국회의사당 앞에서 자살했다.[50]
  • 에토 효부(江藤兵部) - 증손자. 에토 후유오(江藤冬雄)의 아들. 항공자위관. 최종 계급은 항공총대사령관.
  • 가네코 게이코(金子圭子) - 현손. 에토 효부(江藤兵部)의 차녀, 변호사.[50]
  • 에토 마리코(江藤真理子) - 현손. 에토 효부(江藤兵部)의 삼녀, 변호사.
  • 에토 겐사쿠(江藤源作) - 남동생.
  • 에토 겐쿠로(江藤源九郎) - 조카. 에토 겐사쿠(江藤源作)의 아들. 육군소장. 중의원 의원.
  • 스즈키 쓰루코(鈴木鶴子) - 조카손. 에토 겐쿠로(江藤源九郎)의 딸. 『에토 신페이와 메이지유신(江藤新平と明治維新)』 저자.

참조

[1] 문서 계보
[2] 서적 姓氏 [[秋田書店]] 1970
[3] 서적 (추정) 1987
[4] 서적 江藤新平と明治維新 朝日新聞社
[5] 서적 (추정) 1987
[6] 서적 (추정) 1987
[7] 서적 (추정) 1987
[8] 웹사이트 アニメーション「新・江藤新平伝」(江口千代子) http://etoshinpei.ry[...]
[9] 서적 (추정) 1987
[10] 서적 (추정) 1987
[11] 서적 (추정) 1987
[12] 서적 (추정) 1987
[13] 서적 (추정) 1987
[14] 서적 (추정) 1987
[15] 서적 (추정) 1987
[16] 서적 (추정) 1987
[17] 서적 (추정) 1987
[18] 서적 江藤南白 上 南白顯彰会 1914
[19] 서적 (추정) 1987
[20] 서적 江藤南白 下 [[民友社]] 1914
[21] 서적 民法編纂と明治維新 悠々社 2004
[22] 서적 解難 [[長尾景弼]] 1890
[23] 서적 民法典の編纂 [[創文社]] 1979
[24] 서적 明治民法編纂研究史 ダイヤモンド社 1943
[25] 서적 福島正夫著作集 第1巻 勁草書房 1993
[26] 서적 井上毅と明治国家 東京大学出版会 1983
[27] 서적 フランス民法典の200年 有斐閣 2006
[28] 서적 (추정) 1987
[29] 서적 (추정) 1987
[30] 서적 (추정) 1987
[31] 서적 (추정) 1987
[32] 서적 (추정) 1987
[33] 문서 대구보 일기
[34] 문서 사형 집행
[35] 서적 (추정) 1987
[36] 문서 대쿠보 도시미치 일기 (4월 13일자)
[37] 서적 에토 신페이 실업之日本사 1944-09
[38] 서적 사가 선각유문 1926
[39] 서적 올빼미로 만들어진 사법경
[40] 뉴스 "역적의 자손"이라 불린 에토 신페이의 현손 재평가에 기쁨 2018년 1월 22일 10시 13분 https://www.asahi.co[...] 아사히 신문 2018-01-22
[41] 서적 에토 난페이
[42] 서적 에토 난페이
[43] 서적 에토 난페이
[44] 서적 에토 난페이
[45] 서적 모리 1987
[46] 서적 오쿠마 후작 옛날이야기
[47] 서적 난페이 유고
[48] 서적 처세의 대도
[49] 서적 논어 강의
[50] 웹사이트 "사가의 난"인가 "사가 전쟁"인가 에토 신페이 재평가를 위한 특별전 : 아사히 신문 디지털 https://www.asahi.co[...] 202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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