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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1세 (카스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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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사벨 1세는 1451년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이사벨 데 포르투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무능한 이복 오빠 엔리케 4세 치세의 혼란 속에서 성장했으며, 토로스 데 귀산도 협정을 통해 왕위 계승권을 확보했다. 1469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하여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통합하는 기반을 마련했고, 레콩키스타를 완성하여 가톨릭 군주라는 칭호를 얻었다. 또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을 지원하고, 스페인 제국 건설의 토대를 다졌다. 정략결혼을 통해 스페인의 안정을 추구했으나, 자녀들의 불운으로 인해 왕위 계승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150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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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1세 (카스티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44세의 이사벨의 초상화
이사벨 1세의 익명 초상화, 기원후 1490년경
칭호가톨릭 여왕, 하느님의 종
재위1474년 12월 11일 – 1504년 11월 26일
대관식1474년 12월 13일
전임자엔리케 4세
후임자후아나 1세
공동 통치자페르난도 5세 (1475년부터)
배우자페르난도 2세 (1469년 결혼)
자녀이사벨, 포르투갈 왕비
후안 데 아스투리아스
후아나, 카스티야와 아라곤 여왕
마리아, 포르투갈 왕비
카탈리나, 잉글랜드 여왕
왕가트라스타마라 가문
아버지후안 2세
어머니이사벨 드 포르투갈
출생일1451년 4월 22일
출생지마드리갈 데 라스 알타스 토레스, 아빌라, 카스티야
사망일1504년 11월 26일
사망지메디나 델 캄포, 바야돌리드, 카스티야
매장지그라나다 왕실 예배당, 안달루시아, 스페인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이사벨 1세 서명
이사벨 1세의 서명
통치 정보
카스티야 여왕 및 레온 여왕전임: 엔리케 4세
계승: 후아나 1세
아라곤 왕비재위 기간: 1479년 1월 20일 – 1504년 11월 26일
상세 정보: 더 보기

2. 어린 시절

이사벨 1세는 1451년 4월 22일 마드리갈 데 라스 알타스 토레스에서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포르투갈의 이사벨라 사이에서 태어났다.[6] 이사벨은 이복 오빠 엔리케에 이어 왕위 계승 서열 2위였으나,[5] 1453년 남동생 알폰소가 태어나면서 3위로 밀려났다.[7] 1454년 아버지 후안 2세가 사망하고 엔리케 4세가 즉위하면서 이사벨과 알폰소는 국왕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고, 아레발로로 이주했다.[8][5][9]

아레발로에서의 생활은 혼란스러웠고 재정적으로도 어려웠다.[8] 이사벨의 아버지는 유언으로 자녀들의 재정적 안정을 보장했지만, 엔리케 4세는 이복 형제들을 억압하려는 의도나 무능함으로 인해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8]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사벨은 어머니의 감독 아래 종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9]

이사벨은 1482년 페드로 마르쿠엘로의 ''그라나다 정복 서사시''에 등장한다.


포르투갈의 호안나가 딸 호안나를 출산하려 하자, 이사벨과 알폰소는 세고비아 궁정으로 소환되어 국왕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으며 교육을 받았다.[5] 알폰소는 가정교사의 보살핌을 받았고, 이사벨은 여왕의 가신이 되었다.[10] 세고비아에서 이사벨의 생활 환경은 개선되어, 성에서 살며 읽기, 철자법, 쓰기, 문법, 역사, 산수, 미술, 체스, 춤, 자수, 음악, 종교 교육을 받았다.[11] 이사벨은 여유로운 생활을 누렸지만, 엔리케 4세는 그녀가 세고비아를 떠나는 것을 금지했다.

호안나가 엔리케 4세의 딸이 아니라 벨트란 데 라 쿠에바의 딸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귀족들은 엔리케 4세에게 항의하며 알폰소를 후계자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고, 심지어 알폰소에게 왕위를 찬탈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1467년 올메도 2차 전투가 벌어졌으나 무승부로 끝났다. 엔리케 4세는 알폰소를 추정 상속자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호안나 공주와의 결혼을 제시했다.[5][12] 그러나 알폰소는 1468년 7월 14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귀족들은 독살을 의심했다. 귀족들은 이사벨에게 반란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했지만,[5] 이사벨은 협상을 통해 토로스 데 기산도에서 엔리케 4세와 타협을 이루었다. 이 협정으로 이사벨은 추정 상속자로 지명되었고, 이복 오빠의 동의 없이 결혼하지 않되 강요받지도 않는다는 조건이 포함되었다.[5][14]

2. 1. 출생

카스티야-레온의 왕 후안 2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이사벨 데 포르투갈 (주앙 1세의 아들 아베이루 공작 주앙의 딸)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6]

이사벨이라는 이름은 할머니 이사벨 데 바르셀로스에게서 물려받은 이름이다. 포르투갈 왕가에는 이 외에도 같은 이름의 인물로, 13세기에 아라곤 왕가에서 포르투갈 왕 디니스 1세에게 시집가서 후에 성인으로 추대된 이사벨 데 아라곤(성 이사벨), 아폰수 5세의 첫 번째 왕비 이사벨 데 코임브라 (어머니의 사촌), 마누엘 1세의 누나 이사벨 데 비제우 (사촌, 어머니의 사촌인 브라간사 공작 페르난두 2세의 아내) 등이 있었다.

이사벨이 3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이복 오빠 엔리케 4세에 의해 어머니, 남동생 알폰소와 함께 추방되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8] 어머니 이사벨은 그 생활 때문에 정신 질환을 앓았고, 모자는 고생을 겪었다.[9]

2. 2. 정변과 유배

재상 루나의 최후 (1453년)


이사벨이 태어난 1451년 당시 카스티야 왕국재상 루나(Luna)의 권력 남용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였다.[142] 국왕 후안 2세는 무능하고 정치에 관심이 없어 모든 것을 루나에게 맡겼기에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였다. 루나는 젊은 시절부터 후안 2세를 대신하여 실권을 행사해왔는데, 힘이 비대해지자 점차 안하무인이 되었다.[142]

1447년 이사벨의 생모가 후안 2세와 혼인하였는데, 루나는 왕비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고 하였다. 심지어 국왕 부부의 결혼 생활마저 간섭하였다. 왕비는 루나를 제거하고 추락한 왕권을 바로잡기 위해 전처의 아들 엔리케 왕자(이사벨의 이복 오빠)와 협력하여 1453년 정변을 일으켰다.[143] 먼저 재상 루나를 잡아 참수시키고[144] 그의 측근들을 숙청하였다. 같은 해 알폰소 왕자가 태어났지만, 부왕 후안 2세는 총신 루나의 죽음을 슬퍼하다 이듬해 1454년 7월에 사망하였다.

어린 이사벨 1세와 그 가족


엔리케 4세(재위 1454~1474)로 즉위한 이사벨의 이복 오빠는 이사벨과 어머니, 남동생 알폰소를 궁정에서 추방했다.[145] 엔리케 4세는 이복동생들을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잠재적인 정적으로 간주했다.[146] 1453년 정변 때 보여준 계모 이사벨의 능력으로 볼 때, 언젠가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 남동생 알폰소에게 물려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기 때문이다.[147] 아레발로(Arévalo)라는 소도시로 추방당한 후 왕의 감시 속에 매우 궁핍하게 생활하였다.[146]

어머니 이사벨은 충격으로 인해 정신질환을 앓게 되었다.[148] 26세의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되었는데, 한때는 정치적 동맹으로 정변을 도왔던 자식(국왕 엔리케 4세)에게 배신당해 궁궐에서 추방당하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어머니 이사벨은 남동생 아폰수를 출산 후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배신의 충격으로 인해 그 증상이 점차 심해져 결국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계모가 정신병에 걸린 것이 분명해지자 정치적인 불안감이 사라진 엔리케 4세는 이복 동생 이사벨과 알폰소를 돌보기 시작했다. 살라망카 대학교의 유명 교수 안나를 아레발로(Arévalo)로 보내 이사벨이 공부할 수 있게 하였다.[149] 이사벨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한 이유는, 왕가의 공주는 정략결혼을 통해 국제 외교 무대에서 활용 가치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150] 1462년, 이사벨이 11살 되던 해에 엔리케 4세는 이사벨과 알폰소를 세고비아 궁궐로 소환하여 그곳에서 생활하도록 한 후 직접 감시하였다.[145]

2. 3. 내전

엔리케 4세의 통치는 전임 후안 2세와 마찬가지로 무능하여 카스티야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1462년에 왕비에게서 딸 후아나가 태어났지만, 친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일각에서는 국왕이 아닌 왕비와 친했던 벨트란 데 라 쿠에바 남작(1443~1492)이 친부라는 소문이 돌았고, 사람들은 후아나를 '벨트란의 아이'라는 뜻의 '벨트라네하(Beltrannja)'라고 불렀다.[144][151]

귀족들은 이사벨의 이복 오빠 엔리케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고 성불구자[152][153]라는 점을 들어 후아나의 왕위 계승권을 부정했다. 그 대신 알폰소 왕자를 왕위 계승자로 추대하려 했다. 엔리케 4세는 이복동생 이사벨과 알폰소를 다시 궁궐 밖 변방으로 추방했는데,[154] 이는 어린 후아나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이사벨 1세의 석상


1464년, 귀족들은 이사벨의 남동생 알폰소를 왕으로 옹립하고 반란을 일으켰다.[144] 후안 2세(1405~1454)와 그의 아들 엔리케 4세(재위 1454~1474)로 이어지는 50년이 넘는 무능한 통치에 귀족과 백성들은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내전은 4년간 이어지다가 1468년 알폰소 왕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끝이 났다.

알폰소의 지지자들(반 국왕파)은 이사벨에게 반란군의 구심점이 되어달라며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지만,[145] 이사벨은 “오라버니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라며 거절했다. 이는 이복오빠의 친딸인지 불분명한 후아나보다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기에 더 합당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었다. 이사벨은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엔리케 4세를 만나 협상을 시작했고, 1468년 9월 19일 토로스 데 귀산도(Toros de Guisando) 협정[155]을 맺었다. 이 협정을 통해 후아나 대신 이사벨이 차기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았으며, 이사벨은 원하지 않는 결혼을 거부할 수 있고 엔리케 4세가 동의하지 않는 결혼은 하지 않는다는 조항 등이 포함되었다.[156][145]

3. 결혼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을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혼인시키려 했다.[157] 이 혼인 협상에는 엔리케 4세의 딸 조안나와 아폰수 5세의 아들 주앙 2세가 결혼한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아폰수 5세 사후에 주앙 왕자와 조안나가 포르투갈과 카스티야를 상속받기로 되어 있었다.[158] 그러나 이사벨은 토로스 데 귀산도 협정에 명시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여 이 결혼을 거부하였다.[159]

이사벨은 아폰수 5세가 나이가 너무 많고, 이 결혼이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제한할 것이라고 판단했다.[160] 또한 혼인 협약에 따라 훗날 태어날 자식들이 권력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점도 우려했다.[158] 이후 엔리케 4세는 루이 11세의 동생인 베리 공작 샤를과의 혼담을 추진하는 등[161] 다소 무리한 혼사를 계속 추진하였다.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이 결혼을 통해 카스티야를 떠나고 왕위계승권을 잃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이사벨은 아라곤의 후안 2세와 비밀 협상을 통해 페르난도 왕자와의 결혼을 추진하였다.[162] 1469년 10월 초, 이사벨은 죽은 남동생 알폰소의 묘가 있는 아빌라에 간다는 핑계로 왕궁을 빠져나와 바야돌리드로 도망쳤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는 측근들과 함께 상인과 하인으로 위장하여[163] 비밀리에 카스티야에 잠입, 바야돌리드에 도착했다.[145] 두 사람은 1469년 10월 19일 바야돌리드에서 결혼했다.[164][165][166]

결혼 소식에 엔리케 4세는 격노하여 이사벨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했다.[167] 토로스 데 귀산도 협정에 따르면 이사벨은 엔리케 4세의 동의 없는 결혼은 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이 결혼은 카스티야와 아라곤 통일의 기초가 되었으며 레콩키스타를 완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4. 통치

이사벨 1세는 1474년 왕위에 올랐을 때, 카스티야는 오빠인 엔리케 4세의 통치로 인해 절망적인 상태였다. 엔리케 4세는 낭비가 심하고 왕국의 법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아, 당시 카스티야 주민들은 살인, 강간, 강도가 처벌 없이 자행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다.[65] 이 때문에 이사벨은 왕국을 개혁할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아야 했다.

이사벨 1세의 첫 번째 주요 개혁은 1476년 마드리갈 코르테스에서 경찰 조직인 라 산타 에르만다드(La Santa Hermandad, 성스러운 형제단)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중세 후기 ''에르만다드''는 도로와 시골을 순찰하고 범법자를 처벌함으로써 법과 질서를 규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남성 집단을 의미했다.[68] 그러나 이러한 형제단은 대개 군주에 의해 탄압되었다. 1476년 이전에는 대부분 지역에서 사법 제도가 왕실 관리보다는 반대파 귀족의 통제하에 있었다.[69]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476년 카스티야, 레온, 아스투리아스를 위한 일반적인 에르만다드가 설립되었다. 이 경찰 조직은 왕국에서 발생하는 범죄를 규제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로 구성되었으며, 100가구당 1800 마라베디의 세금으로 충당되었다.[70]

1481년 이사벨 1세는 갈리시아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두 명의 관리를 파견했다. 이 불안정한 지역은 후안 2세 시대부터 폭군 귀족들의 먹잇감이 되었다.[72] 이사벨 1세가 임명한 관리들은 1,500명 이상의 강도를 갈리시아에서 몰아내며 평화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73]

이사벨 1세는 즉위 초부터 왕실 재정 회복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1480년 톨레도 코르테스는 엔리케 4세 치세 동안 양도된 토지와 임대료를 회수하는 것이 재정 개혁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결론 내렸다. 많은 귀족들이 토지에 대해 막대한 금액을 지불해야 했지만, 왕실 금고는 풍족해졌다. 이사벨의 유일한 조건은 교회, 병원, 빈민에게 주어진 선물은 철회하지 않는 것이었다.[75] 또한 이사벨은 왕실 조폐소에 대한 독점권을 확립하고 주화의 법적 기준을 정했다. 조폐소들을 폐쇄하고 화폐 생산에 대한 왕실 통제를 통해 왕국 재정을 관리하는 능력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회복했다.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는 각자 왕국에서 새로운 정부 및 행정 제도를 거의 설립하지 않았다. 특히 카스티야에서 그들의 주요 업적은 후안 2세엔리케 4세 통치 기간 동안 존재했던 제도를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한 것이었다.[76]

페르난도와 이사벨과 그들의 신하들


전통적으로 카스티야 통치자들의 주요 자문 기구는 왕립 평의회였다. 1480년 톨레도 코르테스에서 이사벨은 왕립 평의회에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이전보다 전문 행정가들에게 더 많이 의존하기 시작했으며, 평의회는 재편되어 한 명의 주교, 세 명의 '카바예로스'와 여덟 또는 아홉 명의 변호사가 봉사하도록 정해졌다. 귀족들은 더 이상 국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환영받았다.

이사벨은 또한 군주로서 자신과 신하들 사이에 개인적인 관계를 제공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매주 금요일 시간을 정해 직접 사람들의 불만을 들었다. 국무원은 개혁되어 국왕과 여왕이 주재했다. 이사벨이 코르테스를 더욱 강력하게 만든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통치 기간 동안 코르테스는 정치적 권력을 잃었다. 이사벨과 그녀의 남편은 비의회 정부 방향으로 나아갔고 코르테스는 거의 수동적인 자문 기구가 되었다.[83]

톨레도 코르테스의 개혁 이후, 여왕은 법학자 알폰소 디아스 데 몬탈보에게 법적 폐기물을 정리하고 포괄적인 법전을 엮는 작업을 맡겼다. 4년 후 '오르데난사스 레알레스'가 완성되었다.[84]

후안 데 플란데스의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 (c. 1500–1504)


이사벨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부터 가톨릭 군주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스페인의 물리적, 영적 통일을 위해 종교 재판을 제도화했다. 1499년 무슬림 봉기 이후 그라나다 조약이 파기되었고, 무슬림들은 기독교도가 되거나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사벨의 고해 사제 시스네로스는 톨레도의 대주교로 임명되어[104] 스페인의 종교 기관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사벨과 그녀의 남편은 제국을 건설했고, 말년에는 행정과 정치에 몰두했다. 왕위 계승에 관심을 가지고 스페인 왕실을 유럽의 다른 통치자들과 연결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맏딸과 맏아들에 대한 계획은 실패했다. 외아들 아스투리아스 공 존은 결혼 직후 사망했고, 딸 아라곤의 이사벨은 아들 미구엘 다 파스를 낳다 사망했으며, 미구엘도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결국 이사벨 1세의 왕관은 셋째 자녀 호아나와 사위 펠리페 1세에게 넘어갔다.[106]

4. 1. 카스티야 왕위 계승전

카스티야의 엔리케 4세가 1474년 12월에 사망하자, 그의 이복동생인 이사벨 1세와 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 사이에 왕위 계승 다툼이 벌어졌다.[168] 후아나는 엔리케 4세의 친딸이 아니라는 의혹이 있었는데, 엔리케 4세는 성불구자로 알려져 있었고,[152] 후아나의 생부는 초대 알부케르크 공작 벨트랑(1443~1492)이라는 소문이 있었다.[169] 그러나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는 카스티야의 왕권을 노리고 후아나와 결혼한 후,[170] 1475년 5월에 카스티야를 침공했다.

1476년 3월, 이사벨 1세의 남편 페르난도 2세는 토로 전투에서 승리하며 승기를 잡는 듯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주앙 왕자가 지원군을 이끌고 오면서 양측은 다시 대치했고, 지리한 공방전이 이어졌다.[171] 육지와 해상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카스티야는 계속 밀렸다.[172] 3년간의 전쟁 끝에, 양측은 포르투갈의 알카소바스에서 만나 종전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1479년에 체결된 알카소바스 조약은 대서양에서 포르투갈에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지만, 이사벨 1세는 이 조약을 통해 카스티야의 왕위를 인정받고 전쟁을 종결지었다.

여왕 이사벨의 선포


1474년 12월 12일, 마드리드에서 엔리케 4세의 사망 소식(12월 11일)이 세고비아에 전해지자,[28] 이사벨은 세고비아 알카사르 성벽 안으로 피신하여 지지를 확보했다. 다음 날, 이사벨은 카스티야와 레온의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사벨의 통치는 순탄치 않았다. 엔리케 4세가 이사벨을 후계자로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가 정당한 여왕이라고 주장하는 세력이 있었다.[29] 이들은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후아나를 결혼시켜 카스티야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30]

1470년의 서유럽


1475년 5월, 아폰수 5세와 그의 군대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플라센시아에서 후아나와 결혼했다.[31] 이후, 카스티야 왕위 계승을 위한 전쟁이 벌어졌다. 1476년 3월 1일, 토로 전투에서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지만,[32][33][34] 불확실한 결과에도 불구하고,[43][44] 이 전투는 이사벨 1세에게 정치적 승리를 안겨주었다.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의 지지 세력은 해산되었고, 포르투갈 군대는 카스티야를 떠났다.

역사가 후스토 L. 곤잘레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두 군대는 토로에서 마주쳤고, 승패를 알 수 없는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페르디난드는 포르투갈군이 궤멸된 대승을 알리는 소식을 보냈고, "라 벨트라네하"의 일파는 해산되었으며 포르투갈군은 왕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49]

이사벨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1476년 4월–10월에 마드리갈-세고비아에서 의회를 소집했다.[50] 이 자리에서 그녀의 딸 이사벨이 카스티야 왕위 상속인으로 서약받았다.

같은 해 8월, 이사벨은 세고비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직접 진압하며 통치자로서의 능력을 증명했다.[51] 1478년 6월 30일, 아들 아스투리아스 공작 후안의 출생으로 이사벨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한편, 카스티야와 포르투갈 함대는 대서양과 기니의 부를 놓고 기니 전투를 벌였다.[52][53] 이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통해 신대륙 발견으로 대서양의 새로운 균형을 이루게 하여 카스티야를 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했다.

형 왕에게 자녀가 없었으나 후아나라는 여자아이가 태어났지만, 친부 논란으로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다. 일부 카스티야 귀족들은 이사벨과 알폰소를 다음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1464년 알폰소에게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가 수여되었고, "국왕 알폰소 12세"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1468년 알폰소의 죽음으로 상황이 종료되었다. 알폰소의 지지자들은 이사벨을 다음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지만, 이사벨은 "형이 살아있는 동안 다른 왕을 옹립해서는 안 된다"라며 거절했다.

이사벨은 아라곤-카탈루냐 왕국의 왕자 페르난도와 몰래 만나 결혼했다. 1474년에 엔리케 4세가 사망하고, 이사벨은 남편 페르난도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

1476년 3월, 토로 전투에서 포르투갈 왕 아폰수 5세에게 승리하고, 1479년 9월에 알카소바스 조약을 체결하여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시켰다.

1479년 1월, 페르난도가 아버지 후안 2세의 사망으로 아라곤 왕위를 계승하면서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 즉 스페인 왕국(히스파니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4. 2. 통합 왕국의 탄생

1479년 시아버지 후안 2세가 죽자 남편 페르난도 2세는 아라곤의 왕위를 계승하였고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 즉 스페인(에스파냐) 왕국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스페인은 아직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군주끼리 결혼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군주의 공동통치제 성향을 띠고 있었다. 정치(행정, 입법, 사법 등)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완전한 통합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아직도 제각기 두 군주의 통치를 받았다. 이는 훗날 이사벨이 죽은 후에 상속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64] 이사벨은 자신은 왕비가 아니라 여왕이며, 페르난도보다 더 연상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4. 3. 레콩키스타 완성

1492년 1월, 이베리아반도 남부에 남아있던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을 제압하여, 800년에 걸친 레콩키스타를 마무리 지었다. 당시 무슬림과의 전쟁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사벨은 전장을 누비는 남편을 위해 군자금과 물자 조달 등에 국력을 쏟아부었다.[64] 레콩키스타가 끝나갈 무렵, 이사벨과 페르난도에게 남은 곳은 그라나다뿐이었다. 그라나다 에미레이트는 13세기 중반부터 무슬림 나스르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다.[85] 자연 방벽과 요새화된 도시의 보호를 받으며 레콩키스타의 긴 과정을 견뎌냈다. 1482년 2월 1일, 국왕과 여왕은 메디나 델 캄포에 도착했고, 이것이 일반적으로 그라나다 전쟁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전쟁 참여가 처음부터 분명했던 반면, 그라나다의 지도부는 분열되어 통일된 전선을 제시하지 못했다.[8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나다를 정복하는 데는 10년이 걸렸고, 1492년에 정점에 달했다.

스페인 군주는 여러 유럽 국가에서 병사들을 모집했고, 최신 최고의 대포로 포병을 개선했다.[87] 그들은 체계적으로 왕국을 조각조각 점령해 나갔다. 1485년에는 론다를 포위했는데, 집중적인 포격으로 단 2주 만에 항복했다.[88] 이듬해 로하가 점령되었고, 무함마드 12세가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1년 후, 말라가가 함락되면서 무슬림 나스르 왕국의 서부 지역이 스페인에게 넘어갔다. 동부 지역은 1489년 바자가 함락된 후 무너졌다. 그라나다 포위전은 1491년 봄에 시작되었고, 무함마드 12세는 마침내 그해 말에 항복했다. 1492년 1월 2일,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그라나다에 입성하여 도시의 열쇠를 받았고, 주요 모스크는 교회로 봉헌되었다.[89]

프라디야의 '그라나다 항복'(오른쪽 말에 탄 사람이 이사벨)


전쟁 동안 이사벨은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의 능력과 기력을 알아보고 그를 협상 대표 중 한 명으로 임명했다. 그녀의 후원 아래, 데 코르도바는 혁신적인 군사 경력을 쌓아 떠오르는 스페인 군대의 조직과 전술에 혁명을 일으키며 전쟁의 본질을 바꾸고 유럽의 권력 균형을 변화시켰다.

그 위업 덕분에 1496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부터 칭송받은 두 사람은 가톨릭 공동왕(''Los Reyes Católicos'')이라는 칭호를 하사받게 된다. 이후 이사벨은 ‘가톨릭교도 이사벨’(''Isabel la Católica'')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64]

4. 4. 콜럼버스 후원

콜럼버스의 항해 경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귀환; 페르디난드 2세와 이사벨 1세 앞에서 알현하는 모습


이사벨 1세는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을 지원했다. 그 덕분에 콜럼버스는 1492년 10월 12일에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귀국한 후 스페인포르투갈은 영토 분쟁에 휩싸였다. 분쟁은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체결하며 원만하게 마무리되었다.[173] 또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인해 훗날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 개척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이사벨 1세의 생전에는 기대와 달리 경제적인 큰 실익은 없었다. 추가적으로 이루어진 3차례 항해에서 콜럼버스가 말한 것처럼 많은 금이 발견되지 않았고 향신료도 가지고 오지 못했다.[174] 콜럼버스가 원주민들에게 잔혹한 짓을 하거나 살육을 행하자 이를 심하게 문책하기도 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통해 신대륙 발견으로 대서양의 새로운 균형을 이루게 하여 카스티야를 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했다. 콜럼버스가 첫 항해(1492년)에서 받은 명령에서 알 수 있듯이, "[가톨릭 군주]는 알카소바스 분할에서 서명된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으며, 따라서 콜럼버스에게 카나리아 제도의 위도선을 따라 항해하도록 요구했다."[64] 이처럼, 스페인 군주는 서쪽으로의 콜럼버스 항해를 후원함으로써, 남은 유일한 팽창 경로를 시도했다.

레콩키스타가 끝나갈 무렵 이사벨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탐험을 후원하기로 결정한다. 그라나다를 점령한 지 불과 3개월 만이었다. 이사벨 1세 여왕은 서쪽으로 항해하여 동인도에 도달하려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탐험을 후원하기로 동의했다(콜럼버스에 따르면 2,000마일 거리).[90] 국왕은 신하에게 양보하는 의미로 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91]

콜럼버스의 탐험대는 1492년 8월 3일에 출발하여 10월 12일에 신세계에 도착했다.[91] 그는 이듬해에 돌아와 국왕에게 자신의 발견을 보고했으며, 원주민과 금을 데리고 영웅적인 환영을 받았다. 콜럼버스는 카스티야 여왕의 후원을 받았지만, 재무 기록에 따르면 그의 첫 번째 항해가 완료된 후인 1493년까지 그에게 왕실 지급이 없었다.[92] 그 후 스페인은 황금 시대의 탐험과 식민지화—스페인 제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이사벨 1세와 페르디난드 2세는 유럽 외 지역의 지구를 포르투갈의 주앙 2세 국왕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포르투갈은 남아메리카가 포르투갈의 영향권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스페인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주앙 2세 국왕은 포르투갈을 위해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사벨 1세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삼는 것을 반대했다. 그녀는 카나리아 제도 (소수의 원주민이 거주)에서 시행된 최근 정책을 따라 원주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왕실 입장을 정했는데, 이 정책은 모든 사람이 카스티야 왕관의 신하이며 대부분의 상황에서 노예가 될 수 없다고 명시했다. 그녀는 콜럼버스의 원주민 노예화에 분노했고, 원주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왕실 입장을 정했다.[94] 전쟁 포로이거나 인육 섭취 또는 항문 성교를 하는 경우를 포함하여, 노예가 될 수 있는 몇 가지 상황이 있었다.[95]

콜럼버스가 1,200명을 체포한 사건 이후,[96] 이사벨은 그들을 돌려보내고 콜럼버스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이사벨은 정복과 복음화가 한 사람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알론소 데 오헤다, 후안 데 라 코사, 빈센테 야녜스 핀손, 디에고 데 레페 또는 페드로 알론소 니뇨가 이끄는 다른 탐험대의 범위를 넓혔다.[97]

이사벨은 미래에 자신의 노력이 되돌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유언에서 후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이 그들의 인격과 재산에 어떠한 잘못도 받지 않도록 하고, 오히려 그들을 잘 공정하게 대하며, 만약 그들이 어떤 잘못을 받았다면, 그것을 바로잡아 주도록 하라."[98][99][100]

4. 5. 알함브라 칙령

1492년 3월, 이사벨 1세는 스페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강제 개종하거나 4개월 안에 떠날 것을 명령했다.[175] 오랜 전쟁으로 부족해진 국고를 채우고 공신들에게 줄 재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유대인 재산을 수탈하고자 했다.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하고 국외로 반출하는 것까지 보장했지만, 짧은 4개월 안에 처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시 스페인 인구는 약 1000만 명이었는데, 떠난 유대인은 17만 명(1.7%)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상공업에 종사했고 금융·유통망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방 이후 스페인 경제가 침체하기 시작했다.[176] 이때 상당수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포르투갈 주앙 2세의 도움으로 포르투갈로 이주하였다.[177]

스페인에서 가톨릭 종교 재판이 시작되고, 도미니코회 수사 토르케마다가 초대 심문관으로 임명되면서, 가톨릭 군주들은 종교적, 국가적 통일 정책을 추진했다. 1492년 3월 31일, 유대인 추방을 위한 알람브라 칙령이 발표되었다.[101] 유대인들은 7월 말까지(4개월) 국외로 떠나야 했으며, 금, 은, 돈, 무기, 말을 가지고 갈 수 없었다.[101] 전통적으로 20만 명의 유대인이 스페인을 떠났다고 알려졌지만, 최근 역사가들은 총 8만 명의 유대인 인구 중 최대 4만 명이 떠났고 나머지는 개종했다고 밝혔다.[102]

4. 6. 혼인 동맹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사벨은 큰 딸 이사벨을 그와 혼인시켰다. 그러나 이 혼인에는 포르투갈 내 유대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로 인해 1506년 리스본에서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고, 약 7,000명의 유대인이 희생되었다.[178] 막내딸 캐서린은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와 혼인하여 양국 관계를 강화했다. 왕세자 아서가 결혼 후 사망했지만, 캐서린은 다시 헨리 8세와 재혼했다.

둘째 딸 후아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미남공 펠리페와 혼인했다. 이 결혼은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전쟁을 일으키자,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이루어졌다.[179] 이 결혼을 통해 훗날 카를 5세가 태어났다.

1497년, 합스부르크 가문과는 이중 결혼을 했다. 후안 왕태자가 결혼 직후 사망하고, 차녀 후아나는 미남왕 펠리페 1세와의 부부 관계에 고통받아, 후에 정신 질환을 앓게 된다. 1498년에 장녀 이사벨이 재혼 후 산욕으로 사망하고, 그 유아 미겔도 1500년에 요절했기 때문에, 다음 왕위는 후아나의 남편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계승되는 것이 확정된다.

1501년 11월에는 막내딸 카탈리나가 잉글랜드의 아서 왕자와 결혼했지만, 이듬해 4월에 사별한다. 이사벨은 이탈리아 전쟁에서의 잉글랜드의 지원을 기대하며, 카탈리나를 잉글랜드에 남겨두었다. 1504년, 제2차 이탈리아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유로, 카탈리나와 아서의 동생 헨리 왕자와의 재혼을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비공개를 조건으로 허락받았지만, 곧 그것을 번복하고, 카탈리나의 장래 잉글랜드 왕비의 지위를 확보했다.

5. 사망

이사벨 1세는 1504년 9월 14일 공식적으로 정부 업무에서 물러났고, 같은 해 11월 26일 메디나 델 캄포 왕궁에서 사망했다.[109] 1497년 아들 아스투리아스 공자 후안, 1496년 어머니 포르투갈의 이사벨, 1498년 딸 아스투리아스 공주 이사벨의 죽음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 페르난도, 딸 후아나 및 다른 친척들과 함께 손자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건설한 그라나다왕실 예배당에 안장되었다.[5]

유언을 남기는 이사벨 여왕 (에두아르도 로사레스作, 1864년 그림)

6. 가족 관계

이사벨과 페르난도와 그들의 딸 후아나, 1482년경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7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 중 5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116]

  • 이사벨 (1470–1498)[117]은 아폰수와 결혼했으나, 후사가 없었다.[118] 이후 마누엘 1세와 결혼하여 미겔 다 파즈를 낳았으나, 미겔 다 파즈는 두 살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 1475년 5월 31일 세브레로스에서 유산된 아들.
  • 후안 (1478–1497), 아스투리아스 공.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대공녀와 결혼했으나, 생존한 자녀는 없었다.[119]
  • 후아나 (1479–1555), 카스티야 여왕. 미남왕 필리프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120]
  • 마리아 (1482–1517)[121]는 언니의 남편이었던 마누엘 1세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1482년 7월 1일 새벽에 태어난 마리아의 사산된 쌍둥이.[122] 성별에 대한 출처는 상반된다.
  • 아라곤의 캐서린 (1485–1536)은 웨일스 공 아서와 결혼하여 자녀가 없었고, 이후 그의 남동생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결혼하여 콘월 공작 헨리와 잉글랜드의 메리 1세를 두었다.[123]

6. 1. 부계 및 모계

이사벨 1세의 부계 및 모계
부계모계



이사벨 1세 계보 v2.png


이사벨 1세는 카스티야 연합왕국 마드리갈 데 라스 알타스 토레스에서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이사벨 데 포르투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이사벨 데 포르투갈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의 손녀였다.[134]

이사벨의 가문은 트라스타마라가로 불리는데, 이는 고조부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가 트라스타마라 백작이었기 때문이다. 엔리케 2세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의 정부 레오노르 데 구스만에게서 태어난 서자였으나, 이복 형 페드로 1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부계로는 카롤링거 왕조의 먼 후손으로, 이탈리아의 군주 베렝가리오 1세의 외손녀의 20대손이다.

6. 2. 남편과 자녀

이사벨 1세는 페르난도 2세와 1469년 10월 19일에 혼인하여 7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2명은 유산되었다.[116] 5명이 장성하였는데, 이 중 장남이자 왕세자인 후안은 1497년에, 장녀 이사벨은 1498년에 각각 사망했다.[106] 현재 스페인 왕가는 차녀 후아나와 삼녀 마리아의 혈통에 해당한다.[141]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자녀[116]
이름출생 - 사망배우자비고
이사벨1470년 - 1498년포르투갈 왕자 아폰수, 마누엘 1세미겔을 낳던 도중 사망.[117]
아들 (유산)1475년 5월 31일-세브레로스에서 유산.[116]
후안1478년 - 1497년오스트리아의 마르게리타결핵으로 사망, 자녀 없음.[119]
후아나 1세1479년 - 1555년펠리페 1세카를 5세의 어머니. 정신병으로 토르데시야스에서 감금된 채 생활.[120]
마리아1482년 - 1517년마누엘 1세친언니 이사벨의 사망으로 홀아비가 된 마누엘 1세와 혼인.[121] 주앙 3세와 엔히크 1세의 어머니.
딸 (유산)1482년 7월 1일-마리아의 쌍둥이 자매.[122]
캐서린1485년 - 1536년아서 튜더, 헨리 8세메리 1세의 어머니.[123]


7. 유산과 평가

1958년, 이사벨이 사망한 바야돌리드 대교구의 주교 호세 가르시아 골다라즈는 이사벨의 성인 추대 절차를 시작했다. 그녀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27권에 걸쳐 3,500건의 문서가 선정되었다.[124]

1970년,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 "가톨릭 이사벨의 시성 절차는 안전하게 진행될 수 있다. 이사벨 여왕의 공적 또는 사적 행위 중 기독교적이고 복음적인 기준에 영감을 받지 않은 것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5세기 동안 끊이지 않고 '성인의 평판'이 있었고, 조사가 진행될수록 더욱 뚜렷해졌다."

1972년, 이 문서들은 바티칸의 성인 시성성에 공식적으로 제출되었다. 이 절차가 승인되어 이사벨은 1974년 3월 "하느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받았다.[124]

유대인 추방 문제로 인해, 성인 추대 절차는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기 1년 전인 1991년에 중단되었다. 일부 저자들은 이사벨의 성인으로서의 평판이 여왕 자신이 신중하게 만들고 널리 퍼뜨린 이미지에서 크게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125]

2020년 4월, 안토니오 카니사레스 요베라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스페인 주교들에게 이사벨의 시성 절차를 재개할 것을 요청했다고 확인했다.[126]

이사벨 여왕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유럽 밖에서 이사벨 1세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항해를 가능하게 한 인물로 가장 기억되는데, 이는 스페인과 유럽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는 시대를 열었다. 그녀의 통치는 스페인 제국의 설립을 보았고, 이는 결국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을 점유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을 창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유럽 내에서 이사벨 1세와 그녀의 남편은 레콩키스타를 완성하고 서유럽에서 가장 큰 무슬림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스페인과 이베리아 반도를 확고한 가톨릭 국가로 세운 것으로 다소 악명이 높다. 그녀의 통치는 또한 악명 높은 스페인 종교 재판의 시작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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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문서 ITEM por cuanto al tiempo que nos fueron concedidas por la Santa Sede Apostólica las yslas y Tierra Firme del Mar Oçéano descubiertas y por descubrir, nuestra principal intención fue al tiempo que lo suplicamos al papa sexto Alejandro, de buena memoria, que nos hizo la dicha concesión, de procurar e ynduçir y traer los pueblos dellas y los convertir a la nuestra Santa Fe Católica y enviar a las dichas islas y Tierra Firme prelados, religiosos y clérigos y otras personas doctas y temerosas de Dios para instruir a los vecinos y moradores della en la Fe Católica, y los enseñar y dotar de buenas costunbres y poner en ellos la diligencia debida, según más largamente en las letras de la dicha concesión se contiene; por ende, suplico al Rey, mi señor, muy afectuosamente y encargo y mando, a la dicha Princesa, mi hija, y al dicho Príncipe, su marido, que así lo hagan y cunplan y que esto sea su principal fin; y que en ello pongan mucha diligencia y no consientan ni den lugar que los indios vecinos y moradores de las dichas Yndias y Tierra Firme, ganadas y por ganar, reciban agravio alguno en sus personas ni bienes, mas manden que sean bien y justamente tratados; y si algun agravio an recebido, lo remedien y provean, por manera que no escedan cosa alguna lo que por las letras apostólicas de la dicha concesión nos es injungido y mandado. http://bdh-rd.bn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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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문서 これには別の説もあり、オーストリア大公アルブレヒト妃でスペイン王フェリペ2世の王女イサベル・クララ・エウヘニアがベルギーのオーステンデ攻略に際し、3年間下着を替えなかったからとも云うが、そもそもどちらもあまり根拠はないらし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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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문서 토로스 데 귀산도(Toros de Guisando) 협정이란 '귀산도 언덕의 황소 협정' 이라 번역할 수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6km 떨어진 귀산도 언덕에는 고대 켈트인들이 화강암으로 황소 형상을 조각해 놓은 관광명소가 있다. 이곳에서 엔리케 4세와 이사벨 1세가 종전 평화 협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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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서적 Foundations of the Portuguese empire 1415–1580, volume I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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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178]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2019-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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