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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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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화 정책은 193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국가들이 나치 독일의 팽창을 막기 위해 취했던 외교 정책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혹함과 평화주의적 분위기, 반공주의적 성향 등이 배경이 되어, 독일의 군비 증강과 영토 확장을 묵인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만주 사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오스트리아 병합 등을 거치며 유화 정책은 실패로 귀결되었고, 뮌헨 협정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를 분할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유화 정책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독재 정권에 대한 단호한 대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훈을 남겼다. 오늘날에도 독재 정권에 대한 대응, 약소국 보호, 한반도 문제 등 다양한 국제 문제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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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책

2.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연맹과 집단 안보 체제의 실패는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이 등장하는 주요 배경이 되었다.[10] 국제 연맹은 전쟁 방지를 위해 국제 협력과 침략에 대한 집단 저항을 목표로 설립되었으나,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과 이탈리아 왕국에티오피아 침공 등 독재 국가들의 침략 행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1919년 파리에서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독일에 막대한 배상금 부과, 영토 및 식민지 상실, 군사력 제한 등 가혹한 조항을 담고 있었다. 이는 독일 국민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히틀러나치당이 부상하는 원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피해에 대한 반성으로 유럽에서는 평화주의 정서가 널리 확산되었다. 국제 연맹 창설, 제네바 의정서 채택, 불전 조약 체결 등 국제적인 평화 노력이 이어졌으나, 침략국에 대한 무력 제재를 꺼리는 소극적인 국제 여론이 형성되었다.

영국의 보수, 우익 세력은 나치 독일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로 간주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공산주의가 나치즘보다 더 큰 위협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나치 독일의 팽창을 묵인하는 경향이 있었다. 영국 보수당 의원 대다수는 유화 정책을 지지했지만, 윈스턴 처칠은 독일의 위협을 경고하며 재무장을 주장했다. 영국 노동당은 초기에는 재무장에 반대했지만, 나치 독일의 위협이 고조되면서 재무장을 지지하고 유화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2. 1. 베르사유 조약과 독일의 불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9년 파리에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The Treaty of Versailles|베르사유 조약영어독일에 1,320억 금 마르크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다.[1] 또한 식민지와 영토의 13%를 빼앗고, 전차, 공군력, 잠수함 보유를 금지했으며, 육군 병력은 10만 명 이하로 제한했다.[1] 참모본부를 해체하고, 프랑스와의 국경 지역인 라인란트를 비무장 지대로 만드는 등 독일의 경제와 안보에 가혹한 조항을 포함했다.[1]

이러한 가혹한 조약 내용으로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커져갔다. 이러한 불만을 바탕으로 베르사유 체제 타파를 주장한 히틀러나치당이 높은 지지를 얻었다.[1] 1933년 히틀러는 자유 선거를 통해 독일 총리로 선출되었고, 이후 수권법 제정과 1934년 총통 취임을 통해 독일의 독재 권력을 장악했다.[1]

2. 2. 유럽의 평화주의 정서

제1차 세계 대전의 막대한 피해에 대한 반성으로 유럽에서는 "모든 전쟁에 대해 무조건 반대한다"는 절대적 평화주의가 대두되었다.[36] 침략국에 대해서도 무력 제재를 꺼리는 국제 여론이 형성되었고, 베니토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략에서도 이탈리아에 군사 제재를 가하려는 나라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이 실수로 시작되었으며, 이 경우 국제 연맹이 이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10] 또는 대규모 군비 경쟁이 원인이 되어 군축이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10] 혹은 국가적 불만이 원인이 되어 불만을 평화적으로 해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0]

이러한 평화주의적 정서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국제적인 평화 노력이 이어졌다.

연도사건
1920년국제 연맹 창설
1924년제네바 의정서 채택 ("침략 전쟁은 국제 범죄이다"라고 명기)
1928년불전 조약(켈로그-브리앙 조약, 전쟁 포기에 관한 조약) 체결


2. 3. 영국의 반공주의와 나치 독일

영국의 보수, 우익 세력은 나치 독일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로 보았다. 이들은 나치 독일의 팽창을 묵인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당시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공산주의가 나치즘보다 더 큰 위협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37] [38] 당시 상류층 사이에서는 "히틀러주의가 공산주의보다 낫다"라는 슬로건이 흔하게 사용되었다.[37] 프랑스 우익들은 프랑스 사회주의자 총리 레옹 블룸을 언급하며 "블룸보다 히틀러가 낫다"고 믿는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38]

반공주의는 할리팩스 경의 주요 동기였는데, 그는 1936년과 1937년에 괴링을 방문하고 히틀러를 만난 후,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는 강력한 힘이지만, 그것이 부자연스럽거나 부도덕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저들이 공산주의 등을 진정으로 혐오하는 자들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었다면, 우리도 똑같이 느꼈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39]

영국 보수당 의원 대다수도 유화 정책에 찬성했지만, 윈스턴 처칠은 당내 지지자들이 분열되어 있다고 말했다. 1936년 처칠은 보수 정치인 대표단을 이끌고 스탠리 볼드윈에게 독일의 재무장 속도와 영국의 뒤처짐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22] 볼드윈은 그들의 긴박감을 거부하고, "국제 연맹이나 다른 어떤 사람을 위해서도" 영국을 누구와도 전쟁하게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며, 유럽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볼셰비키와 나치가 싸우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40]

보수당 내에서 처칠은 독일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영국의 재무장이 더 빠르게 진행되어야 하며,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다고 믿는 드문 인물이었다.[41] 그러나 처칠은 공산주의, "국제 유대인",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격렬한 반대 때문에 파시즘 전체를 공격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41] 처칠의 파시즘에 대한 경고는 스페인 내전 동안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좌파를 궤멸시킨 1938년에야 시작되었다.[42]

뮌헨 회담 일주일 전, 처칠은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분할하는 것은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이 나치의 위협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붕괴는 영국이나 프랑스 모두에게 평화나 안보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22]

영국 노동당은 원칙적으로 파시스트 독재에 반대했지만, 1930년대 후반까지 재무장을 반대했고 상당한 평화주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51][52] 그러나 나치 독일의 위협이 고조되고 국제 연맹의 무능함으로 인해, 1937년 어니스트 베빈과 휴 달턴은 당을 설득하여 재무장을 지지하고 유화 정책에 반대하도록 했다.[54][55]

좌파 일각에서는 네빌 체임벌린이 독일과 소련 사이의 전쟁을 기대했다고 말했다.[10] 클레멘트 애틀리는 1937년 한 정치 연설에서 국민 정부가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독일의 재무장을 묵인했다고 주장했다.[51] 영국 공산당은 유화 정책이 친파시스트 정책이며, 영국 지배 계급이 사회주의보다 파시즘을 선호한다고 주장했다.[56] [57]

3. 유화 정책의 전개

1935년 히틀러베르사유 조약을 깨고 재무장과 징병제 부활을 발표했다.[10] 영국은 독일을 소련에 대한 방패로 보고 묵인했고,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1936년 독일은 라인란트를 비무장지대로 규정한 조약을 어기고 라인란트 진주를 감행했다.[10] 영국은 개입하지 않았고, 국제 연맹에서 소련만이 독일에 대한 제재를 제안했다.

1931년 일본 제국만주를 침공했고, 국제 연맹은 일본을 규탄했지만 일본은 탈퇴 후 진격을 계속했다. 미국은 스팀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일본의 정복을 인정하지 않았다.[7]

1934년 영독 지불 협정은 양국 경제 관계를 안정시켰고,[12] 1935년 영국-독일 해군 협정은 독일 해군 재건을 허용했다.

1935년 이탈리아 왕국에티오피아를 침공하자 국제 연맹은 제재를 가했지만, 수에즈 운하 폐쇄는 고려하지 않았다.[10] 1936년 이탈리아는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했고, 국제 연맹은 제재를 포기했다.

1938년 독일은 쿠르트 슈슈니크 오스트리아 총리에게 군사 행동 위협과 함께 오스트리아 나치를 석방하고 정부에 참여하도록 요구했다. 슈슈니크는 사임했고, 아르투어 자이 스잉크바르트가 독일군을 불러들였다. 1938년 오스트리아 안슐루스 국민 투표 결과 99.73%가 안슐루스에 찬성했다.[13] 영국 하원에서 체임벌린은 무력 사용만이 오스트리아 합병을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15]

1938년 주데텐 독일 정당은 자치를 요구했다.[16] 뮌헨 회담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독일의 수데텐란트 점령에 합의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저항할 힘을 잃었다. 1939년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병합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32]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 포고했지만, 가짜 전쟁 기간 동안 적극적인 군사 개입은 피했다.[32]

3. 1. 독일의 재무장과 라인란트 진주

1933년은 빨강, 1939년은 분홍, 1943년은 주황색 독일
(보호령・총독부령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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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히틀러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재무장과 징병제의 부활을 발표했다.[10] 영국 보수당은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독일을 소련에 대한 방파제로 이용하고자 독일의 세력 확대를 묵인했고,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1936년 3월 7일, 독일은 라인란트를 비무장지대로 규정한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을 어기고 라인란트 진주를 감행하여 조약은 완전히 무효가 되었다.[10]

히틀러는 영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예상했지만, 프랑스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의 장교들은 프랑스의 저항에 직면하면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프랑스는 영국과 협의하여 국제 연맹에 항의했지만, 스탠리 볼드윈 총리는 영국이 프랑스를 지원할 병력이 부족하고 여론도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에서는 독일군이 "그들 자신의 뒷마당"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여겨졌다.[10] 노동당 국회의원 휴 달턴은 영국 국민도 노동당도 군사적 또는 경제적 제재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10] 국제 연맹 이사회에서는 소련만이 독일에 대한 제재를 제안했다.

히틀러는 협상에 초대받고 서방 열강과의 불가침 조약을 제안했지만, 자세한 내용을 요구받자 대답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라인란트 점령은 그가 국제 사회가 그에게 저항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만들었고, 독일을 강력한 전략적 위치에 놓았다.

3. 2. 만주사변과 국제연맹의 무력함

1931년 9월, 국제 연맹 회원국인 일본 제국은 만주 지역의 인구가 중국인뿐만 아니라 다민족이라고 주장하며 중국 동북부의 만주를 침공했다. 중화민국은 국제 연맹과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국제 연맹 이사회는 양측에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원래 위치로 철수할 것을 요청했고, 미국은 켈로그-브리앙 조약에 따른 평화적인 문제 해결 의무를 상기시켰다. 일본은 이에 개의치 않고 만주 전체를 점령했다. 국제 연맹은 일본을 규탄하는 조사 위원회를 구성했고, 1933년 2월에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에 일본은 국제 연맹에서 탈퇴했고 중국으로의 진격을 계속했으며, 국제 연맹과 미국은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스팀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일본의 정복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는 1930년대 후반 미국 정책이 일본보다 중국을 선호하도록 전환하는 데 기여했다.[7] 데이비드 톰슨과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국제 연맹의 "극동에서의 무활동과 무능함이 유사한 반항 행위를 계획한 유럽의 침략자들에게 모든 격려를 보냈다"고 주장한다.[8]

3. 3. 영독 지불 협정과 영독 해군 협정

1934년 영독 지불 협정은 영국과 독일 간의 경제 관계를 안정시키고,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으로 발생한 채권에 대한 독일의 이자 지급을 보장했으며, 특히 무역 분야에서 영국과 독일 간의 경제적 관계를 심화시켰다.[12] 1935년 영국-독일 해군 협정은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반복적으로 위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독일 해군, 특히 U보트를 재건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했다. 1938년 주영 독일 대사인 헤르베르트 폰 디르크센은 이 협정을 1935년 해군 협정과 함께 "위태로운 시기에도 [영국과 독일 간의] 외교 관계 구조를 지탱"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3. 4.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 연맹은 국제 협력과 집단 안보를 통해 또 다른 전쟁을 막기 위해 설립되었다. 국제 연맹 회원국은 공격을 받을 경우 다른 회원국의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과 이탈리아 왕국 베니토 무솔리니에티오피아 침공과 같은 독재자들의 침략에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이레 셀라시에 1세 (1942년경)


이탈리아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는 아비시니아제국주의 야심을 품고 있었다. 1934년 12월, 영국과 소말리아 국경 근처 왈왈에서 이탈리아 왕립군과 에티오피아 제국군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이탈리아는 아비시니아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고, 아비시니아는 국제 연맹에 호소하여 하이레 셀라시에 황제가 제네바에서 열린 회의에 직접 참석하여 연설했다.

1935년 10월, 무솔리니는 아비시니아를 공격했다. 국제 연맹은 이탈리아를 침략국으로 선언하고 제재를 가했지만, 석탄과 석유는 제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알바니아, 오스트리아, 헝가리는 제재를 거부했고, 독일과 미국은 국제 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경제는 타격을 입었다. 국제 연맹은 아비시니아로의 무기 수송을 막을 수 있는 수에즈 운하를 폐쇄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너무 가혹한 조치라고 판단하여 그렇게 하지 않았다.[10]

1935년 4월,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와 함께 독일의 재무장에 항의했다. 프랑스는 무솔리니를 달래어 그가 독일과의 동맹을 맺지 않도록 하는 데 열중했다. 영국은 지중해로 해군 함대를 이동시켰지만, 1935년 11월, 영국 외무장관 새뮤얼 호어와 프랑스 총리 피에르 라발은 비밀리에 아비시니아의 3분의 2를 이탈리아에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언론 유출과 여론의 반발로 호어와 라발은 사임했다. 1936년 5월, 이탈리아는 아비시니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티오피아의 황제로 선포했다. 7월에 국제 연맹은 제재를 포기했다. 이 사건은 국제 연맹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3. 5. 오스트리아 병합

1918년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오스트리아는 '도이치오스트라이히'(독일-오스트리아)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고, 대다수의 오스트리아인은 독일과의 합병을 원했다.[13]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들이 체결한 베르사유 조약생제르맹 조약은 오스트리아와 독일 간의 연합을 국제 연맹의 동의 없이 엄격히 금지했으며, "독일-오스트리아"라는 명칭 또한 오스트리아 제1 공화국이 출현한 후 "오스트리아"로 변경되었다.[13] 바이마르 공화국과 오스트리아 제1 공화국의 헌법은 모두 통일의 목표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이는 민주 정당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히틀러의 부상은 오스트리아 정부의 이러한 계획에 대한 열정을 약화시켰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히틀러는 나의 투쟁 (1924)에서 자신의 출생 국가인 오스트리아를 어떤 수단으로든,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독일과 합병하려 할 것이라고 적었다.

1938년 초,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총리 쿠르트 슈슈니크에게 군사 행동의 위협과 함께 투옥된 오스트리아 나치들을 석방하고 정부에 참여하도록 요구했다. 슈슈니크는 이에 따랐고, 친나치 변호사 아르투어 자이 스잉크바르트를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히틀러를 저지하고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슈슈니크는 3월 13일에 이 문제에 대한 국민 투표를 실시하려 했다. 히틀러는 국민 투표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고, 3월 11일, 슈슈니크에게 오스트리아 나치에게 모든 권력을 넘기거나 침략에 직면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 네빌 헨더슨은 오스트리아에 대한 강압적인 사용에 대해 독일 정부에 항의했다.[14]

슈슈니크는 프랑스와 영국 어느 쪽도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임했고, 자이 스잉크바르트는 독일군에게 질서를 회복해 줄 것을 호소했다. 3월 12일, 독일 국방군은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다. 그들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았고, 환호하는 오스트리아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오스트리아는 자이 스잉크바르트를 총독으로 하는 독일의 오스트마르크가 되었다. 1938년 오스트리아 안슐루스 국민 투표는 4월 10일에 실시되었고, 투표자의 99.73%가 안슐루스에 찬성한 것으로 공식 기록되었다.[13]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합병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슐루스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14] 영국 하원에서 체임벌린은 "오스트리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나라와 다른 국가들이 무력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경우뿐이었다"고 말했다.[15] 미국의 반응도 비슷했다. 이러한 국제적인 반응은 히틀러가 제3 제국을 확장하려는 계획에서 더욱 공격적인 전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3. 6. 뮌헨 협정과 체코슬로바키아 분할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보헤미아 왕관령과 거의 일치하는 영토를 가지고 창설되었다. 이 국가는 보헤미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를 포함했으며, 다수의 독일계 인구가 거주하는 주데텐란트와 다른 소수 민족들이 거주하는 지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1938년 4월, 콘라트 헨라인이 이끄는 주데텐 독일 정당은 자치를 요구하며 "수데텐 독일인을 제국 국경 내로 데려오기 위한 직접적인 행동"을 위협했다.[16]

프랑스와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에 수데텐 자치를 수용하라고 권고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독일의 침략에 대비해 부분적인 동원령을 내렸다. 네빌 체임벌린은 룬시만 사절단을 프라하로 보내 중재하게 했고,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자치를 허용하도록 설득했다. 독일은 분쟁을 격화시켰고, 히틀러는 75만 명의 병력을 체코-독일 국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9월 12일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에서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고,[16], 수데텐 나치스의 체코슬로바키아 및 유대인 대상 폭력 행위가 증가했다.

독일의 침공 가능성에 직면한 체임벌린은 9월 15일 베르히테스가덴으로 날아가 히틀러와 직접 협상했다. 히틀러는 수데텐란트의 독일 병합을 요구했고, 체임벌린은 거부하면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유럽 지리상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수데텐란트 점령을 독일 침공을 통해서만 강제로 막을 수 있었다.[17]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드바르트 베네스에게 독일계 다수가 거주하는 모든 영토를 독일에 넘겨주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수데텐 독일 자유군단을 설립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목표에 대한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

22일, 체임벌린은 바트 고데스베르크에서 히틀러와 두 번째 회담을 가졌고,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양도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9월 24일, 독일은 고데스베르크 각서를 발표하여 9월 28일까지 양도하지 않으면 전쟁을 하겠다고 요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요구를 거부했고, 프랑스는 동원령을 내렸으며, 영국은 영국 해군을 동원했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뮌헨에서 히틀러와 회담을 가진 후 1938년 9월 30일 헤스턴 공항에 착륙하는 모습. 그는 손에 영국과 독일 간의 평화 협정을 들고 있다.


9월 26일, 히틀러는 베를린의 스포츠팔라스트에서 연설을 통해 수데텐란트가 "유럽에서 내가 해야 할 마지막 영토 요구"라고 주장했고,[18] 체코슬로바키아에 9월 28일 오후 2시까지 영토를 양도하지 않으면 전쟁에 직면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19]

체임벌린, 달라디에, 히틀러, 무솔리니, 치아노가 뮌헨 협정에 서명하기 전에 찍은 사진


갈등이 심화되자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설득하여 분쟁을 4개국 회담에 부치도록 했다. 1938년 9월 29일, 히틀러, 체임벌린,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무솔리니가 뮌헨에서 만났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소련은 회담에 참여하지 못했다. 4개국은 독일이 수데텐란트 점령을 완료하고, 국제 위원회가 다른 분쟁 지역을 고려하기로 합의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만약 이 합의를 따르지 않으면 고립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체임벌린의 요청에 따라 히틀러는 영국과 독일 간의 협정에 기꺼이 서명했다. 체임벌린은 영국으로 돌아와 "우리 시대의 평화"를 약속했다. 뮌헨 회담 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체임벌린에게 "훌륭한 사람"이라는 전보를 보냈고, 나중에 로마 주재 미국 대사 윌리엄 필립스에게 "나는 최종 결과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라고 말했다.[20]

뮌헨 회담의 결과 체코슬로바키아는 요새선과 스코다사의 군수 공장을 비롯한 공업 지대를 잃고 독일에 저항할 힘을 잃었다. 1939년 3월에는 독일의 책략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슬로바키아와 카르파토-우크라이나가 독립했다. 슬로바키아는 독일의 보호국이 되었고, 카르파토-우크라이나는 독일의 동맹국 헝가리 왕국에 편입되었다. 남은 체코도 독일의 요구에 굴복하여 병합되었다.

3. 7.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잔여 지역 병합과 폴란드 침공

뮌헨 협정 이후,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남은 지역을 병합했고, 슬로바키아를 위성 국가로 만들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 침공을 시작했고, 이에 영국프랑스는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32]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맞서 전쟁에 참전했지만, 초기에는 가짜 전쟁으로 알려진 기간 동안 심각한 군사적 개입을 피했다.[32] 당시 서부 전선의 독일군 병력은 29개 사단이었던 데 반해, 영국과 프랑스는 110개 사단을 보유하여 연합군 측이 우세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지원이나 독일 본토 침공과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어에만 집중했다. 그 결과, 기동력을 앞세운 독일군에 의해 폴란드군은 쉽게 무너졌고,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에 의해 동서로 분할되었다.

독일의 팽창
1933년은 빨강, 1939년은 분홍, 1943년은 주황색 독일
(보호령・총독부령 포함)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에 항의하여 독일계에 대한 식사 제공을 거부하는 체코계 미국인 레스토랑 경영자

4. 유화 정책에 대한 평가와 논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나치 독일의 유럽 점령으로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은 비판에 직면했다. 체임벌린은 여당 내 반발과 야당의 협력 거부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윈스턴 처칠은 저서 《제2차 세계 대전 회고록》에서 유화 정책 대신 조기에 히틀러를 저지했다면 홀로코스트를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최근 영국에서는 체임벌린이 유화 정책으로 번 시간을 군비 증강에 활용하여 영국 본토 항공전 승리에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나온다.

유화 정책 논란은 현대에도 독재 정권 대응 방식 논의에 영향을 미친다. 1990년 걸프 위기 당시 조지 H. W.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쿠웨이트 침공에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로 대응했으나, 이라크가 철수를 거부하자 다국적군을 편성해 걸프 전쟁을 개전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뮌헨 협정을 언급하며 사담 후세인 선제공격 필요성을 주장했다.

4. 1. 유화 정책 옹호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는 전쟁에 대한 극심한 피로감과 평화주의 정서가 널리 퍼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전쟁이 실수로 시작되었거나, 대규모 군비 경쟁이 전쟁의 원인이었다고 믿었다. 따라서 국제 연맹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거나, 군축을 통해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10] 또한,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게 불공정했으며, 독일계 소수 민족의 자결권과 독일의 군비 평등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영국에서는 왕족, 노동당, 언론, 학계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화 정책을 지지했다.[35] 특히 반공주의 정서가 강하게 작용했는데, 대숙청 소식과 영국 내 노동 불안 재발 가능성 등으로 인해 "히틀러주의가 공산주의보다 낫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37] 프랑스에서도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블룸 (사회주의자 총리)보다 히틀러가 낫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였다.[38] 할리팩스 경은 나치의 민족주의와 인종주의가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옹호하며, 반공주의적 입장에서 유화 정책을 지지했다.[39]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일부 보수당 의원들은 독일의 위협을 경고하며 유화 정책에 반대했지만, 당시에는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22] 영국 해군은 아비시니아 위기 당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을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독일과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유화 정책을 지지했다.[43] 영국 공군은 레이더와 허리케인, 스핏파이어 등 신형 전투기 개발을 통해 독일의 공습을 막을 수 있다고 기대했지만, 전력 준비에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유화 정책을 통해 시간을 벌고자 했다.[47][48]

프랑스 공군은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의 전력을 과대평가하고 자국 공군의 열세를 우려하여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을 지지했다.[50] 노동당은 파시즘에 반대했지만, 평화주의 세력의 영향으로 재무장에 반대하다가 1937년에야 어니스트 베빈과 휴 달턴의 주도로 재무장 지지와 유화 정책 반대로 선회했다.[54][55]

공산당은 유화 정책을 친파시스트 정책으로 규정하고, 영국 지배 계급이 사회주의보다 파시즘을 선호한다고 비판했다.[57] 그러나 1930년대 중반까지 영국 여론은 전쟁과 재무장에 반대하는 경향이 강했다. 옥스퍼드 유니언의 토론에서 학생들은 국왕과 국가를 위해 싸우지 않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22] 평화 국민투표에서는 1,100만 명이 군비 감축을 지지했다.[22] 그러나 스페인 내전을 겪으면서 많은 평화주의자들이 파시즘에 대한 무력 대응을 지지하게 되었고,[59][60] 뮌헨 협정 직후에는 대체로 협정을 지지하는 분위기였다.[10]

결론적으로, 유화 정책은 당시 유럽의 평화주의 정서와 영국의 반공주의적 입장, 그리고 군사력 준비 부족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유화 정책을 통해 시간을 벌어 군비를 증강할 수 있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4. 2. 유화 정책 비판론

유화 정책은 히틀러의 침략 야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쟁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는다. 1939년 8월, 히틀러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자신에게 효과적인 반대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그들에 대한 경멸을 드러냈다.[32] 이는 유화 정책이 독재자의 오판을 불러일으켰음을 보여준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유화 정책을 옹호했던 사람들은 비판을 받았다.[35] 유화 정책은 영국 외교에서 피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유화 정책에 반대했던 소수의 사람들은 "현명한 조언이 무시된 광야의 목소리"로 재평가되었다.[35]

유화 정책은 약소국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독재 정권에 굴복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뮌헨 협정 일주일 전, 윈스턴 처칠은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분할하는 것은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이 나치의 위협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22]

쉴라 그랜트 더프는 저서 ''유럽과 체코인''에서 체코 국민을 옹호하고 영국의 유화 정책을 비판하며,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유화 정책은 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다. 휴 달턴은 유화 정책을 히틀러에게 유화적인 런던 시의 부유층, 보수당, 귀족들의 정책이라고 비판했다.[69]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 대전 회고록》에서 유화 정책이 아닌, 이른 시기에 히틀러를 쳐부쉈다면 홀로코스트도 없었을 것이라며 유화 정책의 실패를 언급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유화 정책은 독재적이고 공격적인 정권에 대한 대응을 논할 때 자주 언급된다. 1990년 걸프 위기 당시 미국의 조지 H. W.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쿠웨이트 침공에 대해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를 통해 철수를 요구했으나 이라크가 거부하자 다국적군을 편성하여 걸프 전쟁을 개전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개전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뮌헨 협정을 예로 들며 사담 후세인에 대한 선제 공격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4. 3. 역사학계의 논쟁

윈스턴 처칠은 저서 《제2차 세계 대전 회고록》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은 막을 수 있었다. 유화 정책이 아니라, 이른 시기에 히틀러를 쳐부쉈다면 그 후의 홀로코스트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유화 정책의 실패를 언급했다.[35]

반면, 최근 영국에서는 "체임벌린은 유화 정책으로 벌어들인 시간을 군비 증강을 위해 최대한 유효하게 활용했다. 이것이 없었다면 영국은 역사적 사실보다 훨씬 불충분한 군비 상태로 개전하여 독일을 쳐부수기는커녕 역사적 사실보다 더욱 곤경에 처했을 것이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스핏파이어 없이 영국 본토 항공전을 치르는(그리고 패배하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긍정적인 의견도 있다.

이 문제는 현대에도 독재적이고 공격적인 정권에 대한 대응을 이야기할 때 종종 논의된다. 1990년 걸프 위기 당시, 미국의 부시(아버지) 행정부는 히틀러의 주데텐란트 요구에 대해 독일에 양보했던 것의 결과를 반성하여 이라크쿠웨이트 침공에 관해 유엔 안보리 결의를 10차례나 내고 이라크에 쿠웨이트로부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이라크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다국적군을 편성하여 걸프 전쟁을 개전했다. 2003년 미국·영국 등에 의한 이라크 전쟁 개전에 대해 미국의 부시(아들) 행정부는 뮌헨 회의를 예로 들며 "히틀러에 대해 유화 정책을 취한 것이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낳았다. 사담 후세인도 선제 공격을 하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진다"라고 이라크 전쟁의 목적 중 하나로 언급했다.[10]

1961년, A.J.P. 테일러는 저서 ''제2차 세계 대전의 기원''에서 히틀러가 전쟁을 위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다른 독일 지도자처럼 행동했다고 주장했다. 유화 정책은 수동적인 정책이 아니라 적극적인 정책이었으며, 히틀러의 통합을 허용하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에 의해 시행된 정책이었다. 테일러는 유화 정책이 외교적, 정치적으로 적절한 예측 불가능한 지도자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했다.[76]

폴 케네디는 당시 정치인들이 직면한 선택에 대해 "각 과정은 단점을 공유했다. 악의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 이 무렵 영국의 세계적 입장이 위기에 처해 있어 결국 해결할 수 없었다. 좋은 해결책이나 적절한 해결책이 없다는 의미에서."라고 말했다.[77]

마틴 길버트는 "근본적으로, 낡은 유화 정책은 희망의 분위기였고, 낙관주의는 빅토리아 시대적이었으며, 사회가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진화하고 진보가 더 나아질 수밖에 없다고 믿는 점은 버크적이었다. 새로운 유화 정책은 공포의 분위기였고, 나치즘이 남아있고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영국이 다루어야 할 생활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비관주의적 믿음에서 홉스적이며, 좋은 것의 일부를 보존하기 위해 나쁜 것을 삼키는 것을 고집했다."라고 말했다.

테일러의 ''제2차 세계 대전의 기원''에 담긴 논쟁은 때때로 "수정주의"로 묘사되었으며,[78] 당시 많은 역사가들에게 거부되었고, 그의 책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서평은 일반적으로 비판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통찰력으로 칭찬을 받았다.

1990년대 초에는 때때로 "반 수정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유화 정책 이론이 등장했는데,[79] 역사가들은 유화 정책이 1930년대 영국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을 것이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너무 늦게 수행되었으며, 히틀러를 억제할 만큼 강력하게 시행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프랭크 맥도너는 유화 정책에 대한 이러한 견해의 선두 주자이며, 그의 저서 ''네빌 챔벌린, 유화 정책, 그리고 영국이 전쟁으로 가는 길''에서[80] "수정주의 이후" 연구로 묘사되었다.

제임스 P. 레비는 유화 정책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에 반대한다. "히틀러가 나중에 한 일을 알면서 유화 정책의 비평가들은 1930년대에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을 비난하는데, 그들은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유화 정책에 책임이 있는 정치 지도자들은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은 잘못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시도한 것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인간적이었다."라고 썼다.[81]

챔벌린이 히틀러와 공모하여 소련을 공격했다는 견해는 특히 극좌파에서 지속되었다.[82] 앤서니 비버는 "유화 정책은 네빌 챔벌린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그 뿌리는 볼셰비즘에 대한 두려움에 있었다. 1926년 총파업과 공황은 혁명의 가능성을 보수 정치인들에게 매우 현실적인 문제로 만들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국에서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분쇄한 독일과 이탈리아 정권에 대해 엇갈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썼다.[83]

5. 유화 정책의 교훈과 현대적 의의

윈스턴 처칠은 저서 《제2차 세계 대전 회고록》에서 유화 정책 대신 이른 시기에 히틀러를 쳐부쉈다면 홀로코스트도 없었을 것이라며 비판했다.[1] 그러나 최근 영국에서는 네빌 체임벌린이 유화 정책으로 벌어들인 시간을 군비 증강에 최대한 활용하여 영국 본토 항공전 승리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유화 정책에 대한 논쟁은 현대에도 독재적이고 공격적인 정권에 대한 대응을 논의할 때 종종 언급된다. 1990년 걸프 위기 당시, 부시(아버지) 행정부는 이라크쿠웨이트 침공에 대해 유엔 안보리 결의를 10차례나 내고 철수를 요구했으나, 이라크가 거부하자 다국적군을 편성하여 걸프 전쟁을 개전했다. 이는 주데텐란트 요구에 대한 양보로 히틀러의 팽창을 막지 못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사례이다. 2003년 이라크 전쟁 개전 당시, 부시(아들) 행정부는 뮌헨 회담을 언급하며 사담 후세인에 대한 선제 공격이 아우슈비츠와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

5. 1. 독재 정권에 대한 대응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이끌었던 유화 정책은 아돌프 히틀러베니토 무솔리니 같은 독재자들의 침략적인 행동을 막지 못했다. 1939년 히틀러가 뮌헨 협정을 어기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면서 유화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32] 이는 국제 사회가 독재 정권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더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국제 연맹과 집단 안보 체제의 실패는 유화 정책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설립된 국제 연맹은 국제 협력과 집단적 대응을 통해 전쟁을 막고자 했으나,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과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과 같은 사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32]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초기 가짜 전쟁 기간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피했지만,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이후 윈스턴 처칠이 새로운 총리가 되면서 영국은 강경 대응으로 전환했다. 처칠은 히틀러의 평화 제안을 거부하고, 독일에 맞서 싸울 것을 결의했다.[33]

전후 시대의 정치 지도자들은 유화 정책의 실패를 교훈 삼아 국제 관계에서 단호한 대응을 강조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한국 전쟁 참전, 앤서니 에덴 총리의 수에즈 운하 위기 대응,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해상 봉쇄 결정 등은 유화 정책에 대한 반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84][85]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린든 B. 존슨 대통령 등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베트남 전쟁 등에서 유화정책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커티스 르메이 미국 공군 참모총장과 같은 강경파들은 케네디의 신중한 대응을 유화 정책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86][75]

냉전 시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보수 동맹들은 유화 정책의 교훈을 언급하며 소련에 대한 강경 대응을 촉구했다.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는 포클랜드 전쟁 당시 처칠의 사례를 언급하며 단호한 대응을 강조했다.[88]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총리는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뮌헨 협정의 실패를 언급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90] 버락 오바마 행정부 관계자들은 시리아 내전 개입에 소극적인 태도를 바샤르 알 아사드에 대한 유화 정책이라고 비판받았다.[75]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란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을 다룰 때 "유화 정책의 잘못된 편안함"에 대해 경고했다.[91]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은 이란에 대한 유화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92][93]

티베트 분리주의자들은 서방 국가들의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정책을 유화 정책으로 간주한다.[94] 조지아 침공, 크림반도 합병, 돈바스 분쟁 등에 대한 국제 사회의 미온적인 대응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하는 배경 중 하나로 여겨진다.[95][96]

일부 나토 국가들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주저하는 것은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에 대한 유화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는다.[97][98][99][100]

2020년 도하 협정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참여 없이 미국과 탈레반 간에 체결되어 미국의 탈레반에 대한 유화책으로 비판받았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미군 철수를 결정한 후, 탈레반은 공세를 통해 카불을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붕괴시켰다.[101]

윈스턴 처칠은 유화 정책이 홀로코스트를 막을 기회를 놓쳤다고 비판했지만, 최근 영국에서는 체임벌린이 유화 정책으로 확보한 시간을 군비 증강에 활용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5. 2. 약소국 보호와 국제 정의

유화 정책은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이 희생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939년 3월 15일 히틀러가 뮌헨 협정을 어기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면서, 약소국을 희생시킨 유화 정책은 그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이는 국제 정의와 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 사회의 노력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설립된 국제 연맹은 국제 협력과 침략에 대한 집단 저항을 통해 전쟁을 막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국제 연맹은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 이탈리아 왕국에티오피아 침공과 같은 침략 행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국제 연맹의 실패는 집단 안보의 실패로 이어졌고, 결국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으로 이어졌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유화 정책의 문제점은 독재적이고 공격적인 정권에 대한 대응을 논의할 때 자주 언급됩니다. 1990년 걸프 위기 당시, 미국은 이라크쿠웨이트 침공에 대해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를 통해 철수를 요구하고, 이라크가 이를 거부하자 다국적군을 편성하여 걸프 전쟁을 개전했습니다. 이는 히틀러에게 양보했던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사례입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개전 당시에도 미국은 뮌헨 협정을 언급하며 사담 후세인에 대한 선제 공격의 필요성을 주장했습니다.

5. 3. 한반도 문제에 대한 시사점

유화 정책의 실패는 북한 핵 문제와 같은 한반도 안보 위협에 대한 대응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윈스턴 처칠은 저서 《제2차 세계 대전 회고록》에서 유화 정책 대신 이른 시기에 히틀러를 쳐부쉈다면 홀로코스트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 이는 단호한 제재와 압박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최근 영국에서는 네빌 체임벌린이 유화 정책으로 벌어들인 시간을 군비 증강에 활용하여 영국 본토 항공전 승리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1] 이는 대화와 협상을 병행하는 전략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1990년 걸프 위기 당시 조지 H. W.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쿠웨이트 침공에 대해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를 통해 철수를 요구했으나, 이라크가 거부하자 다국적군을 편성하여 걸프 전쟁을 개전했다.[1] 2003년 이라크 전쟁 개전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뮌헨 회담을 언급하며 사담 후세인에 대한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주장했다.[1]

5. 3. 1. 햇볕 정책에 대한 논란

햇볕정책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햇볕정책 지지자들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대화와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상호 존중과 경제 협력을 통해 북한의 개혁과 개방을 유도하고, 장기적으로 한반도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햇볕정책 비판론자들은 이 정책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지 못했고, 오히려 북한 정권의 유지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핵 개발 자금으로 전용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며, 보다 강경한 대북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쟁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나치 독일에 대한 영국의 유화정책에 대한 논쟁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당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아돌프 히틀러와의 대화를 통해 전쟁을 막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독일의 팽창을 막지 못했다. 윈스턴 처칠은 유화정책이 히틀러를 막을 기회를 놓쳤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이 영국의 군비 증강 시간을 벌어주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현대에 들어서도 독재적이고 공격적인 정권에 대한 대응을 논의할 때 유화정책에 대한 논쟁이 자주 등장한다. 1990년 걸프 전쟁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사담 후세인을 히틀러에 비유하며 선제공격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참조

[1] 웹사이트 Appeasement — World War 2 on History http://www.history.c[...]
[2] 논문 "The Anglo-Italian war trade negotiations, contraband control and the failure to appease Mussolini, 1939–40."
[3] 서적 Public Opinion and the End of Appeasement in Britain and Franc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20-10-12
[4] 뉴스 "'Appeasement' Review: What Were They Thinking? Britain's establishment coalesced around appeasement and bared its teeth at those who dared to oppose it" https://www.wsj.com/[...] Wall Street Journal 2019-11-01
[5] 서적 Neville Chamberlain, Appeasement, and the British Road to War https://books.google[...] Manchester UP
[6] 문서 The Makings of the West
[7] 간행물 The Roosevelt Administration and Manchukuo, 1933?1941
[8] 서적 Europe Since Napoleon Longans Green & Co.
[9] 서적 The Fascist Challenge and the Policy of Appeasement https://www.taylorfr[...] Routledge
[10] 문서 English History, 1914–1945
[11] 논문 "Ensuring Benevolent Neutrality: The British Government's Appeasement of General Franco during the Spanish Civil War, 1936–1939"
[12] 뉴스 "Chamberlain and Hitler vs. Pakistan and Taliban" https://archive.toda[...] The Frontier Post Newspaper 2013-07-03
[13] 문서 The Third Reich in Power
[14] 서적 The Anschluss Movement 1931–1938 and the Great Powers
[15] 서적 Twentieth Century Journey, Volume 2, The Nightmare Years: 1930–1940 https://archive.org/[...] Little Brown and Company
[16] 서적 How War Came: The Immediat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17] 서적 English History, 1914–1945
[18] 서적 Hitler: Speeches and Proclamations, 1932–1945: The Chronicle of a Dictatorship
[19] 서적 Hitler & Mussolini: The Secret Meetings Enigma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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