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수 (1923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익수(1923년)는 일제강점기, 광복군 활동, 6.25 전쟁 참전, 1.21 사태 지휘 등을 거친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1923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나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서 경리문관으로 근무하다 광복군에 합류하여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며 우익 청년 운동을 주도했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6.25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1.21 사태 당시 1사단 15연대장으로 무장공비 소탕 작전을 지휘하다 전사했다. 그는 태극무공훈장을 추서받았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고, 2015년 1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달의 호국인물 - 박희동
박희동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국군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이자 지휘관으로서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공군사관학교 교장, 공군대학 총장 등을 역임하며 공군 전력 강화에 기여한 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 이달의 호국인물 - 이태영 (1927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해군 장교 이태영은 1927년생으로 몽금포 전투와 서해, 원산 영흥만 봉쇄 작전 등에 참여, PC-704함 지휘 중 전사 후 훈장이 추서되었다. - 조선민족청년단 - 이범석
이범석은 조선 왕족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정치인으로, 청산리 대첩에서의 활약과 대한민국 건국 참여, 초대 국무총리 역임 등 뚜렷한 업적을 남겼으나, 과장된 서술 및 정치적 행보에 대한 논란으로 평가가 엇갈린다. - 조선민족청년단 - 정성태
정성태는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국회의원, 국회부의장을 역임했으며, 한일협정 반대 운동에 참여하다가 9대 총선 낙선 후 정계를 은퇴했다. - 은성훈장 수훈자 - 코트니 휘트니
코트니 휘트니는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하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참모 및 연합군 최고사령부 민정국장으로 활동하며 일본국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한 인물이다. - 은성훈장 수훈자 - 함명수
함명수는 해군사관학교 1기 출신으로 몽금포 해전에서 승리한 초계함 함장, 제7대 해군참모총장, 제9대 및 10대 국회의원, 그리고 한국수산개발공사 사장을 역임한 군인이자 정치인, 기업인이다.
이익수 (192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익수 |
다른 이름 | 이범규 |
출생일 | 1923년 10월 7일 |
사망일 | 1968년 1월 24일 |
사망지 |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
국적 | 대한민국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1묘역 21호 |
본관 | 전주 이씨 한남군파 |
부모 | 이현만(부) |
친척 | 형 1명 누나 1명 이범윤(아우) 이범정(아우) 이범원(아우) 누이동생 1명 |
배우자 | 한산 이씨 부인 |
군 경력 | |
복무 기간 | 1949년 ~ 1968년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최종 계급 | 육군 준장(추서)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6·25전쟁 공비토벌작전 600고지전투 소작봉 전투 1·21 사태 |
서훈 내역 | |
서훈 | 미국 은성훈장 화랑무공훈장 공비토벌 기장 6·25사변 종군 기장 전투 보병 휘장 태극무공훈장 |
2. 생애
이익수는 1923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서천군 판교국민학교와 공주농업학교를 거쳐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며 학업에 매진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키우고 중국어를 독학하는 등 미래를 준비했다.
일제강점기 말, 징용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일본군 지나지구 총사령부 경리문관'으로 근무하다가 탈출하여 이범석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 광복군에 합류, 상해지구 경리부장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광복군 동지들을 인솔하여 귀국하였고, 이범석 장군이 창설한 조선민족청년단(족청단)에 가입하여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지역 책임자로 활동하며 청년 운동을 이끌었다.
대한민국 국군 창설 이후 호국군을 거쳐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반을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정식 임관하였다. 6.25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전쟁 이후에도 제주도 제1훈련소, 논산 제2훈련소, 육군대학 등에서 근무하며 여러 부대의 지휘관과 참모직을 역임했다.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며 대령으로 진급했고, 강원도 병무청장을 지내기도 했다.
국방대학원을 수료하고 1사단 15연대장으로 복무하던 중, 1968년 1·21 사태가 발생하자 북한 무장공비 소탕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작전 중 부하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단신으로 공비들에게 접근하여 귀순을 권유하다가, 1968년 1월 24일 경기도 양주시 노고산 일대에서 공비의 소총 사격으로 전사하였다.
2. 1. 유년 시절 및 학창 시절
1923년 10월 7일 충청남도 부여에서 6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세 살 때 원인 모를 병을 앓기 시작하여 여러 의원을 찾았으나 낫지 않았고, 1년 반이 지난 후 무당을 불러 굿을 한 뒤 병세가 호전되었다. 가족들의 간호 끝에 발병 3년 만인 다섯 살 때 걸음마를 배울 수 있었다.여섯 살 가을부터 부친의 기대를 받으며 한문 공부를 시작했다. 천자문의 음과 훈을 익히고 습자와 서예를 배우며 학문에 대한 열의를 보였다. 9살에는 서천군 판교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집에서 4km 떨어진 학교를 매일 걸어 다니며 6년 동안 개근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 학생들에 대한 억압 속에서도 일본 학생들을 제치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매년 우등상, 조행상(모범상), 개근상을 수상했다. 4학년 때부터는 성적과 품행을 인정받아 반장을 맡았다.
16살에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기숙사가 있는 공주농업학교로 진학했다. 이곳에서 단체 생활과 강도 높은 군사 훈련을 경험했으며, 일제의 공출 정책으로 인해 기숙사에서는 만주에서 가축 사료로 쓰이던 콩깻묵으로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등 어려운 환경에 처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그는 조선인이 모든 면에서 일본인을 앞서야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전문학교까지 진학하여 학업에 정진할 것을 결심했다. 또한 신체 단련의 필요성을 느껴 유도와 검도 유단자가 되었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과 합류할 생각으로 중국어를 독학했다. 방학에는 고향에 내려와 동네 청년들과 부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야학 활동을 하기도 했다.
공주농업학교 3학년, 18살 때 결혼하였다. 4학년 때 일제의 쇠붙이 공출 등으로 집안 형편이 더욱 어려워지자, 학업을 조속히 마치기 위해 졸업을 1년 앞두고 경성법학전문학교로 월반하여 진학했다.
2. 2. 청년 시절
이익수의 청년 시절은 일제 강점기 말기와 해방 이후 격동의 시기에 걸쳐 있다. 그는 학업을 마친 후 징용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여 활동했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서는 조선민족청년단 활동을 통해 국가 건설에 기여하고자 했으며, 이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 과정에 참여하여 정식 장교로 임관하였다. 그의 청년기는 조국의 독립과 건국이라는 시대적 과업 속에서 군사 및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기였다.2. 2. 1. 징용 면제 및 광복군 활동
학교 졸업 후 징용 대상이 될 상황이었으나, 부친이 알고 지내던 일본인의 주선으로 징용을 면제받을 기회를 얻었다. 당시 국내, 일본, 중국 중 근무지를 선택하라는 제안에 중국을 택했고,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중국어 구사 능력이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 '일본군 지나지구 총사령부 경리문관'으로 추천되었다. 1943년 3월 말, 국경과 만주를 거쳐 중국 남경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주로 연락 사무나 문서 기록, 정리와 같은 군 행정 업무를 담당했지만, 때로는 일본인 상관의 지시로 힘든 일을 하거나 중국인 포로나 죄수를 감시하는 보초 근무를 서기도 했다.한편, 이익수를 존경하고 따르던 동갑내기 처남이 그를 따라 중국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편지로 전해왔다. 몇 달 후 처남은 중국행 수속 서류를 받아 남경으로 왔고, 두 사람은 타지에서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1944년경, 늑막염으로 만주 봉천의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남경보다 상해로 이동하기 쉬운 만주에 온 것을 기회로 삼아 병원을 탈출했다. 이후 이범석 장군이 지휘하던 광복군 부대를 찾아가 합류했으며, 광복군 상해지구 경리부장의 직책을 맡았다.
해방 이후에는 상해에서 광복군 관련 잔여 업무를 정리했다. 이후 상해에 남아 있던 광복군 약 400여 명을 인솔하여 배편으로 군산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2. 2. 2. 조선민족청년단 및 호국군 활동
해방 이후 혼란기에 이범석 장군이 창설한 조선민족청년단(족청단)에 가입하였다. 수원에 있던 중앙 훈련소에서 제1기생으로 다른 200여 명의 지도자들과 함께 훈련을 마쳤다. 이후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조직 책임 임무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재정적 지원 없이 옥산과 이웃한 홍산면 등지에서 우익 청년운동을 이끌었다. 충청남도 도단 조직부장과 홍산·옥산 단부 단장을 겸임하며 공주, 부여, 강경까지 조직을 확장했다. 특히 그가 이끈 홍산 단부는 공주, 부여, 홍산 지역을 아우르며 전국적으로 강력한 청년단체로 성장하여 '홍산 특별단부'로 불렸고, 자체 훈련소까지 갖추었다.족청단이 해체되자, 단원들의 사기를 유지하고 국가에 기여할 길을 모색하기 위해 군 입대를 독려했다. 당시 국방장관이 된 이범석의 지시에 따라 족청단원들의 입영을 추진했으며, 옥산국민학교 교정에서 국가 수호와 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후 자신도 호국군사관학교를 통해 호국군 소위로 임관하였고, 대전에 위치한 호국군 사령부에서 작전참모로 근무했다.
2. 2. 3. 대한민국 국군 장교 임관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되고 호국군이 해체되면서, 외국에서 군사 경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반에 입교하였다. 단기 교육을 마친 후 1949년 10월 17일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정식 임관하였다.임관 후 2사단 25연대에 작전교관으로 배속되었다. 당시 25연대는 온양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거의 족청단 단원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어머니와 함께 살림을 차렸으며, 이미 세 딸을 둔 가장이었다.
2. 3. 6.25 전쟁
1952년 12월 24일, 넷째의 결혼식 전날 생환 소식이 가족에게 전해졌고, 그는 이미 홍산에 도착해 있었다. 그날 저녁, 연락병과 함께 권총을 차고 장총과 망원경을 멘 채 지프차로 귀가했다.1953년 4월, 제주도의 제1훈련소로 발령받아 본부 부식계장, 교도연대 작전과장, 정보과장, 감찰과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이후 감찰관으로 발탁되어 감찰 교육을 받았고, 감찰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여 당시 대구에 위치했던 감찰본부의 선임장교로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중령 편제였으나, 당시 그는 소령이었기에 동기생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전해진다. 감찰본부에서는 미비했던 감찰 관련 법규를 정비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후 25사단 감찰부장으로 부임했으나, 곧 논산 제2훈련소 감찰부 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녀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진해 육군대학에 입교했고, 강원도 화천 2사단 3대대장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육군대학 역시 우등으로 졸업하여 학교 교관직 제의를 받았으나, 본인이 일선 근무를 희망하여 졸업 후 25사단 72연대 1대대장으로 발령받았다.
1962년 6월경에는 3사단 군수참모로 근무했으며, 장녀가 대학교 2학년일 때는 3사단 18연대 부연대장을 맡았다.
이후 육군본부 인사참모로 근무하던 중 대령으로 진급했고, 작전참모와 전사과장을 거쳐 강원도 병무청장으로 발령받았다.
2. 4. 1·21 사태
국방대학원 군사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 후 대한민국 육군 대령 계급으로 1사단 15연대장으로 부임했다. 부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침투한 1·21 사태가 발생했다.사태 발생 후, 북쪽으로 도주하던 무장공비 일부가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남쪽 북노고산 줄기로 잠입했다.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인접한 1사단 병력이 동원되었고, 15연대장 이익수 대령도 연대 병력을 이끌고 도주로 차단 및 섬멸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작전 중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노고산 지역에서 무장공비 3명을 발견하고 도로를 차단하며 노고산 일대를 포위했다.
1968년 1월 24일, 6중대가 포위망을 좁혀가며 30m 전방까지 접근해 교전을 벌여 공비 1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나머지 공비 2명은 방공호를 거점으로 삼아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격렬히 저항했다. 한국군은 불리한 지형(빙판)에서 아래에서 위로 공격해야 했기에 피해가 발생했고, 수색 중대장 송광수 대위가 전사했다.
병사들의 추가 희생을 우려한 이익수 대령은 지원 병력 투입 대신, 경비소대장 김진태 소위 등에게 뒤따르지 말 것을 지시하고 권총과 수류탄만 소지한 채 단신으로 공비들이 은신한 산등성이로 접근했다. 20m 전방까지 다가가 생포를 위해 귀순을 권유했으나, 공비들은 이를 거부하고 계속 저항했다. 이에 수류탄으로 제압하기로 결정하고 사정거리를 가늠하려던 순간, 방공호에서 뛰쳐나와 도주하던 공비 1명이 쏜 소총에 맞아 1968년 1월 24일 오후 3시경 현장에서 전사했다.
3. 사후
1968년 1월 29일, 1·21 사태에서 희생된 다른 장병들과 함께 육군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6군단사령부에서 이세호 당시 6군단장의 주관으로 합동 영결식이 거행되었으며, 이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전사 처리 과정에서 1군사령부 내부에서는 작전 실패라는 의견도 있었으나, 당시 작전참모였던 이재전 등은 이익수가 후퇴 중이 아닌 정면 교전 중에 전사했다는 점,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도 태극무공훈장을 추서받은 사례, 그리고 군의 사기 등을 고려하여 합당한 예우를 주장했다. 최종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려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고, 육군 준장으로 1계급 특진을 결정했다.[5]
그의 묘비명은 장녀의 부탁으로 명필 이철경이 작성했으며, 1968년 7월 13일에 묘비 제막식이 열렸다.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졌다.
'「의(義)를 위해 죽는 병졸 되어도 사(私)를 위해 사는 영웅 되지 마라」 향로봉 기슭을 치닫던 무쇠다리 노고산 진두에 호국의 넋이 되다. / 순간에 영원을 새긴 마흔다섯의 심혈(心血)은 하늘에 록(祿)이 있는 불후(不朽)의 향기 / 자유 정의 임무는 목숨보다 중한 것 「내 뒤를 따르라」 앞장서 간 외침은 / 태극 충무 화랑 미 은성(美銀星)훈장 광채에 안겨 온 누리 울리는 종(鍾)이 되셨어라.'
2015년 1월, 대한민국 전쟁기념관은 그를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하였다.

참조
[1]
문서
국립서울현충원 유품전시관에 있는 이익수 육군준장에 대한 설명
[2]
서적
나의 아버지 이익수 장군
학인
1996
[3]
문서
General Orders No.882
1951-11-12
[4]
문서
과거 임관제도
대한민국 육군의 출신별 4성 장군 목[...]
[5]
웹인용
이익수 육군준장. 태극무공훈장
https://blog.daum.ne[...]
2021-05-2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