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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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분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숭례문 중수와 전국 성곽 축조 등 토목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세종 시대에는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했으며, 문종 때에는 왜인 문제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단종 때에는 하삼도 도체찰사를 자청하여 해안 방어 체제를 점검했다. 그러나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사사되었으나,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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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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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관 | 진주(晋州) |
별명 | 자 자유(子㕀) |
호 | 애일당(愛日堂) |
출생일 | 1394년 |
사망일 | 1454년 |
사망 원인 | 교형(絞首刑) |
국적 | 조선 |
국가 | 조선 |
학력 및 경력 | |
학력 | 태종16년(1416년)친시문과(親試文科) 을과2등(乙科)으로 급제 |
주요 경력 | 都體察使 우의정 |
가족 관계 | |
부 | 父:정이오(鄭以吾) |
모 | 母:안동 權氏 |
직업 및 직책 | |
직업 | 문관, 정치가 |
직책 | 문관 |
2. 생애
2. 1. 초기 생애
2. 2. 관직 생활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3]은 세종 29년(1447년) 최고 책임자에 의정부좌참찬 겸 판호조사 정분(議政府左參贊 兼 判戶曹事 鄭苯:정2품)이 행정 및 역사(工師)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2년여 보수 끝에 신작이라 기록된 만큼 대대적인 공사로 지금의 웅장한 모습으로 신축 되었으며, 상량묵서에는 세종 30년(1448) 3월 입주(立柱)한 것으로 되어 있고 같은 해 5월에 공역이 끝났다. 정 남쪽의 문은 "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4]이라 태조 5년부터 불렀고, 편액의 글씨는 양녕대군[5]이 쓴 글씨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6]
1426년(세종 8년) 1월[9]왜인(倭人)들에게 내이포(金海府乃而浦).부산포(東莱県富山浦).염포(蔚山塩浦)등 3포를 열어 무역할 것을 허락 하였다. 3포에는 각각 왜관을 두어 왜인 60명에 한하여 거주를 허락 하였으나 차츰 허가 포구를 벗어나, 소금.기와.명주.목재등 거래 품목을 확대 하면서 부당한 요구와 횡포로 서울까지 오게 되니 드디어 1450년 윤1월 세종이 이르기를[10]
"외객인(倭客人)의 단목(丹木)·동납(銅鑞)을 서울로 올라오지 말게 하고, 포구(浦口)에 머물러 무역하도록 함이 내가 처음부터 정한 뜻인데, 옳지 않은 데가 있지 않겠느냐.명주 1만 필을 허락된 포소(浦所)에 보내어 무역하게 하되,그 형편을 시험하여 보아서 거래가 활발하지 않으면 모두 서울에 가져와 같은 가격에 팔면 서울에서 거래해도 별 이익이 없다는 방안을 만들어 허가구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라"
문종때"왜인(倭人) 20여 인이 와서 내이포·부산포·염포등지에 거주하는데, 혹시 변(變)을 일으킬까 염려되니,정분(鄭苯)으로 하여금 그 정상을 자세히 살펴보고 오게 하소서. 또 왜인(倭人)이 와서 거주한 지가 이미 오래 되어 갑자기 돌아가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적의 침입을 막을(守禦) 방책과 접대할 계략(計謀)을 늦출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 하기를,"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下三道都體察使)를 보내는 것은 이러한 일을 겸하여 살피려는 것이다." 하였다,

정분(鄭苯)은 직접 살피고 보고 하기를
"내이포(乃而浦)에 항상 거주하는 왜인(倭人)뿐만 아니라 여러 섬의 다른 왜인들(客倭)도 폭주(輻輳)하여 환란(患亂)이 털끝만큼 짧은(毫忽)시간에 달려 있습니다."
단종때에도 정분(鄭苯)은 하삼도 도체찰사를 자청하여 해안 전역의 순회를 마치고 충청도에 이를 때 창졸간에 계유정란을 맞았다.
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忠淸全羅慶尙道都體察使)임명되어 정분(鄭苯)이 길을 떠났으니,성터[城基]를 살펴서 정(定)하기 위함이었다.
1451년 9월 임금에게 보고하니,
"그대로 둘 각 고을과, 물려서 쌓아야 할 각 고을과, 또 모름지기 개축(改築)을 요하는 각 고을을 마감(磨勘) 하여 올립니니다.
- 그대로 둘 곳.
순천부읍성.낙안군읍성.보성군읍성.영암군읍성.광양읍성.흥양현읍성.무안읍성.강진현.내상성(內廂城).만경읍성.임피읍성.함열읍성.
- 물려서 쌓아야 할 곳.
고부읍성.무장읍성.부안읍성.옥구읍성.
- 개축(改築)하여야 할 곳.
장흥읍성.영광읍성.나주읍성.용안현.흥덕읍성.
- 같은달 경상도 심찰 후 계(啓)를 올리니,
- 그대로 둘 곳.
경주읍성.김해읍성.창원내상성.곤양군읍성.기장읍성.동래읍성.고성읍성.남해읍성.하동읍성.
- 시기(時期)에 미치도록 개축(改築)할 곳.
울산군내상성.사천읍성.鎭海縣邑城.
- 뒤에 쌓을 수 있는 곳.
晉州촉석루.밀양읍성.함안군읍산성.양산읍성.언양읍성.칠원읍성.비인현읍성.남포읍성.보령읍성.해미읍성. 唐津현읍성.면천읍성.홍주읍성.임천산성.한산산성.舒川읍성.
- 추후하여 쌓을 수 있는 곳.
서산읍성.부여현산성.아산산성."
위와 같이 의정부에 보고 하였고 이무렵 당대에 재상인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서 치사(致仕)한 황희(黃喜)가 졸(卒)하였다. 황희는 장수현(長水縣) 사람인데, 자(字)는 구부(懼夫)이며,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아들이고, 현재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伴鷗亭)에서 89세까지 말년을 보냈다.
2. 2. 1. 숭례문 중수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3]은 세종 29년(1447년) 최고 책임자에 의정부좌참찬 겸 판호조사 정분(議政府左參贊 兼 判戶曹事 鄭苯:정2품)이 행정 및 역사(工師)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2년여 보수 끝에 신작이라 기록된 만큼 대대적인 공사로 지금의 웅장한 모습으로 신축 되었으며, 상량묵서에는 세종 30년(1448) 3월 입주(立柱)한 것으로 되어 있고 같은 해 5월에 공역이 끝났다. 정 남쪽의 문은 "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4]이라 태조 5년부터 불렀고, 편액의 글씨는 양녕대군[5]이 쓴 글씨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6]
2. 2. 2. 내불당 건축
(아무 내용도 출력하지 않음)2. 2. 3. 전국 성곽 축조
1426년(세종 8년) 1월[9]왜인(倭人)들에게 내이포(金海府乃而浦).부산포(東莱県富山浦).염포(蔚山塩浦)등 3포를 열어 무역할 것을 허락 하였다. 3포에는 각각 왜관을 두어 왜인 60명에 한하여 거주를 허락 하였으나 차츰 허가 포구를 벗어나, 소금.기와.명주.목재등 거래 품목을 확대 하면서 부당한 요구와 횡포로 서울까지 오게 되니 드디어 1450년 윤1월 세종이 이르기를[10]"외객인(倭客人)의 단목(丹木)·동납(銅鑞)을 서울로 올라오지 말게 하고, 포구(浦口)에 머물러 무역하도록 함이 내가 처음부터 정한 뜻인데, 옳지 않은 데가 있지 않겠느냐.명주 1만 필을 허락된 포소(浦所)에 보내어 무역하게 하되,그 형편을 시험하여 보아서 거래가 활발하지 않으면 모두 서울에 가져와 같은 가격에 팔면 서울에서 거래해도 별 이익이 없다는 방안을 만들어 허가구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라"
문종때"왜인(倭人) 20여 인이 와서 내이포·부산포·염포등지에 거주하는데, 혹시 변(變)을 일으킬까 염려되니,정분(鄭苯)으로 하여금 그 정상을 자세히 살펴보고 오게 하소서. 또 왜인(倭人)이 와서 거주한 지가 이미 오래 되어 갑자기 돌아가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적의 침입을 막을(守禦) 방책과 접대할 계략(計謀)을 늦출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 하기를,"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下三道都體察使)를 보내는 것은 이러한 일을 겸하여 살피려는 것이다." 하였다,
정분(鄭苯)은 직접 살피고 보고 하기를
"내이포(乃而浦)에 항상 거주하는 왜인(倭人)뿐만 아니라 여러 섬의 다른 왜인들(客倭)도 폭주(輻輳)하여 환란(患亂)이 털끝만큼 짧은(毫忽)시간에 달려 있습니다."
단종때에도 정분(鄭苯)은 하삼도 도체찰사를 자청하여 해안 전역의 순회를 마치고 충청도에 이를 때 창졸간에 계유정란을 맞았다.
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忠淸全羅慶尙道都體察使)임명되어 정분(鄭苯)이 길을 떠났으니,성터[城基]를 살펴서 정(定)하기 위함이었다.
1451년 9월 임금에게 보고하니,
"그대로 둘 각 고을과, 물려서 쌓아야 할 각 고을과, 또 모름지기 개축(改築)을 요하는 각 고을을 마감(磨勘) 하여 올립니니다.
- 그대로 둘 곳.
순천부읍성.낙안군읍성.보성군읍성.영암군읍성.광양읍성.흥양현읍성.무안읍성.강진현.내상성(內廂城).만경읍성.임피읍성.함열읍성.
- 물려서 쌓아야 할 곳.
고부읍성.무장읍성.부안읍성.옥구읍성.
- 개축(改築)하여야 할 곳.
장흥읍성.영광읍성.나주읍성.용안현.흥덕읍성.
- 같은달 경상도 심찰 후 계(啓)를 올리니,
- 그대로 둘 곳.
경주읍성.김해읍성.창원내상성.곤양군읍성.기장읍성.동래읍성.고성읍성.남해읍성.하동읍성.
- 시기(時期)에 미치도록 개축(改築)할 곳.
울산군내상성.사천읍성.鎭海縣邑城.
- 뒤에 쌓을 수 있는 곳.
晉州촉석루.밀양읍성.함안군읍산성.양산읍성.언양읍성.칠원읍성.비인현읍성.남포읍성.보령읍성.해미읍성. 唐津현읍성.면천읍성.홍주읍성.임천산성.한산산성.舒川읍성.
- 추후하여 쌓을 수 있는 곳.
서산읍성.부여현산성.아산산성."
위와 같이 의정부에 보고 하였고 이무렵 당대에 재상인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서 치사(致仕)한 황희(黃喜)가 졸(卒)하였다. 황희는 장수현(長水縣) 사람인데, 자(字)는 구부(懼夫)이며,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황군서(黃君瑞)의 아들이고, 현재 파주시 문산읍 반구정(伴鷗亭)에서 89세까지 말년을 보냈다.
2. 3. 계유정난과 죽음
1453년 수양대군(세조)은 문종의 고명을 받은 원로 대신인 황보인, 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는데, 이를 "난리를 안정시켰다."라는 뜻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한다.[11] 정분은 다음날 충주 용안역 부근에서 이현로로부터 서울 소식을 들었으나, 궁궐에 복명하고자 상경하던 중 임금의 명령서를 가진 관원을 만났다. 정분은 길가에서 죽는 것이 흉하니 역관에서 죽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관원은 정분을 적소로 압송하라는 전지를 받았다고 답했다. 이현로는 용안역(현 충주시 신니면 용원리)에서 교살되었고, 정분은 낙안(현 순천시 낙안면 남대리)으로 압송되었다.[11]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영경연서운관사겸판이병조사(領議政府事領經筵書雲觀事兼判吏兵曹事)로서, 백관의 으뜸, 집현전과 예문관 장악, 인사권(호조판서), 병력 통솔(병조판서), 궁궐과 도성 수비, 전국의 군마와 연락망 통제 등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다. 이는 단종에게 아뢰고 승지 최항을 시켜 명패를 내리게 하여 얻은 권력이었다.
세조가 극찬한 한명회와 권람이 이 모든 계획을 세웠고, 정인지, 한확 등이 협력했다. 한명회의 살생부대로 움직인 홍달손, 홍윤성, 양정, 유수, 봉석주, 임자번 등은 1, 2등 공신이 되었다.
초생달이 뜨는 시간에 살육이 시작되었고, 세조는 김종서를 먼저 제압하여 죽였다고 임금께 아뢰었다. 다른 대신들은 왕명으로 입궐하는 대로 한명회와 수하 무사들이 죽였다. 김종서는 세조가 직접 가서 죽였고, 황보인은 입궐 3문에서, 병조판서 민신은 현릉(문종) 비석소 현장에서, 이명민은 집에서 무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양, 윤처공, 조번, 김연 등도 무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다음날, 세조가 영의정이 된 날, 정분은 하삼도 도체찰사의 임무 수행 중 충청도에 다다랐고, 전지에 따라 졸지에 용안에서 낙안으로 압송되었다. 세조의 조력자 한명회의 살생부에 의해 진행된 이 계획은 성공하였다.

3. 주요 활동
3. 1. 의정부 활동
wikitext1452년 12월 11일 좌의정 남지(南智)가 병으로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자, 김종서(金宗瑞)를 좌의정(左議政)으로, 정분(鄭苯)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임명하였다.[35] 황보인·김종서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황표정사(黃標政事)란 말이 생겨났다.
당시 나라의 토목공사를 전담하던 임시 관청인 도청(都廳)이 있었는데, 정분(鄭苯)과 민신(閔伸)이 제조(提調)를 맡고, 이들의 당여(黨與)인 직장(直長) 이명민(李命敏)이 실무를 관장하였다. 이명민은 음흉하고 간사한 자로[36], 정분과 민신에게 아부하며 도청의 전권을 휘둘렀고, 삼군(三軍) 방패(防牌)와 섭육십(攝六十)[37]및 여러 공장(工匠)을 마음대로 부리는 권한을 장악하였다.
3. 1. 1. 6조 반열
1436년 전 승지 정분(鄭笨)이 감사의 임무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아, 흉년 구제를 위해 충청도 감사로 임명되었다. 직전 임자는 정인지(鄭麟趾)였고, 아버지의 상사(喪事)를 당해 사직하였다. 1438년 이조 참판(吏曹:從二品)에 제수되었고, 1439년 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19]로 5년여 동안 관련 정사에 임한 후 가정 대부(嘉靖大夫) 공조참판으로 승진하여 서울로 돌아왔다.1443년 공조 참판(工曹參判) 정분(鄭苯)은 주문사[20](奏聞使)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정분은 강관토(江官土) 등과 면대해서 조선에서 쓰는 관직명(官號)과 이름(人名)이 다르고 언어(音韻)가 같지 않아 직접 심문 하도록 허락을 받았으며, 왜구의 침략 행위가 심하다는 내용을 알리기 위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4년 예조 참판을 거쳐 1445년 6조[21](六曹) 반열에 올랐다.
1446년 4월 19일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가 52세로 사망하여 국상 기간이 이어지면서 장마가 계속되어 7월 1일 국장일을 정하였고, 산릉(묘지) 역사 적임자로 정분(鄭苯)이 지명되어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22]으로 승진하였다.
3. 1. 2. 훈민정음 반포

1446년 9월에 《훈민정음》[23]이 완성되어 반포하였다. 어제(御製)에,
한글은 1443년(세종25년) 훈민정음 28자를 연구·창제하고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후, 1446년 음력 9월 29일(세종 28년) 에 이를 반포하면서『훈민정음 해례본』을 통하여 쓰기편한 문자와 천지인(天地人)을 바탕으로 하는 음양오행의 관계가 설명되어있다.
글자를 만들면서 창제동기를 밝힌것은 한글이 유일하며 유네스코[24]가 선정한 가장 과학적인 문자이고, 정보화 시대에 전혀 문제가 안되는 표현 문자이다. 최고 학부(最高學部) 집현전[25]은 모든 학문 즉 천문학(天文學), 기상학(氣象學), 역사학(歷史學), 지리학(地理學), 문학(文學), 예술(藝術), 철학(哲學), 의학(醫學), 본초학(本草學), 농학(農學) 역학(譯學=번역등語學)등의 학자들을 적극 양성하면서, 실용정신이 시대적 과제였기에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신분을 뛰어넘어 노비출신 장영실(1390~1450)등 인재를 등용하고 육성하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3. 2. 토목, 건축 활동
정분(鄭苯)은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재능과 도량이 있어, 문신이지만 토목에 조예가 깊었다. 대간(臺諫)들은 "높고 크면서(高大) 웅장하고 화려함(壯麗)이 지나치게(僭濫)도 궁궐(宮禁)에 비길 만 하다"고 자주 말했다.[7] 정분은 재능이 있어 일을 잘 처리했고, 민신(閔伸)은 부지런하고 소심하여, 대체로 건축이 있을 때에는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였다.[7]
대신들은 "정분(鄭苯)은 정부(議政府)의 관리이니, 친히 토목공사를 감독함은 옳지 못합니다." 하였으나, 정분은 선공 제조(繕工提調)가 되어 토목 공사(土木工事)를 맡아 볼 때, 모든 일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손에다 지팡이를 들고 지시하며 계략하여 꾸미기(規畫)를 전문가(工師)처럼 하였다.[8]
3. 2. 1. 숭례문과 내불당
1447년 (세종 29년) 8월 30일 숭례문(崇禮門)을 새로 짓는데,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판호조사 정분(正憲大夫 議政府左參贊 兼 判戶曹事 鄭苯)[27]"을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분(苯)이 오로지 토목(土木)의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아서, 영선(營繕)하는 일이 연해 계속되고 미리미리 임금의 뜻에 맞도록 하니, 재물과 인력이 동나게 되었다"[28]고 기록되어 이 공사와 내불당 신축에 상당한 자재와 인력이 동원됐음을 알 수 있다. 조력자로는 형조판서 민신, 선공감 직장 이명민, 부사직 김부흥 등 대목과 좌변목수, 우변목수, 도석수, 조각장, 노야장 등 기타 인력으로 구성되었고, 토목(土木)·영선(營繕)의 관리 감독 관청은 선공감(이명민;종3품)이었다.1448년 세종 30년 11월 8일, 세종은 병이 중하여 궁궐 밖 금성대군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29] 불심(佛心)으로 건강을 지탱하려는 세종은 숭례문 공사와 내불당(內佛堂)[30]을 짓는 일까지 정분(鄭苯)에게 일임하였다. 세종은 정분에게 "경(정분)이 부득이 불당을 영조하는 일까지 맡았는데, 지금 천기가 추워지는 것 같으니 빨리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경기(京畿)의 선군(船軍:水軍) 4천 명을 역사시키려고 하나, 그 수가 너무 많으므로, 이달에 1천 명을 역사시키고 내달에 1천 명을 역사시키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이에 정분은 "절터가 조금 높고 궁성이 낮으므로, 마땅히 쌓아서 높이게 되어 공사가 작지 않으나, 불당 짓는 것이 13간 밖에 안되어 빠른 시일 내 완성할 수 있으므로, 선군을 역사시킬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막대한 자재와 인력 동원 때문에 숭례문 공사가 잠정 지연되었고, 마침내 1448년 말 궁궐 내 불당(佛堂)[31]이 완성되자 세종은 친히 불상을 안치하는 행사를 가졌다.
내불당은 세종(世宗) 30년(1448년) 경복궁 안에 세워진 불당이다. 태조 때부터 불교(佛敎)를 배척했기 때문에 세종도 처음에는 억불정책(抑佛政策)을 폈으나, 만년에는 불교를 보호하게 되었다. 세종은 모든 유생(儒生)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궁정 안에 화려한 불당을 짓고, 그 안에 황금불(黃金佛) 3구(軀)를 안치하여 불교를 보호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년) 경복궁 안의 문소전(文昭殿) 뒤에 세우고 흥천사(興天寺) 석탑에 안치되어 있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4과(顆)와 두골 ·패엽경(貝葉經) ·가사 등을 옮겨 봉안하였다. 세조 때에는 법회 ·법석(法席) ·간경회(看經會) 등이 베풀어져 크게 일어났고, 성종 ·중종 등은 이 절의 특별 보호를 명하였다. 그 후에는 억불숭유정책의 영향을 받은 듯하며, 임진왜란 이후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정분(鄭苯)은 진관사(眞觀寺)에서 수륙사(水陸社)를 베풀라는 명을 받기도 했다. 정분은 속이 트이고 사리에 밝아 재상(宰相)의 기국(器局)이 있고, 큰 일을 잘 결단(決斷)하여 임금의 위임(委任)을 받았다. 선공 제조(繕工提調)가 되어 토목 공사(土木工事)를 맡아 볼 때, 모든 집을 짓는 데 힘써 크고 아름답게 하였다. 불당(佛堂)을 짓는 역사를 정분이 민신(閔伸)과 함께 감독하였다. 정분이 짧은 옷을 입고 막대를 잡아 공장(工匠)을 지휘하니, 보는 사람이 그 대신(大臣)의 체모를 잃는 데 분하게 여겼다고 한다.
3. 2. 2. 산릉 제조
우의정 정분은 이때부터 세조 편에 선 정인지, 신숙주, 김질, 정창손 등 집현전 출신들과 상신집정(上臣執政: 3정승)에 불만을 가진 정치세력 들로부터 소위 "현릉사토(顯陵莎土:)사건"으로 정쟁에 휘말리게 되었다.지평(持平) 신자승(申自繩)이 본부(本府: 사헌부)와 의논하여 임금에 아뢰기를,
"황보인, 김종서, 정분(鄭笨)은 모두 제조(提調)로서 산릉(山陵)의 역사를 맡았는데, 마침내 〈봉분의 흙이〉 무너지고 말았으니, 불경(不敬)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1차 사직상서> 2월 19일.
다만 빗물이 스며들까 염려하여 봉분을 만들 때에 체제(體制)를 좀 높이 하였을 뿐입니다. 이때에 천기(天氣)가 갑자기 차가워져서 사토(莎土)가 힘이 없어지고 눈비가 크게 쌓여 겨울을 지나면서 얼었다 녹았다 하다가, 봄비가 내리자 무너져 내리게 된 것입니다.
<2차 사직상서> 3월 13일 전하께서 비록 용서하여 묻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구차하게 죄책을 면하는 것을 신은 실로 이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鄭笨중국어을 관직(官職)에 나오도록 명하니, 정분이 아뢰기를,
"주상께서 당초에 신의 용렬함을 알지 못하시고 산릉의 일을 관장하도록 명하시니, 신은 이미 중(重)한 명을 받들었고, 또 문종 대왕께서 문득 승하하여 보필(補弼)의 효력이 없음을 슬퍼하며 산릉에 마음을 다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소신의 죄를 다스린 연후에야 거의 신민의 마음이 쾌(快)할 것입니다."하니, 전지하기를,"혐의하지 말라."하였다. 단종 1년 3월 16일(1453년)
4. 계유정난 이후
4. 1. 삭탈관직과 유배
4. 2. 외방 종편과 사사
정란 이후 8~9개월이 지난 시점에 경기 각 고을에서 인심이 소란스러웠고, 서강(西江)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황보인, 김종서는 죄가 있지만 정분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39] 안평대군을 죽인 후 오히려 정분에게 민심이 쏠려 동경과 존경을 받는 중심 인물이 되었고, 그의 덕행과 절개에 대한 동정 여론도 일었다.사헌부의 건의에 따라, 권남, 한명회는 세조에게 정분을 죽여야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며, 하루빨리 정분을 처형할 것을 요청했다.
단종 1년 10월 15일, 세조는 태조와 문종의 능에 추석제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중량포(中良浦) 주막에서 쉬면서, 좌승지 박원형과 우승지 권자산이 간신들을 제거하라고 요청하자, 즉시 정분 등을 법에 따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40] 이날 정분은 교형에 처해졌다.[41]
이로써 간당의 뿌리가 영원히 근절되었으며, 대략 46명이 함께 처형되었다. 처형된 이들의 부모, 아들, 아직 출가하지 않은 딸, 처첩, 조부모, 손자, 형제, 아직 출가하지 않은 자매, 아들의 처첩은 먼 지방의 관노비로 영구히 소속되었고, 백부, 숙부와 형제의 아들은 먼 지방에 안치되었으며, 16세 미만인 자는 나이가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행하도록 하였다.
의금부에 갇혀 있던 난신에 연좌된 부녀자들은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42] 10년 후인 1464년에는 관련자의 숙질(아저씨와 조카) 등을 거주하는 지방에서 편하게 살도록 허락하면서, 난신 정분에 연좌[43]된 정분의 조카 정세존, 정옥수, 정효동, 정옥동을 석방하였다.[44] 유배시킨 죄인을 그 위치에서 풀어주어 외방에 편리한 대로 살게 하는 제도(外方從便)에 의해 숙질 이상의 기타 가족들은 서울을 떠나 거제, 남해, 진도 등 지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45]
14년간 집권한 세조는 계유정란 당시와 이후 관련된 난신의 숙질과 자매의 연좌자 2백여 명을 한명회, 정인지, 신숙주 등과 의논하여 석방했다. 이때 세자(예종)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대신들이 의논하는 대로 따랐다.[46] 이틀 후 세조는 경복궁에 있던 면복을 가져오게 하여 친히 세자에게 내려 즉위하게 하고 수강궁의 정침에서 사망했다.[47] (1468년 9월 6일)
4. 3. 사후 복권
단묘조의 세 대신을 복관한 뒤에 정분의 자손을 찾지 못하였다.[59] 장흥 정성 사람이 마가와 송사함으로 인해 관에서 정성 사람 선대의 묘를 파 보니 지석 두 조각을 찾았는데, 바로 정분의 아들 정광로의 묘였다.[59] 정광로는 당시의 일이 어려움을 알고 거짓으로 미쳐 자취를 숨겼고, 죽음에 이르러 그의 아들이 지석을 묻었으나 유계로 인해 그 내력을 비밀로 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은 누구의 자손인지 알지 못하였다.[59] 수백년 뒤에 비로소 옛 정승의 혈손임을 알았으니 조정에서 표이의 거조가 있어야 한다고 하니, 임금이 기이한 일이라 하며 결원을 기다려 조용하라 하였다.[59]5. 평가
5. 1. 긍정적 평가
5. 2. 부정적 평가
5. 3. 후손에 대한 평가
정분은 문과 급제 후 좌찬성, 우의정 등 37년간 요직을 두루 거친 고관대작이었다. 흠결 없이 관직 생활을 이어온 충직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생몰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가, 314년 후 사료적 가치가 불분명한 지석 두 조각에서 후손이 발견되었다는 점은 특이한 점으로 꼽힌다. 이러한 정황은 미관말직이나 미천한 집안에서나 있을 법한 일로, 실존 흔적을 문중 기록이 아닌 역사 기록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기이하게 여겨진다.정분은 장릉 배식록에 우의정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릉 배식록에는 황보인(영의정), 김종서(좌의정)를 비롯하여, 안평대군, 금성대군, 송현수, 권자신, 정종, 민신, 조극관, 김문기, 성승, 박정,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박중림 등 당대의 여러 인물들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6. 기타
6. 1. 정분과 한명회
한명회는 경덕궁(개성.태조의 사저) 궁직이었는데, 친구 권람이 세조에게 그를 소개했다. 세조는 한명회를 만나보고 비범한 인물임을 알았다. 단종 즉위년 10월, 세조가 북경에 사신으로 자청하여 가기 전, 한명회에게 비밀리에 안평대군과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의 종적을 염탐할 것을 지시했다.[48] 세조는 안평대군이 중신들과 결탁하여 변을 일으킬까 걱정하여 신숙주와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를 대동하여 북경에 다녀왔다.한명회는 세조 저택의 종 조득림(趙得琳)으로 하여금 이용(李瑢)의 종 및 여러 소인들과 교제를 맺게 하여 행적을 밟았다. 황보인은 미복(微服)으로 이용의 첩의 집을 왕래하고, 또 이용은 김종서·정분·허후, 민신 등과 더불어 밤에 자주 잔치를 벌이고 술을 마셨다. 황보인이 이용에게 백옥대(白玉帶)를 보내니, 이용은 황금침향대(黃金沈香帶)로 보답하고, 또 김종서와 정분에게는 서대(犀帶)를 각각 1요(腰)씩 주고, 진귀한 물건과 서화(書畫)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명회는 이런 내용을 빠짐없이 세조에게 보고했다. (서대는 1품 이상의 관리가 관복에 갖추어 차던 허리띠)[49]
한명회는 세조를 찾아가 10월 10일 의거하기로 약속일을 정했다. 이미 세조는 1년 전부터 조카 단종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찾아간 날은 계유정난 열흘 전이었다.[50]
정란 이후, 한명회는 정난공신으로 군기사(軍器寺) 녹사(錄事)가 첫 관직이고 세조의 참모로 모든 정사에 관여하게 된다. 승진 할수록 한명회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정략적 혼인으로 친인척 관계를 만들어 기반을 다지고 요직을 장악해 나가면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둘렀다. 한명회와 그 주변 인물들과 줄을 대지 못하면 벼슬을 할 수 없어 돈을 주고 관직을 사는(賣官賣職)[51] 등 조선왕조 역사상 크나큰 인사 폐단과 혼란을 초래하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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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촌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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