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빈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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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빈 이씨는 조선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의 어머니이다. 1696년에 태어나 1701년 궁녀로 입궁하여 1726년 숙의에 책봉되었으며, 화평옹주를 낳은 후 귀인과 빈으로 승격하였다. 장헌세자 등 7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대부분 일찍 사망하였고, 아들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여 결국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1764년 사망했으며, 영조는 그녀의 묘지명을 직접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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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 이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영빈 이씨 |
한자 표기 | 暎嬪 李氏 |
로마자 표기 | Yeongbin Issi |
다른 표기 | 영빈 전의 이씨 (暎嬪 全義 李氏) 선희궁 (宣禧宮) |
신분 | |
품계 | 정1품 빈 |
봉호 | 영빈 |
재위 기간 | 1730년–1764년 |
배우자 | 영조 이금 |
자녀 | 화평옹주 화협옹주 사도세자 화완옹주 |
가문 | |
본관 | 전의 이씨 |
아버지 | 이유번 |
어머니 | 한양 김씨 |
생애 및 사망 | |
출생 | 1696년 8월 15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 | 1764년 8월 23일 |
사망 장소 | 조선 한성부 경희궁 양덕당 |
묘소 | 수경원, 고양시 서오릉 |
시호 | 소유(昭裕)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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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696년에 이유번(李楡蕃)의 딸로 태어났다. 1701년에 궁녀로 입궁하였다. 1726년 영조(英祖)의 총애를 받아 숙의(淑儀)로 책봉되었다.[1] 1727년 화평옹주(和平翁主)를 출산한 것을 계기로 귀인(貴人)으로, 그리고 측실의 최고 품계인 빈(嬪)으로 승격하였다.
1727년부터 1738년 사이에 장헌세자(莊獻世子) 등 7명의 자녀를 출산하였으나, 화완옹주(和緩翁主)를 제외한 6명은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특히 화평옹주는 남편의 총애를 크게 받았다. 1748년 화평옹주가 사망하자, 깊이 슬퍼하였다.
아들 장헌세자는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정신적으로 병들어 갔고, 더욱이 세자가 궁녀와 환관(宦官)을 살해하는 기이한 행위에 시달렸다. 1762년 노론(老論)이 세자를 비난하는 가운데, 그녀는 남편 영조에게 아들의 기행을 알리고, 아들을 처형하도록 상소(奏上)하였다.[2] 같은 해 아들은 뒤주에 갇혀 굶어 죽었다.
1764년 68세의 나이로 병으로 사망하였다. 아들의 죽음으로부터 2년 후의 일이었다.
2. 1. 탄생과 입궁
본관은 전의이며, 1696년(숙종 22년) 7월 18일, 이유번(李楡蕃)과 어머니 한양 김씨(김우종의 딸)의 딸로 태어났다.[3] 1701년(숙종 27년), 6세의 나이로 대궐에 들어와 궁녀가 되었다.[3]2. 2. 후궁 시절
1696년 (숙종 22년)에 태어나 1701년(숙종 27년) 6세의 나이로 궁녀가 되었다.[3] 1726년(영조 2년) 11월 16일, 31세의 늦은 나이에 영조의 승은을 입고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4]1727년(영조 3년) 4월, 화평옹주를 낳았다.[5] 1728년(영조 4년) 8월, 둘째 옹주를 낳고 그해 10월에 종1품 귀인(貴人)으로 진봉되었다.[5] 1729년(영조 5년) 12월, 셋째 옹주를 낳았다.
1730년(영조 6년), 효장세자의 3년상과 경종 비 선의왕후의 국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내명부 정1품 영빈(暎嬪)에 책봉되어 조정과 민간의 탄식을 자아냈다.[6]
1732년(영조 8년) 1월, 넷째 옹주를 낳았다.[7] 1733년(영조 9년), 다섯째 옹주인 화협옹주를 낳았다. 영조는 효장세자 사후 후사를 걱정하던 중, 영빈 이씨가 연이어 딸만 낳자 크게 근심하였다.[7] 화평옹주와 화협옹주 사이에 태어난 세 옹주는 모두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하였다.
1735년(영조 11년), 아들 사도세자(장조)를 낳았다.[8] 영조는 매우 기뻐하며 이듬해에 사도세자를 세자로 책봉하였다.[9] 그러나 사도세자는 정비 정성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생후 100일 만에 영빈과 떨어져 선의왕후 처소의 궁인들에게 양육되었다.
1738년(영조 14년), 여섯째 딸인 화완옹주를 낳았다. 영빈 이씨는 1남 6녀를 낳았는데, 화완옹주를 제외한 나머지 자녀들은 모두 영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2. 3. 임오화변과 사도세자의 죽음
1762년(영조 38년) 윤5월,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극에 달한 가운데,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발하였다.[10] 이때 영빈 이씨 또한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상세히 고하며, 세자의 잘못이 심각하여 모자의 정을 끊고서라도 고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백여 명 가까이 죽이고,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일을 했다고 증언했다.[10] 또한 기생, 비구니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이고, 궁궐 후원에 무덤을 만드는 등 불측한 일을 했다고 덧붙였다.결국 영조는 창덕궁에서 세자(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엄히 가두었다.[10]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세자는 뒤주에 갇혀 사망하였다(임오화변).[10] 영조는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였고,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춘방(세자궁)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10] 영조는 세손(정조)을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왕통을 잇게 하였다.[10]
혜경궁 홍씨의 기록에 따르면, 영빈 이씨는 아들의 죽음 이후 손자에게 지극한 애정을 쏟았고, 손자의 식사와 공부를 직접 챙겼다고 한다.
2. 4. 죽음
1764년(영조 40년) 7월 26일, 경희궁의 양덕당에서 사망하였다.[11]영조는 매우 슬퍼하며 직접 영빈의 묘지명을 지었는데, 국왕이 후궁의 지문을 지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12] 영조는 직접 글을 짓고 사위인 화평옹주의 남편인 금성위 박명원이 글씨를 쓴 영빈 이씨의 청화백자 묘지명을 만들었다. 또한 영조는 사도세자와 영빈의 일을 기록한 《표의록(表義錄)》을 직접 작성하였다.
영조는 《어제영빈이씨묘지(御製暎嬪李氏墓誌)》에서 "아아! 이제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구나. 39년간 해로하였는데 지금 하나의 꿈이 되고 말았으니 내 슬픔이 너무나 깊다. 다섯 달만 더 살았더라면 칠순이 되었을 것을,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일이다."라며 슬퍼했다.
영빈 이씨의 묘소는 의열묘(義烈墓)로 양주 연희궁 대야동 언덕(오늘날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에 조성되었다. 의열묘는 고종 대에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수경원(綏慶園)으로 격상되었으며,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으로 이전되었다.
1788년(정조 12년), 정조는 영빈의 묘인 의열묘를 선희궁(宣禧宮)으로 칭하였으며[13], 후에 선희궁은 임금을 낳은 후궁들을 배향하는 칠궁(七宮)을 구성하는 사당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고종대에 소유(昭裕)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3. 가족 관계
아버지: 이유번(李楡蕃)
어머니: 한양 김씨
남편: 영조(1694년 ~ 1776년)
==== 자녀 ====
영빈 이씨는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 6녀를 두었다.[14][15][16][17][18][19] 장녀는 화평옹주(1727년~1748년)로 박명원에게 시집갔다. 차녀, 3녀, 4녀는 모두 요절하였다. 5녀는 화협옹주(1733년~1752년)로 신광수에게 시집갔다. 장남은 사도세자(1735년~1762년)이며, 훗날 장조로 추존되었다. 며느리는 혜경궁 홍씨이다. 6녀는 화완옹주(1738년~1808년)로 정치달에게 시집갔으나, 정조 즉위년(1776년) 폐서인되었다.
작호 | 이름 | 생몰년 | 배우자 | 비고 | |
---|---|---|---|---|---|
장녀 | 화평옹주 | 1727년 - 1748년 | 박명원 | ||
차녀 | 옹주 | 1728년 - 1731년 | rowspan="3" | | 이옹주(二翁主)로 기록 | |
3녀 | 옹주 | 1729년 - 1731년 | 삼옹주(三翁主)로 기록 | ||
4녀 | 옹주 | 1732년 - 1736년 | 사옹주(四翁主)로 기록 | ||
5녀 | 화협옹주 | 1733년 - 1752년 | 신광수 | ||
장남 | 사도세자 | 선 | 1735년 - 1762년 | 혜경궁 홍씨 | 조선의 추존 국왕 |
6녀 | 화완옹주 | 용완 | 1738년 - 1808년 | 정치달 | 정조 즉위년(1776년) 폐서인 |
3. 1. 자녀
영빈 이씨는 영조와의 사이에서 1남 6녀를 두었다.[14][15][16][17][18][19] 장녀는 화평옹주(1727년~1748년)로 박명원에게 하가했다. 차녀, 3녀, 4녀는 모두 요절하였다. 5녀는 화협옹주(1733년~1752년)로 신광수에게 하가했다. 장남은 사도세자(1735년~1762년)이며, 훗날 장조로 추존되었다. 며느리는 혜경궁 홍씨이다. 6녀는 화완옹주(1738년~1808년)로 정치달에게 하가하였으나, 정조 즉위년(1776년) 폐서인되었다.작호 | 이름 | 생몰년 | 배우자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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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 화평옹주 | 1727년 - 1748년 | 박명원 | ||
차녀 | rowspan="3" | | 이옹주(二翁主)로 기록 | |||
3녀 | 삼옹주(三翁主)로 기록 | ||||
4녀 | 사옹주(四翁主)로 기록 | ||||
5녀 | 화협옹주 | 1733년 - 1752년 | 신광수 | ||
장남 | 사도세자 장조 의황제 장종대왕 | 선 | 1735년 - 1762년 | 혜경궁 홍씨 헌경의황후 | 조선의 추존 국왕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
6녀 | 화완옹주 | 용완 | 1738년 - 1808년 | 정치달 | 정조 즉위년(1776년) 폐서인 |
4. 관련 문화재
백자청화영빈이씨 묘지·명기 및 석함(白磁靑華暎嬪李氏 墓誌․明器 及 石函)은 연세대학교 경내에 있던 영빈 이씨의 묘인 수경원을 1970년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西五陵)으로 옮길 때 실시한 발굴조사 시 출토된 유물이다. 2010년 10월 17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11호로 지정되었다. 영빈 이씨 은인은 1899년 제작되었다.
5. 미디어에서의 영빈 이씨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에서 김윤경이 연기하였다. 1998년 MBC 드라마 《대왕의 길》에서 정혜선이 연기하였다. 2015년 영화 《사도》에서 전혜진이 연기하였다. 2021년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남기애가 연기하였다.
5. 1. 드라마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에서 김윤경이 연기하였다. 1998년 MBC 드라마 《대왕의 길》에서 정혜선이 연기하였다. 2015년 KBS2 드라마 《드라마 스페셜 - 붉은 달》에서 이항나가 연기하였다. 2021년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남기애가 연기하였다.5. 2. 영화
2015년 영화 《사도》에서 전혜진이 영빈 이씨를 연기하였다.```source
참조
[1]
웹사이트
영조大王실록
https://sillok.histo[...]
[2]
서적
영조실록
[3]
서적
어제영빈이씨묘지(御製暎嬪李氏墓誌)
[4]
서적
승정원일기
[5]
서적
승정원일기
[6]
서적
영조실록
[7]
서적
영조실록
[8]
서적
영조실록
[9]
서적
영조실록
[10]
서적
영조실록
[11]
서적
영조실록
[12]
서적
어제영빈이씨묘지(御製暎嬪李氏墓誌)
[13]
서적
정조실록
[14]
서적
태봉등록(胎峯謄錄)
[15]
서적
승정원일기
[16]
서적
태봉등록(胎峯謄錄)
[17]
서적
승정원일기
[18]
서적
태봉등록(胎峯謄錄)
[19]
서적
영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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