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 (18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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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희(1824년 ~ 1863년)는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사도세자의 서증손이며 은언군의 손자이다. 풍계군의 서자로 태어났으나 은전군, 상계군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다. 헌종 재위 기간 중 유배되었다가 철종 즉위 후 복권되었으며, 철종의 총애를 받아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1851년에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1863년 철종이 그의 후사를 논의하게 했으며, 그해 사망하여 효희(孝僖)의 시호를 받았고, 고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24년 한성부에서 풍계군 이당의 서자로 태어났다. 사도세자의 서증손이자 은언군의 손자였다. 초기 생애와 헌종 재위 기간 동안의 행적은 철종과 고종 때 관련 기록들이 대량으로 삭제되어 알 수 없다.
2. 생애
1844년(헌종 10) 모함을 받아 해도로 유배되었으나, 1849년 철종 즉위 후 복권되었다.[1] 1849년(철종 즉위년) 6월 23일 소의대부에 봉해지고, 같은 날 익평군에 봉작되었다. 이후 사옹원제조, 오위도총부부총관, 종친부유사당상 등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851년 현록대부로 승진했다.
1863년(철종 14) 9월 18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철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를 특별히 예우하였다.
2. 1. 젊은 시절
1824년 한성부에서 풍계군 이당의 서자로 태어났다. 사도세자의 서증손이자 은언군의 손자였다. 초기 생애와 헌종대까지의 행적은 철종과 고종 때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서 은언군, 상계군 관련 기사들이 대량으로 삭제되어 알 수 없다.
1844년 (헌종 10) 누군가의 모함을 받아 해도로 유배되었으나, 1849년 철종 즉위 후 대왕대비와 철종의 특별 배려로 복권되었다.[1] 유배 이유는 불분명하다.
1849년 (철종 즉위년) 6월 23일 소의대부, 익평군에 봉작되었다. 7월 1일 사옹원제조, 7월 12일 중의대부, 7월 26일 사옹원제조, 7월 28일 사옹원제조, 9월 28일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했다. 11월 11일 종척집사, 11월 12일 승헌대부로 승진했다. 1850년 (철종 1) 2월 5일 오위도총부도총관, 3월 27일 도총관, 3월 30일 숭헌, 6월 7일 가덕으로 승진했다. 1851년 (철종 2) 1월 2일 의덕대부를 거쳐 흥록대부로 승진했다.
1851년 (철종 2) 8월 6일 현록대부로 승진했다. 6월 26일 청나라 동지사 정사, 10월 20일 사은주청사겸 세백사 정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1853년 (철종 4) 2월 29일 선원보 찬수감인교정관, 4월 1일 통례원인의 인헌관, 1855년 7월 26일 오위도총부 도총관, 휘경원 천원수빈관, 수릉 천장도감 대존관, 1857년 (철종 8) 1월 7일 인의 인헌관, 1월 25일 종친부유사당상, 순원왕후 사망 후 8월 5일 인릉 수릉관, 1858년 (철종 9) 8월 5일 종척집사, 수릉관, 1859년 8월 15일 종헌관을 역임했다.
2. 1. 1. 출생과 가계
1824년 10월 16일 한성부에서 풍계군 이당과 그의 첩 전주이씨 사이의 서자로 태어났다.[1] 그는 사도세자의 서증손이며, 은언군의 손자였다. 명종 때인 1563년 사림파 집권 이후 동성동본 금혼령이 내려졌지만, 풍계군의 아버지 은언군이나 풍계군은 모두 동성동본인 전주이씨를 첩으로 두었다. 익평군의 생모 전주이씨는 선원세계나 선원보에 기록되지 못했다.[1]
1900년대 이후 편찬된 선원계보에는 서자라는 칭호가 사라졌다. 그는 생부 풍계군이 서삼촌 은전군의 양자로 입양되었고, 다시 익평군은 친백부이자 아버지 풍계군이 은전군의 양자가 되었으므로 계통상 5촌이 되는 상계군 이담의 사후 양자로 입양되어, 은언군의 적손자가 되었다. 3세 때 생부 풍계군을 잃었고, 상계군 사건, 상산군부인 송씨와 상계군의 부인 평산군부인 평산신씨의 천주교 신봉 사건 등으로 집안이 역모로 몰려 작위를 받지 못했다.[2]
헌종 재위 기간인 1844년에는 모함을 받아 해도로 유배되었다가 1849년 복권되었다.
그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할아버지 | 은언군 이인 | 1754년 5월 29일 | 1801년 6월 13일 | |
할머니 | 상산군부인 진천송씨 | 1753년 10월 15일 | 1801년 4월 4일 | |
양 할아버지 | 은전군 이찬 | 1759년 | 1778년 | 생부 풍계군의 양부 |
양부 | 상계군 이담 | 1769년 | 1786년 11월 20일 | |
양모 | 평산군부인 신씨 | ? | 1801년 3월 17일 | |
생부 | 풍계군 이당 | 1783년 2월 1일 | 1826년 5월 8일 | |
생모 | 광산현부인 증 광산군부인 광산김씨 | 1803년 4월 4일 | 1864년 3월 29일 | 김시채(金時彩)의 딸 |
생모 | 전주이씨 | ? | 1850년 이전 사망 | [1] |
부인 | 덕성군부인 덕수이씨 | 1820년 1월 4일 | ? | 이우신(李愚信)의 딸 |
양자 | 덕안군 이재덕 | 1852년 | 1877년 | 덕흥대원군 11대손이자 응천군 이돈 8대손 이계(李烓)의 차남. |
며느리 | 정부인 달성서씨 | 1850년 9월 25일 | ? | 서우보(徐佑輔)의 딸 |
양손자 | 이언용 | ? | 1893년 | 휘경원참봉 역임 |
양손자 | 이완용 | 1872년 11월 13일 | 1936년 | 덕흥대원군의 12대손 선무전 이재경(李載經)의 아들, 양자 이재덕의 양자 |
첩 | 미상 | - | - | |
서자 | 경은군 이재성 | 1860년 11월 10일 | ? | |
서며느리 | 군부인 안동권씨 | 1859년 10월 11일 | 1888년 4월 15일 | 권재익(權在益)의 딸 |
서손자 | 이춘용(李萭鎔) | 1881년? | ? | |
서며느리 | 군부인 여흥이씨 | 1879년 4월 29일 | ? | 이병로(李丙老)의 딸 |
서손자 | 이우용(李萭鎔) | 1899년? | ? |
2. 1. 2. 유배와 복권
1844년 그는 모함을 받아 해도로 유배되었으나, 1849년 철종 즉위 후 대왕대비와 철종의 특별 배려로 복권되었다.[1] 유배 이유는 불분명하다.2. 2. 철종 즉위와 복권
1849년 철종이 즉위하면서 이희는 소의대부에 봉해지고, 같은 날 익평군에 봉작되었다. 이후 사옹원[제조], 오위도총부부총관, 오위도총부도총관, 종친부유사당상 등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851년 현록대부로 승진하여 최종 관직은 현록대부에 이르렀다.2. 2. 1. 관직 임명
1849년(철종 즉위년) 6월 23일 소의대부(昭義大夫)와 익평군(益平君)에 봉해졌다. 그해 7월 1일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에 임명된 뒤 7월 12일 중의대부(中義大夫)로 승진하고, 7월 26일과 7월 28일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를 역임하였다. 9월 28일 오위도총부부총관이 되었다.1849년 11월 11일 종척집사(宗戚執事)를 거쳐 11월 12일 승헌대부(承憲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다. 1850년(철종 1) 2월 5일과 3월 27일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역임하고, 3월 30일 숭헌(崇憲), 6월 7일 가덕(嘉德)으로 품계가 올라갔다. 1851년(철종 2) 1월 2일 의덕대부(宜德大夫)를 거쳐 흥록대부로 승진했다.
1851년 8월 6일 현록대부로 승진했다. 그해 6월 26일과 10월 20일 청나라에 동지사신(冬至使臣)과 사은주청사겸 세백사(謝恩奏請兼歲幣使)의 정사(正使)로 연경에 다녀왔다. 1853년(철종 4) 2월 29일 선원보(璿源譜) 찬수감인교정관(纂修監印校正官)을 거쳐 4월 1일 통례원인의 인헌관(引儀引獻官)을 겸직하고, 1855년 7월 26일 오위도총부 도총관, 휘경원 천원수빈관(遷園守殯官),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代奠官)을 역임하였다. 1857년(철종 8) 1월 7일 인의 인헌관, 1월 25일 종친부유사당상, 8월 5일 인릉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었다. 1858년(철종 9) 8월 5일 종척집사와 수릉관, 1859년 8월 15일 종헌관을 역임하였다. 최종 관직은 현록대부에 이르렀다.
2. 2. 2. 청나라 사신 파견
1851년(철종 2) 6월 26일 청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冬至使)의 정사(正使)로 연경에 다녀왔다. 그해 10월 20일 사은주청사겸 세백사(謝恩奏請兼歲幣使)의 정사(正使)로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 대해 사대 외교를 펼치고 있었으며, 동지사와 사은사는 조선이 청나라에 정기적으로 보내는 사절단이었다. 동지사는 동짓달에, 사은사는 청나라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로 보내는 사절이었다. 주청사는 중요한 외교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세백사는 조공을 바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익평군은 정사로서 이러한 사절단을 이끌고 청나라에 가서 외교적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이는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 2. 3. 기타 활동
1853년(철종 4) 2월 29일 선원보 찬수감인교정관(纂修監印校正官)을 거쳐 4월 1일 통례원 인의 인헌관(引儀引獻官)을 겸직하고, 1855년 7월 26일 오위도총부 도총관, 휘경원 이장시 휘경원 천원수빈관(遷園守殯官), 수릉 이장 시 수릉천장도감 대존관(代奠官), 1857년(철종 8) 1월 7일 인의 인헌관, 1월 25일 종친부 유사당상 등을 지냈다. 순원왕후가 죽자 8월 5일 인릉 수릉관(守陵官)에 제수되었다. 1858년(철종 9) 8월 5일 종척집사, 수릉관, 1859년 8월 15일 종헌관을 역임했다.2. 3. 질병과 최후
철종은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인 이희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어의를 보내 치료하게 했으나, 이희는 1863년(철종 14) 9월 18일에 향년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철종은 이희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단정하고 성실한 성품을 기리고, 장례를 특별히 예우하였다.2. 3. 1. 투병과 사망
철종은 어의를 보내 그의 병을 치료하려 하였으나 차도가 없었다. 1863년(철종 14) 9월 16일 철종은 종친부(宗親府)에 익평군(益平君)의 후사(後嗣)를 의논하여 정할 것을 명하였다.[1]익평군에게는 적자가 없었고 첩에게서 얻은 서자 이재성만이 있었다. 결국 양자를 들여 대를 잇도록 결정되었다. 9월 17일 종친부에서는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10세손(世孫)이자 고(故) 현감(縣監) 이병식(李秉植)의 손자인 이덕주(李德周)를 익평군의 후사로 정하고, 예(禮)에 따른 절차를 거행할 것을 아뢰었다.[2]
1863년(철종 14) 9월 18일 익평군이 별세하자 철종은 중사(中使)를 보내어 상을 돕게 하고 장례 물품을 보냈다. 또한 예장(禮葬)과 봉록(俸祿) 등은 전례에 의거해 거행하도록 하고, 성복(成服)하는 날에는 내시(內侍)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철종은 이희(曦)에 대해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로서, 기우(器宇)가 돈중(敦重)하고 품행(品行)이 슬기롭고 순수하였으며, 온갖 곤경을 겪었으면서도 조심하는 마음가짐으로 욕심을 참고, 화려한 겉치레를 버리며 만족할 줄 알았다."고 평가하였다. 철종도 익평군이 죽고 3개월 뒤인 1863년 12월 8일에 별세하였다. 이희의 향년은 40세였다.
2. 3. 2. 철종의 애도
철종은 이희가 죽자 "이 종실(宗室)은 단정하고 성실한 자태와 근신하고 두려워하는 규범을 내가 깊이 잘 알고 있는데, 불행히 병이 들어 갑자기 졸서(卒逝)했다는 단자(單子)를 보게 되니, 지난일을 추념(追念)함에 슬픈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라며 애도했다.철종은 또한 "희(曦)는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로서, 기우(器宇)가 돈중(敦重)하고 품행(品行)이 슬기롭고 순수하였으며, 온갖 곤경을 골고루 겪었으면서 조심하는 마음가짐으로 기욕(嗜欲)을 참아 내었고, 번화한 겉치레를 떨어버리며 만족할 줄을 알았다. 자신에 대한 일을 검속하게 하여 가정에 대한 일을 다스렸으며, 말에 발표하여 일에 시행하였으므로 행실이 칭술할 만한 것이 있고 선행(善行)에 기록할 만한 것이 있으니, 이것이 종신토록 성예(聲譽)를 보전하게 된 이유인 것으로, 그가 평생에 당했던 일을 살펴보건대 마침내 범상(凡常)의 인물이 되도록 한 것은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평가했다.
1863년 9월 18일 이희가 세상을 떠나자, 철종은 중사(中使)를 보내 호상(護喪)하게 하고 동원 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보냈으며, 예장(禮葬)과 봉록(俸祿) 등은 전례에 의거해 거행하도록 했다. 또한 성복(成服)하는 날에는 내시(內侍)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했다. 철종도 이희가 죽고 3개월 뒤인 1863년 12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2. 3. 3. 후사 논의
철종은 어의를 보내 그의 병을 치료하려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1863년(철종 14) 9월 16일 철종은 "익평군(益平君)의 병이 이미 가볍지 않다고 하니, 각파(各派)의 문장(門長)들로 하여금 그의 후사(後嗣)를 의정(議定)하여 즉시 등문(登聞)하게 할 것으로 종친부(宗親府)에 분부(分付)하라."는 하교를 내렸다.[1]익평군 이희에게는 적자가 없었고, 첩에게서 얻은 서자 이재성만이 있었다.[1] 결국 양자를 들여 대를 잇도록 결정되었다.[1] 9월 17일 종친부(宗親府)는 익평군의 후사를 논의한 결과,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10세손이자 현감(縣監) 이병식(李秉植)의 손자인 이덕주(李德周)가 13세로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예법에 따른 절차를 진행할 것을 요청했고 철종이 윤허하였다.[1]
2. 4. 사망 직후
1863년 11월 25일 경기도 양주군 안현산(鞍峴山)에 안장되었다가 한성부 연희궁 서쪽 언덕으로 이장되었다.[1]2. 4. 1. 시호와 배향
1863년(철종 13) 10월 30일 철종의 명으로 시호를 정하게 하였다. 11월 1일 종묘에 철종의 묘정에 공신 자격으로 배향되었고, 11월 7일 시호는 효희(孝僖)로 추증되었다. 김병학이 올린 시호 중 효희(孝僖, 慈惠愛親曰孝 小心恭愼曰僖)와 효정(孝貞, 慈惠愛親曰孝 廉約自守曰貞), 정민(貞敏, 廉約自守曰貞 好古不怠曰敏) 중 첫번째인 효희가 그의 시호로 채택된 것이다.[1]2. 4. 2. 장례와 추증
1865년 (고종 2년) 9월 11일 고종은 익평군(益平君)이 철종의 가까운 친족이므로, 그의 대상(大祥)에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3. 가족 관계
은언군 이인의 손자이자 풍계군 이당의 서자인 이희는, 친부는 풍계군 이당이고 생모는 광산 김씨와 전주 이씨이다.[1] 본부인 덕성군부인 덕수이씨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첩에게서 서자 이재성을 얻었다. 고종의 명으로 응천군 이돈(凝川君 李潡) 8대손 이계(李烓)의 차남 이재덕을 사후양자로 삼았다.
- 할아버지 :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䄄, 1754년 5월 29일 ~ 1801년 6월 13일)
- 할머니 : 상산군부인 진천송씨(常山郡夫人 宋氏, 1753년 10월 15일 ~ 1801년 4월 4일)
- 양 할아버지 : 은전군 이찬(恩全君 李禶, 1759년 ~ 1778년), 생부 풍계군의 양부
- 아버지(양부) : 상계군 이담(常溪君 李湛, 1769년 ~ 1786년 11월 20일)
- 어머니(양모) : 평산군부인 신씨(郡夫人 申氏, ? - 1801년 3월 17일)
- 아버지(생부) : 풍계군 이당(豊溪君 李瑭, 1783년 2월 1일 - 1826년 5월 8일)
- 어머니(생모) : 광산현부인 증 광산군부인 광산김씨(光山縣夫人 贈 光山郡夫人光山金氏, 1803년 4월 4일 ~ 1864년 3월 29일), 김시채(金時彩)의 딸
- 어머니(생모) : 전주이씨(全州李氏[1], ? - 1850년 이전 사망)
- 부인 : 덕성군부인 덕수이씨(德城郡夫人 德水李氏, 1820년 1월 4일 ~ ?), 이우신(李愚信)의 딸
- 첩 : 이름 미상
- * 서자 : 경은군 이재성(景恩君 李載星, 1860년 11월 10일 ~ ?)
- * 서자 경은군 이재성의 부인
- ** 군부인 안동권씨(1859년 10월 11일 ~ 1888년 4월 15일, 권재익(權在益)의 딸
- ** 군부인 여흥이씨(1879년 4월 29일 ~ ?), 이병로(李丙老)의 딸
- 양자 : 덕안군 이재덕(德安君 李載悳, 1852년 - 1877년), 덕흥대원군 11대손이자 응천군 이돈(凝川君 李潡) 8대손 이계(李烓)의 차남.
- 며느리 : 정부인 달성서씨(貞夫人 達城徐氏, 1850년 9월 25일 - ?), 서우보(徐佑輔)의 딸
- * 양손자 : 이언용(李彦鎔, ? - 1893년, 휘경원참봉 역임)
- * 양손자 : 이완용(李完鎔, 1872년 11월 13일 - 1936년), 덕흥대원군의 12대손 선무전 이재경(李載經)의 아들, 양자 이재덕의 양자
3. 1. 가계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양부 | 상계군 이담 | 1769년 | 1786년 11월 20일 | 은언군의 아들 |
양모 | 평산군부인 신씨 | ? | 1801년 3월 17일 | |
생부 | 풍계군 이당 | 1783년 2월 1일 | 1826년 5월 8일 | 은언군의 서손자, 은전군의 사후 양자 |
생모 | 광산현부인 증 광산군부인 광산 김씨 | 1803년 4월 4일 | 1864년 3월 29일 | 김시채(金時彩)의 딸 |
생모 | 전주 이씨[1] | ? | 1850년 이전 | |
부인 | 덕성군부인 덕수 이씨 | 1820년 1월 4일 | ? | 이우신(李愚信)의 딸 |
첩 | 미상 | |||
양자 | 덕안군 이재덕 | 1852년 | 1877년 | 덕흥대원군 11대손, 응천군 이돈 8대손 이계의 차남 |
며느리 | 정부인 달성 서씨 | 1850년 9월 25일 | ? | 서우보(徐佑輔)의 딸 |
양손자 | 이언용 | ? | 1893년 | 휘경원참봉 역임 |
양손자 | 이완용 | 1872년 11월 13일 | 1936년 | 덕흥대원군의 12대손, 이재경(李載經)의 아들, 덕안군 이재덕의 양자 |
서자 | 경은군 이재성 | 1860년 11월 10일 | ? | |
서며느리 | 군부인 안동 권씨 | 1859년 10월 11일 | 1888년 4월 15일 | 권재익(權在益)의 딸 |
서손자 | 이춘용(李萭鎔) | 1881년? | ? | |
서며느리 | 군부인 여흥 이씨 | 1879년 4월 29일 | ? | 이병로(李丙老)의 딸 |
서손자 | 이우용(李萭鎔) | 1899년? | ? |
3. 2. 양자 입적
풍계군의 서자였던 그는 은언군의 서손이었다. 이후 그는 삼촌 은전군 이찬의 사후양자로 입양된 풍계군의 서자로서, 생가의 적(嫡) 백부이자 호적상 종숙이 되는 상계군의 양자로 다시 입양되어 은언군의 적손자가 되었다.[2] 그러나 상계군 사건, 상산군부인 송씨와 상계군의 부인 평산군부인 평산신씨의 천주교 신봉 사건 등으로 집안이 역모로 몰렸으므로 그는 작위를 받지 못했다.[2]3. 3. 서자 문제
풍계군 이당은 첩 전주이씨에게서 서자 이희(후일의 익평군)를 얻었다.[1] 그러나 1563년 사림파 집권 이후 내려진 동성동본 금혼령에도 불구하고, 풍계군의 아버지 은언군과 풍계군은 모두 동성동본인 전주이씨를 첩으로 두었다. 익평군의 생모 전주이씨는 선원세계나 선원보에 기록되지 못했다.[1]익평군은 풍계군의 서자였고, 익평군의 아들 경은군 이재성 역시 서자였으므로, 익평군은 양자를 들여야 했다.
4. 평가
이희(익평군)에 대한 평가는 현재 남아있는 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하게 내리기 어렵다.
참조
[1]
웹사이트
顯祿大夫益平君諡狀
http://yoksa.aks.ac.[...]
[2]
문서
상산군부인 진천송씨와 며느리 평산군부인 평산신씨는 모두 세례명이 마리아이다. 따라서 송마리아, 신마리아로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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