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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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52년 10월 1일에 실시되었으며, 사회당 좌우파의 분열과 정치 지형 변화를 배경으로 치러졌다. 총 466석의 의석을 두고, 1,242명의 후보자가 경쟁했으며, 투표율은 76.43%를 기록했다. 그 결과,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당이 240석으로 원내 제1당을 유지했지만 과반 확보에는 실패했다. 선거 이후 요시다 시게루는 제4차 내각을 구성했으며, 공직 추방 해제와 혁신 세력의 한계 등 사회 변화와 정치 지형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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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
지도 정보 | |
![]() | |
선거 정보 | |
국가 | 일본 |
선거 유형 | 의회 |
이전 선거 | 1949년 일본 총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49년 |
선거일 | 1952년 10월 1일 |
다음 선거 | 1953년 일본 총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953년 |
선출 의석 수 | 466석 |
과반 의석 수 | 234석 |
투표율 | 76.43% (증가 2.39pp) |
주요 정당 및 지도자 | |
제1당 지도자 | 요시다 시게루 |
제1당 | 자유당 |
제1당 이전 선거 결과 | 존재하지 않음 |
제1당 획득 의석 | 240석 |
제1당 의석 변동 | 신설 |
제1당 득표수 | 16,938,221표 |
제1당 득표율 | 47.93% |
제1당 득표율 변동 | 신설 |
제2당 지도자 | 시게미쓰 마모루 |
제2당 | 개진당 |
제2당 이전 선거 결과 | 존재하지 않음 |
제2당 획득 의석 | 85석 |
제2당 의석 변동 | 신설 |
제2당 득표수 | 6,429,450표 |
제2당 득표율 | 18.19% |
제2당 득표율 변동 | 신설 |
제3당 지도자 | 가와카미 조타로 |
제3당 | 일본사회당 (우파) |
제3당 이전 선거 결과 | 존재하지 않음 |
제3당 획득 의석 | 57석 |
제3당 의석 변동 | 신설 |
제3당 득표수 | 4,108,274표 |
제3당 득표율 | 11.63% |
제3당 득표율 변동 | 신설 |
제4당 지도자 | 스즈키 모사부로 |
제4당 | 일본사회당 (좌파) |
제4당 이전 선거 결과 | 존재하지 않음 |
제4당 획득 의석 | 54석 |
제4당 의석 변동 | 신설 |
제4당 득표수 | 3,398,597표 |
제4당 득표율 | 9.62% |
제4당 득표율 변동 | 신설 |
제5당 지도자 | 구로다 히사오 |
제5당 | 노동자농민당 |
제5당 이전 선거 결과 | 1.98%, 7석 |
제5당 획득 의석 | 4석 |
제5당 의석 변동 | 3 |
제5당 득표수 | 261,190표 |
제5당 득표율 | 0.74% |
제5당 득표율 변동 | 1.24pp |
선거 전후 수상 | |
선거 전 수상 | 요시다 시게루 |
선거 전 수상 소속 정당 | 자유당 |
선거 후 수상 | 요시다 시게루 |
선거 후 수상 소속 정당 | 자유당 |
2. 배경
1950년에 제정된 공직선거법에 따라 실시된 최초의 총선거였다. 이 법은 이전의 중의원 및 참의원 의원 선거법을 통합하고 지방자치단체장과 교육위원 선출에 공선제를 도입하는 등 여러 변화를 가져왔다(교육위원 공선제는 1956년에 폐지).[3]
전후 일본 정치는 크게 보수, 중도, 혁신 세 축으로 나뉘어 경쟁했다. 주요 정당들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정당 | 의석 수 | 당직자 |
---|---|---|
자유당 (여당) | 240석[3] | 총재: 요시다 시게루 간사장: 하야시 조지 총무회장: 마스야 히데쓰구 정무조사회장: 미즈타 미키오 참의원 의원회장: 오야 신조 |
개진당 | 85석 | 총재: 시게미쓰 마모루 간사장: 미키 다케오 중앙상임위원회 의장: 마쓰무라 켄조 당무위원장: 후카가와 에이자에몬 정책위원장: 키타무라 토쿠타로 참의원 의원회장: 오니마루 기세이 최고고문: 토마베치 기사조 |
일본사회당(우파) | 57석 | 위원장 대행: 아사누마 이네지로 서기장: 아사누마 이네지로 (겸임) 정책심의회장: 미즈타니 나가사부로 국회대책위원장: 미야케 마사이치 |
일본사회당(좌파) | 54석 | 위원장: 스즈키 시게사부로 서기장: 노미조 마사루 정책심의회장: 와다 히로오 국회대책위원장: 사사키 코우조 참의원 의원회장: 카네코 히로후미 |
노동자농민당 | 4석 | 주석: 쿠로다 히사오 서기장: 나카하라 켄지 |
일본공산당 | 0석 | 서기장: 토쿠다 큐이치 임시중앙지도부 의장: 시이노 에츠로 |
제파 | 7석 |
일본공산당은 50년 문제에서 소감파와 국제파의 분열 및 51년 강령에 따른 불법 행위로 지지를 잃어, 공인 후보 전원이 낙선하여 모든 의석을 상실하였다.
2. 1. 사회당 좌우파의 분열
제23회 일본 중의원의원 총선거에서 패배한 후 열린 제4회 당대회에서 모리토 다쓰오가 당의 성격을 '국민정당'으로 규정하고, 의회주의에 근거한 반공을 주창했다. 그러자 이나무라 준조가 혁명에 의해 사회제도를 변혁하며, 때에 따라서는 공산당과의 연합도 불사하는 '계급정당'적 성격의 일본사회당을 주장했다. 이 논쟁은 결국 일본에서의 사회주의적 정책의 실현 방향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했으며, 가쓰마타 세이이치가 제기한 '계급적 대중정당'이라는 정의로 결착이 지어지는듯 했다.하지만 이로 인해 촉발된 좌우파의 대립은 심각하게 진행되었고, 1950년 1월 16일에는 좌·우파가 분열하게 된다. 이때는 75일 후인 4월 3일의 당대회에서 다시 통일할 수 있어 대립이 종료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곧 대일강화조약의 찬반을 둘러싸고 좌우 양파가 대립하기 시작해, 1951년 10월 24일에 다시 분열된다.[1]
2. 2. 정치 지형 변화와 주요 정당
1950년에 제정된 공직선거법에 따라 실시된 최초의 총선거였다. 이 법은 이전의 중의원 및 참의원 의원 선거법을 통합하고 지방자치단체장과 교육위원 선출에 공선제를 도입하는 등 여러 변화를 가져왔다(교육위원 공선제는 1956년에 폐지).[3]전후 일본 정치는 크게 보수, 중도, 혁신 세 축으로 나뉘어 경쟁했다. 주요 정당들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정당 | 의석 수 | 당직자 |
---|---|---|
자유당 (여당) | 240석[3] | 총재: 요시다 시게루 간사장: 하야시 조지 총무회장: 마스야 히데쓰구 정무조사회장: 미즈타 미키오 참의원 의원회장: 오야 신조 |
개진당 | 85석 | 총재: 시게미쓰 마모루 간사장: 미키 다케오 중앙상임위원회 의장: 마쓰무라 켄조 당무위원장: 후카가와 에이자에몬 정책위원장: 키타무라 토쿠타로 참의원 의원회장: 오니마루 기세이 최고고문: 토마베치 기사조 |
일본사회당(우파) | 57석 | 위원장 대행: 아사누마 이네지로 서기장: 아사누마 이네지로 (겸임) 정책심의회장: 미즈타니 나가사부로 국회대책위원장: 미야케 마사이치 |
일본사회당(좌파) | 54석 | 위원장: 스즈키 시게사부로 서기장: 노미조 마사루 정책심의회장: 와다 히로오 국회대책위원장: 사사키 코우조 참의원 의원회장: 카네코 히로후미 |
노동자농민당 | 4석 | 주석: 쿠로다 히사오 서기장: 나카하라 켄지 |
일본공산당 | 0석 | 서기장: 토쿠다 큐이치 임시중앙지도부 의장: 시이노 에츠로 |
제파 | 7석 |
이번 총선거는 1950년에 제정된 공직선거법에 따라 실시된 최초의 총선거였다. 이 법은 구 중의원 의원 선거법과 참의원 의원 선거법을 통합하고 지방자치단체장과 교육위원의 공선제 도입(교육위원 공선제는 1956년에 폐지됨)을 목적으로 하였다.
일본공산당은 50년 문제에서 소감파와 국제파의 분열 및 51년 강령에 따른 불법 행위로 지지를 잃어, 공인 후보 전원이 낙선하여 모든 의석을 상실하였다.
3. 선거 정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에 따른 공직추방령 폐지로 공직추방이 해제된 정치인들이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총 1,242명의 후보자가 입후보하여 경쟁을 벌였다. 주요 정당별 입후보자 수는 다음과 같다.[3]정당 합계 내역 남성 여성 공시 전 전 전직 신인 자유당 475 256 104 115 472 3 285 개진당 209 60 90 59 206 3 67 일본사회당(우파) 109 30 41 38 104 5 30 일본사회당(좌파) 96 16 20 60 95 1 16 일본 공산당 107 18 5 84 103 4 22 노동자농민당 11 4 1 6 9 2 4 소속 불명 41 4 5 23 41 0 9 무소속 166 1 33 132 160 6 4 총계 1,243 393 318 532 1,217 26 437 출전: 『아사히 선거대관』
3. 1. 해산 및 선거
1952년 8월 28일, 중의원이 벼락 해산(돌연 해산)되었다. 공시일은 1952년 9월 5일이었고, 1952년 10월 1일에 투표가 실시되었다. 개선수는 466석이었으며, 중선거구제(3인 선거구 40개, 4인 선거구 39개, 5인 선거구 38개)하에 비밀투표, 단기투표제로 치러졌다. 유권자는 46,772,584명 (남성: 22,312,761명, 여성: 24,459,823명)이었다.
이번 총선거는 1950년에 제정된 공직선거법에 따라 실시된 최초의 총선거였다. 이 법은 구 중의원 의원 선거법과 참의원 의원 선거법을 통합하고 지방자치단체장과 교육위원의 공선제 도입(교육위원 공선제는 1956년에 폐지됨)을 목적으로 하였다.
선거 결과, 여당인 자유당은 240석을 얻어 간신히 과반수를 넘겼지만, 여야는 팽팽히 맞섰다. 일본공산당은 50년 문제에서 소감파와 국제파의 분열 및 51년 강령에 따른 불법 행위로 지지를 잃어, 공인 후보 전원이 낙선하여 모든 의석을 상실하였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에 따른 공직추방령 폐지로 공직추방이 해제된 정치인들이 출마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대다수가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하게 되었다.
3. 2. 입후보자
총 1,242명의 후보자가 입후보하여 경쟁을 벌였다. 주요 정당별 입후보자 수는 다음과 같다.[3]
정당 | 합계 | 내역 | 남성 | 여성 | 공시 전 | |||
---|---|---|---|---|---|---|---|---|
전 | 전직 | 신인 | ||||||
자유당 | 475 | 256 | 104 | 115 | 472 | 3 | 285 | |
개진당 | 209 | 60 | 90 | 59 | 206 | 3 | 67 | |
일본사회당(우파) | 109 | 30 | 41 | 38 | 104 | 5 | 30 | |
일본사회당(좌파) | 96 | 16 | 20 | 60 | 95 | 1 | 16 | |
일본 공산당 | 107 | 18 | 5 | 84 | 103 | 4 | 22 | |
노동자농민당 | 11 | 4 | 1 | 6 | 9 | 2 | 4 | |
소속 불명 | 41 | 4 | 5 | 23 | 41 | 0 | 9 | |
무소속 | 166 | 1 | 33 | 132 | 160 | 6 | 4 | |
총계 | 1,243 | 393 | 318 | 532 | 1,217 | 26 | 437 | |
출전: 『아사히 선거대관』 |
4. 선거 결과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당은 16,810,434표(47.57%)를 얻어 240석을 확보하여 원내 제1당을 유지했다. 개진당은 6,453,028표(18.26%)로 85석, 일본사회당 (우파)는 4,057,241표(11.48%)로 57석, 일본사회당 (좌파)는 3,450,601표(9.76%)로 54석을 얻었다. 일본공산당은 896,764표(2.54%)에 그쳐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노동자농민당은 261,190표(0.74%)로 4석, 기타 정당은 952,501표(2.69%)로 7석, 무소속은 2,454,945표(6.95%)로 19석을 차지했다.[3] 총 유효표는 35,336,704표였으며, 무효 및 백지투표는 413,019표였다.
4. 1. 투표율
총 유권자 46,772,584명 중 35,749,723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76.43%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는 이전 선거보다 2.39% 상승한 수치이다. 성별 투표율은 남성 80.46%, 여성 72.76%였다.4. 2. 정당별 득표 및 의석
정당 | 득표 | 합계 | ||||
---|---|---|---|---|---|---|
득표수 | % | +/– | 의석 | +/– | ||
자유당 | 16,810,434 | 47.57 | +3.70 | 240 | –24 | |
개진당 | 6,453,028 | 18.26 | –0.83 | 85 | +2 | |
일본사회당 (우파) | 4,057,241 | 11.48 | – | 57 | – | |
일본사회당 (좌파) | 3,450,601 | 9.76 | – | 54 | – | |
일본공산당 | 896,764 | 2.54 | –7.22 | 0 | –35 | |
노동자농민당 | 261,190 | 0.74 | –1.24 | 4 | –3 | |
기타 정당 | 952,501 | 2.69 | –2.55 | 7 | –5 | |
무소속 | 2,454,945 | 6.95 | +0.39 | 19 | +7 | |
colspan="7"| | ||||||
계 | 35,336,704 | 100 | 0 | 466 | 0 | |
colspan="7"| | ||||||
유효표 | 35,336,704 | 98.84 | colspan="3" rowspan="5" | | |||
무효 및 백지투표 | 413,019 | 1.16 | ||||
투표 / 투표율 | 35,749,723 | 76.73 | ||||
기권 | 11,022,861 | 23.57 | ||||
유권자 | 46,772,584 |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자유당이 240석을 획득하여 원내 제1당을 유지했지만, 과반 확보에는 실패했다. 개진당은 85석, 일본사회당 우파는 57석, 좌파는 54석을 얻었다. 한편, 일본공산당은 당내 분열과 과격 노선으로 인해 지지 기반을 상실하여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3]
4. 3. 현별 결과
현 | 총 의석 수 | 획득 의석 수 | ||||||
---|---|---|---|---|---|---|---|---|
자유당 | 개신당 | 우익 사회당 | 좌익 사회당 | 노농당 | 기타 | 무소속 | ||
아이치현 | 19 | 9 | 4 | 1 | 4 | 1 | ||
아키타현 | 8 | 4 | 2 | 2 | ||||
아오모리현 | 7 | 4 | 3 | |||||
지바현 | 13 | 8 | 3 | 1 | 1 | |||
에히메현 | 9 | 6 | 1 | 1 | 1 | |||
후쿠이현 | 4 | 4 | ||||||
후쿠오카현 | 19 | 6 | 3 | 4 | 4 | 1 | 1 | |
후쿠시마현 | 12 | 7 | 2 | 2 | 1 | |||
기후현 | 9 | 4 | 2 | 2 | 1 | |||
군마현 | 10 | 2 | 4 | 2 | 1 | 1 | ||
히로시마현 | 12 | 8 | 3 | 1 | ||||
홋카이도 | 22 | 9 | 4 | 7 | 2 | |||
효고현 | 18 | 8 | 5 | 3 | 1 | 1 | ||
이바라키현 | 12 | 7 | 3 | 1 | 1 | |||
이시카와현 | 6 | 3 | 2 | 1 | ||||
이와테현 | 8 | 6 | 1 | 1 | ||||
가가와현 | 6 | 4 | 1 | 1 | ||||
가고시마현 | 10 | 7 | 1 | 1 | 1 | |||
가나가와현 | 13 | 6 | 2 | 4 | 1 | |||
고치현 | 5 | 4 | 1 | |||||
구마모토현 | 10 | 4 | 3 | 1 | 1 | 1 | ||
교토부 | 10 | 4 | 2 | 1 | 2 | 1 | ||
미에현 | 9 | 3 | 5 | 1 | ||||
미야기현 | 9 | 4 | 3 | 1 | 1 | |||
미야자키현 | 6 | 4 | 1 | 1 | ||||
나가노현 | 13 | 8 | 2 | 2 | 1 | |||
나가사키현 | 9 | 5 | 2 | 1 | 1 | |||
나라현 | 5 | 3 | 1 | 1 | ||||
니가타현 | 15 | 8 | 3 | 2 | 2 | |||
오이타현 | 7 | 2 | 2 | 1 | 2 | |||
오카야마현 | 10 | 7 | 1 | 1 | 1 | |||
오사카부 | 19 | 9 | 2 | 6 | 2 | |||
사가현 | 5 | 2 | 1 | 2 | ||||
사이타마현 | 13 | 10 | 2 | 1 | ||||
시가현 | 5 | 2 | 1 | 2 | ||||
시마네현 | 5 | 2 | 1 | 1 | 1 | |||
시즈오카현 | 14 | 10 | 1 | 3 | ||||
도치기현 | 10 | 5 | 3 | 1 | 1 | |||
도쿠시마현 | 5 | 1 | 3 | 1 | ||||
도쿄도 | 27 | 11 | 2 | 9 | 5 | |||
돗토리현 | 4 | 2 | 1 | 1 | ||||
도야마현 | 6 | 3 | 3 | |||||
와카야마현 | 6 | 1 | 2 | 2 | 1 | |||
야마가타현 | 8 | 6 | 2 | |||||
야마구치현 | 9 | 6 | 2 | 1 | ||||
야마나시현 | 5 | 2 | 1 | 1 | 1 | |||
합계 | 466 | 240 | 85 | 57 | 54 | 4 | 7 | 19 |
5. 선거 이후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일본 사회에 여러 변화를 가져왔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로 공직추방령이 폐지되면서 공직추방되었던 정치인들이 대거 정계에 복귀하여 일본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특히 보수 세력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공직 추방 해제는 일본 사회의 민주화와 자유화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1]
일본공산당은 50년 문제에서 소감파와 국제파의 분열 및 51년 강령에 따른 불법 행위로 지지를 잃어 모든 의석을 상실하는 등 혁신 세력은 한계를 드러냈다.[1]
5. 1. 정계 개편과 요시다 내각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결과 자유당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지만, 여전히 원내 제1당의 지위를 유지했다.[3] 요시다 시게루는 제4차 요시다 내각을 구성하여 정권을 이어갔다.제15회 국회 (임시회)는 1952년 10월 24일부터 1953년 3월 14일까지 열렸다. 중의원 의장에는 오노 반보쿠(자유당), 부의장에는 이와모토 노부유키(자유당)가 선출되었다. 1952년 10월 24일 실시된 중의원 의장 선거와 부의장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중의원 의장 선거 (1952년 10월 24일) | 득표수 | 중의원 부의장 선거 (1952년 10월 24일) | 득표수 |
---|---|---|---|
오노 반보쿠(자유당) | 244표 | 이와모토 노부유키(자유당) | 226표 (결선 투표) |
키요세 이치로(개신당) | 89표 | 사에키 무네요시(개신당) | 210표 (결선 투표) |
하라 히카루(일본사회당(좌파)) | 59표 | 무효 | 17표 (결선 투표) |
토미요시 에이지(일본사회당(우파)) | 56표 | ||
무효 | 6표 |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같은 날 실시된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에서 247표를 얻어 재신임을 받았다.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 (1952년 10월 24일, 중의원) | 득표수 |
---|---|
요시다 시게루(자유당) | 247표 |
시게미쓰 마모루(개신당) | 88표 |
스즈키 시게사부로(일본사회당(좌파)) | 59표 |
카와카미 조타로(일본사회당(우파)) | 56표 |
무효 | 3표 |
5. 2. 사회 변화와 영향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일본 사회에 여러 변화를 가져왔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로 공직추방령이 폐지되면서, 공직추방되었던 정치인들이 대거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는 일본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특히 보수 세력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공직 추방 해제는 일본 사회의 민주화와 자유화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1]일본공산당은 50년 문제에서 소감파와 국제파의 분열 및 51년 강령에 따른 불법 행위로 지지를 잃어 모든 의석을 상실하는 등 혁신 세력은 한계를 드러냈다.[1]
5. 2. 1. 공직 추방 해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에 따라 공직추방령이 폐지되면서, 공직추방에서 해제된 정치인들이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대다수는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하였다.[1] 이는 전쟁 이전 및 전쟁 기간 동안 활동했던 정치인들이 대거 정계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일본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보수 세력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공직 추방 해제는 일본 사회의 민주화와 자유화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과거사 문제에 대한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5. 2. 2. 혁신 세력의 한계
일본공산당은 50년 문제에서 소감파와 국제파의 분열 및 51년 강령에 따른 불법 행위로 지지를 잃어, 공인 후보 전원이 낙선하여 모든 의석을 상실하였다.[1]참조
[1]
서적
Elections in Asia: A data handbook, Volume II
[2]
논문
The Japanese General Election of 1952
https://www.cambridg[...]
1953
[3]
간행물
議会制度百年史
[4]
간행물
『官報号外』昭和27年10月24日 第15回国会衆議院会議録第1号
https://kokkai.ndl.g[...]
1952-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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