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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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는 1950년 결성된 일본의 노동 단체이다.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출범했으나, 1951년 좌경 노선으로 전환하여 반미, 평화주의를 추구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핵무기 금지, 미군 기지 반대 운동 등 사회 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대규모 파업을 주도했다. 1983년에는 451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리며 일본 전체 조직 노동자의 36%를 차지했다. 1989년 전일본민간노동조합연합회(전민노련)에 합류하기 위해 해산되었으며, 총평의 정치 활동은 이후 별도의 조직을 통해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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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 |
---|---|
개요 | |
명칭 |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
약칭 | 총평 |
영어 명칭 | General Council of Trade Unions of Japan (JCTU) |
기본 정보 | |
종류 | 나ショナル센터 |
설립일 | 1950년 7월 11일 |
해산일 | 1989년 11월 |
후신 조직 |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 총평센터 |
가맹 단체 수 | 50개 단산 (그 중 옵서버 가맹 1개 단산) |
조합원 수 | 391만 명 |
우편 번호 | 101-0062 |
본부 소재지 | 도쿄도지요다구간다스루가다이 3-2-11 총평회관 (현 연합회관) |
지지 정당 | 일본사회당 |
추가 정보 | |
기타 | 1950년 7월 11일, 총평의 결성 대회가 열렸다. |
2. 내력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후, 일본 미군정의 보호와 육성 아래 다시 시작된 일본의 노동 운동은 경제 사회 정세를 배경으로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색채가 짙었으며, 일본공산당이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냉전이 격화되고 미군정의 정책이 전환됨에 따라 전일본산업별노동조합회의(산별회의)나 전국노동조합연락협의회(전노련) 등으로 대표되던 종래의 노동 운동은 한계를 보였다. 한편, 생디칼리슴과 공산주의의 배제, 국제자유노동조합총연맹(ICFTU, 세계노동조합연맹에서 분열되어 결성) 가맹 등을 지향하는 운동 조류가 진행되었다. 그 조류의 노총으로서 1950년(쇼와 25년) 7월 11일 총평이 결성되었다.[12]
미군정 원조하에 반공 노총으로 출발한 총평이었지만, 이듬해인 1951년 3월 제2회 대회에서 행동 강령으로서 평화 4원칙을 결정하고 ICFTU 가맹 의안을 부결하는 등, 좌경 반미 노선으로 전향했다. 요시다 내각이 파괴활동방지법의 전신인 국가공안보장법, 집회데모취체법, 총파업금지법, 노동삼법개정을 도모하자 1951년 6월 「노동법개악반대투쟁위원회」(노투)를 설치하고, 1952년에는 노동악법들의 국회 심의에 맞서 정치총파업을 4차에 걸쳐 실시했다(노투 파업). 총평은 일본탄광노동조합(탄노), 일본전기산업노동조합(전산)을 필두로 전투적 쟁의를 전개했다. 당시 언론은 이러한 변화를 “닭이 오리가 되었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미군정의 노동조합 담당자가 “치킨(겁쟁이)이 레임덕(쓸모없는 것)이 되었다”고 욕한 것을 통역사가 “오리 되었다”고 직역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14] 1952년 7월 제3회 대회에서는 내부 우파가 제안한 ICFTU 일괄가맹안이 부결되고, 좌파사회당 지지를 결정하면서 좌파 노선을 분명히 했다.
1952년 12월 전국섬유산업노동조합동맹(전섬동맹), 전일본해원조합(해원조합), 전국영화연극노동조합(전영연), 일본방송노동조합(일방노) 4개 단산은 총평의 정치투쟁 중시 지도를 비판하는 「총평비판―민주적노동조합의 입장에 서서」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며, 우파계 노조들과 지도부의 불화가 표면화되었다(4단산비판 사건). 양측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고, 제4회 대회를 거쳐 1953년 7월부터 11월까지 일방노를 제외한 우파계 3개 단산이 잇따라 총평에서 탈퇴했다. 이들은 1951년 6월 재건된 우파 노총인 일본노동조합총동맹(총동맹)과 1954년 새로운 연락협의체인 전일본노동조합회의(전노)를 결성했다. 총평은 3개 단산의 탈퇴를 계기로 계급 투쟁을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자본주의 체제 변혁을 목표로 삼는 노선 전환을 완성했다. 일본사회당 지지를 운동 방침에 명기하고 반전평화운동을 추진했으며, “옛날 육군 지금 총평”이라는 야유를 들을 정도로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다. 총평의 좌파 노선에는 노농파 마르크스주의 연구집단인 사회주의협회의 영향이 있었다.
1952년 5월 1일, 총평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일방적인 성격에 대한 전국적인 항의 시위를 주도했다. 대부분 평화롭게 진행되었지만, 도쿄 황궁 밖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의 폭력적인 충돌로 여러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여 "피의 메이데이"로 기억되었다.[3]
1950년대 후반, 총평은 핵무기 금지 운동, 일본 내 미국 군사 기지 반대 운동 등 여러 정치적, 사회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임금 인상을 위한 대규모 파업을 주도했다. 미일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안보 투쟁과 큐슈 북부 미이케 탄광에서 벌어진 미이케 투쟁에서 총평의 과격한 활동은 절정에 달했다. 총평은 안보 조약 반대 투쟁의 일환으로 640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전국적인 총파업을 조직했는데, 이는 일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파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노력은 모두 참담한 실패로 끝났으며, 이후 총평은 논쟁적인 파업보다는 더 온건한 직장 내 활동으로 점차 전환했다.[4]
1958년 8월 15일, 와카야마현에서 근무 평정 반대, 민주 교육을 지키는 국민 대회를 개최하고 데모를 열었으나 경찰과 충돌했다. 또한, 산하 노동자 자녀의 등교 거부를 지지했다.[15]
일본 사회당 지지를 운동 방침에 명기하고, 일본 공산당과는 개별 과제에서 공동 투쟁을 하기로 했다. 1964년의 4.17 제네럴 스트라이크 문제로 일본 공산당이 파업에 반대하는 방침을 취한 결과, 일부 노조에서는 노조 내의 일본 공산당원에 대한 공격이 있기도 했다.[16]
1961년 5월 18일, 주간지 『신주간』을 창간했으나, 1962년 7월 5일 폐간되었다.
1978년에는 OECD 노동조합자문위원회에 참가했다.
1983년 당시 총평은 산하에 49개 단산 451만 명 조합원을 거느리며, 일본의 전체 조직노동자의 36%가 총평 조합원이었다. 그 중 70%가 관공서 공공부문 노동자였다. 매년 중립노동조합연락회의(중립노련)과 함께 춘투공투회의를 조직하고 춘계생활투쟁(춘투)를 임금결정기구로 정착시켰다.
1987년 발족한 전일본민간노동조합연합회(전민노련)에 합류하기 위해 1989년 해산되었다. 전민노련은 이후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연합)이 되었다.[6][7]
총평의 정치 활동을 계승하는 조직으로 1989년 9월 '''총평 센터'''가 만들어졌고, 1992년 10월 '''사회당과 연대하는 노조 회의'''로 전환되었다. 이 조직은 일본사회당 및 그 후신인 사회민주당을 지지했지만, 민주당 결성 이후 지지축을 민주당으로 옮기는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1997년 '''민주리버럴노조회의'''로 전환되었다. 1999년 5월에는 연합정치센터의 결성에 따라 민주리버럴노조회의는 해산하면서 총평계의 정치활동은 종지부를 찍었다.
2. 1. 결성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한 후,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보호와 육성 하에 재출발한 일본의 노동 운동은 경제·사회 정세를 배경으로 급진적이고 정치적 색채가 짙어졌으며, 일본 공산당도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냉전이 발발하면서 GHQ가 반공 자세(소위 "역코스")를 강화함에 따라, 1947년의 2·1 제너럴 스트라이크 중단, 도호 사건에 대한 미군 출동 등 일본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했던 산별회의나 전노련 등에 집약되어 있던 노동 운동은 곤경에 빠졌다. 1948년에는 GHQ의 의향에 따라 정령 201호가 공포되어, 공무원의 쟁의권이 박탈되었다. 게다가 1950년에는 레드 퍼지로 공산당원과 싱파가 대량 해고되었다.[1]이러한 배경에서 노동조합주의와 일본 공산당 배제, 국제자유노동조합총연맹(세계노동조합연맹에서 분열되어 결성) 가맹 등을 지향하는 운동 조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0년(쇼와 25년) 7월 11일,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 결성 대회가 도쿄도 미나토구의 도쿄회관에서 열렸다.[12] 초대 의장에는 탄노 출신의 무토 타케오, 사무국장에는 도시교 출신의 시마가미 젠고로가 선출되었다. 총동맹, 국철, 일교조, 도노련, 해원조합, 사철총련 등 주요 나셔널 센터와 단산(산업별 단일 노동조합의 약칭[13])이 참가했다. 총평 결성에는 GHQ의 강한 의향이 작용했으며, 결성 대회에서 일본 공산당 배제 및 국제자유노련 접근을 내용으로 하는 대회 선언을 채택하여 산별회의·전노련과는 선을 긋는 노동조합으로 출발했다.
2. 2. 결성과 초기 활동 (1950년 ~ 1954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한 후,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보호와 육성 아래 재출발한 일본의 노동 운동은 경제・사회 정세를 배경으로 급진적이고 정치적 색채가 짙어졌으며, 일본 공산당도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냉전이 발발하면서 GHQ가 반공 자세("역코스")를 강화함에 따라, 1947년의 2・1 제네럴 스트라이크 중단, 도호 사건에 대한 미군 출동 등 일본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했던 산별회의나 전노련 등에 집약되어 있던 노동 운동은 곤경에 빠졌다. 1948년에는 GHQ의 의향에 따라 정령 201호가 공포되어, 공무원의 쟁의권이 박탈되었다. 1950년에는 레드 퍼지로 공산당원과 싱파가 대량 해고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조합주의와 일본 공산당 배제, 국제자유노동조합총연맹(세계노련에서 분열되어 결성) 가맹 등을 지향하는 운동 조류의 분기 및 결집이 진행되었다.
1950년(쇼와 25년) 7월 11일,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 결성 대회가 도쿄도 미나토구의 도쿄회관에서 열렸다.[12] 초대 의장에는 탄노 출신의 무토 타케오, 사무국장에는 도시교 출신의 시마가미 젠고로가 선출되었다. 총동맹, 국철, 일교조, 도노련, 해원조합, 사철총련 등 주요 나셔널 센터와 단산(산업별 단일 노동조합[13])이 참가했다. 총평 결성에는 GHQ의 강한 의향이 작용했으며, 결성 대회에서 일본 공산당 배제 및 국제자유노련 접근을 내용으로 하는 대회 선언을 채택, 산별회의・전노련과는 선을 긋는 노동조합으로 출발했다.
GHQ의 원조 하에 반공적 색채가 강한 나셔널 센터로 출발한 총평이었지만, 이듬해 1951년 3월 10일 제2회 대회에서 강화 조약을 둘러싸고 민주・좌우가 대립하며, 행동 강령으로 재군비 반대・전면 강화・중립 견지・군사 기지 반대의 평화 4원칙을 결정하고, 국제자유노련 가맹 의안을 부결하는 등 우파가 후퇴하고 좌경・반미로 방향 전환했다. 사무국장으로 타카노 미노루를 선출했다. 요시다 내각이 국가공안보장법(후에 파방법으로 성립), 집회 데모 단속법, 제네럴 스트라이크 금지법, 노동 3법 개정을 꾀한 것에 대해, 1951년 6월에 "노동 법규 개악 반대 투쟁 위원회"(노투)를 설치하고, 국회 심의 중인 1952년에는 정치 제네럴 스트라이크를 4차례에 걸쳐 진행했다(노투 파업). 일본탄광노동조합연합회(탄노)와 전력 회사의 단산인 일본전기산업노동조합(전산)을 필두로, 가맹 단산도 전투적인 노동 쟁의를 전개했다. 당시 언론은 총평의 이러한 변화를 "닭에서 오리로"라고 불렀다. 일설에는, 총평의 변화를 당시 GHQ 노동조합 담당자가 "치킨(겁쟁이)이 쓸모 없게 되었다(lame duck, 레임덕)"라고 욕한 것을, 통역이 이해하지 못하고 "오리가 되었다"라고 직역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52년 7월 제3회 대회에서는 우파의 국제자유노련 일괄 가맹안이 부결되었고, 좌파사회당 지지를 결정하여 좌파 노선을 명확히 했다. 인사에서도 전산 위원장 후지타 스스무가 새로 선출됨과 동시에 타카노 미노루가 사무국장으로 재선출되어 민주화 동맹(민주동. 2・1 제네럴 스트라이크 중단 후에 노조 내에서 일본 공산당의 세력을 배제하는[14]) 좌파의 주도권이 확립되었다. 한편 우파는 임원을 내지 않아, 총평 내 좌우 대립은 깊어졌다.
1952년 12월 25일, 전섬동맹・해원조합・전영연・일방로 4개 단산은 총평 지도부의 정치 투쟁 중시 지도를 비판하는 "총평 비판――민주적 노동조합의 입장에서"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고, 우파 계열 조합과 집행부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4단산 비판). 양측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고, 7월 8일 제4회 대회를 거친 1953년 7월부터 11월에 걸쳐 일방로를 제외한 우파 계열 3개 단산은 잇따라 총평에서 탈퇴했다. 이들은 우파 내셔널 센터인 총동맹을 1951년 6월에 재건, 1954년 4월 22일에는 새로운 연락 협의체로서 전일본노동조합회의(전노)를 결성했다.
총평은 3개 단산 탈퇴를 계기로 계급 투쟁을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자본주의 체제 변혁을 목표로 삼아 제2회 대회 이래의 노선 전환을 완성했다. 일본사회당 지지를 운동 방침에 명기하고, 반전 평화 운동을 진행했다. 총평의 정치적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종종 억지스러운 행동이 물의를 일으켰고 "옛 육군, 지금 총평" 등으로 조롱받았다. 총평의 좌파 노선 형성에는 사회주의협회의 영향이 있었다. 관계자 회고에 따르면,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걸쳐 총평 본부 전임자는 거의 사회주의협회 회원이었다고 한다.
2. 3. 좌파 노선의 확립과 활동 (1955년 ~ 1980년대)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후, 일본 미군정의 보호와 육성 아래 다시 시작된 일본의 노동 운동은 경제 사회 정세를 배경으로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색채가 짙었으며, 일본공산당이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냉전이 격화되고 미군정의 정책이 전환됨에 따라 전일본산업별노동조합회의(산별회의)나 전국노동조합연락협의회(전노련) 등으로 대표되던 종래의 노동 운동은 한계를 보였다. 한편, 생디칼리슴과 공산주의의 배제, 국제자유노동조합총연맹(ICFTU, 세계노동조합연맹에서 분열되어 결성) 가맹 등을 지향하는 운동 조류가 진행되었다. 그 조류의 노총으로서 1950년(쇼와 25년) 7월 11일 총평이 결성되었다.[12]미군정 원조하에 반공 노총으로 출발한 총평이었지만, 이듬해인 1951년 3월 제2회 대회에서 행동 강령으로서 평화 4원칙을 결정하고 ICFTU 가맹 의안을 부결하는 등, 좌경 반미 노선으로 전향했다. 요시다 내각이 파괴활동방지법의 전신인 국가공안보장법, 집회데모취체법, 총파업금지법, 노동삼법개정을 도모하자 1951년 6월 「노동법개악반대투쟁위원회」(노투)를 설치하고, 1952년에는 노동악법들의 국회 심의에 맞서 정치총파업을 4차에 걸쳐 실시했다(노투 파업). 총평은 일본탄광노동조합(탄노), 일본전기산업노동조합(전산)을 필두로 전투적 쟁의를 전개했다. 당시 언론은 이러한 변화를 “닭이 오리가 되었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미군정의 노동조합 담당자가 “치킨(겁쟁이)이 레임덕(쓸모없는 것)이 되었다”고 욕한 것을 통역사가 “오리 되었다”고 직역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14] 1952년 7월 제3회 대회에서는 내부 우파가 제안한 ICFTU 일괄가맹안이 부결되고, 좌파사회당 지지를 결정하면서 좌파 노선을 분명히 했다.
1952년 12월 전국섬유산업노동조합동맹(전섬동맹), 전일본해원조합(해원조합), 전국영화연극노동조합(전영연), 일본방송노동조합(일방노) 4개 단산은 총평의 정치투쟁 중시 지도를 비판하는 「총평비판―민주적노동조합의 입장에 서서」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며, 우파계 노조들과 지도부의 불화가 표면화되었다(4단산비판 사건). 양측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고, 제4회 대회를 거쳐 1953년 7월부터 11월까지 일방노를 제외한 우파계 3개 단산이 잇따라 총평에서 탈퇴했다. 이들은 1951년 6월 재건된 우파 노총인 일본노동조합총동맹(총동맹)과 1954년 새로운 연락협의체인 전일본노동조합회의(전노)를 결성했다. 총평은 3개 단산의 탈퇴를 계기로 계급 투쟁을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자본주의 체제 변혁을 목표로 삼는 노선 전환을 완성했다. 일본사회당 지지를 운동 방침에 명기하고 반전평화운동을 추진했으며, “옛날 육군 지금 총평”이라는 야유를 들을 정도로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다. 총평의 좌파 노선에는 노농파 마르크스주의 연구집단인 사회주의협회의 영향이 있었다.
1952년 5월 1일,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는 점령 종식에 관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일방적인 성격에 대한 전국적인 항의 시위를 주도했다. 대부분 평화롭게 진행되었지만, 도쿄 황궁 밖에서 시위대와 경찰 간의 폭력적인 충돌로 여러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여 "피의 메이데이"로 기억되었다.[3]
1950년대 후반,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는 핵무기 금지 운동, 일본 내 미국 군사 기지 반대 운동 등 여러 정치적, 사회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임금 인상을 위한 대규모 파업을 주도했다. 미일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안보 투쟁과 큐슈 북부 미이케 탄광에서 벌어진 미이케 투쟁에서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의 과격한 활동은 절정에 달했다.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는 안보 조약 반대 투쟁의 일환으로 640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전국적인 총파업을 조직했는데, 이는 일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파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노력은 모두 참담한 실패로 끝났으며, 이후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는 논쟁적인 파업보다는 더 온건한 직장 내 활동으로 점차 전환했다.[4]
1958년 8월 15일, 와카야마현에서 근무 평정 반대, 민주 교육을 지키는 국민 대회를 개최하고 데모를 열었으나 경찰과 충돌했다. 또한, 산하 노동자 자녀의 등교 거부를 지지했다.[15]
일본 사회당 지지를 운동 방침에 명기하고, 일본 공산당과는 개별 과제에서 공동 투쟁을 하기로 했다. 1964년의 4.17 제네럴 스트라이크 문제로 일본 공산당이 파업에 반대하는 방침을 취한 결과, 일부 노조에서는 노조 내의 일본 공산당원에 대한 공격이 있기도 했다.[16]
1978년에는 OECD 노동조합자문위원회에 참가했다.
1983년 당시 총평은 산하에 49개 단산 451만 명 조합원을 거느리며, 일본의 전체 조직노동자의 36%가 총평 조합원이었다. 그 중 70%가 관공서 공공부문 노동자였다. 매년 중립노동조합연락회의(중립노련)과 함께 춘투공투회의를 조직하고 춘계생활투쟁(춘투)를 임금결정기구로 정착시켰다.
2. 4. 해산과 그 이후 (1980년대 ~ 현재)
1987년 발족한 전일본민간노동조합연합회(전민노련)에 합류하기 위해 1989년 해산되었다. 전민노련은 이후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연합)이 되었다.[6][7]우경화된 연합과 달리 총평의 정치활동을 계승하는 조직으로 1989년 9월 '''총평센터'''가 만들어졌고, 1992년 10월 '''사회당과 연대하는 노조회의'''로 전환되었다. 이 조직은 일본사회당 및 그 후신인 사회민주당을 지지했지만, 민주당 결성 이후 지지축을 민주당으로 옮기는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1997년 '''민주리버럴노조회의'''로 전환되었다. 1999년 5월에는 연합정치센터의 결성에 따라 민주리버럴노조회의는 해산하면서 총평계의 정치활동은 종지부를 찍었다.
3. 가맹 조합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 해산 직전인 1989년 7월 당시 가맹 조합은 다음과 같다.[25]
총평 결성 초기에는 민간 기간산업 단체도 많이 가맹했지만, 총평이 좌경화되면서 민간 기업 노조들은 대부분 탈퇴하고 우파 노총인 전일본노동총동맹(동맹)에 가맹했다. 이에 따라 총평은 공공부문 노조가 중심이 되었다.
노조 | 약칭 | 비고 |
---|---|---|
전일본자치단체노동조합 | 자치노 | |
일본교직원조합 | 일교조 | |
전일본수도노동조합 | 전수도 | |
일본도시교통노동조합 | 도시교 | |
국철노동조합 | 국노 | |
일본사철노동조합총연합회 | 사철총련 | |
일본철도산업노동조합총연합 | 철산총련 | |
전체신노동조합 | 전체신 | 현 일본우정그룹노동조합 (JP노조) |
전기통신정보산업노동조합연합 | 정보통신노련 | 전신은 전국전기통신노동조합(전전통)과 전전공사 계열 기업의 노동조합으로 구성된 전통노련. NTT 민영화에 따라 개칭. 현 정보산업노동조합연합회(정보노련) |
일본탄광노동조합 | 탄로 | |
일본철강산업노동조합연합회 | 철강노련 | 현 일본기간산업노동조합연합회. 총평 가맹이었지만 민사당과의 관계도 강했다. |
일본국가공무원노동조합연합회 | 국공노련 | 총평 반주류파 (통일노조간)의 유력 노조 중 하나로, 총평 해산 후 전국노동조합총연합(전노련) 결성에 참가 |
일본의료노동조합연합회 | 일본의로련 | 총평 반주류파 (통일노조간)의 유력 노조 중 하나로, 총평 해산 후 전노련 결성에 참가 |
전일자노 건설일반노동조합 | 건설일반전일자노 | 총평 반주류파 (통일노조간)의 유력 노조 중 하나로, 총평 해산 후 전노련 결성에 참가 |
전일본운수일반노동조합 | 운수일반 | 총평 반주류파 (통일노조간)의 유력 노조 중 하나로, 총평 해산 후 전노련 결성에 참가 |
전국일반노동조합 | 전국일반 | 중소 영세 업체를 대상으로 한다. |
전국자동차교통노동조합연합회 | 전자교노련 | |
전일본항만노동조합 | 전항만 | |
일본방송노동조합 | 일본방노 | |
일본신문노동조합연합 | 신문노련 | |
전국경주노동조합 | 전경로 | |
전국농림어업단체직원노동조합연합 | 전국농단로 | |
전일본건설운수연대노동조합 | 전일건운 | |
총평・전일본건설산업노동조합 | 전일건 | |
전일본조선기계노동조합 | 전조선기계 | 2016년 해산 |
전일본전력노동조합협의회 | 전전력 | 전신은 1947년 결성된 일본전기산업노동조합 (전산). 1996년 전국전력관련산업노동조합총연합(전력총련)에 흡수되어 소멸 |
전주류군노동조합 | 전주로 | 주일본미군 기지 노동자의 노동조합. 현재 국공관련노동조합연합회(국공연합) 가맹 |
전국금속노동조합 | 전국금속 | 현재의 JAM |
일본비철금속산업노동조합연합회 | 비철금속노련 | 전일본금속광산노동조합연합회(전광)에서 이행하여 결성. 현재의 일본기간산업노동조합연합회 |
합성화학산업노동조합연합 | 합화노련 | 현재의 일본화학에너지산업노동조합연합회(JEC연합) |
일본섬유산업노조연합회 | 섬유노련 | 1998년에 일본섬유생활산업노동조합연합회 (섬유생활노련)로 개칭. 2002년에 UI젠센 (현재의 전국섬유화학식품유통서비스일반노동조합동맹(UA젠센))에 통합 |
전국인쇄출판산업노동조합총연합회 | 전인총련 | 전국노동조합총연합(전노련)에 가맹 |
전국산림노동조합 | 전산로 | 현재의 전일본산림임업목재관련산업노동조합연합회(산림노련) |
전일본해운노동조합연합회 | 전해련 | 1998년 해산.[18] 일부는 전국일반에 합류[19]했지만 그 후의 추세는 불명 |
일본자동차운전사노동조합 | 자운로 | 현재의 전국노무공급사업노동조합연합회(노무공로련) |
전일통노동조합 | 전일통 | 일본통운의 기업별 노동조합. 전일본운수산업노동조합연합회(운수노련) 가맹 |
전일본호텔노동조합연합회 | 호텔노련 | 현재의 서비스・투어리즘산업노동조합연합회(서비스연합) |
담배산업노동조합공투회의 | 담배공투 | |
알코올전매노동조합 | 알전 | 민영화 후에는 일본알코올산업 주식회사로 된다. 그 관련 회사의 일본합성알코올노조는 일본화학에너지산업노동조합연합회(JEC연합)에 가맹하고 있다. |
방사선영향연구소노동조합 | 방영연노조 | 현재는 전일본자치단체노동조합(자치노) 가맹 |
전국고령자퇴직자연락협의회 | 전국고퇴련 | |
전농림노동조합 | 전농림 | |
전림야노동조합 | 전림야 | 현재의 전일본산림임업목재관련산업노동조합연합회(산림노련) |
전조폐노동조합 | 전조폐 | |
전인쇄국노동조합 | 전인쇄 | |
전홋카이도개발국노동조합 | 전개발 | |
전재무노동조합 | 전재무 | |
대장성직원조합 | 대장직조 | |
오키나와국가공무원노동조합 | 오키나와국공로 | |
회계검사원직원노동조합 | 회계로 | |
정부관계특수법인노동조합협의회 | 정로협 | |
주택산업노동조합연락협강회 | 주택노협 | 옵저버 가맹 |
다음은 1958년, 1970년, 1985년 연맹 가맹 노조와 조합원 수 현황이다.[7][8][9]
노조 | 약칭 | 1958년 조합원 수 | 1970년 조합원 수 | 1985년 조합원 수 | 탈퇴 | 탈퇴 사유 |
---|---|---|---|---|---|---|
알코올 독점 노동조합 | 아루코르센바이 | 1,278 | 1,056 | 443 | ||
전 재무국 노동조합 | 젠자이무 | 해당 없음 | 5,339 | 해당 없음 | 1975 | 국공노련으로 합병 |
전 홋카이도 개발국 직원 노조 | 젠카이하쓰 | 해당 없음 | 11,050 | 해당 없음 | 1975 | 국공노련으로 합병 |
전 국제 통상 산업성 노동조합 | 젠쇼코 | 8,803 | 10,791 | 해당 없음 | 1975 | 국공노련으로 합병 |
전 일본 건설 산업 노동조합 | 해당 없음 | 해당 없음 | 3,000 | 1989 | 탈퇴 | |
전일본 일용 노동조합 | 젠니치지로 | 150,339 | 153,068 | 67,386 | 1989 | 전국노련으로 이관 |
전일본 특급 노동조합 | 젠니쓰 | 67,920 | 69,489 | 해당 없음 | 1968 | 운수노련으로 합병 |
전일본 호텔 노동조합 연합회 | 호테루로렌 | 해당 없음 | 해당 없음 | 12,383 | 1989 | 렌고로 이관 |
전일본 금속 광산 노동조합 연합회 | 젠코 | 57,000 | 31,984 | 해당 없음 | 1982 | 비철금속노련으로 합병 |
전일본 시영 교통 노동조합 연합회 | 토시키코츠 | 46,601 | 66,237 | 48,028 | 1989 | 렌고로 이관 |
전 일본 비철금속 노동조합 연합회 | 히테츠킨조쿠로렌 | 해당 없음 | 해당 없음 | 16,477 | 1989 | 렌고로 이관 |
전 일본 해운 노동조합 연합회 | 젠카이렌 | 4,931 | 8,505 | 7,949 | 1989 | 렌고로 이관 |
전일본 주둔군 노동조합 | 젠추로 | 81,753 | 25,320 | 해당 없음 | 1989 | 렌고로 이관 |
전 일본 유리 및 병 제조업체 노동조합 | 젠쇼로 | 해당 없음 | 9,668 | 해당 없음 | 1972 | 가가쿠도메이로 합병 |
전일본 항만 노동조합 | 젠코완 | 20,261 | 28,214 | 22,124 | 1989 | 탈퇴 |
전일본 국립병원 노동조합 | 젠이로 | 24,159 | 해당 없음 | 해당 없음 | 1957 | 이로쿄로 합병 |
전일본 도도부현 및 시정촌 노동조합 | 지치로 | 437,931 | 836,090 | 1,267,021 | 1989 | 소효로 이관 |
전일본 전기통신 노동조합 | 젠덴쓰 | 152,039 | 232,519 | 276,686 | 1989 | 소효로 이관 |
전일본 운수 일반 노동조합 | 운유이판 | 12,655 | 14,409 | 16,267 | 1989 | 전국노련으로 이관 |
전 사법 행정 직원 노동조합 | 젠시호 | 16,630 | 12,564 | 해당 없음 | 1975 | 국공노련으로 합병 |
전 규슈 전력 노동조합 | 젠큐덴 | 해당 없음 | 3,212 | 해당 없음 | ||
전 노동성 노동조합 | 젠로도 | 13,255 | 19,732 | 해당 없음 | 1975 | 국공노련으로 합병 |
전 조폐국 노동조합 | 젠조헤이 | 1,597 | 1,790 | 1,444 | 1989 | 렌고로 이관 |
전 독점 공사 노동조합 | 젠센바이 | 39,729 | 37,938 | 30,219 | 1987 | 해산 |
전 전파 관리국 노동조합 | 젠뎀파 | 2,800 | 2,456 | 해당 없음 | 1975 | 국공노련으로 합병 |
전 운수 노동조합 | 젠운유 | 해당 없음 | 5,790 | 해당 없음 | 1975 | 국공노련으로 합병 |
감사원 직원 노동조합 | 카이켄로 | 해당 없음 | 1,120 | 1,055 | 1989 | 탈퇴 |
건설성 노동조합 | 젠켄로 | 해당 없음 | 12,564 | 해당 없음 | 1975 | 국공노련으로 합병 |
특수 정부 기관 노동조합 협의회 | 세이로쿄 | 해당 없음 | 10,161 | 21,479 | 1989 | 렌고로 이관 |
문부성 직원 노동조합 | 몬부쇼쿠소 | 1,635 | 1,914 | 해당 없음 | 1975 | 국공노련으로 합병 |
재무성 직원 노동조합 | 오쿠라쇼쿠소 | 1,800 | 1,985 | 해당 없음 | ||
일본 사철 노동조합 총연합회 | 시테츠로렌 | 134,374 | 253,259 | 197,045 | 1989 | 렌고로 이관 |
정부 인쇄국 노동조합 | 젠인사쓰 | 7,340 | 7,499 | 6,215 | 1989 | 렌고로 이관 |
국제 전기통신 공사 노동조합 | 코쿠사이 덴-덴 | 3,063 | 3,212 | 4,637 | ||
일본 농림수산성 노동조합 | 젠노린 | 106,000 | 50,613 | 해당 없음 | 1975 | 국공노련으로 합병 |
일본 방송 노동조합 | 닛포로 | 7,000 | 13,326 | 12,876 | 1989 | NHK 로렌으로 합병 |
일본 탄광 노동조합 | 탄로 | 200,441 | 54,648 | 11,449 | 1989 | 렌고로 이관 |
일본 의료 노동조합 협의회 | 이로쿄 | 해당 없음 | 65,646 | 144,161 | 1989 | 전국노련으로 이관 |
일본 세관 직원 노동조합 | 젠제이칸 | 해당 없음 | 1,190 | 해당 없음 | 1975 | 국공노련으로 합병 |
일본 전력 산업 노동조합 | 덴산 | 3,000 | 1,517 | 2,626 | ||
일본 화학 산업 노동조합 연합회 | 카가쿠도메이 | 41,644 | 32,963 | 해당 없음 | 1989 | 렌고로 이관 |
일본 철강 노동조합 연합회 | 텟코로렌 | 120,722 | 208,905 | 211,886 | 1989 | 렌고로 이관 |
일본 합성 화학 노동조합 연합회 | 고카로렌 | 97,657 | 118,615 | 112,798 | 1989 | 렌고로 이관 |
일본 국가 공무원 노동조합 연합회 | 콕코로렌 | 해당 없음 | 해당 없음 | 136,570 | 1989 | 전국노련으로 이관 |
일본 신문 노동조합 연합회 | 신분 로렌 | 27,056 | 38,057 | 41,961 | 1989 | 탈퇴 |
일본 섬유 및 의류 노동조합 연합회 | 세니로렌 | 해당 없음 | 19,550 | 7,903 | 1989 | 렌고로 이관 |
일본 우편 수송 노동조합 | 닛테이 | 해당 없음 | 3,916 | 해당 없음 | ||
일본 우편 노동조합 | 젠테이 | 218,013 | 239,600 | 171,606 | 1989 | 렌고로 이관 |
일본 교원 조합 | 닛쿄소 | 593,117 | 547,311 | 667,443 | 1989 | 렌고로 이관 |
일본 담배 및 관련 노동조합 | 젠타바코 | 해당 없음 | 해당 없음 | 27,599 | 1989 | 렌고로 이관 |
법무성 직원 노동조합 | 젠호무 | 해당 없음 | 7,657 | 해당 없음 | 1975 | 국공노련으로 합병 |
주택 산업 노동조합 연락 협의회 | 주타쿠로쿄 | 해당 없음 | 해당 없음 | 해당 없음 | 1973 | 탈퇴 |
일본 전력 노동자 전국 협의회 | 젠덴료쿠 | 해당 없음 | 4,351 | 2,626 | 1989 | 렌고로 이관 |
전국 자동차 운수 노동자 연합 | 젠지코 | 해당 없음 | 58,577 | 56,541 | 1989 | 렌고로 이관 |
전국 제지 및 펄프 산업 노동조합 연합회 | 카미파로렌 | 47,707 | 58,003 | 26,147 | 1988 | 카미파렌고로 합병 |
전국 여객 자동차 노동자 연합회 | 젠료로렌 | 17,027 | 해당 없음 | 해당 없음 | ||
전국 인쇄 및 출판 산업 노동조합 연합회 | 젠인소렌 | 16,538 | 18,700 | 13,376 | 1989 | 전국노련으로 이관 |
전국 고무 산업 노동조합 연합회 | 고무로렌 | 해당 없음 | 23,460 | 49,294 | 1989 | 렌고로 이관 |
전국 수도 노동조합 연합회 | 젠스이도 | 13,796 | 28,561 | 36,797 | 1989 | 소효로 이관 |
일본 전국 산림 노동조합 | 젠린야 | 해당 없음 | 63,777 | 37,984 | 1989 | 신린로렌으로 합병 |
전국 목재 산업 노동조합 | 젠모쿠로 | 해당 없음 | 11,961 | 해당 없음 | ||
전국 조달청 노동조합 | 젠초타츠 | 2,502 | 해당 없음 | 해당 없음 | ||
전국 철도 기관사 노동조합 | 도료쿠샤 | 해당 없음 | 61,650 | 해당 없음 | 1985 | 탈퇴 |
전국 철도 노동조합 | 코쿠로 | 368,605 | 275,615 | 187,530 | 1989 | 전국노조로 이관 |
전국 세무 공무원 노동조합 | 젠코쿠제이 | 31,896 | 3,209 | 해당 없음 | 1975 | 국공노련으로 합병 |
전국 전기 통신 상호 원조 협회 노동조합 | 덴사이로 | 해당 없음 | 8,098 | 해당 없음 | ||
전국 금속 및 기계 노동조합 | 젠코쿠킨조쿠 | 91,000 | 212,929 | 155,799 | 1989 | 킨조쿠키카이로 합병 |
전국 일반 노동조합 | 젠코쿠이판 | 해당 없음 | 104,345 | 121,042 | 1989 | 렌고로 이관 |
오키나와 공무원 노동조합 | 오키나와칸코로 | 해당 없음 | 7,080 | 해당 없음 | 1975 | 국공노련으로 합병 |
운수성 해상 노동조합 | 젠카이지 | 2,130 | 해당 없음 | 해당 없음 | ||
항만 건설 위원회 직원 노동조합 | 젠코켄 | 4,350 | 4,193 | 해당 없음 | 1975 | 국공노련으로 합병 |
후생성 직원 노동조합 | 코세이쇼쿠소 | 3,697 | 2,926 | 3,413[10] |
4. 역대 지도부
직책 | 이름 | 재임 기간 | 출신 조직 |
---|---|---|---|
의장 | 타케후지 타케오 | 1950년 7월 ~ 1952년 7월 | 탄노 |
의장 | 후지타 스스무 | 1952년 7월 ~ 1953년 7월 | 전산 |
의장 | 후지타 토타로 | 1953년 7월 ~ 1956년 8월 | 사철총련 |
의장 | 하라구치 유키타카 | 1956년 8월 ~ 1958년 7월 | 전광 |
의장 | 오오타 카오루 | 1958년 7월 ~ 1966년 8월 | 합화노련 |
의장 | 호리이 토시카츠 | 1966년 8월 ~ 1970년 8월 | 사철총련 |
의장 | 이치카와 마코토 | 1970년 8월 ~ 1976년 7월 | 전주노 |
의장 | 마키에다 모토후미 | 1976년 7월 ~ 1983년 7월 | 일교조 |
의장 | 쿠로카와 타케시 | 1983년 7월 ~ 1989년 11월 | 사철총련 |
사무총장 | 시마가미 젠고로 | 1950년 ~ 1951년 | 도시교 |
사무총장 | 다카노 미노루 | 1951년 ~ 1955년 | 전국금속 |
사무총장 | 이와이 아키라 | 1955년 ~ 1970년 | 국노 |
사무총장 | 오오키 쇼고 | 1970년 ~ 1976년 | 전전통 |
사무총장 | 토미즈카 미츠오 | 1976년 ~ 1983년 | 국노 |
사무총장 | 마가라 에이키치 | 1983년 ~ 1989년 | 자치노 |
참조
[1]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
간행물
Prospects of Japanese Labor
1954
[3]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4]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5]
뉴스
EDITORIAL - Rengo's uphill battle October 31, 2005
http://www.japantime[...]
The Japan Times
2005-10-31
[6]
웹사이트
Rengo 2010 website
http://www.jtuc-reng[...]
2012-02-06
[7]
서적
Gewerkschaften in der japanischen Politik von 1970 bis 1990
VS Verlag für Sozialwissenschaften
2013-03-13
[8]
서적
Directory of Labor Organizations, Asia and Australasia
United States Department of Labor
1958
[9]
서적
Labor Law and Practice in Japan
United States Department of Labor
1970
[10]
문서
Figure is for 1980
[11]
문서
1989年11月解散大会時点。以下同じ。
[12]
문서
『戦後20年写真集』共同通信社、1965年8月1日。
[13]
웹사이트
単産(タンサン)とは
https://kotobank.jp/[...]
2020-04-25
[14]
웹사이트
民同(ミンドウ)とは
https://kotobank.jp/[...]
2020-04-25
[15]
서적
現代世相風俗史年表:1945-2008
河出書房新社
[16]
문서
この問題に取材した小説として、佐藤貴美子『桜子』(新日本出版社)がある
[17]
웹사이트
日本労働年鑑 第60集/1990年版
http://oisr-org.ws.h[...]
労働旬報社
1990-07-05
[18]
웹사이트
https://www.jmd.co.jp/article.php?no=97109
https://www.jmd.co.j[...]
[19]
웹사이트
https://www.jmd.co.jp/article.php?no=97312
https://www.jmd.co.j[...]
[20]
웹사이트
日本労働年鑑 第57集/1987年版
http://oisr-org.ws.h[...]
労働旬報社
1987-06-25
[21]
웹사이트
日本労働年鑑 第58集/1988年版
http://oisr-org.ws.h[...]
労働旬報社
1988-06-25
[22]
웹사이트
総評とは
https://kotobank.jp/[...]
2021-10-20
[23]
웹사이트
日本労働総同盟
https://kotobank.jp/[...]
[24]
웹사이트
日本労働組合総同盟
https://kotobank.jp/[...]
[25]
웹사이트
日本労働年鑑 第60集/1990年版
http://oisr-org.ws.h[...]
労働旬報社
1990-07-05
[26]
웹사이트
日本労働総同盟
https://kotobank.jp/[...]
[27]
웹사이트
日本労働組合総同盟
https://kotobank.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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