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기 사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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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기 사카에는 1885년 일본에서 태어난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작가이다. 그는 도쿄 외국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하며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했고, 고토쿠 슈스이, 사카이 도시히코 등이 세운 헤이민샤에 참여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1920년대에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대하여 국제 연대를 추구했으며,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아내 이토 노에, 조카와 함께 일본 육군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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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기 사카에 | |
---|---|
기본 정보 | |
이름 | 오스기 사카에 |
원어 이름 | 大杉 栄 |
로마자 표기 | Ōsugi Sakae |
출생일 | 1885년 1월 17일 |
출생지 | 가가와현마루가메시 |
사망일 | 1923년 9월 16일 |
사망지 | 도쿄부도쿄시 |
사망 원인 | 암살 |
정치 | |
사상 | 무정부주의 |
학력 | |
출신 학교 | 도쿄외국어학교 |
직업 | |
직업 | 사상가, 노동운동가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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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
2. 생애
오스기 사카에는 1885년 1월 17일 태어나, 일본 육군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고야 육군 지방 소년학교에 입학했으나 군대 문화에 대한 반항으로 퇴교당했다. 이후 도쿄 외국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며 아나키스트 사상에 눈을 떴고, 고토쿠 슈스이 등이 세운 헤이민샤에 참여하며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여 1906년 '전차 요금 인상 반대운동'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수감 중에도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에스페란토 등 외국어 학습과 사상 연구를 계속했다. 출소 후에는 잡지 발행, 번역 등을 통해 아나키즘과 산디칼리즘 사상을 전파하며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921년~1922년 '아나-볼셰 논쟁'에서는 볼셰비즘과 대립각을 세웠다.
국제적인 연대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에스페란토 보급에 힘쓰고 아시아 각국의 혁명가들과 교류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한국의 이동휘, 여운형, 박열 등 독립운동가들과 연대했으며,[2] 1920년에는 상하이에서 열린 국제 회의에도 참석했다.[1] 베트남의 호치민과도 연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3년 국제 아나키스트 대회 참석을 위해 프랑스로 갔으나 노동절 시위 중 체포되어 추방당했다. 같은 해 9월 간토 대지진 이후의 혼란 속에서, 일본 육군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에게 아내 이토 노에, 조카와 함께 연행되어 살해당했다(아마카스 사건).[52] 이는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사회주의 및 아나키즘 운동에 대한 탄압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요시다 기주 감독은 그의 삶을 다룬 영화 《에로스와 학살》(1969)을 제작했다.[2]
2. 1. 유년기 및 청소년기
오스기 사카에(大杉栄)는 1885년 1월 17일 가가와현 마루가메시에서 태어났다.[5] 그의 아버지 오스기 아즈마(大杉東)는 아이치현 출신의 대일본제국 육군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토요(豊)였다. 에이는 차남으로, 여러 형제자매가 있는 대가족에서 자랐다.[5] 외모와 성격은 어머니를 닮았다고 전해진다.[5]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1888년 12월부터 도쿄 고지마치구의 후지미 소학교 부속 유치원에 다녔으나[6], 1889년 아버지가 니가타현 신발다시의 보병 제16연대로 부임하면서 14세까지 신발다에서 성장했다. 신발다혼무라 보통소학교, 신발다 고등소학교, 키타가와라 보통중학교(현 니가타현립 신발다 고등학교)를 다녔다.[7]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참전한 군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군인의 길을 걷도록 키워졌으며, 원수를 목표로 삼았다.[5] 1899년 9월, 나고야 육군 지방 소년학교 제3기생으로 입학했다.[8] 처음에는 독일어과를 희망했으나 프랑스어과에 배정되었는데, 이는 훗날 그가 사상가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5]
나고야 육군 지방 소년학교 시절, 오스기는 학업보다는 무도에 열중했으며 학교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했다. 동급생 나카무라 나카(中村中)와 동성애 관계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나카는 체조 수업 중 사고로 사망했다. 수학여행 중 저학년에게 성적인 장난을 쳤다는 이유로 30일간 근신 처분을 받기도 했다.[9] 그는 상관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군대 문화에 반항하며[10] 자주 문제를 일으켰고, 우울증 진단을 받아 휴가를 얻기도 했다. 학교 밖에서는 활발했지만, 학교로 돌아오면 다시 반항적인 태도를 보여 동기생과의 다툼 끝에 칼에 찔리는 사건까지 일으켰다. 결국 1901년 12월, 입학 2년 만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 당시 그의 성적은 실기 과목은 수석, 학과 과목은 차석이었으나 품행은 최하위였다.
군대 생활의 답답함에서 벗어난 오스기는 문학을 하기로 결심하고, 어학 공부를 명목으로 1902년 1월 도쿄로 갔다.[11] 낮에는 칸다 사루가쿠초의 도쿄학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요츠야구의 프랑스어 학교에 다녔다. 같은 해 6월, 어머니가 니가타 병원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12] 이 시기 오스기는 하숙집 친구의 영향으로 진화론 원서를 읽고, 아시오 동광산 광독 사건 반대 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회 문제에 눈을 뜨면서 당시 가장 저렴했던 신문 『만조보(萬朝報)』를 구독하며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도시히코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반전론에 공감했다. 헤이민샤(平民社) 결성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가 강연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1902년 10월에는 준텐 중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13]
1903년 3월 준텐 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9월 구제 도쿄 외국어학교(현 도쿄 외국어대학) 불어과에 입학했다.
1903년부터 여러 기독교 교회를 다니다가 에비나 단조(海老名弾正) 목사가 있는 일본 연합 본고 기독교회(현 일본기독교단 유미초 혼고 교회)에 정착하여 같은 해 10월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을 옹호하는 에비나 목사의 태도에 반발하여 교회와 관계를 끊었다.
1904년 3월, 헤이민샤에서 열린 사회주의 연구회에 참석하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들었다. 오스기는 이후 헤이민샤를 자주 드나들며 사회주의 활동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잡지 『개조(改造)』에 자서전 형식으로 연재되었으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미완으로 남았다.[14]
2. 2. 사회주의 운동 투신
일본 육군 소좌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고야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했으나, 동료와의 다툼 및 군대 생활에 대한 반항적인 태도로 인해 퇴교 처분을 받았다. 군대 생활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문학을 지향하기로 결심한 오스기는 1902년 상경하여[11] 도쿄 외국어학교(현 도쿄 외국어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다. 이 시기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며 사회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특히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도시히코 등이 러일 전쟁을 앞두고 주장한 반전론에 공감하여 그들이 세운 평민사의 강연회에 참가하는 등 점차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초기에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세례를 받기도 했으나, 러일 전쟁 발발 후 교회의 국가주의적 태도에 반발하여 관계를 끊었다.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 투신은 1906년 도쿄 시내 전차 요금 인상 반대 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언론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신문에 기고한 글로 인해 신문지조례 위반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1908년에는 이른바 '옥상 사건'과 적기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17] 이전 형량까지 합쳐 총 2년 6개월간 지바형무소에서 복역했다.[18] 수감 기간 동안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에스페란토 등 다양한 외국어를 익히고 아나키즘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19] 또한 에스페란토를 통해 국제적인 연대를 모색하여, 이후 에스페란토 학교를 열어 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1910년 출소 후, 고토쿠 슈스이 등이 대역사건으로 처형당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이 위축된 상황(사회주의 운동의 겨울 시대)에서도 오스기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사카이 도시히코 등과 함께 '매문사'를 결성하고,[20] 1912년 아라하타 칸손과 함께 《근대사상》을 창간했으며,[22] 1914년에는 《평민신문》을 복간하고 사회주의 연구회를 개최하는 등 운동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두 잡지 모두 발행 금지 처분을 당하는 등 탄압을 받았다.[23] 같은 해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24] 그러나 점차 아나키즘 입장을 명확히 하면서 이전 동지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으며, 1916년에는 이토 노에와의 관계 등으로 인해 가미치카 이치코에게 칼로 찔리는 히카게차야 사건이 발생하여 사회적으로 큰 비난을 받고 운동 내에서 고립되기도 했다.[27]
1917년 이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노동운동이 활발해지자, 오스기는 산디칼리즘 입장에서 노동 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도쿄 가메이도로 이주하여 이토 노에와 함께 《문명비평(文明批評)》 (1918),[30] 《노동신문(勞動新聞)》 (1918), 《노동운동(勞動運動)》 (1919-1921) 등을 잇달아 발행하며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1918년에는 1918년 미소동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으며,[33] 1919년에는 노동자 중심의 '도쿄노동동맹회'를 결성하고 기관지 《노동운동》을 발행하는 등 조직적인 활동을 펼쳤다.[35]
오스기는 국제적인 연대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20년 6월, 한국의 이춘숙의 권유로[1] 상하이에서 열린 코민테른 극동국 관련 회의에 참석하여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했다. 러시아인, 베트남인, 중국인, 아프리카인 등 다양한 국적의 혁명가들과 연대를 모색했으며, 특히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동휘, 여운형 등과 직접 만나 국제 연대를 논의했다. 또한 박열 등이 조직한 아나키즘 단체 '흑도회'의 결성을 후원했으며,[2] 베트남의 독립운동 지도자 호치민과도 연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일본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 벌어진 '아나-볼셰 논쟁'에서는 아나르코생디칼리슴의 입장에서 볼셰비즘을 강하게 비판하며 사상적 대립을 벌였다.
1923년에는 국제 아나키스트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프랑스 파리로 갔으나, 노동절 집회에 참가하던 중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추방당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9월, 간토 대지진 발생 후의 혼란 속에서 아내 이토 노에, 조카와 함께 일본 육군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에게 연행되어 살해당했다(아마카스 사건). 이는 그의 사회주의 및 아나키즘 활동에 대한 국가적 탄압의 비극적인 결과로 평가된다.
2. 3. 국제 연대 활동
오스기 사카에는 에스페란토 학교를 열어 아시아 아나키스트들에게 에스페란토를 가르치는 등 국제 연대 활동을 펼쳤다. 그는 세계 각지를 다니며 러시아인, 베트남인, 중국인, 아프리카인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교류했으며, 특히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이동휘, 여운형 등과 직접 만나 연대하고자 했다. 또한, 박열 등이 조직한 아나키즘 단체 '흑도회'의 결성을 후원했으며, 베트남의 독립운동 지도자 호치민과도 연대했다.1920년 6월, 그는 한국의 이춘숙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중화민국 상하이로 가서 코민테른 극동국과 관련된 아시아 공산주의자들과 만났다.[1] 같은 해 10월에도 상하이에서 열린 사회주의자 집회에 참가했다.[38]
1922년 12월, 다음 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국제 아나키스트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을 떠났다.[46] 1923년 1월,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상하이에서 프랑스행 배에 올랐다.[47] 이 여정에는 마흐노 운동의 지도자 네스토르 마흐노와 접촉하려는 목적과 더불어, 아시아 아나키스트 연합을 구상하며 상하이와 프랑스에서 중국 아나키스트들과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다. 2월 13일 프랑스 마르세유에 도착했으나[48], 대회는 연기되었고 국경 이동이 어려워지자 파리 근교 생드니에서 열린 노동절(메이데이) 집회에 참가하여 연설하던 중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었다.[49] 그는 생테 감옥에 수감되었고, 신원이 밝혀져 재판 후 강제 추방 처분을 받았다.[50] 프랑스 주재 일본 영사관의 주선으로 7월 11일 고베로 귀국했다.[51]
2. 4. 아마카스 사건과 죽음
1923년 9월 간토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오스기 사카에는 아내 이토 노에와 6살 조카 타치바나 소이치와 함께 일본 육군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에게 연행되었다. 지진 발생 불과 2주 후인 9월 16일, 오스기와 이토, 타치바나는 헌병대 사령부에서 아마카스 마사히코 등에 의해 살해당했고, 시신은 우물에 유기되었다. 이 사건은 아마카스 사건으로 알려졌다.[52][1] 당시 오스기의 나이는 38세였다. 살해 실행범으로 지목된 아마카스 대위와 그의 부하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공판 내용은 신문에 상세히 보도되었다.지진 이후 혼란 속에서 일본 정부는 조선과 일본의 아나키스트 그룹 및 불령사의 박열, 김자문자 등을 대역 사건으로 엮어 탄압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옥사한 신야 초대는 지진 직전 오스기에게 스터디 모임 강사를 요청하고 오스기가 주최한 집회에도 참석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은 경찰 조서에 기록되어 있다.
1923년 12월 16일, 자유연합파 노동조합과 아나키스트 단체들이 주최하여 살해된 세 사람의 합동 장례식이 거행되었다.[53] 그러나 장례식 도중 우익 단체 대화회 소속원이 조문객으로 위장하여 오스기의 유골을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골은 9일 후 대화회 회장 이와타 후미오가 경찰에 제출했고, 이듬해 5월 유족에게 반환되었다.[54] 이 사건은 오스기 사카에 유골 탈취 사건으로 불린다.
오스기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노동운동가 와다 큐타로, 무라키 겐지로 등은 기요틴사의 나카하마 테츠, 후루타 다이지로 등과 함께 다음 해 1주기까지 정부 요인 암살 등을 계획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55]
오스기의 유골은 처음 아내 노에의 고향인 후쿠오카현에 묻혔으나, 지역 사회의 반감으로 인해 묘가 훼손되는 일이 반복되었다.[56] 결국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의 공동묘지에 다시 묘가 세워졌다.[57] 2023년 9월 16일, 아마카스 사건 100주년을 맞아 묘 앞에서 추모제가 열려 약 50명이 참석했다.[58]



3.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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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저술 활동
오스기 사카에는 다양한 저술 및 번역 활동을 통해 자신의 아나키즘 사상을 전파했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옥중 경험을 담은 『옥중기』(1919, 춘양당)와 이후 현대사조사에서 복간된 『옥중기』 및 『속옥중기』(1965, 오스기 에이 전집 제13권 수록), 유럽 망명 경험을 기록한 『일본탈출기』(1923, 알스) 및 현대사조사 복간본(1965, 오스기 에이 전집 제13권 수록), 그리고 『자서전』(1923, 개조사) 등이 있다.[60][61]
그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진화의 한 요소』(1924년 번역 출간)와 장 앙리 파브르의 『곤충기』(1922년 제1권 번역)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외국의 중요 사상과 지식을 소개하는 데 힘썼다.
또한, 『근대사상』, 『평민신문』, 『문명비평』, 『노동신문』[60][61], 『노동운동』 등 여러 신문과 잡지에 적극적으로 글을 기고하며 자신의 사회 비판적 시각과 사상을 펼쳤다. (이 중 『노동신문』을 제외하고는 복각판이 간행되었다.)
그의 급진적인 사상 때문에 일부 저서는 당시 제국주의 체제 하에서 발매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사회적 개인주의』(1915)와 『노동운동의 철학』(1916)이 있다. 이는 당시 일본 사회의 경직된 분위기와 사상 탄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다양한 저작과 편저를 남겼다.
- 『생의 투쟁』 (1914년, 1923년)
- 『거지의 명예』 (1920년, 이토 노에와 공저)
- 『크로포트킨 연구』 (1920년, 알스 출판)
- 『정의를 구하는 마음』 (1921년, 알스 출판)
- 『장난』 (1921년)
- 『두 명의 혁명가』 (1922년, 이토 노에와 공저, 알스 출판) - 이후 흑색전선사에서 복간 (1985년)
- 『만문만화』 (1922년, 모치즈키 케이 그림, 알스 출판) - 이후 흑색전선사에서 복간 (1972년, 1984년)
- 『무정부주의자가 본 러시아 혁명』 (1922년)
- 『수필집 생의 투쟁』 (1923년)
- 『자유의 선구』 (1924년)
오스기 사카에 사후에도 그의 사상과 삶을 기리는 출판 활동이 이어졌다. 개조 (1923년 11월 오스기 사카에 추도호), 중앙공론 (1923년 11월 사토 하루오의 회고 글 「나의 회상하는 오스기」 수록), 『노동운동』 (1924년 3월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에 추도호), 『조국과 자유』 (1925년 9월 오스기 사카에 추도호) 등이 간행되었다. 또한 알스판(1925-1926)과 현대사조사판(전14권) 등 여러 차례 전집이 출간되었으며, 오자와 마사미치(大澤正道)의 『대杉 영 연구』(1968), 아키야마 키요시(秋山清)의 『대杉 영 평전』(1976) 등 연구서와 평전도 나왔다. 고타 다이지로(古田大次郎)의 『죽음의 참회』(1926, 춘추사), 와다 큐타로(和田久太郎)의 『옥창에서』(1930), 발매 금지된 고타 다이지로의 『사형수의 추억』(1930) 등 동지들의 기록도 출간되었다. 근래에도 오스기 유타카(大杉豊)가 편찬한 일기, 서간집, 해설을 덧붙인 복간본(『일본 탈출기』, 『자서전』, 『옥중기』 등)과 관련 연구서들이 꾸준히 출간되어 그의 사상적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탈출기』는 『My Escapes from Japan』(2014)이라는 제목으로 영역되기도 했다.
5. 한국과의 관계
1920년 6월 오스기는 한국의 이춘숙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춘숙은 오스기에게 상하이로 가서 코민테른 극동국과 관련된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을 만날 것을 제안했다.[1]
6. 평가 및 영향
오스기 사카에는 일본의 아나키스트이자 사회 운동가로서, 그의 사상과 활동은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1920년 6월, 오스기는 한국의 이춘숙과 접촉하여 상하이로 건너가 코민테른 극동국과 관련된 아시아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했다.[1] 이는 그의 국제적인 연대 활동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요시다 기주 감독의 영화 《에로스와 학살》(1969)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2]
오스기 사카에의 주요 저작 및 관련 연구 서적은 다음과 같다.
제목 | 저자/역자/편자 | 출판사 | 출판 연도 |
---|---|---|---|
『대杉 영 전집』 전14권 | 현대사조사 | ||
『대杉 영 연구』 | 오자와 마사미치(大澤正道) | 동성사(同成社) | 1968년 7월 |
『대杉 영 평전』 | 아키야마 키요시(秋山清) | 사상의 과학사 | 1976년 11월 |
『장 앙리 파브르 곤충기』 | 장 앙리 파브르(저), 오하라 히데오(저), 오스기 에이(역) | 아키시키쇼텐 | 2005년 |
『일기·오스기 에이 전』 | 오스기 유타카 | 사회평론사 | 2009년 |
『일본 탈출기』 | 오스기 유타카(해설) | 도요비샤 | 2011년 |
『자서전』 | 오스기 유타카(해설) | 도요비샤 | 2011년 |
『옥중기』 | 오스기 유타카(해설) | 도요비샤 | 2012년 |
『KAWADE 길의 수첩 오스기 에이』 | 카와데쇼보신샤 | 2012년 | |
『오스기 에이와 동지들』 | 팔 출판 | 2013년 | |
『오스기 에이 추상』 | 오스기 유타카(해설) | 도요비샤 | 2013년 |
『My Escapes from Japan』 (『일본 탈출기』 영역판) | 마이클 샤와티(역) | 도요비샤 | 2014년 |
『오스기 에이 서간집』 | 오스기 유타카(편) | 도요비샤 | 2018년 |
7. 기타
오스기는 일생 동안 가족조차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의 심각한 말더듬으로 고통받았다. 특히 '가' 발음에서는 눈을 깜빡이며 “금붕어가 밀가루풀을 삼키는 듯한 입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육군사관학교 시절에는 “하현달”이라고 말하지 못해 “상현달은 아닙니다”라고 답하여 위기를 넘겼지만, 이 때문에 교관에게 성격이 비뚤어졌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또한, 고토 신페이에게 500JPY을 빌리려 했으나 ‘고’ 발음이 나오지 않아 결국 300JPY만 빌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920년 6월, 오스기는 한국의 이춘숙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상하이로 가서 코민테른 극동국과 관련된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을 만났다.[1]
오스기는 고토 신페이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 1923년 12월 17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당시 제2차 야마모토 내각의 내무대신이었던 고토 신페이는 자신이 데라우치 내각의 내무대신 시절 오스기에게 두 차례에 걸쳐 총 500JPY을 지원했으며, 이는 "역대 내무대신들이 해왔던 일"이라고 밝혔다.[59]
요시다 기주 감독은 오스기의 삶을 다룬 영화 《에로스와 학살》(1969)을 제작했다.[2]
참조
[1]
서적
The Japanese Communist Movement 1920-19667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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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os Plus Massacre: An Introduction to the Japanese New Wave Cinema
https://archive.org/[...]
Indiana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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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外国語学校一覧 従明治39年至明治4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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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もうひとりの明治社会主義者――深尾韶の生涯
思想の科学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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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名碑の墓石山中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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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9
[57]
웹사이트
静岡)大杉栄らの墓前祭、色とりどりのバラ献花
https://www.asahi.co[...]
朝日新聞DIGITAL
2019-09-16
[58]
웹사이트
「権力の横暴は忘れない」甘粕事件から100年 静岡で最後の墓前祭
https://www.nishinip[...]
西日本新聞
2023-09-17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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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藤新平をめぐる権力構造の研究
南窓社
[60]
서적
大杉栄・伊藤野枝選集 第5巻 解説
https://dl.ndl.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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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202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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