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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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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봉은 유비의 양자로, 유비가 신야에 머물 때 후사가 없어 입양되었다. 익주 공략, 한중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맹달과 함께 신성, 방릉, 상용을 공격하여 부군장군에 올랐다. 관우가 번성을 포위했을 때 증원 요청을 거절하여 관우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고, 맹달의 배신으로 촉으로 돌아와 유비의 질책과 제갈량의 권유로 자결했다. 무예와 기력이 뛰어났으나, 상황 판단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선이 태어난 후 양자가 되었으며, 관우를 돕지 않은 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등 역사적 사실과 다른 묘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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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봉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유봉
본명구봉 (寇封)
출생미상
출생지형주장사군라현
사망220년
사인자살
배우자미상
자녀유린 (劉林)
양아버지유비
관직 정보
관직부군장군 (副軍將軍)
임기 시작219년
임기 종료220년
군주유비(한중왕) / 헌제
이전 관직부군중랑장 (副軍中郎將)
이전 임기 시작214년
이전 임기 종료219년
이전 군주헌제
군사 정보
소속후한
직업장군
주요 활동서촉 공방전, 한중 공방전, 상용 일대 점령
적수맹달, 신의

2. 생애

유봉은 본래 성이 구씨(寇氏)였으나, 유비형주에 머물던 시절 후사가 없어 양자로 삼았다.[1][13] 207년 유비의 친아들 유선이 태어났지만, 유봉은 계속해서 유비의 장수로서 활동했다.[13]

211년 이후 유비의 익주 정벌에 참여하여 당시 2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공을 세웠고,[13][1] 익주 평정 후 부군중랑장에 임명되었다.[13][1] 이후 한중 공방전에도 참여했으며,[14] 219년에는 맹달과 함께 상용 지역을 점령하는 공을 세워 부군장군으로 승진했다.[14][2]

그러나 같은 해 관우번성 전투에서 지원을 요청했을 때, 맹달과 함께 상용 지역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2]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관우의 패사와 형주 상실로 이어졌고, 유비는 이에 대해 유봉을 원망하게 되었다.[2] 또한 유봉은 맹달과도 불화를 겪었다.[2]

220년, 관우 구원 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을 두려워하고 유봉과의 갈등도 깊어진 맹달은 위나라로 투항했다.[2][3] 위나라 군대가 맹달과 함께 상용을 공격해오자 유봉은 맞서 싸웠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패배하여 성도로 돌아왔다.[3] 성도에서 유봉은 맹달을 핍박한 것과 관우를 돕지 않은 것에 대해 유비의 질책을 받았다.[3] 제갈량은 유봉의 강직하고 용맹한 성품이 유비 사후 유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며 제거할 것을 건의했고, 유비는 이를 받아들여 유봉에게 자살을 명했다.[3] 유봉은 죽기 전 맹달의 투항 권유를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생을 마감했고, 유비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3]

2. 1. 출생과 입양

유봉은 본래 성이 구씨(寇氏)였으며, 모계를 통해 한나라 황족의 후예인 장사 유씨(長沙 劉氏) 가문과 관련이 있었다.[1] 유비형주 지역에 머물던 시기, 아직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207년(건안 12년) 이전에 유봉을 양자로 들였다.[13][1] 이는 당시 세력 기반을 다지고 확장하려 했던 유비의 정치적 판단이 작용한 결정으로 볼 수 있다. 207년 유비의 친아들인 유선이 태어났지만[13], 유봉은 그 이후에도 유비의 양자로서 지위를 유지하며 활동하게 된다.

2. 2. 익주 평정과 활약

유비가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을 때 양자로 삼았다.[13][1] 유봉은 본래 성이 구(寇)씨였다.[1]

211년 유비가 익주를 공략하기 시작하자[1], 당시 20대였던 유봉은 뛰어난 무예와 힘을 바탕으로[1] 제갈량, 장비 등과 함께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13][1] 214년 익주가 평정된 후, 유봉은 부군중랑장(副軍中郎將)에 임명되었다.[13][1]

218년에는 한중 공방전에 참여하였다.[14] 219년, 조조가 한중에서 철수하기 전 조창을 보내 유봉과 대적시키려 했으나, 조창이 도착하기 전에 조조가 먼저 퇴각하여 싸움은 이루어지지 않았다.[14]

같은 해(219년), 의도태수 맹달이 북쪽으로 진군하여 방릉을 공략하고 태수 괴기(蒯祺)를 죽였다.[6] 이어서 상용(上庸)으로 나아갔다.[14][2] 유비는 맹달 혼자서는 임무를 완수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유봉을 한중에서 면수(沔水)를 따라 내려보내 맹달과 합류하게 했다.[14][2] 상용 태수 신탐이 이들에게 항복하자[14][2] 유봉은 이 공로를 인정받아 부군장군(副軍將軍)으로 승진했다.[14][2]

2. 3. 한중 공방전과 상용 점령

218년 한중 공방전에 참여하였다.[14] 219년에는 조조조창을 보내 유봉과 맞서게 하려 했으나, 조창이 한중에 도착하기 전에 조조 군이 먼저 퇴각하면서 싸움은 이루어지지 않았다.[14]

같은 해인 219년, 유비의도 태수 맹달에게 북쪽으로 진군하여 방릉과 상용(上庸)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 맹달은 먼저 방릉 태수 괴기(蒯祺)를 죽이고 방릉을 점령한 후 상용으로 향했다.[6] 유비는 맹달 혼자서는 임무를 완수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유봉에게 한중에서 군대를 이끌고 면수(沔水)를 따라 내려가 맹달을 지원하도록 지시했다.[2] 유봉과 맹달의 군대가 상용에 도착하자, 상용 태수 신탐은 저항 없이 항복했다.[2] 신탐은 항복 후에도 태수직을 유지했으며, 그의 동생 신의는 서성 태수로 임명되었다. 유봉은 이 상용 점령의 공으로 부군장군(副軍將軍)으로 승진했다.[2]

2. 4. 관우와의 불화와 형주 상실

219년, 유비의 명으로 의도태수 맹달이 북쪽의 방릉군과 상용을 공격했다. 유비는 맹달 혼자서는 임무 완수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유봉에게 한중에서 군대를 이끌고 면수(沔水)를 따라 내려가 맹달과 합류하도록 지시했다. 상용태수 신탐이 항복하면서 유봉과 맹달은 상용 지역을 점령했고, 유봉은 이 공으로 부군장군(副軍將軍)으로 승진했다.[14][2]

같은 해, 관우번성(樊城)과 양양을 포위 공격하며 유봉과 맹달에게 여러 차례 지원군 파견을 요청했다.[2] 그러나 유봉과 맹달은 점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용 지역의 민심이 아직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관우의 요청을 거절했다.[2] 결국 지원을 받지 못한 관우는 조조 군과 손권 군의 협공을 받아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유비는 중요한 거점이었던 형주를 상실하게 되었다. 유비는 유봉과 맹달이 관우를 돕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원망했다.[2]

이 무렵 유봉은 맹달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의 군악대를 빼앗는 등 갈등을 빚고 있었다.[2] 220년, 맹달은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유비의 분노를 두려워했고, 유봉과의 불화까지 겹치자 결국 유비에게 편지를 남기고 위나라로 투항했다.[2][3] 위나라에 귀순한 맹달은 하후상, 서황과 함께 다시 상용을 공격해왔다. 맹달은 유봉에게 '유선이 이미 태자로 책봉된 상황에서 친아들도 아닌 당신의 입지가 위태로우니 위나라로 투항하라'고 권유했지만, 유봉은 이를 거절했다.[3] 그러나 전투 중 부하였던 신탐의 동생 신의가 배반하여 위나라 군대에 성문을 열어주면서 상용은 함락되었고, 유봉은 성도로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3]

성도로 돌아온 유봉은 유비에게 맹달을 핍박하여 위나라로 달아나게 한 것과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심한 질책을 받았다.[3] 이때 제갈량은 유봉의 강인함과 용맹함이 장차 유선에게 부담이 될 수 있으며, 만약 그가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큰 위협이 될 것이라며 유비 사후의 안정을 위해 유봉을 제거할 것을 건의했다.[3] 결국 유비는 제갈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봉에게 자살을 명했다. 유봉은 죽기 직전 "아, 맹달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되는구나!"라고 탄식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 유비는 양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3]

2. 5. 맹달의 배신과 유봉의 최후

219년, 유비 휘하의 장수 관우번성을 포위 공격하며 상용에 주둔하던 유봉과 맹달에게 여러 차례 지원군을 요청했다.[2] 하지만 유봉과 맹달은 점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용 지역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관우의 요청을 거절했다.[2] 결국 관우는 손권 군대의 공격으로 패배하고 처형되었으며, 유비는 이 소식을 듣고 유봉과 맹달이 관우를 돕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원망하게 되었다.[2] 설상가상으로 유봉은 맹달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의 군악대를 빼앗는 등 갈등을 빚었다.

220년, 맹달은 관우를 구원하지 못한 것에 대한 처벌이 두려웠고, 유봉과의 불화도 깊어져 결국 유비에게 편지를 남기고 위나라로 투항했다.[2][3] 위나라의 조비는 맹달을 받아들여 건무장군, 신성태수로 삼고, 하후상, 서황 등과 함께 군대를 주어 상용을 공격하게 했다.[3] 이때 맹달은 유봉에게 편지를 보내 투항을 권유했다. 그는 편지에서 유선이 이미 태자로 책봉되었으므로 친아들이 아닌 유봉의 입지가 위태로우며, 위나라 조정은 유봉이 그의 본가인 낙후(羅侯)의 후계를 잇도록 할 의향이 있다고 설득했다.[3]

그러나 유봉은 맹달의 제안을 거절하고 위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다.[3] 하지만 부하 장수였던 신탐의 동생 신의 등이 배반하여 위나라 군대에 호응하는 바람에 상용은 함락되었고, 유봉은 성도로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3]

성도로 돌아온 유봉에게 유비는 맹달을 핍박하여 위나라로 달아나게 만든 것과 관우를 구원하지 않은 것을 들어 크게 질책했다.[3] 이때 제갈량은 유봉의 강직하고 용맹한 성품이 유비 사후에 즉위할 유선에게 부담이 되거나 통제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여, 후환을 없애기 위해 유봉을 제거할 것을 유비에게 건의했다.[3]

결국 유비는 제갈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봉에게 자결을 명했다.[3] 유봉은 죽음을 앞두고 "아, 맹달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되는구나!"(嗟乎|차호중국어, 恨不用孟子度之言|한불용맹자도지언중국어)라고 탄식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 유비는 유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3]

3. 평가

유봉은 무예와 기력이 남달리 뛰어난 장수였다.[15][1] 촉한승상이었던 제갈량은 유봉의 굳센 용맹함 때문에 유비 사후에는 유선이 그를 제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15][3]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유봉이 좋지 않은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지킬 방도를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며 그의 죽음이 당연한 결과였다고 비판했다.[15]

3. 1. 맹달의 편지 (요약)

위나라에 투항한 맹달은 유봉에게 편지를 보내 투항을 권유했다. 맹달은 편지에서 유비와 유봉은 혈연관계가 아닌 길에서 만난 사이일 뿐이며, 아두가 태자가 된 이상 식자들은 유봉의 존재를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2][3] 그는 과거 문종, 상앙, 백기, 효기(孝己),[16] 백기(伯奇)[17] 등 충신과 효자도 군주나 부모의 마음이 변하거나 이간질로 인해 화를 입는 경우가 있음을 언급했다. 또한 신생, 위의 급(伋), 어구(禦寇),[18] 의 건(建)[19]처럼 정당한 후계자였음에도 쫓겨나 죽은 사례를 들며 권력과 이익 앞에서 관계가 변질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맹달은 유비가 속으로는 결정을 내렸으나 겉으로는 의심하고 있으며, 측근들의 험담으로 인해 의심이 증폭되어 유봉이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위나라로 귀순하면 폐하께서 선양을 받은 후 인재를 널리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유봉이 본래 성씨인 구(寇)씨의 후예로서 나후(羅侯) 작위를 잇는 것은 물론, 300호 이상의 더 큰 봉토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회유했다.[3] 맹달은 《역경》의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는 구절과 《시경》의 '많은 복은 스스로 구해야 한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결단을 촉구했다.

그러나 유봉은 맹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3] 결국 상용을 잃고 성도로 돌아가 사형 선고를 받고 자결하게 되었을 때, 유봉은 "아, 맹달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구나!"라고 탄식했다.[3]

4. 삼국지연의에서의 유봉

소설삼국지연의》에서는 유봉이 유선이 태어난 이후에 유비의 양자가 된 것으로 묘사되어, 실제 역사 기록과는 차이를 보인다. 당시 관우유표의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후계자 다툼을 예로 들며, 미래에 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다며 유봉의 입양을 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유봉은 관평, 맹달 등과 함께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다. 군사 방통의 지휘 아래 유장 휘하의 장수 고패양회를 참하는 공을 세웠으며, 방통 사후에는 제갈량의 지휘를 받으며 황충, 엄안 등과 함께 싸움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맹달과 함께 상용을 점령하는 과정에서도 활약했다. 그러나 서황이나 조조의 아들 조창과의 일기토에서는 패배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219년, 관우가 맥성( 麥城|맥성중국어)에서 오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자 요화를 보내 유봉과 맹달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맹달은 관우가 평소 자신들에게 불만이 있었고, 유선을 지지했으며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는 이유를 들어 구원 요청을 거절할 것을 진언했고, 유봉은 이를 따른다. 결국 관우는 구원받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

요화로부터 유봉과 맹달이 구원병을 보내지 않아 관우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유비는 크게 분노하여 그들을 처벌하려 한다. 처벌을 두려워한 맹달은 위나라로 투항하고, 유봉에게도 투항을 권유하는 서신을 보낸다. 유봉은 이에 격분하여 사자를 처형하고 서신을 찢어버리며 거절 의사를 분명히 한다. 이후 유봉은 위의 장수 서황, 하후상의 지원을 받는 맹달과 전투를 벌이지만, 부하 장수 신단의 배신으로 인해 크게 패하고 백여 기의 병력만 이끌고 성도로 퇴각한다.

성도로 돌아온 유봉은 유비를 만나 해명을 시도하지만, 분노한 유비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즉시 처형을 명령한다. 제갈량 등 일부 신하들이 유봉이 맹달의 투항 권유를 단호히 거절했다는 점을 들어 처형을 만류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유봉은 참수당한다. 유비는 나중에 유봉이 위나라의 유혹을 뿌리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일시적인 분노로 그를 처형한 것을 후회하며 슬퍼했고, 관우의 죽음과 더불어 깊은 슬픔에 잠겨 병을 얻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5. 가계

유봉의 원래 성은 구(寇)씨이며, 낙후(羅侯)의 후손이다. 또한 모계를 통해 후한 헌제의 아들인 유발의 후손인 장사군(長沙) 유씨 가문과도 관련이 있다.[1]

유비형남 4군(장사군, 영릉군, 계양군, 무릉군)을 평정한 후 아직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유봉을 양자로 삼았다.[1]

'''유봉의 가계'''
관계이름설명
양부유비촉한의 초대 황제. 후계자가 없어 유봉을 양자로 삼음.[1]
본인유봉원래 성은 구(寇)씨. 낙후(羅侯)의 후손.[1] 모계를 통해 장사군 유씨와도 관련.[1]
아들유림(劉林)촉한의 아문장(牙門將). 264년 촉한 멸망 후 하동군으로 이주.[20][4]



유봉의 아들 유림(劉林)은 유선 치하의 촉한에서 아문장(牙門將)으로 복무했으며, 264년 촉한 멸망 후 의 명에 따라 하동군으로 이주하였다.[20][4]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인용 三国志集解
[6] 서적 襄陽記
[7] 서적 二階堂・中川の翻訳
[8] 기타
[9] 서적 二階堂・中川の翻訳
[10] 기타
[11] 서적 二階堂・中川の翻訳
[12] 서적 二階堂・中川の翻訳
[13] 서적 삼국지
[14] 서적 위략
[15] 서적 삼국지
[16] 문서 상 고종의 아들
[17] 문서 윤길보(尹吉甫)의 아들
[18] 문서 진 선공(陳宣公)의 아들
[19] 문서 초 평왕의 아들
[20]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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