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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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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안은 후한 시대의 유학자이자 관료로, 맹씨역을 수학하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진출했다. 그는 음평 장, 임성령을 거쳐 초군 태수로 재직하며 유영의 모반 사건 연루자들을 공정하게 재판하여 명제의 신임을 얻었고, 하남윤으로 임명되어 10년간 수도의 기풍을 다스렸다. 이후 태복, 사공, 사도를 역임하며 외척 두씨 세력과 대립하다가 사도 재직 중 사망했다. 원안은 엄정하고 공정한 정치를 펼쳐 칭송받았으며, 그의 아들 원상, 손자 원탕, 증손 원소와 원술 등 후손들이 후한 말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옌스 시에서 원안의 삶을 기록한 원안비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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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안
기본 정보
원안의 초상화
원안의 초상화
원(袁)
안(安)
소녕(邵寧)
시호헌릉(憲陵)
출생후한 여남 여양현
사망후한
묘소망산
관력
시대후한
가문여남 원씨
아버지원량(袁良)
형제원창(袁敞)
자녀원상(袁賞)
원평(袁評)
원성(袁成)
원봉(袁逢)
원외(袁隗)
손자원기(袁基)
원소(袁紹)
원술(袁術)
원담(袁譚)
원상(袁尙)
원희(袁熙)
원매(袁買)
주요 활동
직책음령(陰令)
초상(譙相)
예장태수(豫章太守)
장작대장(將作大匠)
태복(太僕)
사공(司空)
사도(司徒)
봉작양가후(陽嘉侯)
주요 사건두태후의 칭제 사건 진압

2. 생애

원안의 조부 원량은 맹씨역을 배운 유학자로, 전한 평제 때 태자사인을 지냈고 후한 건국 후에는 성무현 현령을 역임했다. 원안은 조부로부터 가학(家學)인 맹씨역을 이어받아 학문에 힘썼다.

초기에는 현의 공조(功曹)를 지내다가 60년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본격적으로 나아갔다.[12] 효렴 천거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지며, 이후 음평현장(陰平縣長), 임성현령(任城縣令) 등 지방관을 역임하며 공정한 일 처리로 명성을 얻었다.[12]

71년에는 초왕 유영의 모반 사건 직후 초군 태수로 부임하여, 사건 연루자들에 대한 조사를 공정하게 처리하며 많은 무고한 이들을 구제하였다.[2][3][4][12] 이에 명제의 신임을 얻어 74년 수도 낙양 일대의 행정을 담당하는 하남윤으로 발탁되었다.[5] 하남윤으로 10년간 재직하며 엄정하면서도 덕치에 힘써 수도의 기강을 바로 세웠고, 그의 명성은 조정에 널리 알려졌다.[4]

83년에는 구경 중 하나인 태복으로 임명되어 중앙 관료가 되었고,[6] 이후 삼공사공(86년)[7]사도(87년)[8]를 차례로 역임하며 조정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88년 장제가 사망하고 어린 화제가 즉위하자, 외척인 두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했다. 원안은 두씨 일파, 특히 두헌의 전횡과 북흉노 원정 강행 등 군사적 정책에 반대하며 강직한 입장을 견지했다.[10] 비록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흉노 원정은 강행되었으나, 청렴하고 강직한 관리들의 대표격이었던 원안은 두씨 세력 하에서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원안은 두씨의 세도를 우려하던 중 영원 4년(92년) 4월 9일(음력 3월 계축일), 사도 재직 중에 사망하였다.[9][12] 그의 장례는 4월 26일(음력 윤3월 경오일)에 치러졌다.[9][12] 원안 사후 몇 달 뒤 두씨 세력은 쿠데타로 몰락하였고, 원안은 사후에 명예가 회복되었다. 그의 아들 원상(袁賞|원상zho)은 낭(郎)에 임명되었으며,[10] 다른 아들들인 원경과 원창 역시 각각 태수와 사공의 지위에 올랐다.[10] 원안의 후손들은 이후 몇 대에 걸쳐 삼공의 지위를 차지하는 명문가, 이른바 여남 원씨를 이루었으며, 그의 증손자인 원소원술은 후한 말의 주요 군벌로 성장했다.

1929년 허난성 옌스 시에서 원안의 생애를 기록한 원안비(袁安碑)가 발견되었다. 이 비석은 원안 사후 약 20년 뒤인 117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전서로 새겨져 있다. 비석에는 《후한서》 등 기존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임명 및 사망 날짜 등이 기록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11]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원량은 맹자역경을 배운 유학자로, 전한 평제 때 태자사인(太子舍人)을 지냈으며 후한 광무제가 건국한 후에는 성무현 현령을 지냈다. 원안은 조부 원량으로부터 가학(家學)인 맹씨역을 배워 유학자로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원안은 처음에 현의 공조(功曹)를 지냈으나, 영평 3년(60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郞中)에 임명되었다.[12] 효렴으로 추천될 당시의 일화는 다음과 같다. 원안이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힘쓰던 시절, 큰 눈이 내려 굶주리게 되었지만 그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현령이 순찰 중 눈을 치우지 않은 집을 발견하고 혹시 굶어 죽은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들어가 보니 원안의 집이었다. 현령이 왜 나와서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느냐고 묻자, 원안은 "큰 눈으로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제가 밖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감복한 현령은 원안을 효렴으로 천거하였다.

관직에 나선 원안은 음평(陰平長)과 임성령(任城令)을 차례로 역임하며 엄중하고 공정한 정치를 펼쳐 높은 평가를 받았다.[12] 영평 14년(71년) 2월 2일,[2] 초왕 유영의 모반 사건 직후 초군 태수로 파견되었다.[3] 그는 유영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많은 사람들의 재판을 담당하면서, 반역에 가담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 수백 명의 무죄를 주장하여 무고한 이들을 구제했다.[4]

원안의 공정한 일 처리에 감탄한 명제74년 9월 18일,[5] 그를 중앙으로 불러 수도 낙양 주변 지역의 행정을 책임지는 하남윤으로 임명했다. 원안은 임지를 엄정하게 다스리면서도 함부로 형벌을 내리지 않고 덕치(德治)에 힘썼다. 그가 10년간 재임하는 동안 수도의 기풍이 바로 서고 질서가 잡혔으며, 그의 명성은 조정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2. 2. 초왕 유영 사건과 하남윤 시절

영평 14년(71년) 2월 2일[2], 명제는 원안을 초군태수로 임명하여[3], 모반 혐의를 받던 초왕 유영 사건의 뒷수습을 맡겼다.[3] 당시 유영의 모반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수천 명의 현지 주민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있었다.[3] 원안은 사건을 조사하며, 비록 "반역자의 동조자"로 몰릴 위험이 있다는 주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4] 반역에 가담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 400여 가구[4](혹은 수백 명[12])의 무죄를 황제에게 상주하여 이들을 형벌로부터 구제하였다.[4][12] 원안의 공정하고 신중한 일 처리에 명제는 크게 만족하였다.[4]

이후 원안은 명제에 의해 중앙으로 소환되었고, 74년 9월 18일[5]에는 수도 낙양과 그 주변 지역의 행정을 총괄하는 하남윤으로 임명되었다. 원안은 하남윤으로 재직하는 10년 동안 엄정하게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함부로 형벌을 남용하지 않고 덕치(德治)에 힘썼다. 그 결과 수도의 기강이 바로 서고 질서가 잡혔으며, 그의 명성은 조정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후한서''는 당시 "수도의 지도자들이 그를 존경했고 그의 이름은 조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4]

2. 3. 중앙 정치와 외척 세력과의 갈등

건초 8년(83년) 7월 9일, 원안은 구경 중 하나인 태복으로 승진하며 중앙 관직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6] 이후 몇 년간 그는 북흉노에 대한 한나라의 정책 방향을 둘러싼 조정의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85년에 열린 회의에서 원안은 대사마 鄭弘|정홍zho과 사공 第五倫|제오륜zho 등이 반대하는 가운데, 흉노에 대해 화친 정책을 유지하고 인질 교환을 지속하는 등 보다 외교적인 접근 방식을 옹호했다.

이후 원안은 86년 6월 3일에 제오륜의 뒤를 이어 사공에 임명되었고,[7] 87년 7월 31일에는 다시 승진하여 사도의 자리에 올랐다.[8]

88년, 장제가 붕어하고 그의 어린 아들인 화제가 열 살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정치 지형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섭정을 맡은 두태후와 그녀의 오빠 두헌은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북흉노 문제에 대해 강경한 군사적 대응을 선호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역적 기반과 조정 내 입지를 이용해 전쟁을 통해 중앙 권위를 확장하고자 했다.

원안은 대사마 숙유, 사공 任隗|임외zho 및 다른 구경들과 함께 조정에 나아가 북방으로의 군사 원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북흉노가 국경을 침범하지 않았으므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원정군을 보내 국가의 자원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러한 원안과 다른 신중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태후는 원정군 파병을 명령했다.

결국 89년 여름, 한나라가 이끄는 군대는 세 갈래로 진격하여 큰 저항 없이 길락산에서 북 선우를 격파하고 그를 서쪽 알타이 산맥까지 추격했다. 91년의 마지막 공세는 북흉노 세력을 사실상 멸망시켰으나, 이는 과거 북흉노가 지배하던 영역에 정치적 공백을 만들어 이후 한나라가 이 지역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원안은 외척 두씨 세력의 전횡을 우려하던 중, 영원 4년(92년) 4월 9일(음력 3월 계축일)에 사도로 재직 중에 사망했다.[9][12] 그의 장례는 4월 26일(음력 윤3월 경오일)에 치러졌다.[9][12] 원안이 사망한 지 몇 달 후, 화제가 친정을 선언하며 일으킨 쿠데타로 두씨 일족은 몰락했다. 이후 원안은 황제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고, 그의 장남 袁賞|원상zho은 수도에서 관직을 받았다.[10]

3. 가계 및 후손

(원경의 아들)원탕사도, 태위증손자
(원탕의 아들)원봉삼공증손자
(원탕의 아들)원회삼공고손자
(원탕의 손자)원소후한 말 군웅고손자
(원탕의 손자)원술후한 말 군웅



원안의 아들 중 한 명인 원창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삼공의 하나인 사공에 올랐다. 다른 아들인 원경의 아들, 즉 원안의 손자인 원탕은 사도태위를 역임했다. 원탕의 아들들인 원봉원회 형제는 모두 삼공의 지위에 올랐으며, 후한 말기의 유명한 군웅인 원소원술은 원탕의 손자들이다. 이처럼 원안의 후손들은 여러 대에 걸쳐 후한의 고위 관직을 차지하며 명문가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한편, 원안의 묘비로 추정되는 '원안비'라는 전서로 쓰인 비석이 출토되었으나, 이것이 실제 원안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4. 원안비

1929년, 원안의 삶을 기록한 기념 비석허난성 옌스 시에서 발견되었다. 이 비석은 원안이 사망한 지 약 20년 후인 117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137.5cm, 너비 71.5cm 크기이며, 현재 허난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비석에는 그의 공식 전기인 《후한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그의 임명 및 사망 날짜가 새겨져 있어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11] 이는 1923년에 발견된 그의 아들 원창(袁敞)의 비석과 유사하며, 두 비석은 원래 같은 장소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참조

[1]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2] 간행물 Han Situ Yuan An Bei
[3] 서적 Houhanshu
[4] 서적 Houhanshu
[5] 간행물 Han Situ Yuan An Bei
[6] 서적 Houhanshu
[7] 서적 Houhanshu
[8] 서적 Houhanshu
[9] 간행물 Han Situ Yuan An Bei
[10] 서적 Houhanshu
[11] 문서
[12] 문서 《원안비》(袁安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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