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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조 (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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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원조는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문학 평론가로, 일본 유학 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1930년대 초반부터 사회 현실 비판적인 평론을 발표했다.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참여하고 조선문학건설본부 결성을 주도했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했다. 좌파 지식인으로 명망 높은 가문 출신이며, 이육사의 유고 시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 이전에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했으며, 박헌영·이승엽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며, SBS 드라마 《야인시대》의 영향으로 사진이 구마적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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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조 (문학 평론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관경주 이씨
이름이원조
출생일1909년 6월 2일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북도 안동
사망일1955년
직업평론가, 언론인
국적대한제국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장르문학평론
친척이육사(형)

2. 생애

경상북도 안동 출생으로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1935년 호세이 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온 뒤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했다.

1930년대 초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참여하고 《조선일보》와 《소년중앙일보》에 평론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1930년대 활발한 활동을 했다. 사회 현실의 인식과 비판을 강조하는 이념적인 내용의 평론을 썼으며, 특히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인민적 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을 설파했다.

왕족인 이관용의 딸과 결혼했을 정도로 명망이 높은 가문에서 유교적 소양을 쌓은데다, 서구문학을 전공하고 학예부 기자 생활을 한 그는 세련된 교양을 갖춘 좌파 지식인이었다. 외조부 허형이 독립운동가이며 둘째형인 이육사를 포함한 형제들이 의열단에 가입할 정도로 민족주의와 반일주의에 충실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1946년, 2년 전 중국에서 옥사한 이육사의 유고 시집인 《육사시집》을 간행했다.

광복 직후에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했으며,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다가 한국 전쟁 이전에 월북했다. 북조선에서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냈고, 한국 전쟁 때는 서울로 와 남로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주필로 활약했다. 이때 해방일보에서 기자로 함께 일했던 원로언론인 조덕송(전 전남일보 고문)의 회고록 《민족대드라마 증언》에 따르면 이원조는 성격이 매우 까다롭고 까칠했다고 한다. 당시 해방일보 기자는 아니었으나 좌익계 통신사인 조선통신사 기자로 있었던 이태(80년대 인기넌픽션 《남부군》의 저자) 또한 자신이 가까이서 지켜본 이원조에 대해서 "성격이 보통 사람과 달리 좀 괴팍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상의 증언들 외에도 여러사람들의 증언이나 회고 등을 통해 볼때 이원조는 극도의 엘리트의식과 타고난 예민함 등으로 보통 사람과는 성격이 약간 달랐던 것같다. 그는 언론인 뿐만 아니라 문학가로도 활발한 문명을 떨쳤지만 그 정치적 비중 때문에 남로당 숙청의 칼날을 피할수는 없었다. 결국 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 당시 단독재판을 받은 박헌영을 제외한 다른 12명의 거물급 남로당인사들과 나란히 피고인이 되어 함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 재판에서 이원조는 징역12년을 선고받음으로써 징역15년을 선고받은 윤순달과 함께 사형을 면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처형과 함께 모습을 감추게 되었는데 전 남로당원으로서 해방일보 기자와 북한정권의 문화선전성 구라파부장을 역임했던 박갑동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형량에 관계없이 이원조 또한 처형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조정래의 역사소설《태백산맥》에서는 부인과 아이들을 우익들에게 잃은 백색 테러 피해자이자, 언론을 통해 '해방전쟁'을 지원하는 언론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2. 1. 초기 생애와 언론 활동

이원조는 경상북도 안동 출생으로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1935년 호세이 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했다. 1930년대 초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참여하고 《조선일보》와 《소년중앙일보》에 평론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1930년대 활발한 활동을 했다. 사회 현실의 인식과 비판을 강조하는 이념적인 내용의 평론을 썼다.

왕족인 이관용의 딸과 결혼했을 정도로 명망이 높은 가문에서 유교적 소양을 쌓은데다, 서구문학을 전공하고 학예부 기자 생활을 한 그는 세련된 교양을 갖춘 좌파 지식인이었다. 외조부 허형이 독립운동가이며 둘째형인 이육사를 포함한 형제들이 의열단에 가입할 정도로 민족주의와 반일주의에 충실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1946년, 2년 전 중국에서 옥사한 이육사의 유고 시집인 《육사시집》을 간행했다.

광복 직후에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했다.

2. 2. 문학 및 평론 활동

경상북도 안동 출생으로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1935년 호세이 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돌아온 뒤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했다.

1930년대 초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참여하고 《조선일보》와 《소년중앙일보》에 평론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1930년대 활발한 활동을 했다. 사회 현실의 인식과 비판을 강조하는 이념적인 내용의 평론을 썼으며, 특히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인민적 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을 설파했다.

왕족인 이관용의 딸과 결혼했을 정도로 명망이 높은 가문에서 유교적 소양을 쌓은데다, 서구문학을 전공하고 학예부 기자 생활을 한 그는 세련된 교양을 갖춘 좌파 지식인이었다. 외조부 허형이 독립운동가이며 둘째형인 이육사를 포함한 형제들이 의열단에 가입할 정도로 민족주의와 반일주의에 충실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1946년, 2년 전 중국에서 옥사한 이육사의 유고 시집인 《육사시집》을 간행했다.

광복 직후에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했으며,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다가 한국 전쟁 이전에 월북했다. 북조선에서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냈고, 한국 전쟁 때는 서울로 와 남로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주필로 활약했다. 이때 해방일보에서 기자로 함께 일했던 원로언론인 조덕송(전 전남일보 고문)의 회고록 《민족대드라마 증언》에 따르면 이원조는 성격이 매우 까다롭고 까칠했다고 한다. 당시 해방일보 기자는 아니었으나 좌익계 통신사인 조선통신사 기자로 있었던 이태(80년대 인기넌픽션 《남부군》의 저자) 또한 자신이 가까이서 지켜본 이원조에 대해서 "성격이 보통 사람과 달리 좀 괴팍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상의 증언들 외에도 여러사람들의 증언이나 회고 등을 통해 볼때 이원조는 극도의 엘리트의식과 타고난 예민함 등으로 보통 사람과는 성격이 약간 달랐던 것같다. 그는 언론인 뿐만 아니라 문학가로도 활발한 문명을 떨쳤지만 그 정치적 비중 때문에 남로당 숙청의 칼날을 피할수는 없었다. 결국 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 당시 단독재판을 받은 박헌영을 제외한 다른 12명의 거물급 남로당인사들과 나란히 피고인이 되어 함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 재판에서 이원조는 징역12년을 선고받음으로써 징역15년을 선고받은 윤순달과 함께 사형을 면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처형과 함께 모습을 감추게 되었는데 전 남로당원으로서 해방일보 기자와 북한정권의 문화선전성 구라파부장을 역임했던 박갑동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형량에 관계없이 이원조 또한 처형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조정래의 역사소설《태백산맥》에서는 부인과 아이들을 우익들에게 잃은 백색 테러 피해자이자, 언론을 통해 '해방전쟁'을 지원하는 언론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2. 3. 월북과 한국 전쟁

이원조는 광복 직후에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했으며,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다가 한국 전쟁 이전에 월북했다. 북조선에서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냈고, 한국 전쟁 때는 서울로 와 남로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주필로 활약했다. 이때 해방일보에서 기자로 함께 일했던 원로언론인 조덕송(전 전남일보 고문)의 회고록 《민족대드라마 증언》에 따르면 이원조는 성격이 매우 까다롭고 까칠했다고 한다. 당시 해방일보 기자는 아니었으나 좌익계 통신사인 조선통신사 기자로 있었던 이태(80년대 인기넌픽션 《남부군》의 저자) 또한 자신이 가까이서 지켜본 이원조에 대해서 "성격이 보통 사람과 달리 좀 괴팍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상의 증언들 외에도 여러사람들의 증언이나 회고 등을 통해 볼때 이원조는 극도의 엘리트의식과 타고난 예민함 등으로 보통 사람과는 성격이 약간 달랐던 것같다. 그는 언론인 뿐만 아니라 문학가로도 활발한 문명을 떨쳤지만 그 정치적 비중 때문에 남로당 숙청의 칼날을 피할수는 없었다. 결국 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 당시 단독재판을 받은 박헌영을 제외한 다른 12명의 거물급 남로당인사들과 나란히 피고인이 되어 함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 재판에서 이원조는 징역12년을 선고받음으로써 징역15년을 선고받은 윤순달과 함께 사형을 면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처형과 함께 모습을 감추게 되었는데 전 남로당원으로서 해방일보 기자와 북한정권의 문화선전성 구라파부장을 역임했던 박갑동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형량에 관계없이 이원조 또한 처형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2. 4. 박헌영·리승엽 간첩 사건과 최후

경상북도 안동 출생으로 일본 유학 후 1935년 호세이 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1930년대 초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참여하고 《조선일보》와 《소년중앙일보》에 평론을 발표하며 활동했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인민적 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을 설파했다.

1946년에는 2년 전 중국에서 옥사한 이육사의 유고 시집 《육사시집》을 간행했다. 광복 직후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과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하고,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다 한국 전쟁 이전에 월북했다. 북조선에서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냈고, 한국 전쟁 때는 서울로 와 남로당 기관지 해방일보 주필로 활약했다. 당시 해방일보 기자였던 조덕송(전 전남일보 고문)의 회고록 《민족대드라마 증언》과 좌익계 통신사 조선통신사 기자였던 이태(80년대 인기넌픽션 《남부군》의 저자)는 이원조의 성격이 매우 까다롭고 괴팍했다고 회고한다.

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 당시 단독재판을 받은 박헌영을 제외한 다른 12명의 거물급 남로당인사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에서 이원조는 징역 12년을 선고받았으나, 전 남로당원 박갑동의 증언에 따르면 형량에 관계없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정래의 역사소설《태백산맥》에서는 부인과 아이들을 우익들에게 잃은 백색 테러 피해자이자, 언론을 통해 '해방전쟁'을 지원하는 언론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3. 평가 및 뜬소문

SBS 드라마 야인시대의 영향으로 이원조의 사진[1] 이 익명의 누리꾼 의해 구마적[2]이라며 유포되기도 하였다.[3]

3. 1. 평가

3. 2. 뜬소문

SBS 드라마 야인시대의 영향으로 이원조의 사진[1] 이 익명의 누리꾼 의해 구마적[2]이라며 유포되기도 하였다.[3]

4. 작품

5. 가족 관계

참조

[1] 뉴스 (격동의 역사와 함께한 조선일보 90년) 이육사·원조·원창 3형제, 조선일보 기자로 일해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0-01-15
[2] 문서
[3] 구글 검색 구글 검색사이트 https://www.googl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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