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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나카 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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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마나카 신지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1989년부터 2001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뛰어난 제구력을 바탕으로 슬로 커브와 포크볼을 주무기로 사용했으며, 1993년에는 다승왕, 최다 탈삼진, 사와무라상 등을 수상하며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았다. 2002년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하며, 주니치 드래건스 1군 투수 코치를 역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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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나카 신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원어 이름Shinji Imanaka
일본어 표기今中 慎二
가나いまなか しんじ
한자今中 慎二
로마자 표기Imanaka Shinji
출생일1971년 3월 6일
출생지오사카부 가도마시
신장182
체중73
수비 위치투수
투구
타석
프로 입단 연도1988년
드래프트 순위1순위
첫 출장1989년 5월 26일
마지막 경기2001년 7월 13일
선수 경력
포지션투수
데뷔 리그NPB
데뷔일1989년 5월 26일
데뷔 팀주니치 드래건스
마지막 리그NPB
마지막 날짜2001년 7월 13일
마지막 팀주니치 드래건스
소속팀주니치 드래건스 (1989–2001)
코치 경력
코치 팀주니치 드래건스 (2012–2013)
통계
통계 연도2001
통계 리그NPB
승-패 기록91-69
세이브5
평균 자책점3.15
탈삼진1129
수상
수상 내역1x 에이지 사와무라 상 (1993)
1x 센트럴 리그 승리 챔피언 (1993)
1x 센트럴 리그 탈삼진 챔피언 (1993)
1x 센트럴 리그 MVP (투수) (1993)
1× 베스트 나인 (1993)
1× 미쓰이 골든 글러브 상 (1993)
4x NPB 올스타 (1991, 1993–1995)

2. 유년 시절과 프로 입단 전

오사카부 가도마시 후루카와바시역 주변에서 태어난 이마나카 신지는 세 살 터울 형의 영향으로 하마마치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57] 원래 오른손잡이였으나, 이웃 주민에게 왼손잡이용 글러브를 받으면서 왼손 투수가 되었다.[57] 3학년 때 형이 잊은 도시락을 전해주러 갔다가 야구팀 코치의 권유로 형과 같은 연식 야구팀에 입단했고, 4학년 때부터 투수를 맡았다.[57]

가도마 시립 제1 중학교 진학 후 그 해에 창단된 리틀 시니어 팀 '가도마 시니어'에 입단하여 1학년 때부터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57] 당시 이미 빠른 공을 던졌지만, 팀의 수비력이 약해 대회에서 승리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이 때문에 야구를 그만둘까 고민하기도 했다.[57]

오사카 산업대학 부속 고등학교(현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 다이토 교사 야구부 강화 계획에 따라 스카우트되어 입학했다.[57] 1학년 여름 오사카부 대회에서 벤치에 들어갔고, 가을 오사카부 대회 준준결승 PL가쿠엔 고등학교전에 등판하여 다쓰나미 가즈요시와 노무라 히로시를 앞세운 강호를 상대로 호투하며 일본 프로 야구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았다.[57] 곧 성장하여 속구를 던지게 되면서 한신 타이거스 스카우트 다마루 히토시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57] 2학년 겨울, 어머니가 거미막밑출혈로 사망하는[58] 큰 슬픔을 겪었지만, 3학년이 되면서 정신적으로 회복하고 프로 진출의 목표를 갖게 되었다.

3학년(1988년) 때, 다이토 교사는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로 독립했다. 이마나카는 3학년 여름 오사카부 대회에서 15탈삼진을 기록했지만, 팀은 연장 접전 끝에 첫 경기에서 패하며 고시엔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59] 대학 진학을 고려하던 중, 145km/h의 직구[60]를 던지는 이마나카에게 프로 야구 12개 구단 스카우트가 주목했고,[59] 198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주니치 드래건스의 1순위 지명을 받았다.[61] 담당 스카우트는 호모토 히데아키였으며, 계약금 6000만, 연봉 480만(추정)에 입단 계약을 맺었다.[61]

2. 1. 야구 시작

오사카부 가도마시 후루카와바시역 주변에서 태어나[56] 세 살 연상인 형의 영향으로 하마마치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57] 원래는 오른손잡이였지만 이웃에 살던 중년 여성으로부터 왼손잡이용 글러브를 받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왼손 투수가 되었다.[57] 3학년 때 형과 같은 연식야구팀에 들어갔는데, 형이 잊어버린 도시락을 전해주러 갔다가 ‘내일부터 연습하러 오라’는 말을 듣고 입단하게 된 것이다. 4학년부터 투수가 됐다.[57] 가도마 시립 제1 중학교에 진학하여 그 해에 설립된 리틀 시니어 팀인 ‘가도마 시니어’에 입단, 1년차부터 팀의 에이스가 됐다.[57] 당시부터 공의 구속은 빨랐지만 팀의 수비력이 좋지 않아 대회에서 이길 기회가 별로 없었고, 이 때문에 야구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57]

2. 2. 학창 시절

오사카부 가도마시 후루카와바시역 주변에서 태어나[56] 세 살 터울인 형의 영향으로 하마마치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57] 원래는 오른손잡이였지만 이웃에 살던 중년 여성으로부터 왼손잡이용 글러브를 받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왼손으로 던지게 됐다.[57] 3학년 때 형과 같은 연식 야구팀에 들어갔는데, 직접 원해서가 아니라 형이 잊은 도시락을 전해주러 갔다가 "내일부터 연습하러 오라"는 말을 듣고 입단했다.[57] 4학년부터 투수를 맡았다.[57] 가도마 시립 제1 중학교에 진학해 그해 설립된 리틀 시니어 팀 '가도마 시니어'에 입단, 1학년 때부터 팀의 에이스가 됐다.[57] 당시 공의 구속은 빨랐지만 팀 수비력이 좋지 않아 대회에서 이길 기회가 적었고, 야구를 그만둘까 생각하기도 했다.[57] 오사카 산업대학 부속 고등학교(현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 다이토 교사가 연습을 견학했을 때 팔이 긴 좌완 투수였던 이마나카에게 관심을 가졌고, 야구부 강화를 추진하던 이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57]

입학 초기에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곧 몰라보게 성장하여 속구를 던지게 되었고, 오사카 산업대학 부속 고등학교를 방문한 다마루 히토시(당시 한신 타이거스 스카우트)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57] 1학년 여름 오사카부 대회(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오사카 대회)에서 벤치에 들어갔고, 가을 오사카부 대회 준준결승 PL가쿠엔 고등학교전에 등판했다. 이 경기는 0대 1로 졌지만, 다쓰나미 가즈요시와 노무라 히로시를 앞세워 이듬해 춘계, 하계 대회 연패를 달성한 강호를 상대로 호투하여 일본 프로 야구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았다.[57] 2학년 겨울, 어머니가 거미막밑출혈로 사망하며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지만,[58] 3학년이 되면서 정신적으로 회복, 장래 프로 진출의 목표를 갖게 되었다.

3학년인 1988년, 다이토 교사는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로 독립했다. 3학년 여름 오사카부 대회에서 15탈삼진을 기록했지만, 팀은 연장 접전 끝에 첫 경기에서 패하며[59] 고시엔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대학 진학을 생각하던 중, 145km/h의 직구[60] 덕분에 프로 야구 12개 구단 스카우트가 학교를 방문할 정도로[59] 주목받았고, 198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주니치 드래건스의 1순위 지명을 받았다. 담당 스카우트는 호모토 히데아키였으며, 계약금 6000만, 연봉 480만(추정)에 입단 계약을 맺었다.[61] 팀 동료로는 이마나카와 배터리를 이룬 기리야마 아키요시(1988년 닛폰햄 파이터스 드래프트 번외 입단)가 있다.

2. 3. 주니치 드래건스 입단

198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주니치 드래건스로부터 1위 지명을 받았다.[11] 이마나카는 드래프트 회의 당시에 대해 "많은 보도 카메라가 대기하고 있었고, 이름이 불린 순간은 카메라 셔터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고 회고했다.[12] 담당 스카우트는 나카타 무네오였으며, 계약금 6000만, 연봉 480만(모두 추정)으로 입단 계약을 맺었다.[13] 일본햄 파이터스에 드래프트 외로 입단한 키리야마 아키요시가 동기이다.

3. 프로 야구 선수 시절

1997년, 이마나카 신지는 스프링 캠프를 앞두고 왼쪽 어깨에 심한 통증을 느꼈고, 정밀 검사 결과 근육 손상이 확인되었다.[76][77] 시범 경기에서 구속 저하와 어깨관절주위염 재발로 5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 등판이 무산되었다. 6월에 1군에 복귀했지만 부진으로 2군으로 내려갔고, 8월에 복귀하여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시즌 첫 승을 거두었지만[79] 결국 2승에 그쳤다.

1998년에는 어깨 상태가 회복되어 5월 16일 요코하마전에서 승리했으나,[81][82] 이것이 현역 마지막 승리였다. 6월 5일 요미우리전에서 8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며 부활의 조짐을 보였지만,[83] 7월 9일 야쿠르트전에서 부진하며 2승 8패를 기록, 호시노 센이치 감독으로부터 기교파 전향 명령을 받고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83]

1999년, 투구 연습을 시작했지만 불펜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85] 7월 15일 히로시마전에서 2이닝 6실점으로 부진했고, 결국 8월 20일 왼쪽 어깨 수술을 받았다.[85] 주니치는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이마나카는 재활로 인해 팀 우승에 직접 기여하지 못했다.

2000년에는 11년 만에 2군 스프링 캠프에서 시즌을 맞이했고, 처음으로 1군 등판 없이 시즌을 마쳤다. 2001년, 1월 합동 자주 트레이닝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 2년 만에 1군 스프링 캠프에 합류했지만, 제구 문제로 개막전 1군 등록에 실패했다.[86] 그 해 2년 만에 1군에 등판했지만, 체력적인 한계를 느껴 10월에 현역 은퇴를 결심했다. 야마다 히사시 투수 코치의 중간 계투 제안과 타 구단의 영입 제의도 있었지만,[73] 11월 10일 은퇴 기자회견을 가졌다.[73]

3. 1. 프로 데뷔 초반 (1989년 ~ 1996년)

이마나카 신지는 프로 1년 차인 1989년, 곤도 신이치와 우에하라 아키라의 사례를 따라 스프링 캠프와 시범 경기 기간 동안 2군에서 체력 훈련과 수비 연습에 집중했다.[60] 신타쿠 히로시와 이나바 미쓰오의 지도를 받으며 투구폼 교정과 체력 향상에 힘썼고,[60] 5월 26일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1군 첫 등판을 기록했다.[59] 9월 17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는 기타벳푸 마나부와의 투수전에서 2회에 물집이 생긴 것을 뭉개고 순간접착제로 굳혀 5이닝을 던지는 투혼을 발휘하며 프로 첫 승리를 따냈다.[59] 시즌 후 추계 스프링 캠프에서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임시 코치로부터 당시 메이저 리그에서 유행하던 스플릿 핑거 패스트볼 계통의 포크볼을 배웠다.[62]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이마나카는 주니치 드래건스의 선발 투수로 활약하며 성장과 부상을 겪었다. 올스타전에 처음 출전했고,[67]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수상하는 등 최고의 시즌을 보내기도 했지만,[71] 어깨 부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73]

3. 1. 1. 1990년: 선발 투수로서의 성장

1990년, 스프링 캠프에서 이케다 히데토시 투수 코치에게 팔로 스루 등을 지도받아 직구의 성장과 변화구의 꺾임이 개선되었다.[63] 또한 싱커의 습득에도 도전했다.[64] 3월 24일 도요하시 시민 구장에서 열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시범 경기에서 무라타 가쓰요시와 투수전을 펼쳐 5이닝 동안 2피안타, 무볼넷, 무실점의 호투를 보였다.[63]

개막 이후에는 장래 좌완 에이스로서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서 주로 선발로 기용되었다.[65] 당시에는 아직 막연하게 던지는 듯한 점이 있었지만,[66]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하여 6차례의 완투를 기록하는 등 규정 투구 이닝에 도달해서 10승(6패)을 기록했다.

3. 1. 2. 1991년: 올스타전 출전과 아쉬운 평균 자책점 타이틀 실패

1991년에는 올스타전에 처음으로 출전하여 2차전에서 7회부터 2이닝 동안 1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67] 같은 해 사사오카 신지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는데, 시즌 최종전인 더블헤더에 연속 선발 등판했지만 평균 자책점 0.08 차이로 아쉽게 타이틀을 놓쳤다.[67] 이 시즌 야쿠르트전에서 구원에 실패한 이마나카 때문에 당시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는 분노하여 콘크리트 재질의 화로를 여러 번 걷어차 발목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67] 이는 이마나카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이마나카의 행동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일'로 회자되곤 한다.[67]

3. 1. 3. 1992년: 부상과 슬로 커브 습득

1992년 4월 19일에 열린 요미우리전에서 땅볼 타구가 왼쪽 손목에 맞아 골절되는 부상을 당해 3개월 뒤인 여름에 복귀했다.[68] 골절이 나은 직후에는 악력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아서 가볍게 캐치볼을 해도 손목에 날카로운 통증이 있었다. 그러나 왠지 커브만은 통증 없이 던질 수 있었기 때문에 재활 훈련에서는 커브만을 사용한 멀리 던지는 방식의 캐치볼을 계속했다. 처음 한동안엔 컨트롤이 잡히지 않았지만 점점 요령이 잡혀서 이것이 이마나카의 결정구라고도 할 수 있는 슬로 커브를 습득한 계기가 됐다고 한다.[68][69] 또 아랫팔의 근육을 단련하는 가운데 왼쪽 팔꿈치의 유리 연골이 우연히 들러붙었다고도 말했다.[70] 그 해에는 11경기에 등판에만 그쳤지만 8승 2패로 평균자책점 1.77의 성적을 남겼다.

3. 1. 4. 1993년: 최고의 시즌, 사와무라상 수상

1993년, 이마나카는 자신의 첫 개막전 선발 투수로 출전하여 개막 4연승을 거두었다. 이후 5연패를 겪었지만, 곧바로 반등에 성공했다.[66] 7월 6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는 당시 센트럴 리그 최다 타이 기록인 한 경기 16탈삼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2년 만에 올스타전에 출전하여 1차전에서 센트럴 리그 팀의 두 번째 투수로 등판, 2이닝 동안 4피안타 2실점을 기록했다.

이마나카는 이 해에 선발 투수로 주 1, 2회 등판하며[66] 총 249이닝을 소화했다. 9월 2일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는 9회 2사까지 호투했으나 이케야마 다카히로에게 동점 홈런을 맞고 연장전에 돌입, 15회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이 경기는 이마나카에게 다음 해의 '10.8 결전'과 함께 현역 시절 가장 인상 깊었던 경기로 꼽힌다.[71]

1993년 시즌 최종 성적은 17승 7패, 평균 자책점 2.20, 247탈삼진으로, 다승왕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획득했다. 또한, 심사 항목을 모두 충족하여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수상했다. 1990년대에 심사 항목을 모두 채운 선수는 이마나카 외에 1991년의 사사오카 신지뿐이었다. 이마나카는 베스트 나인골든 글러브상도 동시에 수상하며 최고의 시즌을 마무리했다.

3. 1. 5. 1994년: 10.8 결전과 어깨 부상 시작

1994년 올스타전 2차전 9회에 등판하여 이치로 등을 삼자 범퇴로 처리했다.[72] 같은 해 주니치는 시즌 최종전까지 요미우리와 치열하게 우승을 다투었고, 이마나카는 2일 또는 3일 간격으로 선발 등판을 계속했지만 통증을 호소하지 않았다.

'10.8 결전'에서는 경기에 앞서 나카무라 다케시 등 선수회 멤버들에게 "이겨도 좋고 져도 좋으니 선발로 나와 달라"는 부탁을 받을 정도로 팀 내 신뢰를 받았다.[72] 그러나 이 경기에서 4이닝 5실점으로 조기 강판되어 패전 투수가 되었다.[72] 다른 선수들은 이 결과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72]

이마나카는 훗날 이 해 여름 무렵부터 왼쪽 어깨 상태가 점차 나빠졌다고 회고했다.[73]

3. 1. 6. 1995년: 메이저 리그 진출 제의

1995년, 이마나카 신지는 극심한 피로 등으로 커브 등 공의 각도가 나빠졌지만 팀 내에서 유일하게 규정 투구 이닝을 채웠고 리그 2위인 15차례의 완투를 기록했다.[74] 같은 해에 열린 올스타전에서는 1차전에 센트럴 리그 팀의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해 2이닝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또한, 메이저 리그 스카우트로부터는 그 해에 미국으로 건너간 노모 히데오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고, 신시내티 레즈의 데이브 존슨 감독으로부터 시즌 중에 트레이드를 통한 영입 제의가 있었다고 한다.[74]

3. 1. 7. 1996년: 어깨 부상 악화

今中 慎二|이마나카 신지일본어는 1996년에 4년 연속으로 개막전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6월 27일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히로시마전에서 구단 역사상 가장 빠른 186경기 만에 통산 1000탈삼진을 달성했다.[75] 7월까지 9승을 올리는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7월 16일 도쿄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전에서 프로 데뷔 후 가장 짧은 1/3이닝 만에 강판되었고, 왼쪽 어깨 통증을 호소했다. 다음 날 정밀 검사 결과 왼쪽 어깨 관절 주위 염증으로 2주간 안정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아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이로 인해 직후에 열리는 올스타전 출전을 포기했고, 斎藤 隆|사이토 다카시일본어가 대신 출전하게 되었다.[75]

이 부상 보름 전에도 허리 통증으로 등판을 피했지만, 우승 경쟁을 하고 있는 팀 사정으로 1주일 후 투구 연습을 재개했다. 7월 29일 1군에 복귀했고, 8월 4일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전에서는 1실점 완투승을 거두었다. 그 후에도 왼쪽 어깨 통증이 남은 채로 등판하여[75] 4승을 추가하며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인 14승을 기록했다.

3. 2. 프로 데뷔 후반 (1997년 ~ 2001년)

1997년 이마나카는 스프링 캠프에서 어깨 부상이 재발하여 5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 등판에 실패했고, 1군 복귀 후에도 부진하여 2군으로 강등되었다.[43][44] 1998년에는 어깨 상태가 회복되어 5월 16일 요코하마전에서 승리했지만, 이것이 현역 마지막 승리가 되었다.[43] 이후 다시 부진에 빠져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1999년에는 어깨 통증이 심해져 수술을 받았다. 주니치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이마나카는 재활로 인해 팀 우승에 직접 기여하지는 못했다. 2000년과 2001년에는 1군 등판 기회를 얻지 못했고, 결국 2001년에 은퇴를 결심했다. 야마다 히사시 투수 코치의 중간 계투 제안도 있었지만, 은퇴를 선택했다.

3. 2. 1. 1997년: 어깨 부상 재발과 부진

이마나카 신지는 1997년 스프링 캠프에서 어깨 부상이 재발하여 5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 등판에 실패했다.[43] 1군에 복귀한 후에도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2군으로 강등되었다.[44]

3. 2. 2. 1998년: 현역 마지막 승리

어깨 상태가 회복되어 5월 16일 요코하마전에서 승리하지만, 이것이 현역 마지막 승리가 된다.[43] 이후 부진이 계속되며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3. 2. 3. 1999년: 어깨 수술과 팀 우승

이마나카 신지는 1999년에 어깨 통증이 악화되어 수술을 받았다. 주니치는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이마나카는 재활로 인해 팀 우승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다.

3. 2. 4. 2000년 ~ 2001년: 은퇴

이마나카는 1군 등판 기회를 잡지 못하고, 결국 2001년에 은퇴를 결심했다. 야마다 히사시 투수 코치로부터 중간 계투로서의 재기를 제안받았지만, 은퇴를 선택했다.

4. 은퇴 후

2002년 3월 23일, 나고야 돔에서 열린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시범 경기에서 은퇴식이 거행됐다. 다니 요시토모와 맞대결 후 장남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았다.[88] 은퇴 후에는 NHK 야구 해설자와 주니치 스포츠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 나고야 민영 방송국에도 게스트로 출연해 해설을 맡았다. 2009년 퍼시픽 리그 우승팀으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를, 2010년에는 주니치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우승을 예측하여 적중시켰다.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의 ‘나고야 80 D'sers’팀 소속으로도 활동했다.

2012년, 친정팀 주니치의 2군 투수 코치로 발탁됐다. 그해 시즌 후 곤도 히로시 1군 투수 코치가 퇴단하면서 1군 투수 코치로 부임했다. 2013년에는 불펜 담당이었으나, 팀 성적 부진으로 6월 12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곤도 신이치 투수 코치와 교체돼 벤치 담당이 됐다. 10월 15일, 구단으로부터 코치진 개편에 따라 다음 시즌 계약을 맺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고 퇴단했다.[89] 2014년부터는 다시 NHK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주로 종합 TV 도카이 로컬의 주니치 주관 경기, BS의 메이저 리그 중계에 출연)

5. 플레이 스타일

이마나카 신지는 마른 체형에도 불구하고 전성기에는 최고 구속 150km/h에 육박하는[45] 날카로운 직구와 100km/h 전후의 슬로 커브를 구사했다. 포크볼과 70-80km/h의 초슬로 커브를 섞어 던졌으며, 1996년 무렵부터는 체인지업도 사용했다[46]. 변화구를 의식적으로 완전히 똑같은 폼으로 던져 타자를 농락했고, 포수 나카무라 타케시는 릴리스 직전까지 사인이 틀린 게 아닌가 하고 불안해하기도 했다. 특히 커브가 직구보다 더 힘차게 팔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폼이었기 때문에, 타자는 직구에 밀리거나 커브에 몸이 쏠리기 쉬웠다.

선발 등판 시에는 5회까지는 직구와 커브로 투구를 구성하고, 6회 무렵부터 포크볼을 섞어 던졌다[47]. 포크볼은 많아야 10구 정도만 던졌지만, 후반부터 구종을 늘림으로써 타자들이 노림수를 좁히기 어렵게 하여 주도권을 잡았다. 또한 구종이 적은 중반까지 공략하려다가 상대가 초조해하는 효과도 있었다.

바깥쪽 낮은 공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몸쪽 승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몸쪽으로 공을 던지는 것은 코스가 빗나가면 장타로 연결될 위험이 크기 때문에 용기와 정교한 제구력이 요구되지만, 바깥쪽 승부만으로는 타자가 발을 내딛고 공을 맞히거나 볼넷으로 인한 자멸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48]

5. 1. 투구 스타일

마른 체형에서 전성기에는 최고 속도 150km/h에 육박하는[90] 좋은 직구와 100km/h 전후의 슬로 커브포크볼과 70~80km/h의 초슬로 커브[91]를 혼합한 투구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1996년경부터는 체인지업도 사용하고 있었다.[91] 이러한 변화구를 의식적으로 완전히 똑같은 폼에서 던져 타자를 속이고 포수 나카무라 다케시가 릴리스 직전까지 ‘사인이 잘못된 것인가’하고 불안감을 가진 적도 많았다고 한다.[91] 특히 커브의 방향이 직구보다 강력하게 팔을 뿌리친 듯이 보이는 폼이었기 때문에 타자는 직구로 생각하고 방망이를 돌리기도 하고 커브에 몸을 따라나가기도 쉬웠다고 한다.[72]

선발일 때는 어떻게 완투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고 5회까지는 직구와 커브로 투구를 하여 타자가 세 번째부터 네 번째에 들어와서 익숙해지는 6회쯤부터 포크볼을 섞어서 던졌다.[92] 포크볼은 많아야 10개 정도 밖에 던지지는 않았지만 종반부터 구질을 늘림으로서 노림수를 갖고 타격하기 어려울 정도로 해서 주도권을 잡고 더욱이 구질의 적은 중반까지 공략하고자 해서 상대가 초조해 하는 효과도 있었다고 한다.[92] 나카무라 다케시는 팀 득점에 관계없이 3점 이내에서 완투하고자 하는 스타일로, 8점을 얻으면 7점까진 허용하는 야마모토 마사와는 대조적이었다고 평가했다.[72] 이 때문에 중요한 경기에서는 점수를 빼앗기지 않는 점을 평가받아서 선발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72]

바깥으로 떨어지는 낮은 공을 베이스로 하면서 그것을 살리기 위해서도 몸쪽을 유효하게 사용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었다. 몸쪽으로의 투구는 코스가 어중간하게 되면 장타로 연결되기가 쉽기 때문에 용기와 컨트롤이 필요하지만 바깥쪽만으로는 안타나 적시타를 얻어맞든가 볼넷에 의한 자멸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93]

5. 2. 주요 구종

이마나카 신지는 마른 체형에서 최고 구속 150km/h에 육박하는[45] 날카로운 직구와 100km/h 전후의 슬로 커브, 포크볼을 섞어 던졌으며, 1996년 무렵부터는 체인지업도 사용했다[46]. 이러한 변화구들을 의식적으로 완전히 똑같은 폼으로 던져 타자들을 농락했다. 포수 나카무라 타케시는 릴리스 직전까지 사인이 틀린 것이 아닌가 하고 불안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커브가 직구보다 더 힘차게 팔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폼이었기 때문에, 타자들은 직구에 밀리거나 커브에 몸이 쏠리기 쉬웠다.

선발 등판 시에는 5회까지는 직구와 커브로 투구를 구성하고, 6회 무렵부터 포크볼을 섞어 던졌다[47]. 포크볼은 많아야 10구 정도만 던졌지만, 후반부터 구종을 늘림으로써 타자들이 노림수를 좁히기 어렵게 하여 주도권을 잡았다. 또한 구종이 적은 중반까지 공략하려다가 상대가 초조해하는 효과도 있었다.

5. 2. 1. 슬로 커브

1992년 4월 19일 요미우리전에서 땅볼 타구에 왼쪽 손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했다.[68] 부상 회복 직후에는 악력이 돌아오지 않아 가벼운 캐치볼에도 손목에 통증이 있었지만, 왠지 커브만큼은 통증 없이 던질 수 있었다. 재활 훈련에서는 커브만을 사용한 멀리던지기 캐치볼을 계속했고, 처음에는 컨트롤이 불안정했지만 점차 요령을 터득하여 이마나카의 결정구라고 할 수 있는 슬로 커브를 습득하게 되었다.[68][69]

슬로 커브는 집게손가락가운뎃손가락을 공의 중심에서 벗어나도록 실밥에 걸고, 매우 느슨하게 잡아서 엄지는 붙일 정도로 하여 던졌다. 손목을 비틀지 않고 집게손가락과 엄지 사이에서 쏙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으로 얼굴 앞에서 릴리스하여 던졌으며, 베이스 위에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듯한 이미지로 몸쪽, 바깥쪽으로 구분해서 던질 수 있었다.[72]

타자 입장에서는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날 만큼 높은 궤도에서 떨어져 오는 것처럼 보였고, 포수 미트에 들어가기 전에 공회전하여 멈추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한다.[68] 이 때문에 타자는 허리가 빠지는 경우가 많았고, 토머스 오말리를 비롯한 외국인 타자들이 특히 슬로 커브를 상대하기 까다로워했다.[72] 하라 다쓰노리에게는 8 ~ 9구 연속으로 커브만을 던졌을 때 모두 파울이 될 정도로 슬로 커브는 파울을 유도하거나 카운트를 유리하게 잡을 때에도 효과적이었다. 또한 반발력이 없기 때문에 맞아도 멀리 날아가지 않고,[91] 구속이 느리기 때문에 타자가 반드시 반응하는[69] 등 사용하기 편리한 공이었다고 한다.

5. 2. 2. 포크볼

손가락이 짧고 벌리는 것도 좁았기 때문에 확실하게 볼을 끼워 던지는 포크볼을 배우는 건 포기했다. 그러나 1989년 추계 스프링 캠프에서 공을 얕게 쥐는 스플릿 핑거 패스트볼 계통의 포크볼을 습득하여 1991년경부터 사용하게 됐다. 낙차에는 편차가 있어서 고르지 않았지만 1경기 중에서 분명하게 떨어지는 것은 한 개 정도로 기본적으로 변화는 적었다.[92] 약간 높은 듯이 들어가면 좋은 공이 되지만 제구를 지나치게 신경 쓰면 팔의 흔들림으로 간파당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낮게 던지면서도 팔을 강하게 뿌리치는 것을 중시했다고 한다.[62]

공을 잡는 것이 얕기 때문에 포크볼은 개량하는 것이 어려워서 연습에서는 거의 던지지 않았다. 포크볼 자체는 통타를 당하는 경우가 많아 수뇌진으로부터 경기에서는 던지지 말라는 조언도 들었지만[91] 직구와 커브를 살리기 위해 계속해서 던졌다.[76] 1994년부터 맞붙게 된 오치아이 히로미쓰에게도 포크볼의 존재가 매우 컸다는 평가를 받았다.[76]

5. 3. 몸쪽 승부의 중요성

이마나카 신지는 바깥쪽 낮은 공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몸쪽 승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몸쪽으로 공을 던지는 것은 코스가 빗나가면 장타로 연결될 위험이 크기 때문에 투수에게 용기와 정교한 제구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마나카는 바깥쪽 승부만으로는 타자가 타석에서 발을 내딛고 공을 맞히거나 볼넷으로 인한 자멸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48]

6. 선수로서의 평가

이마나카 신지는 통산 74차례의 완투를 기록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66] 사구가 적어 1994년과 1995년에는 사구를 허용하지 않는 등의 성적을 남겼지만, "사구의 공포심이 없으면 타자는 4할을 칠 수 있다"라는 말도 있어서[96] 어느 정도는 사구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많이 등판하여 통산 25승을 올린 ‘요미우리 킬러’였지만,[66] 가네다 마사이치에나쓰 유타카의 3년 연속 요미우리전 5승 이상의 기록에는 미치지 못했다.

좌완 투수임에도 통산 피안타율에서 좌타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97] 25세까지 통산 85승을 올렸지만, 이후 부상으로 100승에 도달하지 못하고 은퇴했다. 같은 시기에 50세까지 현역으로 뛰면서 통산 219승을 거둔 팀 동료 야마모토 마사와는 대조적이지만, 주니치팬에게는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두 명의 에이스로서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다.

6. 1. 통산 성적

통산 74차례의 완투를 기록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66] 몸에 맞는 볼이 적어서 1994년과 1995년에는 단 한 개의 몸에 맞는 볼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몸에 맞는 볼의 공포심이 없으면 타자는 4할을 칠 수 있다”라는 말도 있어서[96] 어느 정도는 몸에 맞는 볼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또한 고의 사구도 적어, 선발 투수로서 풀 시즌을 던지면서 고의 사구가 단 한 개도 없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많이 등판하는 선발 로테이션으로 꾸려진 점도 있어서 요미우리와 상대할 때 통산 25승을 올린 ‘요미우리 킬러’였지만,[66] 가네다 마사이치에나쓰 유타카의 3년 연속 요미우리전에서 5승 이상의 기록에는 미치지 못했다.

또한 좌완 투수이면서도 통산 피타율은 좌타자를 상대할 때 2할 6푼 3리(1301타수 342안타), 우타자를 상대할 때는 2할 4푼 4리(3528타수 860안타)로 좌타자에게 피안타율이 더 높을 정도로 취약했다.[97] 이에 대해서 이마나카는 현역 은퇴 후인 2002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전의 좌타자는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공을 부담스럽게 생각했지만 현대의 좌타자는 좌완 투수의 슬라이더 등에도 잘 대응하고 있어서 좌완 투수 대 좌타자는 투수에게 유리하다는 일반론이 반드시 성립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옛날 좌타자는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가는 공을 어려워했지만, 요즘 좌타자는 좌완 투수의 슬라이더 등에도 잘 대응하면서 좌완 투수 대 좌타자가 투수에게 유리하다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반드시 성립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일본어 [97]

25세까지 통산 85승을 올리면서 그 후에 생긴 부상으로 100승에 도달하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었다. 같은 시기에 50세까지 현역 선수로 뛰면서 통산 219승을 거둔 팀 동료 야마모토 마사의 꾸준함과는 대조적이지만, 주니치팬에게 남긴 인상은 야마모토 못지않게 강한 것이 있으며 견고한 두 명의 에이스로서 오래도록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6. 2. 좌타자에게 약한 이유

좌완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통산 피안타율은 좌타자 상대 2할 6푼 3리(1301타수 342안타), 우타자 상대 2할 4푼 4리(3528타수 860안타)로 좌타자에게 더 약했다.[97] 이에 대해 이마나카는 은퇴 후인 2002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7. 타 선수와의 관계

오치아이 히로미쓰, 마에다 도모노리에게는 안타를 쉽게 맞는다는 이미지가 있어서 주자가 있을 때는 주위에 들릴 정도로 기합을 넣어 대결했고, 이 두 선수를 자신의 컨디션의 바로미터로 삼았다.[71] 투수 중에서는 구와타 마스미가 가장 인상에 남았는데, 그의 투구에는 방망이가 전혀 맞지 않았고 투수전에서 이긴 기억이 없을 정도로 상극이었다.[71] 나카무라 다케시를 주전 포수로 신뢰했으며, 은퇴 후 《선데이 드래건스》에서 나카무라의 전별 비디오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98]

7. 1. 오치아이 히로미쓰, 마에다 도모노리

오치아이 히로미쓰마에다 도모노리에게는 쉽게 안타를 맞는다는 이미지가 있어, 주자가 있는 상황 등에서는 주위에 들릴 정도로 기합을 넣어서 대결했다.[71] 이 두 사람이 타자로서 가장 인상에 남았으며 자신의 컨디션의 바로미터이기도 했다고 한다.[71]

7. 2. 나카무라 다케시

주전 포수를 맡았던 나카무라 다케시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서, 은퇴 후 출연한 《선데이 드래곤즈》에서 나카무라에게서의 전별 비디오를 보았을 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였다.[98]

8. 에피소드

이마나카 신지의 별명은 '츄-'(チュー) 또는 '이마츄'(イマチュー)이다.[1]

9. 상세 정보

이마나카 신지는 1989년부터 2001년까지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활약한 투수이다.

통산 12년 동안 233경기에 등판하여 187경기에 선발로 나왔으며, 74승 69패, 5세이브, 91완투, 16완봉, 평균자책점 3.15, 1129탈삼진을 기록했다.

이마나카 신지 투수 기록
연도소속팀등판선발완투완봉세이브승률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1989주니치10700140.20040.27151703032316.862.16
19903119611061.625144.2169125448567623.861.57
199136278412130.480193.01921059316766542.521.31
199211861820.80076.15281906617151.770.93
199331301431771.708249.01832059224767612.200.98
199428251421393.591197.01661842015668632.881.06
199525241531290.571189.01781845015072693.291.18
199625241121480.636179.21751357115375663.311.30
199710800220.50044.24251931823204.031.43
1998141400280.20062.16442815041375.341.49
19995100010.0008.0111116777.881.50
20017000000----11.0121601443.271.64
통산:12년233187741691695.5691395.113151154061511295394893.151.24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9. 1. 출신 학교

오사카 산업대학 고등학교 (현 오사카 토인 고등학교)

9. 2. 선수 경력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1989년부터 2001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9. 3. 지도자 경력

9. 4. 해설자 경력

NHK 야구 해설자(2002년 ~ 2011년, 2014년 ~ )와 주니치 스포츠 평론가(2002년 ~ 2011년)를 역임했다.[1]

9. 5.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수상 경력
다승왕 (1993년)
최다 탈삼진 (1993년)
사와무라 에이지상 (1993년)
베스트 나인 (1993년)
골든 글러브상 (1993년)
월간 MVP (1991년 8월)
IBM 플레이어오브더이어상 (1993년)
우수 JCB·MEP상 (1993년, 1995년)


9. 6. 개인 기록


  • 첫 등판: 1989년 5월 2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9차전(나고야 구장), 8회초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2이닝 1실점[1]
  • 첫 탈삼진: 상동, 8회초에 시노즈카 도시오로부터[1]
  • 첫 선발 등판: 1989년 5월 30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5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4이닝 3실점에서 패전 투수[1]
  • 첫 승리: 1989년 9월 17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2차전(나고야 구장), 5이닝 1실점[1]
  • 첫 완투 승리: 1990년 6월 2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8차전(나고야 구장), 9이닝 1실점[1]
  • 첫 세이브: 1990년 8월 2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차전(나고야 구장), 7회초 1사에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2와 2/3이닝 무실점[1]
  • 첫 완봉 승리: 1990년 8월 29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3차전(나고야 구장)[1]
  • 첫 홈런: 1996년 4월 23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4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3회초에 테리 브로스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1]
  • 통산 1000투구 이닝: 1995년 7월 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5차전(나고야 구장) ※역대 261번째[1]
  • 통산 1000탈삼진: 1996년 6월 27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4차전(나고야 구장), 5회초에 가네모토 도모아키로부터 ※역대 97번째[1]
  • 올스타전 출장: 4회 (1991년, 1993년 - 1995년) ※1996년에도 선출되었으나 출장 거부[1]

9. 7. 등번호

今中 慎二|이마나카 신지일본어의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등번호
번호사용 기간
141989년 ~ 2001년
712012년 ~ 2013년


10. 관련 정보

이마나카 신지는 NHK 프로 야구, 선데이 드래곤즈, 도데스카! 등의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저서로는 悔いは、あります。|후회는 있습니다.일본어, 中日ドラゴンズ論:"不気味"さに隠された勝利の方程式|주니치 드래건스론: ‘섬뜩함’에 숨겨진 승리의 방정식일본어 등이 있다.

10. 1. 출연 프로그램


  • NHK 프로 야구
  • 선데이 드래곤즈
  • 도데스카!

10. 2. 저서


  • 悔いは、あります。|후회는 있습니다.일본어 (더 마사다, 2002년 5월, ISBN 4883970787)
  • 中日ドラゴンズ論:"不気味"さに隠された勝利の方程式|주니치 드래건스론: ‘섬뜩함’에 숨겨진 승리의 방정식일본어 (베스트셀러스 (베스트 신서), 2010년 10월, ISBN 4584123047)

참조

[1] 웹사이트 【11月10日】2001年(平13) 沢村賞投手・今中慎二「自信がなくなった」 http://www.sponichi.[...] 2009-11-01
[2] 간행물 「惜別球人 6回 今中慎二『いいときも、悪いときもあった。でも気持ちよくできた13年間でした』」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12-10
[3] 간행물 「天才サウスポーの原動力は打倒・巨人の心意気!」 週刊ベースボール 1993-08-30
[4]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93-08-30
[5] 웹사이트 「嫌いだったんですよ、巨人が」中学生で乱闘騒動…無気力で受けた"入団テスト" https://full-count.j[...] 2023-11-17
[6] 뉴스 “おっさん”は8月天国に…愛弟子今中さんから中日・大野雄へ名将の教え マウンドに帽子置いた本当の意味 https://www.chunichi[...] 中日新聞社 2020-08-24
[7]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93-08-30
[8]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12-10
[9] Youtube ドラゴンズスペシャル https://twitter.com/[...]
[10] 간행물 「期待のドラフト1位クンの中間報告 今中慎二」 週刊ベースボール 1989-04-10
[11] 웹사이트 制度として無い『逆指名作戦』…中日は今中慎二の“一本釣り”にこうして成功した 2位で大豊獲得の会心ドラフト https://www.chunichi[...] 2024-04-20
[12] Youtube ドラゴンズスペシャル https://twitter.com/[...]
[13] 뉴스 読売新聞 1988-12-04
[14] 간행물 「オレに訊くな! ストレートとカーブの本格派左腕・今中慎二(元中日)に訊く フォークの使い方を教えて下さい」 野球小僧 2010-02-01
[15] 간행물 「人物ショートシヨート 開幕一軍て、本当に楽しいですネ! もはや左腕エースの扱い。星野監督は西本とあわせて30勝の皮算用」 週刊ベースボール 1990-04-23
[16] 뉴스 読売新聞 1990-03-02
[17] 간행물 「テクニカル・ポイント 中日・今中慎二 制球を気にしすぎて上体だけの投げ方に」 週刊ベースボール 1990-07-09
[18]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12-10
[19] 웹사이트 「怒られたけど、使ってくれた」 山本、中村、立浪、今中「4兄弟」が星野氏悼む https://www.daily.co[...] 株式会社デイリースポーツ 2022-11-17
[20] 간행물 「魔球伝説 『今中慎二のカーブを捕った』中村武志」 Sportiva 2007-08-01
[21] 간행물 「魔球伝説2008 本人が解説! カーブ 今中慎二 わざと不安定に握ることがコツ」 Sportiva 2008-07-01
[22] 뉴스 読売新聞 1993-02-06
[23]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12-10
[24] 간행물 Sportiva 2007-08-01
[25]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12-10
[26] 웹사이트 故障隠して登板も「真面目に投げろ」 つらかった痛烈野次…球速出ない異変に「嘘でしょ」 https://full-count.j[...] 2023-11-30
[27] 간행물 「にんげんドキュメント 野球浪漫 2回 今中慎二 天才サウスポーの孤独な闘い」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4-16
[28] 웹사이트 故障隠して登板も「真面目に投げろ」 つらかった痛烈野次…球速出ない異変に「嘘でしょ」 https://full-count.j[...] 2023-11-30
[29] 간행물 野球小僧 2010-02-01
[30] 간행물 「中日・今中が開幕を断念」 週刊ベースボール 1997-04-07
[31]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4-16
[32] 간행물 「遅すぎたエース復活 今中(中日)」 週刊ベースボール 1997-09-01
[33] 간행물 星野仙一と鈴木宗男 絡み合いすぎる人脈と金脈 深層レポート「知られざる素顔」第2弾 週刊文春 2002-06-13
[34] 뉴스 読売新聞 1997-12-07
[35] 뉴스 セ・リーグ 第7節 今中2勝、山崎猛打賞 継投竜、最後はサムソン 中日新聞 1998-05-17
[36] 뉴스 "セ・リーグ 中日が快勝" 東京新聞 1998-05-17
[37] 간행물 "こんなハズじゃなかった… 今中慎二 速球派か?軟投派か?今が勝負どころの元エース" 週刊ベースボール 1998-10-05
[38] 웹사이트 왜? 「年俸ダウン」なのに祝福ムード…契約更改で起きたまさかの“珍事” https://dot.asahi.co[...] 2021-11-23
[39]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4-16
[40]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04-16
[41] 간행물 "残留か?退団か?その去就が注目される人たち" 週刊ベースボール 2001-10-01
[42] 웹사이트 復活に苦心も「来年は契約できない」 肩は限界、阪神の誘い断念…選んだ“中日一筋” https://full-count.j[...] 2023-12-01
[43] 뉴스 読売新聞 2002-03-24
[44] 웹사이트 来季の契約について https://web.archive.[...] 2013-10-15
[45] 간행물 "今中慎二(復活かけて-背水の男たち)" 週刊ベースボール 1999-03-08
[46] 간행물 野球小僧 2010-02
[47] 간행물 野球小僧 2010-02
[48] 간행물 "レフティーの不思議 左対左の虚と実 左ピッチャーの秘密 左打者との対戦で何を考える? 今中慎二氏に聞く" 週刊ベースボール 2002-07-15
[49] 서적 悔いは、あります。 ザマサダ 2002
[50] 간행물 "プロが公開『特上の握り』 変化球大図鑑 テクニカル・ポイント カーブ編 今中慎二" 週刊ベースボール 2004-06-07
[51]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2-07-15
[52]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02-07-15
[53] 기타 サンデードラゴンズ 2001年11月11日放送 2001-11-11
[54] 서적 ベースボール・レコード・ブック1997 ベースボール・レコード・ブック 1996-12
[55] 간행물 "‘석별구인 〈6회〉 이마나카 신지 -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기분 좋게 할 수 있었던 13년 간의 야구 생활은 즐거웠습니다’" 슈칸 베이스볼 2001-12-10
[56] 간행물 "‘천재 사우스포의 원동력은 타도 교진의 기상!’" 슈칸 베이스볼 1993-08-30
[57]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3-08-30
[58]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93-08-30
[59]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1-12-10
[60] 간행물 "‘기대되는 드래프트 1위 : 쿤의 중간 보고 - 이마나카 신지’" 슈칸 베이스볼 1989-04-10
[61]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88-12-04
[62] 간행물 "‘내게 묻지마! 스트레이트와 커브의 본격파 좌완 이마나카 신지(전 주니치)에게 포크볼 사용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야큐코조 2010-02
[63] 간행물 "‘인물 쇼트쇼트 - 개막 1군에서 정말 즐겁네요! 이미 좌완 에이스의 취급. 호시노 감독은 니시모토와 합쳐서 30승을 예상’" 슈칸 베이스볼 1990-04-23
[64]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90-03-02
[65] 간행물 "‘테크니컬 포인트 - 주니치 이마나카 신지 : 제구에 너무 신경을 써서 상체만의 투구 방법으로’" 슈칸 베이스볼 1990-07-09
[66]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1-12-10
[67] 웹인용 "「怒られたけど、使ってくれた」 山本、中村、立浪、今中「4兄弟」が星野氏悼む" https://www.daily.co[...] 주식회사 데일리 스포츠 2018-01-07
[68] 간행물 "‘마구 전설 : “이마나카 신지의 커브를 잡았다” - 나카무라 다케시’" Sportiva 2007-08
[69] 간행물 "‘마구 전설 2008 - 본인이 해설! 〈커브〉 이마나카 신지 : 일부러 불안정하게 잡는 것이 요령’" Sportiva 2008-07
[70]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93-02-06
[71]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1-12-10
[72] 간행물 《Sportiva》 2007-08-01
[73]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1-12-10
[74] 뉴스 【11月10日】2001年(平13) 沢村賞投手・今中慎二「自信がなくなった」 http://www.sponichi.[...] 스포츠 닛폰
[75] 간행물 ‘인간 다큐멘터리 - 야구 낭만(2회) 이마나카 신지 : 천재 사우스포의 고독한 투쟁’ 《슈칸 베이스볼》 2001-04-16
[76] 간행물 《야큐코조》 2010-02-01
[77] 간행물 ‘주니치의 이마나카가 개막을 단념하다’ 《슈칸 베이스볼》 1997-04-07
[78]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1-04-16
[79] 간행물 ‘너무 늦었던 에이스 부활 - 이마나카(주니치)’ 《슈칸 베이스볼》 1997-09-01
[80] 뉴스 요미우리 신문 1997-12-07
[81] 뉴스 セ・リーグ 第7節 今中2勝、山崎猛打賞 継投竜、最後はサムソン 주니치 신문 1998-05-17
[82] 뉴스 セ・リーグ 中日が快勝 도쿄 신문 1998-05-17
[83] 간행물 ‘이럴 방책은 아니었다… 이마나카 신지: 속구파인가? 기교파인가? 지금이 승부처인 예전 에이스’ 《슈칸 베이스볼》 1998-10-05
[84] 웹인용 なぜ? 「年俸ダウン」なのに祝福ムード…契約更改で起きたまさかの“珍事” https://dot.asahi.co[...] 2021-11-23
[85]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1-04-16
[86]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1-04-16
[87] 간행물 ‘잔류인가? 퇴단인가? 그 거취에 주목받는 사람들’ 《슈칸 베이스볼》 2001-10-01
[88] 뉴스 요미우리 신문 2002-03-24
[89] 웹사이트 관련 내용 http://dragons.jp/ne[...] 주니치 드래건스 공식 홈페이지 2013-10-15
[90] 간행물 ‘이마나카 신지(부활에 걸어서 - 배수의 진을 친 남자들)’ 《슈칸 베이스볼》 1999-03-08
[91] 간행물 《야큐코조》 2010-02-01
[92] 간행물 《야큐코조》 2010-02-01
[93] 간행물 ‘왼손잡이의 불가사의 - 왼쪽 대 왼쪽의 허와 실 : 좌완 투수의 비밀, 좌타자와의 대결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이마나카 신지에게 듣는다’ 《슈칸 베이스볼》 2002-07-15
[94] 서적 후회는 있습니다. 더 마사다 2002
[95] 간행물 ‘프로가 공개한다 〈특상의 쥠〉 변화구 대도감 - 테크니컬 포인트 : 커브 편 - 이마나카 신지’ 《슈칸 베이스볼》 2004-06-07
[96]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2-07-15
[97]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02-07-15
[98] 방송 《선데이 드래건스》 2001-11-11
[99] 서적 《베이스볼 레코드북 1997》 1996-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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