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노 세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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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쿠노 세이스케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나라현 출신이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관료로 시작하여 자치 사무 차관을 역임했다. 1963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13번의 당선을 기록했으며, 문부대신, 법무대신, 국토청 장관 등을 지냈다. 그는 헌법 개정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지하는 등 우익 성향을 보였으며, 중일 전쟁에 대한 역사 수정주의적 발언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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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노 세이스케 | |
---|---|
기본 정보 | |
인명 | 오쿠노 세이스케 |
로마자 표기 | Okuno Seisuke |
출생 | 1913년 7월 12일 |
출생지 | 일본 나라현 고세시 |
사망 | 2016년 11월 16일 (103세)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 진구마에 |
국적 | 일본 |
학력 | |
출신 학교 |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
학위 | 법학사 |
경력 | |
전직 | 내무성 관료 자치성 관료 사무차관 법무대신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칭호 및 훈장 | 훈일등욱일대수장 중의원 영년재직의원 |
가족 | 아버지: 오쿠노 사다하루 (고세정장) 장남: 오쿠노 신스케 차남: 오쿠노 마사히로 |
의정 활동 | |
직책 | 제16대 국토청 장관 토지 대책 담당 대신 |
내각 | 다케시타 내각 |
임기 시작 | 1987년 11월 6일 |
임기 종료 | 1988년 5월 13일 |
직책 2 | 제39대 법무대신 |
내각 2 | 스즈키 젠코 내각 |
임기 시작 2 | 1980년 7월 17일 |
임기 종료 2 | 1981년 11월 30일 |
직책 3 | 제95대 문부대신 |
내각 3 |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제1차 개조 내각 |
임기 시작 3 | 1972년 12월 22일 |
임기 종료 3 | 1974년 11월 11일 |
직책 4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4 | (나라현 전현구 →) 나라 3구 |
당선 횟수 4 | 13회 |
임기 시작 4 | 1963년 11월 22일 |
임기 종료 4 | 2003년 10월 10일 |
2. 생애
오쿠노 세이스케는 나라현 고세시 출신으로, 나라현립 우네비 중학교, 제1고등학교를 거쳐 1938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아버지 오쿠노 테이지는 나니와 제빙 냉장 사장, 고세 우체국 국장, 나라현 의원 등을 역임했다.
같은 해 내무성에 들어가 관료 생활을 시작,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가고시마현 경찰부 특고 과장으로서 기리시마 사건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자치성(현재의 총무성)에서 근무하며 전후 지방 재정 제도의 기초를 다졌다. 1963년 자치 사무 차관을 역임하다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정계에 입문, 13회 연속 당선되었다.
자민당 소속으로 헌법 개정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주장하는 등 우파적인 정치 성향을 보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종군 위안부는 상행위"라고 발언[6]하는 등 역사 수정주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1988년에는 국토청 장관 재임 중 중일 전쟁에 대해 "일본에 침략 의도는 없었다"고 발언[8]하여 장관직에서 사임했다.
2003년 정계 은퇴 후에도 모두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초대 회장을 맡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2016년 노쇠로 사망했다.[14][13]
2. 1. 관료 시절
나라현 고세시 출신이다. 아버지는 나니와 제빙 냉장 사장, 고세 우체국 국장, 나라현 의원, 고세정 정무를 역임한 오쿠노 세이스케이다. 나라현립 우네비 중학교, 제1고등학교를 거쳐, 1938년 3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같은 해 4월, 내무성에 입성[1]하여 시즈오카현 내무부에 배속되었다[2][3]。이후 야마나시현 내무부 인사과장을 역임했다[2]。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3년에 가고시마현 경찰부특고 과장으로서 신흥 하이쿠 탄압 사건 중 하나인 기리시마 사건을 지휘했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 다음 날 아침, 내무성이 각 성청의 관방장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을 때, 당시 동성 지방국 전시 업무과의 사무관이었던 그는 포츠담 선언에 "전범은 처벌한다" (제10조)고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범을 내지 않도록 공문서 소각 (=증거 은폐)을 제안했다[4](일본이 정식으로 항복하고, 쇼와 천황이 이를 받아들여 "공유 재산의 훼손을 금지한다"는 조서를 발표한 것은 9월 2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내무성의 폐지에 따라 내무성 지방국을 전신으로 하는 자치청 (후의 자치성, 현재의 총무성)으로 옮겼다. 자치청 세무부장, 자치청 세무국장, 자치성 재정국장을 역임하며, 시바타 마모루와 함께 전후의 지방 재정 제도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자치 관료 시대에는 도주제를 주장하며, 현(県)제와 도주제의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지적했다. 중의원 의원으로 전진한 후에도 현의 합병에 관한 법안을 제출했지만, 폐안되었다.
1963년 7월에 자치 사무 차관에 취임했지만, 이케다 하야토총리나, 오쿠다 료조나라현 지사 등에게 설득당해 10월에 퇴관하고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입후보했다[5]。
2. 2. 정치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자치성(현재의 총무성)에서 근무하였다. 자치성 세무부장, 자치성 세무국장, 자치성 재정국장을 역임하며, 시바타 마모루와 함께 전후의 지방 재정 제도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자치 관료 시대에는 도주제를 주장하며, 현(県)제와 도주제의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지적했다. 중의원 의원으로 전진한 후에도 현의 합병에 관한 법안을 제출했지만, 폐안되었다.1963년 7월 자치 사무 차관에 취임했으나, 이케다 하야토총리와 오쿠다 료조나라현 지사 등의 설득으로 10월에 퇴관하고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입후보했다[5]。
1963년 11월,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나라현 전현 구에서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13회 연속 당선되었다. 정치적 입장은 우파였으며, 헌법 개정이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을 주장해 왔다.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종군 위안부는 상행위"라고 발언하며, 적극적으로 반대론을 펼쳤다[6]。
1972년,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문부대신으로 당선 4회 만에 첫 입각했다. 재임 중 학교 교육의 수준 유지를 위한 의무 교육 학교의 교육 직원의 인재 확보에 관한 특별 조치법 성립에 진력했다. 1980년,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 법무대신에 취임했다. 법무대신 재임 시기에는 록히드 사건 재판이 진행 중이었으며, 이에 대해 "검찰은 사람의 도리를 벗어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발언한 것이 검찰청 지휘권자인 법무대신으로서 부적절한 압력이 아니냐는 비판을 야당으로부터 받았다[7]。1987년 다케시타 내각에서는 국토청 장관으로 임명되어 토지 대책에 수완이 기대되었지만, 1988년 5월 9일 중의원 결산위원회에서 중일 전쟁에 대해 "그 당시 일본에 침략의 의도는 없었다"고 발언하여 비판을 받고, 5월 13일 국토청 장관을 사임했다. 국사 타입의 관료로서, "국'''사'''청 장관" 등으로 조롱받았다.
통산 3차례 입각을 경험했다. 그 후에도, 재판관 탄핵 재판소 장, 중의원 윤리 심사회 회장, 자민당 헌법 조사회 최고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93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자민당이 결당 이래 처음으로 정권에서 물러나는 것이 확정되자, 비자민 비공산 연립 참가 여러 당은 기존의 관행을 뒤집고 비교 제1당인 자민당이 아닌 연립 측에서 전 일본 사회당 위원장 도이 다카코를 중의원 의장으로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통상 전원 일치로 이루어지는 특별 국회 개시의 의장 선거에서, 자민당은 항의의 의사로 패배를 각오하고 오쿠노에게 투표했다 (연립 불참가인 일본 공산당도 자당의 독자 후보인 야마하라 겐지로에게 투표).
2003년 5월 31일, 아소 다로가 도쿄대 강연회에서 "창씨 개명은 조선인이 원했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9], 노나카 히로무에게 "조선 이름으로는 장사가 어려웠다. 그런 호소가 많았기 때문에 창씨 개명에 나섰다. 내가 내무 관료로서 도장을 찍었다"고 말하며, 노나카를 침묵시켰다[10][11]。
2003년 10월, 제4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는 고령으로 입후보하지 않고, 장남 오쿠노 노부아키에게 지역구를 물려주는 형태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2013년 7월 12일, 기수 (100세, 세는 나이로는 101세의 생일)를 맞아, 그 축하로 친구 와타누키 민푸와 시마무라 요시노부로부터 도쿄 스카이 트리 견학에 초대받았다[12]。
2015년 11월, 일본 기자 클럽 기자 회견에서는 헌법 개정이 실현되지 않은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전후는 끝나지 않는다. 슬슬 우리 헌법을 만들자"라고 표명했다[13]。
그 외, 모두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초대 회장, 헤이조 천도 1300년 기념 사업 협회 특별 고문, 나라 대학 이사를 역임했다.
2. 3. 역사 수정주의적 발언
오쿠노 세이스케는 자민당 강경파로, 헌법 개정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주장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종군 위안부는 상행위"라고 발언하며 반대론을 펼쳤다.[6]1988년 5월 9일, 국토청 장관 재임 중 중의원 결산위원회에서 중일 전쟁에 대해 "당시 일본에 침략 의도는 없었다"고 발언했다.[8] 이 발언으로 인해 비판을 받고 5월 13일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2003년 5월 31일에는 아소 다로의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했다"는 발언[9]에 대해, "조선 이름으로는 장사가 어려웠다. 그런 호소가 많았기 때문에 창씨개명에 나섰다. 내가 내무성 관료로서 도장을 찍었다"고 옹호하며, 노나카 히로무를 침묵시켰다.[10][11]
3. 논란 및 비판
오쿠노 세이스케는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그는 반 젠더 프리 운동을 펼쳤으며,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에도 반대했다.[16] 장남 오쿠노 노부아키에 따르면, 오쿠노는 국제승공연합의 지원을 받았고, 그 대가로 해당 단체의 활동에 협력했다고 한다.[17]
자치성 재정국 국장 시절, 사토 에이사쿠에게 "(의원) 배지를 달고 말해라"는 말을 들었다. 같은 자치성 출신인 고토다 마사하루는 이론가인 오쿠노에게 논리로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나온 발언이라며 "이것은 사토 에이사쿠 씨의 패배다"라고 말했다.[18]
원내를 이동 중, 지팡이를 짚고 걷는 쿠지라오카 효스케를 앞지를 때 "연장자를 인사도 없이 앞지르다니 무슨 짓인가!"라고 호통을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1913년 7월 12일생인 오쿠노가 1915년 9월 15일생인 쿠지라오카보다 연장자였다(중의원 의원 당선은 두 사람 모두 1963년). 정계를 은퇴한 후에도 역에서 이와미 타카오와 마주쳤을 때, 에스컬레이터를 탄 이와미가 문득 계단 쪽을 보니 오쿠노가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고 한다.[19]
자치 대신·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인연으로 '인권 110번' 주최 치요마루 켄지와 대담했다. 경찰서장급에게 불만을 제기해도 해결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내게 가져와라. 국회에서 다루겠다"라고 답했다.[20]
3. 1. 역사인식 문제
오쿠노 세이스케는 자민당 강경파로, 헌법 개정과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을 주장했다. 특히 역사 인식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논란이 되는 발언을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종군 위안부는 상행위"라고 발언하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반대론을 적극적으로 펼쳤다.[6]
- 1988년 5월 9일, 국토청 장관 재임 중 중의원 결산위원회에서 중일 전쟁에 대해 "당시 일본에 침략 의도는 없었다"고 발언했다.[8] 이 발언으로 인해 비판을 받고 5월 13일 국토청 장관직에서 사임했다.
- 2003년 5월 31일, 아소 다로의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했다"는 발언[9]에 대해, "조선 이름으로는 장사가 어려웠다. 그런 호소가 많았기 때문에 창씨개명에 나섰다. 내가 내무성 관료로서 도장을 찍었다"고 옹호하며 노나카 히로무를 침묵시켰다.[10][11]
이러한 발언들은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쳤으며, 일본 내에서도 역사 인식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3. 2. 기타 논란
4. 소속 단체
- 신도정치연맹 국회의원 간담회
- 모두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초대 회장
- 헤이조 천도 1300년 기념 사업 협회 특별 고문
- 나라 대학 이사
5. 가족 관계
6.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당락 | 선거구 | 정당명 | 득표수 | 득표율 | 정수 | 득표순 | 후보자 | 연령 |
---|---|---|---|---|---|---|---|---|---|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당선 | 나라현 전현 구 | 자유민주당 | 58,017 | 14.70% | 5 | 2 | 10 | 50 |
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당선 | 나라현 전현 구 | 자유민주당 | 60,175 | 14.71% | 5 | 3 | 9 | 53 |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당선 | 나라현 전현 구 | 자유민주당 | 77,369 | 16.78% | 5 | 1 | 9 | 56 |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당선 | 나라현 전현 구 | 자유민주당 | 87,754 | 16.99% | 5 | 2 | 8 | 59 |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당선 | 나라현 전현 구 | 자유민주당 | 100,550 | 17.89% | 5 | 1 | 7 | 63 |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당선 | 나라현 전현 구 | 자유민주당 | 115,285 | 20.89% | 5 | 1 | 6 | 66 |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당선 | 나라현 전현 구 | 자유민주당 | 128,654 | 21.88% | 5 | 1 | 6 | 66 |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당선 | 나라현 전현 구 | 자유민주당 | 85,927 | 13.34% | 5 | 3 | 8 | 70 |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당선 | 나라현 전현 구 | 자유민주당 | 126,605 | 19.19% | 5 | 1 | 7 | 72 |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당선 | 나라현 전현 구 | 자유민주당 | 110,245 | 14.60% | 5 | 3 | 10 | 76 |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당선 | 나라현 전현 구 | 자유민주당 | 113,254 | 15.25% | 5 | 3 | 8 | 80 |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당선 | 나라 3구 | 자유민주당 | 72,682 | 42.14% | 1 | 1 | 4 | 83 |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당선 | 나라 3구 | 자유민주당 | 68,695 | 42.05% | 1 | 1 | 4 | 86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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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奥野誠亮さん評伝
毎日新聞
201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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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70年 あの夏 占領前文書焼却を指示... 元法相 奥野誠亮さ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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奥野誠亮元法相が満100歳 スカイツリーに上る 「社会のお役に立ち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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奥野誠亮元法相が死去、103歳 保守政治家の最長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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奥野誠亮さん死去 筋金入りの保守派、ミスター内務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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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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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法ポリスとわたり合える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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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奥野元法相死去】葬儀は近親者のみで行い、後日お別れの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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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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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教育勅語、国体思想には他民族排除の思想がビルトインされている 元文部科学事務次官・前川喜平氏に訊く②
https://shinsho-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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