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P.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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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올리버 P. 스미스는 미국의 군인으로, 1893년 텍사스주 메나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7년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괌, 아이티, 프랑스 등지에서 근무했으며, 콴티코 해병대 학교 강사, 함대 해병대 작전 장교, 제1해병사단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특히 한국 전쟁 중 장진호 전투에서 신중한 지휘로 부대의 피해를 최소화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는 수훈 십자 훈장, 은성 훈장 등 다수의 훈장을 받았으며, 그의 이름은 군사 시설과 함선에 사용되었다.
1917년 미국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뉴브리튼 섬, 팔라우, 오키나와 전투 등 태평양 전선의 주요 전투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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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P. 스미스 장군은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서 활약한 미 해병대의 주요 지휘관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한국 전쟁 당시 제1해병사단장으로서 인천 상륙 작전과 장진호 전투 등 결정적인 전투를 이끌며 뛰어난 군사적 역량과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신중한 판단과 철저한 준비성은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 속에서 수많은 장병의 생명을 구하고 부대의 성공적인 철수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2. 군 경력
1950년 7월 25일 제1해병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어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북진 과정에서 중공군의 개입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신중하게 진격 속도를 조절하였는데, 이러한 판단은 이후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었을 때 사단의 피해를 줄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장진호 부근 하갈우리에 야전 비행장을 건설하여 부상자 후송 및 보급로를 확보함으로써 제1해병사단의 전멸을 막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신중한 지휘는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53년 7월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1955년 9월 1일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93년 10월 26일 텍사스주 메나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7살 때 사망했고, 이후 어머니와 함께 캘리포니아주 북부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1911년 산타크루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3]
이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 입학하여 원예 관련 학문을 전공했으며, 학비를 벌기 위해 정원 가꾸기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 졸업 후인 1917년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여 군 복무를 시작했다. 스미스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크리스천 사이언티스트로 알려져 있다.
임관 다음 달, 첫 해외 근무지로 마리아나 제도 괌에 파견되었다. 괌에서 복무하던 중 캘리포니아주 헤이워드 출신의 에스더 로릴라 킹(Esther Laurilla King)과 결혼했으며, 이들의 결혼 생활은 58년간 이어졌다.[4]
군 복무 중에도 교육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 있는 미국 육군 보병 학교에서 야전 장교 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버지니아주 콴티코의 해병대 학교에서 중대 장교 과정 강사로 잠시 근무했다. 1934년에는 프랑스로 파견되어 파리 주재 미국 대사관의 무관실에서 근무하는 한편, 1934년 11월부터 1936년 7월까지 파리의 에콜 쉬페리외르 드 게르(École Supérieure de Guerre, 프랑스 육군대학)에 입학하여 과정을 마쳤다. 그는 이 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해병대 장교였다.
1936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다시 콴티코의 해병대 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하며 작전 및 훈련(S-3) 분야를 가르쳤다. 이 시기 그는 학구적인 면모로 '교수(The Professor)'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특히 상륙전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및 전간기
1917년 해병대 소위로 임관하며 군 복무를 시작했다. 그는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은 크리스천 사이언티스트였다. 임관 직후 첫 해외 근무지로 마리아나 제도 괌에 파견되어 해병대 막사와 해군 기지에서 근무했다. 괌 복무 중 캘리포니아 출신의 에스더 로릴라 킹(Esther Laurilla King)과 결혼하여 이후 58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4] 1919년 5월에는 미국으로 돌아와 캘리포니아주 마레 아일랜드의 해병대 막사에서 근무했다.
1921년 10월부터 1924년 5월까지는 해상 근무 명령을 받아 USS 텍사스에 배치된 해병대 파견대의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해상 근무를 마친 후에는 워싱턴 D.C.의 해병대 본부에서 인사 담당으로 근무했다.
1928년 6월 다시 해외로 파견되어 아이티 포르토프랭스에서 아이티 헌병대의 참모 부장(Assistant Chief of Staff)을 맡았다. 1931년 6월 아이티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는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 있는 미국 육군 보병 학교의 야전 장교 과정(Field Officers Course)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았다.
1932년 6월 보병 학교를 졸업하고 버지니아주 콴티코의 해병대 학교(Marine Corps Schools)에 배치되어 중대 장교 과정(Company Officers Course)의 강사로 활동했다. 이듬해인 1933년 9월에는 같은 콴티코 기지의 제7 해병 연대에서 작전 참모(Operations Officer)로 임명되었다.
1934년 1월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주재 미국 대사관의 무관실에서 근무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인 1934년 11월부터 1936년 7월까지 프랑스 육군대학인 에콜 쉬페리외르 드 게르(École Supérieure de Guerre)에서 수학했는데, 이는 해병대 장교로서는 최초였다.
1936년 8월 미국으로 돌아온 스미스는 다시 콴티코의 해병대 학교에서 S-3(작전 및 훈련) 담당 강사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그는 학구적인 면모로 "교수(Professor)"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특히 상륙전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39년 7월에는 서부 해안으로 전출되어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해병 기지에서 함대 해병대(Fleet Marine Force)의 작전 장교로 합류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1942년 5월, 스미스는 워싱턴 D.C.에 있는 해병대 본부로 소환되어 계획 및 정책 부서의 행정관이 되었다. 그는 1944년 1월까지 이 직책을 유지하다가, 제1 해병 사단에 합류하여 뉴브리튼 섬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제5 해병 연대의 지휘관을 맡아 케이프 글로스터 전투의 탈라세아 작전을 이끌었다.
1944년 4월에는 제1 해병 사단의 부사단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9월과 10월에는 펠렐리우 전투에 참여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작전을 수행했다.
이후 1944년 11월, 스미스는 제10군의 해병대 참모 부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5년 7월, 그는 미국으로 돌아왔다.
2. 4. 한국 전쟁
1950년 6월, 제1해병사단 사령관으로 임명된 스미스 소장은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혹한의 겨울 속 북진 작전인 장진호 전투에 이르기까지 한국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사단을 이끌었다.
1950년 10월, 제1해병사단은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미국 육군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원산에 상륙했다. 알몬드와 스미스는 인천 상륙 작전 이전에 일본에서 만난 이후로 서로 불편한 관계였다.[5] 알몬드는 해당 회의에서 상륙 작전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전의 용이성을 강조하며 스미스를 "아들"이라 부르는 등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스미스와 해병대 지휘부는 알몬드가 지나치게 공격적이라고 판단했으며, 도쿄의 상부 지휘부와는 달리 북한 지역에 상당수의 중공군이 주둔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스미스는 가능한 한 빨리 압록강까지 북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중공군 개입이라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안전한 후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신중하게 접근하며 사단의 진격 속도를 조절했다. 이는 거의 명령 불복종에 가까운 행보였으나, 그는 진격로를 따라 보급 지점과 비행장을 건설하며 후방을 다졌다.
1950년 11월,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자 스미스의 신중함은 빛을 발했다. 그는 하갈우리에 미리 설치한 야전 비행장을 통해 부상자를 후송하고 보급품과 병력을 충원하며 사단의 전열을 유지했다. 이후 성공적인 철수 작전을 지휘하여, 혹한 속에서 110km에 달하는 거리를 행군하여 함흥 항구까지 병력을 이동시켰다. 스미스의 신중한 북진과 사단을 분산시키지 않고 하나로 유지하려 했던 판단은 결과적으로 제1해병사단뿐만 아니라 제10군단 전체가 전멸하는 최악의 상황을 막아낸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스미스 장군은 1951년 5월 미국으로 돌아와 캘리포니아주 해병대 기지 캠프 펜들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953년 7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대서양 함대 해병대 사령관을 마지막으로 1955년 9월 1일 대장으로 예편했다.
2. 5. 한국 전쟁 이후
1953년 7월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1955년 9월 1일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1977년 12월 25일, 캘리포니아주 로스알토스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3. 상훈
수훈 십자 훈장 해군 공로 훈장 육군 공로 훈장 은성 훈장 공로 훈장 동성 훈장 항공 훈장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 (별 3개) 해군 부대 표창 해병대 원정 훈장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 훈장 미국 방위 복무 훈장 (베이스 클라스) 미국 전역 훈장 유럽-아프리카-중동 전역 훈장 태평양 전역 훈장 (별 3개)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기념 훈장 국가 방위 복무 훈장 한국 전쟁 참전 기념 훈장 (은색 별) 아이티 공로 훈장 (훈장) 오렌지 나소 훈장, 사령관 보국훈장 통일장 (은색 별)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표창 유엔 한국 참전 훈장
4. 평가 및 유산
4. 1. 긍정적 평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뉴 브리튼, 팔라우, 오키나와 전투 등에 참전하며 군사적 역량을 쌓았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제1해병사단장으로 임명되어 인천 상륙 작전과 장진호 전투 등 주요 전투를 지휘했다.
특히 북진 과정에서 스미스 장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신중하게 진격 속도를 조절했다. 이는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이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질서 있는 후퇴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결정이었다. 당시 상급 부대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은 빠른 북진을 독려했으나, 스미스 장군은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독자적인 판단하에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5] 알몬드와의 의견 대립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격로를 따라 보급 지점과 비행장을 확보하며 사단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스미스 장군의 사전 대비는 빛을 발했다. 그는 하갈우리에 미리 건설해 둔 야전 비행장을 통해 부상자를 후송하고 보급품과 병력을 지원받아 사단의 완전한 붕괴를 막았다. 혹독한 추위와 압도적인 적의 공세 속에서도 그는 침착하게 철수를 지휘했으며, 약 110km에 달하는 거리를 행군하여 함흥까지 성공적으로 퇴각했다. 이러한 스미스 장군의 뛰어난 판단력과 지휘 능력은 제1해병사단뿐만 아니라 제10군단 전체를 전멸의 위기에서 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신중함과 철저한 준비성은 수많은 장병의 생명을 구하고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4. 2. 유산
(해당 섹션에 대한 내용이 원본 소스에 존재하지 않아 작성할 수 없음)
참조
[1]
웹사이트
Significant Quotations during the Korean War
https://www.usmcu.ed[...]
Marine Corps University
2023-08-29
[2]
웹사이트
Retreat of the 20,000
http://www.time.com/[...]
Time Magazine
1950-12-18
[3]
뉴스
Old timer keeps tabs on past.
https://history.sant[...]
Cabrillo Times and Green Sheet
1977-04-21
[4]
서적
For Country and Corps: The life of General Oliver P. Smith
Naval Institute Press
2009
[5]
문서
Hammel Chosin
[6]
웹사이트
Oliver P. Smith
https://valor.mil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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