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태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25년 단편소설 〈오몽녀〉를 발표하며 등단한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그는 사실주의적 기법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문학 세계를 구축했으며, 〈복덕방〉, 〈까마귀〉, 〈달밤〉 등 여러 작품을 통해 한국 단편 소설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1930년대 구인회 활동, 문장지 편집 등 문단 활동을 하였으나, 1945년 광복 이후 좌파 계열에서 활동하다가 1946년경 월북하였다. 월북 후 숙청되어 함흥 등지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70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작품은 해금 이후 재조명되었으며, 현재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자택은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선문학가동맹의 인물 - 박태원 (1909년)
    박태원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소설가로, 모더니즘 소설을 주로 썼으며,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다 사망했다.
  • 조선문학가동맹의 인물 - 홍명희
    홍명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 정치인으로, 장편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하며, 독립운동 참여, 언론 및 교육계 활동 후 해방 후 남북협상 참여, 월북하여 북한에서 요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역할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 신문 기자 - 밥 우드워드
    밥 우드워드는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로 닉슨 대통령 탄핵에 기여하고 미국 정치와 권력의 내면을 파헤치는 데 기여한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지만, 익명 정보원의 과도한 사용과 객관성 부족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 신문 기자 - 카를 슈르츠
    카를 슈르츠는 독일 혁명에 참여했다가 미국으로 이민하여 상원의원과 내무장관을 지낸 정치인이자 언론인, 저술가로, 반노예제 운동, 남북 전쟁 참전, 공무원 개혁 및 인디언 정책에 기여하며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이태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태준
원어 이름李泰俊
본명이규태
李奎泰
출생일1904년 11월 4일
출생지대한제국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진명리
사망일1978년
사망지자강도
직업작가
학력일본 조치 대학교 철학과 중퇴
활동 기간1924년 ~ 1943년
장르소설
부모이용하(양부)
이창하(생부)
순흥 안씨(생모)
배우자이순옥
자녀2남 3녀
(그 중 장녀 이소명, 장남 이유백)
형제누이동생 2명
문화어리태준
본명 한자李奎泰
작품
저널 인용제목=이태준론―단편미학의 대가가 보여주는 현실의 단층
작가 이태준

2. 생애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개화파 지식인이었으나 친일파로 오해받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후 사망했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9살에 고아가 되었다.[2] 이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문학적 재능을 보였으나 동맹휴교 주모자로 지목되어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 생활을 했다.[2]

1925년 단편소설 〈오몽녀〉로 등단한 후, 개벽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여러 잡지 편집에 관여했다.[2] 1930년 결혼 후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이화여전 등에서 작문교사로 활동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구인회를 이끌고, 1939년에는 《문장》 창간에 참여하여 식민지 말기 조선문학을 지키는 데 기여했다.[2] 그러나 1940년대에는 친일적인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2]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등 좌파 계열에서 활동하다 1946년월북했다.[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김일성 우상화에 반대하다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함흥 등지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64년 복귀하기도 했으나, 다시 강원도 탄광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4] 사망 시기는 1970년경으로 추정된다.[5]

2. 1. 등단 전 (1904년 ~ 1925년)

李泰俊|이태준중국어은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진명리에서 아버지 이창하(李唱夏)와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 安氏) 사이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창하는 철원공립보통학교 교원과 덕원감리서주사(德原監理署主事)를 역임한 개화파 지식인이었다. 이태준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민족의식과 신학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나, 아버지가 의병에게 친일파로 오해받아 고향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가 1909년 가을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가장을 잃은 가족은 이듬해 귀국했으나, 어머니마저 1912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이태준은 9살의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삼남매는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고향으로 돌아와 친척 집에 맡겨졌지만, 주변의 동정과 괄시는 이태준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2]

1918년 사립 봉명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한 달 후 가출하여 여러 곳을 방랑하다 원산 객주집의 사환으로 정착하였다. 2년여를 여기서 보내던 중 상경하여 고학을 하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습작생활에 몰두하였다. 1924년에는 학예부장으로 활동하며 《휘문》 2호에 가람 이병기의 추천으로 기행문 〈부여행〉이 1등으로 뽑히는 등 문학적 재능을 보였으나, 6월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4학년 1학기에 퇴학당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나도향 등과 어울려 '공기만을 먹고사는' 처참한 고학 생활을 했다.[2]

2. 2. 등단과 작가 활동 (1925년 ~ 1945년)

1925년 단편소설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하여 문단에 처음으로 나섰다. 1929년 개벽사에 입사하여 《학생》, 《신생》 등의 편집에 관여하는 한편 《어린이》에 많은 동화를 발표하였다.[2]

1930년 5월 이화여전 음악과를 갓 졸업한 이순옥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931년 《중외일보》 기자로 입사했으며, 이후 신문폐간과 함께 이름을 뜯어고친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장이 되었고, 이화여전·이보·경보 등에 작문교사로 출강하였다. 이 시기를 이태준 문학의 전성기로 보고 있다. 이태준의 대표작의 대부분이 이때에 쓰여졌으며, 구인회 구성에도 앞장서는 등 사회적 위상도 드높아졌다. 1933년에서 1937년까지의 작품을 통해 이태준은 '비경향문학이 낳은 최대의 작가'라는 평가를 받기 이르렀다.[2]

1939년 《문장》의 창간에 관여하고 책임편집을 맡으면서 식민지 말기 조선문학을 지키는 데 남다른 공헌을 했다. 이 잡지를 중심으로 이태준은 이병기의 주도 아래 고전부흥에 진력하며 의고주의적 취향을 표출하기도 하였다.[2]

1940년대에 접어들면 이태준도 몇몇 친일적 글을 발표한다. 1943년 고향인 철원 근처로 소개하였다 그곳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2]

2. 3. 광복 이후와 월북 (1945년 ~ 1956년)

광복 후 이태준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경향파 문학과는 거리를 두었던 이전까지의 경향과는 달리 조선문학가동맹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파 계열에서 활동했으며, 한국 전쟁 이전인 1946년경에 월북하였다. 그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행적이나 세상을 떠난 시기가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태준은 김일성을 영웅화하라는 노동당의 지시를 정면으로 비판,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3] 1956년 숙청되어 함흥으로 추방, 함흥노동자신문 교정원으로 배치되었으며, 이후 다시 함흥콘크리트블록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배치되었다. 1964년 조선노동당 중앙당 문화부 창작실 전속작가로 복귀하였으나, 몇 년 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로 추방, 그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4]

사망 시기는 1968년경을 비롯한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1970년경이 가장 유력한 사망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5] 2000년대 들어 탈북 작가인 최진이가 이태준의 딸들이 쓴 일기를 보았다며, 이들의 가족사를 증언한 바 있다.[6]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알려진 그의 마지막 행적은 66살이던 1969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부부가 함께 살고 있는 모습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7]

2. 4. 숙청과 사망 (1956년 ~ 미상)

이태준은 김일성을 영웅화하라는 노동당의 지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3]

1956년 숙청되어 함흥으로 추방, 함흥노동자신문 교정원으로 배치되었으며, 이후 다시 함흥콘크리트블록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배치되었다. 1964년 조선노동당 중앙당 문화부 창작실 전속작가로 복귀하였으나, 몇 년 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로 추방, 그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4] 사망 시기도 1968년경을 비롯한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1970년경이 가장 유력한 사망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5]

2000년대 들어 탈북 작가인 최진이가 이태준의 딸들이 쓴 일기를 보았다며, 이들의 가족사를 증언한 바 있다.[6]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알려진 그의 마지막 행적은 66살이던 1969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부부가 함께 살고 있는 모습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7]

3. 작품 세계

이태준은 단편 소설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초기 소설들은 정갈한 외장이나 서정적 분위기 속에서 궁핍한 시대의 단면을 예민하게 드러냈으며, 특히 1930년대 말 발표된 〈까마귀〉, 〈복덕방〉, 〈밤길〉 등은 한국 소설 문학의 가치를 드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1]

3. 1. 문학적 평가

이태준은 단편 문학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민충환은 "김동인이 주춧돌을 놓고 현진건이 갈고 닦은 한국 현대 단편소설을 완성한 대가"라고 하였다.[1] 김기림은 이태준을 "우리들이 가진 가장 우수한 스타일리스트"로 평가했으며, 최재서는 "인간상을 묘출하는 데 ... 명확한 수완을 가진 작가"라 칭하며 "스케치적 필치로 그 인물의 말이나 행동을 점점이 터치하여 가는 동안에 어언간 선명한 인간상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박태원은 "벌써 막연히 일가를 이룬 그 자신의 독특한 예술혼을 가진 극히 존중을 받아 마땅한 작가"라고 평가했다.[9]

역사적 현실을 세련된 문학적 기법과 잘 어울리게 하여 완성도 높은 예술작품으로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초기 소설들은 정갈한 외장이나 서정적 분위기 속에서 궁핍한 시대의 단면을 예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태준의 예술적 성취는 미적 기교가 완숙기에 접어드는 1930년대 후반 작품에서 그 진가를 한껏 발휘한다. 특히 1930년대 말 발표된 〈까마귀〉, 〈복덕방〉, 〈밤길〉 등은 한국 소설 문학의 가치를 드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월북 후의 작품은 하나같이 남한 측의 잔학성을 고발하는 한편, 이를 통해 적극적인 투쟁 의지를 고취하는 내용이다. 한국전쟁기의 작품에는 반미적 성향이 특히 강하게 나타나 있다. 북한 체제에 부응하는 것 외에도 이태준 자신이 평소 가지고 있던 서양인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작용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 소설들은 북한에서 적극 수용되지 못하였고, 이태준의 숙청과 더불어 북한 문학사에서 사라져버렸다.[1]

4. 작품 목록

이태준은 단편 소설과 장편 소설을 모두 집필하였다.

종류작품 목록
단편 소설
장편 소설


4. 1. 단편 소설


  • 오몽녀〉 (1925)
  • 〈복덕방〉
  • 〈까마귀〉
  • 〈밤길〉
  • 〈영월영감〉
  • 〈토끼 이야기〉
  • 〈달밤〉 (1933)
  • 〈산월이〉
  • 〈고향〉 (1933)
  • 〈불우선생〉 (1933)
  • 〈패강랭〉 (1938)
  • 〈농군〉 (1939)
  • 〈돌다리〉 (1943)
  • 〈해방전후〉 (1946)

4. 2. 장편 소설


  • 제2의 운명
  • 왕자 호동
  • 청춘 무성
  • 황진이
  • 농토
  • 사상의 월야

5.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년도비고
배우자이순옥1930년 결혼
장녀이소명1931년
장남이유백1932년
차녀이소남1934년
차남이유진1936년
삼녀이소현1940년

[10]

6. 사후

이태준은 여러 방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북한에서는 반동작가라는 굴레에 갇혀 사라졌고, 남한에서도 한동안 월북 작가라는 멍에를 벗지 못하고 잊혀졌다. 1988년 7월 19일 남한 정부의 월·납북 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 이후, 연구실에서 조심스럽게 진행되던 이태준에 대한 문학 연구가 갑작스레 활기를 띠며 상허학회를 중심으로 상당한 수준의 성과물을 양산하게 되었다.[1]

2012년 11월 20일에 개통된 경원선 백마고지역이 이태준의 생가 터(철원읍 율이리 소재)와 비교적 인접해 있어, 이 역의 명칭을 이태준역으로 하자는 주장이 일각에서 있었으나, 2012년 9월 철원군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백마고지역으로 역명을 정하였다.

참조

[1] 저널 이태준론―단편미학의 대가가 보여주는 현실의 단층 2016
[2] 서적 이태준과 한국 근대소설의 성격 소명출판 1999-10-30
[3] 서적 박헌영 평전 실천문학사
[4] 뉴스 월북작가 이태준, 그는 자신의 소설이 예술이기를 소망했다 http://www.kwnews.co[...] 강원일보
[5] 웹인용 월북문인 박태원과 이태준 https://blog.daum.ne[...] 2013-07-23
[6] 저널 일제시대 최고의 문장가 이태준의 통한의 가족사 https://web.archive.[...] 2007-08-26
[7] 간행물 월북작가 이태준의 통곡의 가족사 2000-11
[8] 뉴스 북악스카이웨이를 걸어보자! http://www.hani.co.k[...] 한겨레 2008-06-10
[9] 저널 이태준 소설의 창작방법 연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2017
[10] 서적 이태준 전집 1 : 달밤 외 소명출판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