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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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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경읍은 충청남도 논산시 서부에 위치한 읍으로, 금강과 지류가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백제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충청도 은진현에 속했다. 금강을 통한 수운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여 조선 3대 시장으로 꼽히며 번성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육상 교통의 발달과 군산항 개항으로 쇠퇴했다. 현재는 논산시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며, 강경젓갈로 유명하다. 주요 문화 유산으로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과 구 강경노동조합 사무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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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읍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강경읍은 논산시 (적색)의 서부에 위치
강경읍은 논산시 (적색)의 서부에 위치
기본 정보
한글 표기강경읍
한자 표기江景邑
일본어 표기 (히라가나)こうけいゆう
일본어 표기 (가타카나)カンギョン=ウプ
로마자 표기Ganggyeong-eup
일반 정보
광역시/도충청남도
시/군/구논산시
면적7.011
세대4,634
세대 조사 기준2017년 12월 31일
인구7,903
인구 조사 기준2022년 2월
행정리28
법정리13
238
홈페이지강경읍사무소

2. 지리

강경읍은 논산시 서부에 있으며, 동쪽은 연무읍채운면, 서쪽은 금강부여군 세도면, 남쪽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망성면, 북쪽은 성동면과 접한다.[1] 강경읍 주변은 평야지대로 곡창지대이다.[1]

계룡산대둔산에서 발원한 금강 지류들이 북서쪽으로 돌아 남쪽으로 흐르다가 논산천에서 합류하고, 논산천은 강경읍 부근에서 금강 본류와 합류한다. 금강과 지류들은 논산평야의 젖줄 노릇을 하고 있으며, 금강은 천혜의 방위선이자 교통 수단이 되어 왔다.

금강이 지류인 강경천과 합류하여 남쪽에서 서쪽으로 물길을 바꾸는 지점에 위치한다. 읍 중심부는 금강 동쪽에 있지만, 서쪽에도 읍 구역이 있다. 주변에 펼쳐진 평야는 곡창 지대로 알려져 있다.

3. 역사

강경은 금강의 지류가 합류하여 서해로 연결되는 육로와 수로가 교차하는 평야 지대로 백제 시대부터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다. 고려조선시대에는 충청도 은진현(恩津縣)이었다. 대한제국 시기 수상 교통을 바탕으로 충청남도 공주, 부여장항, 군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고려 중기 무렵에도 제주에서 미역, 고구마, 좁쌀을 실은 배들이 드나 들었고 중국의 무역선들도 비단, 소금 등을 싣고 무역로를 텄다. 한국의 3대 강인 금강이 흐르고, 충청도전북특별자치도를 연결하는 중부 지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강경포에는 시장이 크게 발달했다.

17세기 말엽 강경천 주변의 하시장이 개설되었고, 19세기 말에는 대시장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1870년에 옥녀봉 동쪽 기슭에 상시장이 설시되면서 2대포구, 3대시장으로 발전하였다. 강경포에 형성된 시장은 대구, 평양의 시장과 함께 '조선 3대 시장'으로 불리며 '1평양, 2강경, 3대구'라는 표현을 만들어냈다.[1] 강경포구는 전국 3대 시장으로서 조선시대부터 4일과 9일장이 열렸다. 채운면의 제방 밑에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무지개 모양 돌다리인 미내다리가 있다.

1900년대 들어 조선에서 근대화의 수혜를 입는 첫 번째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강경포로 대거 진출하여 시장에 각종 상점과 금융 건물을 세웠다. 1910년대 초반에 지어진 한일은행 건물이 대표적이다. 강경은 전성기에 인구가 3만명에 달했고 유동인구는 10만명에 달했다. 1920년대 강경은 충청남도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도시였다. 근처에 세워진 소규모 수력발전소에서 전기를 공급하였다. 강경극장도 세워졌다.

강경포가 위치해 있는 은진현(恩津縣)의 행정 구역은 여러 차례 변동을 거쳤다. 일본인들이 진출해 시가지를 조성한 후인 1912년에는 충청남도 은진군 김포면이었고, 1914년에는 논산군 강경면으로 개칭하였다.

강경에는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침례교회,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한 강경성결교회가 있다.

1899년, 금강 하구에 군산이 개항하여 쌀의 출하 항구로 발달하게 되자, 강경은 곡물 시장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빼앗겼다. 그러나 군산과 내륙부를 잇는 금강 수운의 거점으로는 번성했고, 1930년의 제 시행으로 가장 먼저 승격한 마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철도 개통 이후 1905년부터 청주와 공주가 강경의 상권에서 이탈한 이래 1914년 호남선 개통 등으로 육상 교통이 계속 발달해 가는 과정에서 강경시장은 쇠퇴했다. 군산항의 기능 상실 이후에는 바다와 내륙의 교량지로서의 역할을 잃었다. 지금은 옛 강경포 지역에 포구의 흔적만 남아 있다.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1913년 건축). 등록문화재 제324호


구 강경노동조합 사무소(1920년 건축). 등록문화재 제323호

3. 1. 주요 연표


  • 조선시대: 충청도 은진현
  • 1911년: 은진군의 치소를 강경으로 이전(~1914년).
  • 1912년: 충청남도 은진군 김포면 (여산군 북일면 일부 편입)
  • 1914년 3월 1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면
  • 1915년: 익산군 망성면 작촌리 일부를 강경면에 편입
  • 1921년 10월 1일: 채운면 산양리 일부를 강경면에 편입하여 금정(錦町; 현 채산리)이라 함
  • 1931년 4월 1일: 강경읍으로 승격
  • 1931년~1933년: 금강 하류 개수공사 (논산천, 강경천 제방축조)
  • 1936년 4월 1일: 채운면 제내리, 산양리, 삼거리, 신촌리 일부를 강경읍에 편입하여 행정구역 확장. 제내리는 영정(榮町; 현 채운리), 신촌리는 동정(東町; 현 동흥리), 산양리 중 강경천에 연한 부분은 욱정(旭町)이라 하고, 삼거리 일부는 남정에, 산양리 중 금강에 연한 부분은 황금정에 편입함.
  • 1996년 3월 1일: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3. 2. 강경포 사건

1899년 당시 은진군 소속이었던 강경포에서 가톨릭 측과 일반 주민들 사이에 다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인근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나바위본당에서 가톨릭 신자와 비신자 간의 부채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나바위본당에 부임해 있던 프랑스인 신부가 사건에 관여하면서 프랑스와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 사건은 강경포를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강경포 사건이라고 불리며, 교안 사건이자 교폐 사건이기도 하다.

4. 행정 구역

강경읍은 남교리, 대흥리, 동흥리, 북옥리, 산양리, 서창리, 염천리, 중앙리, 채산리, 채운리, 태평리, 홍교리, 황산리 등 13개 법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법정리
남교리
대흥리
동흥리
북옥리
산양리
서창리
염천리
중앙리
채산리
채운리
태평리
홍교리
황산리


5. 강경시장

강경시장은 조선시대부터 4일과 9일장이 열렸던 곳이다. 금강을 통해 배가 시장 안쪽까지 들어올 수 있는 지형적 이점을 바탕으로 크게 성장했다. 서해에서 생산된 각종 해산물은 강경포를 거쳐 강경시장에 모였다가 전국 각지로 공급되었다. 전성기에는 해산물 성수기인 봄철에 하루 100여 척의 배가 드나들었고[1], 군산공주를 오가는 정기선이 매일 다닐 만큼 번성했다. 하루에 강경시장을 오가는 상인의 수는 수만 명에 달했다.

1905년 청주공주가 강경의 상권에서 이탈하고, 1914년 호남선 개통 등 육상 교통이 발달하면서 강경시장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군산항의 기능 상실 이후에는 바다와 내륙을 잇는 교량지로서의 역할도 잃게 되었다. 지금은 옛 강경포 지역에 포구의 흔적만 남아있지만, 젓갈 시장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6. 산업

젓갈은 강경의 명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한때 해산물의 집산지였던 흔적이다.[1]

7. 문화 유산


  • 한일은행 강경지점 (등록문화재 제324호): 1910년대 초반에 지어졌다.[1]
  • 강경노동조합 (등록문화재 제323호): 1920년대에 지어졌다.
  • 강경침례교회: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이다.
  • 강경성결교회: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 미내다리: 채운면에 있는 조선 시대 돌다리로, 무지개 모양이다.

8. 행정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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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교통

국도 제23호선이 강경읍을 통과하며, 한국철도공사 호남선강경선이 지나는 강경역이 있다. 강경역에는 무궁화호새마을호 열차가 정차한다.

10. 출신 인물

11.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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