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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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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헌경왕후는 조선 영조의 며느리이자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조선 정조의 어머니이다. 1735년 홍봉한과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으며, 1744년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 이후 혜빈으로 강등되었으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혜경궁으로 궁호가 높아졌다. 1795년 회갑을 기념하여 자서전인 《한중록》을 저술했다. 1815년 사망하여 헌경빈의 시호를 받았으며, 이후 헌경왕후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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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경왕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인명혜경궁 홍씨
한자 표기惠慶宮洪氏
로마자 표기Hyegyeonggung Hongssi
다른 이름헌경왕후 (獻敬王后)
존호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 (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
휘호인철계성 (仁哲啓聖)
시호헌경의황후 (獻敬懿皇后)
생애
출생일1735년 8월 6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반송방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사망일1816년 1월 13일
사망지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묻힌 곳융건릉
가족 관계
배우자장조 (사도세자)
자녀의소세자, 정조, 청연공주, 청선공주
아버지홍봉한
어머니한산부부인 한산 이씨
주요 경력
책봉세자빈
칭호혜빈 (惠嬪), 혜경궁 (惠慶宮), 자궁 (慈宮)
기타
가문풍산 홍씨
능묘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 1-15
비고대한제국 추존 황후

2. 생애

1744년(영조 20년)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다. 1752년에는 정조를 낳았다.

1762년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가 죽자, 영조는 혜경궁에게 '혜빈(惠嬪)'이라는 호를 내렸다.[3] 혜빈은 사가로 물러나 생활하였다.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를 계승하면서, 혜경궁은 국왕의 생모로서 사실상 왕대비 대우를 받았다. 정조는 어머니를 자궁(慈宮)으로 칭했다.[1][2]

1776년 정조 즉위 후 혜경궁(惠慶宮)으로 궁호가 높아졌다.[1] 왕실에서 혜경궁이 가장 연장자였으나, 정순왕후가 대비의 위치를 차지하여 왕실 서열상 제2위였다.[2]

1778년(정조 2년) 효강(孝康), 1783년(정조 7년) 자희(慈禧), 1784년(정조 8년) 정선(貞宣), 1795년(정조 19년) 회갑을 맞아 휘목(徽穆)의 존호를 받았다.[3]

정조순조 대에 걸쳐 《한중록》을 저술하여 사도세자의 죽음과 60년 궁중 생활을 회고했다.[1]

1800년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자 혜경궁은 《한중록》의 제목을 고쳤다.

1815년(순조 15년)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로 사망하여 헌경빈(獻敬嬪)의 시호를 받았다.[4]

1899년(광무 3년)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종으로 추존하면서 혜경궁은 헌경왕후로 추존되었고, 장조로 추존하여 황제로 격상하면서 헌경왕후 또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하였다.[2]

2. 1. 탄생과 가계

1735년(영조 11년) 6월 18일, 한성부 반송방에서 홍봉한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선조의 외6대손으로, 아버지 홍봉한은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의 아들 홍만용의 증손자이다.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

     ┌─→원종인조효종현종숙종영조   사도세자   
   선조   
     └─→   정명공주      홍만용      홍중기      홍현보      홍봉한      혜경궁 홍씨   



|}

혜경궁이 태어날 때 할아버지 홍현보는 태몽을 꾸고, 혜경궁이 태어나자 아들 내외에게 특별한 아이라고 말하였다.

1743년(영조 19년)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할아버지 홍현보는 예조판서까지 역임했지만 《한중록》에 의하면 그의 가계는 빈한하여 언니를 시집보낼 때와 그가 출가할 때 혼수품이 넉넉하지 않았다 한다. 그가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릴 때, 얼굴도 모르고 처음 보는 친척들이 나타나서 자신의 이름을 알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영조의 특명으로 아버지 홍봉한은 그에게 《소학(小學)》, 《내훈(內訓)》, 《어제훈서(御製訓書)》를 가르쳤다 한다. 1744년(영조 20년)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낳은 아들로는 의소세손과 정조가 있다. 영조는 첫 손자인 의소세손 이정이 태어나자 기대가 남달랐으나 의소세손은 곧 요절했다. 그러나 2년 만에 둘째 아들 세손 이산이 태어났다.

헌경왕후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홍봉한홍만용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의 증손)
어머니한산부부인 이씨1713년 - 1755년
남편장헌세자훗날 국왕으로 추존되어 "장조"의 묘호가 내려짐
아들의소세손1750년 - 1752년, 요절
아들정조1752년 - 1800년
청연군주1754년 - 1821년, 광은위 김기성에게 하가
청선군주1756년 - 1802년, 흥은위 정재화에게 하가


2. 2. 임오화변과 혜빈 강등

1762년(영조 38년) 7월 4일(윤5월 13일)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는 형벌을 내렸다.[2]

1762년(영조 38년) 7월 12일(윤5월 21일)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폭염 속에서 사망하였다. 영조는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혜경궁 홍씨에게는 '혜빈(惠嬪)'이라는 호를 내렸다.[3]

2. 3. 사도세자 사망 이후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은 이후 영조는 혜빈(惠嬪)이라는 빈호를 하사했고, 혜빈은 사가에 머물렀다.[3] 아들 정조가 영조의 명에 의해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승통을 계승하였으므로, 혜경궁은 생전에 세자빈이었지만 국왕의 생모로서 사실상 왕대비로 대우받았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을 자궁(慈宮)으로 칭하였다.[1][2]

1769년 세손(훗날 정조)이 정재화 등과 함께 기방에 출입한 것을 화완옹주홍국영 등이 목격하고 혜경궁에게 알렸다. 혜경궁은 친정아버지 홍봉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사건 수습을 요청했으나, 홍봉한은 개입을 거절했다. 이에 혜경궁은 단식농성을 하였고, 결국 홍봉한이 나서서 기생들을 유배보내고 세손에게 후보고를 한 뒤 사건을 수습했다. 이 사건은 한중록에 언급되어 있다.

1775년(영조 51년)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홍인한은 극력 반대하였고, 이 문제로 정조의 미움을 사서 정조 즉위 후 사사된다. 홍봉한1770년(영조 46년)경 반대파 김귀주, 정후겸의 공격으로 정계에서 은퇴하고 봉조하 직함으로 교외에 거주했다. 그는 이복동생이던 홍인한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정조는 홍인한이 형을 배신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홍봉한은 사도세자 생전부터 있었던 정순왕후 외척 가문과의 정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에도 김귀주 정파의 탄핵을 여러 번 받았다. 정조 즉위 초와 사후에도 이들이 홍봉한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사도세자의 추숭에 대해 당시 세손이던 정조와 홍봉한이 사석에서 나눈 이야기를 김귀주가 영조에게 고자질해서 홍봉한을 역적으로 몰기도 했었다.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獻敬惠嬪)이었으나, 1899년(광무 3년)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종으로 추존하면서 혜경궁을 헌경왕후로 추존하였다. 이후 장종을 다시 장조로 추존하여 황제로 격상하면서 헌경왕후 또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하였다.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 홍씨'''로도 알려져 있다.

연도사건
1762년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가 죽은 뒤, 영조는 "혜빈"(惠嬪한국어)의 빈호를 내리고 홍씨를 출궁시켰다.
1776년정조가 즉위하자 홍씨는 혜경궁의 궁호를 받았다.
1815년정조 사후 15년 만에 사망했으며, 헌경빈(獻敬嬪한국어)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향년 81세.
1899년헌경왕후로 추존되었다.
1903년대한제국 성립 후 장헌세자가 장조의황제로 추존되자, 홍씨도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한국어)로 추존되었다.


2. 4. 정조 즉위와 혜경궁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은 이후 영조에 의해 '''혜빈'''(惠嬪)이라는 빈호를 하사받고 사가에 머물렀다. 아들 정조가 영조의 명에 의해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승통을 계승하였으므로 생전의 신분은 세자빈이었지만, 국왕의 생모로서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을 자궁(慈宮)으로 칭하며 사실상 왕대비로 대우하였다.

1776년 영조가 83세에 서거하고, 대리청정하던 세손 이산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등극하니, 곧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어머니 혜빈 홍씨 역시 '혜경궁(惠慶宮)'으로 궁호가 높아졌다.[1] 당시 왕실에서 혜경궁 홍씨가 제일 연장자였으나, 서열상 10살 아래인 정순왕후가 대비의 위치를 차지하여 왕실 서열상 제2위의 위치에 있었다.[2]

1778년(정조 2년)에 효강(孝康), 1783년(정조 7년) 자희(慈禧), 1784년(정조 8년) 정선(貞宣), 1795년(정조 19년)에는 그의 회갑을 기념하여 휘목(徽穆)이란 존호를 받았다.[3]

2. 5. 《한중록》 저술

정조와 순조 대에 사도세자의 죽음과 본인의 60년 궁중 생활을 회고한 자전적 회고록 《한중록》을 저술하였다.[1] 1795년(정조 19년) 회갑을 맞아 《한중록》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는데, 《한중록》은 한 번에 쓰인 것이 아니라 십수 년에 걸쳐 여러 번 쓰였으며 목적과 대상도 각기 달랐으나 후대에 누군가가 모아서 책으로 엮은 것이다.[1]

《한중록》에서 혜경궁 홍씨는 아들 정조 사후 벽파의 공격으로 친동생이 사사당하고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리자, 가문의 원수였던 김귀주 계열, 벽파에 대한 원한을 드러내며, 친동생의 죄목이나 아버지에 대한 공격 등에 대해 정조 생전의 말이나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상세하게 거론하며 조목조목 변론하였다.[1]

《한중록》(閑中録) 또는 《읍혈록》(泣血録)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혜경궁의 자서전으로, 1795년부터 1805년에 걸쳐 작성되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슬픈 이야기와 친정 풍산 홍씨 가문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쓴 속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6권으로 조선 궁중 문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1]

2. 6. 생애 후반과 죽음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은 이후 영조에 의해 '''혜빈'''(惠嬪)이라는 빈호를 하사받고 사가에 머물렀다. 아들 정조가 영조의 명에 의해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승통을 계승하였으므로 생전의 신분은 세자빈이었지만, 국왕의 생모로서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을 자궁(慈宮)으로 칭하며 사실상 왕대비로 대우하였다.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獻敬惠嬪)이었으나, 1899년(광무 3년)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존하면서 혜경궁을 헌경왕후로 추존하였고, 장종을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하여 황제로 격상하면서 헌경왕후 또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하였다.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로도 알려져 있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조의 아들이자 혜경궁 홍씨의 손자인 순조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정조 치세기간부터 집필하던 회고록 《한중록》(閑中錄)의 제목을 순조 즉위 후 《한중록》(恨中錄)으로 고쳤다. 1910년부터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그가 《한중록》을 쓴 이유가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친정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생전 그는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의 존호를 받았다. 1805년(순조 5년)부터는 담현증(痰昡症)을 앓아 오래 병석에 누웠다. 1815년(순조 15년)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며 헌경빈(獻敬嬪)의 시호를 받았다. 이는 총명하고 예지(睿知)함을 헌(獻)이라 하고 밤낮으로 경계함을 일러 경(敬)이라 하였다 한다.[4] 순조 즉위 직후 혜경궁은 아들 정조의 약속을 이유로 친정에 대한 신원을 요구했고, 1814년(순조 14년) 그의 친정집은 신원, 복권된다. 또한 홍봉한의 죽음 직전에 그를 비난했던 정이환, 이심도 등의 처벌을 요구한다. 이심도는 사형에 처해진다.

2. 7. 사후 추존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은 이후 영조에 의해 '''혜빈'''(惠嬪)이라는 빈호를 하사받고 사가에 머물렀다. 아들 정조가 영조의 명에 의해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승통을 계승하였으므로, 생전의 신분은 세자빈이었지만 국왕의 생모로서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을 자궁(慈宮)으로 칭하며 사실상 왕대비로 대우하였다.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獻敬惠嬪)이었으나, 1899년(광무 3년)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존하면서 혜경궁을 헌경왕후로 추존하였고, 장종을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하여 황제로 격상하면서 헌경왕후 또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하였다.[2]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로도 알려져 있다.[2]

1854년(철종 5년) 유정(裕靖)의 존호가 추가되었다.[3] 1899년(광무 3년) 8월 3일에 경연특진관 서상조(徐相祖)의 상소로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할 것을 청하여 고종이 승인하여 장헌세자가 장종대왕으로 추존되자, 함께 헌경왕후로 추존되었고,[3]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899년(광무 3년) 장종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격상되자 그녀 역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되었다.[3]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이다.[3]

능은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융릉(隆陵)으로 남편인 장조와 함께 묻혀 있으며,[3] 인근에는 아들 정조와 며느리인 효의왕후의 능인 건릉(健陵)도 위치하여 있다.[3]

3. 가족 관계

가계
관계본관이름생몰년비고
아버지풍산 홍씨홍봉한1713년 - 1778년정명공주의 현손[5], 홍현보와 풍천 임씨의 아들
어머니한산 이씨한산부부인 이씨1713년 - 1755년이집과 기계 유씨의 딸
남편-장헌세자1735년 - 1762년훗날 국왕으로 추존되어 "장조"의 묘호가 내려짐



자녀
관계작호이름생몰년배우자비고
장남의소태자
의소세손
정(琔)1750년 - 1752년-1899년(광무 3년) 세자로 격상, 1901년(광무 5년) 태자로 격상
차남정조 선황제
정조대왕
산(祘)1752년 - 1800년효의왕후 김씨제22대 국왕, 대한제국 추존 황제
장녀청연공주
청연군주
-1754년 - 1821년광은위 김기성1899년(광무 3년) 공주로 격상
차녀청선공주
청선군주
-1756년 - 1802년흥은위 정재화


4. 평가

사도세자의 세자빈이었으나,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후 영조로부터 '''혜빈'''(惠嬪)이라는 빈호를 받고 사가에 머물렀다. 아들 정조가 영조의 명으로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생전 신분은 세자빈이었지만 왕의 생모로서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을 자궁(慈宮)으로 칭하며 사실상 왕대비로 대우하였다.[1]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獻敬惠嬪)이었으나, 1899년(광무 3년)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존하면서 혜경궁을 헌경왕후로 추존하였고, 장종을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하여 황제로 격상하면서 헌경왕후 또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하였다.[1]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로도 알려져 있다.[1]

아들 정조와 손자 순조 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사도세자의 죽음과 본인의 60년 동안 궁중 생활을 회고한 자전적 회고록인 《한중록》의 저자이다.[1]한중록》은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 회고록이자 수필로서, 정사에서는 알 수 없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왕실 내의 비화, 여러 인물들의 성격 묘사와 사건 및 대화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1]

5. 혜경궁 홍씨가 등장하는 작품


  • 마거릿 드래블의 소설 《붉은 왕세자빈》(The Red Queen, 한글판 부제: 영혼의 ‘한중록’)에 등장한다.
  • 김경민의 소설 《왕의 언약》, 《사도세자》에 등장한다.

5. 1. 드라마


5. 2. 영화

참조

[1] 웹인용 영조실록 99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5월 22일(을묘)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1762-05-22
[2] 웹인용 영조실록 99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을묘)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1762-05-13
[3] 웹인용 영조실록 99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21일(을묘)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1762-05-21
[4] 역사기록 빈청에서 혜경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올리다 순조실록 1815-12-25
[5] 문서 선조 → 정명공주 → 홍만용 → 홍중기 → 홍현보 → 홍봉한 → 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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