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코 잇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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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잇코 잇키는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일본에서 일어난 일련의 종교적, 사회적 봉기를 가리킨다. 잇코 잇키는 렌뇨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에서 시작되었으며, 아미타 신앙에 기반한 공격적인 교리를 특징으로 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분산된 추종자였으나, 1486년 가가국을 장악하면서 평민 집단이 한 지방을 통치하는 사례를 만들었다. 잇코 잇키는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들과 갈등을 겪으며,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진압될 때까지 각지에서 세력을 떨쳤다. 주요 잇코 잇키로는 가가 잇코 잇키, 미카와 잇코 잇키 등이 있으며, 이들의 봉기는 사회적, 종교적 특징을 보였고, 다양한 무기와 전술을 사용했다. 잇코 잇키에 대한 탄압으로 카쿠레 넨부츠라는 비밀 결사가 결성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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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코 잇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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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잇코잇키 (一向一揆) |
의미 | 잇코슈 봉기 |
설명 | 조도신슈 불교 신자들이 봉건 시대 일본에서 자신들의 통치자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건 |
역사 | |
시작 시기 | 15세기 중반 |
종료 시기 | 1586년 |
정치 | |
정치 체제 | 신정 군사 연합 |
수도 | 이시야마 혼간지 (사실상, 1496–1580) 기타 지역 수도 |
종교 | |
종교 | 조도신슈 불교 |
언어 | |
사용 언어 | 후기 중세 일본어 |
지도자 | |
지도자 1 | 렌뇨 |
지도자 2 | 지쓰뇨 |
지도자 3 | 쇼뇨 |
지도자 4 | 겐뇨 |
재임 기간 1 | 1457–1499 |
재임 기간 2 | 1499–1525 |
재임 기간 3 | 1525–1554 |
재임 기간 4 | 1560–1592 |
직함 | 몬슈 |
관련 정보 | |
선행 국가 | 잇코슈 도가시 씨 |
후행 국가 | 오다 씨 도요토미 씨 도쿠가와 씨 마에다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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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정토진종 혼간지 교단이 무사, 농민, 상공업자 등을 조직화하여 형성된 종교적인 자치조직인 잇코 잇키는 1488년 가가국 슈고 도가시 마사치카를 멸망시킨 사건을 통해 그 세력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센고쿠 시대 말기 오다 노부나가 등에 의해 진압되기 전까지 전국 각지에서 안정되고 윤택한 마을을 구축하고 지배하였다.
셋쓰국 오사카와 이세국 나가시마, 미카와국 야하기가와 유역 등 잇코 잇키의 본거지는 습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들이 고도의 치수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지기도 한다.
잇코 잇키는 아사쿠라씨(朝倉氏)에게 빼앗긴 에치젠국 요시사키(吉崎)를 되찾기 위해 구즈류가와 전투(九頭竜川の戦い) 등 수십 번의 대규모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잇키의 확대가 무가 정권의 기반을 위협하는 것을 두려워한 오다 노부나가와 호소카와 하루모토 등의 중앙 권력자와의 싸움을 전개하는 등, 센고쿠 다이묘와 같이 패권을 다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1580년 오다 노부나가와의 항쟁에서 패배한 겐뇨가 오사카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퇴거한 이후, 혼간지의 분열 소동 등 내분이 일어나면서 잇코 잇키는 크게 세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3세기에는 소규모 토지 소유자 계급인 지자무라이가 상호 방어를 위해 "잇키"를 결성했다. 이들은 훌륭한 무사 가문 출신으로, 오랫동안 자신들의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신규 이주자들에 대항하여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지키려고 했다. 시라하타-잇키(백기 봉기)와 미카즈키-잇키(초승달 봉기)는 아시카가 막부에 대항한 대표적인 봉기였다. 한 지방 전체가 관련된 봉기는 쿠니-잇키(쿠니는 지방을 의미)라고 불렸다. 15세기의 봉기인 쓰치-잇키 또는 도-잇키는 더 조직적이었으며 농민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오닌의 난이 1477년에 종결되자, 수많은 잇키의 구성원들은 수도원과 신사를 점령했고, 부유한 시민들을 겁주기 위해 밤낮으로 경고 종을 울렸다.[2]
1506년에는 아사쿠라 씨가 혼간지 잇코슈 금지령을 내렸고, 1521년에는 에치고 나가오 씨가, 1555년에는 히고 사가라 씨가 금지령을 내렸다. 1572년에는 우에스기 겐신 군이 가가 잇코 잇키·엣추 잇코 잇키 연합을 격파하기도 했다.
2. 1. 렌뇨의 등장과 잇코 잇키의 형성
조지 산섬에 따르면, 잇코 잇키는 처음에는 렌뇨의 가르침을 따르는 분산되고 조직되지 않은 추종자들이었다. 렌뇨는 1457년 교토 혼간지 주지사로 임명되어 자신의 견해를 펼칠 수 있었다. 1465년, 렌뇨는 교토에서 도망쳐야 했고, 1471년 에치젠국에 새로운 혼간지 분원 사찰인 요시자키 고보를 세워 농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추종자를 얻기 시작했다.[2]1486년경에 첫 번째 폭력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는 잇코 잇키의 첫 번째 주요 조직적 행동이었다. 그들은 가가국의 지사를 전복하고 스스로 통제권을 잡았다. 이는 일본 역사상 평민 집단이 한 지방을 통치한 첫 번째 사례였다.[2][4]
렌뇨는 평화주의자였으며 평화를 가르쳤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격동적인 시대에 대한 방어로서의 자기 방어만을 옹호했다. 다이묘들은 전국에서 거의 끊임없이 서로 영토를 놓고 싸웠기에, 렌뇨는 자신의 종파 사찰들이 공격자로부터 요새화되고 방어되도록 했다. 잇코 잇키 봉기를 촉발한 것은 그의 카리스마적인 리더십과 대중주의적 가르침이었지만, 그는 결코 봉기를 옹호하거나 지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기는 1499년 렌뇨가 사망한 후에도 계속되었고, 그가 창시한 조도신슈의 하위 종파도 퍼져 나갔다. 그들은 오사카 외곽의 이시야마 혼간지, 오와리국과 이세국 경계의 나가시마, 그리고 미카와국 일련의 사찰에 요새를 구축했다.
2. 2. 잇코 잇키의 발전과 센고쿠 다이묘와의 갈등
1488년(조쿄 2년), 가가 슈고 도가시 마사치카를 멸망시킨 사건으로 잇코 잇키의 세력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센고쿠 시대 말기, 오다 노부나가 등에 의해 진압될 때까지 각지에서 안정되고 풍요로운 마을을 건설하고 지배하였다. 본거지로 여겨지던 셋쓰 오사카, 이세 나가시마, 미카와 야하기가와 유역 등은 습지대였기 때문에, 고도의 치수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아사쿠라 씨에게 빼앗긴 에치젠 요시자키를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대규모 전투를 일으켰고(구즈류가와 전투), 잇키가 지나치게 확대되어 무가 정권의 기반을 위협하는 것을 두려워한 오다 노부나가와 호소카와 하루모토 등의 중앙 권력자와 싸움을 벌이는 등, 센고쿠 다이묘와 같이 패권을 다투었다.
1506년 구즈류강 전투에서 아사쿠라 노리카게와 싸웠고, 1536년 센단노 전투에서 나가오 타메카게를 격파했다. 1555년 다이쇼지-오모테 전투에서 다시 아사쿠라 노리카게와 싸웠다.[3]
1580년(덴쇼 8년), 오다 노부나가와의 항쟁에서 패배한 겐뇨가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퇴거한 이후, 혼간지의 분열 소동 등 내분이 일어나 크게 세력이 약화되어 잇코 잇키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조지 산섬에 따르면, "잇코(일심) 종파는 신란의 가르침에서 발전하여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공격적인 교리로 변모한 아미타 신앙의 한 분파"라고 한다. 13세기에는 소규모 토지 소유자 계급인 지자무라이가 "상호 방어를 위해 리그(''잇키'')를 결성했다". 산섬에 따르면, 이는 "훌륭한 무사 가문 출신으로, 오랫동안 자신들의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신규 이주자들에 대항하여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지키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시라하타-잇키(백기 봉기)와 미카즈키-잇키(초승달 봉기)는 아시카가 막부에 대항한 수많은 봉기의 예시였다. 한 지방 전체가 관련된 봉기는 쿠니-잇키(쿠니는 지방을 의미)라고 불렸다. 봉기는 1351년, 1353년, 1369년, 1377년, 1384-1386년, 1366-1369년에 일어났다. 15세기의 봉기인 쓰치-잇키 또는 도-잇키는 더 조직적이었으며 "농민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오닌의 난이 1477년에 종결되자, "수많은 잇키의 구성원들"은 수도원과 신사를 점령했고, 산섬에 따르면 "부유한 시민들을 겁주기 위해 밤낮으로 경고 종을 울렸다".[2]
잇코-잇키는 처음에는 렌뇨의 가르침을 따르는 분산되고 조직되지 않은 추종자들이었다. 그의 선교 활동과 교토 혼간지 주지사로 임명된 것은 1457년이었으며,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비정통적인 견해를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1465년, 렌뇨는 교토에서 도망쳐야 했고, 1471년 에치젠국에 새로운 혼간지 분원 사찰인 요시자키 고보를 세웠다. 그는 이 사찰에서 농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추종자를 얻기 시작했다. 1486년경에 첫 번째 폭력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는 잇코-잇키의 첫 번째 주요 조직적 행동이었다. 그들은 가가국의 지사를 전복하고 스스로 통제권을 잡았다. 이는 일본 역사상 평민 집단이 한 지방을 통치한 첫 번째 사례였다.[2][4]
렌뇨는 평화주의자였으며 평화를 가르쳤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특별히 격동적인 시대에 대한 방어로서의 자기 방어만을 옹호했다. ''다이묘'', 즉 무사 군벌들은 전국에서 거의 끊임없이 서로 영토를 놓고 싸웠다. 따라서 렌뇨는 자신의 종파 사찰들이 공격자로부터 요새화되고 방어되도록 했다. 잇코-잇키 봉기를 촉발한 것은 그의 카리스마적인 리더십과 대중주의적 가르침이었지만, 그는 결코 봉기를 옹호하거나 지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기는 1499년 렌뇨가 사망한 후에도 계속되었고, 그가 창시한 조도 신슈의 하위 종파도 퍼져 나갔다. 그들은 오사카 외곽의 이시야마 혼간지, 오와리국과 이세국 경계의 나가시마, 그리고 미카와국 일련의 사찰에 요새를 구축했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그들의 증가하는 숫자와 힘은 당시 위대한 사무라이 지도자들의 관심과 우려를 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미카와국의 소헤이가 봉기하여 이 지방을 점령할 것을 걱정했다. 1564년, 그의 군대는 조도슈 소헤이의 도움을 받아 아즈키자카 전투에서 미카와 잇코-잇키를 격파했다.
''잇키''는 그들의 군사력보다는 경제적, 정치적 위협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와 같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이시야마 혼간지 및 기타 ''잇키''의 요새는 주요 무역로를 가로질러 위치해 있었고, 노부나가가 자신의 주요 영토 목표로 삼았던 지역과 동일했다. 이 나라 서부에서 수도로 가는 거의 모든 길이 ''잇키'' 또는 그 동맹국에 의해 통제되었고, ''잇키'' 운동의 대중주의적 뿌리는 그들에게 상당한 경제적 권력을 부여했다. 특히 노부나가는 이러한 이유와, 그들이 자신의 주요 적 또는 경쟁자 거의 모두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잇코-잇키의 파괴를 추구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한때 노부나가로부터 쇼군이 되도록 강력한 지원을 받았지만, 그들의 관계가 악화되자 ''잇키''로 돌아섰다. ''잇키''는 또한 모리, 아자이, 아사쿠라 씨족에게 강력한 동맹군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의 후쿠이현인 아사쿠라의 거점 에치젠국에서 노부나가는 1575년 8월에 아지마노 마을 사람들을 죽이라고 장군들에게 명령했는데, 이는 노부나가 공기(織田信長公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시야마 혼간지와 나가시마 요새는 오다 노부나가의 군대에 의해 여러 차례 포위되었다. 각 진지를 점령하려는 여러 번의 시도가 실패한 후, 그는 결국 성공했다.[2]
2. 3. 오다 노부나가와의 항쟁과 잇코 잇키의 쇠퇴
15세기 말, 오다 노부나가는 잇코잇키 세력의 확대를 경계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잇코잇키는 무사 정권의 기반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호소카와 하루모토 등 중앙 권력자들도 잇코잇키와의 싸움에 가담하면서, 잇코잇키는 센고쿠 다이묘와 같은 세력으로 패권을 다투게 되었다.[2]1506년 구즈류강 전투에서 아사쿠라 노리카게와 싸웠고, 1536년 센단노 전투에서 나가오 타메카게를 격파했다. 1555년 다이쇼지-오모테 전투에서 다시 아사쿠라 노리카게와 싸웠다.[3]
156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즈키자카 전투에서 미카와국의 잇코잇키를 격파했다. 이 전투는 이에야스와 잇코잇키 간의 결정적인 충돌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잇코잇키의 군사력뿐만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위협 때문에 이들을 경계했다. 잇코잇키의 거점인 이시야마 혼간지 등은 주요 무역로에 위치했고, 노부나가의 주요 영토 목표와 겹쳤다. 또한 잇코잇키는 아시카가 요시아키, 모리, 아자이, 아사쿠라 씨족 등 노부나가의 적대 세력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1575년 8월, 오다 노부나가는 에치젠국 아지마노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도록 명령했다. 이시야마 혼간지와 나가시마 요새는 오다 노부나가의 군대에 의해 여러 차례 포위되었고, 결국 함락되었다.[2]
1580년, 겐뇨가 오사카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퇴거하면서 잇코잇키는 크게 쇠퇴했다. 이후 혼간지의 분열 등으로 내분이 일어나 잇코잇키라는 명칭은 사라지게 되었다.
3. 주요 잇코 잇키
- 1466년 오미·가나모리 전투 - 사상 최초의 잇코 잇키[1]
- 1480년 엣추 잇코 잇키[2]
- 1488년 가가 잇코 잇키[3]
- 1531년 교로쿠·덴분의 난(다이쇼 잇키(大小一揆)라고도 함.)[4]
- 1532년 기나이 잇코 잇키(나라)[5]
- 1563년 미카와 잇코 잇키[6]
- 1570년 이시야마 전투 - 혼간지 제11세 게뇨가 사이카슈・아사이 씨・아사쿠라 씨・다케다 씨・우에스기 씨・모리 씨 등과 연합하여 노부나가 포위망의 핵을 이루고, 각지의 문도와 연동하여 10년에 걸쳐 오다 씨를 괴롭힌 사상 최대의 잇코 잇키
- 1570년 나가시마 잇코 잇키
- 1574년 에치젠 잇코 잇키
4. 사회적, 종교적 특징
정토진종 혼간지 교단에 의해 조직된 잇코 잇키는 승려, 무사, 농민, 상공업자 등으로 구성된 종교적 자치 조직이었다. 혼간지 파에 속하는 사찰, 도장을 중심으로, 렌뇨가 설파한 "미타 여래의 본원에 의지하여 일심으로 극락 왕생을 믿는 것"이라는 교의를 따르는 토호적 무사나 자치적인 소촌에 모인 농민들이 지역적으로 강고한 신앙 조직을 형성하였다.
1488년 가가 수호 토가시 마사치카를 멸망시킨 것을 계기로 잇코 잇키의 세력이 널리 알려졌다. 센고쿠 시대 말기, 오다 노부나가 등에 의해 진압될 때까지 각지에서 안정되고 풍요로운 마을을 건설하였다.
한편, 잇코 잇키를 일으킨 사찰·승려들은 세속 권력에 따르지 않는 정치적 움직임을 보였다. 오다 노부나가가 잇코 잇키에 대해 비전투원의 학살을 포함한 전멸전을 벌인 배경에는, 그들이 오다 정권의 종교 정책에 대립하는 존재이자 종교인으로서 자격이 없음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6][7]
아사쿠라씨(朝倉氏)에게 빼앗긴 에치젠국 요시사키(吉崎)를 되찾기 위하여 몇 십번이나 대규모의 전투를 일으키거나(구즈류가와 전투(九頭竜川の戦い)), 잇키가 지나치게 확대되어 무가 정권의 기반을 위협하는 것을 두려워한 오다 노부나가와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晴元) 등의 중앙 권력자와의 싸움을 전개하는 등, 센고쿠 다이묘화하여 패권을 다투기도 했다.
그러나, 1580년 오다 노부나가와의 항쟁에서 패배한 겐뇨(顕如)가 오사카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퇴거한 이후에는, 혼간지의 분열 소동 등 내분이 일어나 크게 세력이 약화되어 잇코 잇키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음은 잇코 잇키와 관련하여 금지령을 내린 사례이다.
4. 1. 조직과 생활
정토진종 혼간지 교단이 무사, 농민, 상공업자 등을 조직화하여 전란의 배제를 목표로 형성된 종교적인 자치조직이다. 1488년, 가가국 슈고 도가시 마사치카(富樫政親)를 멸망시킨 것으로 그 세력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센고쿠 시대 말기, 오다 노부나가 등에 의해 진압당하기 전까지, 전국 각지에서 안정되고 윤택한 마을을 구축하고 지배하였다. 본거지로 여겨지던 셋쓰국 오사카와 이세국 나가시마(長島), 미카와국 야하기가와(矢作川) 유역 등이 모두 습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고도의 치수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16세기 잇코 잇키는 시골 폭도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갑옷과 무기를 사용했다. 많은 이들이 전통적인 승려 복장을 착용했으며, 갑옷의 정도와 종류는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다양한 종류의 투구를 착용했고, 또 다른 이들은 농민의 짚모자와 망토를 선택했다. 나기나타는 다양한 검과 단검과 함께 매우 흔하게 사용되었으며, 아르케부스는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갑옷이나 무기는 아니지만 잇코 잇키 승려 전사들이 매우 흔하게 사용한 것은 불교적 구호가 적힌 깃발이었다. 흔히 사용된 구호 중 일부는 "아미타불께 귀의합니다!" (''Namu Amida Butsu''; 南無阿弥陀仏)와 "전진하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후퇴하는 자는 지옥으로 갈 것이다"라는 염불(''nenbutsu'')이었다.[4]
잇코 잇키에 대한 대응으로 신불교가 박해를 받았고, 이로 인해 ''카쿠레 넨부츠'' 비밀 결사가 결성되었다.
4. 2. 무기와 전술
16세기 잇코 잇키는 시골 폭도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갑옷과 무기를 사용했다. 많은 이들이 전통적인 승려 복장을 착용했으며, 갑옷의 정도와 종류는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다양한 종류의 투구를 착용했고, 또 다른 이들은 농민의 짚모자와 망토를 선택했다. 나기나타는 다양한 검, 단검과 함께 매우 흔하게 사용되었으며, 아르케부스는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4]잇코 잇키 승려 전사들이 매우 흔하게 사용한 것은 불교적 구호가 적힌 깃발이었다. 흔히 사용된 구호 중 일부는 "아미타불께 귀의합니다!" (ja)와 "전진하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후퇴하는 자는 지옥으로 갈 것이다"라는 염불(''넨부쓰'')이었다.[4]
5. 잇코 잇키에 대한 탄압과 카쿠레 넨부츠
잇코 잇키는 시골 폭도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갑옷과 무기를 사용했다. 많은 이들이 전통적인 승려 복장을 착용했으며, 갑옷의 정도와 종류는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다양한 종류의 투구를 착용했고, 또 다른 이들은 농민의 짚모자와 망토를 선택했다. 나기나타는 다양한 검, 단검과 함께 매우 흔하게 사용되었으며, 아르케부스는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갑옷이나 무기는 아니지만 잇코 잇키 승려 전사들이 매우 흔하게 사용한 것은 불교적 구호가 적힌 깃발이었다. 흔히 사용된 구호 중 일부는 "아미타불께 귀의합니다!" (南無阿弥陀仏|나무아미타불일본어)와 "전진하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후퇴하는 자는 지옥으로 갈 것이다"라는 염불(''nenbutsu'')이었다.[4]
잇코 잇키에 대한 대응으로 신불교가 박해를 받았고, 이로 인해 ''카쿠레 넨부츠'' 비밀 결사가 결성되었다.
참조
[1]
서적
A Brief History of Japan: Samurai, Shogun and Zen: The Extraordinary Story of the Land of the Rising Sun
https://books.google[...]
Tuttle Publishing
2017-08-01
[2]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4]
서적
Japanese Warrior Monks AD 949–1603
https://archive.org/[...]
Osprey Publishing Ltd.
[5]
문서
ただし、「一向宗」とは本来は別の宗派(後の[[時宗]]一向派)を指す語であったともされている。'''[[一向宗]]'''を参照のこと。
[6]
서적
日本の中世11 戦国乱世を生きる力
[7]
서적
織田信長権力論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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