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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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제두는 정몽주의 후손으로, 조선 시대의 학자이다. 그는 주자학이 주류였던 조선에서 양명학을 연구하여 조선에 양명학을 처음으로 소개했으며, 실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강화도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강화학파를 형성했고, 그의 학문은 이건창과 정인보에게 계승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존심』, 『학변』, 『하곡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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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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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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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49년 |
사망 | 1716년 |
본관 | 연일(延日) |
자 | 사수(士修) |
호 | 하곡(霞谷) |
시호 | 문강(文康)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정유성(鄭維城) |
어머니 | 안동 권씨(安東 權氏) |
배우자 | 해주 오씨(海州 吳氏) |
학문과 사상 | |
주요 저서 | 하곡집(霞谷集) 존언(存言) 만물일원지종요(萬物一原指宗要) 심기설(心氣說) |
관직 | |
주요 경력 | 지평(持平) 사간(司諫) 사성(司成) 승지(承旨) 대사성(大司成)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 좌참찬(左參贊)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좌빈객(左賓客) |
2. 생애
포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현종 때 우의정을 지낸 할아버지 도촌 정유성 밑에서 자랐다. 일찍이 학문에 뜻이 있어 백가(百家)에 통달하였고, 박세채와 윤증의 문인이다. 숙종 때 6품, 대성, 방백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평생 학문 연구에 힘썼다.[1]
그의 저서로는 《논어해(論語解)》, 《맹자설(孟子設)》, 《존언(存言)》, 《서(書)》, 《성학설(聖學說)》, 《대학설(大學說)》, 《중용해(中庸解)》 등이 있다. 대표작 《존심(存心)》, 《학변(学弁)》, 《존언(存言)》과 사서 주석 등은 양명학자라는 이유로 냉대받아 생전에 간행되지 못했다. 전집으로 《하곡집(霞谷集)》이 있다.[1]
2. 1. 학문적 여정
정몽주의 후손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 정유성 밑에서 자랐다. 일찍이 학문에 뜻이 있어 백가(百家)에 통달하였고, 박세채와 윤증의 문인이다. 숙종 때 여러 벼슬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평생 학문 연구에 힘썼다.[1]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곧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20세 때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 41세에 안산(현 시흥시 화정동 가래울)으로 이주하여 당시 학계와 정계에서 이단으로 몰려 배척당하면서도 조선 최초로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하였다. 61세 이후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이주하여 신작(申綽), 이광사, 유희 등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1]그는 왕양명의 학설 중 '치량지설(致良知說)'의 '양'(良)이 '지'(知)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치지'의 '지'(知)가 지식의 '지'(知)가 아니라 선천적 지혜라고 했다. 그러므로 '양'(良)는 선천적으로 얻은 혜명(慧明)한 선천적 지성을 뜻한다고 했으며, '양지'가 있으므로 경험이 가능하고 지식을 지식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성현의 말씀이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속에 흐르는 논리가 중요한 것이요, 논리보다도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있는 양지가 더욱 귀하다고 했다.[1]
당시 조선은 주자학(성리학)이 전성기였으나, 정제두는 이단시되던 양명학을 조선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강화도에서 이광신, 이광사 등의 소론 학자들 사이에 그 학통을 열었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러 이건창과 정인보에게 계승되었다. 그 곁에서 천문학, 문자학, 사회 제도 연구에 힘썼으며, 관념적인 허학을 비판하고 실학을 실천했다. 또한 일상 예의범절과 국가 의전에 대한 건백서 등 예학을 연구했다.[1]
2. 2. 강화학파 형성
정몽주의 후손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성리학)이 전성기였으나, 정제두는 이단시되던 양명학을 조선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강화도에서 이광신, 이광사 등의 소론 학자들 사이에 그 학통을 열었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러 이건창과 정인보에게 계승되었다. 그는 천문학, 문자학, 사회 제도 연구에 힘썼으며, 관념적인 허학을 비판하고 실학을 실천했다. 또한 일상 예의범절과 국가 의전에 대한 건백서 등 예학을 연구했다.[1]3. 사상과 학문
정제두는 정몽주의 후손으로, 어릴 적 부모를 여의고 현종 때 우의정을 지낸 할아버지 정유성 슬하에서 성장했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여러 학문에 통달하였고, 박세채와 윤증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숙종 재위 시기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평생을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나 곧 주자학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20세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 41세에 안산(현 시흥시 화정동 가래울)으로 이주하여 당시 학계와 정계로부터 이단으로 배척받는 상황 속에서도 조선 최초로 양명학의 사상 체계를 완성하였다. 61세 이후에는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거처를 옮겨 신작, 이광사, 유희 등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조선과 한국 학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제두의 학술 사상은 양명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논어해(論語解)>, <맹자설(孟子設)>, <존언(存言)>, <서(書)>, <성학설(聖學說)>, <대학설(大學說)>, <중용해(中庸解)> 등이 있다.[1] 그러나 대표작인 『존심(存心)』, 『학변(学弁)』, 『존언(存言)』과 사서 주석 등은 양명학자라는 이유로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냉대받았다. 사후 『하곡집(霞谷集)』이라는 전집이 간행되었다.
3. 1. 실학적 경향
정제두는 주자학이 전성기였던 조선 사회에서 이단으로 여겨지던 양명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강화도에서 이광신, 이광사 등 소론 학자들에게 양명학을 가르쳤으며, 그의 학통은 조선 말기 이건창과 정인보에게 계승되었다.[1]그는 왕양명의 '치량지설(致良知說)'에서 '양'(良)이 '지'(知)에 대해 주의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즉, '치지'의 '지'(知)는 지식이 아닌 선천적 지혜이며, '양'(良)은 타고난 밝은 선천적 지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양지' 덕분에 경험이 가능하고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성현의 말씀 속에 흐르는 논리보다도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있는 양지가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1]
정제두는 천문학, 문자학, 사회 제도 연구에도 힘썼으며, 관념적인 학문을 비판하고 실학을 실천했다. 또한 일상 예의범절과 국가 의전에 대한 연구도 진행했다.[1]
4. 저서
정제두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존심(存心)』, 『학변(学弁)』, 『존언(存言)』과 사서 주석 등이 있다. 그러나 그는 양명학자였기 때문에 생전에는 그의 저작들이 냉대받아 간행되지 못했다.[1] 전집으로는 『하곡집(霞谷集)』이 있다.[1]
5. 영향
정몽주의 후손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성리학)이 전성기였으나, 정제두는 이단시되던 양명학을 조선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강화도에서 이광신, 이광사 등의 소론 학자들 사이에 그 학통을 열었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러 이건창과 정인보에게 계승되었다.[1] 그는 천문학, 문자학, 사회 제도 연구에 힘썼으며, 관념적인 허학을 비판하고 실학을 실천했다. 또한 일상 예의범절과 국가 의전에 대한 건백서 등 예학을 연구했다.[1]
그는 왕양명의 학설 중 제일의(第一義)라고 할 수 있는 '치량지설(致良知說)'의 '양'(良)이 '지'(知)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 즉 '치지'의 '지'(知)가 지식의 '지'(知)가 아니라 선천적 지혜라고 했다.[1] 그러므로 '양'(良)는 생래적으로 얻은 혜명(慧明)한 선천적 지성을 뜻한다고 했으며, '양지'가 있으므로 경험이 가능하고 지식을 지식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1] 또한 성현의 말씀이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속에 흐르는 논리가 중요한 것이요, 논리보다도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있는 양지가 더욱 귀하다고 했다.[1]
그의 학풍은 조선과 한국의 학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의 학술사상의 본령(本領)은 양명학에 있었다.[1] 61세 이후 강화도 하곡(霞谷)로 이주하여 신작(申綽)·이광사(李匡師)·유희(柳僖) 등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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