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렐리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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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펠렐리우 전투는 1944년 9월부터 11월까지 태평양 전쟁 중 팔라우 제도의 펠렐리우 섬에서 벌어진 미국과 일본 간의 전투이다. 이 전투는 미국이 필리핀 탈환을 위한 전진 기지 확보를 위해 감행되었으며, 일본군은 섬의 험준한 지형을 활용한 요새화된 방어선을 구축하여 격렬하게 저항했다. 미군은 비행장 점령을 목표로 상륙 작전을 펼쳤지만, 일본군의 예상 밖의 저항과 지연 전술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73일간 이어진 전투 끝에 미군은 펠렐리우 섬을 점령했지만, 전략적 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희생을 치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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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렐리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명 | 펠렐리우 전투 |
부분전 | 마리아나·팔라우 제도 전역의 일부 |
시기 | 1944년 9월 15일 – 1944년 11월 27일 |
장소 | 펠렐리우섬, 팔라우 제도 |
좌표 | 7°00′N 134°15′E |
결과 | 미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지휘관 1 | 윌리엄 H. 루퍼츠 |
지휘관 2 | 나카가와 구니오 |
부대 | |
부대 1 | 제3 상륙군단 |
부대 2 | 펠렐리우 수비대 |
병력 규모 | |
병력 1 | 47,561명 |
병력 2 | 10,900명 |
피해 규모 (팔라우 군도 전체) | |
피해 1 | 총 1,989-2,143명 전사 |
피해 2 | 12,033명 사망 (낙오자 제외) |
위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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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44년까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은 마리아나 제도 전투(1944년 6월~8월)를 통해 확보한 공군 기지에서 일본 본토를 폭격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합참은 일본 제국을 격파하기 위한 두 가지 전략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 탈환 후 오키나와 섬을 점령하고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전략을 제안했다. 체스터 W. 니미츠 제독은 필리핀을 우회하고 오키나와와 타이완을 일본 본토 공격 거점으로 삼은 뒤 일본 최남단 섬을 침공하는 더 직접적인 전략을 선호했다. 두 전략 모두 펠렐리우 침공을 포함했지만, 그 이유는 달랐다.[14]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진주만 해군 기지에서 맥아더와 니미츠를 만나 그들의 주장을 들었고, 맥아더의 전략이 채택되었다. 맥아더가 필리핀을 탈환하기 전에 팔라우 제도, 특히 펠렐리우와 앙가우르를 무력화하고 필리핀 상륙 남쪽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비행장을 건설해야 했다.
2. 1. 일본 측 배경
1944년까지 펠렐리우에는 약 11,000명의 일본군과 소수의 한국인 노동자가 주둔하고 있었다.[15][16] 이들은 1944년 초 마셜 제도가 함락된 후 만주에 주둔하던 관동군에서 펠렐리우를 수비하기 위해 파견된 정예 부대로, 5월에 섬에 도착했다. 제14보병사단 제2연대장 나카가와 쿠니오 대령이 섬 방어 준비를 지휘했다.[16]솔로몬 제도 전역, 길버트 & 마셜 제도 전역, 마리아나 제도에서의 손실을 겪은 일본 제국 육군은 새로운 섬 방어 전술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팀을 구성했다. 이전에는 일본군 섬 수비대가 해변에서 적의 상륙에 격렬하게 저항하여 해군 폭격에 매우 취약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일본군은 상륙 해변에 대한 형식적인 방어만 하고, 섬 내부의 더 방어 가능한 지형을 활용하여 장기적인 전투를 벌이는 새로운 전술을 수립했다. 펠렐리우의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산호 능선은 이러한 심층 방어에 이상적이었다. 나카가와 대령은 이 험한 지형을 활용하여 견고한 요새, 동굴 및 기타 지하 진지를 구축했는데, 이 모든 것이 "벌집"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인력 낭비와 비효율적인 반자이 돌격 공격은 중단하기로 했다. 이러한 전술 변화는 소모전을 통해 미군이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고 일본군 섬 수비대를 확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도록 강요했다.

나카가와의 방어선은 펠렐리우의 최고점인 우무르브로골 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곳은 펠렐리우 중앙에 위치한 언덕과 가파른 능선들의 집합체로, 중요한 비행장을 포함하여 섬의 상당 부분을 조망할 수 있었다. 우무르브로골에는 약 500개의 석회암 동굴이 있었고, 일본군 기술자들이 터널로 연결했다. 이 동굴 중 다수는 1921년에 설립되어 주로 사이판에서 설탕 산업을 개발하기 위해 설립된 일본 회사인 남양흥발주식회사(南洋興發株式會社, Nanyo Kohatsu Kaisha)가 개발한 구 탄광이었다. 본사는 사이판에 있었지만, 이 회사는 펠렐리우의 인산염 매장지를 소유하고 운영했다.[17] 인산염 물질은 원주민 노동력으로 채굴되었고, 인력에 의해 운행되는 협궤 철도를 통해 펠렐리우 부두에 위치한 인산염 정제 공장으로 운송되었다.[18][19]
광산과 동굴은 방어 진지로 전환되었다. 기술자들은 많은 동굴 입구에 여러 개의 개구부가 있는 슬라이딩 강철 장갑 문을 추가하여 포병과 기관총 모두에 추가적인 보호와 은폐를 제공했다. 동굴 입구는 수류탄과 화염 방사기 공격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경사지게 열리거나 변경되었다. 동굴과 벙커는 펠렐리우 중앙 전역에 걸쳐 광대한 터널 및 참호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어 일본군이 필요에 따라 진지를 대피하거나 재점령할 수 있었고, 축소되는 내선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일본군 수비대는 97식 81mm 박격포 및 96식 150mm 박격포와 98식 20mm 기관총 대공포로 무장했으며, 경전차 부대와 대공 부대가 지원했다. 일본군은 또한 해변 지형을 활용했다. 상륙 해변 북쪽 끝은 작은 반도에서 해변을 조망하는 약 9.14m 산호 곶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나중에 공격을 감행한 해병대원들에게 "The Point"로 알려지게 되었다. 1식 47mm 대전차포 1문과 20mm 포 6문을 수용하기 위해 곶에 구멍이 뚫렸다. 그런 다음 진지는 밀봉되어 해변을 향해 발사할 수 있는 좁은 틈만 남았다. 일본군은 펠렐리우 서쪽 해안의 약 3.22km 길이의 상륙 해변을 따라 유사한 진지를 건설했다.
해변에는 또한 상륙정을 위한 수천 개의 장애물이 있었는데, 주로 지뢰와 뇌관이 노출된 채 묻혀 밟으면 폭발하도록 설계된 대형 포탄이 많았다. 나카가와는 상륙을 막기 위해 해변을 따라 대대를 배치했지만, 이 부대는 불가피한 미국군의 내륙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나카가와와 그의 상급 장교들은 펠렐리우가 공격받을 경우 수비대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고, 일본군 기획자들은 생존자를 대피시키기 위한 비상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2. 2. 미국 측 배경
1944년까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은 마리아나 제도 전투(1944년 6월~8월)를 통해 확보한 공군 기지에서 일본 본토를 폭격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합참은 일본 제국 격퇴를 위한 두 가지 전략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 탈환 후 오키나와 섬을 점령하고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전략을 제안했다. 체스터 W. 니미츠 제독은 필리핀을 우회하고 오키나와와 타이완을 일본 본토 공격 거점으로 삼은 뒤 일본 최남단 섬을 침공하는 더 직접적인 전략을 선호했다. 두 전략 모두 펠렐리우 침공을 포함했지만, 이유는 달랐다.[14]제1해병사단이 공격을 수행하도록 선정되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진주만 해군 기지에서 맥아더와 니미츠를 만나 그들의 주장을 들었고, 맥아더의 전략이 채택되었다. 맥아더가 필리핀을 탈환하기 전, 팔라우 제도, 특히 펠렐리우와 앙가우르를 무력화하고 필리핀 상륙 남쪽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비행장을 건설해야 했다.
미국군은 비악 전투에서 3,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2달 동안 일본군의 지연 전술에 맞서 요새화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상륙 작전 계획에서 변경된 사항이 없었다.[20] 펠렐리우에서 미국 작전 계획자들은 남부 펠렐리우의 비행장과 가깝다는 이유로 남서쪽 해변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다. 1연대 해병대는 루이스 B. "체스티" 풀러 대령의 지휘하에 해변 북쪽에, 5연대 해병대는 해롤드 해리스 대령의 지휘하에 중앙에, 7연대 해병대는 허먼 하네켄 대령의 지휘하에 남쪽 끝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사단의 포병 연대인 11연대는 윌리엄 해리슨 대령의 지휘하에 보병 연대 다음으로 상륙할 예정이었다. 계획은 1연대와 7연대가 내륙으로 진격하여 5연대의 측면을 방어하고, 5연대가 상륙 해변 중앙에 위치한 비행장을 점령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5연대는 펠렐리우의 동쪽 해안으로 진격하여 섬을 양분할 예정이었다. 1연대는 우무르브로골로 북진할 것이고, 7연대는 섬의 남쪽 끝을 정리할 예정이었다. 단 한 개의 대대만이 예비대로 남겨졌으며, 앙가우르에서 지원을 위해 미 육군 제81보병사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앙가우르는 펠렐리우 바로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9월 4일, 해병대는 과달카날 북쪽에 위치한 파부부에서 출발하여 펠렐리우까지 태평양을 가로질러 약 3379.61km의 항해를 시작했다. 해군 수중 파괴반이 일부 장애물을 해변에서 제거했고, 군함은 9월 12일에 펠렐리우에 대한 사전 침공 폭격을 시작했다.
전함 , , , 및 , 중순양함 , , 및 , 그리고 경순양함 , 및 ,[29] 사령선 의 지휘하에 약 15.54km2 섬에 3일간의 대규모 폭격을 가했으며, 공격 부대와 함께 항해한 3척의 항공모함, 5척의 경항공모함, 그리고 11척의 호위 항공모함으로부터 공습을 허용하기 위해 잠시 중단했다.[21] 이 기간 동안 총 519발의 약 40.64cm 포탄, 1,845발의 약 35.56cm 포탄과 1,793발의 약 226.80kg 폭탄이 펠렐리우를 강타했다.
미국은 폭격이 성공적이라고 믿었고, 제시 올덴도프 해군 소장은 해군이 더 이상 목표물이 없다고 주장했다.[21] 실제로는, 일본군의 대부분의 위치는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심지어 해변을 방어하도록 남겨진 대대조차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초기 미국군의 공격 동안, 섬의 방어군은 자신들의 위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특이한 사격 규율을 지켰다. 폭격은 섬에 있던 일본군의 항공기와 비행장 주변의 건물들을 파괴하는 데에 그쳤다. 일본군은 요새화된 위치에 머물면서, 미국 상륙 부대를 공격할 기회를 기다렸다.
3. 양측 전력 비교
미군 사령관은 4일 안에 섬을 탈환하겠다고 예측했지만, 실제 전투는 두 달 이상 지속되었다. 미군 4만 7천여 명과 일본군 1만 3천여 명이 투입되었다. 미군 피해는 사망 1천 500명, 부상 6천여 명이었고, 일본군 피해는 사망 1만 명, 체포 202명이었다.[15][16]
3. 1. 일본군
1944년까지 펠렐리우에는 약 11,000명의 일본군과 소수의 한국인 노동자가 주둔하고 있었다.[15][16] 이들은 마셜 제도가 함락된 후 만주에 주둔하던 관동군에서 파견된 정예 부대로, 5월에 섬에 도착했다. 제14보병사단 제2연대장 나카가와 쿠니오 대령이 섬 방어 준비를 지휘했다.[16]솔로몬 제도 전역, 길버트 & 마셜 제도 전역 및 마리아나 제도에서의 손실을 겪은 일본 제국 육군은 새로운 섬 방어 전술을 개발했다. 이전에는 해변에서 적의 상륙에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이는 해군 폭격에 매우 취약했다. 이를 ಬದಲಾಯಿಸಿ, 일본군은 상륙 해변에 대한 형식적인 방어만 하고, 섬 내부의 방어 가능한 지형을 활용하여 장기전을 벌이는 새로운 전술을 세웠다. 펠렐리우의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산호 능선은 이러한 심층 방어에 이상적이었다. 나카가와 대령은 이 지형을 활용하여 요새, 동굴, 지하 진지를 "벌집" 시스템으로 연결했다. 반자이 돌격과 같은 비효율적인 공격은 중단되었다. 이러한 전술 변화는 미군을 소모전에 휘말리게 하여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고, 일본군 섬 수비대를 확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도록 설계되었다.
나카가와의 방어선은 펠렐리우의 최고점인 우무르브로골 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곳은 섬 중앙에 위치한 언덕과 가파른 능선들의 집합체로, 중요한 비행장을 포함하여 섬의 상당 부분을 조망할 수 있었다. 우무르브로골에는 약 500개의 석회암 동굴이 있었고, 일본군 기술자들이 터널로 연결했다. 이 동굴 중 다수는 일본 회사인 남양흥발주식회사(南洋興發株式會社)가 개발한 구 탄광이었다. 이 회사는 펠렐리우의 인산염 매장지를 소유하고 운영했다.[17] 인산염 물질은 원주민 노동력으로 채굴되었고, 인력으로 운행되는 협궤 철도를 통해 펠렐리우 부두에 위치한 인산염 정제 공장으로 운송되었다.[18][19]
광산과 동굴은 방어 진지로 전환되었다. 기술자들은 많은 동굴 입구에 여러 개의 개구부가 있는 슬라이딩 강철 장갑 문을 추가하여 포병과 기관총 모두에 추가적인 보호와 은폐를 제공했다. 동굴 입구는 수류탄과 화염 방사기 공격에 대한 방어를 위해 경사지게 열리거나 변경되었다. 동굴과 벙커는 펠렐리우 중앙 전역에 걸쳐 광대한 터널 및 참호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어 일본군이 필요에 따라 진지를 대피하거나 재점령할 수 있었고, 축소되는 내선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일본군 수비대는 97식 81mm 박격포 및 96식 150mm 박격포와 98식 20mm 기관총 대공포로 무장했으며, 경전차 부대와 대공 부대가 지원했다. 일본군은 또한 해변 지형을 활용했다. 상륙 해변 북쪽 끝은 작은 반도에서 해변을 조망하는 산호 곶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나중에 공격을 감행한 해병대원들에게 "The Point"로 알려지게 되었다. 1식 47mm 대전차포 1문과 20mm 포 6문을 수용하기 위해 곶에 구멍이 뚫렸다. 그런 다음 진지는 밀봉되어 해변을 향해 발사할 수 있는 좁은 틈만 남았다. 일본군은 펠렐리우 서쪽 해안의 길이의 상륙 해변을 따라 유사한 진지를 건설했다.
해변에는 또한 상륙정을 위한 수천 개의 장애물이 있었는데, 주로 지뢰와 뇌관이 노출된 채 묻혀 밟으면 폭발하도록 설계된 대형 포탄이 많았다. 나카가와는 상륙을 막기 위해 해변을 따라 대대를 배치했지만, 이 부대는 불가피한 미국군의 내륙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나카가와와 그의 상급 장교들은 펠렐리우가 공격받을 경우 수비대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고, 일본군 기획자들은 생존자를 대피시키기 위한 비상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 육군
- 총원 약 10,500명
- 제14사단 보병 제2연대 (연대장: 나카가와 쿠니오 대좌)
- 제14사단 파견 참모: 무라이 겐지로 소장
- 펠렐리우 지구대 본부
- 펠렐리우 지구대 직할 부대
- 보병 제2연대 제1대대: 이치오카 히데히라 대위
- 보병 제2연대 제3대대: 하라다 요시오 대위
- 보병 제15연대 제2대대: 이이다 요시에 소좌 (증원으로서 9월 22일부터 24일에 걸쳐 팔라우 본섬에서 펠렐리우 섬으로 역 상륙)
- 제14사단 전차대: 아마노 쿠니오미 대위
- 보병 제2연대 포병 대대: 코바야시 요헤이 소좌
- 보병 제2연대 공병 중대: 이소하타 사다시게 대위
- 보병 제2연대 통신 중대: 오카다 카즈오 중위
- 보병 제2연대 보급 중대: 아베 젠스케 중위
- 보병 제2연대 위생 중대: 아지마 료조 중위
- 해상기동 제1여단 수송대 제1중대: 카네코 케이이치 중위
- 제14사단 경리 근무부: 야마모토 코이치 소위
- 제14사단 야전병원: 오츠카 타카마로 중위
- 서 지구대
- 보병 제2연대 제2대대: 토미타 야스지 소좌
- 남 지구대
- 보병 제15연대 제3대대: 치아키 타케히사 대위
- 북 지구대
- 독립 보병 제346대대 히키노 미치히로 소좌
- 해군
- 서 캐롤라인 항공대 사령: 오오타니 류조 대좌
- 서 캐롤라인 항공대 펠렐리우 본대
- 제45경비대 펠렐리우 파견대
- 제3통신대
- 제214설영대
- 제30건설대
- 제30공작대
- 남방 방면 해군 항공대
- 특설 제33, 35, 38기관포대 (해군 배속 육군 부대)
- 조선인 노동자 (당시는 일본 국적) 약 3,000명 포함
- '''일본 측 장비'''
3. 2. 미군
제1해병사단은 루이스 B. "체스티" 풀러 대령 지휘하의 1연대 해병대가 해변 북쪽에, 해롤드 해리스 대령 지휘하의 5연대 해병대가 중앙에, 허먼 하네켄 대령 지휘하의 7연대 해병대가 남쪽 끝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사단의 포병 연대인 11연대는 윌리엄 해리슨 대령의 지휘하에 보병 연대 다음으로 상륙할 예정이었다.9월 4일, 해병대는 과달카날 북쪽에 위치한 파부부에서 출발하여 펠렐리우까지 태평양을 가로질러 약 3379.61km의 항해를 시작했다. 해군 수중 파괴반이 해변의 일부 장애물을 제거했고, 9월 12일부터 군함의 펠렐리우에 대한 사전 침공 폭격이 시작되었다.
전함 , , , 및 , 중순양함 , , 및 , 그리고 경순양함 , 및 ,[29] 사령선 의 지휘하에 약 15.54km2 섬에 3일간 대규모 폭격을 가했으며, 공격 부대와 함께 항해한 3척의 항공모함, 5척의 경항공모함, 그리고 11척의 호위 항공모함으로부터 공습을 허용하기 위해 잠시 중단했다.[21] 이 기간 동안 총 519발의 약 40.64cm 포탄, 1,845발의 약 35.56cm 포탄과 1,793발의 약 226.80kg 폭탄이 펠렐리우를 강타했다.
미국은 폭격이 성공적이라고 믿었고, 제시 올덴도프 해군 소장은 해군이 더 이상 목표물이 없다고 주장했다.[21] 실제로는 일본군 대부분의 위치는 피해를 입지 않았고, 심지어 해변 방어를 맡은 대대조차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폭격은 섬에 있던 일본군 항공기와 비행장 주변 건물들을 파괴하는 데에 그쳤다.
4. 전투 경과
미군은 당초 4일 안에 섬을 탈환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 전투는 두 달 이상 지속되었다. 미군 4만 7천여 명과 일본군 1만 3천여 명이 투입되었으며, 미군 피해는 사망 1천 500명, 부상 6천여 명이었고, 일본군 피해는 사망 1만 명, 체포 202명이었다.
일본군은 미군의 상륙이 예상되는 서쪽 해변에 "이시마츠", "이와마츠", "쿠로마츠", "아야메", "렌게" 등의 진지를 사전에 구축했다.[72] 이 진지들은 산호초의 단단한 지형을 이용한 보병호와 철근 콘크리트제 토치카로 구성되었으며, 속사포와 야포, 박격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9월 15일 오전 5시 30분, 미군은 서쪽 해변에 대한 함포 사격을 시작했고, 8시 상륙 직전 함재기 50기의 폭격 후 연막탄을 발사하며 상륙을 개시했다. 제1 해병 연대, 제5 해병 연대, 제7 해병 연대가 주력으로, 제1파 4,500명을 시작으로 제6파까지 나뉘어 상륙했다.
미군은 상륙 지점의 남북 3km 구간을 5개 구역(화이트 1, 2, 오렌지 1, 2, 3)으로 구분했다. 제1 해병 연대는 화이트, 제5, 제7 해병 연대는 오렌지 해안으로 향했지만, 각 해안에는 일본군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해안선에 설치한 장애물과 기뢰로 미군 상륙 부대를 저지하려 했으나, 미 해군 수중 파괴반의 활동과 함포 사격으로 대부분 제거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나카가와 대좌의 명령에 따라 미군을 해안으로 유인하기 위해 사격을 자제하며 기다렸다.[73]
일본군은 상륙 부대가 100~150m까지 접근하자 91식 10cm 유탄포 등을 동원하여 일제 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미군 상륙정과 암트랙이 파괴되고, 많은 해병대원이 사상당했다.[73]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계속 전진하여 일본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해안에 매설한 지뢰로 미군에게 추가 피해를 주려 했으나, 대부분 불발되었다. 그러나 항공 폭탄을 전용한 급조 지뢰는 큰 위력을 발휘했다.[77]
일본군은 95식 경전차를 동반한 반격을 감행했지만, M4 중전차와 바주카에 의해 격파되었다.[83]
상륙 첫날, 미군 해병 제1사단은 1,111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통신 두절과 물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밤에는 일본군의 야간 공격과 심리전이 이어졌다.
9월 16일 이후, 미군은 비행장 점령과 섬 남부 제압을 목표로 공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과 지형적 불리함, 식수 부족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일본군 저격수들은 들것 운반병을 집중 공격하여 미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일본군 제14사단은 팔라우 본섬에서 보병 제15연대 제2대대를 투입하여 역상륙을 시도했으나, 큰 피해를 입고 일부 병력만 펠렐리우 수비대와 합류했다.[109]
앙가우르 전투에서 승리한 미 육군 81 보병사단은 펠렐리우 전투에 투입되어 해병대를 지원했다. 11월 24일, 일본군 지휘관 나카가와는 "우리의 칼은 부러졌고 창은 다 떨어졌다"라고 선언하며 할복했다.[29] 11월 27일, 미군은 섬의 안전을 선언하며 73일간의 전투를 마무리지었다.[30]
4. 1. 상륙 작전 (9월 15일)
비악 전투에서 3,000명의 사상자를 내며 일본군의 지연 전술에 맞서 싸웠던 미군은, 펠렐리우 전투에서는 전술 변화 없이 이전의 상륙 작전 계획을 그대로 유지했다.[20] 작전 계획은 펠렐리우 남서쪽 해변에 상륙하여 비행장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1연대 해병대는 루이스 B. "체스티" 풀러 대령 지휘 하에 북쪽에, 5연대 해병대는 해롤드 해리스 대령 지휘 하에 중앙에, 7연대 해병대는 허먼 하네켄 대령 지휘 하에 남쪽에 상륙할 예정이었다.포병 연대는 윌리엄 해리슨 대령 지휘 하에 보병 연대 뒤를 따랐다. 1연대와 7연대가 내륙으로 진격하여 5연대의 측면을 방어하며 비행장을 점령하고, 5연대는 동쪽 해안으로 진격하여 섬을 양분하는 계획이었다. 1연대는 우무르브로골로 북진, 7연대는 섬 남쪽 끝을 정리할 예정이었다. 앙가우르에는 미 육군 81 보병사단이 대기하며 지원할 예정이었다.
9월 4일, 해병대는 파부부에서 출발하여 펠렐리우까지 약 3379.61km를 항해했다. 해군 수중 파괴반이 해변 장애물을 제거하고, 9월 12일부터 군함의 사전 폭격이 시작되었다.
전함 , , , , , 중순양함 , , , , 경순양함 , , ,[29] 사령선 지휘 하에 3일간 폭격과 항공모함, 경항공모함, 호위 항공모함의 공습이 이어졌다.[21] 총 519발의 약 40.64cm 포탄, 1,845발의 약 35.56cm 포탄, 1,793발의 약 226.80kg 폭탄이 펠렐리우에 투하되었다.
미군은 폭격이 성공적이라고 판단했지만,[21] 일본군은 대부분 피해를 입지 않았고, 특이한 사격 규율을 지키며 공격 기회를 기다렸다. 폭격은 일본군 항공기와 비행장 주변 건물만 파괴했다.

미 해병대는 9월 15일 08시 32분에 상륙을 시작했다. 제1해병대는 북쪽 화이트 비치 1과 2에, 제5해병대와 제7해병대는 중앙과 남쪽 오렌지 비치 1, 2, 3에 상륙했다.[29] 일본군은 해안에 있던 해병대가 상륙정에 접근하자 포격을 시작하여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산호 곶 진지에서는 47mm 포와 20mm 포로 공격했다. 09시 30분까지 일본군은 60대의 LVT와 DUKW를 파괴했다.

제1해병대는 "더 포인트"의 맹렬한 사격으로 고전했다.[29] 풀러의 LVT는 불발탄에 맞았고, 통신 부대는 파괴되었다. 제7해병대는 오렌지 비치 3의 혼잡한 상황에 직면했다.[29]
제5해병대는 야자수 숲의 엄호 덕분에 첫날 가장 큰 진전을 보였다.[29] 활주로 접근 중 나카가와의 전차대가 반격했지만, 전차, 곡사포, 해군 함포, 급강하 폭격기에 의해 격파되었다.[29]
첫날 미군은 약 3.22km 길이의 상륙 해변을 확보했지만, 남쪽에서 약 1.61km 내륙 진격을 제외하고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9] 해병대는 첫날 200명이 사망하고 900명이 부상당했다. 루퍼투스는 일본군 방어가 곧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다.[30]
다음 날인 9월 16일, 미군 전선에 식수가 전달되었지만 연료 드럼통에 담겨 와서 오염되었고, 많은 병사들이 몸 상태가 나빠졌다. 또한 야간 포격으로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류파타스 사단장은 상륙 당일 큰 피해를 입은 제1해병연대 연대장 풀러 대령에게 "더 빨리 전진할 수 없는 건가? 이 멍청아, 전력을 다해서 결과를 내! 내 말이 뭔 말인지 알겠지, 이 멍청아"라며 격렬하게 비난하고, 제1해병연대에는 고지 공략, 제5해병연대에는 비행장 공략, 제7해병연대에는 섬 남단 제압을 명령했다.[85]
해안의 이시마츠 진지는 완강히 저항하며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전차 10량을 앞세워 진격했지만, 일본군의 포격과 나카지마 마사 중위의 육탄 공격으로 전진을 멈췄다.[86] 결국 미군은 이시마츠 진지를 포기하고 철수했다.[87]
미군은 비행장에 도달했지만, 탁 트인 지형에서 일본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제5해병연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베테랑 병사들은 "펠렐리우 섬 비행장 전투가 태평양 전쟁 중 최악의 경험이었다"라고 회상했다.[88] 제1해병연대는 이틀 동안 1,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예비 병력 부족으로 철수하지 못했다.[89] 비행장은 증원군 도착으로 일몰까지 미군 수중에 들어갔다.
제7해병연대는 섬 남부를 공격하며 네이팜탄 공습 지원을 받아 일본군 토치카를 공략하며 정오까지 섬 남단에 도달했다. 그러나 기온 상승과 식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군 저격병의 공격으로 식수 보급이 어려워지자, 제3대대는 "식수 부족으로 병사들이 말라가고 있다"라는 전문을 보냈다. 남부 지구에서는 일본군이 지리적 이점을 얻지 못해, 제7해병연대는 비교적 순조롭게 일본군을 소탕했다. 4일간 일본군 전사자는 2,609명, 제7해병연대 사상자는 497명이었다. 해병대원들은 항복하는 일본군도 사살하여 포로는 없었다.[90]
미군은 일본군의 연락 수단을 전서구로 오인하여 새들을 엽총으로 격추했지만, 실제로는 일본군은 전서구를 사용하지 않았다.[91]
4. 2. 비행장 점령 및 남부 전투 (9월 16일 ~ 23일)
일본군과는 달리, 다가오는 전투에서 전술을 대폭 변경한 미국군은 비악 전투에서 3,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2달 동안 일본군의 지연 전술에 맞서 요새화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상륙 작전 계획에서 변경된 사항이 없었다.[20] 펠렐리우에서 미국 작전 계획자들은 남부 펠렐리우의 비행장과 가깝다는 이유로 남서쪽 해변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다.9월 16일, 제5해병연대는 비행장을 점령하고 펠렐리우 동쪽 해안으로 진격하기 위해 이동했다.[29] 연대 전체가 동시에 비행장을 횡단하면서 북쪽 고지대에서 쏟아지는 맹렬한 포격을 견뎌야 했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비행장을 점령한 후, 그들은 펠렐리우 동쪽 끝으로 빠르게 진격했고, 섬 남부의 방어군은 제7해병연대에 의해 격파되었다.[29]
이 지역은 일본군이 여전히 수많은 토치카를 점령하고 있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열지수는 약 115°F였으며,[31][32] 해병들은 열사병으로 인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해병들의 식수가 빈 기름통에 배급되었고, 이로 인해 물이 기름 찌꺼기로 오염되었다는 점이다.[33]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 23일까지 제5해병연대와 제7해병연대는 비행장과 섬 남부를 확보하여 목표를 달성했지만, 비행장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우무르브로골 산의 고지대에서 일본군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21]
미군은 9월 17일부터 비행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VMO-3의 Stinson OY-1 센티넬은 해병 포병과 함포 사격 지원을 위한 항공 관측 임무를 시작했다. 9월 26일, VMF-114 소속의 해병 F4U 콜세어가 활주로에 착륙했다. 콜세어는 펠렐리우 전역에서 급강하 폭격 임무를 시작하여 보병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열린 동굴 입구에 로켓을 발사하고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이것은 태평양 전역에서 네이팜탄이 사용된 두 번째 사례였으며, 일반적으로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면서 거미집을 숨기고 있는 식물을 태우는 데 효과적이었다. 펠렐리우 비행장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콜세어의 이륙에서 목표 지역까지의 시간은 매우 짧았고, 때로는 10~15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조종사는 착륙 장치를 올리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지 않았고, 공격하는 동안 내린 채로 두었다. 공격이 완료된 후, 콜세어는 다시 착륙 패턴으로 돌아갔다.
4. 3. 블러디 노즈 릿지 전투 (9월 17일 ~ 11월 24일)
"더 포인트" 점령 이후, 제1 해병대는 움부르골 포켓 북쪽으로 이동했으며, 이곳은 해병대에 의해 "블러디 노즈 릿지"라는 별명이 붙었다.[29] 풀러는 부하들을 이끌고 수많은 공격을 감행했지만, 일본군의 사격으로 인해 매번 심각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제1 해병대의 이동은 능선 사이의 좁은 길로 제한되었으며, 각 능선 요새는 직간접 사격으로 서로를 지원할 수 있었다.
해병대는 능선을 천천히 통과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은 최대 사상자를 낼 수 있을 때만 공격하는 특이한 사격 규율을 보였다. 사상자가 증가함에 따라 일본군 저격수들은 들것 운반병을 겨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들것 운반병이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교체하기 위해 돌아와 더 많은 표적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규모 그룹으로 일본군 병사들도 밤에 미군 진지에 침투를 시도했다. 해병대는 2인용 전투 구멍을 만들어 한 명의 해병이 잠을 자는 동안 다른 해병은 침투자를 감시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격렬한 교전은 블러디 노즈 릿지에서 발생했는데, 제1 해병 연대 제1 대대는 소령 레이먼드 데이비스의 지휘 아래 100고지를 공격했다. 6일간의 전투에서 대대는 71%의 사상자를 냈다. 에버렛 P. 포프 대위와 그의 부대는 능선 깊숙이 침투하여 남은 9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그가 100고지라고 생각한 곳을 점령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언덕의 정상에 도달하는 데 하루 동안의 전투가 걸렸는데, 사실 그곳은 더 많은 일본군 방어병들이 점령하고 있는 다른 능선이었다.

능선 기슭에 갇힌 포프는 작은 방어 진지를 설치했는데, 이곳은 밤새 일본군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 해병대는 탄약이 다 떨어졌고 칼과 주먹으로 공격자들과 싸워야 했으며 심지어 산호 바위와 탄약통을 일본군에게 던지기까지 했다. 포프와 그의 부하들은 동이 틀 때까지 버텼고, 이는 더 치명적인 사격을 가져왔다. 그들이 진지를 탈출했을 때 9명만 남았다. 포프는 나중에 이 작전으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일본군은 풀러의 제1 해병대에 70%의 사상자, 즉 1,749명의 사상자를 냈다.[29] 움부르골 능선에서 6일간의 전투 후, 가이거는 미국 육군의 제81 보병 사단 병력을 펠렐리우로 파견하여 연대를 구원하게 했다.[29] 제321 연대 전투단은 9월 23일 움부르골 산 북쪽 끝 펠렐리우 서부 해변에 상륙했다. 일본군이 여전히 점령하고 있는 능선들은 펠렐리우의 미군에 의해 구어적으로 "포켓"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321 연대와 제7 해병대는 9월 24일(D+9)까지 이 "포켓"을 완전히 포위했다.[29]
10월 15일까지 제7 해병대는 46%의 사상자를 냈고, 가이거는 제5 해병대로 교체했다.[29] 해리스 대령은 공성 전술을 채택하여 불도저와 화염 방사기 전차를 사용하여 조직적으로 일본군 진지를 파괴하고 북쪽에서 능선으로 진격했다.[29] 10월 30일 제81 보병 사단이 펠렐리우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해병대와 같은 전술을 사용하여 "포켓"을 완전히 제압하는 데는 또 다른 6주가 걸릴 것이다.[29]
앙가우르 전투에서 승리한 후, 제81 보병 사단은 제1 해병 사단의 펠렐리우 점령 노력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81 보병 사단은 결국 제1 해병 사단을 구원하고 펠렐리우에서의 전투 작전 지휘를 맡았다. 제81 보병 사단은 1945년 1월 18일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끝날 때까지 섬에 계속 주둔했다.
11월 24일 나카가와는 "우리의 칼은 부러졌고 창은 다 떨어졌다"라고 선언했다. 그 후 그는 연대기를 불태우고 할복을 했다.[29] 그는 펠렐리우에서의 일관된 방어 작전으로 사후 중장으로 진급했다. 11월 27일 섬은 안전하다고 선언되었고, 73일간의 전투는 끝났다.[30]
26명의 제2 보병 병사와 8명의 제45 경비대 해병으로 구성된 한 일본군 중위는 1947년 4월 22일까지 펠렐리우의 동굴에서 버텼는데, 전 일본군 제독이 전쟁이 끝났다고 설득한 후에야 항복했다.[29]
4. 4. 일본군 역상륙 (9월 22일 ~ 24일)
일본군 제14사단은 펠렐리우 섬 수비대를 지원하기 위해 팔라우 본섬에서 보병 제15연대 제2대대를 투입, 역상륙을 시도했다. 이이다 소좌가 이끄는 역상륙 부대는 미군의 경계와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109], 일부 병력은 펠렐리우 섬 수비대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이이다 소좌는 3명을 한 조로 묶은 척탄 결사대를 조직하여 야간에 미군 진지에 침투, 척탄 공격을 가했다. 척탄대는 소리 없이 미군 진지에 들어가 총검으로 미군을 공격하고, 발각되면 수류탄으로 자폭하는 공격을 감행했다.[110] 일본군의 이러한 공격으로 미군 비행장 요원에게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비행장 가동을 중단시키지는 못했다.[110]4. 5. 일본군 수비대 옥쇄 (11월 24일 ~ 27일)
"더 포인트"를 점령한 후, 제1 해병대는 움부르골 포켓 북쪽으로 이동했으며,[29] 이곳은 해병대에 의해 "블러디 노즈 릿지(Bloody Nose Ridge)"라는 별명이 붙었다. 풀러는 부하들을 이끌고 수많은 공격을 감행했지만, 일본군의 사격으로 심각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제1 해병대의 이동은 능선 사이의 좁은 길로 제한되었으며, 각 능선 요새는 직간접 사격으로 서로를 지원할 수 있었다.해병대는 능선을 천천히 통과하면서 점점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은 최대 사상자를 낼 수 있을 때만 공격하는 특이한 사격 규율을 보였다. 사상자가 증가함에 따라 일본군 저격수들은 들것 운반병을 겨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들것 운반병이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교체하기 위해 돌아와 더 많은 표적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밤에는 소규모 일본군 병사들이 미군 진지에 침투를 시도하기도 했다. 해병대는 2인용 전투 구멍을 만들어 한 명의 해병이 잠을 자는 동안 다른 해병은 침투자를 감시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격렬한 교전은 블러디 노즈 릿지에서 발생했는데, 제1 해병 연대 제1 대대는 레이먼드 데이비스 소령의 지휘 아래 100고지를 공격했다. 6일간의 전투에서 대대는 71%의 사상자를 냈다. 에버렛 P. 포프 대위와 그의 부대는 능선 깊숙이 침투하여 남은 9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그가 100고지라고 생각한 곳을 점령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언덕의 정상에 도달하는 데 하루 동안의 전투가 걸렸는데, 사실 그곳은 더 많은 일본군 방어병들이 점령하고 있는 다른 능선이었다.
능선 기슭에 갇힌 포프는 작은 방어 진지를 설치했는데, 이곳은 밤새 일본군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 해병대는 탄약이 다 떨어졌고 칼과 주먹으로 공격자들과 싸워야 했으며 심지어 산호 바위와 탄약통을 일본군에게 던지기까지 했다. 포프와 그의 부하들은 동이 틀 때까지 버텼고, 이는 더 치명적인 사격을 가져왔다. 그들이 진지를 탈출했을 때 9명만 남았다. 포프는 나중에 이 작전으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일본군은 풀러의 제1 해병대에 70%(1,749명)의 사상자를 냈다.[29] 움부르골 능선에서 6일간의 전투 후, 가이거는 미국 육군의 제81 보병 사단 병력을 펠렐리우로 파견하여 연대를 구원하게 했다.[29] 제321 연대 전투단은 9월 23일 움부르골 산 북쪽 끝 펠렐리우 서부 해변에 상륙했다. 일본군이 여전히 점령하고 있는 능선들은 펠렐리우의 미군에 의해 구어적으로 "포켓"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321 연대와 제7 해병대는 9월 24일(D+9)까지 이 "포켓"을 완전히 포위했다.[29]
10월 15일까지 제7 해병대는 46%의 사상자를 냈고, 가이거는 제5 해병대로 교체했다.[29] 해리스 대령은 공성 전술을 채택하여 불도저와 화염 방사기 전차를 사용하여 조직적으로 일본군 진지를 파괴하고 북쪽에서 능선으로 진격했다.[29] 10월 30일, 제81 보병 사단이 펠렐리우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해병대와 같은 전술을 사용하여 "포켓"을 완전히 제압하는 데는 또 다른 6주가 걸릴 것이다.[29]
11월 24일, 나카가와는 "우리의 칼은 부러졌고 창은 다 떨어졌다"라고 선언했다. 그 후 그는 연대기를 불태우고 할복을 했다.[29] 그는 펠렐리우에서의 일관된 방어 작전으로 사후 중장으로 진급했다. 11월 27일, 섬은 안전하다고 선언되었고, 73일간의 전투는 끝났다.[30]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펠렐리우 전투는 미군에게 큰 피해를 안겼지만, 전략적 가치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미군은 일본군 수비병 1명을 사살하기 위해 1,500발 이상의 탄약을 소모했으며, 엄청난 양의 포탄과 수류탄을 사용했다.[21]
일본군 수비대는 필리핀에서의 미군 작전을 방해할 능력이 없었고,[21] 펠렐리우에서 점령한 비행장은 이후 작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대신 캐롤라인 제도의 울리시 환초가 오키나와 침공을 위한 발진 기지로 사용되었다.
윌리엄 홀시 주니어 제독은 얍 섬 점령 계획을 취소하고 펠렐리우와 앙가우르 상륙 병력을 레이테 섬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체스터 니미츠는 이를 거부했다.[37]
이 전투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필리핀 귀환과 연합군의 독일 진격으로 인해 유럽 전황에 가려져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또한, 루퍼투스 사단장의 "3일" 승리 예측으로 인해 단 6명의 종군 기자만이 해안에서 보도했다.
앙가우르 전투와 펠렐리우 전투는 미국인들에게 향후 일본 섬 방어의 예고편을 제공했지만,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 전까지 전술에 큰 변화는 없었다.[34] 펠렐리우에서 얻은 강력한 요새 공격 경험은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다시 활용되었다.[36]
펠렐리우 수비대는 쇼와 천황으로부터 11번의 포상을 받았고, 지휘관 나카가와 대좌는 사후 2계급 특진하여 육군 중장이 되었다.
전투가 끝난 후에도 야마구치 소위 등 34명의 일본군 잔존 병력이 2년 가까이 생존하며 유격전을 펼쳤다. 이들은 1947년 4월 22일 미군에 귀순했다.[126]
유진 슬레지는 저서 ''가장 훌륭한 병사들''(With the Old Breed)에서 펠렐리우 전투 경험을 묘사했으며, 2014년 호주 영화 ''파러의 전쟁''(Parer's War)은 데미언 파러가 촬영한 펠렐리우 전투 장면을 담고 있다.[38]
펠렐리우 섬 주민들은 전투 이전에 팔라우 본섬 등으로 소개되어 전투로 인한 민간인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145]
5. 1. 인명 피해
미군은 4일 안에 섬을 탈환하겠다고 예상했지만, 실제 전투는 두 달 이상 지속되었다. 미군 4만 7천여 명과 일본군 1만 3천여 명이 투입되었다. 미군 피해는 사망 1천 500명, 부상 6천여 명이었고, 일본군 피해는 사망 1만 명, 체포 202명이었다.[33]움르브로골 산 주변 "포켓"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은 미군이 전쟁 기간 동안 겪었던 가장 어려운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33] 제1해병사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어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전투까지 작전에 참여하지 못했다. 펠렐리우 전투에서 한 달 동안 제1해병사단은 6,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는 사단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 수치였다. 제81보병사단 역시 섬에서의 작전 기간 동안 3,300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전후 통계에 따르면 미군은 일본군 수비병 한 명을 사살하기 위해 1,500발 이상의 탄약을 소모했다. 미국은 전투 과정에서 1,332만 발의 .30 구경 탄환, 152만 발의 .45 구경 탄환, 693,657발의 .50 구경 탄환, 118,262개의 수류탄, 15만 발의 박격포탄을 사용했다.[21]
이 전투는 미국에서 논란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는 섬 때문에 너무 많은 미국인의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일본군 수비대는 필리핀에서의 잠재적인 미국 작전을 방해할 수단이 없었고,[21] 펠렐리우에서 점령한 비행장은 이후 작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신, 캐롤라인 제도의 울리시 환초가 오키나와 침공을 위한 발진 기지로 사용되었다. 높은 사상자 수는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의 다른 모든 상륙 작전을 넘어섰다.[12]
루퍼투스의 "3일" 승리 예측으로 인해 단 6명의 종군 기자만이 해안에서 보도했기 때문에 전투에 대한 뉴스 보도가 거의 발표되지 않았다. 이 전투는 또한 맥아더의 필리핀 귀환과 연합군의 독일로의 진격으로 인해 유럽에서 가려졌다.
앙가우르 전투와 펠렐리우 전투는 미국인들에게 향후 일본 섬 방어의 예고편을 제공했지만, 미국 계획자들은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 전에 전술에 거의 조정을 하지 않았다.[34]
윌리엄 할시 주니어 제독의 권고에 따라, 캐롤라인 제도의 얍 섬 점령 계획은 취소되었다. 할시는 실제로 펠렐리우와 앙가우르에 대한 상륙을 취소하고 그들의 해병대와 병사들을 레이테 섬으로 보내라고 권고했지만, 이 계획은 니미츠에 의해 거부되었다.[37]
미 해병대는 "일본군은 미군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함으로써 장기간의 지연 작전과 출혈전을 수행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펠렐리우에서 겪은 막대한 비용은 일본으로 향하는 연합군에게 큰 경종을 울렸다. 해상 및 공중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막대한 양의 함포 사격과 네이팜탄을 포함한 폭격과 4배에 달하는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1명의 전사에 미군 1명의 사상과 1,589발의 중화기 및 소화기 탄약을 소모했다. 이 전투는 몇 달 후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의 훌륭하게 지휘된 방어 전술로 이어졌다."[129]
미군 내부에서는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대한 평가가 높은 한편, 펠렐리우 섬 공략의 이점이 그 막대한 손실에 상응하는 것이었는가? 라는 의문이 오늘날에도 제기되고 있다.
육군 제323연대가 무혈 점령한 울리시 환초가 천연의 양항이었고, 펠렐리우 섬보다 훨씬 기지를 구축하기에 매우 적합한 섬이었으며, 미 해군은 이곳에 거대한 전선 기지를 구축했고, 이후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한편, 당초의 목적이었던 필리핀 전역에 대한 항공 지원 기지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펠렐리우 섬의 비행장이 정비되어 필리핀을 지원할 수 있게 된 것은 더글러스 맥아더가 레이테 섬에 상륙한 지 1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며, 그 시점에서는 큰 전략적 가치를 잃었다. 따라서 미국 국내에서도 펠렐리우 전투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고, 동 시기에 진행된 필리핀 전역과 유럽 전선의 마켓 가든 작전 등의 뉴스가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제1해병사단 전사 담당자는 "격렬하게 싸우고, 많은 피해를 입고, 얻는 것은 적다. 제1해병사단에서는 늘 있는 일이다."라고 자조적인 어조로 회상하고 있다.[130]
미군 고위 장교 중에서도 제3함대의 윌리엄 할시 제독이 "(파라오 공략은) 너무 가치에 비해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한다."라며 처음부터 펠렐리우 섬을 포함한 파라오 공략에 반대했던 자신의 생각은 옳았다고 주장했고, 상륙 부대를 함포 사격으로 지원했던 올덴도르프 소장도 "파라오 공략 작전은 의심할 여지 없이 실행될 필요는 없었다."라고 혹독한 평가를 하고 있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해병 제1사단의 상륙 직전에 "해병대 여러분의 승리는 필리핀 상륙 작전의 성공을 더욱 확고하게 할 것이며, 나는 해군 및 해병대 여러분의 작전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라고 녹음하여 전군에게 연설할 정도로 작전 초기에 열의를 보였지만,[131] 회고록에서는 자신의 남서태평양 부대의 모로타이 상륙과 니미츠 제독의 중부 태평양 부대의 펠렐리우 상륙이 1944년 9월 15일에 동시 감행된 것에 대해 언급하며 "우리 지상 병력의 손실은 44명... 이 성과를 적은 손실로 거둘 수 있었음을 기뻐한다. <중략>. 한편, 중부 태평양에서는 그다지 운이 좋지 않아 파라오 제도 공략에 8,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132]
반면에 스테일메이트 II 작전의 최고 책임자였던 태평양 방면군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원수는 "펠렐리우 섬의 복잡하기 그지없는 방비를 뚫기 위해서는 미국의 역사에서 다른 어떤 상륙 작전에서도 볼 수 없었던 최고의 전투 손실 비율(약 40%)을 감수해야만 했다"라고 고전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도,[133] "펠렐리우 섬의 이점이 2,000명의 전사를 포함한 10,000명의 미군 사상자에 상응하는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한편 파라오가 일본군의 수중에 완전히 남겨졌을 경우, 맥아더의 필리핀 진격에 대해 진정한 위협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그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134]
펠렐리우 전투에서 실제로 싸웠던 병사의 소감으로, 부상당한 톰 보일 이등병은 펠렐리우 전투의 의의를 전후 50년 가까이 지난 후 "인생의 마무리에 지금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가치 있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비참한 경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다지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남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회상하고 있다.[135]
5. 2. 전략적 평가
미군 사령관은 4일 안에 섬을 탈환하겠다고 예측했지만, 실제 전투는 두 달 이상 이어졌다. 미군 4만 7천여 명과 일본군 1만 3천여 명이 투입되었다. 미군 피해는 사망 1천 500명, 부상 6천여 명이었고, 일본군 피해는 사망 1만 명, 체포 202명이었다.[33]움르브로골 산 주변 "포켓"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은 미군이 전쟁 기간 동안 겪었던 가장 어려운 전투로 불린다.[33] 제1해병사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침공까지 작전에 참여하지 못했다. 1달 동안의 펠렐리우 전투에서 제1해병사단은 6,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으며, 이는 사단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 수치였다. 제81보병사단 역시 섬에서의 작전 기간 동안 3,300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전후 통계에 따르면 미군은 각 일본군 수비병을 사살하기 위해 1,500발 이상의 탄약을 소모했으며, 미국은 전투 과정에서 1,332만 발의 .30 구경 탄환, 152만 발의 .45 구경 탄환, 693,657발의 .50 구경 탄환, 118,262개의 수류탄, 15만 발의 박격포탄을 소모했다.[21]
이 전투는 미국에서 논란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는 섬 때문에 너무 많은 미국인의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일본군 수비대는 필리핀에서의 잠재적인 미국 작전을 방해할 수단이 부족했고,[21] 펠렐리우에서 점령한 비행장은 이후 작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신, 캐롤라인 제도의 울리시 환초가 오키나와 침공을 위한 발진 기지로 사용되었다. 높은 사상자 수는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의 다른 모든 상륙 작전을 넘어섰다.[12]
또한, 루퍼투스의 "3일" 승리 예측으로 인해 단 6명의 종군 기자만이 해안에서 보도했기 때문에 전투에 대한 뉴스 보도가 거의 발표되지 않았다. 이 전투는 또한 맥아더의 필리핀 귀환과 연합군의 독일로의 진격으로 인해 유럽에서 가려졌다.
앙가우르 전투와 펠렐리우 전투는 미국인들에게 향후 일본 섬 방어의 예고편을 제공했지만, 미국 계획자들은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 전에 전술에 거의 조정을 하지 않았다.[34] 이오지마의 상륙 공격 전 해군 포격은 펠렐리우보다 약간 더 효과적이었지만, 오키나와에서는 예비 포격이 크게 개선되었다.[35] 이오지마에서 수중 폭파를 수행하는 수중 폭파반은 양쪽 해안을 쓸어 적을 혼란시켰지만, 나중에 오키나와의 정확한 공격 해변을 일본군 수비대에게 알렸다.[35] 펠렐리우의 미국 지상군은 강력한 요새를 공격하는 경험을 쌓았으며, 이는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다.[36]
윌리엄 할시 주니어 제독의 권고에 따라, 캐롤라인 제도의 얍 섬 점령 계획은 취소되었다. 할시는 실제로 펠렐리우와 앙가우르에 대한 상륙을 취소하고 그들의 해병대와 병사들을 레이테 섬으로 보내라고 권고했지만, 이 계획은 니미츠에 의해 거부되었다.[37]
구분 | 전사자 | 전상자 | 기타 |
---|---|---|---|
일본군 | 10,022명[136]~10,695명[137] | 446명[136] | 생존자는 잔존자 34명과 포로 302명. 포로의 대부분은 조선 출신 군속.[138] |
미군 | 1,684[136]~2,336명[139][140] | 7,160[136]~8,450명[141][142] | 전병자 수천 명[143][144] |
5. 3. 전후 논란 및 평가
움르브로골 산 주변 "포켓"에 있는 일본군 축출은 미군이 전쟁 기간 동안 겪었던 가장 어려운 전투로 불린다.[33] 제1해병사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침공까지 작전에 참여하지 못했다. 펠렐리우 전투에서 제1해병사단은 한 달 동안 6,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으며, 이는 사단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 수치였다. 제81보병사단 역시 섬에서의 작전 기간 동안 3,300명의 사상자를 냈다.전후 통계에 따르면 미군은 각 일본군 수비병을 사살하기 위해 1,500발 이상의 탄약을 소모했다. 미국은 전투 과정에서 1,332만 발의 .30 구경 탄환, 152만 발의 .45 구경 탄환, 693,657발의 .50 구경 탄환, 118,262개의 수류탄, 15만 발의 박격포탄을 소모했다.[21]
이 전투는 미국에서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는 섬 때문에 너무 많은 미국인의 목숨을 잃었다는 논란이 있었다. 일본군 수비대는 필리핀에서의 잠재적인 미국 작전을 방해할 수단이 부족했고,[21] 펠렐리우에서 점령한 비행장은 이후 작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신, 캐롤라인 제도의 울리시 환초가 오키나와 침공을 위한 발진 기지로 사용되었다. 높은 사상자 수는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의 다른 모든 상륙 작전을 넘어섰다.[12]
루퍼투스의 "3일" 승리 예측으로 인해 단 6명의 종군 기자만이 해안에서 보도했기 때문에 전투에 대한 뉴스 보도가 거의 발표되지 않았다. 이 전투는 또한 맥아더의 필리핀 귀환과 연합군의 독일로의 진격으로 인해 유럽에서 가려졌다.
앙가우르 전투와 펠렐리우 전투는 미국인들에게 향후 일본 섬 방어의 예고편을 제공했지만, 미국 계획자들은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 전에 전술에 거의 조정을 하지 않았다.[34] 이오지마의 상륙 공격 전 해군 포격은 펠렐리우보다 약간 더 효과적이었지만, 오키나와에서는 예비 포격이 크게 개선되었다.[35] 이오지마에서 수중 폭파를 수행하는 수중 폭파반은 양쪽 해안을 쓸어 적을 혼란시켰지만, 나중에 오키나와의 정확한 공격 해변을 일본군 수비대에게 알렸다.[35] 펠렐리우의 미국 지상군은 강력한 요새를 공격하는 경험을 쌓았으며, 이는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다.[36]
윌리엄 할시 주니어 제독의 권고에 따라, 캐롤라인 제도의 얍 섬 점령 계획은 취소되었다. 할시는 실제로 펠렐리우와 앙가우르에 대한 상륙을 취소하고 그들의 해병대와 병사들을 레이테 섬으로 보내라고 권고했지만, 이 계획은 니미츠에 의해 거부되었다.[37]
유진 슬레지는 그의 저서 ''가장 훌륭한 병사들''(With the Old Breed)에서 펠렐리우 전투에서의 경험을 묘사한다. 2014년 호주 텔레비전 영화 ''파러의 전쟁''(Parer's War)의 마지막 장면 중 하나는 데미언 파러가 사망 당시 카메라로 기록한 펠렐리우 전투를 보여준다.[38]
펠렐리우 섬에는 1943년 6월 말 기준으로 민간인 1,060명(일본인 160명, 조선인 1명, 현지 주민 899명)이 평지가 많은 남부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 이후 항공모함 부족을 도서 기지 항공 부대로 보충하는 방침이 채택되어 비행장 확충 및 방비 강화에 따라, 방첩 관점에서 1943년 9월부터 1944년 8월에 걸쳐 섬 주민들은 팔라우 본섬과 코롤 섬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전투로 인한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145]
현지 주민의 피해가 적었던 것은 미담으로 매일신문의 칼럼 등에 게재되었다고 한다.
진지 구축에 동원된 섬 주민들은 일본군과 의기투합하여, 나카가와는 섬 주민 대표로부터 "함께 싸우고 싶다"는 요청을 받았지만, "너희들과 함께 우리 제국 육군이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며 거절했다. 섬 주민들은 겉치레 우정이었나 실의에 빠진 채 펠렐리우 섬 북부의 갈라코르 부두에서 소개를 위해 일본군이 준비한 대발동정에 올랐지만, 대발이 섬을 떠나는 순간 그 지역의 일본군 전원이 손을 흔들며 해변으로 달려 나왔다. 그 중에는 군모를 흔들거나, 진지 구축 작업 중에 함께 불렀던 즉흥 노래를 합창하며 전송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섬 주민들은 일본군에 품었던 불신은 오해였고, 신뢰할 만한 일본 군인들이었다고 이해했다고 한다.
전후, 소개되었던 섬 주민 중 일부는 남부가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북부로 돌아와 정착했지만, 돌아가지 못한 섬 주민과 자손 1,600명이 토지 소유권 문제로 펠렐리우 출신임을 주장하고 있다.
당시 일본의 교육을 받았던 섬 주민들은 현재도 일본어를 할 수 있으며, 단어 단위라면 젊은이들에게도 일본어가 통하는 경우가 있다.
일본으로부터의 원조로 구입된 코롤과의 연락선은 "YAMATO"라고 명명되었다. 펠렐리우에는 벚꽃이 피지 않지만, 일본을 이미지하는 "사쿠라"라는 단어는 인기가 있어 스포츠 팀 이름 등에도 사용되고 있다.[146]
6. 펠렐리우 전투 관련 논쟁 및 전설
펠렐리우 전투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논쟁 및 전설이 전해진다. 대표적으로 "펠렐리우의 잔 다르크" 전설과 체스터 니미츠 제독의 시문 관련 논쟁이 있다.
"펠렐리우의 잔 다르크" 전설은 일본군 여성 병사가 미 해병대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전설은 증언의 신빙성이 부족하고, 관련 기록도 없어 사실 여부가 불분명하다.
니미츠 제독의 시문과 관련해서는, 일본회의에서 제작한 DVD에 팔라우 사람들이 부르는 "펠렐리우 섬의 벚꽃을 기리는 노래"가 수록되어 논란이 되었다. 이 노래는 일본군의 용맹을 기리는 내용으로, 후나사카 히로시의 저서에 처음 등장했지만, 이후 수정 및 삭제되어 그 진위 여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6. 1. 펠렐리우의 잔 다르크 전설
펠렐리우 전투에서 "펠렐리우의 잔 다르크 전설"로 불리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격전 중 젊은 일본 여성이 미 해병대에 기관총을 난사하여 86명의 사상자를 내고 옥쇄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전쟁 소설가 코지마 죠가 "마지막 한 병사는 여성이었다고 전해지는 페렐리우 섬 일본 수비대의 분전기"라는 전쟁 문헌에서 처음 일본에 소개했다. 그는 미 해병대 스키 하사관에게 목격담을 들은 일본계 미국인 바트 오가타의 증언을 인용했다.[147]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언덕 위에 고립되어 세 방향에서 포위된 채 기관총을 난사했고, 해병대는 86명의 사상자를 냈다. 결국 결사대가 배후 우회를 통해 그녀를 사살했고, 군복 사이로 보이는 하얀 피부를 통해 여성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147] 이후 이 여성은 "펠렐리우의 잔 다르크"로 불리며, 관련 서적이 출판되거나 텔레비전 드라마 목숨이 있는 한 싸워라, 그리고 살아남아라가 방영되기도 했다.[148]코지마의 조사에 따르면, 이 전설의 모델은 코롤 섬의 요정 "츠루노야"의 게이샤 "히사마츠"였다. "히사마츠"는 독립 보병 제346대대장 히키노 미츠히로 소령과 연인 사이였으며, 미군 침공이 임박하자 본토 철수를 거부하고 히키노와 함께 죽겠다고 고집했다. 결국 히키노는 "히사마츠"를 당번병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히사마츠"는 머리를 자르고 남자 군복을 입었으며, 이를 나카오 키요모토 상사가 목격하고 코지마에게 증언했다.
역사가 하타 이쿠히코도 이 전설을 조사했다. 후나사카 히로시는 제2해상유격대 소대장 타카가키 소위 등이 "히사마츠"를 발견하고 코롤 섬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했지만, 히키노가 나타나 타카가키를 때리고 "히사마츠"를 상륙시켰다는 이야기를 타카가키의 부하 장병들에게 들었다고 저술했다. 하타는 코롤 섬에서 현지 가이드 이치카와 타다시로부터 "히사마츠"의 겐지나가 우메노 세츠이며, 흰 피부에 둥근 얼굴, 긴 머리카락을 가졌고, 히키노를 따라 페렐리우 섬으로 건너갔다는 증언을 얻었다. 이치카와는 그녀가 기관총으로 미군을 사살하고 중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옮겨져 2주 후에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보병 제2연대 소속 모리시마 일등병은 장교 전속 위안부가 섬에 남아 군복을 입고 낚시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같은 연대 생존자 이이지마 상등병은 미군이 세운 일본군 여성 병사의 묘를 목격했다.[149] 야마구치 이하 34명의 생존자 중에도 군복 차림 여성이 해안에서 낚시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었고, 미군 병사로부터 "북쪽 지역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은 여자 병사가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증언들은 전설의 영역을 넘지 못했다. 하타는 미 해병대와 전우회에도 취재했지만 성과가 없었고, 히키노의 유고에도 "히사마츠"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하타는 히키노가 여자와 함께였다면 부하들에게 신뢰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히키노는 1944년 9월 28일경 자결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히사마츠"의 참전과 전사에 대한 확증은 얻지 못했지만, 종군 간호사를 통해 "히사마츠"의 사진을 입수하여 실존 여부를 확인했다.
이러한 여성 병사 이야기는 다음 3가지 에피소드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사이판 전투에서 일본인 여성이 미군에 소총을 난사하고 부상당했다는 이야기 (로버트 셔로드 저술, "사이판" 1951년 번역 출판).
- 사이판 전투에서 자결을 시도하다 구조된 종군 간호사 스가노 시즈코가 "사이판의 잔 다르크"로 보도된 사건 (1944년 7월 25일자 뉴욕 헤럴드 트리뷴).
- 에니웨토크 전투에서 일본군 여성 병사가 미군을 저격하고 포로가 되었다는 뉴욕 타임스 보도.
6. 2. 니미츠 제독의 시문
나고시 후타라노스케에 따르면, 팔라우 공화국이 탄생했을 때, 같은 섬 출신 사람들에 의해 펠렐리우 전투에서 일본군의 용맹한 전투를 기리는 「펠렐리우 섬의 벚꽃을 기리는 노래」(작사: 조지 시게오와 오키야마 토요미, 작곡: 같은 섬 초등학교 부교장 윈티)가 만들어져 지금도 불리고 있다고 한다.[150]나고시의 주장은 후나사카 히로시의 저서 『혈풍 펠렐리우 섬』(1981년, 총문사)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지만, 후나사카의 책에서는 「작사: 오키야마 토요미・쇼지 시게오, 작곡: 같은 섬 초등학교 부교장 윈티, 감수: 후나사카 게이코・하치노스 이치로, 지도: 후나사카 히로시」라고 기술되어 일본인에 의한 「감수」와 「지도」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나고시의 책에서는 생략되었다. 또한, 후나사카 히로시의 『혈풍 펠렐리우 섬』은 2000년에 「펠렐리우 섬 옥쇄전」으로 제목이 바뀌어 출판되었지만, 펠렐리우 섬의 벚꽃을 기리는 노래에 대한 기술은 삭제되었다.
「펠렐리우 섬의 벚꽃을 기리는 노래」는 산케이 신문사 기자 스미다 요시노리에 의해 1978년 펠렐리우 섬 취재 시에 기록된 「녹색 섬의 묘」(작사: 초등학교 부교장 윈티・톤미, 작곡: 아내 안토니아)와 곡(멜로디)이 같다. 이로 보아 1981년 후나사카의 책에 쓰인 「펠렐리우 섬의 벚꽃을 기리는 노래」는 1978년 이전에 만들어진 「녹색 섬의 묘」의 곡을 재사용하고, 작사는 후나사카에 의해 이루어졌다고도 추정된다.
일본회의 사업 센터가 2005년에 제작한 DVD 『하늘을 나는 청춘-일본을 사랑한 용사들』[151]에는 팔라우 사람들이 「펠렐리우 섬의 벚꽃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는 영상[152]이 수록되어 있다.
7. 펠렐리우 전투와 한국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2012년 조사에서 팔라우 제도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무자 중 절반 가량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현지에서 숨졌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156]
8. 펠렐리우 전투를 다룬 작품
1982년에 건축된 펠렐리우 신사 내에 1994년에 건립된 석비에는 스틸메이트 II 작전의 지휘관이었던 체스터 니미츠의 시문으로 여겨지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여, 이 섬을 지키기 위해 일본인들이 얼마나 용감한 애국심으로 싸우고 옥쇄했는지 전해주시오.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 C.W. 니미츠
명월 이황지조에 따르면, 이 시문은 펠렐리우 신사 경내의 게시판에 적혀 있던 것을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명월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오른쪽 게시판에는 전투의 경과가 요약되어 있으며, 미국 공판 전사에 실려 있다고 하면서, 다음의 시적인 문장으로 맺고 있습니다. "이 섬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이여. 당신이 일본을 지나치게 된다면 전해주시오. 이 섬을 죽음으로 지킨 일본군 수비대의 용기와 조국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153]
명월은 이 시문의 원본인 영문을 찾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고, 우라 시게루 (전 육군 중좌, 미야기 사건에서 쿠데타 계획 작성에 관여, 전후 항공 막료장, 퇴직 후 록히드사의 대리점 마루베니 고문)가 1984년에 도미하여 니미츠의 자료를 구하기 위해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때, 교관으로부터 니미츠의 시로 전해졌다는 다음과 같은 영어 문장을 제시받았다.
> 우라 씨가 쇼와 59년에 도미하여, 니미츠의 자료를 구하려고 애나폴리스 해군 사관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교관에게 들은 영어 문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Tourists from every country who visit this island should be told how courageous and patriotic were the Japanese soldiers who all died defending this island. "
8. 1. 서적
나고시는 『세계에 사는 일본의 마음』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게재된 사진에는 시문 뒤에 출처로 후나사카 히로시 저 『혈풍 펠렐리우 섬』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해당 시문은 미군 공판 전사에 기록된 시문으로만 소개되어 있다.[1] 후나사카 히로시의 『혈풍 펠렐리우 섬』(1981년)에서 해당 부분은 산케이 신문 기자 스미다 요시노리가 1978년에 산케이 신문의 이바라키현 판에 기획 연재한 "펠렐리우 섬 78"을 수록한 부분에 기재되어 있다.[2] "혈풍 펠렐리우 섬"에서 스미다 요시노리 기자의 기사에서는 출처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와 거의 같은 문장이 후나사카 히로시가 감수하고 자신이 경영하는 출판사에서 낸 "영광의 군기 아아 우리 미토의 2개 연대"(1972년 다이세이도 서점)에 존재한다.[3]8. 2. 텔레비전 드라마
로버트 셔로는 사이판 전투를 보도한 주간지 타임 1944년 8월 7일 자 "THE NATURE OF THE ENEMY"에서, 궁지에 몰린 세 명의 재류 일본인 여성이 입수 자살하기 전에 머리를 빗질하는 모습을 목격한 해병대원의 증언을 듣고 테르모필레 전투를 연상했다는 기사를 썼다. 이 기사는 일본 신문(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 호치)에서 전의 고양을 위해 인용되었다. 셔로드는 1945년에 종군 보고서 "On to Westward: The WAR IN THE CENTRAL PACIFIC"을 출판했고, 1951년 나카노 고로의 번역으로 일본에서도 출판되었다.8. 3. 게임
셜로드(シャーロッド)의 "On to Westward"는 주로 사이판 전투와 이오지마 전투를 다루고 있지만, 펠렐리우 전투에 대해 언급하면서, 펠렐리우 일본 수비대의 병사들이 죽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태평양의 방파제를 쌓을 것이다!"라는 글을 남겼다고 기록했다.[155]이 "태평양의 방파제"라는 표현은 사이판 전투에서 보병 제136연대장 오가와 유키마쓰 대좌가 1944년 5월 9일 출진식 인사에서 "몸으로써 태평양의 방파제가 되겠다"라고 한 말과 유사하다. 사이판 전투에서 자결한 나구모 주이치 중장도 옥쇄 직전 마지막 훈시에서 "태평양의 방파제가 되어 사이판 섬에 뼈를 묻겠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1944년 2월 마리아나·팔라우 방면의 방위를 관할하는 제31군 사령관 오바타 히데오 중장이 쇼와 천황에게 맹세한 말에서 유래한다. 오바타는 1944년 5월 28일~30일에는 펠렐리우의 수비 부대를 시찰했고, 괌 전투에서 옥쇄 전사했지만, 자신도 8월 10일에 "나의 몸으로써, 태평양의 방파제가 되겠다"라는 결별의 전보를 쳤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History of Batlles of Imperial Japanese Tanks
http://www3.plala.or[...]
2018-03-04
[2]
웹사이트
World War II casualties
https://www.history.[...]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2023-02-10
[3]
간행물
History of the USMC in World War II vol. IV: Western Pacific Operations
https://www.marines.[...]
U.S. Marine Corps
2023-02-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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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 Marine Corps
2023-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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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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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ミスVSスミス」に関しては、海兵隊を見下している陸軍から「(海兵隊指揮官は、陸軍将官のように大部隊を指揮する訓練を受けておらず、その能力もないのに、)海兵隊の中将に陸軍の少将を解任する資格があるのか」と大いに憤懣の声が上がり、ホーランド・スミス配下で戦死した海兵隊員の一部の遺族からの海兵隊司令官としての資質を問う非難に呼応して、これに同調する議員達によって議会に持ち込まれて政治問題化し戦後まで尾を引くことと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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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戦地ペリリュー島から帰還 元日本兵 永井敬司さん死去 - 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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激戦地・ペリリュー島から生還、永井敬司さん死去 {{!}} 朝日新聞デジタル 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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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死者1万人…死闘を指揮した「南洋のサムラ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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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天皇の島から 戦後70年・序章 時を超え眠り続ける「誇り」 集団疎開させ、島民を守った日本兵
産経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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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秘話・大東亜戦争とアジアの歌声
展転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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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最後の1兵は女性だった、と語り伝えられるペリリュー島日本守備隊の奮戦記
宝石
196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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命ある限り戦え、そして生き抜くんだ2014年8月15日(金)放送終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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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に生きる日本の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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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翔る青春 日本を愛した勇士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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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を守る国民会議/国際企画/(有)日本会議事業セン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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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とパラオの絆② 「ペリリュー島を讃える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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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に生きる日本の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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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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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o West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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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일제 때 팔라우 징용 한인 절반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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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2-11-06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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