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공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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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공흠은 함경북도 명천군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 운동을 했으며, 해방 후에는 북조선노동당에서 활동했다. 그는 일본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했다. 해방 후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평안북도 당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북한 정권에 참여했으나, 김일성의 독재를 비판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중국에서 생활하다가 1974년 의료 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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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안파 - 김두봉
김두봉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정치인으로, 주시경의 제자로서 한글 연구와 교육에 힘썼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조선독립동맹 결성,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숙청되었다. - 연안파 - 최창익
최창익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으며, 광복 후 북조선에서 요직을 맡았으나 종파 사건으로 숙청되었다. - 김두봉 - 백남운
백남운은 일제강점기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에 입각해 한국사를 연구하고 광복 후 좌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참여한 정치인이다. - 김두봉 - 최창익
최창익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으며, 광복 후 북조선에서 요직을 맡았으나 종파 사건으로 숙청되었다. - 김원봉 - 최창익
최창익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일본 유학 중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으며, 광복 후 북조선에서 요직을 맡았으나 종파 사건으로 숙청되었다. - 김원봉 - 김성숙 (1898년)
김성숙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대한민국 정치인으로, 3·1 운동 참여 후 중국에서 의열단,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의용대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했으며, 해방 후 독립노동당을 창당하여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윤공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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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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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파평 윤씨 |
자 | 중보(仲輔) |
호 | 정정와(靜靜窩) |
생애 | |
출생 | 1547년 |
사망 | 1622년 |
가족 | |
아버지 | 윤현 |
어머니 | 증 정부인 남양 홍씨 |
배우자 | 정부인 평산 신씨 |
아들 | 윤순거 |
손자 | 윤선도 |
관력 | |
과거 급제 | 문과 병과 1576년 |
주요 관직 | 형조좌랑 병조정랑 사간 지평 수찬 교리 직제학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도승지 대사간 황해도관찰사 대사성 이조참판 대제학 이조판서 지경연사 예조판서 좌참찬 판의금부사 우찬성 좌찬성 영중추부사 |
저서 및 작품 | |
저서 | 정정와집(靜靜窩集) |
평가 및 기타 | |
시호 | 문간(文簡) |
기타 정보 | 인조반정에 가담 |
2. 생애
함경북도 명천군 출신으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에서 비행술을 익혔다.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하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다.[1] 국내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시도하다 체포되었으나,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의용대, 조선독립동맹 등에서 활동하며 연안파의 일원이 되었다.[2][3]
해방 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평안북도 당 위원장, 내무국 38선 경비대장,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선전부장, 제5군단 군사위원, 평양시 당 위원장, 재정상, 상업상 등 요직을 역임했다.
1956년 김일성의 독재 체제 구축에 반발하여 서휘, 리필규, 김강 등과 함께 김일성을 비판하고 중국으로 망명하는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었다. 중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당적은 회복되었으나 귀국을 거부하고 중국에 남았다. 이후 중국 내륙 지방으로 이주되어 감시 속에서 생활했으며, 귀국을 희망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1974년 산시성 린펀시의 한 병원에서 의료 사고로 사망했다.
2. 1. 항일 독립운동
함경북도 명천군 출신이다. (김중생의 저서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 전쟁』에는 영변군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9년 3월 가산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학년 겨울에 중퇴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술을 배웠다. 1931년 4월 일본비행학교 정과에 입학하여 6월에 졸업했고, 같은 해 8월에는 일본비행학교 조종과에 입학했다. 1931년 5월에는 이등 비행기 조종사 면허를 취득했다.1933년 4월,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에 가입했다. 1934년 4월에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2기를 졸업했다.[1] 같은 해 6월 조선으로 돌아와 노동자들과 연계하여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중국의 의열단과 연계하여 비행기로 일본군을 공격하고 일본 요인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강점기 경찰에 의해 경성(현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1934년 11월 동지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전선동맹에 가입했으며, 조선의용대에 참가하여 활동했다. 이후 중국공산당 근거지 연안으로 이동하여, 1939년 항일군정대학 제5기를 졸업했다.[2] 1941년 1월에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43년 7월에는 조선독립동맹 연안분맹에 배속되었다. 1944년 10월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설립되자 김극과 함께 제4구대 책임자를 맡았다.[3]
2. 2. 북한 정권 참여
1945년 8월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후, 윤공흠은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 참여하였다. 1946년 8월에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평안북도 당 위원장과 도당 학교 교장을 겸임하였다.1947년 7월에는 박일우가 국장으로 있던 내무국 산하 38도선 경비대장을 맡았고, 1948년에는 평안북도 당 서기로 활동하였다. 1949년에는 소련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선전부장 및 제5군단 군사위원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전쟁 중인 1952년에는 평양시 당 위원장을 지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내각의 재정상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954년 3월에는 상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1956년 4월, 다시 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나, 같은 해 8월 김일성의 독재 체제를 비판하며 서휘, 리필규, 김강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8월 종파 사건).
2. 3. 중국 망명과 사망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같은 해 8월 김일성의 독재 체제를 비판하며 서휘, 리필규, 김강 등 연안파 동료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8월 종파 사건).중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1956년 9월 23일 열린 9월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박창옥의 중앙위원 자격과 윤공흠 등의 당적이 회복되었지만, 윤공흠 등 망명자들은 회의 결과를 통보받고도 귀국을 거부했다. 대신 북조선 정부에 가족들의 중국 이주를 요구했다. 당시 외무상 남일은 소련 대사에게 북한 정부가 가족들의 중국행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전했으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중국으로 망명한 간부들은 다시는 가족을 만나지 못했고,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국제 정세가 변화하면서 중국은 북조선을 전략적 동맹으로 삼기 위해 북조선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1958년, 중국 공산당 중앙대외연락부는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강 등을 베이징에서 쓰촨성 청두로 이주시켰고, 다른 망명 간부들도 선양 등지에서 쓰촨성으로 옮겨졌다. 같은 해 여름,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어메이 산에 모아 학습 회의를 열었으며, 이후 윤공흠 등은 중국 내륙 각지로 흩어져 정착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의 요구에 따라 조선에서 온 사람과 접촉하지 않고, 북한 내부에 편지를 보내지 않으며, 외부에서 북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중앙대외연락부는 당분간 이들의 당적과 국적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협조적인 인물에 한해 일반 업무를 맡기되 당정 업무는 배제하며, 결혼과 가정 형성은 인정하고 생활상 배려와 원조를 제공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1961년 7월, 마오쩌둥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1956년 북조선 내정 간섭의 책임을 여산 회의에서 실각한 펑더화이에게 전가했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는 박일우밖에 믿지 않았고, 이상조는 늘 리커농 앞에서 당신들의 험담을 했다"고 비난하며, 망명파들을 "전복을 꾀하고 분열시키려 한 자들"로 규정했다. 이후 중국 공산당은 공식 문서에서 이들에 대한 호칭을 '조선 도망 간부'에서 '조선 반당 섹트 분자'로 바꾸었다.
1962년 4월, 중앙대외연락부는 중국 내 '조선 반당 섹트 분자'와 그 가족을 공안 부문의 통일적 감시와 관리 하에 두도록 제안했다. 이 제안에는 "윤공흠과 김정룡(전 인민군 총병원 당 위원장)은 반성하고 있으니, 외국 거류민으로서 중국에 체류하게 하고, 홍십자(적십자)가 생활을 돌보며, 공안 부문은 수면 하에서 감시한다. 생활 대우는 기존과 같이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쓰촨성과 산시성 당 위원회에 전달되었다. 윤공흠이 실제로 반성의 태도를 보이며 귀국을 신청했으나 허가되지 않아 낙담했다는 보고가 있었고, 쓰촨성 당 위원회는 현상 유지를 제안했다. 그러나 중앙대외연락부는 조선노동당의 입장을 고려하여 새로운 방침에 따라 처리하되 어느 정도 배려는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1974년, 산시성 린펀시의 한 방직공장 부속 병원에서 의료 사고로 사망했다.
참조
[1]
뉴스
불멸의 발자취(50)—김원봉과 남경의 사적지들
http://www.jlcxwb.co[...]
2011-10-09
[2]
뉴스
불멸의 발자취(77)—연안에 모인 조선혁명가들
http://www.jlcxwb.co[...]
2013-02-03
[3]
뉴스
불멸의 발자취(80)—조선혁명가들의 연안 대집합
http://www.jlcxwb.co[...]
2013-02-05
[4]
백과사전
윤공흠
http://enc.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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