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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초칠국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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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초칠국의 난은 전한 경제 시대에 일어난 제후들의 반란으로, 한 고조 유방이 봉건제와 군현제를 혼합한 군국제를 실시한 것이 배경이 되었다. 경제는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영지를 삭감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이에 반발한 오나라를 비롯한 일곱 제후국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주아부의 활약으로 3개월 만에 진압되었고, 반란에 가담한 제후국들은 멸망하거나 영지가 축소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제후왕의 권한은 더욱 약화되었고, 중앙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어 군국제는 점차 군현제와 유사한 형태로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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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초칠국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명오초칠국의 난
원어명七国之乱 (중국어)
시기기원전 154년
장소중국 동부
결과전한의 승리, 황권 강화
교전 세력
교전국 1전한
교전국 1-1여남 왕국
교전국 1-2양 왕국
교전국 1-3제 왕국
교전국 1-4하간 왕국
교전국 2오초칠국
교전국 2-1오 왕국
교전국 2-2초 왕국
교전국 2-3교서 왕국
교전국 2-4조 왕국
교전국 2-5교동 왕국
교전국 2-6치천 왕국
교전국 2-7제남 왕국
지휘관 및 지도자
전한 측 지휘관경제
전한 측 지휘관 2주아부
전한 측 지휘관 3두영
전한 측 지휘관 4이광
칠국 측 지휘관오왕 유비†
칠국 측 지휘관 2초왕 유무
칠국 측 지휘관 3교서왕 유앙
칠국 측 지휘관 4조왕 유수
칠국 측 지휘관 5교동왕 유웅거
칠국 측 지휘관 6치천왕 유현
칠국 측 지휘관 7제남왕 유벽광
병력 규모
전한 측 병력360,000명
칠국 측 병력 (오)200,000명
칠국 측 병력 (기타)300,000명
피해 규모
전한 측 피해미상
칠국 측 피해거의 전멸
기타 정보
오초칠국의 난 지도
한나라 시대의 오초칠국의 난을 보여주는 지도

2. 역사적 배경

한나라 초기, 한 고조 유방은 제국의 약 3분의 1에서 2분의 1에 해당하는 영토에 친척들에게 제후 작위를 수여했다. 이는 군현제 하에 중국 지역에 대한 유씨 일족의 지배를 통합하려는 시도였다.[2]

한 문제 재위 기간 동안, 이들 제후들은 자체적인 법을 제정하고, 자체적인 화폐를 주조하고 세금을 징수했다. 많은 제후들은 자신들의 영지 내에서 황실 정부의 권위를 사실상 무시했다. 한 경제가 기원전 157년에 황제가 되었을 때, 부유한 제후국인 오나라는 특히 지배적이었다.

한나라 이전 진나라는 지방 전체를 군과 현으로 나누어 직할 통치하는 군현제를 채택했다. 그러나 한나라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치주의에 대한 반성과 오랜 전란으로 인한 국력 피폐를 고려하여 군국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진나라 이외의 구 육국 지역의 선비와 백성들 중에는 한나라의 황제를 "진왕"과 동렬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고, 제후왕을 왕으로 삼아 옛 육국 (전국 칠웅)의 부활을 바라는 경향이 있었다.

그 후 한나라는 문제·경제 시대의 선정을 통해 점차 국력을 회복했고, 중앙 정부는 각지 제후왕들의 권력을 꺼리게 되었다. 제후왕 쪽에서도 자신의 영지 내에서는 완전한 독립의 권한을 유지하며 중앙 정부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들이 많아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나라는 제염과 동전 주조로 얻는 재력을 바탕으로, 오왕 유비의 세자 유현이 황태자 시절의 경제에게 육박 바둑판을 던져 살해당한 경위도 있어 제후왕의 의무인 장안으로의 참근을 중단하는 등 독립적인 태도를 강화했다.

중앙에서도 가의조착은 "제후왕의 권한을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원앙은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황족인) 유씨 일문의 화합을 깨뜨리고 흉노 등의 외적을 이롭게 한다"고 하는 등, 제후왕 대책은 필요하다고 여겨졌지만, 그 수단에 대해서는 양론이 있었다. 문제는 온건 정책을 취하여 오왕에게도 지팡이를 하사하고 참근을 면제하는 등 온건하게 대처했기에 갈등이 표면화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문제에서 경제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후, 경제는 최측근인 어사대부가 된 조착의 말을 받아들여 제후왕들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영지를 차례차례 삭감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제후왕들은 경계심과 반발심을 축적해갔다.

오왕은 영내의 장군(鄣郡)에 구리 광산이 있어 망명객을 불러모아 불법으로 주조하고, 나라 동쪽에 면한 황해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부세를 걷지 않아도 나라는 풍족했다.[8]

문제 때에 오나라 태자 유현이 입조해 황태자(경제)와 육박을 했는데, 서로 다투다 황태자가 육박 판을 던져 유현을 죽이고 말았다. 한나라에서는 유현의 시체를 오나라로 보내 장사지내게 했는데, 오왕은 장안에서 장사지내지 않은 것에 노해 원망을 품고 입조하지 않았다.

경제는 태자 시절부터 총애한 조조를 어사대부로 삼았고, 조조는 제후왕의 죄를 물어 지군(제후국 관할의 군 중 서울을 관할하지 않는 지역)을 덜어내도록 청을 올렸다. 경제는 이 문제를 놓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했는데, 두영 외에는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조는 30가지 법령을 바꾸어 제후국들을 소란하게 했다.[9] 조조는 경제에게 올린 청에서 오왕의 반란은 이미 기정사실로 여기고 왕국령을 덜어내면 반란이 일찍 일어나겠지만 피해가 적을 것이라고 했다.[10] 경제와 조조는 세 나라 왕의 죄를 추궁해 그들의 군을 덜어냈다.

삭감된 지역비고
조왕 유수상산군경제 2년(기원전 155년)
초왕 유무동해군 혹은 동해군과 설군경제 3년(기원전 154년), 효문태후 상중에 간음
교서왕 유앙여섯 현작위를 팔고 간음, 교서국은 교서군 1군만 있는 제후국이라 군을 삭감하는 것은 곧 폐번



조정에서는 경제에게 큰 불만을 품고 있는 오나라 지군도 덜어낼 의논을 했고, 오왕은 선수를 쳐 반란을 일으키고자 해 중대부 응고(應高)를 교서왕에게 보내 설득했다. 교서왕은 반란에 가담할 것을 약속하고, 이웃의 제·치천·교동·제남에도 사신을 보내 반란에 함께할 것을 약속받았다.[16]

3. 삭번 정책과 반발

한 문제 재위 기간 동안, 제후들은 자체적인 법을 제정하고, 화폐를 주조하며 세금을 징수하는 등 황실의 권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 경제 즉위 후, 부유한 오나라는 특히 지배적이었다.[4] 경제의 핵심 참모인 조조는 제후국의 규모를 줄여 위협을 줄일 것을 제안했다.[5] 조조는 오나라와 다른 제후국의 반란 가능성을 고려했지만,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는 것이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154년, 경제는 다음과 같은 처벌을 명령했다.

대상처벌 내용근거
초나라동해군 몰수초왕 유무가 박태후 상중에 음주
조나라상산군 몰수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범죄
교서국6개 현 몰수교서왕 유앙이 작위 판매 자금 횡령
오나라회계군과 장군 몰수오왕 유비의 다양한 범죄[4]



한나라 초기에 한 고조 유방은 친척들에게 제후 작위를 수여하여 군현제 하에 통합하려는 시도를 했다.[2] 그러나 제후왕들은 자신의 영지 내에서 독립적인 권한을 유지하며 중앙 정부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오왕 유비는 세자 유현이 경제에게 살해당한 경위도 있어 중앙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5]

중앙에서는 가의조착이 제후왕의 권한 삭감을 주장했지만, 원앙은 유씨 일문의 화합을 깨뜨릴 수 있다고 반대했다. 문제는 온건 정책을 취했지만, 경제는 조조의 주장을 받아들여 영지 삭감을 시작했다.



오왕 유비는 장군에 구리 광산이 있어 망명객을 모아 불법으로 돈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7][8] 이 때문에 부세를 걷지 않아도 나라가 풍족했다. 문제 때 오나라 태자 유현이 황태자(경제)와 육박을 하다 황태자가 던진 육박 판에 맞아 죽었다. 오왕은 이에 원한을 품고 입조하지 않았다.

경제는 조조를 어사대부로 삼았고, 조조는 제후왕의 죄를 물어 지군을 덜어내도록 청을 올렸다.[9] 조조는 오왕의 반란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왕국령을 덜어내면 반란이 일찍 일어나겠지만 피해가 적을 것이라고 했다.[10]

조정에서 오나라 지군을 덜어낼 의논을 하자, 오왕은 반란을 일으키고자 교서왕을 설득했다. 교서왕은 반란에 가담하고, 이웃 제후국에도 사신을 보내 반란에 함께할 것을 약속받았다.[16] 오나라의 회계·장 두 군을 덜어낸다는 조서가 내려오자 반란은 실현됐다. 다음 일곱 나라의 왕들은 한나라에서 임명한 관리를 죽이고 반란에 참여했다.[17]

봉국을 삭감당한 오·교서·초·조 네 나라가 모두 참여했으며, 교서왕이 꾀어들인 교동·치천··제남 중 제나라를 제외한 세 나라의 왕도 참여했다.

4. 반란의 발발

吳楚七國之亂중국어 진압에 참여한 한나라측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역할비고
태위주아부반란 진압군 총사령관주발의 아들
대장군두영반란 진압, 형양 주둔, 조나라와 제나라 방면 군사 감독두태후와 불화로 칩거 중 경제가 등용
-난포조나라 공격초한전쟁 당시 활약
-역기조나라 공격
태상원앙오왕 설득 시도 (실패)전 오나라 재상, 조조 주살 건의
종정유통오왕 설득 시도 (실패)오왕의 조카



경제는 조조를 주살하여 반란군에 사죄하고, 원앙태상으로, 오왕의 조카 덕경후 유통종정으로 삼아 오왕을 찾아가게 했다. 이때 오나라와 초나라는 양나라의 극벽(棘壁)을 공격하고 있었다. 먼저 친족인 덕경후가 오왕을 만나 회유하고 조서를 주었으나, 오왕은 "내가 이미 동쪽의 황제인데 누구에게 절하겠느냐?" 하며 원앙을 만나지 않고 억류하여 자신의 장수가 되도록 겁박했다.[40] 원앙이 거절하자 오왕은 원앙을 죽이려 했으나, 원앙은 이전에 은혜를 입었던 오나라 군중의 사마의 도움을 받아 탈출해 양나라로 가서 귀환했다.[41][42]

5. 전개 과정

기원전 154년, 오나라 왕 유비는 조정의 영토 삭감 움직임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초나라, 조나라 등 6개국 왕들도 동조하여 반란에 가담하면서 총 7개국이 참여하는 "오초칠국의 난"이 발발했다. 반란군은 유씨 왕조를 위협하는 간신 조조를 처단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6]

오나라는 남쪽의 남월의 병력을 빌려 총 70만 명의 대군을 모았고, 조나라는 북쪽의 흉노와 연합하여 반란 규모를 키웠다. 제나라에서는 교서왕, 교동왕, 치천왕, 제남왕이 반란에 가담했지만, 제북왕 유지와 과거 제나라 수도였던 임치(제효왕)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교서왕 등은 임치를 공격했으나 요새였기 때문에 함락시키지 못하고 발이 묶여, 결국 오나라와 초나라 군대만이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회남왕 유안도 반란에 가담하려 했으나, 재상 장석지의 계략으로 가담하지 못했다.

오나라 군은 14세부터 62세까지 남자 백성을 징병하여 병사의 질은 낮았지만, 수는 중앙 정부군을 압도했다. 오나라는 영지에서 얻는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군대를 운영했기에, 경제는 큰 위기감을 느꼈다.

경제는 과거 오나라 재상을 지냈고 직언으로 유명했던 원앙을 불러 오나라 내부 정보와 조언을 구했다. 원앙은 반란군이 오나라 왕의 이익에만 매달려 있고, 주변 간신들도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진압될 것이라며 조조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다. 경제는 고민 끝에 조조를 처형했다.[6] 원앙은 오나라 왕의 조카와 함께 화평 사절로 갔지만, 이미 천하의 반이 가담한 상황에서 오나라 왕은 사치스러웠고, 조조 제거는 명분에 불과했기에 반란군은 칼을 거두지 않았다. 다만 연나라 등 중립을 지키거나 중앙 정부 편에 선 제후들도 영토 삭감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반란 확대를 저지하는 효과는 있었다. 원앙은 오나라 왕에게 장군으로 등용될 것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하고 갇혔다가, 과거 은혜를 베풀었던 오나라 사마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경제에게 보고했다.

경제는 건국 공신 주발의 아들이자 문제가 "한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군사를 맡겨 해결하라"고 유언했던 주아부태위로 임명하고, 초한전쟁에서 활약한 난포를 붙여 반란 진압을 명했다. 반란군은 대군이었지만 통솔력이 부족했고, 오나라 장군이 기습전을 제안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정공법만 고집했다. 도중에 양나라 왕 유무의 완강한 저항에 막혀 발이 묶였다. 그 사이 주아부는 요충지인 낙양과 형양을 확보하고, 양나라, 조나라, 제나라 중간에 있는 창읍에 들어가 방어를 강화했다. 유무와 경제의 양나라 구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주아부는 이를 무시하고 방어에 집중했다. 한편, 조나라와 제나라를 견제하고, 반란군의 주력인 오나라와 초나라 군대에게는 기동성이 뛰어난 병사를 보내 강의 보급로를 파괴하는 등 보급선을 끊는 전술을 사용했다.

오나라와 초나라 군대는 전의가 크게 저하되었고, 병사와 장수들 사이에서 탈주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오나라 왕은 창읍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주아부는 예상대로 수비에 전념했고, 오나라 왕의 양동 작전을 간파하여 동남쪽에 군대를 집중시키고 한나라 군대의 주특기인 평지 전차로 격퇴했다. 오나라 군대는 철수했지만, 주아부는 추격하여 오나라 군대를 붕괴시켰다. 오나라 왕은 군대를 버리고 동구로 도망쳤지만, 동구 왕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 머리는 중앙에 바쳐졌다. 주력 오나라 군대의 대패 및 오나라 왕의 죽음을 알게 된 다른 왕들은 반란이 실패로 끝났음을 알고, 그중 2명은 자살했고, 그 외의 왕은 귀국했지만 후에 살해되었다.[74]

부조 장식으로 사냥 장면을 묘사한 중국 무덤의 벽 조각, 기마 궁술, 한나라 (기원전 202년 - 서기 220년) 국립 동양 미술관, 로마

5. 1. 오·초 전선

기원전 154년, 오나라 왕 유비는 조정의 영토 삭감 움직임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초나라, 조나라 등 6개국 왕들도 동조하여 총 7개국이 참여하는 "오초칠국의 난"이 발발했다. 반란군은 유씨 왕조를 위협하는 간신 조조를 처단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6]

오나라는 남쪽의 남월의 병력을 빌려 총 70만 명의 대군을 모았고, 조나라는 북쪽의 흉노와 연합하여 반란 규모를 키웠다. 제나라에서는 여러 나라들이 반란에 가담했지만, 제북왕 유지와 과거 제나라 수도였던 임치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교서왕 등은 임치를 공격했으나 요새였기 때문에 함락시키지 못하고 발이 묶였다. 결국 오나라와 초나라 군대만이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회남왕 유안도 반란에 가담하려 했으나, 재상 장석지의 계략으로 가담하지 못했다.

오나라 군은 14세부터 62세까지 남자 백성을 징병하여 병사의 질은 낮았지만, 수는 중앙 정부군을 압도했다. 오나라는 영지에서 얻는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군대를 운영했기에, 경제는 큰 위기감을 느꼈다.

경제는 과거 오나라 재상을 지냈고 직언으로 유명했던 원앙을 불러 오나라 내부 정보와 조언을 구했다. 원앙은 "반란군은 오나라 왕의 이익에만 매달려 있을 뿐이며, 주변 간신들도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진압될 것"이라며 조조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다. 경제는 고민 끝에 조조를 처형했다.[6] 원앙은 오나라 왕의 조카와 함께 화평 사절로 갔지만, 이미 천하의 반이 가담한 상황에서 오나라 왕은 사치스러웠고, 조조 제거는 명분에 불과했기에 반란군은 칼을 거두지 않았다. 연나라 등 중립을 지키거나 중앙 정부 편에 선 제후들도 영토 삭감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반란 확대를 저지하는 효과는 있었다. 원앙은 오나라 왕에게 장군으로 등용될 것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하고 갇혔다가, 과거 은혜를 베풀었던 오나라 사마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경제에게 보고했다.

경제는 건국 공신 주발의 아들이자 문제가 "한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군사를 맡겨 해결하라"고 유언했던 주아부태위로 임명하고, 초한전쟁에서 활약한 난포를 붙여 반란 진압을 명했다. 반란군은 대군이었지만 통솔력이 부족했고, 오나라 장군이 기습전을 제안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정공법만 고집했다. 도중에 양나라 왕 유무의 완강한 저항에 막혀 발이 묶였다. 그 사이 주아부는 요충지인 낙양과 형양을 확보하고, 양나라, 조나라, 제나라 중간에 있는 창읍에 들어가 방어를 강화했다. 유무와 경제의 양나라 구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주아부는 이를 무시하고 방어에 집중했다. 한편, 조나라와 제나라를 견제하고, 반란군의 주력인 오나라와 초나라 군대에게는 기동성이 뛰어난 병사를 보내 강의 보급로를 파괴하는 등 보급선을 끊는 전술을 사용했다. 오나라와 초나라 군대는 이익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에 굶주림에 전의가 빠르게 꺾일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오나라와 초나라 군대는 전의가 크게 저하되었고, 병사뿐만 아니라 장수들 사이에서도 탈주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오나라 왕은 창읍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주아부는 예상대로 수비에 전념했고, 오나라 왕의 양동 작전을 간파하여 동남쪽에 군대를 집중시키고 한나라 군대의 주특기인 평지 전차로 격퇴했다. 오나라 군대는 철수했지만, 주아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추격했다. 오나라 군대는 붕괴되었고, 오나라 왕은 군대를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오나라와 초나라 군대는 수양의 양나라 수도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주아부는 경제에게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은 적절한 전략이 아니라고 제안했다. 특히 초나라 군대는 맹렬함과 뛰어난 기동성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대신 양나라가 공격의 주된 피해를 입게 하고, 양나라를 우회하여 오나라와 초나라의 보급선을 차단하여 반란군을 굶어 죽게 하는 계획을 세웠다. 경제는 이에 동의했고, 주아부는 수도 장안을 출발하여 이미 영양에 집결해 있던 주력 부대에 합류했다. 오나라와 초나라는 장안과 영양 사이 길목에 자객을 매복시켜 주아부를 암살하려 했지만, 병사 조섭(趙涉)의 경고를 받은 주아부는 우회로를 이용하여 자객을 피했다.

주아부는 군대 지휘권을 잡은 후, 오나라와 초나라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제녕 (산둥성)의 창읍으로 향했다. 이때 양나라는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유무는 주아부에게 즉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여러 차례 사자를 보냈지만, 주아부는 이를 무시했다. 경제는 형을 걱정하여 주아부에게 즉시 양나라로 가서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주아부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기병대를 보내 오나라와 초나라의 보급선을 차단했다. 이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유무의 장군 한안국(韓安國)과 장우(張羽)가 강력한 방어를 펼쳐 오나라와 초나라가 양나라를 신속하게 점령할 수 없게 되자, 북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주아부를 공격했다. 주아부는 오나라와 초나라 군대와 정면 전투를 피하고, 대신 자신의 진지를 방어하는 데 집중했다. 주아부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오나라와 초나라 군대는 굶주림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붕괴되었다.

5. 2. 제·조 전선

오왕 유비가 반란을 일으키자, 초왕 유무와 조왕 유수도 이에 동조하였다.[17] 조나라에서는 승상 건덕과 내사 왕한이 반대했으나 조왕이 이들을 살해했고,[18] 초나라에서는 승상 장상과 태부 조이오가 반대했으나 초왕이 이들을 살해했다.[19]

제나라에서는 교서왕 유앙, 교동왕 유웅거, 치천왕 유현, 제남왕 유벽광이 반란에 가담하여,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제나라의 서울 임치를 포위하였다.[74] 그러나 임치는 견고하여 석 달 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제나라 중대부 노앙은 황제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황제는 오나라와 초나라를 무찔렀다는 거짓 정보를 주며 제나라를 지키라고 명했다. 그러나 세 나라는 노앙을 협박하여 한나라가 졌다고 거짓 보고를 하게 했다. 노앙은 성 아래에서 제효왕 유장려에게 한나라가 승리하고 구원군을 보내니 항복하지 말라고 알렸고, 세 나라는 노앙을 죽였다.[74]

제나라는 전황이 나빠 세 나라와 연합하려 했으나, 맹약 직전 노앙이 도착하여 대신들이 제효왕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권했다. 한나라의 난포와 평양후 조양이 이끄는 구원군이 도착하여 세 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제나라 포위를 풀었다. 오나라와 초나라가 패주했다는 소식을 듣자 반란군은 각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74][75][76][77] 교서왕의 태자 덕은 한나라 군을 습격하고 실패하면 바다로 도망치자고 제안했으나, 교서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궁고장후가 조서를 들고 와 교서왕을 꾸짖자 교서왕은 목숨을 구걸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교서왕과 태자, 태후 모두 자살했다. 교동왕, 치천왕, 제남왕도 모두 자살했다.[78][79] 진압군은 제효왕이 반란에 가담하려 했다는 말을 듣고 제나라를 공격하려 했고, 제효왕도 자살했다.[80] 제북왕 유지는 자살하여 처자만이라도 지키려 했으나, 공손확이 양효왕에게 변호하여 제북왕은 처벌받지 않았다.[81]

조왕 유수역기의 공격을 받아 한단에서 농성하며 일곱 달을 버텼다. 조왕과 협력하기로 한 흉노는 오나라와 초나라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약속을 어겼다. 역기가 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제나라를 공격했던 난포가 역기를 도와 수공으로 한단성을 함락시켰다. 조왕은 자살했다.[74]

한편, 유비의 객인 주구는 하비에서 현령을 죽이고 민병대를 장악하여 반란에 가담, 북쪽으로 진격하여 성양국 군대를 상대로 승리했다. 그러나 유비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감에 휩싸여 죽었다.[74]

제나라 왕 유장려는 항복을 고려했으나, 사신 루가 저항하라고 설득하여 저항 의지를 굳혔다. 난포와 평양후 조기가 도착하여 네 제후국을 격파했지만, 제나라가 처음에는 음모의 일부였음을 발견했다. 유장려는 자결했지만, 경제는 그를 불쌍히 여겨 아들 유수가 제후국을 상속하도록 허락했다.[74]

반란을 일으킨 네 제후국의 왕들은 항복하거나 자결했다. 네 제후국은 중앙 정부에 의해 빼앗겼다.[74]

조나라는 흉노가 전투에 불참하면서 희망을 잃었다. 난포이기가 한단을 공격하여 제방을 무너뜨려 함락시켰고, 조나라 왕 유수는 자결했다.[74]

제북왕 유지는 공손획의 변호로 목숨을 건지고 재천국을 받았다.[74]

6. 결과 및 영향

오왕은 영내의 장군(鄣郡)에 구리 광산이 있어 망명객을 불러모아 불법으로 주조하고, 나라 동쪽에 면한 황해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부세를 걷지 않아도 나라는 풍족했다.[8]

문제 때에 오나라 태자 유현이 입조해 황태자(경제)와 육박을 했는데, 서로 다투다 황태자가 육박 판을 던져 유현을 죽이고 말았다. 한나라에서는 유현의 시체를 오나라로 보내 장사지내게 했는데, 오왕은 장안에서 장사지내지 않은 것에 노해 원망을 품고 입조하지 않았다.

진압이 끝나자, 경제는 원래 오왕의 동생인 덕애후의 아들과 초왕의 할아버지 초원왕의 아들 유례로 두 나라의 후사를 모두 세워주려 했다. 그러나 두태후가 황실의 원로로 난을 주도한 오나라를 괘씸하게 여겨, 유례만 초왕이 됐고 오나라는 이름을 강도나라로 고쳐 여남왕에게 주었다.[82][83] 제북왕은 반란군과 함께 모의했으나 실제로 반란에는 가담하지 않았기에 치천나라로 옮기고,[84] 반란 가담을 단호히 거부한 형산왕을 표창해 제북나라로 옮겼다. 여강왕은 반란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월나라와 교류했으므로, 장강 북쪽에 있는 형산나라로 옮겼다.[85] 여남나라와 여강나라는 폐지하고 한 조정의 직할지로 삼았다. 교서나라에는 유단을 봉했다. 한편 조나라에서 중산나라를 새로 만들어 중산정왕을 봉했다.

주아부는 조후에, 두영은 위기후에 봉했고, 이 둘은 조회에서 열후 중 가장 존귀한 대접을 받았다.

기원전 153년, 교동나라에 경제의 아들 유철을 왕으로 봉했다. 기원전 152년, 광천왕을 조나라로 옮겨 봉했다.

고조는 처음에는 제국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독립적인 군사력을 가진 황족들을 봉했다. 그러나 경제가 정점에 달했을 때, 이들은 이미 황실 정부의 법과 명령을 따르지 않아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만약 이 일곱 제후들이 이 충돌에서 승리했다면, 한나라는 느슨한 연합 국가로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란 이후, 제후국 제도는 유지되었지만, 경제력이 강했던 제후들의 권한은 점차 줄어들었고, 제후국의 규모 또한 경제력이 쇠퇴하면서 축소되었다. 이는 경제가 안정된 무제 시대까지 이어졌다. 한나라의 장수와 함께, 분열된 국가보다 통일된 제국을 갖는 것이 정상이라는 중국인의 사고방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난 이후, 제후왕에 대한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그 전까지 왕이 중앙과 마찬가지로 작은 조정(朝廷)을 가지고 영지를 통치하던 것을, 통치의 실권은 조정이 임명한 관료인 이 쥐고, 왕은 단지 영지에서 올라오는 조세를 받는 존재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 무제 시대에는 추은의 명령이 내려져, 그 전까지 장자 상속으로 되어 있던 영지를 다른 아들들에게도 분할하여 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제후왕의 세력은 쇠퇴해 갔고, 군국제도 거의 군현제와 비슷하게 되었다.

7. 진압 이후

경제는 반란이 진압된 후, 반란을 주도한 오나라를 괘씸하게 여긴 두태후의 뜻에 따라 오나라의 이름을 강도나라로 고치고 여남왕에게 주었다.[82][83]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제북왕은 치천나라로 옮기고,[84] 반란 가담을 거부한 형산왕은 제북나라로 옮겼다. 여강왕은 월나라와 교류했기에 장강 북쪽의 형산나라로 옮겼으며,[85] 여남나라와 여강나라는 폐지되어 한나라 조정의 직할지가 되었다. 교서나라에는 유단을, 조나라에서 새로 만들어진 중산나라에는 중산정왕을 봉했다.

주아부는 조후에, 두영은 위기후에 봉해졌으며, 이 둘은 조회에서 열후 중 가장 존귀한 대접을 받았다.

기원전 153년, 교동나라에 경제의 아들 유철이 왕으로 봉해졌다. 기원전 152년에는 광천왕이 조나라로 옮겨 봉해졌다.

오초칠국의 난 이후, 제후국 제도는 유지되었지만 제후들의 권한은 점차 줄어들었고, 제후국의 규모 또한 축소되었다. 이는 무제 시대까지 이어졌다. 반란 이후 제후왕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어, 왕은 영지에서 올라오는 조세를 받는 존재로만 남게 되었다. 무제 시대에는 추은의 명령이 내려져 영지를 다른 아들들에게도 분할하여 줄 수 있게 되면서, 제후왕의 세력은 더욱 쇠퇴했고, 군국제군현제와 비슷하게 되었다.

참조

[1] 논문 An Outline of the Local Administrations of the Later Han Empire https://hkjo.lib.hku[...] 1967-11-00
[2] 논문 The Constitutional Development of the Western Han Dynasty American Oriental Society
[3] 서적 Chronicle of the Chinese Emperors: the Reign-by-Reign Record of the Rulers of Imperial China Thames & Hudson Ltd. 1998
[4] 서적 Memory and Agency in Ancient China: Shaping the Life History of Object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8
[5] 서적 Representations of Childhood and Youth in Early China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4
[6] 문서 袁盎と鼂錯は政敵の間柄であり、劉氏の和についてなど政策でもあらゆる点で反対だったため、極めて仲が悪かった。実際に鼂錯は呉王の蜂起を理由に袁盎を殺そうとしたものの、景帝の言により隠居させるに留まっていた。袁盎は機を逆に利用し、鼂錯を殺したのである。ただし、鼂錯の殺害も反乱への対応の一環でしかなかったかも知れない。
[7] 문서 예장군은 오기이다. 안사고 주석, 반고 찬, 《한서》35권 열전 제5 오왕 비
[8] 문서 반고: 《한서》 권35 형연오전,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郡國諸侯各務自拊循其民。吳有豫章郡銅山,即招致天下亡命者盜鑄錢,東煑海水為鹽,以故無賦,國用饒足。”
[9] 문서 위와 같음, 권49 원앙조조전제49, “遷為御史大夫,請諸侯之罪過,削其支郡。奏上,上令公卿列侯宗室雜議,莫敢難,獨竇嬰爭之,繇此與錯有隙。錯所更令三十章,諸侯讙譁。”
[10] 문서 위와 같음, 권35 형연오전제5, “今吳王前有太子之隙,詐稱病不朝,於古法當誅。文帝不忍,因賜几杖,德至厚也。不改過自新,迺益驕恣,公即山鑄錢,煑海為鹽,誘天下亡人謀作亂逆。今削之亦反,不削亦反。削之,其反亟,禍小;不削之,其反遟,禍大。”
[11] 문서 위와 같음, 권38 고오왕전제8, “趙王遂立二十六年,孝景時鼂錯以過削趙常山郡,”
[12] 문서 위와 같음, 권35 형연오전제5, “及前二年,趙王有罪,削其常山郡。”
[13] 문서 위와 같음, 권36 초원왕전제6, “王戊稍淫暴,二十年,為薄太后服私姦,削東海、薛郡,乃與吳通謀。”
[14] 문서 위와 같음, 권35 형연오전제5, “三年冬,楚王來朝,錯因言楚王戊往年為薄太后服,私姦服舍,請誅之。詔赦,削東海郡。”
[15] 문서 위와 같음, “膠西王卬以賣爵事有姦,削其六縣。”
[16] 문서 위와 같음, 권35 형연오전제5, “王不聽,遂發使約齊、菑川、膠東、濟南,皆許諾。”
[17] 문서 위와 같음, 권35 형연오전제5, “乃削吳會稽、豫章郡書至,則吳王先起兵,誅漢吏二千石以下。膠西、膠東、菑川、濟南、楚、趙亦皆反,發兵西。”
[18] 문서 위와 같음, 권38 고오왕전제8, “趙王遂立二十六年,孝景時鼂錯以過削趙常山郡,諸侯怨,吳楚反,遂與合謀起兵。其相建德、內史王悍諫,不聽。遂燒殺德、悍,”
[19] 문서 위와 같음, 권36 초원왕전제6, “其相張尚、太傅趙夷吾諫,不聽。遂殺尚、夷吾,”
[20] 문서 위와 같음, 권35 형연오전제5, “齊王後悔,背約城守。濟北王城壞未完,其郎中令劫守王,不得發兵。”
[21] 문서 위와 같음, 권44 회남형산제북왕전제14, “孝景三年,吳楚七國反,吳使者至淮南,王欲發兵應之。其相曰:「王必欲應吳,臣願為將。」王迺屬之。相已將兵,因城守,不聽王而為漢。”
[22] 문서 위와 같음, “吳使者至廬江,廬江王不應,而往來使越;至衡山,衡山王堅守無二心。”
[23] 문서 위와 같음, 권35 형연오전제5, “燕王、趙王故與胡王有約,燕王北定代、雲中,轉胡衆入蕭關,走長安,匡正天下,以安高廟。”
[24] 문서 위와 같음, “七國之發也,吳王悉其士卒,下令國中曰:「寡人年六十二,身自將。少子年十四,亦為士卒先。諸年上與寡人同,下與少子等,皆發。」二十餘萬人。”
[25] 문서 위와 같음, “南使閩、東越,閩、東越亦發兵從。”
[26] 문서 위와 같음, 권94 서남이양월조선전, “后數世,孝景三年,吳王濞反,欲從閩粵,閩粵未肻行,獨東甌從。”
[27] 문서 위와 같음, 권35 형연오전제5, “孝景前三年正月甲子,初起兵於廣陵。西涉淮,因并楚兵。發使遺諸侯書曰:「吳王劉濞敬問膠西王、膠東王、菑川王、濟南王、趙王、楚王、淮南王、衡山王、廬江王、故長沙王子:幸敎!”(후략)
[28] 문서 위와 같음, 趙王遂亦陰使匈奴與連兵。
[29] 문서 위와 같음, 권38 고오왕전제8, “其相建德、內史王悍諫,不聽。遂燒殺德、悍,發兵住其西界,欲待吳楚俱進,北使匈奴與連和。”
[30] 문서 위와 같음, 권49 가의전제19, “後十年,文帝崩,景帝立,三年而吳、楚、趙與四齊王合從舉兵,西鄉京師,梁王扞之,卒破七國。”
[31] 문서 위와 같음, 권53 경십삼왕전제23, “吳楚反時,非年十五,有材氣,上書自請擊吳。景帝賜非將軍印,擊吳。”
[32] 문서 위와 같음, 권46 만석위직주장전제16, “吳楚反,詔綰為將,將河閒兵擊吳楚有功,拜為中尉。”
[33] 문서 위와 같음, 권5 경제기제5, “吳王濞、膠西王卬、楚王戊、趙王遂、濟南王辟光、菑川王賢、膠東王雄渠皆舉兵反。大赦天下。遣太尉亞夫、大將軍竇嬰將兵擊之。”
[34] 문서 위와 같음, 권52 두전관한전제22, “孝景三年,吳楚反,上察宗室諸竇無如嬰賢,召入見,固讓謝,稱病不足任。太后亦慙。於是上曰:「天下方有急,王孫寧可以讓邪?」迺拜嬰為大將軍,賜金千斤。”
[35] 문서 위와 같음, “嬰言爰盎、欒布諸名將賢士在家者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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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문서 사기 권38 고오왕전제8
[85] 문서 사기 권44 회남형산제북왕전제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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