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오언 (서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언은 삼국 시대 오나라와 서진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제갈량의 추천을 받아 이름을 알렸으며, 육항의 부하로 건평 태수를 지냈다. 오언은 진나라에 투항하여 금성태수, 둔황태수, 순양내사, 교주자사 등을 역임하고 대장추에 이르렀다. 그는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나 군사적 재능을 보였으며, 강직한 성품으로 손호에게 직언을 하고 진나라 무제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육항은 오언의 재능을 높이 사 장수로 등용하려 했고, 오언은 손호에게 간언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서진 사람 - 육기
    육기는 동오 황실과 관련된 인물로, 오나라 멸망 후 서진에서 문인 관료로 활동하며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고, 팔왕의 난 시기에는 군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모함으로 처형당했다.
  • 서진 사람 - 석륵
    석륵은 갈족 출신으로 노예 생활과 산적 생활을 거쳐 유연의 한에 귀순한 뒤 세력을 키워 후조를 건국하고 화북 지역을 장악한 오호십육국 시대의 군주이다.
  • 동오 사람 - 시삭
    시삭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위사로, 손침의 모반을 고발하고 제거 계획에 참여했으며, 손침 제거 후 그의 일족 처형에 협력했고 그의 아들 시참은 진나라의 도교 도사였다.
  • 동오 사람 - 사광 (삼국지)
    사광은 삼국시대 오나라 사람으로, 사촌 사휘 등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여대의 부탁으로 그들을 설득하여 항복시켰으나, 사휘 등은 처형되고 사광은 관직을 박탈당해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오언 (서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오언
원어 이름吾彥
사칙 (士則)
생애
출생지쑤저우, 장쑤성
사망 시기알 수 없음
활동 시기3세기
소속오, 진
경력
오나라 시기 관직건평태수 (建平太守)
오나라 시기 임관 시기알 수 없음
오나라 시기 퇴임 시기280년
진나라 시기 관직교주자사 (交州刺史)
진나라 시기 임관 시기290년
진나라 시기 퇴임 시기310년대
섬긴 군주손호
진 무제
진 혜제
진 회제

2. 생애

오언은 오군(吳郡)의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키가 8척에 달하고 힘이 센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통강리(通江吏)라는 벼슬을 했으며, 이후 육항(陸抗)의 부장이 되었다. 육항은 오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장수로 삼고 싶어했으나, 다른 장수들이 출신 때문에 반대할 것을 우려하여 계책을 세웠다. 잔치 때 다른 사람을 시켜 미친 척하며 칼을 휘두르게 하자, 다른 장수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오언은 침착하게 제압했다. 육항은 이 일을 계기로 오언을 장수로 발탁했다.

272년 서릉독(西陵督) 보천(步闡)이 진나라에 투항하자, 육항의 명을 받고 좌혁 등과 함께 보천을 공격했다. 육항이 진군을 격파하고 보천을 죽여 반란을 진압한 후, 오언은 형주의 건평(建平) 태수로 임명되었다.

당시 진나라 익주자사 왕준은 오나라 정벌을 위해 군선을 만들었는데, 이때 생긴 나무 부스러기가 장강을 타고 오나라 영역까지 흘러갔다. 오언은 손호(孫皓)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건평에 군사를 늘려 달라고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오언은 쇠사슬과 쇠송곳을 장강 바닥에 설치했지만, 왕준은 뗏목과 불로 이를 제거했다.

280년 왕준이 이끄는 진나라 정벌군이 건업(建業)을 점령하고 오나라가 멸망할 때까지도 오언은 성을 굳게 지켰다. 오나라가 멸망한 것을 알고 난 후에야 진나라에 항복했다.

낙양으로 간 손호사마염(司馬炎) 앞에서 가충(賈充)을 무안하게 만드는 등 부끄러워하지 않자, 사마염설영에게 오나라가 망한 이유를 물었다. 설영손호의 폭정 때문이라고 답했다. 며칠 후 오언에게 묻자, 오언은 오나라 군신(君臣)이 모두 현명했으나 천운이 다해 멸망했다고 답했다. 사마염은 오언의 대답을 더 훌륭하게 여겼다.

돈황 태수를 지냈다가 다시 안문 태수가 되었다. 당시 순양왕(順陽王) 사마창(司馬暢)은 포악한 인물이었으나, 오언이 순양내사(順陽内史)가 되자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이후 교주목 도황(陶璜)이 죽자 그의 뒤를 이었으며 남중도독(南中都督)을 겸했다. 도황이 죽을 무렵 구진(九眞)에서 조지(趙祉)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오언은 부임 후 이를 진압하였다.

303년 영주(寧州) 자사 이의(李毅)가 소수민족 오령이(五苓夷)족의 원한을 사 공격을 받았다. 이의는 조정에 구원을 청했으나 중앙 정계는 팔왕의 난으로 혼란스러워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오언은 307년 아들 오자(吾咨)에게 군사를 주어 영주를 구원하였다.

오언은 20여 년 동안 교주자사에 있으면서 안정되게 다스렸으며, 나이가 들자 다른 사람을 후임으로 삼아달라고 청하였다. 이후 조정으로 불려가 대장추(大長秋)로 재직하던 중에 죽었다.

2. 1. 오나라에서의 삶

오언은 오군(吳郡)의 비천한 집안 출신으로, 처음에는 통강리(通江吏)라는 벼슬을 했다. 이후 육항의 부장이 되었는데, 육항은 오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장수로 삼고 싶어했다. 그러나 다른 장수들이 출신 성분을 문제 삼을 것을 걱정하여 계책을 세웠다. 잔치 때 다른 사람을 시켜 미친 척하며 칼을 휘두르게 하자, 다른 장수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오언은 침착하게 제압했다. 육항은 이 일을 계기로 오언을 장수로 발탁했다.[5]

272년 보천이 진나라에 투항하자, 육항의 명을 받고 좌혁 등과 함께 보천을 공격했다. 이후 육항이 진군을 격파하고 보천을 죽여 반란을 진압했고, 오언은 건평(建平) 태수로 임명되었다.[7]

당시 진나라 왕준은 오나라 정벌을 위해 군선을 만들었는데, 이때 생긴 나무 부스러기가 장강을 타고 오나라 영역까지 흘러갔다. 오언은 손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건평에 군사를 늘려 달라고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오언은 쇠사슬과 쇠송곳을 장강 바닥에 설치했지만, 왕준은 뗏목과 불로 이를 제거했다.[6]

280년 왕준이 이끄는 진나라 정벌군이 건업을 점령하고 오나라가 멸망할 때까지도, 오언은 성을 굳게 지켰다. 오나라가 멸망한 것을 알고 난 후에야 진나라에 항복했다.

낙양으로 간 손호사마염 앞에서 가충을 무안하게 만드는 등 부끄러워하지 않자, 사마염설영에게 오나라가 망한 이유를 물었다. 설영은 손호의 폭정 때문이라고 답했다. 며칠 후 오언에게 묻자, 오언은 오나라 군신(君臣)이 모두 현명했으나 천운이 다해 멸망했다고 답했다. 사마염은 오언의 대답을 더 훌륭하게 여겼다.

2. 1. 1. 초기 경력

오언은 오현 오군 출신으로 가난한 배경에서 자랐다. 《진서》에 따르면 키가 8척(188cm)이며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통강현에서 말단 관리로 오나라에서 벼슬을 시작했다.[2]

오언은 육항 밑에서 처음으로 군사적 역할을 맡았다. 육항은 오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지만, 다른 장군들의 반대를 우려하여 더 이상 승진시킬 수 없었다. 육항은 장군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계획을 세우고, 몰래 누군가에게 미친 척하며 칼을 휘두르게 했다. 장군들은 가짜 미치광이를 보고 두려워 도망쳤지만, 오언은 침착하게 작은 책상으로 자신을 방어했다. 자리에 있던 장군들은 모두 그의 용기를 칭찬했고, 육항은 마침내 오언을 중요한 직책으로 승진시킬 수 있었다.[5]

2. 1. 2. 육항의 부장과 장군 발탁

육항은 오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지만, 다른 장군들의 반대를 우려하여 그를 바로 승진시키지 못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육항은 계책을 세웠다. 장군들을 모아놓고 몰래 사람을 시켜 미친 척하며 칼을 휘두르게 했다. 장군들은 겁을 먹고 도망쳤지만, 오언은 침착하게 작은 책상으로 자신을 방어했다.[5] 이를 본 장군들은 오언의 용기에 감탄했고, 육항은 이 기회를 틈타 오언을 중요한 직책에 발탁할 수 있었다.[5]

2. 1. 3. 건평 태수 시절

272년, 익주자사 왕준은 오나라 정복을 위해 전함을 건조하는 임무를 맡았다. 건조 과정에서 생긴 나무 조각들이 오나라 영토로 흘러 들어갔고, 오언은 이를 손호에게 가져가 진나라의 침략 계획 증거로 제시하며 북서쪽 국경 강화를 건의했다. 그러나 손호는 이를 무시했고, 오언은 개인적으로 쇠사슬을 만들어 양쯔강을 통한 진출을 막는 방어벽을 세웠다.[6]

같은 해 9월, 서릉독 보천이 오나라에 반기를 들고 진나라에 항복했다. 오언은 육항의 명을 받아 장군 좌혁 등과 함께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12월, 오군은 양조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서릉을 탈환하여 보천을 사로잡아 반란을 진압했다.[7]

2. 2. 진나라에서의 삶

280년 왕준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가 건업(建業)을 점령하고 가 멸망하자, 오언은 성을 굳게 지키고 있다가 오나라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나라에 항복했다.[9]

사마염은 낙양으로 올라온 손호가충을 무안하게 만드는 등 부끄러워하지 않자, 오나라 출신 신하 설영에게 오나라가 망한 이유를 물었다. 설영은 손호의 폭정을 탓했지만, 오언은 오나라 군신(君臣)은 모두 현명했으나 천운이 다해 멸망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사마염은 오언의 대답을 더 훌륭하게 여겼다.[9]

이후 오언은 돈황 태수, 안문 태수를 거쳐 순양내사, 교주자사를 역임하고, 대장추에 이르렀다.

2. 2. 1. 진나라 귀순과 초기 관직 생활

오나라가 멸망한 후, 오언은 낙양에 있는 의 수도로 보내졌다. 낙양에서 오언은 진 무제에 의해 금성 태수로 임명되었다.[9] 무제는 오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곧이어 돈황 태수로 임명하였다.

얼마 후, 무제는 전 오나라 관리인 설영에게 손호가 실패한 이유를 물었고, 설영은 그의 전 황제를 부정적으로 언급했다. 무제는 같은 질문을 오언에게 했고, 오언은 "오나라의 군주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신하들은 덕이 있고 현명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무제는 웃으며 "그렇다면 왜 오나라가 멸망했는가?"라고 물었다. 오언은 "존속할지 멸망할지는 오직 하늘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폐하께서 저희를 정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하늘의 일인데, 어찌 인간의 행위를 탓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당시 근처에 있던 대신 장화는 오언에게 "경은 오나라의 장군으로 여러 해를 지냈는데도, 저는 경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참 이상하군요."라고 말했다. 오언은 "폐하께서도 저를 아시는데, 어찌 아시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무제는 오언의 말에 감명받아 그를 칭찬했다.[9]

이후 오언은 안문 태수를 지냈다.

2. 2. 2. 순양내사 시절

사마창이 순양왕으로 있을 때, 오언은 그의 밑에서 내사가 되었다. 사마창은 제멋대로인 인물로, 과거 여러 내사를 무고하여 처형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언은 청렴하고 공정하게 직무에 힘썼으며, 부하를 지도하며 형벌과 법률을 엄격히 지켰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오언을 크게 두려워했고, 사마창조차 함부로 그를 무고할 수 없었다.[10]

사마창은 오언의 존재를 꺼려 그를 멀리하기 위해 조정에 상주하여 그를 천거했다. 이로 인해 오언은 내사직에서 이동하여 원외산기상시가 되었다.[10]

2. 2. 3. 교주자사 시절

290년, 교주 자사 도황이 사망하자,[16] 오언은 도황의 뒤를 이어 남중 도독교주자사가 되었다. 도황이 사망하자 구진군에서 조지(趙祉)가 반란을 일으켜 교주 태수를 몰아냈지만, 오언은 부임하자마자 이들을 소탕하여 반란을 평정했다.[11]

그 후 20여 년 동안 교주를 다스리면서 이 지역의 평화를 유지했다. 그의 위신과 은혜는 널리 알려졌고, 교주는 평온한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11]

영가 원년(307년) 12월, 성한과 다투어 잠정적으로 녕주를 통치하던 서이교위 이초를 돕기 위해 오언은 아들 위원장군 오자(吾咨)를 녕주에 파견했다.[12] 이후 오언은 상소를 올려 다른 사람과 직무를 교체할 것을 청했고, 요청이 받아들여져 중앙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동시에 대장추에 임명되었으나,[18] 재직 중에 사망했다.[14][19]

2. 2. 4. 영주 구원과 대장추 임명

영가 원년(307년) 12월, 녕주에서 이초를 돕기 위해 오언은 아들 오자(吾咨)를 파견했다.[12] 이후 오언은 다른 사람과 직무를 교체할 것을 요청하여 대장추[17]에 임명되었고[18], 재직 중에 사망했다.[14][19]

3. 인물

오언은 오현 오군 출신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키가 8척([20]당시 척도에 따르면 193.6cm)에 달하고 힘이 무척 셌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통강리(通江吏)라는 벼슬을 했으며, 나중에는 육항(陸抗)의 부장이 되었다. 육항은 오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장수로 삼고 싶어했으나, 다른 장수들이 그의 출신 때문에 반대할 것을 걱정했다.

272년, 서릉독(西陵督) 보천(步闡)이 진나라에 귀부하고 서릉성을 점거하자, 육항의 명을 받고 좌혁(左奕) 등과 함께 보천을 공격했다. 이후 형주의 건평(建平) 태수로 임명되었다.

당시 진나라 익주자사 왕준(王濬)은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선을 대대적으로 만들었는데, 이때 생긴 나무 부스러기가 장강을 타고 오나라 영역까지 흘러갔다. 오언은 이를 보고 손호(孫皓)에게 글을 올려 건평에 군사를 늘려 달라고 청했으나, 손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280년, 왕준이 이끄는 진나라 정벌군이 건업(建業)을 점령하면서 오나라는 멸망했다. 그러나 오언은 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기에 진군은 건평을 점령하지 못했다. 오나라가 멸망한 것을 알고 난 후, 오언은 진나라에 항복했다.

낙양으로 온 손호사마염(司馬炎) 앞에서도 가충(賈充)을 무안하게 만드는 등 부끄러워하지 않자, 사마염은 오나라 옛 신하 설영(薛瑩)에게 오나라가 망한 이유를 물었다. 이후 오언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자, 오언은 오나라 군신(君臣)이 모두 현명했으나 천운이 다해 멸망한 것이라고 답했다. 사마염은 오언의 대답을 더 훌륭하게 여겼다.

돈황 태수를 지냈다가 안문(雁門) 태수가 되었다. 당시 순양왕(順陽王) 사마창(司馬暢)은 포악한 인물이라 순양내사(順陽内史)로 임명되는 사람마다 꼬투리를 잡아 죽였으나, 오언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했다.

이후 교주목 도황(陶璜)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남중도독(南中都督)을 겸했다. 도황이 죽을 무렵, 구진(九眞)에서 조지(趙祉)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오언은 부임 후 이를 진압하였다.

303년, 영주(寧州) 자사 이의(李毅)가 소수민족 오령이(五苓夷)족의 원한을 사 공격받자, 조정에 구원을 청했으나 중앙 정계는 팔왕의 난으로 혼란스러워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307년, 오언은 아들 오자(吾咨)에게 군사를 주어 영주를 구원하게 했다.

오언은 20여 년 동안 교주자사로 있으면서 안정적으로 다스렸고, 나이가 들자 다른 사람을 후임으로 삼아달라고 청했다. 이후 조정으로 불려가 대장추(大長秋)로 재직하던 중 사망했다.

3. 1. 용맹과 지략

오현 오군 출신인 오언은 가난한 배경에서 자랐지만, 문무에 재능이 뛰어났다. 《진서》에 따르면 키가 8척(188cm)이며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셌다고 한다.[2] 다른 기록에는 호랑이에 비유될 정도로 뛰어난 완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20]

오언은 오나라의 대도독 육항 밑에서 군사적 역할을 맡았다. 육항은 오언의 재능을 높이 샀지만, 다른 장군들의 반대를 우려하여 그를 쉽게 승진시키지 못했다. 한번은 육항이 장군들을 모아놓고 몰래 미친 척하는 사람을 시켜 칼을 휘두르게 했다. 장군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오언은 침착하게 작은 책상으로 자신을 방어했다. 이를 통해 장군들은 그의 용기를 칭찬했고, 육항은 오언을 중요한 직책으로 승진시킬 수 있었다.[5]

272년, 익주의 자사 왕준이 오나라 정복을 위해 전함을 건조하면서 발생한 목재 폐기물이 오나라 영토로 흘러들어왔다. 오언은 이를 손호에게 가져가 진나라의 침략 계획 증거로 제시하고 국경 강화를 건의했지만, 손호는 무시했다. 이에 오언은 개인적으로 쇠사슬을 만들어 양쯔강을 통한 진출을 막는 방어벽을 세웠다.[6]

3. 2. 강직함

오언은 손호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며, 진 무제 앞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기개를 보여주었다.[9] 진나라가 를 멸망시킨 후, 오나라 관리들은 낙양으로 보내졌다. 무제는 오언을 진성군 태수로 임명했다. 한번은 무제가 설영에게 손호의 실패 이유를 묻자 설영은 손호를 부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무제가 같은 질문을 오언에게 하자, 오언은 "오나라의 군주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신하들은 덕이 있고 현명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무제가 "그렇다면 왜 오나라가 멸망했는가?"라고 묻자, 오언은 "존속할지 멸망할지는 오직 하늘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 이것이 모두 하늘의 일인데, 어찌 인간의 행위를 탓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장화가 "경은 오나라의 장군으로 여러 해를 지냈는데도, 저는 경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오언은 "폐하께서도 저를 아시는데, 어찌 아시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무제는 오언의 말에 감명받아 그를 칭찬했다.[9]

4. 일화

오언은 비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뛰어난 용맹과 재능으로 여러 일화를 남겼다.

오언은 육항(陸抗)의 부장이 되었는데, 육항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장수로 삼고 싶어했다. 그러나 다른 장수들이 출신을 문제 삼을 것을 걱정하여 계략을 꾸몄다. 잔치 때 한 사람을 시켜 난동을 부리게 했고, 다른 장수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오언은 침착하게 제압했다. 육항은 이 일을 통해 오언을 장수로 삼을 수 있었다.[5]

272년 보천(步闡)의 반란을 진압하고 형주 건평(建平) 태수로 임명되었다. 당시 진나라 왕준(王濬)이 오나라 정벌을 위해 배를 만들 때 생긴 나무 부스러기가 장강을 타고 흘러오자, 오언은 손호(孫皓)에게 건평의 군사를 늘려달라고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쇠사슬과 쇠송곳을 설치하여 진나라 전함을 막으려 했으나, 왕준은 뗏목과 불로 이를 제거했다.

280년 오나라가 멸망한 후, 낙양으로 간 손호사마염(司馬炎) 앞에서 가충(賈充)을 무안하게 만드는 등 부끄러워하지 않자, 사마염설영(薛瑩)에게 오나라가 망한 이유를 물었다. 설영손호의 폭정을 탓했다. 그러나 오언은 오나라 군신(君臣)이 모두 현명했으나 천운이 다해 멸망했다고 답하여 사마염의 칭찬을 받았다.[9]

돈황 태수, 안문(雁門) 태수를 지냈으며, 포악한 순양왕(順陽王) 사마창(司馬暢)도 오언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했다. 교주목 도황(陶璜)의 뒤를 이어 남중도독(南中都督)을 겸했으며, 303년 영주(寧州) 자사 이의(李毅)가 소수민족에게 포위되자 307년 아들 오자(吾咨)를 보내 구원했다.

4. 1. 설휴에 대한 오언의 동경

오언은 오현 오군 출신으로 가난하게 자랐다. 키가 8척(188cm)이며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통강현에서 말단 관리로 오나라에서 벼슬을 시작했다.[2] 269년 12월경,[3] 오언은 장군 설수가 대군을 이끌고 교지군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 좌절감을 느꼈다. 이때 관상가 유찰은 오언의 얼굴을 보고 "공은 외모로 보아 언젠가 경력에서 같은 수준에 도달할 것입니다. 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4]

4. 2. 육항의 신임

육항은 오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지만, 다른 장군들이 반대할 것을 우려하여 선뜻 발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육항은 여러 장수들을 모아 연회를 열고, 몰래 한 사람에게 미치광이 흉내를 내게 하여 칼을 휘두르게 했다. 다른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 도망쳤지만, 오언은 침착하게 책상을 들어 자신을 방어했다. 이를 본 장군들은 모두 오언의 용기에 감탄했고, 육항은 그를 중요한 직책에 등용할 수 있었다.[5]

4. 3. 무제와의 문답

진 무제는 오나라가 멸망한 후, 오언을 진성군의 태수로 임명했다. 어느 날 무제가 설영에게 손호가 실패한 이유를 묻자, 설영은 손호를 부정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무제가 같은 질문을 오언에게 하자, 오언은 "오나라의 군주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신하들은 덕이 있고 현명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무제가 "그렇다면 왜 오나라가 멸망했는가?"라고 묻자, 오언은 "존속할지 멸망할지는 오직 하늘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폐하께서 저희를 정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늘의 일인데, 어찌 인간의 행위를 탓해야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곁에 있던 장화는 오언에게 "경은 오나라의 장수로 여러 해를 지냈는데도, 저는 경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참 이상하군요."라고 말했다. 오언은 "폐하께서도 저를 아시는데, 어찌 아시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무제는 오언의 말에 감명받아 그를 칭찬했다.[9]

4. 4. 육기, 육운 형제와의 관계

오나라 황제 손권은 일찍이 육강과 그의 사촌 형제인 육희 중 누가 더 훌륭한지 오언에게 질문했다. 오언은 "덕망 면에서는 육강이 육희보다 못하고, 공적 면에서는 육희가 육강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라고 말했다. 오언이 교주에 부임한 후, 그는 육강의 아들인 육기와 육운에게 선물을 보냈다. 육기는 처음에는 선물을 받으려 했지만, 육운이 육기의 형편없는 성장 배경과 아버지에 대한 오언의 발언을 언급하며 그를 만류했다. 육기는 이에 동의했고,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오언에 대해 비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윤우(尹虞)라는 관리는 육기 형제에게 오언을 그의 상황으로 판단하고 사소한 불경함으로 가혹하게 비방한다고 꾸짖었다. 육기 형제는 잘못을 깨닫고 오언에 대한 비판을 멈추고 그와 더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어느 날, 오언은 무제로부터 과거에 모셨던 육항·육희의 인물에 대해 질문을 받자, "덕과 명망에서는 육항이 육희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공적을 세워 칭찬받는 점에서는 육희가 육항에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평가하여, 과거의 은인인 육항만을 칭찬하는 듯한 발언은 하지 않았다.[4] 그 때문에 육항의 아들인 육기·육운에게 소외당하게 되었고, 오언으로부터 육씨 가문에 보내는 선물은 거부당하게 되었다.[4] 이후, 오언을 험담하는 육기·육운에게 윤우가 다음과 같이 충고하자, 비로소 육기 등의 마음이 풀렸다고 한다.[4]

"고대부터 천한 신분에서 출세한 자 중에는 제왕도 있습니다. 겨우 공경(公卿) 정도가 어떻다는 것이오. 하정·후사광·당빈·장의윤 등이 모두 가난하고 천한 신분에서 출세하여 모두 중앙의 측근이나 지방의 중진이 되었지만, 험담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당신들은 사칙(오언) 옹이 질문에 조금 칭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험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방 사람들이 모두 당신들을 버리고 당신들이 외톨이가 될까 봐 걱정입니다"[4]

참조

[1] 서적 Book of Jin
[2] 서적 Jin Shu
[3] 서적 Sanguozhi
[4] 서적 Jin Shu
[5] 서적 Jin Shu
[6] 서적 Zizhi Tongjian
[7] 서적 Sanguozhi
[8] 서적 Jin Shu
[9] 서적 Jin Shu
[10] 서적 Jin Shu
[11] 서적 Jin Shu
[12] 서적 Zizhi Tongjian
[13] 서적 Jin Shu
[14] 서적 晋書
[15] 서적 晋書斠注
[16] 간행물 晋方鎮年表
[17] 서적 北堂書鈔
[18] 정보
[19] 정보
[20] 서적 太平御覧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