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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호 (18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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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인호는 1854년 충청도 예산 출생으로, 동학에 입교하여 최시형에게 지도를 받았다.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으며, 1904년 갑진개혁운동에 동참하고 1907년 천도교 차도주가 되었다. 1908년 천도교 제4대 교주가 되어 교단 조직을 개편하고, 교육 및 여성 교역 활동을 전개했다. 3·1 운동에 민족 대표로 참여하여 투옥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후 천도교 신·구파 갈등과 항일 투쟁을 벌였다. 1939년 교단 활동을 다른 지도자에게 넘기고 물러났으며, 1940년 사망 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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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호 (1854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박인호
원어 이름朴寅浩
본명박용호(朴龍浩) → 박남수(朴南壽) → 박인호(朴寅浩)
출생일음력 1855년 02월 11일
출생지조선 충청도 예산군
사망일1940년 04월 03일
사망지일제강점기 경성부
국적대한제국
거주지대한제국 한성부
별칭(字)는 도일(道一)
도호(道號)는 춘암(春菴)
직업천도교(동학)의 지도자 및 독립운동가
민족한민족(밀양 박씨)
경력1919년 3·1 기미 민족 대표 49인의 일원
상훈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전임자손병희
후임자(대도주제 폐지)
활동 기간1883년~1939년 02월 01일
교파천도교
수행 성직천도교
칭호천도교 제4대 대도주
칭호 기간1908년 01월 18일~1921년 12월 01일
웹사이트두피디아 박인호
기타
참고1883년 당시 동학 학도 첫 입문.
1939년 02월 01일 당시 천도교 원로 교단 은퇴.

2. 생애

조선 충청도 예산에서 출생하여, 1883년 동학(훗날의 천도교)에 입교했다. 1884년 제2대 교주인 최시형에게 가섭사(가야사)에서 직접 지도를 받은 몇 안 되는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고향인 예산에서 포교하던 중 동학 농민 운동이 발발하자 덕산 대접주 자격으로 참여, 충청도 홍주, 예산, 신례원 지역에서 동학군을 이끌고 관군과 싸웠다.

이후 1904년에는 손병희갑진개혁운동에 동참했고, 1907년에는 천도교의 차도주(次道主)가 되었다. 1908년 1월 18일에는 제3대 교주 손병희의 뒤를 이어 제4대 천도교 교주가 되었다. 박인호는 천도교 교주가 된 이후에 교단의 조직과 규칙을 개편하여, 일진회를 모두 광범위하게 내쫓는 등, 이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 세력의 개입에 시달리고 있던 천도교를 안정시켰다. 또한 교리강습소를 설치하면서 천도교 교역자를 양성하는 한편 체계적인 교육문화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 사범강습소를 설치했다.

전국 각지에 부인전교사와 부인순회교사를 임명하여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천도교 교역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신언》(神言), 《천도교서》(天道敎書)를 비롯한 천도교 교단의 지침서를 집필했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동덕여학교, 양덕여자학교, 삼호보성소학교, 문창학교 등을 직접 인수하여 교육 운동을 전개했고 교리서 발간, 교리강습소 운영을 통한 종교 계몽 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손병희의 주도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민족 대표 49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최린을 통해 천도교 자금 5,000원을 3·1 운동 경비로 지원했고, 이종일, 이종린, 김홍규, 윤익선과 함께 《조선독립신문》의 발간과 인쇄 작업을 맡았다. 3·1 운동 관련 혐의로 1919년 3월 10일에 체포되어 1년 9개월 동안 수감되었으나, 1920년 12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복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손병희 사후 최린의 신파와는 대립하여 일본에 대해 비타협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1922년 1월 18일에는 천도교 교주로 다시 임명되었지만 6월 6일에 천도교 구파와 신파 간의 갈등으로 인해 사임하게 된다. 1926년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구파가 순종 사망으로 인한 국장을 계기로 6·10 만세운동을 연합 조직할 때 가담했다.

1938년에는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반일 기도를 지시한 무인 멸왜 기도 사건(戊寅 滅倭 祈禱 事件)이 드러나기도 했다. 천도교(天道敎)의 원로 박인호는 1939년 2월 1일 이후에 천도교 교단 활동을 최인, 권동진, 오세창 등에게 모두 넘겨주고 물러나게 된다.

2. 1. 동학 입교와 동학 농민 운동 참여

박인호는 1883년 동학(훗날의 천도교)에 입교했다. 1884년 제2대 교주인 최시형에게 가섭사(가야사)에서 직접 지도를 받은 몇 안 되는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고향인 예산에서 포교하던 중 동학 농민 운동이 발발하자 덕산 대접주 자격으로 참여, 충청도 홍주, 예산, 신례원 지역에서 동학군을 이끌고 관군과 싸웠다.

2. 2. 천도교 지도자 활동

박인호는 1883년 동학(훗날의 천도교)에 입교했다. 1884년 제2대 교주인 최시형에게 〈'가섭사'〉에서 직접 지도를 받은 몇수명의 제자들 중 한 명이다.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에서 포교하던 도중에 동학 농민 운동에서 덕산 대접주 자격으로 참가하여 충청도 홍주, 예산, 신례원 지역에서 동학군을 이끌고 관군과 싸웠다. 이후 1904년에는 손병희갑진개혁운동에 동참했고, 1907년에는 천도교의 차도주(次道主)가 되었다.

1908년 1월 18일에는 제3대 교주 손병희의 뒤를 이어 제4대 천도교 교주가 되었다. 박인호는 천도교 교주가 된 이후에 교단의 조직과 규칙을 개편하여, 일진회를 모두 광범위하게 내쫓는 등, 이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 세력의 개입에 시달리고 있던 천도교를 안정시켰다. 또한 교리강습소를 설치하면서 천도교 교역자를 양성하는 한편 체계적인 교육문화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 사범강습소를 설치했다.

박인호는 전국 각지에 부인전교사와 부인순회교사를 임명하여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천도교 교역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신언》(神言), 《천도교서》(天道敎書)를 비롯한 천도교 교단의 지침서를 집필했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동덕여학교, 양덕여자학교, 삼호보성소학교, 문창학교 등을 직접 인수하여 교육 운동을 전개했고 교리서 발간, 교리강습소 운영을 통한 종교 계몽 운동을 전개했다.

2. 3. 3·1 운동 참여와 투옥

1919년 손병희의 주도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민족 대표 49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최린을 통해 천도교 자금 5,000원을 3·1 운동 경비로 지원했고, 이종일, 이종린, 김홍규, 윤익선과 함께 《조선독립신문》의 발간과 인쇄 작업을 맡았다. 3·1 운동 관련 혐의로 1919년 3월 10일에 체포되어 1년 9개월 동안 수감되었으나, 1920년 12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복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2. 4. 천도교 신·구파 갈등과 항일 투쟁

1919년 손병희의 주도로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민족 대표 49인 중 한 명으로 참가하였다. 최린을 통해 천도교 자금 5,000원을 3·1 운동 경비로 지원하였고, 이종일, 이종린, 김홍규, 윤익선과 함께 《조선독립신문》의 발간과 인쇄 작업을 맡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인호는 1919년 3월 10일에 독립 운동 자금 모금 혐의로 체포되어 1년 9개월 동안 수감되었지만 1920년 12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복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선고받았다.

손병희 사후 최린의 신파와는 대립하여 일본에 대해 비타협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1922년 1월 18일에는 천도교 교주로 다시 임명되었지만 6월 6일에 천도교 구파와 신파 간의 갈등으로 인해 사임하게 된다. 1926년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구파가 순종 사망으로 인한 국장을 계기로 6·10 만세운동을 연합 조직할 때 가담했다.

1938년에는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반일 기도를 지시한 무인 멸왜 기도 사건(戊寅 滅倭 祈禱 事件)이 드러나기도 했다. 천도교(天道敎)의 원로 박인호는 1939년 2월 1일 이후에 천도교 교단 활동을 최인, 권동진, 오세창 등에게 모두 넘겨주고 물러나게 된다.

3. 사후

박인호는 1940년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박인호(朴寅浩) http://encykorea.aks[...] 2022-08-22
[2] 기타
[3] 기타
[4] 기타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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