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와라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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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다와라 정벌은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호조 우지마사를 공격하여 일본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호조 우지마사가 히데요시의 교토 방문 요청을 거부하면서 양측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히데요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오다와라 성을 포위했다. 호조 측은 징병과 성곽 개축 등 방어 준비를 했지만, 도요토미 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밀려 주요 거점이 함락되었다. 결국 오다와라 성이 함락되고 호조 우지마사는 할복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호조 가문의 영지가 주어졌다. 이 사건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이 확고해졌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후 권력을 잡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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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와라 정벌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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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전투 이름 | 오다와라 정벌 |
로마자 표기 | Odawara seibatsu |
시기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기간 | 1590년 2월 ~ 7월 |
장소 | 사가미국 오다와라 및 간토 일대 |
결과 | 도요토미군의 승리, 후호조 씨 멸망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도요토미 군 |
교전국 2 | 호조 군 |
지휘관 | |
지휘관 1 |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카쓰 마에다 도시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혼다 다다카쓰 사카이 이에쓰구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이코마 지카마사 호리오 요시하루 가모 우지사토 사나다 마사유키 사나다 유키무라 우키타 히데이에 호소카와 다다오키 구로다 간베에 이이 나오마사 호리 히데마사 모가미 요시아키 시마즈 도요히사 |
지휘관 2 | 호조 우지마사(사망) 호조 우지테루(사망) 호조 우지쿠니 호조 우지나오 호조 우지타다 호조 우지미쓰 호조 우지타카 지바 나오시게 마쓰다 노리히데 나리타 우지나가 다이도지 마사시게 후마 고타로 |
병력 | |
병력 1 | 도카이도 방면군: 170,000명 도산도 방면군: 35,000명 수군: 10,000~20,630명 총합: 220,000명 |
병력 2 | 총 82,000명 |
피해 | |
피해 1 | 미상 |
피해 2 | 미상 |
관련 전투 및 캠페인 | |
관련 캠페인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전투 시마즈 씨의 전투 후호조 씨의 전투 |
이전 전투 | 하치카타성 전투 |
이후 전투 | 시모다성 전투 오시성 전투 |
2. 전사(前史)
1582년 오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8년 일본 재통일에 성공했다. 히데요시는 호조 우지마사와 호조 우지나오 부자에게 교토의 주라쿠다이로 덴노를 방문할 때 참석할 것을 요청했으나, 우지마사는 이를 거절했다. 우지마사는 1590년 봄이나 여름으로 방문을 연기할 것을 제안했지만, 히데요시는 이를 거부하여 양측의 관계는 악화되었다.[1]
전국 시대에 신흥 다이묘로 등장한 호조 우지야스는 무사시 국 진출을 꾀하며 가와고에 야전에서 우에스기 노리마사와 아시카가 하루우지 등을 제압하고, 가이 국의 다케다 신겐,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와의 고소슨 삼국동맹을 배경으로 간토 진출을 본격화하면서 간토 간료직을 계승한 에치고 국의 우에스기 겐신과 대치했다. 특히 우에스기 씨의 간토 출병에는 다케다 씨와의 고소 동맹으로 연계하여 대항했다.
전국 시대 후기에 오다·도쿠가와 세력과 대치하는 신겐이 스루가 침공을 하자 후호조 씨는 가이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겐신과 에소 동맹을 맺어 다케다 씨를 포위 공격했지만, 우지야스 사후 호조 우지마사가 고소 동맹을 회복하면서 다시 간토 평정을 진행해 나갔다.
신겐이 서상 작전 도중에 급사한 후, 에치고에서는 겐신의 죽음으로 우지마사의 동생이자 겐신의 양자였던 우에스기 가게토라와 겐신의 조카인 우에스기 가게카쓰 사이에 오타테의 난이 발발했다. 다케다 가쓰요리는 우지마사의 요청으로 시나노 국 북부까지 출병하여 양자의 조정을 시도했지만, 가쓰요리가 철병한 후 화목은 깨지고, 가게카쓰가 난을 진압함으로써 다케다 가와의 동맹은 끝났다. 가쓰요리와 가게카쓰는 고에쓰 동맹을 맺고 1580년에 호조 씨는 다케다와 적대 관계로 전환한 것을 받아들여, 우지마사가 동맹을 맺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상위자인 노부나가에게 영토를 양도하고 오다 씨에 대한 복속을 보였다.[12][13]
1582년 혼노지의 변에서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으로 자결하자마자 호조 씨는 오다 가에 반란을 일으켜 오다 영토를 공격했다. 간나가와 전투를 거쳐, 이에야스와 덴쇼 임오의 난이 발발했다.[14] 이에야스는 사타케 요시시게 등과 연계하면서 호조 씨 타도를 목표로 했다.[17][18] 호조 씨는 사나다 마사유키가 이반하여, 10월에 오다 노부카쓰, 오다 노부타카로부터의 화목 권고를 받아들여[19][20] 강화했다.
1583년 1월, 호조 씨는 마에바시 성을 공격하고, 3월에는 누마타에도 침공했다.[21] 6월, 호조 씨와 이에야스 사이에 혼인이 성립되자, 간토 북부의 영주들은 히데요시에게 간토의 평안을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22][23] 1584년에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시작되자 무효화되었다.
1583년 11월 말, 누마지리 전투가 일어나 호조 씨와 간토 북부의 영주들은 전면전에 돌입했다.[27] 1585년부터 1587년에 걸쳐 히데요시가 주고쿠 정벌을 진행하는 와중에 간토의 평안은 방치되었고, 호조 씨는 1585년 1월에 사노 무네쓰나를 전사시키고, 다테바야시 성의 나가오 아키나가를 복속시켰다. 9월에는 누마타에 침공했고,[30] 1586년 4월에도 다시 침공했다.[31] 1587년 12월, 히데요시는 간토 북부의 영주들에게 호조 씨의 사노 지배를 인정할 것을 통지했고,[34] 1588년 2월, 호조 우지나오는 도요토미 정권에 복속을 청했다.[36]
히데요시는 1588년 4월, 고노에 사키히사의 주라쿠다이 행차 때 우지마사·우지나오 부자의 참석을 요구했지만, 우지마사는 이를 거부했다. 5월, 이에야스는 우지마사와 우지나오에게 적절한 인물을 상락시키도록 요구했다.[39] 호조 씨는 8월에 호조 우지노리를 명대리로 상락시켜, 긴장은 완화되었다.
1589년 10월 하순, 호조 씨는 나구루미 성을 탈취했는데, 이는 히데요시의 이전 판결을 뒤집은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관계자 처벌을 요구하며 거부했다. 히데요시는 “우지마사의 상락 의향을 받아들여 그동안의 비난을 용서하고, 고즈케 누마타 영지의 지배까지 허락했다. 그런데 이번 나구루미 공격은 히데요시의 판결을 뒤엎는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라고 규탄했다.[42] 우지나오는 12월 7일 자 서장에서 나구루미 성 사건은 우지마사나 우지나오의 명령이 아니었고, 사나다 측 나구루미 성주가 호조 측에 투항한 결과라고 변명했다.[43] 같은 시기, 호조 우지쿠니가 우쓰노미야 구니쓰나를 공격했는데, 이것 또한 총무사령 위반이었다. 11월, 히데요시는 관동의 영주들에게 "우지마사가 11월 중에 상락하지 않으면 다음 해 봄에 호조 정벌을 실시한다"고 통지했다.[44][45] 11월 24일, 호조씨와의 절연장을 배포했다. 12월 25일에는 호조 씨에게 5개조의 선전포고로 여겨지는 서장을 보냈다.[48]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을 앞두고 각 다이묘에게 서장을 발송했다. 그 서장 속에 "우지나오는 천도의 정리에 등을 돌리고, 제도에 대해 간모를 꾀한다. 어찌 천벌을 면하겠는가······. 결국, 천하, 칙명에 거스르는 자는 빨리 주벌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적고[49], 즉 "천도에 등을 돌리고, 제도에 대해 악다구리를 꾀하며, 칙명에 거스르는 우지나오에게 주벌을 가하기로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2. 1. 간토의 정세
1582년 오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8년 일본 재통일에 성공했다. 히데요시는 호조 우지마사와 호조 우지나오 부자에게 주라쿠다이로의 덴노 방문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지만, 우지마사는 거절했다. 1590년 5월, 히데요시는 호조 씨를 상대로 오다와라 정벌을 개시했다.[1]전국 시대에 북조 우지야스는 가와고에 야전에서 우에스기 노리마사와 아시카가 하루우지 등을 제압하고, 다케다 신겐, 이마가와 요시모토와의 갑상순 삼국 동맹을 배경으로 우에스기 겐신과 대치했다.
신겐이 서상 작전 도중 급사한 후, 겐신의 죽음으로 우에스기 카게토라와 우에스기 카게카츠 사이에 오타키의 난이 발발했다. 다케다 카츠요리는 조정을 시도했지만, 카게카츠가 난을 진압함으로써 다케다 가와의 동맹은 끝났다. 1580년, 북조 씨는 다케다와 적대 관계로 전환한 것을 받아들여, 우지마사가 동맹을 맺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상위자인 노부나가에게 영토를 양도하고 오다 씨에 대한 복속을 보였다.[12][13]
1582년 혼노지의 변에서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으로 자결하자, 북조 씨는 오다 영토를 공격했다. 신류가와 전투를 거쳐, 덴쇼 임오의 난이 발발했다.[14] 이에야스는 북간토의 여러 세력과 연계하면서 북조 씨 타도를 목표로 했다.[17][18] 북조 씨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이반으로 후방에 불안을 안은 채, 10월에 오다 측의 화목 권고를 받아들여[19][20] 강화했다.
6월, 북조 씨와 이에야스 사이에 혼인이 성립했다. 북간토의 영주들은 이에야스로부터 떨어져, 히데요시에게 간토의 평안을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22][23] 1584년에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시작되자 무효화되었다.
1583년 11월 말, 누마지리 전투가 일어나 북조 씨와 북간토의 영주들은 전면전에 돌입했다.[27] 1585년부터 1587년에 걸쳐 히데요시가 세이코쿠 계략을 진행하는 와중에 간토의 평안은 방치되었고, 북조 씨는 1월에 사노 무네쓰나를 전사시키고, 다테바야시 성의 나가오 아키나가를 복속시켰다. 9월에는 누마타에 침공했고,[30] 1586년 4월에도 다시 침공했다.[31] 1587년 12월, 히데요시는 북간토의 영주들에게 북조 씨의 사노 지배를 인정할 것을 통지했고,[34] 1588년 2월, 북조 우지나오는 도요토미 정권에 복속을 청했다.[36]
히데요시는 1588년 4월, 고요제이 천황의 쥬라쿠다이 행행을 행했다. 북조 씨에 대해 우지마사·우지나오 부자의 참석을 요구받았지만, 우지마사는 이를 거부했다. 5월, 이에야스는 우지마사와 우지나오에게 적절한 인물을 상락시키도록 요구했다.[39] 북조 씨는 8월에 우지마사의 동생인 북조 우지노리를 명대리로 상락시켜, 긴장은 완화되었다.
1589년 10월 하순, 호조 씨는 명호도성을 탈취했는데, 이는 히데요시의 이전 판결을 뒤집은 것이었다. 호조 측은 변명의 사자를 보냈지만, 히데요시는 관계자 처벌을 요구하며 거부했다. 히데요시는 “우지마사의 상락 의향을 받아들여 그동안의 비난을 용서하고, 우에노 누마타 영지의 지배까지 허락했다. 그런데 이번 명호도 공격은 히데요시의 판결을 뒤엎는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라고 규탄했다.[42] 우지나오는 12월 7일 자 서장에서 명호도성 사건은 우지마사나 우지나오의 명령이 아니었고, 사나다 측 명호도 성주가 호조 측에 투항한 결과라고 변명했다.[43]
같은 시기, 호조 우지쿠니가 우쓰노미야 쿠니쓰나를 공격했는데, 이것 또한 「총무사령」 위반이었다. 11월, 히데요시는 관동의 영주들에게 "우지마사가 11월 중에 상락하지 않으면 다음 해 봄에 호죠 정벌을 실시한다"고 통지했다.[44][45]
11월 24일, 호조씨와의 손절서를 배포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12월 10일 상락하여 동의를 받고, 12월 25일에는 우에스기 카게카쓰가 상락했다. 같은 날 히데요시는 호조씨에게 5개조의 선전포고로 여겨지는 서장을 보냈다.[48]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을 앞두고 각 다이묘에게 서장을 발송했다. 그 서장 속에 "우지나오는 천도의 정리에 등을 돌리고, 제도에 대해 간모를 꾀한다. 어찌 천벌을 면하겠는가······. 결국, 천하, 칙명에 거스르는 자는 빨리 주벌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적고[49], 즉 "천도에 등을 돌리고, 제도에 대해 악다구리를 꾀하며, 칙명에 거스르는 우지나오에게 주벌을 가하기로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우지나오는 12월 17일, 다음 해 1월 15일 오다와라로의 참진을 명령했다.
북쪽의 다테 마사무네와 대립하고 있던 사타케 씨는 중앙의 오다 씨와 도요토미 씨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다테 씨는 사타케 씨를 사이에 두고 오다와라 호조 씨와 동맹 관계에 있었고, 사타케 씨는 다테 씨를 사이에 두고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친교를 돈독히 하고 있었다.[84]
1589년, 스리카미하라 전투의 결과, 아시나 요시히로는 다테 마사무네에게 패배하여 아시나 씨는 세력을 잃었고, 남오슈의 영주들은 다테 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총무사령을 위반한 것이었고, 도요토미 씨의 출병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항전한 우쓰노미야 구니쓰나는 1589년 9월에 우쓰노미야 성과 타쿠 성을 공격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도요토미 씨에 의한 오다와라 정벌이 명령되었다.
2. 2. 도요토미 정권의 등장과 호조 가문과의 관계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러 전투를 거쳐 1588년 일본을 재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히데요시는 호조 우지마사와 호조 우지나오 부자에게 교토의 주라쿠다이로 덴노를 방문할 때 참석할 것을 요청했으나, 우지마사는 이를 거절했다. 우지마사는 1590년 봄이나 여름으로 방문을 연기할 것을 제안했지만, 히데요시는 이를 거부하여 양측의 관계는 악화되었다.[1]전국 시대에 신흥 다이묘로 등장한 호조 우지야스는 무사시 국 진출을 꾀하며 가와고에 야전에서 우에스기 노리마사와 아시카가 하루우지 등을 제압하고, 가이 국의 다케다 신겐,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와의 고소슨 삼국동맹을 배경으로 간토 진출을 본격화하면서 간토 간료직을 계승한 에치고 국의 우에스기 겐신과 대치했다. 특히 우에스기 씨의 간토 출병에는 다케다 씨와의 고소 동맹으로 연계하여 대항했다.
전국 시대 후기에 오다·도쿠가와 세력과 대치하는 신겐이 스루가 침공을 하자 후호조 씨는 가이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겐신과 에소 동맹을 맺어 다케다 씨를 포위 공격했지만, 우지야스 사후 호조 우지마사가 고소 동맹을 회복하면서 다시 간토 평정을 진행해 나갔다.
신겐이 서상 작전 도중에 급사한 후, 에치고에서는 겐신의 죽음으로 우지마사의 동생이자 겐신의 양자였던 우에스기 가게토라와 겐신의 조카인 우에스기 가게카쓰 사이에 오타테의 난이 발발했다. 다케다 가쓰요리는 우지마사의 요청으로 시나노 국 북부까지 출병하여 양자의 조정을 시도했지만, 가쓰요리가 철병한 후 화목은 깨지고, 가게카쓰가 난을 진압함으로써 다케다 가와의 동맹은 끝났다. 가쓰요리와 가게카쓰는 고에쓰 동맹을 맺고 1580년에 호조 씨는 다케다와 적대 관계로 전환한 것을 받아들여, 우지마사가 동맹을 맺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상위자인 노부나가에게 영토를 양도하고 오다 씨에 대한 복속을 보였다.[12][13] 우지마사는 우지나오에게 가독을 양도하고 에도 성에 은거한 후에도, 호조 우지테루나 호조 우지쿠니 등 유력 일문에 대해 종가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실질적인 당주로 군림했다.
우에스기 씨와의 결별 후, 가쓰요리는 히타치 국의 사타케 요시시게 등 반 호조 세력과 동맹을 맺고 대항했고, 오다 노부나가와도 화목을 시도했지만 1582년에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본격적인 고슈 정벌을 시작했고, 후호조 씨도 이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다케다 씨는 멸망했고, 후호조 씨는 고즈케 국와 스루가에서 다케다 측 여러 성을 공략했지만, 시기를 놓쳤다.
그러나 같은 해 혼노지의 변에서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으로 자결하자마자 호조 씨는 오다 가에 반란을 일으켜 오다 영토를 공격했다. 오다 씨 가신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군대를 패퇴시킨 간나가와 전투를 거쳐, 오다 체제에 등을 돌린 호조 씨를 정벌하기 위해 군을 일으킨 이에야스와 사이에 덴쇼 임오의 난이 발발했다.[14] 이 원정은 이에야스가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오다 체제로부터 승인을 얻은 행동이었고, 오다 체제 측에서도 미즈노 다다시게가 원군으로 가이에 출병하고 있었다.[15] 또한 뒤이어 상방에서도 원군이 출병될 예정이었지만 오다 노부카쓰와 오다 노부타카 사이에 정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중지되었다.[16] 이에야스는 사타케 요시시게, 유키 하루토모, 미나가와 히로테루, 미즈타니 마사무라 등과 연계하면서 호조 씨 타도를 목표로 했다.[17][18] 호조 씨는 한때 시나노 국 동부를 지배하에 두었지만, 사나다 마사유키가 이반했다. 후방에 불안을 안은 채 전투를 꺼린 후호조 씨는 10월에 오다 노부카쓰, 오다 노부타카로부터의 화목 권고를 받아들여[19][20], 후호조 씨가 고즈케, 도쿠가와 씨가 가이·시나노 국를 각각 영유하는 것으로 강화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도쿠가와의 휘하가 된 마사유키는 세력 범위 중 하나인 누마타 시의 할양이 강화 조건으로 된 것에 분노하여 도쿠가와 씨로부터도 이반하고 가게카쓰를 의지하게 되었다.
후호조 씨는 도쿠가와 씨와의 동맹 체결에 의해 전군을 간토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미 보소 반도 남부의 사토미 요시요리를 사실상 종속하에 두고 있던 호조 씨는 간토 북부에 군세를 집중시키게 되었다.
호조 씨는 이듬해 1583년 1월에 곧바로 마에바시 성을 공격하고, 3월에는 누마타에도 침공했다.[21]
6월, 호조 씨와 이에야스 사이에 혼인이 성립했다. 이 혼인 성립은 덴쇼 임오의 난 때와 마찬가지로 이에야스에 대해 호조의 후원이 되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던 간토 북부의 영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간토 북부의 영주들은 이에야스로부터 떨어져, 일제히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서장을 보내 히데요시에게 간토의 평안을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22][23] 히데요시도 호조 씨의 평안을 어지럽히는 행위를 문제시했지만,[24] 당시 정권 내에서는 동국에 대한 우선순위가 낮아[25] 10월 말에 이에야스에게 간토의 평안 지연을 질책한 것으로 끝났다.[26] 그것조차도 이듬해 1584년에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가 시작되자 무효화되었다.
1583년 11월 말, 누마지리 전투가 일어나 호조 씨와 간토 북부의 영주들은 전면전에 돌입했다.[27] 1584년이 되자 호조 씨는 우쓰노미야 국에 침공했고, 사타케 씨도 오야마를 공격했다. 양측은 4월부터 7월에 걸쳐 누마지리에서 이와후네 산 사이에서 대치했다.[28]
1585년부터 1587년에 걸쳐 히데요시가 주고쿠 정벌을 진행하는 와중에 간토의 평안은 방치되었고, 간토 북부의 영주들은 곤경에 처했다. 호조 씨는 1585년 1월에 사노 씨를 공격하여 당주 사노 무네쓰나를 전사시키고 우지야스의 아들인 호조 우지타다를 당주로 세우는 데 성공했다. 또한 같은 달까지 다테바야시 성의 나가오 아키나가를 복속시켰다. 다테바야시 시는 간토 남부와 북부의 결절점에 해당하며,[29] 다테바야시 공략으로 호조 씨의 간토 북부 침공이 용이해졌다. 9월에는 사나다 영토인 누마타에 침공했고,[30] 1586년 4월에도 다시 침공했다.[31] 호조 씨는 병행하여 미나가와 씨에도 공격을 가했다. 1586년 5월에 일시적으로 화목했지만, 그 후 다시 침공했다. 미나가와 씨는 우에스기 씨의 지원을 얻어 격퇴에 성공했지만, 1587년에 강화하고 호조 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32] 또한 1585년 윤 8월에는 이에야스가 사나다를 공격하고, 이듬해 1586년에도 다시 침공을 계획했지만, 히데요시가 개입하여 미수에 그쳤다.[33]
1587년 12월, 히데요시는 간토 북부의 영주들에게 호조 씨의 사노 지배를 인정할 것을 통지했고,[34] 현상을 추인할 것을 분명히 했다. 1588년 2월, 호조 우지나오는 가사하라 야스아키를 상락시켜 누마타 영토의 인도를 조건으로[35]도요토미 정권에 복속을 청했다.[36]
기나이 동전을 중요시하고 있던[37] 규슈 정벌을 1587년 중에 끝낸 히데요시는 1588년 4월, 고노에 사키히사의 주라쿠다이 행차를 행했다. 호조 씨에 대해 우지마사·우지나오 부자의 주라쿠다이 행차 참석을 요구받았지만, 우지마사는 이를 거부했다. 교토에서는 호조 토벌의 풍문이 일어나 호조 씨도 임전 태세를 취하게 되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음과 같은 설득을 받았다.
# 이에야스가 호조 부자의 일을 참소하지 않고, 호조 씨의 영토를 전혀 바라지 않는다
# 이번 달 중에 형제들을 파견한다
# 도요토미가에의 출사를 거부하는 경우, 도쿠히메를 이혼시킨다
행차에는 동국의 영주들도 사자를 파견했지만, 호조 씨는 사자를 파견하지 않았다.[38]
5월, 이에야스는 호조 우지마사와 우지나오에게 서장을 보내 우지마사 형제 중 적절한 인물을 상락시키도록 요구했다.[39] 호조 씨는 이에 응하여 8월에는 우지마사의 동생인 호조 우지노리가 명대리로 상락하고, 도요토미-호조 양 세력 간의 긴장은 완화되었다. 또한 12월에는 우지마사가 변명을 위해 상락할 예정임을 전했지만[38] 이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간토 북부의 시모쓰케 국 우쓰노미야 시 주변부에서는 미부 성 및 가누마 성의 미부 요시오가 원래 친 호조였고, 우쓰노미야 가의 중신으로 모카 성 성주인 하가 다카쓰구도 처음에는 주가에 따라 호조에 저항했지만 1589년에 마침내 이에 굴복하고 사노 씨에게 양자를 보내고, 나스 씨에 대해서도 호조 씨 주도적인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호조 씨는 오다와라 개전 시점에는 시모쓰케의 대부분을 세력 하에 두고 있었다. 더욱 히타치 국 남부에도 진출하여 사타케 씨 배후의 오슈의 다테 마사무네와 동맹을 맺는 등, 간토 평야의 제압은 눈앞에 다가왔다. 열세가 된 사타케 요시시게, 우쓰노미야 구니쓰나, 사노 후사쓰나 등 반 호조 측 제후는 히데요시에 가까워지게 된다.
11월 10일, 히데요시는 사노 후사쓰나에게 우지마사가 상락하지 않을 경우, 호조 씨 토벌을 위해 간토로 출병할 것을 전달했다.[41]
한편 같은 해 10월 하순, 호조 씨는 사나다 영지가 된 영분의 거점인 나구루미 성에 누마타 성 성주 이나마타 구니노리를 침공시켜 이를 탈취했는데, 이는 마치 히데요시의 이전 판결을 군사 행동으로 뒤집은 것이었다. (「나구루미 성」항목 내의 「나구루미 성 사건」항목 참조.)
이 사건은 사나다 씨로부터 도쿠가와 씨를 통해 히데요시에게 전달되었다. 호조 측에서는 변명의 사자로 이시마키 야스타카가 상락했고, 도요토미 측에서는 이전 누마타 성 인도와 같은 쓰다 모리쓰키와 후타다 이쓰하쿠가 파견되어 관계자의 인도 및 처벌을 요구했지만, 호조 측은 이를 거부했다. 히데요시는 이 훈서에서 “우지마사의 상락 의향을 받아들여 그동안의 비난을 용서하고, 고즈케 누마타 영지의 지배까지 허락했다. 그런데 이번 나구루미 공격은 히데요시의 판결을 뒤엎는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라고 규탄했다.[42] 이에 대해 우지나오는 늦게 12월 7일 자 서장에서 우지마사 구금이나 호조 씨의 국교의 허황된 설이 있기 때문에 상락할 수 없다는 점과, 이에야스가 신종했을 때 아사히히메와 혼인하고 오만노가타를 인질로 한 뒤 상락하는 후대를 받았던 점을 들면서, 나구루미 성 사건에서의 호조 씨에 대한 태도와의 차이를 지적하고, 구금·국교 없이 마음 편히 상락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또 나구루미 성 사건에 대해서는 우지마사나 우지나오의 명령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사나다 측 나구루미 성주가 호조 측에 투항한 결과이며, “나구루미 성은 사나다 씨로부터 호조 측에 넘어간 성이므로, 애초에 빼앗을 필요도 없고, 전혀 모르는 일이다”, “나구루미 성은 우에스기가 움직였기 때문에 군세를 누마타에 들여놓은 것뿐이다”, “이미 나구루미 성은 사나다 측에 반환했다”고 변명했다.[43]
하지만 같은 시기, 고즈케 국 하지카타 성 성주인 호조 우지쿠니가 시모쓰케 국의 우쓰노미야 구니쓰나를 공격했는데, 이것 또한 히데요시의 다이묘의 사투를 금하는 방책인 총무사령에 위반되는 행위였다.
11월, 히데요시는 관동의 영주들에게 "우지마사가 11월 중에 상락하지 않으면 다음 해 봄에 호조 정벌을 실시한다"고 통지했다.[44][45]
또한, 11월 21일자로 사나다 마사유키에게도 서장을 보내 "앞으로 호조 씨가 출사하더라도, 성을 빼앗은 자를 처벌할 때까지는 호조 씨를 사면하지 않는다", "다음 해 봄(연두)에 출병한다"는 뜻을 적었다.[46]
11월 24일에는 호조 씨와의 절연장을 호조 씨와 여러 다이묘들에게 배포했다. 같은 날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 보낸 서장에서는 다음 해 봄 출진 결정과 진촉을 알리고, 군사 상담을 위해 이에야스의 상락을 요청했다. 또한 쓰다 모리즈키·후타다 이쓰하쿠를 파견하여 이에야스 영내인 스루가 국 누마즈 시의 미시마 역에 재번시켜 군사·병참 기지로서의 준비를 시키고, 호조로부터 온 사자 이시마키 야스타카는 호조 씨의 답변에 따라 국경에서 처형할 것을 요청했다. 이처럼 이에야스에게도 호조 정벌의 의향을 명확히 밝혔고, 다소 호조 씨와 친분이 있던 이에야스의 동향이 주목되었지만, 히데요시와 호조 씨의 중재를 단념한 이에야스는 12월 10일에 상락하여 히데요시에게 동의 의향을 전달하는 동시에 자신도 대 호조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47] 12월 25일에는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상락했다.
또한, 같은 날 히데요시는 호조 씨에게 5개조의 선전포고로 여겨지는 서장을 보냈다.[48] 이 서장은 12월 5일에 사에마바시 성에 도착한 쓰다와 후타에 의해 호조 씨에게 전달되었다.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을 앞두고 각 다이묘에게 서장을 발송했다. 그 서장 속에 "우지나오는 천도의 정리에 등을 돌리고, 제도에 대해 간모를 꾀한다. 어찌 천벌을 면하겠는가······. 결국, 천하, 칙명에 거스르는 자는 빨리 주벌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적고[49], 즉 "천도에 등을 돌리고, 제도에 대해 악다구리를 꾀하며, 칙명에 거스르는 우지나오에게 주벌을 가하기로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우지나오는 12월 17일, 호조 영내의 가신·타국중에 대해 다음 해 1월 15일 오다와라 시로의 참진을 명령했다.
북쪽의 다테 마사무네와 대립하고 있던 사타케 요시시게는 일찍부터 중앙의 오다 씨와 도요토미 씨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다테 씨는 사타케 씨를 사이에 두고 오다와라 호조 씨와 동맹 관계에 있었고, 사타케 씨는 다테 씨를 사이에 두고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친교를 돈독히 하고 있었다.[84] 한편, 간토 북부의 소규모 영주들은 오다와라의 지배하에 들어갈지, 아니면 끝까지 저항하여 멸망의 길을 걸을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사타케 씨는 그러한 영주들을 보호하거나, 혹은 인척 관계를 맺음으로써 반(反)호조 씨 연합을 형성하고 있었다.
전년인 1589년, 스리아게하라 전투의 결과, 사타케 요시시게의 차남인 아시나 요시히로는 다테 마사무네에게 패배하여 아시나 씨는 세력을 잃었고, 무쓰 국 남부의 영주들은 다테 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총무사령을 위반한 것이었고, 도요토미 씨의 출병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남북으로 다테와 호조에 둘러싸인 사타케 씨는 존속의 위기에 놓였다. 시모쓰케 국에서도 호조 씨의 압박이 강해지고, 그 지배하에 들어가는 세력도 많아지고 있었다. 항전한 우쓰노미야 구니쓰나는 1589년 9월에 호조 우지쿠니에게 우쓰노미야 성과 다쿠 성을 공격받았고, 가신들 중에도 호조 씨에게 붙는 자[85]가 나타나는 가운데, 거점을 요새인 다케야마 성으로 옮겨 철저 항전의 자세를 보였지만,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우쓰노미야 공격 또한 도요토미 씨의 총무사령을 위반한 것이었고, 호조 씨 정벌의 명분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도요토미 씨에 의한 오다와라 정벌이 명령되었다.
3. 양측의 군사 준비
1589년(덴쇼 17년) 2월, 호조 우지나오의 가신 이타베오카 고세쓰사이가 상경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누마타성 할양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히데요시는 누마타령의 2/3를 호조 가문에, 1/3을 사나다 가문에 주는, 상당히 양보한 판결을 내렸다.[40] 6월 5일 호조 우지나오는 호조 우지마사가 12월 초순에 상경할 것이라고 전했으나, 이후 나구리성 사건으로 호조 가문은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연락을 중단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셋째 아들 나가마루(후의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인질로 상경시켜 히데요시에게 복종하고 호조 가문과 단교했다.[47]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가문에 영내 군세 통과 시 편의 제공과 영내 여러 성의 사용을 요구했고, 도쿠가와 가문은 2월 중 대규모 군세의 영내 주둔 및 통과를 돕기 위해 성, 다리, 숙소 등을 정비했다.
2월 1일, 도요토미 군 선봉이 출발했고, 도요토미 히데쓰구,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오다 노부카쓰 등이 출진했다. 24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만 군사가 나가쿠보성에 주둔했다.[50]
호조 가문은 오다와라성 농성을 결정하고 1월에 군사 동원령을 내렸다.[48] 15~70세 남자를 징병하고, 대포 주조를 위해 절의 종을 헌납받는 등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오다와라성을 확장 개축하고, 하치오지성, 야마나카성, 니라야마성 등을 보수, 증축했으며, 하코네산 지역을 중심으로 성채를 정비했다.
도요토미 측은 가신 다이묘들의 영지 규모에 따라 병력 부담을 결정했다. 나가쓰카 마사이에에게 쌀과 잡곡 20만 석을 징발하게 하고, 덴쇼오반 1만 장으로 물자를 모았다. 나가소네 모토치카, 우키타 히데이에, 구키 요시타카 등에게 수군을 이끌고 징발 물자를 수송하게 했다. 모리 데루모토에게는 수군을 제공하게 하고, 데루모토 자신은 교토를 지키게 했다.[59]
3. 1. 도요토미 군
도요토미 군은 크게 도카이도를 진군하는 본대와 도산도에서 진군하는 북방대로 나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본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카쓰 등 20만 대군이었고, 마에다 도시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사나다 마사유키 등이 이끄는 북방대는 3만 5천 병력이었다.[59] 여기에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간토 지역 무사들의 1만 8천 병력이 합류했다.[59]1590년(덴쇼 18년) 3월, 히데요시는 고요제이 천황에게서 호조 가문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고 주라쿠다이에서 출진했다.[55][56] 같은 달 15일, 북방대가 우스이 고개로 진군했다. 히데요시는 오미하치만, 가시와바라 숙소, 오가키성, 기요스성, 미카와 요시다성을 거쳐 3월 19일 스루가국 슨푸성에 도착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접을 받았다.[50] 27일, 히데요시는 최전선인 미에이바시 성에 도착했고, 다음 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호조 가문의 야마나카성과 니라야마성을 시찰한 후 나가쿠보성에 들어갔다.[57]
2월 10일, 모리 데루모토의 수군이 아키국 이쓰쿠시마를 출발하여 20일에 하리마국 효고항에 도착했다.[51] 시마국에는 구키 요시타카,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나가소네 모토치카, 우키타씨, 모리씨 등 1천 척이 넘는 도요토미 측 수군이 집결하여 출항했다. 2월 27일, 스루가국 에지리미나토에 도착한 수군은 이즈 나가하마성을 공격했다.[52] 이후 도쿠가와 수군은 서쪽 이즈의 여러 성과 항구를 점령하며 이즈반도를 남하했다.[53][54]
도요토미 군은 나가쓰카 마사이에에게 20만 석의 쌀과 잡곡을 징발하게 하고, 덴쇼오반 1만 장으로 말, 가축, 곡물 등을 모았다. 나가소네 모토치카, 우키타 히데이에, 구키 요시타카 등에게 수군을 이끌고 징발한 물자를 수송하게 했다. 모리 데루모토에게는 수군을 제공하게 하고, 데루모토 자신은 교토를 지키게 했다.[59]
다음은 주요 참전 무장과 병력이다.
구분 | 주요 무장 | 병력 |
---|---|---|
주력 |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카쓰, 가모 우지사토, 구로다 요시타카, 도요토미 히데쓰구, 우키타 히데이에, 호소카와 다다오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이시다 미쓰나리, 가토 기요마사 등 | 약 17만 |
수군 | 나가소네 모토치카,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 와키사카 야스하루, 모리 수군 | 약 1만 |
북방대 | 마에다 도시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사나다 마사유키, 오가사와라 사다요시 등 | 약 3만 5천 |
간토 군 | 사타케 요시노부, 우쓰노미야 구니쓰나, 유키 하루토모, 사토미 요시야스 등 | 1만 8천 |
총계 | 약 21만 |
도요토미 측은 북방대로 호조 가문을 견제하면서 주력 부대로 오다와라성으로 가는 길목의 야마나카성, 니라야마성, 아시가라성을 공격하고, 수군으로 이즈반도를 돌아 오다와라성 앞바다에 전개하여 해상 수송을 차단하는 전략을 세웠다.
3. 2. 호조 군
호조 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항하여 오다와라에서 농성하기로 결정하고, 1월에 군사 동원령을 내렸다.[48]같은 해 10월 하순, 호조 씨는 명호도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는데, 이는 히데요시의 중재를 무시한 행동이었다.[42] 호조 측은 명호도 성주가 스스로 호조 측에 투항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히데요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43]
또한, 호조(후지타) 우지쿠니가 우쓰노미야 쿠니쓰나를 공격한 것도 히데요시의 「총무사령」을 위반한 것이었다.
4.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정(東征)
1590년 3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조 토벌을 명분으로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55][56] 오다와라 정벌의 일환으로, 히데요시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는 동시에, 마에다 도시이에와 우에스기 가게카쓰 등이 이끄는 별동대를 통해 호조 측의 주요 거점들을 공략했다.
이 포위 공격은 "사무라이 역사상 가장 비전통적인 포위 작전"으로 불릴 정도로, 히데요시는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첩, 매춘부, 음악가, 곡예사 등을 동원하여 다양한 오락거리를 제공했다.[2] 수비병들은 갑옷과 신총으로 무장한 채 성벽에서 잠을 자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이와 장기간의 포위로 인해 점차 사기가 저하되었다.
가이 국 출신 광부들이 성벽 아래 땅굴을 파서 이이 나오마사 휘하 병사들이 성 안으로 진입하는 등 소규모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지만,[2] 전투는 주로 전통적인 기근 작전으로 진행되었다. 3개월 후, 이시가키야마 이치야 성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호조 수비군의 저항 의지는 완전히 꺾였고, 결국 항복했다.[3]
한편, 마에다 도시이에와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이끄는 군대는 마쓰이다 성, 미노와 성, 마에바시 성, 마쓰야마 성, 하치가타 성을 차례로 함락하며 간토 지방 남서부로 진격했다.[2] 시즈오카에서는 이세 국의 시모다 요새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해군이 이즈 수군을 격파했고, 이 전투는 나가소카베 모토치카가 이끌었다.[4]
시모사의 호조 동맹이었던 고마군은 혼다 다다카쓰와 도쿠가와 군의 사카이 이에쓰구에게 사쿠라 성을 빼앗겼다. 고마 시게타네는 가문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했고, 고마 씨는 영지를 몰수당했지만 많은 고위 구성원들이 이이 나오마사의 도쿠가와 가신이 되었다.[4] 오시 성 전투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수비군이 오다와라에서 영주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했다.
4. 1. 도요토미 군의 진군
1590년 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케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모았던 기세가와 주변에 주력 부대를 집결시켰다. 3월 27일, 히데요시는 누마즈의 미에하시조에 도착했고, 29일에 오다와라 성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진격을 막는 야마나카 성에는 도요토미 히데쓰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대를, 니라야마 성에는 오다 노부카쓰의 군대를 배치하여 각각 공격을 개시했다.[50]히데요시는 고요제이 천황으로부터 호조 토벌을 명목으로 절도를 받고 주라쿠다이에서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55][56] 오미하치만, 가시와바라 숙소, 오가키 성, 기요스 성, 미카와 요시다 성을 거쳐 3월 19일에 히데요시가 스룬푸 성에 들어가 도쿠가와가 이를 맞이했다.[50] 27일, 히데요시는 최전선인 미에이바시 성에 도착했다. 다음 날 28일, 히데요시는 도쿠가와와 함께 호조 측의 거점인 야마나카 성과 니라야마 성을 멀리서 정찰하고[57] 나가쿠보 성에 들어갔다.
2월 1일 선봉이 출발했고, 같은 달 중에 도요토미 히데쓰구,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오다 노부카쓰 등 여러 다이묘들이 출진하여 24일에 국고에서 출발한 도쿠가와 군 3만이 나가쿠보 성에 주둔했다. 이 나가쿠보 성은 호조 측의 야마나카 성과 10km도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24일에 오다 노부카쓰가 미에이바시 성에 도착했고, 25일에 도쿠가와가 주둔했다.[50] 3월 3일에 도요토미 히데쓰구, 가모 우지사토의 군세가 도착했다.
2월 10일, 모리 데루모토의 수군이 아키 국 이쓰쿠시마를 떠나 20일에는 하리마국 효고 항에 도착했다.[51] 시마 국에 구키 요시타카,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가쓰야스, 나가소네 모토치카, 그 외 우키타씨, 모리씨 등 1천 척이 넘는 도요토미 측 수군이 집결하여 출항했다. 2월 27일에 스루가 국 에지리미나토에 도착했다. 군선뿐만 아니라 수송 임무도 있어 대규모 군세에 의한 장기간의 전투가 예상되었기에 에지리미나토에는 20만 석이 넘는 병량이 운반되었다. 3월에 들어 수군은 히데요시의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이즈나가하마 성을 공략했다. 이후, 서이즈의 방어가 허술하다고 본 도쿠가와 수군은 고하마 가게타카가 도히타카야 성, 야기자와마루야마 성[52]을 점거했고, 무카이 마사쓰나와 혼다 시게쓰구는 안라리 성과 다고 성[53]을 함락시키면서 서이즈의 여러 성과 중요 항구를 빼앗으며 이즈반도를 남하했다. 호조 측은 이즈 남단의 시모다 성을 방어선으로 삼아 수군을 집결시키고 있었고, 서이즈의 여러 성에는 소수의 육전 부대만 배치되어 있었다.[54]
북방(나카센도)에서는 마에다 도시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사나다 마사유키, 이다 야스쿠니 등이 3월 15일에 우스이 고개로 진군했다.
도요토미 측은 나가쓰카 마사이에에게 명하여 쌀과 잡곡 20만 석을 징발하고, 덴쇼오반 1만 장으로 말과 가축, 곡물 등을 모았다. 나가소네 모토치카, 우키타 히데이에, 구키 요시타카 등에게 명하여 수군을 출동시켜 징발한 쌀 등의 수송에 배치했다. 모리 데루모토에게는 수군을 제공하게 했지만, 데루모토 본인에게는 교토 수호를 명하여 후방의 걱정을 없앴다. 도요토미 군은 크게 두 개의 군세로 구성되었다. 도카이도를 진군하는 도요토미 본대와 도쿠가와 군 주력 20만과 도산도에서 진군하는 마에다·우에스기·사나다 군으로 이루어진 북방대 3만 5천이다.[59] 여기에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사타케씨, 마카베씨, 유키씨, 우쓰노미야씨, 오타하라씨, 오제키씨, 사토미씨[60] 등 간토 제후군 1만 8천이 추가되었다.
도요토미 측의 기본적인 전략은 북방대로 견제를 가하면서 주력은 오다와라로 가는 길을 막는 야마나카, 니라야마, 아시가라 세 성을 무력으로 돌파하고, 동시에 수군은 이즈 반도를 순찰하여 오다와라 앞바다에 전개하여 해상 수송을 차단하는 방침이었다.
구분 | 주요 장수 |
---|---|
주력 |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카쓰, 오다 노부카네, 가모 우지사토, 구로다 요시타카, 도요토미 히데쓰구, 도요토미 히데카쓰, 우키타 히데이에, 호소카와 다다오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요시카와 히로이에, 미야베 쓰구루, 호리 히데마사, 이케다 데루마사, 아사노 나가마사, 이시다 미쓰나리, 나가쓰카 마사이에, 다치바나 무네시게, 오타니 요시쓰구, 이시카와 가즈마사, 마스다 나가모리, 다카야마 우콘, 쓰쓰이 사다쓰구, 하치스카 이에마사, 오토모 요시무네, 가토 기요마사(병력만), 후쿠시마 마사노리, 하세가와 히데카즈, 다키가와 우키, 다이바 나가시게, 가네모리 나가치카, 가네모리 요시시게, 교고쿠 다카쓰구 (약 17만) |
수군 | 나가소네 모토치카,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 와키사카 야스하루, 스가 다쓰나가, 모리 수군 (약 1만) |
북방대 | 마에다 도시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사나다 마사유키, 오가사와라 사다요시, (이다 야스쿠니(마쓰다이라 야스쿠니)), 모리 히데요리, 사노 부쓰나 (약 3만 5천) |
간토군 | 사타케 요시노부, 사타케 요시시게, 우쓰노미야 구니쓰나, 유키 하루토모, 다가야 시게쓰네, 사토미 요시야스 (1만 8천) |
총계 | 약 21만 |
4. 2. 도요토미 군의 호조 측 성 공략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성을 함락하는 것 외에도, 마에다 도시이에와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이끄는 군대를 통해 호조의 외곽 거점들을 공략했다. 이 군대는 마쓰이다 성, 미노와 성, 마에바시 성, 마쓰야마 성, 하치가타 성을 차례로 함락한 후, 간토 지방 남서부에 있는 하치오지 성과 시즈오카에 도착했다.[2] 이세 국의 시모다 요새 전투에서는 히데요시의 해군이 이즈 수군을 물리쳤고, 나가소카베 모토치카가 이끌었다.[4]시모사의 호조 동맹인 고마군은 혼다 다다카쓰와 도쿠가와 군의 사카이 이에쓰구에게 사쿠라 성을 빼앗겼다. 고마 시게타네는 가문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했고, 고마 씨는 영지를 몰수당했지만 많은 고위 구성원들이 이이 나오마사의 도쿠가와 가신이 되었다.[4] 오시 성 전투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수비군이 오다와라에서 영주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했다.
북조 씨는 오다와라에서 농성하기로 결정하고 1월에 군사 동원령을 내렸다.[48]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셋째 아들 나가마루(후의 가쓰히데)를 인질로 상락시켜 히데요시에게 복속하고 북조 씨와 단교하는 태세를 보이며 선봉 부대를 출진시켰다.[47]
2월 1일 선봉이 출발했고, 도요토미 히데쓰구,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오다 노부카쓰 등 각 다이묘가 출진하여 24일에 도쿠가와 군 3만이 나가쿠보 성에 주둔했다. 3월 3일에는 도요토미 히데쓰구, 가모 우지사토의 군세가 도착했다.
2월 10일, 모리 데루모토의 수군이 아키 국 이쓰쿠시마를 떠나 20일에 하리마 국 효고 항에 도착했다.[51] 시마 국에 구키 요시타카, 와키사카 야스하루, 가토 가쓰야스, 나가소카베 모토치카 등 1천 척이 넘는 도요토미 측 수군이 집결하여 출항했다. 2월 27일, 스루가 국에지리미나토에 도착했다. 3월, 수군은 히데요시를 기다리지 않고 이즈나가하마 성을 공략했다. 서이즈 방어가 허술하다고 본 도쿠가와 수군은 고하마 가게타카가 도히타카야 성, 야기자와마루야마 성[52]을 점거했고, 무카이 마사쓰나와 혼다 시게쓰구는 안라리 성과 다고 성[53]을 함락시키며 이즈반도를 남하했다. 북조 측은 시모다 성을 방어선으로 삼고 수군을 집결시켰고, 서이즈 성에는 소수 육전 부대만 배치했다.[54]
3월 1일, 히데요시는 고요제이 천황에게서 북조 씨 토벌 명목으로 절도를 받고 주라쿠다이에서 출진했다.[55][56] 북방(주센도)에서는 북국 세력(마에다 도시이에·우에스기 가게카쓰·사나다 마사유키·이다 야스쿠니)들이 3월 15일에 우스이 고개로 진군했다.
오미하치만, 가시와바라주쿠, 오가키 성, 기요스 성, 미카와 요시다 성을 거쳐 3월 19일 히데요시가 스룬푸 성에 들어가 도쿠가와가 맞이했다.[50] 27일, 히데요시는 최전선 미에이바시 성에 도착했다. 28일, 히데요시는 도쿠가와와 함께 야마나카 성, 니라야마 성을 시찰하고[57] 나가쿠보 성에 들어갔다. 28일, 북방에서는 마쓰이다 성 공격이 시작되었고, 29일에는 하코네에서 야마나카 성이 공격받아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
마쓰이다 성과 다테바야시 성 등에 수천 명의 병력이 배치된 것을 보면, 오다와라·하코네 서방뿐 아니라 북방 침입 군대를 맞는 성에도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59]
; 도요토미 측 주요 장병
구분 | 주요 장수 |
---|---|
주력 |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카쓰, 오다 노부카네, 가모 우지사토, 구로다 요시타카, 도요토미 히데쓰구, 도요토미 히데카쓰, 우키타 히데이에, 호소카와 다다오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요시카와 히로이에, 미야베 쓰구루, 호리 히데마사, 이케다 데루마사, 아사노 나가마사, 이시다 미쓰나리, 나가쓰카 마사이에, 다치바나 무네시게, 오타니 요시쓰구, 이시카와 가즈마사, 마스다 나가모리, 다카야마 우콘, 쓰쓰이 사다쓰구, 하치스카 이에마사, 오토모 요시무네, 가토 기요마사(병력만), 후쿠시마 마사노리, 하세가와 히데카즈, 다키가와 우키, 다이바 나가시게, 가나모리 나가치카, 가나모리 요시시게, 교고쿠 다카쓰구 (약 17만) |
수군 | 나가소카베 모토치카,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 와키사카 야스하루, 스가 다쓰나가, 모리 수군 (약 1만) |
북방대 | 마에다 도시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사나다 마사유키, 오가사와라 사다요시, (이다 야스쿠니(마쓰다이라 야스쿠니)), 모리 히데요리, 사노 부쓰나 (약 3만 5천) |
관동군 | 사타케 요시노부, 사타케 요시시게, 우쓰노미야 구니쓰나, 유키 하루토모, 다가야 시게쓰네, 사토미 요시야스 (1만 8천) |
총계 | 약 21만 |
; 후호조 측 주요 장수
구분 | 주요 장수 |
---|---|
오다와라 성 | 호조 우지나오, 호조 우지마사, 호조 우지테루, 오타 우지후사, 지바 나오시게, 사노 우지타다, 호조 우지미쓰, 호조 우지타카, 호조 나오사다, 이세 사다하루, 하가와 야스다다, 마쓰다 노리히데, 마쓰다 야스무라, 가사하라 마사하루, 가사하라 마사타카, 오도지 나오시게, 우에다 노리사다, 난조 시게나가, 야마카쿠 사다카쓰, 야마카쿠 야스사다, 스즈키 시게노부(다이가쿠), 이토 마사요, 가지와라 가게무네, 유라 구니시게, 나가오 아키나가, 나리타 우지나가, 나리타 야스타다, 나리타 나가타다, 시미즈 마사카쓰, 미부 요시오, 기라 씨 아사(기타미 가쓰타다), 지바 시게타네, 사카이 야스하루, 사카이 마사타쓰, 나이토 나오유키(나이토 쓰나히데 자식), 와다 노부나리, 오바타 노부사다, 호조 야스타네, 호조 우지스케, 미우라 죠신, 시오타 스케타다, 도미오카 히데나가, 다카조리 다네노리, 다카조리 다네토모, 소마 하루타네, 다카이 다네나가, 오가사와라 야스히로, 오가사와라 나가후사, 사쿠마 야스마사, 사쿠마 가쓰유키, 오고 다카시게, 이다 고레마사, 시라쿠라 시게이에 |
기타 성 | 마쓰다 야스나가(야마나카 성), 나리타 야스스에(시노부 성), 호조 우지노리, 에가와 에이키치(니라야마 성), 오도지 마사시게(마쓰이다 성), 호조 우지쿠니(하치가타 성), 하가와 야스다다(우마야바시 성), 시미즈 야스히데(시모다 성) |
4. 2. 1. 야마나카성 전투
1590년 3월 29일 아침,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이끄는 도요토미군은 야마나카성을 공격했다. 야마나카성은 마쓰다 야스나가가 성주로 있었으며, 호조 우지카쓰 등의 원군을 포함하여 약 4,000명의 병력이 방어하고 있었다.[61]도요토미군은 총 67,800명으로, 히데쓰구를 중심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대도 참여했다.[61] 공격은 다이사키 데마루에 집중되었고, 마미야 야스토시가 이끄는 수비군은 맹렬히 저항했으나 결국 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치야나오 나오스에가 전사하는 등 도요토미 측에도 피해가 있었다.
구분 | 병력 | 주요 인물 |
---|---|---|
우군 | 18,300명 | 이케다 데루마사, 키무라 시게스케, 하세가와 슈이치, 호리 히데마사, 니와 나가시게 |
중군 | 19,500명 | 도요토미 히데쓰구, 나카무라 카즈우지, 키무라 시게스케, 이치야나오 나오스에, 하시바 히데카쓰 |
좌군 | 30,000명 | 도쿠가와 이에야스 |
예비 | - | 야마우치 카토요, 호리오 요스하루 |
기타 | - | 와타나베 스스무, 오사키 나가유키, 이나바 마사나리, 센가쿠 히데히사 |
주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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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 야스나가(성주) |
호조 우지카쓰, 호조 나오시게, 호조 시게히로 (원군) |
마미야 야스토시, 마미야 노부토시, 마미야 나오모토, 마쓰다 야스무네, 카게야마 우지히로, 유키타 나오키요, 아사쿠라 모토하루, 타메 나가사다, 하세가와 킨히데, 오이누마 우지마사, 우츠키 야스토모 |
성의 각 부분이 차례로 함락되면서, 마쓰다 야스나가는 호조 우지카쓰 형제 등을 탈출시키고 남은 병력과 함께 최후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오전 중에 성은 함락되었다. 마쓰다 야스나가를 비롯한 많은 수비군이 전사했다.[63] 히데요시는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보낸 서장에서 호조 측 전사자가 약 2천 명이라고 언급했다.[64]
야마나카성의 함락은 오다와라 호조씨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같은 날, 도쿠가와 군은 다카노스 성을 함락시켰고, 다음 날에는 아시가라 성이 함락되었다. 가와무라 성 등 주변의 작은 성들도 함락되거나 버려지면서, 오다와라성 서쪽 지역은 도요토미 측의 세력권이 되었다.
4. 2. 2. 니라야마성 전투
1590년 3월 29일부터 6월 24일까지 니라야마성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을 위해 오다와라 성을 함락하는 것 외에도, 호조 가문의 외곽 거점들을 공략했는데, 시즈오카현에 위치한 니라야마성도 그 중 하나였다.도요토미 군은 44,100명, 호조 군은 3,640명으로 병력 차이가 컸다.
호조 측은 히데요시의 공격에 대비하여 15세에서 70세 사이의 남자들을 징병하고, 대포 주조를 위해 절의 종을 헌납하게 하는 등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59] 또한, 오다와라성을 확장 개축하고, 하치오지 성, 야마나카 성, 니라야마 성 등을 보수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신들에게 영지의 석고에 상응하는 병력을 부담하게 하고, 나가쓰카 마사이에에게 쌀과 잡곡 20만 석을 징발하게 했다. 나가소네 모토치카, 우키타 히데이에, 구키 요시타카 등에게 수군을 출동시켜 징발한 물자를 수송하게 했다.[59]
도요토미 군은 크게 두 개의 군세로 나뉘었다. 도카이도를 통해 진군하는 도요토미 본대와 도쿠가와 군 주력 20만 명, 도산도에서 진군하는 마에다·우에스기·사나다 군 3만 5천 명이었다.[59] 여기에 히데요시에게 항복한 사타케 씨, 마카베 씨, 유키 씨, 우쓰노미야 씨, 오타하라 씨, 오제키 씨, 사토미 씨[60] 등 간토 제후군 1만 8천 명이 추가되었다.[59]
호조 측은 주력군을 오다와라성에 집결시키고, 정예병을 야마나카, 니라야마, 아시가라 성에 배치했다. 그러나 각 성의 유수 부대는 평소 병력에 포함되지 않는 징병된 노장년 남성들로 구성되어 방어 능력이 부족했다. 호조 우지쿠니, 우지테루 등은 야전을 주장했지만, 우지노리와 마쓰다 노리히데 등은 농성책을 주장했다. 결국 오다와라 농성 전략이 채택되었다.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오가사와라 단바를 사자로 보내 개성 협상을 시도했지만, 우지노리는 거절했다. 오가사와라는 함부로 공격을 시작했다가 에가와 히데요시에게 격퇴당하고 전사했다.
히데요시는 니라야마성 포위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오다 노부카쓰 이하 주력은 오다와라 방면으로 전진시켰다. 우지노리는 4개월 이상 농성했지만,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와 구로다 다카타케를 통해 호조 측의 불리한 상황을 전달하며 설득하자 항복했다. 6월 24일, 이에야스의 가신 나이토 노부나리가 성을 접수했다.
우지노리는 이후 오다와라 개성을 위한 설득 활동에 힘썼다. 에가와 히데요시의 아들 에가와 히데나가는 개전 직전 도주하여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했고, 개성 협상에 참여했다.
당시 사무라이들은 첩, 매춘부, 음악가, 곡예사 등과 함께 전투를 즐겼고, 수비병들은 신총과 갑옷을 착용한 채 성벽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이는 "사무라이 역사상 가장 비전통적인 포위 작전"으로 불린다.[2] 가이 국의 광부들이 성벽 아래를 파서 이이 나오마사 휘하의 병사들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 경우와 같이, 성 주변에서 소규모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2]
3개월 후, 이시가키야마 이치야 성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호조 수비군의 저항 의지가 꺾였고, 결국 항복했다.[3]
4. 2. 3. 시모다성 전투
下田城の戦い|시모다 성 전투일본어는 이즈의 시모다 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투이다. 히데요시의 해군은 이즈 수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는 나가소카베 모토치카가 이끌었다.[4]4. 2. 4. 다마나와성 전투

앞서 야마나카 성 함락 당시 탈출하여 도망친 호조 우지카쓰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자결하려 했으나, 가신 아사쿠라 가게스미(朝倉景澄)와 아우인 지바 나오시게(千葉直重), 호조 시게히로(北条繁広) 등에게 설득되어, 700기의 병력을 이끌고 거성인 옥정성으로 돌아와 농성했다. 이때 오다와라 성 북쪽을 우회하는 길로 옥정성에 돌아왔기 때문에, 오다와라성 농성군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고 합류하지 않아 호조 우지마사에게 의심을 받았다.[4]
그 후, 도쿠가와 휘하의 혼다 타다카쓰 등을 중심으로 한 군대에 성을 포위당했지만, 별다른 저항 없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자(使者)인 쓰즈키 히데쓰나(都築秀綱), 마쓰시타 사부로자에몬(松下三郎左衛門)과 성 아래 다이오우지(大応寺)(현 류호우지(龍寶寺)) 주지인 료타쓰(良達)의 설득에 응하여, 4월 21일에 항복하고 성문을 열었다. 성을 넘겨준 후에는 도쿠가와씨와 후루타 시게타다(古田重然), 세타 마사타다(瀬田正忠) 등이 수비하였다. 이후 우지카쓰는 도요토미 측으로서, 시모우사 지방의 호조 측 성의 무혈 개성에 힘썼다.[4]
4. 2. 5. 오다와라성 포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규모 군대가 오다와라성을 포위했는데, 이는 "사무라이 역사상 가장 비전통적인 포위 작전"으로 불렸다. 사무라이들은 첩, 매춘부, 음악가부터 곡예사, 불장난꾼, 저글링까지 모든 것으로 즐거움을 얻었다. 수비병들은 성벽에서 신총과 갑옷을 착용하고 잠을 잤다.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히데요시가 공격하는 것을 단념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 포위 공격은 대부분 전통적인 기근 작전으로 이루어졌다. 가이 국의 광부들이 성벽 아래를 파서 이이 나오마사 휘하의 병사들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 경우와 같이, 성 주변에서 소규모의 작은 충돌만 발생했다.[2]3개월 후, 이시가키야마 이치야 성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호조 수비군의 저항 의지를 꺾었고, 그들은 항복했다.[3]

6월 26일, 오다와라성을 내려다보는 이시가키야마(石垣山)에 관동 최초의 근세 성곽의 위용을 자랑하는 「일야성(一夜城)(이시가키야마성(石垣山城))」이 완성된 것도 호조 씨 측에 타격을 주었다. 성 안에서는 호조 씨 일족·중신들이 도요토미군과 철저 항전할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이러한 인상이 후세에 강해져, 원래는 「평시에 한 달에 2회 정도 행해졌던 호조 씨의 정례적인 시정 방침 중신 회의」를 가리키는 것이었던 「오다와라 텟테이(小田原評定)」이라는 말이 「결론이 나지 않는 회의나 평의」라는 의미의 고사로 사용되게 되었다. 또 도요토미 측은 이 무렵 성을 정신적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밤중에 포위군 전군이 성을 향해 철포 일제 사격을 했다는 이야기도 남아있다.
7월 2일, 오타 우지후사 세력의 히로사와 시게노부가 가모 우지사토, 세키 카즈마사, 오다 노부카쓰의 진영에 야습을 가했다. 마지막 의지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던 가모 진영은 일단 혼란에 빠졌지만, 스스로 창을 든 우지사토나 가모 고카(蒲生郷可), 타마루 나오마사(田丸直昌), 마치노 유키토모(町野幸知), 가모 고카(蒲生郷可), 가모 고지(蒲生郷治), 츠쿠다 마타에몬(佃又右衛門) 등 주종은 분전하여 히로사와를 놓쳤지만 이를 물리쳤다. 이때 일군의 대장이었던 우지사토의 갑옷과 투구, 창에는 격전에서 입은 상처가 많이 새겨져 있다고 전해진다.
7월 5일, 호조 우지나오와 오타 우지후사는 타키가와 유토시의 진영으로 향해, 타키가와와 구로다 다카타카를 통해 자결을 대가로 성병을 구할 것을 요청했고, 히데요시에게 우지나오의 항복이 전해졌다.[107]
4. 2. 6. 북방 부대의 간토 평야 침입 및 제압
1590년 3월 28일부터 4월 20일까지, 마에다 도시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사나다 마사유키 등이 이끄는 북방대는 우스이 고개를 넘어 간토 평야·우에노국에 침공하려 했다. 마쓰이다 성 성주이자 북조씨의 중신이었던 오오도지 마사시게는 이를 우스이산에서 격퇴하려 했지만, 사나다 노부유키 부대에 의해 저지당하고, 마쓰이다 성으로 후퇴하여 농성했다.북방대는 마쓰이다 성 공략에 착수했다. 3월 20일에 총공격이 있었지만, 수비하는 오오도지 측은 이를 막았다. 북방대는 성을 포위하고 주변 지역에 방화하며 성채를 깎아내리듯 공격을 계속했지만, 성 측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공성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결국 북방대는 마쓰이다 성을 포위한 채 주변 성채를 공략했다. 4월 22일, 마침내 항복하고 개성하였다. 이후 마사시게는 북방대의 안내를 하게 되었다.
그 무렵 북방대는 4월 17일경 구니미네 성, 미야자키 성 등의 여러 성, 마에바시 성(4월 19일), 미노와 성(4월 24일), 시라이 성(5월 15일) 무사시 마쓰야마 성(5월 22일), 그 외 니시마키 성, 이시쿠라 성, 간다 금산성, 오고 성, 시라쿠라 성(아사바 성, 니이야 성), 신보리 성 등 상모·무사시국 북서부의 각 성을 개성 또는 함락시켰다.
마쓰야마 성에서는 당주 우에다 노리사다가 주력을 이끌고 오다와라 성에 있었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야마다 나오야스 이하, 난바다 노리쓰구나 가네코 이에모토, 키로코 토모노리, 와카바야시 나오모리 등 약 2300명이 마쓰야마 성에 농성했지만, 마에다 도시이에·사나다 마사유키·우에스기 가게카쓰 등에게 포위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항복, 개성했다. 항복한 3000여 기병은 마에다 군의 선봉에 가세하여, 하치오지 성 공격에 참가했다.
4월 말에 마에다 도시이에는 항복한 다이도지 마사시게 부자를 동반하여 오다와라 포위 중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 참진했다. 그 귀로 다이도지 마사시게는 자성인 가와고에 성에 개성 권고를 하였다. 가와고에 성의 본래 수성장은 앞서 마쓰이다 성에서 항복한 다이도지 마사시게이며, 성은 마사시게의 아들(양자)인 다이도지 나오히데가 다이도지 씨의 집을 지키는 수비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지만, 마사시게의 항복을 받는 형태로 가와고에 성도 항복, 개성하여 마에다 군이 입성했다.

4. 2. 7. 하치가타성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성을 함락하는 것 외에도, 마에다 도시이에와 우에스기 가게카츠가 이끄는 군대를 통해 호조 가문의 외곽 거점들을 공략했다. 이 군대는 마쓰이다 성, 미노와 성, 마에바시 성, 마쓰야마 성, 하치가타 성을 차례로 함락했다.[2]이시가키야마 이치야 성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면서 3개월 후 호조 수비군의 저항 의지가 꺾였고, 그들은 항복했다.[3]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규모 군대는 하치가타 성을 포위했는데, 이는 "사무라이 역사상 가장 비전통적인 포위 작전"으로 불렸다. 사무라이들은 첩, 매춘부, 음악가부터 곡예사, 불장난꾼, 저글링까지 모든 것으로 즐거움을 얻었다. 수비병들은 성벽에서 신총과 갑옷을 착용하고 잠을 잤다.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히데요시가 공격하는 것을 단념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 포위 공격은 대부분 전통적인 기근 작전으로 이루어졌다. 가이 국의 광부들이 성벽 아래를 파서 이이 나오마사 휘하의 병사들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 경우처럼, 성 주변에서 소규모의 작은 충돌만 발생했다.[2]
4. 2. 8. 다테바야시성, 시노부성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성 함락 외에도, 마에다 도시이에와 우에스기 가게카츠 등이 이끄는 군대를 통해 호조의 외곽 거점들을 공략했다. 이 군대는 마쓰이다 성, 미노와 성, 마에바시 성, 마쓰야마 성, 하치가타 성을 차례로 함락한 후, 간토 지방 남서부에 있는 하치오지 성과 시즈오카에 도착했다.[3]마쓰이다성에는 오오도지 마사시게가 이끄는 수천 명의 병력이, 다테바야시 성 등에도 같은 정도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59]
1590년 5월 19일부터 22일까지 이와쓰키성(岩付城)에서 전투가 벌어졌다.[62] 이와쓰키성은 성주 호죠 우지후사(오타 우지후사)가 다가올 도요토미군의 습격에 대비하여 성을 둘러싼 해자(총구조)를 새로 건설해 방어력을 높여두었다. 그러나 우지후사 이하 주력은 오다와라성에 농성했기 때문에 전력이 부족했고, 가로인 다테 후사자네(伊達房実)의 지휘 아래 격전이 벌어졌지만, 양측의 전력 차이는 컸다. 19일에 총구조가 무너졌다. 공격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하치가타성 공격에 곧바로 착수하라는 거듭되는 독촉을 받았기 때문에, 단기결전을 위해 화공과 강공으로 압박했다. 그 결과, 농성측은 병사의 거의 절반인 1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후 항복했다.[62]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와츠키의 병사는 모두 죽이고, 여자아이들은 모두 연행하라"고 지시했지만, 책임자인 아사노 나가마사는 살아남은 자들과 여자아이들을 구명하여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아사노 나가마사는 이 명령 불복종에 대해 히데요시로부터 질책을 받았다.[62]
사료에 따라서는 본마루가 항복했을 때 비전투원만 생존해 있었고, 다테 후사자네(伊達房実) 이하 전투원은 모두 사망했다고도 한다.[82] 호죠 우지마사의 여동생인 쵸린인이 성내 비전투원을 지휘하고 고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개성 후, 구명된 비전투원 중에 쵸린인과 오타 우지후사의 부인(코쇼쇼)이 있었지만, 이들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83] 오다와라 정벌이 시작되기 전에 구금되어 있던 이시마키 야스토시가 파견되어 두 사람을 보호했다.
개성 후 후쿠하라 나가타카(福原長堯)가 파견되어 전후 처리와 유수를 맡았다.
- 이와쓰키성 전투 양측 주요 장수 및 병력
공격군 (도요토미 측) | 수비군 (호조 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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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9. 하치오지성 전투
덴쇼 18년(1590년) 6월 23일에 벌어진 하치오지 성 전투는 오다와라 정벌의 일환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측이 호조 우지테루가 성주로 있던 하치오지 성을 공격한 전투이다.- 공격군 (도요토미 측): 총 15,000명
지휘관 | 병력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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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스기 가게카쓰 | 후지타 신키치 등 |
마에다 도시이에 | 아오키 노부아키, 아라키 젠타유 등 |
마에다 도시나가 | |
키무라 시게쓰구 | |
사나다 마사유키 | |
야마자키 가타이에 | |
옛 호조 굴복 장수 | 다이도지 마사시게, 마쓰야마 성 굴복 장수 (우에다 씨, 야마다 나오야스, 난바타 겐지, 가네코 씨, 히로코 도모노리, 와카바야시 나오모리 등), 오바타 무리 (당주는 오다와라 성에 농성 중) |
- 수비군 (호조 측): 성주 호조 우지테루의 부하 및 주민 총 3,000명
당시 하치오지 성은 성주 우지테루가 오다와라 성에 있었기 때문에 성대(城代) 요코치 간모, 가신 가리노 이치안, 나카야마 이에노리, 곤도 쓰네히데, 세쓰라 씨 및 인근 농민, 부녀자 등 약 3,000명이 농성하고 있었다.[4]
도요토미 군은 전날 밤부터 성의 정문(大手)과 후문(搦手) 양쪽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새벽에는 요새 지역까지 수비대를 몰아넣었다. 격전으로 인해 공격 측도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며 공격이 잠시 멈추기도 했다. 그러나 우에스기 가게카쓰 휘하에 있던 후지타 신키치의 가신 히라이 무심이 이 지역 지리에 밝아 샛길을 안내했고, 이 후문 쪽 별동대의 기습이 성공하여 그날 안에 성은 함락되었다.[4]
호조 우지테루의 정실 비사를 비롯한 성 안의 부녀자들은 자결하거나 오슈덴의 폭포에 몸을 던졌고, 폭포는 사흘 밤낮으로 피로 물들었다고 전해진다.[4] 포로로 잡힌 장병들의 목은 오다와라 성으로 보내져 배에 싣거나 성문 근처에 내걸려 오다와라 성 수비병들에게 하치오지 성 함락의 현실을 보여주며 조기 항복을 압박하는 데 사용되었다.[4]
성대 요코치 간모 이하의 잔병들은 탈출하여 히라야마 우지시게가 지키는 히와라 성으로 향했다. 히와라 성은 산간부에 위치하여 히라야마 우지시게 등이 분전했지만, 마에다 도시이에와 우에스기 가게카쓰 등의 대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7월 12일에 함락되었다. 우지시게 등 히라야마 일족은 성 아래에서 자결했다. 오다와라 성은 이미 항복한 상태였지만, 히와라 성에는 이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4]
하치오지 성에는 함락 이후 마에다 군과 우에스기 군이 주둔했다.
4. 3. 간토 제후들의 동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당시 간토 지방의 여러 호족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선택을 했다. 크게 호조 측과 도요토미 측으로 나뉘어 대립했으며, 일부는 중립을 지켰다.
- 호조 측:
- 호조(후지타) 우지쿠니: 하지가타 성주로서 시모쓰케 국의 우쓰노미야 쿠니쓰나를 공격하는 등 총무사령을 위반했다.
- 오다와라 성 농성: 호조 우지나오, 호조 우지마사를 비롯한 호조 일족과 주요 가신들은 오다와라 성에 집결하여 농성전을 준비했다. 지바 나오시게, 사노 우지타다 등 간토 각지의 호족들도 이에 참여했다.
- 각 성의 저항: 야마나카성의 마쓰다 야스나가, 니라야마성의 호조 우지노리 등 주요 거점에서도 호조 측이 저항했으나, 병력 부족으로 대부분 함락되었다.
- 유라쿠니시게(由良国繁): 키류성(桐生城)을 묘인니(妙印尼)가 방어하고, 마쓰이다성(松井田城) 공격에 참여하여 유라(由良) 씨는 멸족을 면했다.[98]
- 고가 공방(古河公方): 실질적인 여당주인 아시카가 시히메(足利氏姫)는 중립을 지켰으나, 가신단은 호조 씨 계통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99]
- 기라씨: 당주 기라 시토모(吉良氏朝)가 오다와라 성에 농성하여 영지를 몰수당하고, 세타가야성(世田谷城) 등이 폐성되었다.
- 도요토미 측:
- 사타케씨: 다테 마사무네와 대립하며 오다 씨, 도요토미 씨와 연락했다. 스리카미하라 전투에서 아시나 요시히로가 패배한 후, 총무사령 위반을 이유로 도요토미 씨의 출병 명분을 제공했다.
- 반(反)호조 씨 연합: 우쓰노미야 쿠니쓰나, 유키 하루토모 등은 사타케 씨와 연합하여 호조 씨에 저항했다. 이들은 호조 측 성들을 함락시키고,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 사노 씨: 사노 후쓰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간토 각국의 지도를 가토 기요마사에게 제출했다.
- 오타 스케마사: 사타케 씨에게 보호받고 있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하고 공을 세웠으나 옛 영지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 나스 씨: 나스 스케하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참진 명령을 따르지 않아 영지를 몰수당했으나, 오타와라 하루키요의 노력으로 나스 스케카게에게 5천 석이 주어졌다.[97]
- 리미씨(里見氏): 리미 요시야스(里見義康)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진 명령을 받고 미우라 반도(三浦半島)에 상륙, 가마쿠라(鎌倉)로 진군하여 독자적인 금제를 발표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중재로 사면되었다.
- 기타:
- 다테 마사무네: 총무사령 위반을 이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속했다. 아시나 씨를 멸망시킨 것은 부모의 원수를 갚은 것이라고 변명하여 본령을 안도받았으나, 아시나 씨의 영지는 몰수당했다.
이처럼 간토 제후들은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각자의 선택을 했으며, 그 결과는 오다와라 정벌 이후 간토 지역의 세력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5. 오다와라 개성
6월 23일 하치오지성(八王子城)이 함락되면서, 성 안에서 발견된 수많은 시신과 성 밖에 전시된 장병들의 처자식 시신은 후호죠 씨 측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100]
6월 14일 하치가타성의 호조 우지쿠니가 출가 형식으로 개성하고, 6월 24일에는 이즈의 니라야마성이 개성되어 호조 우지노리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했다.[100] 같은 날, 역시 개성했다.[100]
6월 24일, 구로다 다카타카와 오다 노부오의 가신 타키가와 유토시(滝川雄利)가 오다와라성에 들어가 항복을 권고했고, 먼저 항복한 우지노리도 성에 들어가 항복을 설득했다.[100]
6월 26일, 오다와라성을 내려다보는 이시가키야마(石垣山)에 관동 최초의 근세 성곽인 「일야성(一夜城)」이 완성되어 후호죠 씨 측에 큰 충격을 주었다.[100] 성 안에서는 후호죠 씨 일족과 중신들이 도요토미군과의 항전 또는 항복을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100] 이러한 상황은 후세에 「오다와라 텟테이(小田原評定)」이라는, 결론이 나지 않는 회의를 뜻하는 고사성어로 남게 되었다.[100]
7월 2일, 오타 우지후사 군 소속 히로사와 시게노부가 가모 우지사토·세키 카즈마사와 오다 노부오의 진영에 야습을 감행했다.[103] 예상치 못한 공격에 가모 진영은 혼란에 빠졌으나, 우지사토 등이 분전하여 히로사와를 격퇴했다.[104]
7월 5일, 호조 우지나오와 오타 우지후사는 타키가와 유토시에게 자결을 조건으로 성병들의 목숨을 구걸했고, 히데요시에게 우지나오의 항복 의사가 전달되었다.[107]
6. 전후 처리
호조 우지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에 맞서 오다와라를 지키지 못하고 함락당했다. 이후 우지마사는 그의 형제 우지테루와 함께 할복을 강요당했다.[5] 히데요시의 최고 장군 중 한 명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호조 가문의 영지를 하사받았다. 히데요시는 당시에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것은 도쿠가와의 정복 시도와 쇼군 자리에 오르는 데 큰 디딤돌이 되었다. 다도 명인 야마노우에 소지는 오다와라 영주를 섬겼으나, 고문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7월 5일, 다키가와 유토리(滝川雄利)의 진영에 간 우지나오는 자신의 할복으로 성병(城兵) 모두의 사면을 간청했으나, 사면은 허락되었지만 할복은 보류되었다.
초기의 개성(開城)·항복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 호조씨(北条氏)는 무사시·사가미·이즈만을 영지로 한다.
# 우지나오(氏直)를 상락(上洛)시킨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전 당주인 우지마사(氏政)와 일가중(御一家衆)의 수장으로서 우지테루(氏照), 그리고 가중(家中)을 대표하는 원로인 마쓰다 노리히데와 오오도지 마사시게에게 개전의 책임이 있다 하여 이 네 사람에게 할복을 명령했다.[107]
7월 7일부터 9일까지 가타기리 가쓰모토와 와키사카 야스하루,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3인을 검사(檢使)로 하여 오다와라성(小田原城) 인수에 임하게 했다. 7월 10일, 우지마사(氏政)와 우지테루(氏照)는 오다와라성(小田原城)을 나와 도쿠가와(徳川)의 진영에 들어갔다. 7월 11일, 성하(城下)의 의사 다무라 안슈(田村安栖)의 저택에서, 이시카와 사다키요·마키다 히로사다·사사 마사치카·호리타 가즈쓰구·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의 검시역(檢視役)이 지켜보는 가운데, 형제인 우지노리(氏規)의 개착(介錯)으로 할복했다. 우지노리는 형제의 자살 후, 스스로도 추이복(追腹)을 자르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고도 전해진다. 우지나오(氏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위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고, 고야산에 은거(蟄居)를 명령받았다. 7월 21일, 우지나오(氏直)는 가신들 30명 정도를 데리고 출발했고[109], 8월 12일에 고야산(高野山)에 들어갔다. 은거 중인 우지나오(氏直)는 후타다 이쓰하쿠(富田一白)와 쓰다 모리즈키(津田盛月)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사면의 중재를 요청했다. 이듬해 2월에는 벌써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통해 사면의 명령이 전해졌고, 5월 상순에는 오사카에서 옛 오다 노부나가 저택[110]을 하사받았고, 8월에는 1만 석이 주어졌다. 그러나 11월에 병사했다. 호조씨(北条氏)는 우지노리(氏規)의 자손이 우여곡절 끝에 가와치·사야마번의 다이묘로서 도요토미·도쿠가와 시대를 거쳐 존속했다. 우지마사(氏政)와 우지테루(氏照)의 목은 16일에 교토로 보내져, 주라쿠다이의 다리에 내걸렸다.[55] 5일에 마쓰다 노리히데가, 19일에 오오도지 마사시게가 각각 할복했다.
한편, 오다와라성 개성 후에도 저항을 계속했던 시노비성에 대해서는, 성주인 나리타 우지나가의 오다와라성(小田原城)에서의 항복을 받아 우지나가(氏長) 명의의 사자가 보내져, 7월 16일에 개성했다. 그 후, 우지나가(氏長)의 딸인 가이히메가 히데요시(秀吉)의 측실이 되어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우지나가(氏長)에게 시모쓰케국우야마 2만 석이 주어졌다. 후카야 우에스기씨의 본거지였던 후카야성은, 당주인 우에스기 우지노리(上杉氏憲)가 호조(北条)에 편을 들고 오다와라(小田原)에 머물렀기 때문에 부재 중에, 유수부대(留守部隊)를 지휘한 아키모토 나가토모 등이 고성항전(籠城抗戦)을 했으나, 최종적으로 개성했다. 전후, 후카야 우에스기씨는 소령(所領)을 잃었지만, 아키모토 나가토모는 간토(関東)에 입봉(入封)한 도쿠가와(徳川) 씨를 섬기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투항을 촉구한 공으로 다이묘가 되어, 후에 자손으로부터 로주(아키모토 다카토모)를 배출했다. 호조(北条) 측에 가담하여 도요토미(豊臣)군과 싸운 자가 에도 시대에 후다이 다이묘가 된 유일한 사례이다. 7월 12일에는 히와라성(檜原城)이 함락되고, 하치오지성의 잔당과 히라야마씨 등이 자결했지만, 그들에게 오다와라 개성(小田原開城)이 전해졌는지는 불명이다.
7월 13일, 히데요시(秀吉)가 오다와라성(小田原城)에 들어갔다. 이 날, 도쿠가와(徳川) 씨의 간토(関東) 전봉(転封)이 공표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이 방침은 전해졌던 것 같으며, 도쿠가와 가신인 마쓰다이라 이에타다의 일기 『이에타다 일기(家忠日記)』 6월 20일 조에 "국바꾸리 금일의 유(国替わり近日の由)"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국바꾸기 준비를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에타다(家忠)에게 본국으로 일단 귀환하도록 명령하고 있다. 7월 초는 도요토미(豊臣) 씨로부터 각지로의 발급 문서가 많지만, 7월 중순 무렵부터 도쿠가와(徳川) 씨 발급의 서장이 남는다. 또 동시기에,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나 도리이 모토타다 등 일부 가신에게는 지행(知行)이 통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도쿠가와(徳川) 씨의 간토(関東) 경영에는, 아직도 히데요시(秀吉) 진영의 막료의 손이 많이 가담하고 있다. 더욱이 도쿠가와 가신인 이이 나오마사나 혼다 다다카쓰의 각각의 배지(配地)의 할당에조차, 히데요시(秀吉)의 의견이 크게 관여하고 있었다고 추측되는 서장이 남는다.
7월 18일[111]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성에 들어가고, 9월까지에는 가신들에게 지행(知行)이 할당되고 있다. 8월 1일 도요토미(豊臣)군은 우쓰노미야에 주둔하고, 이후는 오슈를 향했지만, 도쿠가와(徳川)는 후술되는 오다 노부카쓰 개역(改易)의 중재를 위해, 7월 말에 우쓰노미야(宇都宮)에 참진(参陣)하고 있기 때문에, 1일에 돌아왔다고 생각된다. 이즈국에 관해서는 4월 중에 도쿠가와(徳川) 씨에게 주어지고 있다.
고호조씨의 구령(旧領)은 거의 그대로 도쿠가와(徳川) 씨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비게 된 도쿠가와 구령(徳川旧領)(미카와국·도토미국·스루가국·가이국·시나노국 일부 등)으로의 국바꾸기(国替え)를 히데요시(秀吉)에게 명령받은 오다 노부카쓰는, 이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개역되어 시모쓰케국 우쓰노미야성에 은거(蟄居)하게 되었다. 이 개역에 의해, 히데요시(秀吉)의 구주가(旧主家)인 오다(織田) 씨는 세력을 잃고, 호조(北条) 씨를 단기간에 멸망시킨 뒤에도 구니모치의 다이묘이며 정이위내대신(正二位内大臣)인 구주가(旧主家)일지라도 개역(改易)할 수 있는 히데요시(秀吉),라는 실권력이 확정되었고, 동시에 관위·소령의 양면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정권의 다이묘로서 최고의 실력자로 확정되었다. 또 전술의 히데요시(秀吉)의 재정(裁定)으로, 사나다(真田) 씨가 호조(北条) 씨에게 양도했던 우에노국누마타성은 사나다(真田)에게 반환되었다. 히데요시(秀吉)의 노여움을 산 사토미 요시야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중재한 것도 있어, 아와국 일국은 안도되었지만, 가즈사국의 소령(所領)은 몰수되어 도쿠가와(徳川) 씨에게 주어졌다.
히타치국은 일국이 사타케 요시노부에게 주어졌다. 이 도요토미 정권의 어묵(御墨付き)을 배후로 하여, 사타케(佐竹) 씨는 히타치(常陸) 중부의 에도 시게미치이나 다이죠 키요모토를 멸하고, 또한 천정 19년(1591년) 2월에는, 히타치(常陸) 남부의 가시마(鹿島)·나미키타(行方) 양군(両郡)의 남방삼십삼관이라고 불리는 가시마씨 등 다이죠씨 일족의 구니진 영주(領主)를 오타성에 초대하여 모살하는 등으로 히타치(常陸) 국내를 통일을 달성했다. 그러나 도쿠가와(徳川) 씨와 마찬가지로, 영내(領内)의 지행(知行) 할당에는 도요토미 정권의 간섭이 있고, 도요토미 정권에 가까웠던 사타케 요시히사에게 많은 소령(所領)이 주어졌다.
우에노국의 누마타성은, 본래 여기를 호조(北条) 씨와 다투고 있던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주어졌지만, 누마타령(沼田領)은 마사유키(昌幸)의 장남인 사나다 노부유키가 반독립으로 성주(城主)가 되고, 동시에 도쿠가와(徳川) 씨의 여력다이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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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主の高城胤則は小田原籠城中であったが、叔父の戦死と豊臣の圧倒的な大群に衝撃を受け、密かに城に使いを送って開城を命じ、浅野長政に降伏させ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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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の相馬治胤が100騎を率いて小田原籠城中に、不仲の子の秀胤が徳川に通じて5月中に開城。戦後、秀胤に本領安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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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金酒井政辰が150騎、土気酒井康治は3百騎を率いて小田原城に籠城しており、当主不在。さらに里見氏の北上に備えて各支城にも兵を配していたと推測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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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間、6月5日に小田原に参陣した奥州会津の伊達政宗の詰問を行う為、浅野長政と前田利家は軍を置き、自身らは小田原包囲陣に入っている。6月9日に伊達政宗と秀吉の会見があったため、それ以降に自軍に戻ったと考えら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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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杉景勝は相続時の因縁から、小田原北条氏とは仇敵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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芳賀高継。戦後すぐに帰参を許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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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二者は従兄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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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子。実兄は宇都宮国綱であり、国綱・朝勝・芳賀高武の三兄弟は、佐竹義宣・蘆名義広らと従兄弟。なお、近年の研究では小田原征伐当時、朝勝とは別人の結城氏当主がいたかもしれないことが示唆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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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城晴朝の実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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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王子城に籠城し、戦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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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室は佐竹義重養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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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生義雄の妹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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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戸重通は縁者の結城晴朝の下へ逃れ、大掾清幹は自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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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田原には義宣と共に参陣し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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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野崎昭通(照通)は伊達政宗の娘五郎八姫と家康六男の松平忠輝の婚姻に伊達家から付属し、忠輝家中となり越後高田藩士となるが、忠輝改易により浪人。その後増上寺の仲介により徳川御三家の水戸藩に仕え、常陸に復帰している。
[95]
문서
のちに佐竹氏の重臣となる元・小山家臣の渋江政光はこの時浪人し、佐竹氏に登用された。
[96]
문서
常陸下館城の水谷正村らは結城氏の親族で家臣。小田原征伐後は独立大名として4万7,000石を安堵された上で結城氏寄騎。
[97]
문서
のちに資晴も許され、別に所領が与えられた。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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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だし国繁と顕長の間にもう一人、渡瀬繁詮という兄弟がいたことも考慮すべきである。繁詮は当初兄弟と同じく北条傘下であったがのち離れ、上方に出て豊臣家に仕え、豊臣秀次の重臣となっていた。
[99]
문서
氏姫の母も祖母も北条氏の娘。
[100]
참고자료
kuroda(2013)
[101]
참고자료
kuroda(2013)
[102]
서적
家忠日記
[103]
문서
戦後、弟の関根勝直と共に結城秀康に仕える。越前騒動で追放。
[104]
문서
牢人であった仙石秀久が活躍し、秀吉の勘気が解けたという話が残る。
[105]
서적
伊達家文書
[106]
서적
高橋
1992
[107]
서적
kuroda(2013)
[108]
문서
小幡文書
[109]
서적
家忠日記
[110]
문서
후술하는 내용
[111]
문서
후년 내용, 家忠日記 내용 포함
[112]
서적
御湯殿上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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