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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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노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이후에는 사회운동가, 공산주의 계열 정치인이다.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1910년 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 후,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이후 사회혁명당, 고려공산당 등에서 활동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에도 관여했다. 해방 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남조선신민당, 남로당 등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월북했다. 북한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상무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했으며, 1965년경 사망했다. 1940년에는 판소리 연구서인 《조선창극사》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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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저술가 - 송진우 (18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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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호는 천도교 제4대 교주이자 독립운동가로, 갑오농민전쟁에 참여,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 《조선독립신문》 발간을 주도하는 등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였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립운동가 - 홍명희
홍명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 정치인으로, 장편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하며, 독립운동 참여, 언론 및 교육계 활동 후 해방 후 남북협상 참여, 월북하여 북한에서 요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역할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립운동가 - 허헌
허헌은 일제강점기 변호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3·1 운동 관련자 변호와 신간회 활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건준위 부위원장, 민전 공동의장 등을 지내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월북 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등을 지냈다.
정노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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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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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1년 1월 12일 |
사망 | 1965년 6월 30일 (향년 74세)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
최종 학력 |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
경력 | |
주요 경력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외교위원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
훈장 | |
주요 훈장 | 건국훈장 독립장 (1977년) |
기타 정보 | |
로마자 표기 | Jeong No-sik |
2. 생애
정노식은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면(현 김제시 만경읍) 출신으로, 항일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정치 활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2년 가까이 복역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사회혁명당, 고려공산당 등에서 활동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해방 이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남조선신민당, 남조선노동당 등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월북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등을 역임했다.[1]
2. 1. 초기 생애 및 항일 독립운동 (1910년 ~ 1945년)
정노식은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면(현 김제시 만경읍) 출신으로, 1910년 김제 소재 영명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중앙기독청년회학관에 입학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1912년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정치경제과를 중퇴하였다.1915년 장덕수, 김철수 등과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1916년 중국·대만의 운동가들과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결성했다. 1918년 조선인유학생학우회에 가입하여 평의원이 되면서 일제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919년 1월 이광수를 북경에 파견하여 미국, 중국 간도(間島) 및 상해, 노령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게 했고, 3·1 운동 때 민족대표 48인으로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복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미결수로 2년 가까이 복역하였다.[1]
이후 1920년 서울에서 사회혁명당에 참여하였다. 1921년 5월 중국 상해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서 간부로 선임되었으며, 1922년 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장이 되고, 1924년 김사국, 이영, 한신교 등이 주도한 조선청년총동맹 창립 때 전형위원이 되었다.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 경리부원, 민립대학기성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폭넓게 활동했다.
2. 2. 해방 이후 활동과 월북 (1945년 ~ 1965년)
1946년 2월 여운형, 허헌, 박헌영, 김원봉 등과 함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중앙집행위원 겸 재정부장, 부의장 및 상임위원을 지냈다.[1] 같은 해 7월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11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결성 때 의장단으로 참석했으며, 12월 중앙상무위원 및 협조부장에 선임되었다.[1]1948년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지냈다.[1]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상무위원, 의장을 지냈다.[1] 한국전쟁 이후 1956년 노동당 중앙검사위원, 1957년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이 되었다.[1] 1958년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196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1]
1965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
3. 저술 활동
1940년, 판소리 연구서인 《조선창극사》(조선일보사)를 저술하여 판소리 명창 88명을 소개하고 판소리 역사를 정리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판소리 연구 저술로 평가받는다.
4. 가족 관계
구분 | 이름 |
---|---|
생부 | 정석필(鄭錫弼) |
양부 | 정희안 (숙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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