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바리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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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마바리번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도도 다카토라가 이요국 이마바리 지역에 봉해지면서 성립되었다. 도도 가문이 이마바리성을 건설하고 조카마치를 정비했으나, 1608년 도도 다카토라가 다른 지역으로 전봉된 후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이 번을 통치하게 되었다. 막부 말기에는 서양식 군제를 도입하고 메이지 유신 시기 신정부군에 협력하여 폐번치현으로 이마바리현이 되었다가 에히메현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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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요국의 번 - 니야번
니야번은 1623년 가토 나오야스가 1만 석을 분지받아 성립된 번으로, 번내 분치임에도 다이묘로 인정받은 유일한 사례이며 폐번치현 이후 에히메현에 편입되었고 진야는 린포카쿠로 남아있다. - 이요국의 번 - 오즈번 (이요국)
오즈번은 에도 시대 이요국에 존재했던 번으로, 와키자카 가문이 다스리다 가토 가문으로 교체되었고, 막부 말기 존왕양이 사상을 지지했으며 이로하마루 사건과 관련되어 폐번치현 이후 에히메현에 편입, 가토 가문은 자작 작위를 받았다. - 도도씨 - 이마바리성
이마바리성은 1604년 도도 다카토라가 건설하여 에도 시대에는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의 거성이었으나, 메이지 시대 폐성령으로 해체되었고 현재는 재건된 천수각과 일부 성벽, 해자가 남아 있는 일본 100대 명성이다. - 도도씨 - 도도 다카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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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수군은 세토 내해에서 활동한 일본 해상 세력으로, 인노시마, 구루시마, 노지마의 세 가문이 주축을 이루며 남북조시대부터 제해권을 장악하고 해상 경호와 통행세 징수 등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해적 정지령 이후 쇠퇴하였다.
이마바리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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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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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이마바리 번 (일본어: 今治藩) |
유형 | 번 |
시대 | 에도 시대 |
위치 | 이요 국 |
통치 | |
정치 체제 | 번 |
번청 | 이마바리 성 |
다이묘 | 알 수 없음 |
역사 | |
성립 | 1636년 |
폐지 | 폐번치현 |
사건 | 폐번치현 (1871년) |
행정 구역 | |
오늘날의 위치 | 에히메현 |
문장 | |
문장 유형 | 몬 |
문장 | 히사마쓰-마쓰다이라 가문 |
![]() |
2. 역사
1600년, 도도 다카토라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공로로 우와지마번의 다이묘로서 영지를 20만 코쿠로 증봉받고, 거점을 이마바리의 고쿠분야마성으로 옮겨 이마바리번을 세웠다. 그러나 고쿠분야마성은 중세 시대의 산성이었기 때문에 조카마치를 건설하기에 불편한 위치였으므로, 1602년에 근대적인 성의 건설을 시작하여 1년 뒤 이마바리성이 완공되었다. 1608년에는 이세국과 이가국을 다스리는 쓰번으로 전봉되었고, 양자 도도 다카요시는 이마바리성을 중심으로 하는 2만 코쿠의 잔여 영주가 되었다. 1635년 도도 다카요시는 이가국 나바리로 전봉되었다.
같은 해 도쿠가와 막부는 마쓰다이라 사다유키를 구와나번에서 이요마쓰야마번으로 옮기고, 그의 동생 마쓰다이라 사다후사를 이세 나가시마성 7,000 코쿠에서 이마바리 다이묘로 3만 코쿠로 증봉시켰다. 1665년, 사다후사는 에도성의 성주로 임명되어, 무사시국, 시모사국, 히타치국에서 1만 코쿠를 추가로 봉록받아 총 4만 코쿠가 되었다.
사다토키는 유언으로 그의 동생에게 간토 지방에 5,000 코쿠를 남겨 이마바리번의 영지를 3만 5,000 코쿠로 줄였다. 1698년, 간토의 5,000 코쿠의 토지는 에히메현 우마군의 5,000 코쿠와 교환되었다. 번의 재정을 뒷받침하는 산업으로는 소금, 면화, 고구마 등이 번의 전매품이었다. 1805년, 7대 다이묘 마쓰다이라 사다요시는 번교의 전신인 "고쇼바"를 설립했고, 1807년 "고쇼바"는 확장되어 "가쓰메이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863년 바쿠마츠 시대에 10대 다이묘 마쓰다이라 사다노리는 서양식 화기로 번의 군대를 개혁하고 해안에 포대를 건설했다. 그는 또한 막부와 존왕양이 지사 사이를 중재하려 했고, 오랫동안 교토에 머물렀다. 1865년 제2차 조슈 정벌 동안, 그는 막부의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판단하여 조정에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그는 재빨리 교토에 군대를 파견하여 교토 고쇼를 경비했다. 그 후 보신 전쟁에서 번은 메이지 정부 군에 복무했다. 이것은 막부를 계속 지원했던 이요마쓰야마번과는 매우 다른 입장이었다.
1868년, 마쓰다이라 사다노리는 마쓰다이라 성을 버리고 "히사마쓰 사다노리"라고 칭했다. 1871년, 이마바리번은 폐번치현으로 "이마바리현"이 되었다. 그 후 마쓰야마현과 세키테츠현을 거쳐 에히메현에 병합되었다. 1884년, 히사마쓰 사다노리는 화족의 자작이 되었다.
2. 1. 번의 성립과 도도 가문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운 도도 다카토라는 도요토미 시대 이요 국 이타지마(후의 우와지마시)에서 7만 석을 영유하고 있었으나, 이 전투의 공으로 20만 석으로 가증되었다. 동시에 이마바리 시내에 있던 고쿠분 산성으로 옮겨 이마바리 번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고쿠분 산성은 중세 산성이었기 때문에 조카마치 조성에 불편함이 있었다. 이에 1602년(게이초 7년) 이마바리포에 근세성곽 건설을 시작하고 이듬해 조카마치 건설에 착수하여, 1604년(게이초 9년) 현재의 이마바리 시가지의 모습이 되는 성과 조카마치가 완성되었다.1608년(게이초 13년), 다카토라는 이가국・이세국에서 22만 석으로 가증 및 영지 교체되어 쓰번으로 전출되었다. 그러나 오치군 2만 석이 남겨져 양자인 다카요시가 이마바리 성주가 되었다. 이후 1635년(간에이 12년), 다카요시는 이가국 나바리로 영지가 교체되어 도도 씨의 지배는 종료되었다.
2. 2.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의 통치
1635년(간에이 12년), 마쓰다이라 사다후사가 이마바리번 3만 석의 번주로 부임하면서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1] 이 가문은 메이지 유신까지 이마바리번을 다스렸다.[1]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은 번의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소금, 면화, 고구마 등의 생산을 장려하고 전매 제도를 시행했다.[1] 1805년(분카 2년)에는 번교(藩校)의 전신인 '고쇼바'(講書場)가 설립되었고,[1] 1807년(분카 4년)에는 '가쓰메이칸'(克明館)으로 확장 개편되어 인재 양성에 힘썼다.[1]
2. 3.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
분큐 3년(1863년), 10대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리는 서양식 군제를 도입하고 해안 방어를 강화하는 등 번정 개혁을 단행했다. 사다노리는 막부와 존왕양이파 사이의 중재를 시도했으나, 게이오 원년(1865년) 제2차 조슈 정벌을 계기로 조정 측에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게이오 4년(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에서는 신정부군 측에 가담하여 교토 고쇼를 경비하고, 보신 전쟁에서 활약했다. 이는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했던 이웃의 이요마쓰야마번과는 대조적인 행보였다.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으로 이마바리번은 이마바리현이 되었고, 이후 에히메현에 편입되었다.3. 역대 번주
1600년부터 1608년까지 도도 다카토라가 이마바리번을 다스렸고, 1608년부터 1635년까지는 천령이었다.[1] 1635년 마쓰다이라 사다후사가 이마바리 번에 부임한 이후, 1871년까지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이 이마바리 번을 통치하였다.
3. 1. 도도 가문 (도자마 다이묘, 20만 석)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품계 | 고쿠다카 |
---|---|---|---|---|---|
1 | 다카토라 | 1600년 ~ 1608년 | 사콘에노쇼쇼(左近衛権少将), 사도노카미(佐渡守) | 종4위 하 (従四位下) | 200,000 석 |
3. 2.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 (후다이 다이묘, 3만 석 → 4만 석 → 3만 5천 석)
1635년 마쓰다이라 사다후사가 이마바리 번에 부임한 이후, 1871년까지 이마바리 번을 다스린 후다이 다이묘 가문이다.# | 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1 | 마쓰다이라 사다후사 | 1635년 ~ 1674년 | 3만 석 → 4만 석[1] |
2 | 마쓰다이라 사다토키 | 1674년 ~ 1676년 | 4만 석[1] |
3 |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 1676년 ~ 1702년 | 3만 5천 석[1] |
4 | 마쓰다이라 사다모토 | 1702년 ~ 1732년 | 3만 5천 석[1] |
5 | 마쓰다이라 사다사토 | 1732년 ~ 1763년 | 3만 5천 석[1] |
6 | 마쓰다이라 사다야스 | 1763년 ~ 1790년 | 3만 5천 석[1] |
7 | 마쓰다이라 사다요시 | 1790년 ~ 1824년 | 3만 5천 석[1] |
8 | 마쓰다이라 사다시게 | 1824년 ~ 1837년 | 3만 5천 석[1] |
9 | 마쓰다이라 가쓰쓰네 | 1837년 ~ 1862년 | 3만 5천 석[1] |
10 | 마쓰다이라 사다노리 | 1862년 ~ 1871년 | 3만 5천 석[1] |
- 마쓰다이라 사다후사 재임 중 영지를 가증받아 4만 석이 되었다.
-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재임 중 분할 영지로 인해 3만 5천 석이 되었다.
4. 주요 가신
이름 | 비고 |
---|---|
하토리 마사즈미 | |
하토리 마사노리 | |
하토리 마사타카 | |
하토리 마사미치 | |
하토리 마사히로 | |
하토리 마사요리 | |
하토리 마사토시 | |
하토리 이즈미 | |
하토리 소스이 | 이즈미의 양자 |
5. 영지
- 우마군 19개 마을
- 오치군 81개 마을
대부분의 한 시스템 영지와 마찬가지로, 이마바리번은 정기적인 지적 조사와 예상되는 농업 수확량을 기준으로 할당된 ''고쿠다카''를 제공하기 위해 계산된 여러 개의 분리된 영토로 구성되었다.[4][5]
참조
[1]
서적
江戸三百藩大全 全藩藩主変遷表付
Kosaido Publishing
2015
[2]
서적
藩と城下町の事典―国別
Tokyodo Printing
2004
[3]
서적
Historical and Geographic Dictionary of Japan
Tuttle (reprint) 1972
[4]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5]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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