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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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83년 11월 28일,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유죄 판결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중의원 해산으로 치러졌다. 선거 결과 자유민주당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공명당이 약진했으며, 자민당과 신자유클럽의 연립 정권이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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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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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국가 | 일본 |
선거 유형 | 의회 |
이전 선거 | 1980년 일본 총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80년 |
선거일 | 1983년 12월 18일 |
다음 선거 | 1986년 일본 총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986년 |
선출 의석 | 511석 (총 중의원 의석) |
과반 의석 | 256석 |
투표율 | 67.94% ( 6.63%p) |
주요 정당 및 지도자 | |
제1당 지도자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제1당 | 자유민주당 |
제1당 이전 선거 결과 | 47.88%, 284석 |
제1당 획득 의석 | 250석 |
제1당 의석 변화 | 34석 |
제1당 득표수 | 25,982,785표 |
제1당 득표율 | 45.76% |
제1당 득표율 변화 | 2.12%p |
제2당 지도자 | 이시바시 마사시 |
제2당 | 일본사회당 |
제2당 이전 선거 결과 | 19.31%, 107석 |
제2당 획득 의석 | 112석 |
제2당 의석 변화 | 5석 |
제2당 득표수 | 11,065,082표 |
제2당 득표율 | 19.49% |
제2당 득표율 변화 | 0.18%p |
제3당 지도자 | 다케이리 요시카쓰 |
제3당 | 공명당 |
제3당 이전 선거 결과 | 9.03%, 33석 |
제3당 획득 의석 | 58석 |
제3당 의석 변화 | 25석 |
제3당 득표수 | 5,745,751표 |
제3당 득표율 | 10.12% |
제3당 득표율 변화 | 1.09%p |
제4당 지도자 | 사사키 료사쿠 |
제4당 | 민주사회당 |
제4당 이전 선거 결과 | 6.60%, 32석 |
제4당 획득 의석 | 38석 |
제4당 의석 변화 | 6석 |
제4당 득표수 | 4,129,907표 |
제4당 득표율 | 7.27% |
제4당 득표율 변화 | 0.67%p |
제5당 지도자 | 후와 데쓰조 |
제5당 | 일본공산당 |
제5당 이전 선거 결과 | 9.83%, 29석 |
제5당 획득 의석 | 26석 |
제5당 의석 변화 | 3석 |
제5당 득표수 | 5,302,485표 |
제5당 득표율 | 9.34% |
제5당 득표율 변화 | 0.49%p |
제6당 지도자 | 다가와 세이치 |
제6당 | 신자유클럽 |
제6당 이전 선거 결과 | 2.99%, 12석 |
제6당 획득 의석 | 8석 |
제6당 의석 변화 | 4석 |
제6당 득표수 | 1,341,584표 |
제6당 득표율 | 2.36% |
제6당 득표율 변화 | 0.63%p |
제7당 지도자 | 덴 히데오 |
제7당 | 사회민주연합 |
제7당 이전 선거 결과 | 0.68%, 3석 |
제7당 획득 의석 | 3석 |
제7당 득표수 | 381,045표 |
제7당 득표율 | 0.63% |
제7당 득표율 변화 | 0.05%p |
총리 정보 | |
선거 전 총리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선거 전 총리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선거 후 총리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선거 후 총리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2. 선거 배경
1983년 12월 18일에 실시된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로키드 사건 유죄 판결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중의원을 해산하면서 시작되었다.[2] 이 판결로 야당의 반발이 거세지자, "연내 총선거"가 결정되어 중의원이 해산되었는데, 이를 '다나카 판결 해산'이라고 한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로키드 선거'라고도 불렸다.[2]
당시 언론은 자민당의 압승을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자민당이 이전 선거보다 34석을 잃는 패배를 기록했다.[2] 자민당은 단독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여 신자유클럽과 연립 정권을 수립, 55년 체제 하에서 유일한 연립 정권을 구성했다.[2]
2. 1. 선거 과정
1983년 11월 28일, 이른바 '다나카 판결 해산'으로 일본 중의원이 해산되었다.[1]선거 시 | 선거 후 |
---|---|
제1차 나카소네 내각 (제71대)[1] |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72대)[1] |
내각총리대신: 나카소네 야스히로 (제11대 자유민주당 총재)[1] | 내각총리대신: 나카소네 야스히로 (제11대 자유민주당 총재)[1] |
여당: 자유민주당[1] | 여당: 자유민주당, 신자유클럽 (자유민주당·신자유국민연합)[1]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83년 12월 18일에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다나카 판결 해산'으로 인해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실형을 선고받아 자유민주당(자민당)에 역풍이 불면서, 공시 전보다 의석 수가 36석 감소하는 사실상의 참패를 당했다.
3. 선거 결과
제1차 나카소네 내각은 '다나카소네 내각', '직각 내각'으로 불리며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을 보여주었다. 세토야마 미쓰오 문부대신, 오노 아키라 노동대신, 다니가와 가즈오 방위청 장관 등 현직 각료 3명이 의석을 잃었다. 아키타 다이스케, 구보타 엔지, 고시카 젠타로, 시세키 이헤이 등 베테랑 의원들과 니시오카 다케오, 아소 다로 등이 낙선했다.
자민당은 단독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해 보수계 무소속 의원을 추가하고 신자유클럽과 연립하여 제2차 나카소네 내각을 발족시켰다.
사회당, 공명당, 사회민주당 등 야당들은 모두 의석을 늘렸다. 특히 공명당은 25석 증가한 58석을 차지하며 역대 최다 의석을 획득했다. 일본 공산당은 의석이 소폭 감소했고, 무라카미 히로시 부위원장과 가네코 미쓰히로 서기국장 등 당 간부가 낙선했다. 사민련은 의석을 유지했지만, 나라사키 야스노스케 서기장이 의석을 잃었다. 신자유클럽은 8석으로 한 자릿수로 후퇴했다.
이번 선거에서는 나다오 히로키치 전 의장, 이시다 히로히데, 구라시키 다다오, 다나카 이사미 등 각료를 역임한 의원, 아스카다 가즈오 전 사회당 위원장 등이 출마하지 않았다. 다나카 로쿠스케와 소노다 나오가 임기 중 사망하는 등 신구 교체가 두드러졌다.[2]
3. 1. 정당별 의석수
자유민주당은 250석을 획득하여 원내 제1당을 유지하였으나, 공천 후보 기준으로 과반수에 미달하였다. 일본사회당은 112석, 공명당은 58석을 획득하여 의석수를 늘렸다. 반면, 일본공산당은 26석으로 의석수가 감소하였다. 민사당은 38석, 신자유클럽은 8석, 사회민주연합은 3석, 무소속은 16석을 획득하였다.[2]
3. 2. 득표율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자유민주당 | 25,982,785 | 45.76% |
일본사회당 | 11,065,082 | 19.49% |
공명당 | 5,745,751 | 10.12% |
일본공산당 | 5,302,485 | 9.34% |
민사당 | 4,129,907 | 7.27% |
신자유클럽 | 1,341,584 | 2.36% |
사회민주연합 | 381,045 | 0.67% |
기타 정당 | 62,323 | 0.11% |
무소속 | 2,768,735 | 4.88% |
총합 | 56,779,697 | 100.00%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득표율은 다음과 같다. 자유민주당이 45.76%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고, 일본사회당이 19.49%로 그 뒤를 이었다. 공명당은 10.12%, 일본공산당은 9.34%, 민사당은 7.27%를 득표했다. 신자유클럽은 2.36%, 사회민주연합은 0.67%의 득표율을 보였다. 기타 정당은 0.11%, 무소속은 4.88%를 기록했다. 총 투표율은 67.94%였다.[1]
3. 3. 분석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대한 분석은 다음과 같다.자유민주당(자민당)은 당초 예상을 뒤엎고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공시 전보다 36석이나 감소한 250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는 로키드 사건으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실형을 선고받은 것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또한, 자민당 내부의 분열과 낮은 투표율도 패배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자민당은 신자유클럽과의 연립을 통해 정권을 유지해야 했다.[2] 사회당 당수 이시바시 마사시는 이를 "유권자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했다.[1]
반면, 공명당은 25석을 추가하며 역대 최다 의석인 58석을 확보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자민당에 대한 불만과 함께, 깨끗한 정치를 바라는 유권자들의 표심이 반영된 결과로 분석된다.[2]
사회당, 공명당, 사회민주연맹, 민주사회당 간의 전략적 투표 협력은 야당의 의석수 증가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주로 공명당에 집중되었다.[2]
공산당은 사회당, 공명당, 사회민주연맹, 민주사회당에 밀려 의석이 소폭 감소했다.
4. 선거 이후
자민당은 1983년 총선에서 단독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으나, 보수계 무소속 의원들을 추가 공천하여 과반수를 확보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신자유클럽과 연립 정권을 수립하여 제2차 나카소네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는 55년 체제 하에서 유일한 연립 정권이었다.
이번 총선은 '다나카 판결 해산'으로 불리며, 로키드 사건 판결이 자민당에 역풍으로 작용하여 공시 전보다 36석이 감소하는 참패를 겪었다. 제1차 나카소네 내각의 현직 각료 중 3명이 낙선하고, 아소 다로 등 여러 의원들이 낙선했다.
야당 중에서는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이 의석을 늘렸고, 특히 공명당은 25석이나 증가하여 역대 최다 의석을 획득했다. 공산당은 의석이 소폭 감소했고, 사민련은 의석을 유지했으나 서기장이 낙선했다. 신자유클럽은 8석으로 크게 후퇴했다.
1983년 12월 26일 제101회 국회(임시회)에서 후쿠나가 겐지가 중의원 의장으로, 카츠마타 세이이치가 중의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날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1985년 1월 24일 제102회 국회(정기회)에서 사카타 미치타가 중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4. 1. 주요 당선자 및 낙선자
당선자 | 소속 정당 |
---|---|
이부키 분메이 | 자민당 |
에노모토 와헤이 | 자민당 |
오시마 리모리 | 자민당 |
가토 타쿠지 | 자민당 |
카네코 겐지로 | 자민당 |
키타가와 마사야스 | 자민당 |
시오지마 히로시 | 자민당 |
지미 쇼자부로 | 자민당 |
타나카 히데유키 | 자민당 |
타나카 나오키 | 자민당 |
타마키 카즈로 | 자민당 |
츠키하라 시게히로 | 자민당 |
나카가와 쇼이치 | 자민당 |
나카무라 마사하루 | 자민당 |
니카이 겐지로 | 자민당 |
니시야마 케이지로 | 자민당 |
노로 아키히코 | 자민당 |
노로타 요시나리 | 자민당 |
히라바야시 코우조 | 자민당 |
무라마치 노부타카 | 자민당 |
마츠다 쿠로 | 자민당 |
야마오카 켄조 | 자민당 |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 자민당 |
아마노 히토시 | 사회당 |
아미오카 유타카 | 사회당 |
이토 츄지 | 사회당 |
우에노 켄이치 | 사회당 |
오쿠노 카즈오 | 사회당 |
오자와 카츠스케 | 사회당 |
카미니시 카즈로 | 사회당 |
사콘 마사오 | 사회당 |
사토 토쿠오 | 사회당 |
세키야마 노부유키 | 사회당 |
타나카 카츠히코 | 사회당 |
타나미 타네아키 | 사회당 |
토미즈카 미츠오 | 사회당 |
나카무라 마사오 | 사회당 |
하마니시 테츠오 | 사회당 |
마츠마에 오오거 | 사회당 |
모토노부 요시타카 | 사회당 |
야마시타 야스오 | 사회당 |
야마나카 스에지 | 사회당 |
요코에 카네오 | 사회당 |
와타나베 요조 | 사회당 |
엔도 카즈요시 | 공명당 |
칸자키 타케노리 | 공명당 |
코타니 코지 | 공명당 |
코마야 아키라 | 공명당 |
사이토 세쓰 | 공명당 |
나카무라 이와오 | 공명당 |
누마가와 요이치 | 공명당 |
하시모토 후미히코 | 공명당 |
히가사 카츠유키 | 공명당 |
후쿠오카 야스오 | 공명당 |
미즈타니 히로시 | 공명당 |
미야자키 카쿠지 | 공명당 |
모리모토 코우지 | 공명당 |
야오이 히데히코 | 공명당 |
아베 모토오 | 민사당 |
이토 히데나리 | 민사당 |
이토 마사히로 | 민사당 |
오가와 야스시 | 민사당 |
스가와라 키시로 | 민사당 |
타키자와 코우스케 | 민사당 |
타나카 요시아키 | 민사당 |
츠카다 노부미츠 | 민사당 |
후지와라 테츠타로 | 민사당 |
오카자키 만슈 | 공산당 |
케이즈카 유키오 | 공산당 |
사토 유우히로 | 공산당 |
후지키 요코 | 공산당 |
아마리 아키라 | 신자유클럽 |
에다 사츠키 | 사민련 |
이토야마 에이타로 | 무소속 |
에토 세이지로 | 무소속 |
오미 코우지 | 무소속 |
카기타 츄사부로 | 무소속 |
쿠마가이 히로시 | 무소속 |
스즈키 무네오 | 무소속 |
타케무라 야스코 | 무소속 |
츠지 카즈히코 | 무소속 |
토즈카 신야 | 무소속 |
가가 하쿠시로 | 무소속 |
아즈마 치카라 | 무소속 |
참조
[1]
논문
ELECCIONS
https://www.jstor.or[...]
1983
[2]
논문
Japan's December 1983 House of Representatives Election: The Return of Coalition Politics
https://www.jstor.or[...]
1984
[3]
설명
[4]
설명
[5]
설명
[6]
간행물
『官報号外』昭和61年6月2日 第105回国会 衆議院会議録第1号
https://kokkai.nd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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