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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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서 사건은 1930년, 대만 원주민 세디크족이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여 일으킨 무장 봉기이다. 세디크족은 일본의 차별, 강제 노동, 문화 탄압에 불만을 품고, 결혼식에서 발생한 일본인 순사 구타 사건을 계기로 봉기를 일으켰다. 모나 루다오가 이끄는 세디크족 전사들은 일본인 134명을 살해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일본군의 진압으로 700명 이상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투항하며 진압되었다. 사건 이후 대만 총독부는 원주민 정책을 수정하고, 일본화 교육을 강화했으나, 2차 우서 사건으로 세디크족 간의 살육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우서 사건은 대만에서 항일 운동으로, 한국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용기로 평가받으며,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1930년 10월 9일, 싸이더커족 족장 루다오 바이의 손자 결혼식에서 일본인 경관 요시무라 가쓰히코가 신랑이 권하는 술을 거절하고 곤봉으로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요시무라는 "금수의 피로 더럽혀진 손"으로 따르는 잔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였으며, 이는 "비위생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족장 손자는 사죄하려 했으나 거부당했고, 이 사건으로 원주민과 일본 군경의 관계는 악화되었다.[18]
1930년 10월 9일, 일본인 경관 요시무라 가쓰히코가 싸이더커족 족장 루다오 바이 손자의 결혼식에서 신랑이 따라준 술을 "금수의 피로 더럽혀진 손"이라며 거절하고 곤봉으로 구타한 사건이 발생했다. 족장 손자가 사과하려 했으나 거부당하면서, 일본 군경과 원주민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25]
2. 배경
원주민들은 '반진(蕃人)' 또는 '세이반(生蕃)'[25] 등으로 불리며 야만인 취급을 받았고, 아타얄족은 토지 개발로 강제 이주 및 강제 노동을 당하며 반감이 컸다. 이러한 차별과 억압은 우서 사건의 배경이 되었다.
2. 1. 일본의 원주민 정책
일본은 대만 원주민을 '번인(蕃人)' 또는 '생번(生蕃)'[25]이라 부르며 야만인 취급했고, 이들의 토지를 강탈하고 강제 노동을 시켰다. 아타얄족은 개발로 인해 강제 이주 및 강제 노동을 당해 일본 군경에 대한 반감이 컸다.[25] 원주민들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금지당하고 일본 문화에 동화되도록 강요받았다.[17]
사쿠마 사마타 대만 총독은 더 공격적인 지형 정책을 채택하여 5년 이내에 벌목 예정 지역의 원주민 집단을 진압하거나 근절하려 했다. 1915년까지 이 정책은 대체로 성공적이었지만, 더 외딴 지역에서는 여전히 저항이 존재했다.
특히, 세디크족은 일본의 산림 자원 수탈과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다. 우서 지구는 일본 식민 지배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성공적인 지구로 평가받았지만, 경찰의 잘못된 행동, 지속적인 강제 노동 관행, 그리고 원주민의 믿음과 관습에 대한 존경심 부족으로 인해 불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4]
2. 2. 사건의 직접적 원인
1930년 10월 7일, 세데크족 족장 모나 루다오의 아들 타다오 모나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일본인 순사 요시무라 가쓰히코가 근처를 지나갔고, 타다오 모나는 그에게 술을 권했다. 그러나 요시무라는 돼지를 도축하고 피가 묻은 손으로 술을 따르는 것은 원주민의 풍습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고 지팡이로 타다오 모나를 때렸다.[5] 이는 세디크족에게 큰 모욕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세디크족 사람들은 들고 일어나 경관을 폭행했다.[18]
이 사건은 세디크족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모나 루다오는 일본 경찰의 보복, 특히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봉기를 계획하게 되었다.[18] 평소 일본 제국의 차별 대우와 강제 노역, 산지 통치를 하는 경찰에 대한 반감 등이 쌓여왔던 것도 봉기의 배경이 되었다.[19]
3. 전개
1930년 10월 27일, 모나 루다오는 1,200명의 전사를 조직해 우서 초등학교 운동회를 습격, 일본인들을 공격하면서 우서 사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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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봉기군의 공격
1930년 10월 27일, 모나 루다오가 이끄는 봉기군은 우서 초등학교에서 열린 육상경기에 참석한 일본인들을 습격했다. 이 공격으로 일본인 134명이 사망하고 215명이 부상당했다.[25] 봉기군은 경찰 주재소와 우체국 등 일본 관공서를 습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탈취했다.[25]
당시 우서 공학교에는 일본인과 대만인(일본식 의상을 입은) 가족들이 모여 있었는데, 봉기군은 일본인을 표적으로 삼아 일본인 132명과 대만인 2명을 참살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목이 잘리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20] 세디크족은 일본인만 살해할 의도였다.[8]
세디크족 출신 일본 경찰관 花岡一郎|하나오카 이치로중국어(세데크어: Dakis Nomin, 1908년 - 1930년)와 花岡二郎|하나오카 지로중국어(세데크어: Dakis Nawi, ?년 - 1930년)는 사건 발생 후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17] 이 둘은 혈연 관계는 없다.[17]
3. 2. 일본군의 진압
일본은 사건 직후 즉각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10월 29일 우서를 탈환했고, 세데크족은 산속으로 숨어 저항을 계속했다.[20] 11월 1일, 모나 루다오의 차남 밧사오가 사망하고, 11월 초에는 모나 루다오가 실종되었다. 일본 측은 친일파 세데크족과 주변 부족들을 동원하여 11월 4일까지 봉기 측 마을을 제압했다.[20] 이후 장남 타다오 모나가 봉기 세력의 전투를 지휘했지만, 12월 8일 타다오 역시 자살하면서 봉기는 사실상 종결되었다. 12월 중, 진압군은 현지 치안을 완전히 회복했다.[20]
일본군은 대포, 기관총, 항공기 등의 병기를 투입하여 세데크족을 제압했다.[20]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여러 설이 있어 확실하지 않다.[20]
일본은 '아군 번'이라 불리는 친일 부족을 동원했는데, 이들에게는 봉기군의 목을 가져오면 현상금을 지급했다. 이는 일본 통치 하에서 금지되었던 출초를 허가한 셈이며, 현상금 대상에는 민간인까지 포함되었다.[20] 이는 원주민 부족 간, 심지어 세데크족 내부에서도 끔찍한 살육을 조장했다.[20]
전투 과정에서 약 700명의 봉기군이 사망하거나 자살했고, 500명 정도가 항복했다.[20] 특히 모나 루다오의 마헤보사에서는 장정의 아내들이 모두 자살하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20] 진압 측에서는 일본군 병사 22명, 경찰관 6명, 아군 번 21명이 전사했다.[20] 전사한 일본군과 아군 번 병사는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1931년 1월,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만 총독 이시즈카 에이조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사임했다.[20]
3. 2. 1. 독가스 사용 논란
일본군이 진압 과정에서 독가스를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930년 11월 3일, 대만군 사령관이 육군 대신에게 보낸 전보에는 "궤양성 투하탄 및 산포탄" 사용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궤양성 독가스 무기(루이사이트)가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0]
그러나 11월 5일 육군성은 대외 관계 등을 고려하여 이 요청을 거부했고, 춘산명철 (2002)은 일본군이 실제로는 청산 가스와 최루성 가스를 혼합한 특수탄(갑3탄) 시제품 3발과 산포용 최루탄(미도리, 갑1탄) 수백 발을 사용했다고 기록했다.[22] 1987년의 자료 에서는 일본군이 최루 가스는 사용했지만, 독가스는 아군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어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0] 이처럼 독가스 사용 여부는 여러 주장이 엇갈려, 현재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4. 제2차 무사 사건
1931년 (쇼와 6년) 4월 25일, 봉기에 가담한 후 투항한 무사 세데크족 생존자(보호 번이라고 불렸다)를 타우츠아사(타우츠아사는 세덕족과 대립하여 아군 번으로서 일본에 협력했다)가 습격하여 216명이 살해되고, 생존자는 298명이 되었다.[23] 습격 측인 타우츠아사의 사망자는 1명이었다. 이를 '''제2 무사 사건'''이라고 한다.[23]
무사 사건의 뒷수습 과정에서 경찰이 아군 번으로부터 총기를 회수하기 직전에 벌어진 사건이었지만, 당시의 경찰관으로부터 경찰이 타우츠아사에게 습격을 사주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타우츠아사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봉기 부족의 토지를 부여받았다.
1931년 (쇼와 6년) 5월 6일, 최종적으로 생존한 세덕족 보호 번 282명[23]은 북항계 중류역의 가와나카지마(현재의 清流部落|칭류 부락중국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여기서 생존자 가족들은 경찰의 지도 아래 생활했다. 강제 이주 후에도 봉기 참가자에 대한 경찰의 취조와 투옥 등 책임 추궁이 계속되었다. 10월에는 귀순식이라는 명목으로 주민을 모아 사건 관계자로 인정한 23명을 체포했다.[23]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던 무사 세덕족 각 사에 대해서도 '반란 협력자'로 투옥되는 사례도 있었다.
이렇게 최종적으로 봉기 유죄자로서 38명이 체포 투옥되었다. 처음 경찰은 이들을 독살로 처형하려 했으나 담당 의사가 독약주사를 거부했다. 38명은 구류 처분되었지만, 도주를 시도하여 살해된 1명 외에는 전원이 1932년 (쇼와 7년) 3월까지 구류 중에 옥사했다.[23]
가와나카지마로 이주한 자들에게는 당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있었지만, 노동력 부족과 말라리아에 시달리며, 이주 후 1년 만에 주민은 210명까지 줄어들었고,[23] 2년 후에는 인구가 3분의 2까지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에는 회복되었다.
5. 결과 및 영향
우서 사건은 1930년 10월 27일, 타이완 세데크족 족장 모나 루다오가 1,200명의 전사를 이끌고 우서 초등학교에서 열린 육상경기에 참석한 일본인들을 습격하여 134명을 살해하고 215명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세데크족 출신 일본 경찰관 2명은 가족과 함께 자살하기도 했다.[19]
일본은 즉각 경찰과 군대로 토벌대를 조직하여 보복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겨자 가스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는 아시아에서 화학전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9][5] 1925년의 제네바 의정서는 화학 무기의 전시 사용을 전쟁 범죄로 규정했지만, 내부 소요나 분쟁에는 적용되지 않았고,[11] 일본은 1975년 5월 21일까지 이 조약의 서명국이 아니었다.[12] 12월 1일 족장이 자살하고 봉기는 3주 동안 지속되었지만, 총 50일 동안 저항이 계속되었다.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약 700명의 세데크족이 죽거나 자살했으며, 500명이 항복했다. 항복한 세데크족 중 약 200명은 일본 측에 가담한 다른 부족의 손에 죽었다. 일본은 항복한 세데크족의 신변 보호를 책임지고 있었음에도 동족 학살을 방관했다. 남은 생존자들은 좁은 보호구역에 갇혀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대만 총독 이시즈카 에이조와 그의 민정 책임자는 1931년 1월 사임해야 했다. 이시즈카의 후임인 오타 마사히로 역시 대만 원주민을 통제하는 데 가혹한 접근 방식을 취했다.[19]
5. 1. 대만 총독부의 정책 변화
일본은 우서 사건 이후 원주민에 대한 통치 방식을 일부 수정했다. 기존의 강압적인 무단 통치에서 벗어나 문화 통치를 표방하며 외형적인 변화를 시도했다.[19] 원주민을 지칭하던 '반진(蕃人)'이라는 멸칭 대신 '가오산족(高山族)'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사용하고, 조선인, 만주인 등과 같은 외지인과 동등한 위치에 놓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형식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원주민들은 여전히 일본 사회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으며 하층민으로 취급되었다. 대만 총독부는 원주민에 대한 동화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벼농사 보급을 시도하여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19] 우서 사건 생존자들이 이주한 가와나카지마(川中島)와 댐 건설로 인해 이주한 사람들이 정착한 나카하라(中原)는 벼농사에 적합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어 주민들의 생활 수준은 이전보다 향상되었다.
또한, 일본과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원주민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칭송받았다. 태평양 전쟁 당시 고사기 의용대에는 자원하여 전장으로 향한 원주민들이 많았는데, 이는 우서 사건에서 세데크족이 보여준 뛰어난 산악전 능력에 군부가 주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러한 사례는 영화 '사욘의 종'에도 묘사되어 황민화 교육의 성과로 선전되었다.
5. 2. 대만 사회에 미친 영향
대만 민중당과 대만 공산당 등은 우서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비판하고 원주민 정책 개선을 요구했다.[19]대만 민중당은 원주민 정책 개선과 경찰 정치 개혁을 요구했다. 대만 공산당 역시 일본 당국을 비판했다. 당시 전국대중당의 중의원 의원이었던 가와카미 조타로와 고노 미쓰루는 사건을 조사했고, 1931년 6월 전국대중당은 제국 의회에서 일본 당국의 대응을 비판했다. 쇼와 천황까지 "사건의 근본에는 원주민에 대한 멸시가 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19]
이 사건으로 인해 대만총독부는 원주민 정책을 수정해야 했다. 원주민에 대한 동화 교육과 함께 벼농사 보급을 시도하여 성과를 거두었다.[19] 우서 사건 생존자들이 이주한 가와나카지마와 댐 건설로 이주한 사람들이 정착한 나카하라는 벼농사에 적합하여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었고, 주민들의 생활은 이전보다 풍요로워졌다.
또한, 일본과 천황에 대한 충성을 보인 원주민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칭송받았으며, 태평양 전쟁 당시 고사기 의용대에 자원하여 전장으로 향한 원주민이 많았다. 일설에는 우서 사건에서 세데크족의 산악전 능력이 뛰어나 군부가 고사기 의용대 창설을 착안했다고도 한다. 이러한 사례는 영화 '사욘의 종'에도 그려졌으며, 황민화 교육의 성과로 칭송되었다.
6. 평가 및 기념
우서 사건은 대만 역사에서 중요한 항일 투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타이완 원주민의 존재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잡지 등에서 흥미 위주로 그 풍속 등이 묘사되는 정도였다. 이 사건은 타이완 총독부에 강한 충격을 주어 원주민 통치의 근본적인 개혁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6. 1. 대만에서의 평가
1945년 중화민국은 대만 통치권을 반환받은 후, 일본이 세운 일본인 희생자 추모비를 철거하고 원주민 희생자 추모비를 건립했다. 대만 사학자들은 사건 명칭을 '무사 봉기(霧社蜂起)'에서 '무사 의거(霧社起義)'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23]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중국 국민당의 중화민국이 타이완을 통치하면서 항일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타이완에서는 무서 사건이 일본 압정에 대한 영웅적인 저항 운동으로 높이 평가받았고, 봉기 지도자들은 '항일 영웅'으로 칭송받았다.[23] 무서에 있던 일본인 순난 기념비는 파괴되었고, 봉기 참가자들을 기리는 석비가 세워졌다. 매년 무서에서는 무서 사건 유족들이 참여하여 봉기 측 부족 희생자를 추도하는 '추사 제전'이 열리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타이완 역사 재인식 붐이 일고 원주민 문화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무서 사건은 '원주민족의 정체성을 건 싸움'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53년 방공호 건설 중 구 주재소 무서 분실 부지에서 30여 구의 백골 사체가 발견되었다. 당시 당사자 회상록에 따르면 이 시체는 일본 측 호소에 응해 투항한 봉기 부족이 처형된 것이라고 하며, 국민정부는 "무명 영웅의 묘"에 유골을 합장했다.[24] 1973년 모나 루다오의 유골이 타이완 대학 표본실에서 반환되어 국민정부는 "무명 영웅의 묘" 뒤편에 "모나 루다오 열사 묘"를 세우고 유골을 안치했다.[24]
1997년 통일 기업이 500만신 대만 달러를 투자하여 모나 루다오상과 봉기 참여자들의 군상을 기증했으며, 현재는 사진 촬영 명소가 되었다.[24]
6. 2. 한국에서의 평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을 대신하여 중국 국민당의 중화민국이 타이완을 통치하게 되면서 항일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타이완에서는 우서 사건이 일본의 압정에 맞선 영웅적인 저항 운동으로 높이 평가받았고, 봉기 지도자들은 '항일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다.[23] 무서에 있던 일본인의 순난 기념비는 파괴되었고, 봉기 참가자들을 기리는 석비가 세워졌다. 무서에서는 매년 우서 사건 유족들이 참여하여 봉기 측 부족 희생자를 추도하는 '추사 제전'이 개최되고 있다.7. 관련 작품
무사 사건은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 1957년 중국 영화 '청산벽혈'(青山碧血),[14] 2003년 TV 드라마 '다나 사쿠라', 2011년 대만 영화 '세디크 발레'가 대표적이다.
우허의 소설 ''Remains of Life''(2000년 중국어 출판, 2017년 영어 번역본 출판)는 이 사건의 여파를 다룬 소설이다.[15]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있다.
- 소설: 나카무라 지헤이 『안개의 번사』(대만 소설집) 먹물 서방 1941년
- 소설: 니시무라 노조무 『이제 해는 저물었다』 릿푸쇼보 1984년 10월, 후에 도쿠마 문고 1989년 10월
- 만화: 邱若龍|추루어룽중국어 『무서 사건』 시보 문화 1990년
- 대만 영화: 『세데크 발레』 2011년
- 음악: 소닉 『賽德克巴萊(Seediq Bale)』 2005년 - 대만의 멜로딕 블랙 메탈 밴드의 앨범. 무서 사건을 그린 컨셉 앨범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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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セデック族を徹底的に追い詰めた日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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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上)最大の抗日蜂起 頭目モーナ・ルーダオの彫像は写真スポット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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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정복자에게 순순히 따르지 않는 토착민에 대한 멸칭 또는 대만일치시기의 타이완 원주민에 대한 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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