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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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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잇키(一揆)는 본래 중국에서 유래한 용어로, 일본에서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의식이나 행동을 일치시키거나 결집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14세기부터 센고쿠 시대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발생했으며, 무사, 농민, 사찰 등 다양한 주체들이 잇키를 결성하여 권력에 저항하거나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려 했다. 에도 막부 시대에는 잇키를 금지하고 '소동' 등의 용어로 대체되었지만, 이후에도 다양한 형태로 백성 잇키가 발생했다. 잇키는 일본 사회의 변화와 함께 그 형태와 의미가 변해왔으며, 중세에는 토지 문제, 근세에는 과중한 세금 부담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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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바라의 난은 1637년부터 1638년 시마바라 반도와 아마쿠사 제도에서 과도한 세금, 기근,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발생한 농민 반란으로, 막부군의 진압과정에서 네덜란드의 지원이 있었으며, 일본의 기독교 탄압과 쇄국 정책 강화의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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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키
개요
명칭잇키 (一揆)
이치미도신 (一味同心)이치미도우신 (일본어: 一味同心, いちみどうしん)
로마자 표기Ikki
역사적 배경
발생 시기일본 역사
시대적 특징농민, 상인, 하급 무사 등이 주도
사회 불만과 저항의 표출
목적 달성을 위한 폭력적인 수단 동원
잇키의 종류
농민 잇키 (百姓一揆)주요 주체: 농민
발생 원인: 과도한 세금, 억압적인 지배
목표: 세금 감면, 영주에 대한 저항
돗코 잇키 (土一揆)주요 주체: 농민, 상인
발생 원인: 고리대금업자의 횡포
목표: 빚 탕감 요구
무사 잇키 (武士一揆)주요 주체: 하급 무사
발생 원인: 정치적 불만, 경제적 어려움
목표: 봉건 영주에 대한 항거
쇼민 잇키 (庶民一揆)주요 주체: 일반 백성
목표: 사회적 불만 해소
주요 잇키 사례
쇼추의 난 (正中の変)가마쿠라 막부 말기의 잇키
가키쓰의 난 (嘉吉の乱)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잇키
겐로쿠 효에쓰 잇키 (元禄郷 hyhyōhyōetsu ikki)에도 시대의 잇키
시마바라의 난 (島原の乱)에도 시대의 대규모 잇키
잇키의 영향
사회 변화봉건 질서에 대한 저항
사회 의식 성장
정치 변화막부와 영주의 통치 방식 변화
민중의 정치 참여 요구 증가
문화민중 문화 발달
잇키 관련 설화 및 예술 작품 등장

2. 잇키의 어원과 용법

'잇키'라는 용어는 원래 중국의 고전인 《맹자》의 “'''先聖後聖 其''揆一''也'''”[19]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나의 기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잇키는 동사로 사용될 때는 특정 목적을 위해 의식이나 행동을 일치시키거나 결집하는 것을 의미한다.[23] 14세기 이후 고쿠진(国人) 잇키가 성행하면서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발생했다. 17세기 에도 막부는 잇키를 금지하고 '도당', '소동'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게 했다.[24][25]

2. 1. 용어의 기원

맹자(孟子)》〈이루(離婁)〉하편의 “'''先聖後聖 其''揆一''也'''”[19]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揆'''는 처음에 '''度'''라고 하여 계량한다는 의미였으며, '''計'''나 '''量'''이라는 글자와 함께 물건을 계측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의미가 '''거리(道程, みちのり)'''나 '''길(道)'''을 뜻하게 되고, 결국 추상적으로 변하여 '''가르침(教え)'''이나 '''방법''', '''행위'''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21] 잇키와 같은 의미를 가진 용어로는 “일지(一致, いっち|잇치일본어)”, “일미(一味, いちみ|이치미일본어)”, “미방(味方, みかた|미카타일본어)”, “요도(与同, よどう)”, “요리키(与力, よりき)”, “도신(同心, どうしん)”, “이치도(一同, いちどう)” 등이 있다.[22]

2. 2. 의미의 변천

원래 "잇키"는 중국 맹자의 구절에서 유래한 말로, 처음에는 '헤아리다', '측량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19][20][21] 점차 '길', '가르침', '방법' 등 추상적인 의미로 변화하였다.[21]

일본에서는 잇키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용어들로 "일치(一致, いっち|잇치일본어)", "일미(一味, いちみ|이치미일본어)", "미방(味方, みかた|미카타일본어)", "여도(与同, よどう)", "요리키(与力, よりき)", "도신(同心, どうしん)", "일동(一同, いちどう)" 등이 사용되었다.[22]

헤이안 시대에는 단순히 동일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원정기에는 엔랴쿠지, 도다이지, 고후쿠지 등 절의 승려들이 모여 결의를 하고, 이를 잇키 계약이라고 칭했다.[2]

가마쿠라 시대에는 '마음을 하나로 한다', '동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동사적으로 사용되었다.[4] 또한, 점괘의 결과나 의견이 일치한다는 용례도 보였다.[3]

남북조 시대에는 절과 신사, 무가, 촌락 등 다양한 형태로 조직으로서의 잇키가 등장하게 되었다.[2] 무사의 잇키로는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친위대가 맺은 군단의 잇키가 있다.[2] 또한, 중소 무사층이 지역 집단을 결성한 고쿠진 잇키도 보였다.[4]

백성을 중심으로 한 잇키는 남북조 후기에 장원 단위의 장가(莊家)의 잇키가 일어났다.[2] 그 후, 도잇키가 등장했지만, 장가의 잇키가 장원 단위였던 것에 비해, 도잇키는 교토 등의 도시에서 발생했다.[2]

전국 시대가 되면 새로운 형태의 무가의 잇키가 출현하여, 잇코 잇키에 더해 법화종의 잇키도 출현했다.[2] 또한 전국 시대에는 넓은 지역에서 무사 외에도 백성이나 절, 신사 등이 유력 무사를 중심으로 결합하여 잇키를 하는 총국 잇키도 발생했다.[2]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막부와 번주에게 소원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6] 에도 초기에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무장 봉기보다 소원이 더 유효하다고 생각하여, 폭력·방화·도둑질 등을 금지하는 백성 잇키의 작법이 만들어져 준수되었다.[8]

2. 3. 동사적 용법

잇키는 "잇키한다"와 같이 동사로도 사용되며,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의식이나 행동을 '''일치''' 또는 '''결집'''시키는 것을 의미한다.[23] 14세기 고쿠진(国人)에 의해 잇키가 성행하면서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잇키는 14세기 전후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걸쳐 다양한 종류와 형태로 발생했다. 17세기 에도 막부는 도당금지령(徒党禁止令)을 발포하여 잇키를 금지했고, 잇키라는 용어 대신 “'''도당(徒党)'''”·“'''소동(騒動)'''”과 같은 용어가 사용되었다.[24][25]

2. 4. 시대별 용법의 변화

원래 "잇키"는 중국의 고전 맹자(孟子)에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했다.[19] 초기에는 '계량하다'는 의미였으나, 점차 '가르침', '방법', '행위' 등 추상적인 의미로 변화했다.[21] "일지(一致, いっち|잇치일본어)", "일미(一味, いちみ|이치미일본어)" 등 비슷한 의미의 용어들이 존재한다.[22]

14세기 이전까지 잇키는 '조직과 행동을 일체화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사례는 드물었다.[23] 헤이안 시대에는 단순히 동일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원정기에는 엔랴쿠지 등의 절의 승려들이 모여 결의를 하고 잇키 계약이라고 칭했다.[2] 가마쿠라 시대에는 '마음을 하나로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4] 점괘의 결과나 의견이 일치한다는 용례도 보였다.[3]

14세기 이후 고쿠진(国人) 잇키가 성행하면서 '조직'이라는 의미가 강해졌다.[23] 남북조 시대에는 절과 신사, 무가, 촌락 등 다양한 형태로 조직으로서의 잇키가 등장했다.[2] 무사의 잇키로는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친위대가 맺은 군단의 잇키가 있고,[2] 총령가의 추대나 견제를 목적으로 하는 일족 잇키도 있었다.[2] 중소 무사층이 지역 집단을 결성한 국인 잇키도 보였다.[4] 백성을 중심으로 한 잇키는 남북조 후기에 장원 단위의 장가(莊家)의 잇키가 일어났고,[2] 그 후 도잇키가 등장했다.[2]

전국 시대에는 새로운 형태의 무가의 잇키가 출현하여, 잇코 잇키와 법화종의 잇키도 출현했다.[2] 또한 전국 시대에는 넓은 지역에서 무사 외에도 백성이나 절, 신사 등이 유력 무사를 중심으로 결합하여 잇키를 하는 총국 잇키도 발생했다.[2]

에도 시대에는 막부의 도당금지령(徒党禁止令)으로 인해 '잇키' 대신 '도당(徒党)', '소동(騒動)'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24][25] 에도 시대에는 인정과 무위의 두 가지 정치 이념 아래에서 사람들은 폭력을 봉인하고, 막부와 번주에게 소원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6]

3. 잇키의 결성

잇키는 단순한 집단이 아니라, '일미신수(一味神水, いちみしんすい|이치미신스이)'라는 특별한 절차와 의식을 통해 결속된 집단을 의미한다.[26] 잇키는 공통의 목적을 위해 개인이 가진 모든 사회적 관계를 지양하고 일체화하는 수단을 취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이 일체화 수단이 바로 일미신수이며, 이를 통해 일미동심(一味同心)이라는 연대감을 가지는 집단이 되었다.[26]

일미신수 의례는 잇키 결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2][9] 잇키 참가자들은 신에게 결집 목적을 서약하는 기청문(起請文)을 작성하고, 잇키 계장(契狀)에 서명했다.[9] 이 계장을 태워 재로 만든 후 물에 섞어 마시는 의례가 바로 일미신수이다.[9]

1637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 에도 막부는 백성들이 패거리를 짓는 것을 금지하여 잇키를 금지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잇키"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요구 관철을 위해 "백성 잇키"를 계속해서 행했다.

3. 1. 일미신수(一味神水)

잇키 참가자들은 신사 경내에 모여 일미동심(一味同心)을 맹세하고 서약서(기쇼몬, 起請文)를 작성했다.[26][2] 이 서약서에는 구성원 각자가 서약을 어겼을 경우 신벌(神罰)이나 불벌(佛罰)을 받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작성된 서약서는 전원이 서명하였으며, 통상적으로 2통 이상 작성되었다. 서약서 중 1통은 신사에 바치고, 다른 1통은 태워 재로 만들어 신수(神水)와 섞어 마셨다.[27][28][9] 이 의식을 통해 신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를 강화했다. 신수를 마시는 행위는 신과 사람이 공유하고 융합하는 행위이며, 신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이 연대할 목적이었다.[29] 신수를 돌려 마시는 행위와 공동식사는 사람 사이의 결속력을 다지게 했다.

3. 2. 기타 결성 방법


  • '''서약(起請)의 종(鐘)'''


종을 울려 잇키 결성을 알리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일미신수와 함께 사용되기도 했다. 미네키시 스미오와 이루마다 노부오의 연구에 따르면, 금속기(金屬器)를 칠 때 발생하는 소리를 이용한 서약 방식이라고 한다. 신사사찰에서는 서약이나 결의와 같은 중요한 행위에 종이 널리 사용되었으며, 잇키 결성에도 이러한 방식이 사용되었다. 1273년, 고야산 영지인 도토미국 나카노쇼(那賀荘)의 백성들은 다이칸(代官)을 배척할 것을 결의한 뒤, 일미신수를 거쳐 종을 울렸다고 전해진다.[30]

  • '''긴초(金打, きんちょう)'''


서약할 때, 서약자가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는 금속 기구를 두드려 소리를 내는 서약 방식이다. 무사(刀), 승려(鉦), 여성은 거울(鏡, 금속 제품이어야 한다)을 두드렸다. 이 방법은 중세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근세에 이르러서도 일반 서민들에게 서약의 방법으로 남아있을 정도로 보편적이었다. 금속을 두드리는 것은 원래 '''신을 맞이하는 행위''' 또는 '''신을 불러오는 행위'''를 의미한다. 서약을 할 때, 신을 보증인으로 세우기 위해 금속기를 두드렸다. 이것은 금속기에서 울리는 소리가 신을 나타나게 한다는 주술적 신앙에 근거한 서약 방식이다.[31]

4. 잇키의 형태

헤이안 시대에는 잇키가 단순히 '동일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가마쿠라 시대에는 '마음을 하나로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남북조 시대에 들어서면서 절, 신사, 무가, 촌락 등 다양한 형태의 조직으로서 잇키가 등장했다.[2]

무로마치 시대에는 금융업자인 술집도창의 빚 탕감을 요구하는 도잇키 또는 도쿠세이 잇키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1428년에는 쇼초의 도잇키가 발생했다.[4]

전국 시대에는 정토진종 혼간지 파의 잇코잇키처럼 사찰을 기반으로 한 잇키도 나타났다. 가가 잇코 잇키는 오닌의 난에서 동군에 속했던 수호 도카시 씨를 추방하고 센고쿠 시대까지 100년 가까이 잇키 세력이 공화국 체제를 유지했다.[2]

에도 시대에는 백성들이 폭력을 봉인하고 막부와 번주에게 소원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백성 잇키는 에도 시대 특유의 사회 문화로 자리 잡았다.[8]

4. 1. 중세 시대의 잇키


  • 쓰치잇키( 土一揆일본어)
  • * 도쿠세이 잇키(徳政一揆일본어)
  • * 바샤쿠 잇키(馬借一揆일본어)
  • 구니잇키(国一揆일본어)
  • 쇼케잇키(荘家一揆일본어)
  • 잇코잇키(一向一揆일본어)
  • 햐쿠쇼 잇키(百姓一揆일본어)
  • 요나오시 잇키(世直し一揆일본어)
  • 종교 잇키

발생년도명칭
1479년 ~ 1576년엣추 잇코 잇키
1488년 ~ 1580년가가 잇코 잇키
1563년미카와 잇코 잇키
1570년나가시마 잇코 잇키
1574년에치젠 잇코 잇키
1577년사이카 잇코 잇키
1532년 ~ 1536년홋케 잇키


  • 무사에 의한 봉기

발생년도명칭
1578년이가 소고쿠 잇키
1585년소야마 잇키
1586년기타야마 잇키
1587년히고 쿠닌 잇키
1589년아마쿠사 쿠닌 잇키
1590년카사이 오사키 잇키
1590년와가・히에누키 잇키
1590년센보쿠 잇키
1592년우메키타 잇키
1594년카나야마 잇키
1600년이와사키 잇키
1600년우라도 잇키


4. 2. 근세 시대의 잇키

1637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 에도 막부는 백성들이 패거리를 짓는 것을 금지했고, 잇키는 금지되었다.[11] 농민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잇키"라고 절대 부르지 않았지만, 농민들이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패거리를 짓는 햐쿠쇼잇키는 계속해서 행해졌다.[11]

근세의 햐쿠쇼잇키에는 다음과 같은 형태가 있었다.[11]

  • 폭동 - 농민의 폭력적인 봉기[11]
  • 도산 - 한 가구나 마을 전체가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것[11]
  • 월소 - 제도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고 상급 관리에게 호소하는 것[11]
  • 강소 - 다수의 농민이 성 아래나 대관소 등에 몰려가 호소하는 것[11]
  • 우치코와시[11]


에도 시대 전기에는 직소도산 등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잇키가 주로 행해졌다. 중기에는 전번 잇키나 총백성 잇키, 강소 등으로 불리는 대규모 봉기가 주류가 되었다. 만 명이나 되는 백성이 집결하는 대규모 잇키였지만, 가옥을 조금 손상시키는 정도였으며, 방화나 약탈·살상 등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칼 사냥 이후에도 대량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이 무장하는 일은 없었고, 이나 괭이 등의 농기구를 들고 조총이나 죽창을 공격에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대응하는 무사 측도 원칙적으로 강경한 대응을 취할 수 없었고, 조총을 사용하는 데에는 막부의 허가가 필요했다. 잇키의 발생은 막부로부터 통치의 실패로 간주될 수도 있었고, 최악의 경우에는 영주의 처벌이나 개역의 위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영주 측도 온건한 대응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햐쿠쇼잇키의 투쟁 형태는 대표월소, 총백성 잇키, 촌방 소동, 국소 등으로 분류된다.

에도 시대 후기 덴메이·덴포 연간에는 다시 광역의 잇키가 다발했다. 무슈 소동에서는 무숙 등 "악당"이라고 불리는 집단에 주도되어, 무기를 휴대하고 파괴뿐만 아니라, 강도나 방화 등, 햐쿠쇼잇키의 작법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는 형태의 잇키도 보였다. 다만, 무기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막부 측에만 있고, 호사카 사토시는 막부가 총격으로 진압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고 있다. 막말에는 요나오시잇키가 각지에서 발생했다.

오자 유이치는 당시 일반 백성이 "무사는 백성의 생활이 제대로 성립하도록 좋은 정치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고, 정치 참여나 체제 변혁의 의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햐쿠쇼잇키는 반체제 운동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 요나하 준은 "정치는 모두 윗분에게 맡기고, 단 증세만은 일절 거부"라고 표현한다.

막부는 잇키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성황리에 열리던 본 춤을 규제하기도 했다.[12]

발생년도명칭
1603년다키야마 잇키
1608년야마시로 게이초 잇키
1614년기타야마 잇키
1615년기슈 잇키
1620년소야산 잇키
1637년시마바라의 난
1652년고하마 번령 쇼오 1년 잇키
1677년구조 잇키(엔포)
1686년조쿄 소동 (가스케 소동)
1690년산인・쓰보야 마을 잇키
1720년난잔 미쿠라인 소동
1722년에치고 질지 소동
1726년야마나카 잇키 (미마사카 쓰야마 팔천인 폭동)
1729년이와시로 54개 마을 농민 폭동
1739년겐분 잇키 (칸에몬 소동)
1745년가미오 와카사노카미 증징 반대 잇키
1748년히메지 번 간엔 잇키
1748년간엔의 백성 소동
1753년모미스리 소동
1754년구조 잇키
1761년우에다 소동
1764년덴마 소동
1768년니가타 메이와 소동
1771년무지개 소나무 잇키
1771년오하라 소동
1781년비단 잇키
1786년스쿠모 잇키
1793년무자에몬 잇키
1804년우시쿠 스케고 잇키
1811년다케다 잇키
1814년호쿠에쓰 소동
1822년세바 소동
1825년아카미노 소동
1831년조슈 번 덴포 잇키
1836년덴포 소동 (군나이 소동, 가이 일국 소동)
1838년사도 일국 잇키
1842년야마시로타니 잇키
1842년오미 덴포 잇키
1847년산헤이 잇키
1856년시부조메 잇키
1866년기소 소동


5. 잇키의 역사

헤이안 시대에는 잇키가 단순히 '동일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엔랴쿠지, 도다이지, 고후쿠지 등 절의 승려들이 모여 결의를 하고, 이를 잇키 계약이라고 칭했다. 1184년에는 죠큐지에서 '만산잇키노기쇼'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2]

가마쿠라 시대에는 '마음을 하나로 한다', '동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잇키'는 동사적으로 사용되었다.[4] 이 시대에는 점괘의 결과나 의견이 일치한다는 용례도 보였다.[3] 가마쿠라 시대에도 잇키가 조직체라는 인식은 희박하여,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 동심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의미가 강했다.[2]

남북조 시대에는 절과 신사, 무가, 촌락 등 다양한 형태로 조직으로서의 잇키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크게 변화하였다.[2]

5. 1. 중세

남북조 시대에는 무가(武家) 조직을 '잇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태평기』에는 백기잇키, 적기잇키, 헤이잇키 등의 일족잇키가 나타나며, 무로마치 막부가 잇키에 대해 명령을 내리는 사례도 보인다[2] 이 시기에는 장원 농민들이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장가의 잇키'를 일으키기도 했다.[2] 고랴쿠의 정변에서는 간레이(관령) 호소카와 요리유키의 해임을 요구하며 쇼군 어소를 포위한 (고쇼마키) 수호 다이묘들을 "잇키중"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들은 무장을 하고 있었지만 전투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금융이 발달하면서 술집과 토창과 같은 금융업자들이 부를 얻게 되자, 빚 탕감을 요구하는 도잇키 또는 도쿠세이 잇키가 자주 발생했다.[2] 여기에는 무사나 낭인이 지도층으로, 일반 서민들이 참여하였다. 1428년 (쇼초 원년)에는 진손이 "일본 개벽 이래, 토민 봉기의 시작이다."라고 평가한 쇼초의 도잇키가 발생했다. 1450년대부터 1460년대에는 특히 도잇키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3년에 한 번꼴로 일어났다.[2]

무사층의 잇키도 계속되었는데, 이를 고쿠진 잇키라고 부른다.[2] 이들 무가(武家)의 잇키는 다른 참가자를 압도하는 정통성이나 무력을 가진 지도자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잇키 계정에서 볼 수 있듯이, 국지적으로는 참가자들이 평등하고 민주적인 합의제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신속하고 통일된 지도를 할 수 없어, 대부분 일시적으로 강세를 보여도 내부 분열 등으로 약해져 개별적으로 격파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수호 등 상위자가 지역의 중소 무사에게 잇키를 조직하게 하여 실질적인 가신단으로 편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닌의 난 이후에는 넓은 범위에서 고쿠진이 집결하는 야마시로의 쿠니 잇키, 이가 소고쿠 잇키|이가 잇키일본어, 코카 군중소 등의 쿠니 잇키가 기내에서 발생했다.

이 시대에는 사찰도 영주였기 때문에, 사찰을 기반으로 한 잇키도 만들어졌다. 정토진종의 혼간지 파나 다카다 파, 법화종 등의 문도가 자신이 속한 교단을 중심으로 일으킨 잇키도 있었다. 특히 유명한 것은 정토진종 혼간지 파의 잇코잇키로, 가 state(이시카와현)에서는 오닌의 난에서 동군에 속했던 수호인 도카시 씨를 추방하고, 센고쿠 시대까지 100년 가까이 잇키 세력이 공화국적인 체제를 유지했다(가가 잇코 잇키). 그러나 이러한 잇키는 문도 이외의 참가자도 많아, 당시에는 '토잇키'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2]

센고쿠 시대 말기에는 무사 집단을 잇키라고 부르는 일은 거의 없어지고, 토민·백성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2] 그러나 무사의 잇키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센고쿠 다이묘 권력 안에서 형태를 바꾸어 존속했다고 여겨진다.[2]

  • 주요 사건

연도사건비고
1428년쇼초의 흙 잇키
1441년가키의 덕정 잇키
1462년간쇼의 흙 잇키
1400년다이몬지 잇키
1418년가즈사 혼 잇키
1429년하리마국 잇키
1465년누카타 군 잇키
1485년야마시로국 잇키
연도종교 잇키비고
1479년 ~ 1576년엣추 잇코 잇키
1488년 ~ 1580년가가 잇코 잇키
1563년미카와 잇코 잇키
1570년나가시마 잇코 잇키
1574년에치젠 잇코 잇키
1577년사이카 잇코 잇키
1532년 ~ 1536년홋케 잇키
연도무사에 의한 봉기비고
1578년이가 소고쿠 잇키
1585년소야마 잇키
1586년기타야마 잇키
1587년히고 쿠닌 잇키
1589년아마쿠사 쿠닌 잇키
1590년카사이 오사키 잇키
1590년와가・히에누키 잇키
1590년센보쿠 잇키
1592년우메키타 잇키
1594년카나야마 잇키
1600년이와사키 잇키
1600년우라도 잇키


5. 2. 근세

에도 시대에는 막부가 백성들이 패거리를 짓는 것을 금지하여 잇키는 금지되었다.[6] 그러나 농민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잇키"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백성 잇키'라는 형태로 저항을 계속했다.[6]

에도 시대 전기에는 직소도산처럼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잇키가 주로 행해졌다.[7] 중기에는 전번 잇키, 총백성 잇키, 강소와 같이 대규모 봉기가 주류를 이루었다.[8] 이들 잇키는 만 명이나 되는 백성이 집결했지만, 가옥을 조금 손상시키는 정도였고 방화, 약탈, 살상은 엄격하게 통제되었다.[8] 칼 사냥 이후에도 농민들은 대량의 무기를 보유했지만, 이나 괭이 같은 농기구를 사용했을 뿐 조총이나 죽창을 공격에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9] 무사 측도 원칙적으로 강경 대응을 할 수 없었고, 조총 사용에는 막부 허가가 필요했다.[10] 잇키 발생은 막부에게 통치 실패로 간주될 수 있어 영주 처벌이나 개역의 위험도 있었기 때문에, 영주 측도 온건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11] 백성 잇키의 투쟁 형태로는 대표월소, 총백성 잇키, 촌방 소동, 국소 등이 있다.

에도 시대 후기 덴메이, 덴포 연간에는 다시 광역 잇키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무슈 소동에서는 무숙 등 "악당"이라 불리는 집단이 주도하여 무기를 휴대하고 파괴뿐 아니라 강도, 방화 등 백성 잇키의 규범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기도 했다. 다만, 무기 사용 기록은 막부 측에만 있어, 호사카 사토시는 막부가 총격 진압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는지 지적한다.[12] 막말에는 세상 바로잡기 잇키가 각지에서 발생했다.

오자 유이치는 당시 일반 백성이 "무사는 백성의 생활이 제대로 성립하도록 좋은 정치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고, 정치 참여나 체제 변혁 의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백성 잇키는 반체제 운동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13] 요나하 준은 "정치는 모두 윗분에게 맡기고, 단 증세만은 일절 거부"라고 표현했다.[13]

막부는 잇키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성황리에 열리던 본 춤을 규제하기도 했다.[12]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신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징병령 반대 잇키, 해방령 반대 잇키 같은 신정 반대 잇키와 지조 개정 반대 잇키가 일어났다. 이 시기에는 죽창 등으로 무장한 잇키가 발생했는데, 메이지 6년 지쿠젠 죽창 잇키나 지조 인하에 성공했을 때 "죽창으로 푹 찌르니 2분 5리"라는 센류에서 죽창이 주요 무기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14] 총이나 칼도 사용되었고, 신정부 관리들이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다.[15] 이러한 잇키는 메이지 10년대에 진정되었고, 자유민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백성 잇키는 구시대적 운동으로 부정적으로 여겨져 "죽창 멍석 깃발"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16]

에도 시대의 주요 잇키
연도명칭
1603년 (게이초 8년)다키야마 잇키
1608년 (게이초 13년)야마시로 게이초 잇키
1614년 (게이초 19년)기타야마 잇키
1615년 (게이초 20년)기슈 잇키
1620년 (겐나 6년)소야산 잇키
1637년 (간에이 14년)시마바라의 난
1652년 (쇼오 1년)고하마 번령 쇼오 1년 잇키
1677년 (엔포 5년)구조 잇키(엔포)
1686년 (조쿄 3년)조쿄 소동 (가스케 소동)
1690년 (겐로쿠 3년)산인・쓰보야 마을 잇키
1720년 (교호 5년)난잔 미쿠라인 소동
1722년 (교호 7년)에치고 질지 소동
1726년 (교호 11년)야마나카 잇키 (미마사카 쓰야마 팔천인 폭동)
1729년 (교호 14년)이와시로 54개 마을 농민 폭동
1739년 (겐분 4년)겐분 잇키 (칸에몬 소동)
1745년 (엔교 2년)가미오 와카사노카미 증징 반대 잇키
1748년 (간엔 2년)히메지 번 간엔 잇키
1748년 (간엔 2년)간엔의 백성 소동
1753년 (호레키 3년)모미스리 소동
1754년 (호레키 4년)구조 잇키
1761년 (호레키 11년)우에다 소동
1764년 (메이와 1년)덴마 소동
1768년 (메이와 5년)니가타 메이와 소동
1771년 (메이와 8년)무지개 소나무 잇키
1771년 (메이와 8년)오하라 소동
1781년 (텐메이 1년)비단 잇키
1786년 (텐메이 6년)스쿠모 잇키
1793년 (간세이 5년)무자에몬 잇키
1804년 (분카 1년)우시쿠 스케고 잇키
1811년 (분카 8년)다케다 잇키
1814년 (분카 11년)호쿠에쓰 소동
1822년 (분세이 5년)세바 소동
1825년 (분세이 8년)아카미노 소동
1831년 (덴포 2년)조슈 번 덴포 잇키
1836년 (덴포 7년)덴포 소동 (군나이 소동, 가이 일국 소동)
1838년 (덴포 9년)사도 일국 잇키
1842년 (덴포 12년)야마시로타니 잇키
1842년 (덴포 13년)오미 덴포 잇키
1847년 (고카 4년)산헤이 잇키
1856년 (안세이 3년)시부조메 잇키
1866년 (게이오 2년)기소 소동
1869년 (메이지 2년)반도리 소동, 다카사키 5만 석 소동
1870년 (메이지 3년)마쓰시로 소동, 나카노 소동
1871년 (메이지 4년)미마사카 소요
1872년 (메이지 5년)테이스케 소동
1873년 (메이지 6년)지쿠젠 죽창 일규
1876년 (메이지 9년)이세 폭동 (도카이 대 일규)


참조

[1] 문서
[2] 웹사이트 演題「中世島津氏と『一揆』−地域比較の視点から」 https://www.pref.kag[...] 鹿児島県 2022-12-06
[3] 서적 吾妻鏡の謎 吉川弘文館 2009
[4] 웹사이트 第二章 南北朝・室町時代の福生市域とその周辺 https://www.lib.fuss[...] 福生市立図書館 2022-12-06
[5] 웹사이트 五 海とともに時代を生きた武士団-肥前松浦党- https://www.pref.sag[...] 佐賀県 2022-12-06
[6] 서적 幕末社会 岩波書店 2022-01-24
[7] 서적 幕末社会 岩波書店 2022-01-24
[8] 서적 幕末社会 岩波書店 2022-01-24
[9] 논문 国一揆と国人一揆について https://hdl.handle.n[...] 福井大学 2018-09
[10] 서적 江戸時代 岩波ジュニア新書 2000
[11] 논문 社会変動とシステム--百姓一揆より https://doi.org/10.1[...] 社会学研究会 1975
[12] 웹사이트 "「すこぶるわいせつ」禁止令も出た盆踊り、それでも各地で受け継がれ…無形文化遺産になるかも" https://www.yomiuri.[...] 2022-08-22
[13] 웹사이트 仲多度郡史(1918年)P897 https://dl.ndl.go.jp[...] 香川県仲多度郡編纂 2019-01-01
[14] 서적 日本の歴史5 戦国の世 岩波ジュニア新書 2000
[15] 웹사이트 懐ゲー「いっき」が小説化!しかも主人公がイケメン過ぎる https://ascii.jp/ele[...] アスキー・メディアワークス 2019-09-06
[16] 문서
[17] 서적 一揆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1982
[18] 서적 一揆 1 一揆史入門 도쿄대학출판회(東京大学出版会) 1981
[19] 문서
[20] 문서
[21] 서적 一揆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1982
[22] 서적 一揆 1 一揆史入門 도쿄대학출판회(東京大学出版会) 1981
[23] 서적 一揆 1 一揆史入門 도쿄대학출판회(東京大学出版会) 1981
[24] 서적 一揆 1 一揆史入門 도쿄대학출판회(東京大学出版会) 1981
[25] 서적 一揆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1982
[26] 서적 一揆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1982
[27] 문서
[28] 문서
[29] 서적 一揆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1982
[30] 서적 一揆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1982
[31] 서적 一揆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1982
[32] 서적 一揆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1982
[33] 문서
[34] 문서
[35] 문서
[36] 문서 조(租), 용(庸), 조(調), 과역 등 세금의 총칭
[37] 문서 장원에서 본가(本家) 다음가는 지위를 가진 영유자
[38] 문서 장원에서 영주의 대리로서 장원 업무를 관리하던 직위
[39] 문서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말기부터 중세까지 장원 현지에 머물면서 사무를 처리했던 장관(莊官)
[40] 문서 진닌(神人)이라고도 하며, 고대 말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신사(神社)에 예속되어 신사의 업무와 잡역에 동원된 하급 신직(神職)
[41] 문서 헤이안 시대 이후, 본래 장원영주와는 다른 권문사사(權門社寺)에 예속되어 잡역을 담당한 자
[42] 문서 중세, 신사(神社) 또는 조정에 음식(供御)을 납품할 의무와 특권을 가졌던 백성
[43] 문서 사원의 여러 건물에 부속된 잡역을 담당한 하급 승려
[44] 문서 어느 촌락에서 오랜기간 정주했던 부류
[45] 문서 주닌(住人)마우토(間人)라고도 하며, 장원제 아래에서 촌락공동체의 최하층에 위치한 근래에 들어온 주민을 가리킨다
[46] 문서 大人이라고도 쓰며, 촌락의 대표자 또는 실력자를 의미한다
[47] 문서 도시요리(年寄)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 무가(武家)에서는 정무에 참여하는 중신을 말하지만, 촌락에서는 오토나와 마찬가지로 촌락의 대표자 또는 실력자가 되는 어른으로서의 역명(役名)을 말한다
[48] 문서 와카슈라고도 하며, 촌락 내에서 비교적 젊은 사람을 말한다
[49] 문서 묘덴(名田, 중세에 공령(公領)이나 장원의 부과 단위가 된 땅)을 보유하고 있으며, 연공이나 부역 등의 납입 책임을 졌던 표준농민
[50] 문서 반가시라(番頭)라고도 하며, 장원제의 하급장관이나 무가(武家)의 경호역을 담당하는 자를 말한다
[51] 문서 오토나뱌쿠쇼(乙名百姓)에 종속된 소농민을 가리키며, 사료에 따라서는 平百姓, 下白姓 등으로도 표기된다
[52] 문서 사민(四民) 가운데 가장 낮은 신분을 가리킨다
[53] 문서 율령제에서 정한 지위가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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