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음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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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옥음방송은 1945년 8월 15일 일본 쇼와 천황이 일본의 항복을 선언하기 위해 라디오로 방송한 것을 의미한다. 포츠담 선언 수락 결정 후, 천황은 종전 조서를 직접 작성하고 녹음했으며, 이 방송은 일본 전역과 해외 점령지에 송출되었다. 방송에서는 천황이 전쟁의 불가피성을 언급하고, 핵무기의 참혹함을 이야기하며, 일본 국민에게 미래를 위한 노력을 촉구했다. 옥음방송은 일본 국민에게 천황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려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의 항복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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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음방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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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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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옥음방송 |
상영 시간 | 4분 36초 |
언어 | 고전 일본어 |
홈 방송국 | NHK |
내레이션 | 히로히토 |
녹음 위치 | 황궁, 도쿄 |
첫 방송일 | 12:00p.m. |
마지막 방송일 | 12:04p.m. |
방송 제목 | |
로마자 표기 | Gyokuon-hōsō |
한국어 번역 | 천황의 목소리 방송 |
관련 문서 | |
한국어 명칭 | 옥음방송 |
상세 정보 | |
방송일 | 1945년 8월 15일 정오 |
방송 내용 | 쇼와 천황이 태평양 전쟁 종결 결정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녹음된 방송 |
방송 매체 | 일본방송협회 라디오 방송 |
방송 시간 | 4분 36초 |
방송 언어 | 고전 일본어 |
2. 배경
1945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에 밀려 패색이 짙었고, 본토는 연일 미군의 공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게 되었다.
쇼와 천황은 포츠담 선언 수락에 관한 칙어를 직접 낭독하여 레코드판에 녹음하고,[15] 다음 날인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국에 알렸다. 칙어 초안은 각의(스즈키 간타로 내각)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확정되었으며, 천황대권에 기초하여 신민(국민)에게 칙지를 선포하는 문서였다. 이 칙서는 중립국인 스위스와 스웨덴 주재 일본 공사관을 통해 영국, 미국, 중화민국, 소비에트 연방 등 연합국 정부에 전달되었다.
방송은 일본방송협회 방송원(아나운서) 와다 신켄의 안내와 청취자 기립 요구, 정보국 총재 시모무라 히로시의 칙어 낭독 설명, 기미가요 연주 후 4분 남짓 낭독되었다.
옥음방송에서 "'''짐은 측근의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대해 그 공동선언을 수락하는 취지를 통고하게 했다'''" (미국, 영국, 중국, 소비에트 연방 4개국에 대해 (포츠담) 공동선언을 받아들인다고 측근 정부에 통고하게 했다)는 부분이 주제이지만, 많은 일본 국민에게는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어'''" 부분이 전시 중의 고난과 점령될 것에 대한 불안을 불러일으켜, 특히 인상에 남아 유명하다.[21]
2. 1. 포츠담 선언
1945년 7월 26일, 연합국은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포츠담 선언은 "전일본 국군의 무조건 항복"(제13조) 등을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수락은 대동아 전쟁에서 대일본제국의 군대가 항복하는 것을 의미했다.일본은 포츠담 선언 수락 여부를 두고 내부적으로 갈등을 겪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선전포고를 받고 "이제 우리나라에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한 스즈키 간타로 내각총리대신(해군대장)은 8월 14일 천황회의에서 쇼와 천황의 재가를 받아 포츠담 선언 수락을 최종 결정했다. 역사학자 이토 요시오는 "소련 참전이 포츠담 선언 수락을 최종적으로 결심하게 된 원인이었음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고 말했다.[15]
2. 2.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
1945년 8월 6일, 미국은 히로시마에,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15] 8월 9일, 소비에트 연방(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 작전을 개시했다. 역사학자 이토 요시오는 "소련 참전이 포츠담 선언 수락을 최종적으로 결심하게 된 원인이었음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고 평가했다.[15] 원자폭탄 투하와 소련의 참전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게 되었다.포츠담 선언은 "전일본 국군의 무조건 항복"(제13조) 등을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수락은 대동아 전쟁에서 대일본제국의 군대가 항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3. 내용
1945년 8월 15일 정오, 쇼와 천황이 일본 제국의 항복을 발표한 라디오 방송이다.
8월 14일 21시 뉴스와 15일 7시 21분 뉴스에서 두 차례에 걸쳐 옥음방송을 예고했다. 예고 내용은 “이번에 칙서가 반포됩니다.”, “15일 정오에 천황 폐하의 직접 방송이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옥음을 듣도록 하십시오.”, “낮 동안 전력 공급이 없는 지역에도 특별 전력 공급을 실시합니다.”, “관공서, 사무소, 공장, 역, 우체국 등에서는 휴대용 수신기를 활용하여 국민들이 빠짐없이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하십시오.”, “신문이 오후 1시경에 배달되는 곳도 있습니다.” 등이었다.
와다 노부카타 아나운서의 멘트 이후, 기미가요가 연주되었고, 천황이 종전 조서를 읽으며 옥음방송이 시작되었다.
3. 1. 종전 조서
1945년 8월 13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해 중립국인 스위스를 통해 전달했다. 쇼와 천황은 일본 도쿄도 고쿄에서 태평양 전쟁 종전 조서를 몇 번 수정한 뒤, 8월 14일 밤 11시 20분부터 NHK 운영진 8명의 도움을 받아 고쿄에 녹음시설을 설치해서 녹음했다. 총 녹음 시간은 5분이었는데, 당시의 SP 레코드에는 3분밖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총 2장에 걸쳐서 녹음했다. 8월 15일 정오 방송은 와다 노부카타가 진행을 맡았다.그 다음 기미가요가 연주되었고, 천황이 종전조서를 읽으며 옥음방송이 시작되었다. 방송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문(문어) | 한국어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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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 다시 한번 기미가요가 방송되면서 종료되었다.
쇼와 천황은 총리 스즈키 간타로와 그의 내각에게 연합국에게 "제국은 그들의 공동 선언의 조항을 받아들인다"라고 통보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포츠담 선언의 수용과 같은 것이었다.[3] 그는 일본의 전쟁 결정을 "자기 보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행위로 정당화했으며, "전황이 반드시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된 것은 아니다"라며 최근 몇 년간의 좌절과 패배를 언급했다. 그는 며칠 전에 발생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를 언급하며 원자폭탄을 "새롭고 가장 잔혹한 폭탄"이라고 불렀다. 천황은 끝으로 일본 국민에게 "미래를 위한 건설에 전념하라"고 촉구했다.
이 방송은 동시에 라디오 진행자 히라카와 타다이치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으로 방송되었다.[8] 미국에서는 미국 연방 통신 위원회(FCC)가 이 방송을 녹음했고, 그 전문은 ''뉴욕 타임스''에 실렸다.[9]
{{인용|朕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을 살펴 비상의 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하여, 이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朕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중국, 소련 네 나라에 그 공동 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하게 하였다.
억이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과 공영의 락을 함께 하는 것은 황조의 유전이며 朕의 굳건한 뜻이다.
이전에 미국, 영국 두 나라에 선전한 바도 또한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해서였지, 다른 나라의 주권을 배척하고 영토를 침략하려는 것과 같은 것은 결코 朕의 뜻이 아니다.
그러나 교전이 이미 4년을 지나, 朕의 육해군 장병의 용감한 싸움, 朕의 백료유사의 격려, 朕의 일억 중민의 봉공, 각각 최선을 다한 것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필시 호전되지 않는다.
세계의 대세도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더하여 적은 새롭게 잔혹한 폭탄을 사용하여 죄 없는 백성을 살상하고, 참해의 미치는 바가 진실로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 교전을 계속하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연이어 인류의 문명마저 파괴할 것이다.
이와 같다면 朕은 무엇으로써 억조의 적자를 보호하고 황조의 영령에 사과할 것인가?
이것이 朕이 제국 정부로 하여금 공동 선언에 응하게 된 까닭이다.
朕은 제국과 함께 항상 동아시아의 해방에 협력한 동맹국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 신민으로서 전장에서 죽고, 직역에 순직하고, 비명에 죽은 자들과 그 유족에게 생각을 미치면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듯하다.
그리고 전상을 입고, 재해를 입고,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에 이르러서는 朕의 깊이 염려하는 바이다.
생각건대, 앞으로 제국이 받을 고통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너희 신민의 충정도 朕이 잘 아는 바이다.
그러나 朕은 시운의 추구하는 바를 감내하며, 견디고 견디어서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열고자 한다.
朕은 이에 국체를 유지하여, 충량한 너희 신민의 정성에 신뢰하고, 항상 너희 신민과 함께 하겠다.
만약 그 정의 격하는 바가, 함부로 사단을 늘리고, 혹은 동포를 배척하고 서로 시국을 어지럽히고, 대도를 그르치고, 신의를 세계에 잃는 것과 같다면, 朕은 가장 경계한다.
마땅히 온 나라가 한 집안이 되어, 자손 대대로 굳게 국조의 불멸을 믿고, 임무가 무겁고 도리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총력을 장래의 건설에 기울이고,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건히 하며, 맹세하여 국체의 영화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에 뒤떨어지지 않기를 기약해야 한다.
너희 신민, 그러므로 능히 朕의 뜻을 몸소 행하여라.
御名御璽
쇼와 20년 8월 14일
내각총리대신 남작 스즈키 칸타로
{{인용|''충성스러운 우리 신민들에게,''
세계의 일반적인 추세와 오늘날 우리 제국의 실제 상황을 깊이 고찰한 후, 특별한 조치를 통해 현재 상황을 해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미국, 영국, 중국 및 소비에트 연방 정부에 우리 제국이 그들의 공동 선언의 조항을 수락한다는 것을 통보하도록 정부에 명령했습니다.[10]
모든 국가의 공동 번영과 행복, 그리고 우리 신민들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 황실 조상으로부터 계승되어 온 엄숙한 의무이며, 우리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일본의 자기 보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보장하려는 진심 어린 욕망으로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으며, 다른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영토 확장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전쟁은 거의 4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 용감하게 싸운 군대와 해군, 근면 성실한 국가 공무원들, 그리고 1억 명의 국민들의 헌신적인 봉사 – 전쟁 상황은 반드시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고, 세계의 일반적인 추세는 모두 일본의 이익에 반하여 돌아섰습니다.
게다가 적은 새롭고 매우 잔혹한 폭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 피해 능력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 싸운다면, 일본 국가의 궁극적인 붕괴와 소멸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의 완전한 멸망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수백만 명의 신민을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또는 우리 황실 조상들의 신성한 영혼 앞에서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우리가 강대국의 공동 선언 조항을 수락하도록 명령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동아시아의 해방을 위해 제국과 꾸준히 협력해 온 동아시아의 동맹국들에게 깊은 유감을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장에서 쓰러진 장교와 병사들, 그리고 직무 중 사망한 사람들, 또는 때 아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과 그들의 유족들에 대한 생각은 밤낮으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부상자와 전쟁 피해자, 그리고 집과 생계를 잃은 사람들의 복지는 우리의 깊은 관심사입니다.
우리 국가가 앞으로 겪게 될 고난과 고통은 분명 클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우리 신민들의 마음속 가장 깊은 감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음으로써 앞으로 모든 세대를 위한 위대한 평화의 길을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를 지키고 유지할 수 있었던 우리는 여러분, 충성스러운 우리 신민들과 항상 함께하며 여러분의 성실함과 정직함에 의지합니다.
불필요한 복잡한 상황을 야기할 수 있는 어떠한 감정의 폭발이나, 혼란을 야기하고 여러분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며 세상의 신뢰를 잃게 할 수 있는 형제 간의 다툼과 분쟁을 가장 엄격하게 경계하십시오.
온 나라가 한 가족으로서 세대를 거듭하여 계속되도록 하십시오. 신성한 땅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을 항상 굳게 지키고, 무거운 책임과 앞으로 나아갈 긴 길을 명심하십시오.
미래를 위한 건설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하나로 모으십시오. 정의의 길을 갈고 닦고, 고귀한 정신을 함양하고, 결의를 가지고 일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황실의 고유한 영광을 더욱 빛내고 세계의 진보에 발맞춰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1945년 8월 14일 도쿄(쇼와 20년)
총리 스즈키 간타로





소비에트 연방의 선전포고를 받고 "이제 우리나라에 이길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한 스즈키 간타로 내각총리대신(해군대장)은 1945년(쇼와 20년) 8월 14일 천황회의에서 쇼와 천황의 재가를 받아 7월 26일 연합국으로부터 제시된 포츠담 선언 수락을 최종 결정했다. 쇼와 천황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일련의 평화 실현에 대한 경위에 대해, 역사학자 이토 요시오는 "소련 참전이 포츠담 선언 수락을 최종적으로 결심하게 된 원인이었음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포츠담 선언은 "전일본 국군의 무조건 항복"(제13조) 등을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수락은 대동아 전쟁에서 대일본제국의 군대가 항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천황회의 결정을 받아 같은 날 밤, 칙어 초안이 각의(스즈키 간타로 내각)에 상정되어 약간의 수정을 거쳐 문구를 확정했다. 칙어 초안은 그대로 쇼와 천황에 의해 재가되어, 종전의 칙어(대동아전쟁 종결의 칙어, 전쟁 종결에 관한 칙어)로서 발포되었다. 이 칙어는 천황대권에 기초하여 포츠담 선언 수락에 관한 칙지를 신민(국민)에게 선포하는 문서이다. 포츠담 선언 수락에 관한 칙어가 발포된 사실은 중립국인 스위스 및 스웨덴 주재 일본 공사관을 통해 영국, 미국, 중화민국, 소비에트 연방 등 연합국 정부 측에 전달되었다.
쇼와 천황은 칙어를 낭독하여 레코드판에 녹음시켜[15], 이듬날 15일 정오부터 라디오 방송으로 국민에게 칙어 내용을 널리 알리기로 했다. 이 옥음방송은 법제상의 효력을 특히 갖는 것은 아니지만, 천황이 패전의 사실을 직접 국민에게 전달하고, 이를 타이르는 의미에서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부터 패전의 상징적 사건으로 여겨져 왔다. 스즈키 간타로 이하에 의한 천황회의 이후에도 육군 일부에는 항전을 주장하며 쿠데타를 기도하고 방송용 레코드판을 실력으로 탈취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패로 끝났다(궁성사건, 레코드판 사건).
전날에는 미리 "15일 정오부터 중대한 방송이 있으니, 전 국민은 모두 정중하게 들어야 한다"는 취지의 보도가 있었고, 또 당일 아침에는 그것이 천황이 직접 하는 방송이며, "정오에는 반드시 국민은 이것을 들어야 한다"는 주의가 이루어졌다. 당시는 전력 사정이 나빠 간헐송전이 되고 있는 지역도 있었지만, 특별히 전국에서 송전되도록 되어 있었다. 또 당일 아침 신문은 방송 종료 후 오후에 배달되는 특별 조치가 취해졌다.
옥음방송에서 "'''짐은 측근의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대해 그 공동선언을 수락하는 취지를 통고하게 했다'''"(나는 미국, 영국, 중국, 소비에트 연방 4개국에 대해 (포츠담) 공동선언을 받아들인다고 측근 정부에 통고하게 했다)는 부분이 주제이지만, 많은 일본 국민에게는, 종전과 전후를 테마로 하는 NHK 등의 특집 프로그램의, "황궁 앞 광장에서 엎드려 천황에게 사과하는 사람들"의 영상과 함께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어'''" 부분이 전시 중의 고난과 점령될 것에 대한 불안을 불러일으켜, 특히 인상에 남아 유명하다.[21]
'''대동아 전쟁 종결의 칙서''', '''종전 칙서'''는 천황대권에 기초하여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칙지를 국민에게 선포하기 위해 8월 14일자로 칙서로 발포되어 같은 날 관보 호외에 고시되었다.[23] 대략적인 내용은 내각서기관장 박수구상이 작성하고, 8월 9일 이후에 한학자 가와다 미즈호(내각촉탁)가 기초하고, 14일에 아나오카 마사아츠(대동아성 고문)가 수정하여 완성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안에 천황의 재가가 있었다. 대신 부서(副署)는 당시 내각총리대신 스즈키 간타로 이하 16명이다. 제7안까지 논의되었다.
긴급한 시간 속에, 매우 비밀리에 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기초 및 정본 작성에 충분한 시간이 없었고, 또한 칙서 내용을 결정하는 각의에서, 전쟁 계속을 요구하는 일부 군부의 자들에 의한 쿠데타를 우려한 육군대신 아난 미키가 「아라자루/전국일니비일본어니시테」의 수정을 요구하여, 「전국필스시모코텐세스일본어」로 고쳐지는 등, 최종 단계까지 어구의 수정이 가해졌다. 이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칙서 정본에도 보충이나 오탈자에 종이를 붙여 수정한 흔적이 보이며, 또한 통상은 어새(御璽) 압인을 위해 최종 페이지는 3행까지 하고 7행 분을 공란으로 해 두어야 하는 관례의 곳 4행이 쓰여져 있고, 문말의 어새를 충분한 여백이 없는 장소에 무리하게 압날했기 때문에, 인영이 본문에 겹치는 이례적인 칙서이다. 전 815자로 여겨지지만, 이설도 있다(본문은 802자).
종전 칙서의 원본은, 내각총무과의 이사관이었던 사노 코몬타가 정서(淨書)한 것이다.[25]
초기, 박수구상은 "알기 쉬운 구어체로 방송하자"고 생각했다. 내각촉탁의 키하라 미치오와 함께 안을 창작하기 시작했지만, "일인칭과 이인칭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기본적인 점에서 막히게 되었다. 즉, 그때까지 천황이 국민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천황이 자신 자신의 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또, 국민에 대해 "너희들"이라고 말할 것인지 "여러분"이라고 말할 것인지, 적당한 표현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결국 실현은 되지 않고, 무난하게 될 문어체로 하게 되었다.[26] 또 성단(聖斷)이 내려진 어전회의에 배석하고 있던 박수는 어전회의에서의 쇼와 천황의 발언을 조합하여 칙서안을 작성했다. 이에 따라 천황의 의사가 반영된다는 이례적인 칙서가 되었다.
옥음방송의 예고는 14일 21시 뉴스와 15일 7시 21분 뉴스 두 차례에 걸쳐 방송되었다. 내용은 “이번에 칙서가 반포됩니다.”, “15일 정오에 천황 폐하의 직접 방송이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옥음을 듣도록 하십시오.”, “낮 동안 전력 공급이 없는 지역에도 특별 전력 공급을 실시합니다.”, “관공서, 사무소, 공장, 역, 우체국 등에서는 휴대용 수신기를 활용하여 국민들이 빠짐없이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하십시오.”, “신문이 오후 1시경에 배달되는 곳도 있습니다.” 등이었다.
3. 2. 옥음방송
1945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는 종전 조서를 낭독하는 옥음방송을 진행했다.[57] 옥음방송은 일본 전역과 해외 점령지에 송출되었다.[57] 옥음방송의 내용은 와다 노부카타의 진행으로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그 다음 기미가요가 연주되었고, 쇼와 천황이 종전조서를 읽으며 옥음방송이 시작되었다. 방송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문(문어) | 한국어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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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 다시 한번 기미가요가 방송되면서 종료되었다.
1945년 8월 14일, NHK는 궁내청 지하의 사무실 방공호에 마이크를 설치했고, 히로히토는 밤 11시 25분에서 11시 30분 사이에 연설을 했다.[1] 첫 번째 녹음에서 천황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기술자들의 조언에 따라 재녹음을 했다.[2] 두 번째 시도에서는 목소리가 너무 높고, 간혹 글자가 생략되는 부분이 있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버전이 공식 버전으로 채택되었고, 첫 번째 버전은 백업으로 남았다.[2]
1945년 8월 15일 오전, 모든 NHK 방송국은 정오에 천황이 국민에게 연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2] 바로 그날 정오, NHK 아나운서가 "중대한 발표"를 위해 일어설 것을 국민에게 지시했다.[2] 국가인 기미가요가 연주된 후 천황의 연설이 이어졌다.[2] 보도에 따르면, 이것은 일반 일본인들이 일본 천황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듣고, 천황의 최초의 라디오 연설이었다고 한다.[3][5][6]
"항복"이라는 단어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쇼와 천황은 총리 스즈키 간타로와 그의 내각에게 연합국에게 "제국은 그들의 공동 선언의 조항을 받아들인다"라고 통보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포츠담 선언의 수용과 같은 것이었다.[3] 그는 일본의 전쟁 결정을 "자기 보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행위로 정당화했으며, 최근 몇 년간의 좌절과 패배를 언급하며 "전황이 반드시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며칠 전에 발생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언급하며 원자폭탄을 "새롭고 가장 잔혹한 폭탄"이라고 불렀다. 천황은 끝으로 일본 국민에게 "미래를 위한 건설에 전념하라"고 촉구했다.
이 방송은 동시에 라디오 진행자 히라카와 타다이치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으로 방송되었다.[8] 미국에서는 미국 연방 통신 위원회(FCC)가 이 방송을 녹음했고, 그 전문은 ''뉴욕 타임스''에 실렸다.[9]
4. 녹음
히로히토의 옥음방송은 생방송이 아닌 녹음 방송이었다. 1945년 8월 14일, NHK는 녹음 기술자들을 황궁으로 파견하여 방송을 녹음했다. 녹음은 궁내청 지하 사무실 방공호에서 진행되었으며, 히로히토는 밤 11시 25분에서 11시 30분 사이에 두 번에 걸쳐 연설을 녹음했다.[1] 첫 번째 녹음은 목소리가 너무 작았고, 두 번째 녹음은 목소리가 너무 높고 간혹 글자가 생략되어, 기술자들의 조언에 따라 두 번째 버전이 공식 버전으로 채택되었다.[2]
녹음 작업은 내정청사에서 이루어졌고, 녹음 장비는 면담실에, 마이크는 옆 방인 집무실에 설치되었다. 녹음 준비는 8월 14일 16시에 완료되었으나, 칙서 최종본 수정으로 인해 지연되어 23시 25분에 낭독이 진행되었다.[34]
총 2종류의 옥음반(테이크 1: 7장, 테이크 2: 5장)이 제작되었다. 두 번째 테이크는 천황 자신의 제안(목소리가 낮았기 때문)과 접속사 누락 문제로 녹음하게 되었으나, 시모무라 히로시는 세 번째 녹음을 거절했다.
옥음 방송은 일본전기음향(현 데논 컨슈머 마케팅(デノン コンシューマー マーケティング))의 DP-17-K 휴대용 원반 녹음기로 SP 음반 규격 아세테이트반에 녹음되었다. 1장에 3분밖에 녹음할 수 없어, 약 5분 분량의 옥음 방송은 여러 장에 걸쳐 녹음되었다.
작업은 다음 날 8월 15일 새벽 1시경에 끝났다. 궁내성은 1차 녹음반을 "부반", 2차 녹음반을 "정반"으로 정하고, "정반"은 도쿄 방송회관으로, "부반"은 다이이치 생명관(第一生命館)의 예비 스튜디오로 가져갔다.[29]
4. 1. 규조 사건
많은 일본 제국 육군 군인들은 히로히토가 전쟁을 끝내는 것을 불명예스럽다고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5년 8월 14일 저녁, 1,000명에 달하는 장교와 군인들이 옥음방송 녹음본을 파괴하고자 황궁을 습격했다.[2][3] 이 사건을 규조 사건이라고 한다. 반란군은 황궁 구조에 익숙하지 않아 문서 더미 속에 숨겨진 녹음본을 찾는 데 실패했다. '원본'과 '사본' 라벨이 붙은 두 대의 축음기는 각각 칠기 상자와 도시락 가방에 담겨 무사히 황궁 밖으로 반출되었다. 하타나카 겐지(羽田中賢治) 소령은 NHK 방송국에서 방송을 중단시키려 했으나, 동부방면군의 명령으로 저지되었다.[2][3]5. 문제점 및 비판
당시 라디오 방송은 기술적인 문제점이 많았다. NHK에서 송출한 방송은 소리의 질이 좋지 않았고, 잡음이 심하게 섞여 라디오 수신 상태가 매우 나빴다. 이로 인해 방송 내용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57]
쇼와 천황이 사용한 단어와 어투 또한 문제가 되었다. 그는 일반적인 일본어가 아닌 격식 높은 문어체를 사용했고, 매우 선언적인 말투를 사용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송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57]
내용 면에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옥음방송에서는 "항복"이라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포츠담 선언 수락"이라는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라"와 같은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여 패전을 명확히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표현들은 일본이 전쟁 책임을 회피하고 전범 재판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6. 영향 및 의의
옥음방송은 태평양 전쟁을 종식시키고 일본의 항복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쇼와 천황의 옥음방송은 일본 국민들에게 패전 소식을 알렸다. 많은 일본인들은 처음으로 천황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며[3][5][6] 큰 충격과 혼란을 겪었다. 당시 도쿄에 있던 프랑스 언론인 로베르 기이앙은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몇 시간 동안 조용히 발표의 의미를 숙고했다고 전한다.
방송은 음질이 좋지 않았고, 어려운 한자어가 많아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18] 그러나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어"라는 표현은[21] 전시 상황과 점령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던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옥음방송은 법제상의 효력은 없었지만, 천황이 직접 패전을 알리고 국민을 타이르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5] 이는 패전의 상징적 사건으로 여겨지며, 전후 일본 사회의 변화와 민주화, 평화 국가 건설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옥음방송의 모호한 표현과 책임 회피적인 태도는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란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칙서 작성 과정에서 "시운노스쿠루쇼"(時運ノ趨ク所)라는 표현을 "되는 대로"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천황의 말로는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어려운 단어는 국민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수정되지 않았다.[47] 또한, "유족니상오치세하단장노오이아리"(遺族ニ想ヲ致セハ断腸ノ思ヒアリ)라는 표현은 사사로운 감정이므로 공적인 자리에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오장이 찢어지는 심정"이라는 뜻으로 설명되어 그대로 사용되었다.[48]
2011년 3월 16일, 동일본대지진 발생 후 아키히토 천황은 비디오 메시지를 발표했는데, 이는 "헤이세이의 옥음방송"이라고도 불렸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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