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네자와성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요네자와성은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에 위치한 윤곽식 구조의 성으로, 센고쿠 시대에는 다테씨의 본거지였고, 에도 시대에는 요네자와번의 번청으로 우에스기씨의 거성이었다. 가마쿠라 시대에 처음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센고쿠 시대에는 다테 마사무네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에도 시대에는 우에스기 가게카츠, 우에스기 요잔 등 우에스기씨가 거성으로 사용했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성터가 공원으로 조성되고 우에스기 신사가 건립되었다. 현재 우에스기 신사 경내에는 마이즈루 다리, 혼마루터 석축 등이 남아 있으며, 요네자와 시 우에스기 기념관에서는 역사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요네자와번 - 우에스기씨
우에스기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 센고쿠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까지 번영하며 간토 간령, 슈고 다이묘, 요네자와 번주 등을 역임했고, 메이지 시대에는 화족으로 서임되었다.
요네자와성 | |
---|---|
지도 | |
기본 정보 | |
![]() | |
일부 | 해당 없음 |
위치 | 요네자와, 야마가타현, 일본 |
종류 | 평지 스타일 일본의 성 |
역사 | |
건설 | 1238년, 1608-1613년 재건 |
건설자 | 우에스기 가게카쓰 |
사용 시기 | 에도 시대 |
철거 | 1873년 |
공개 여부 | 예 |
![]() | |
일본 성곽 개요 | |
![]() | |
다른 이름 | 마이즈루성 (舞鶴城) 마쓰가사키성 (松ヶ岬城) |
구조 | 윤곽식 평성 (輪郭式平城) |
망루 구조 | 고산카이 망루 2기 (御三階櫓2基, 층탑형 3중 3층) |
건설자 | 나가이 도키히로 |
건설 연도 | 랴쿠닌 원년 (1238년) |
개축 | 다테 하루무네 가모 사토야스 우에스기 가게카쓰 |
통치자 | 나가이 씨 다테 씨 가모 씨 우에스기 씨 |
폐성 연도 | 1871년 |
유적 | 토루 (土塁) 해자 (堀) 석벽 (石垣) |
명칭 | |
로마자 표기 | Yonezawa-jō |
2. 역사
요네자와성은 가마쿠라 시대 중기인 1238년에 오에노 히로모토의 아들 나가이 도키히로가 데와 국에 영지를 하사받아 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가이 씨는 약 150년간 이 지역을 통치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다테 씨가 나가이 씨를 대체했고, 다테 마사무네가 이 성에서 태어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한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요네자와 30만 석으로 감봉되어 이 성에 들어왔다. 우에스기 씨는 1608년부터 1613년까지 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했지만, 도쿠가와 막부의 의심을 받아 석벽 대신 토루를 쌓고 천수각 대신 3층 망루를 세웠다.[4]
에도 시대 요네자와번의 번청이었던 이 성은 우에스기 가게카쓰, 우에스기 요잔 등 우에스기 씨의 거성이었다. 혼마루를 중심으로 니노마루, 산노마루가 동심원으로 퍼져 있는 윤곽식 구조였으며, 10기의 망루와 17동의 문이 있었다.[4]
1664년 우에스기 가문의 수입이 15만 석으로 반감되면서 많은 사무라이들이 해고되거나 겸업으로 농사를 짓게 되었지만, 메이지 유신까지 우에스기 씨의 소유로 남아있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요네자와 번은 요네자와 현이 되었고, 1873년에는 성의 건물이 모두 철거되었다. 1876년에는 우에스기 겐신을 기리는 우에스기 신사가 혼마루 터에 세워졌다. 현재 혼마루 터는 우에스기 신사 경내이며, 니노마루 터에는 요네자와 시 우에스기 기념관이 있다.
2. 1. 가마쿠라 시대
랴쿠닌 원년(1238년), 가마쿠라 막부의 중신 오에노 히로모토의 차남 나가이 도키히로가 데와 국 오키타마 군 나가이 고의 지토로 부임하면서 요네자와 성이 처음 축조되었다고 추정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나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4] 도키히로는 부임지의 지명을 따서 나가이 씨라는 성을 사용했으며, 이후 나가이 씨의 지배가 150년 가까이 이어졌다.2. 2. 무로마치 시대
8대 히로후사는 무로마치 시대 초(덴주 6년(1380년)), 오에이 9년(1403년), 오에이 20년(1413년) 등의 설이 있다.)에 다테 무네토오에게 침략당해 이 땅에서 쫓겨났다. 이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까지 이곳은 다테 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5]2. 3. 센고쿠・모모야마 시대
다테 마사무네는 센고쿠 시대 후기에 요네자와 성을 본거지로 삼았으며, 그의 탄생지이기도 하다.[6] 1589년 마사무네는 아시나 요시히로를 꺾고 아시나 씨를 멸망시킨 후, 구로카와성으로 본거지를 옮기고 무네즈미와 무네키요를 요네자와 성주로 삼았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마사무네에게 요네자와로 돌아가도록 했다. 1591년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이와데야마성으로 거처를 옮겼다.이후 오키타마 군은 아이즈에 봉해진 가모 우지사토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중신 가모 사토야스가 요네자와 성주(7만 석, 가모 가문 중 최대)가 되었다.[6] 사토야스는 이때 성을 개수했다. 분로쿠 연간에 시라코 신사가 요네자와 성의 진수가 되었다. 1597년 우지사토의 아들 가모 히데유키는 시모쓰케 국우쓰노미야로 이봉되었고, 아이즈에는 에치고 국으로부터 120만 석으로 우에스기 가게카츠가 입봉했고, 요네자와 성주에는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6만 석, 여력을 포함해 30만 석)를 두었다.[6]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우에스기 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영지의 대부분을 박탈당하고, 요네자와를 중심으로 한 30만 고쿠 영지로 축소되었다. 1608년부터 1613년까지 우에스기 씨는 성을 완전히 개축했다. 그러나 아이즈에 비해 영지가 축소되었고, 가문이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의심을 받으면서, 방어용 토루에는 돌이 사용되지 않았고, 천수각은 소박한 3층 건물로 유지되었다.
2. 4. 에도 시대
1600년(게이초 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우에스기씨는 도요토미씨에 대한 의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횡포를 나오에장으로 탄핵하며 도쿠가와씨에게 선전포고했다. 이에야스는 아이즈 정벌에 나섰으나, 오야마에서 이시다 미쓰나리의 거병 소식을 접하고 회군했다. 나오에 가네쓰구를 총대장으로 한 우에스기군은 요네자와 성에서 북상하여 동군 모가미씨를 공격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패전하자 요네자와 성으로 철수했다. 이로 인해 우에스기 씨는 오키타마 지방과 무쓰국 다테군·시노부군 30만 석(실제 51만 석)으로 감봉되어 요네자와를 거성으로 삼았다.[6]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요네자와 번 우에스기 씨의 거성이 되었다.1608년(게이초 13년) 게이카쓰는 가네쓰구에게 명하여 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게 했고, 1613년(게이초 18년) 윤곽식 구조의 성이 완성되었다. 많은 가신들은 성 아래에 수용될 수 없어 성 근교 황무지였던 히가시하라·미나미하라에 배치되었고, 하급 가신들의 사무라이 마을 "하라가타"가 형성된 것도 요네자와 번의 특징이다.[4]
1664년(간분 4년) 3대 쓰나카쓰가 후사 없이 급사하자, 쓰나노리가 말기 양자로 인정되어 번은 존속했지만 석고는 15만 석(실제 28만 석)으로 반감되었다. 그러나 석고 감소에도 불구하고 번사 해고는 이루어지지 않아 번 재정은 더욱 압박받았다. 성 밖에 하라가타라는 지역을 새로 설치하여 성 아래에 수용할 수 없는 하급 번사를 배치하고 반농 생활을 하게 했다.
9대 하루노리(요잔)는 번정 개혁으로 재정 재건을 이루었다. 하루노리의 은거소인 산하관은 삼의 곁에 있는데, 이는 지후 어전을 전용한 것으로 하루노리 사후 지후 어전으로 되돌아갔다. 다음 대인 우에스기 하루히로도 란가쿠 의술 등 학문을 장려했고, 분카 7년(1810년) "정치 처리가 각별히 잘 이루어져 영내 통치가 좋다"는 이유로 표창받았다. 우에스기 나리카타도 덴포 7년(1836년)에 표창받았다.[7]
우에스기 나리노리 대에도 막부로부터 표창을 받아 18만 7천 석으로 가증되었다. 나리노리는 교토에서 사이고쿠 웅번들과 교류했으며,[8] 분큐 3년(1863년)에는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교토 상경에 수행하여 니조성 경호를 맡았다.
요네자와 번은 에도 시대에 여러 지성을 두었는데, 그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성 이름 | 비고 |
---|---|
후쿠시마성(무쓰국 시노부군) | 간분 4년(1664년)까지. 성주는 혼조씨. 신다쓰 통치의 중심 거점. 간분 반지 이후에도 천령(20만 석)이나 후쿠시마번(이타쿠라씨)이 거성으로 사용. |
오모리성 | 이모가와 씨가 들어감. 북쪽 고지대가 성주 저택으로 추정되며, 주곽 남쪽에 해자와 토루가 잔존. |
야나가와성(무쓰국 다테군) | 스다 씨 축성. 혼마루 망루터 석축, 북쪽 3의 마루 높은 토루 등 우에스기 통치 시대 유구가 잔존. |
호바라성 | 오이시 씨와 군대 히라바야시 마사쓰네가 개전·용수언을 적극 개삭하여 호바라 지방 비옥한 농토의 기초를 만듦.[14] 천령이 된 후 폐성되었지만 혼마루터 현존. 시라카와번이 망루와 저택 자리에 저택을 짓고 호바라 진야가 됨. |
아야카이성, 아라토성, 오구니성, 나카야마성(데와국 오키타마군) | 간분 반지 이후에도 존속한 오키타마군 내 지성. 이후 일국일성령에 의해 성은 "야쿠야", 성주·성대는 "야쿠야쇼"로 개칭. 아야카이성터 아야카이 하치만구 수장고 鞘전 내에 혼마루와 2의 마루 미니어처 복원 모형이 있음. |
다카하타성(오키타마군) | 간분 4년(1664년)까지. 단, 오다 씨 다카하타 이봉 후에도 우에스기 가문이 관리. 분카 7년(1810년) 가증으로 우에스기 가문이 정식 소유. |
다테야마성(오키타마군) | 겐나 엔무 이후 막부 제출 지도나 번 기록에 성산, 고성 등으로 기재. 성터 입구에 현재 우에스기 가문 사유지이므로 출입 대환영 표기가 있으며, 뜻있는 사람들에 의한 안내소가 있음. |
2. 5. 메이지 시대 이후
1871년 폐번치현으로 요네자와 번은 요네자와 현이 되었고, 1872년에는 우에스기 가문의 조상을 기리는 우에스기 신사가 성 안에 세워졌다. 남아있던 모든 건물들은 1873년에 철거되었고, 현재의 요네자와 시청은 제2의 마당에 건설되었다. 1874년에는 본 마당이 공원으로 바뀌었다. 우에스기 신사는 1876년에 천수각 부지 위에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1]보신 전쟁에서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하여 동맹을 주도한 일로 4만 석을 감봉받았다. 이는 아이즈번주 호시나 마사유키에게 은혜를 입은 것도 있었다.[1]
1869년(메이지 2년), 판적 봉환에 의해 우에스기 시게노리는 요네자와 번 지사가 되었다. 요네자와 신전번을 병합하여 요네자와 번의 최종 석고는 15만 7천 석(실고 35만 석)이 되었다.[1]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에 의해 요네자와 현이 설치되었다. 같은 해, 현역의 조정(야시로의 재편입, 분령 지배의 종료 등)이 있어 오키타마군 전부를 현역으로 하는 오키타마현이 발족했다. 1872년(메이지 5년) 마지막 번주 나리노리는, 성내에 있던 우에스기 겐신의 영묘(어당)를 요잔과 함께 합사하여 우에스기 신사로 했다. 1873년(메이지 6년)에는 성의 건물이 전부 파각되었다. 이노마루에 있던 번의 정청은 그대로 군청, 마을사무소(후에 시청)로 이용했다.[1]
1874년(메이지 7년)에는 성터는 마쓰가사키 공원으로 시민에게 일반 공개되었다. 1876년(메이지 9년), 겐신 영구는 우에스기 가문 묘소로, 우에스기 신사를 현재의 땅인 혼마루 터로 옮겼다. 1896년(메이지 29년) 이노마루 터에 우에스기 가문 14대 당주 시게노리 백작 저택이 세워졌다. 1902년(메이지 35년) 우에스기 신사가 별격 관폐사가 된 것을 계기로, 요잔을 섭사 마쓰가사키 신사(혼마루의 동쪽 옆, 세자 어전 터)에 분사했다.[1]
1919년(다이쇼 8년) 요네자와 시내는 요네자와 대화재로 피해를 입어, 우에스기 신사·백작 저택에도 불이 옮겨 붙었다. 현재의 신사 사당은 1923년(다이쇼 12년)에 재건된 것이며, 백작 저택도 1925년(다이쇼 14년)에 재건되어 학명관(鶴鳴館)이라고 불렸다.[1]
1950년(쇼와 25년) 백작 저택이 우에스기 가문에서 요네자와 시로 양도되어, 이듬해부터 중앙 시민회관으로 이용되었다. 1979년(쇼와 54년) 시민회관에서 우에스기 기념관으로 개편되어 향토 요리의 제공과 자료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1]
1997년(헤이세이 9년) 백작 저택은 등록 유형 문화재가 되었다.[1]
2017년 (헤이세이 29년) 4월 6일, 속 일본 100명성 (109번)에 선정되었다.[1]
3. 구조
성은 요네자와시 시가지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센고쿠 시대 후기에는 다테씨의 본거지였으며, 다테 마사무네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에도 시대에는 요네자와번의 번청이 있었고, 우에스기 가게카쓰, 우에스기 요잔으로 대표되는 우에스기씨의 거성이기도 하다. 윤곽식 구조로 되어 있어, 혼마루를 중심으로 니노마루, 산노마루가 동심원으로 퍼져있다. 10기의 망루와 17동의 문이 있다. 우에스기씨가 증축할 당시 30만 석의 다이묘의 거성이었고, 석벽과 천수는 설치되지 않았고, 토루로 쌓은 혼마루에 2기의 3층 망루를 세워 천수각 대용으로 사용했다.[4]
혼마루 터는 현재 우에스기 신사의 경내가 되었고, 니노마루 터에는 요네자와시 우에스기 기념관이 있다. 요네자와 도서관에는 1725년과 1811년에 그려진 《요네자와 성 성하회도》가 소장되어 있다. 1802년의 '쇼사키 성첩도'에 따르면, 혼마루 중앙부에 번주의 거주지가 있었고, 동남쪽 둑 위에는 우에스기 겐신을 모시는 어당을 세웠으며,[4] 천수각 대신 동북과 서북에 3층의 모서리 망루(어삼계) 2기를 설치했다. 이 외에도 2층 망루가 여러 개 설치되었다.
니노마루에는 번의 관청, 세자 어전, 어당에 근시하는 호온지, 다이죠지 등 어당에 교대로 시중드는 진언종의 21개 사찰을 둔 것이 특징이다.[4] 산노마루는 상급·중급 가신의 저택으로 채워졌으며, 상인 마을은 성 밖으로 배치된 정가 곽외형의 전형적인 성하 마을 계획에 속한다.[4]
돌담은 적고 토루를 많이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검소한 성이 되었다. 이는 요네자와성이 적에게 침입당하거나 함락된 경험이 없었던 점이나, 120만 석 시대의 가신을 거의 감축하지 않아 재정이 압박받았다는 설도 있지만,[10]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아이즈에서 건설을 목표로 했던 갓사시 성도 요네자와성과 마찬가지로 나와바리를 갖추고 토루를 많이 사용한 구조이다. 이는 가스가야마성 기슭에 있었던 간토 칸레이 저택인 오야카타에도 공통된 특징이며, 우에스기 씨의 본거지로서 전통적인 성관 건축의 구조이다.
4. 현재
요네자와성은 요네자와시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센고쿠 시대 후기에는 다테 마사무네가 태어난 다테씨의 본거지였으며, 에도 시대에는 요네자와번의 번청으로 우에스기 가게카쓰, 우에스기 요잔 등 역대 번주가 거주했던 곳이다. 평성으로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로 구성된 윤곽식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4]
우에스기씨의 대규모 개축 당시에는 30만 석 다이묘의 거성이었으나, 석벽은 적고 토루를 많이 사용했으며 덴슈는 세우지 않았다. 대신 혼마루의 동북쪽과 서북쪽 모퉁이에 2기의 3층 망루를 세워 덴슈를 대신했다.
현재 혼마루 터는 우에스기 신사 경내이며, 니노마루 터에는 요네자와시 우에스기 기념관(구 우에스기 백작 저택)이 있다. 요네자와 도서관에는 1725년과 1811년에 그려진 요네자와성 성하 그림이 소장되어 있다.
2017년 2월 11일부터 이틀간, 우에스기 눈등롱 축제에서 요네자와 청년 회의소가 오산카이 망루를 실물 3분의 1 축척의 눈 조각으로 재현했다. 눈으로 토대를 만들고, 건물은 판자 등으로 제작하여 하얀 성으로 마감했으며, 창문은 요네자와에서 개발된 유기 EL 조명 패널을 사용하고, LED로 라이트업하여 화려하게 연출했다.[9]
성 주변에는 다음과 같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 삼노마루 토루와 사이조 텐만 신사
- 벤텐바시
- 우에스기 요잔의 은거 저택 터인 산하관 유적
- 등록 유형 문화재인 구 우에스기 백작 저택(요네자와시 우에스기 기념관)
- 국정 사적인 우에스기 가문 묘소
- 혼마루 정문인 마이즈루 다리
- 혼마루 남쪽 해자에 놓인 붉은 다리인 히시몬 다리
- 야구라대가 남아있는 혼마루터 석축
-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의 글씨로 된 "우에스기 요시야마 공" 현창비가 있는 북동쪽 모서리 삼층 야구라 터
- 북서쪽 모서리 삼층 야구라 터
- "우에스기 신사 계조전"이 건립된 혼마루 어전 터
- 어당 터
- 보신 전쟁과 서남 전쟁 전사자 위령비인 초혼비[17]
- 카스가 신사
- 다테 마사무네 탄생지 비석
4. 1. 우에스기 신사
1872년 우에스기 겐신을 비롯한 우에스기 씨의 조상을 기리기 위해 요네자와성 안에 우에스기 신사가 세워졌다.[1][2][3] 1876년에 천수각 부지 위, 즉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현재 혼마루 터는 우에스기 신사의 경내가 되어 있다.'''우에스기 신사'''는 야마가타현 요네자와시에 있는 벳표 신사이다.[1][2][3] 이곳은 일본의 역사적인 군사 지도자인 우에스기 겐신을 모시고 있다.[1][2] 2월에는 눈 등롱 축제를 위해 눈으로 등롱을 조각한다.[1]
4. 2. 요네자와시 우에스기 기념관
현재 혼마루 터는 우에스기 신사 경내이며, 니노마루 터에는 요네자와시 우에스기 기념관(구 우에스기 백작 저택)이 있다.[4]5. 주변 지성
- 다테야마성(오키타마군) - 요네자와성의 서쪽에 있는 평산성이다. 성터는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11][12] 최근 발굴 조사에 의해 전국 시대의 다테 씨의 본거지라는 설이 제기되어 주목받고 있다. 다만, 돌담에 관해서는 쌓는 방식에서 우에스기 시대의 것으로 생각된다.[13]
- 야시로성(오키타마군) - 다카하타성의 전신. 오키타마 지두 나가이 씨를 대신하여 다테 가문이 거점으로 삼았다.
- 스기노메성(무츠국 시노부군) - 후쿠시마성의 전신. 호칭은 다이부쓰성, 스기노메성이라고도 한다.
- 시로이시성 (가리타군) - 성주 카리타 씨는 후에 시로이시 씨로 개명하고, 이윽고 다테 씨의 세력 아래에 편입되었다.
- 오에다성 (다테군) - 다테 씨 일문인 오에다 씨 (후에 오에 씨)의 거성.
- 니혼마쓰성 (아다치군) - 니혼마쓰 요시쓰구의 뒤를 이어, 마사무네는 카타쿠라 카게쓰나, 이어서 다테 시게자네를 배치한다.
- 미하루성 (타무라군) - 마사무네는 타무라 무네아키를 성주로 삼아 처가의 영지인 타무라 영지를 통치하게 했다.
- 히바라성 (야마군) - 요네자와 가도를 남하한 우라반다이에 있는 아이즈와의 국경 성. 1585년(덴쇼 13년)에 다테 마사무네에 의해 축성되었다. 히바라는 여름에도 서늘하며 폐성 후에도 다테(가모, 나오에, 우에스기) 여러 씨족은 오키타마군 내의 군 경계 근처에 역사를 두고 야마군을 감시했다.
- 후쿠시마성 (무쓰국 시노부군) - 간분 4년 (1664년)까지. 성주는 혼조씨. 신다쓰 통치의 중심 거점이었다. 간분의 반지 이후에도 천령(20만 석 여)이나 후쿠시마번 (이타쿠라씨)이 거성으로 사용했다.
- 오모리성 (시노부군) - 이모가와 씨가 들어간다. 북쪽의 높은 곳이 성주의 저택으로 추정되며, 주곽의 남쪽에는 해자와 토루가 남아 있다.
- 야나가와성 (무쓰국 다테군) - 성주 스다 씨에 의한, 혼마루의 망루터의 석축이나 북쪽 3의 마루의 높은 토루 등, 우에스기 통치 시대의 유구가 남아 있다.
- 호바라성 (다테군) - 오이시 씨와 군대 히라바야시 마사쓰네는 개전·용수언을 적극적으로 개삭하여 호바라 지방의 비옥한 농토의 기초를 만들었다.[14] 천령이 된 후 폐성되었지만 혼마루터가 현존한다. 시라카와번이 망루와 저택의 자리에 저택을 짓고 '호바라 진야'가 되었다.
- 아야카이성·아라토성·오구니성·나카야마성 (데와국 오키타마군) - 간분의 반지 이후에도 존속한 오키타마군 내의 지성. 이후에는, 일국일성령 (다만 발령으로부터, 간분 반지로부터도 상당한 연수가 경과하고 있다[15])에 의해 성을 "야쿠야", 성주·성대를 "야쿠야쇼"로 개칭. 아야카이성터의 아야카이 하치만구 '수장고 鞘전' 내에는 혼마루와 2의 마루의 미니어처 복원 모형이 있다.
- 다카하타성 (오키타마군) - 간분 4년 (1664년)까지. 다만, 오다 씨의 다카하타 이봉 후에도 우에스기 가문이 관리(오다 씨는 다카하타 진야 (처음에는 성내, 후에는 누카노메로 이동)를 축성하여 입부[16]). 분카 7년(1810년)의 가증으로 다시 우에스기 가문이 정식으로 소유했다.
- 다테야마성 (오키타마군) - 겐나 엔무 이후의 막부 제출 지도나 번의 기록에 '성산' '고성' 등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간분 반지보다도 이후에도 '야쿠야'가 아닌 '성'이라고 칭하고 있다), 향후 연구 과제로 되어 있다. 성터 입구에 현재는 우에스기 가문의 '사유지이므로 출입 대환영'의 표기가 있으며, 뜻있는 사람들에 의한 안내소가 있다.
6. 교통
참조
[1]
웹사이트
Uesugi-jinja Shrine ! Travel Japan (Japan National Tourism Organization)
https://www.japan.tr[...]
2023-04-07
[2]
웹사이트
Uesugi Jinja Shrine|What to See & Do|STAY YAMAGATA
https://yamagatakank[...]
2023-04-07
[3]
웹사이트
Uesugi-Jinja Shrine ! TOHOKU x TOKYO (JAPAN)
https://www.tohokuan[...]
2023-04-07
[4]
서적
米沢の町づくりと殖産興業
宮帯出版社
2009
[5]
뉴스
伊達政宗と米沢、菅野正道。晴宗の重臣[[中野宗時]]の勢力基盤であったことが移転の根拠の一つとして示されている。
山形新聞
2018-04-18
[6]
서적
直江兼続伝
私家版
1944
[7]
문서
上杉家御年譜
米沢温故会
[8]
문서
上杉家は東国大名としては珍しく、大坂や京都屋敷を所有。
[9]
뉴스
ほか
山形新聞online
2017-01-16
[10]
문서
実際には寛文半知の時点でも、なお米沢藩には「御囲い金」と称する余剰金が数万両も残っていた(「藩史大事典」「藩史物語」など)。
[11]
간행물
平成28年3月1日文部科学省告示第26号
文部科学省
2016-03-01
[12]
웹사이트
国指定史跡舘山城跡
https://www.city.yon[...]
米沢市役所
2024-03-29
[13]
문서
「[[石垣の積み方|打込接]](うちこみはぎ)」という1616年以降の積み方になっている。
[14]
문서
福島県歴史資料館収蔵資料目録
[15]
문서
規模の最も広大な中山城は「上杉家御年譜」(米沢温故会) に「元禄五年(1692)中山御役屋と改称」と記される。
[16]
문서
織田氏は[[明和事件]]により、準国主から[[陣屋|無城]]大名に降格されている。
[17]
문서
上杉家重臣には[[毛利氏]](長州藩の本家筋・越後国佐橋庄)と[[島津氏]](信濃島津家・水内郡太田庄)もいる。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