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구라 신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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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구라 신페이는 일본의 언어학자로, 1882년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다. 그는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며 경성제국대학 교수, 도쿄 제국대학 언어학과 주임 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업적으로는 1920년 《조선어학사》를 출간하고, 한국어 방언 연구를 통해 1944년 《조선어 방언의 연구》를 발표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는 한국어 방언을 분류하고, 향가 해독에 기여했으나, 일제강점기 한국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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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라 신페이 | |
---|---|
기본 정보 | |
이름 | 오구라 신페이 |
원어 이름 | 小倉進平 |
로마자 표기 | Ogura Shinpei |
출생 | 1882년 6월 4일 |
출생지 | 센다이, 일본 제국 |
사망 | 1944년 2월 8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제국 |
국적 | 일본 |
학력 | |
모교 | 도쿄 제국대학 |
경력 | |
직업 | 언어학자 |
근무지 | 게이조 제국대학, 도쿄 제국대학 |
지도 학생 | 학위 지도 학생 |
주요 관심사 | 언어학(일본어・한국어) |
알려진 업적 | 향가 해독, 한국어 방언 조사 |
수상 | 일본 학사원 임페리얼 상 |
2. 경력
1903년 도쿄 제국대학에 입학해 언어학을 전공했으며, 1906년 졸업 논문 〈헤이안 조의 음운〉(平安朝の音韻)을 썼다. 이후 우에다 가즈토시의 국어학 연구실에서 조수로 있다가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했다.[3]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유럽과 미국에 유학한 후, 1926년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되었다. 1933년부터 1943년까지 도쿄 제국대학 언어학과 주임교수를 지냈다.[3] 1920년 《조선어학사》(朝鮮語学史), 1944년 《조선어 방언의 연구 (상·하)》(朝鮮語方言の研究)를 출간했다.[3] 1935년 〈향가 및 이두의 연구〉(郷歌及び吏読の研究)로 일본 학사원상을 받았고, 1943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문화공로상을 받았다.[6][7]
1882년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실업가이자 가인인 오구라 묘엔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2고등학교(현 도호쿠 대학 전신)[5][6]를 졸업하고 도쿄 제국대학에 입학하여 언어학을 전공했다. 1906년 헤이안 시대 일본어 음운론에 관한 논문으로 졸업 후, 우에다 만넨 지도하에 연구를 계속했다. 1911년 29세 나이로 조선총독부 관리로 근무하기 위해 한국으로 이주, 한반도에서 20년을 보냈다.[1][3][6]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전신) 등 여러 학문적, 교육적 직책을 맡았다.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교과서를 편집했으며, 1919년 6월까지 부총장 직급이었다.[3][6]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며 한국어 사전 개발에 기여했다.[6]
1924년 8월부터 1926년 4월까지 경성제국대학 해외 분교의 해외 연구원 및 교수로 유럽에서 유학했다.[3][6] 귀국 후 경성제국대학 언어학 교수가 되어 많은 한국어 학자를 길러냈고, 1926년 한국 최초의 대학 도서관을 열었다.[3] 당시 저명한 한국어 학자 및 사서들 상당수가 그의 제자였다.[3][6][7]
1933년 도쿄 제국 대학 언어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매년 한국을 방문하여 강의했다. 1935년 동아시아 언어학 기여와 한국어-일본어 관계 탐구로 일본 학사원상을 받았다.[6][7] 1938년 일본 언어학회 초대 부회장을 역임했다.[6]
1943년 건강 악화로 은퇴했지만, 한국어 연구를 계속했다.[1][6][7] 1944년 2월 8일 사망 당시 평생의 연구를 담은 책의 마지막 단계를 준비 중이었다. 이 책은 제자 시바타 타케시일본어에 의해 그해 5월 유고로 출판되었다. 연구를 통해 수집한 고서들은 현재 도쿄 대학 오구라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6][7]
앞줄 오른쪽부터 '''오구라 신페이''', 이하 후유, 칸다 조타로. 가운데 줄 오른쪽부터 호시나 코이치, 야스기 사다토시, 우에다 만넨, 후지오카 카츠지, 신무라 이즈루. 뒷줄 오른쪽부터 하시모토 신키치, 토쿠자와 (토쿠자와 켄조?), 고토 아사타로, 킨다이치 쿄스케.
이하 후유 탄생 100주년 기념회 편 '이하 후유: 1876-1947 탄생 100주년 기념 앨범' 1976년, 19쪽.
2. 1. 주요 연구 분야
오구라 신페이는 한반도를 여행하며 다양한 한국어 방언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하여 최초의 현대적 연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1912년 제주도를 시작으로 1923년 강원도까지 한반도 전역의 259개 지점에서 방언을 연구했다.[3][6] 그는 각 지역의 군청에서 시작하여 범위를 넓혀가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했으며, 시골 지역의 열악한 인프라 때문에 말을 타고 이동해야 했다. 식민 정부는 그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제주도 연구 시에는 경찰관을 배정하여 보호하기도 했다.[3]그의 방언 연구는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평안도, 중부지방(경기도 방언 포함)으로 방언을 나누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같은 경상도 방언이라도 영남 방언과 동남 방언으로 나누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지방 방언마다 고유의 음운과 문법이 있음을 실제 방언 채록을 통해 실증했다. 오구라 신페이의 한국어 방언 분류는 오늘날에도 국어학 연구에서 공부할 정도로 짜임새 있는 이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구라 신페이는 1920년대에 향가를 연구하여 1929년에 출판했으며, 1927년에는 향가와 이두 문자에 대한 논문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6] 이 분야에서의 그의 연구는 한국 학자 양주동에게도 향가를 연구하도록 영감을 주었다.[7]
그의 연구 지역과 시기는 다음과 같다.[6]
2. 2. 한국어 방언 연구 방법론
오구라 신페이는 한반도를 여행하며 다양한 한국어 방언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했으며, 이는 그를 최초의 현대적 연구자로 만들었다. 방언에 대한 그의 관심은 처음에는 취미에 가까웠지만 (심지어 휴가를 사용하여 이러한 여행을 다녔다), 텍스트 연구만으로는 ''향가''를 해독하기에 불충분하다고 여겨 결국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3]그의 조사를 통해 그는 한반도 전역의 259개 지점에서 방언을 연구했다. 그는 각 지역의 군청에서 시작하여 그곳에서부터 범위를 넓혀갔다. 이 연구의 상당 부분을 그는 말(horseback)을 타고 이동했는데, 이는 시골 지역의 인프라가 현저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식민 정부는 그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그는 제주도에서 연구할 때 보호를 위해 경찰관을 배정받았다. 이 연구의 결과는 한국어 방언에 관한 약 40편의 논문으로 나타났다.[3]
그가 1944년 《조선어 방언의 연구 (상·하)》(朝鮮語方言の研究)를 출간함으로써 분류한 조선어 방언 즉, 한국어의 방언분류는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평안도, 중부지방(경기도 방언 포함)으로 방언을 나누고, 같은 경상도 방언이라고 해도 영남방언과 동남방언으로 나누는 것이 특징이다. 같은 한국어라도 지방방언마다 고유의 음운(말소리의 체계)과 문법이 있음을 실제 방언을 채록함으로써 실증한 것이다. 지금도 국어학을 공부할 때에 오구라 신페이가 연구한 한국어 방언분류를 공부할 정도로 짜임새가 있는 이론이다.
3. 한국어 방언 분류
오구라 신페이는 1944년 《조선어 방언의 연구 (상·하)》(朝鮮語方言の研究)를 출간하여 한국어 방언을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평안도, 중부지방(경기도 방언 포함)으로 분류했다.[3] 특히 경상도 방언을 영남방언과 동남방언으로 나누었다. 그는 같은 한국어라도 지방 방언마다 고유의 음운(말소리의 체계)과 문법이 있음을 실제 방언 채록을 통해 실증하였다. 오구라 신페이의 한국어 방언 분류는 오늘날에도 국어학 연구에서 공부할 정도로 짜임새 있는 이론으로 평가받는다.[3]
3. 1. 방언 분류
오구라 신페이는 1944년 《조선어 방언의 연구 (상·하)》(朝鮮語方言の研究)를 출간하여 한국어 방언을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평안도, 중부지방(경기도 방언 포함)으로 나누었다.[3] 특히 경상도 방언을 영남방언과 동남방언으로 나누었다. 그는 같은 한국어라도 지방 방언마다 고유의 음운(말소리의 체계)과 문법이 있음을 실제 방언 채록을 통해 실증하였다. 오구라 신페이의 한국어 방언 분류는 오늘날에도 국어학 연구에서 공부할 정도로 짜임새 있는 이론으로 평가받는다.[3]오구라 신페이는 한반도를 여행하며 다양한 한국어 방언을 광범위하게 연구하여 최초의 현대적 연구자로 평가받는다. 처음에는 취미에 가까웠지만, 텍스트 연구만으로는 ''향가''를 해독하기에 불충분하다고 여겨 방언 연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3] 그는 1912년 제주도를 시작으로 1923년 강원도까지 한반도 전역의 259개 지점에서 방언을 연구했다.[6] 각 지역 군청에서 조사를 시작하여 범위를 넓혀갔으며, 시골 지역의 열악한 인프라 때문에 말을 타고 이동해야 했다. 식민 정부는 그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제주도 연구 시에는 경찰관을 배정하여 보호하기도 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한국어 방언에 관한 약 40편의 논문으로 발표되었다.[3]
3. 2. 방언 연구의 의의
오구라 신페이는 1944년 《조선어 방언의 연구 (상·하)》(朝鮮語方言の研究)를 출간하여 한국어 방언을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평안도, 중부지방(경기도 방언 포함)으로 나누었다. 경상도 방언을 영남방언과 동남방언으로 나눈 것이 특징이다. 그는 같은 한국어라도 지방 방언마다 고유의 음운(말소리의 체계)과 문법이 있음을 실제 방언 채록을 통해 실증하였다. 오구라 신페이의 한국어 방언 분류는 오늘날에도 국어학 연구에서 공부할 정도로 짜임새 있는 이론으로 평가받는다.[3]오구라 신페이는 한반도를 여행하며 다양한 한국어 방언을 광범위하게 연구하여 최초의 현대적 연구자로 평가받는다. 처음에는 취미에 가까웠지만, 텍스트 연구만으로는 ''향가''를 해독하기에 불충분하다고 여겨 방언 연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3] 그는 1912년 제주도를 시작으로, 1913년 황해도, 1915년 경상남도, 1916년 경상북도, 1918년 충청남도와 전라남도, 1920년 함경남도, 1921년 전라북도와 충청북도, 1922년 경상북도, 1923년 강원도를 방문했다.[6]
그는 한반도 전역의 259개 지점에서 방언을 조사했다. 각 지역의 군청에서 시작하여 범위를 넓혀가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시골 지역의 인프라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연구의 상당 부분을 말(horseback)을 타고 이동했다. 식민 정부는 그의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제주도 연구 시에는 보호를 위해 경찰관을 배정받기도 했다. 이 연구의 결과는 한국어 방언에 관한 약 40편의 논문으로 발표되었다.[3]
4. 평가
오구라 신페이는 한국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유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한국어 연구에 상당한 기여를 했고,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어려움에 공감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화와 문명을 일본보다 열등하다고 여겼으며, 그들의 굴복을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았다.[1][7]
4. 1. 긍정적 평가
오구라 신페이는 한국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유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한국어 연구에 상당한 기여를 했고,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어려움에 공감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화와 문명을 일본보다 열등하다고 여겼으며, 그들의 굴복을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았다.[1][7]그는 1926년에 한국 최초의 대학 도서관을 열었으며, 이 시기의 저명한 한국어 학자 및 사서들 중 상당수가 그의 제자였다.[3][6][7] 1935년에는 동아시아 언어학에 대한 기여와 한국어와 일본어의 관계 탐구로 일본 학사원상을 받았다.[6][7]
4. 2. 부정적 평가
오구라는 한국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유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한국어 연구에 상당한 기여를 했고,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어려움에 공감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화와 문명을 일본보다 열등하다고 여겼으며, 그들의 굴복을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았다.[1][7]5. 저서
참조
[1]
웹사이트
"[어제의 오늘]조선어 연구학자 오구라 신페이 사망"
https://m.khan.co.kr[...]
2010-02-07
[2]
논문
A Basic Understanding of ''Hyangga'' Interpretation
[3]
웹사이트
우리말 최초 사투리 연구서 저자는 일본인이었다
https://www.ohmynews[...]
2021-10-03
[4]
서적
The Korean Language
SUNY Press
[5]
웹사이트
Tohoku University Registered Tangible Cultural Properties
http://bunkazai.toho[...]
2023-09-01
[6]
웹사이트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
http://kostma.korea.[...]
2023-09-01
[7]
웹사이트
천년의 수수께끼, 신라 향가를 해독한 최초의 인물
https://www.ohmynews[...]
2021-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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