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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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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의 로마"는 역사적으로 동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제국, 이탈리아 왕국 등 여러 국가나 세력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다. 동로마 제국 멸망 후 러시아, 오스만 제국,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이 제3의 로마를 자처하며 비잔틴 제국의 계승을 주장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표방하며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계승권을 주장했고, 프랑스는 나폴레옹 시기에 로마 제국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 과정에서 '제3의 로마' 개념이 등장하여 이탈리아 왕국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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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로마
제3의 로마에 대하여
제1의 로마로마
제2의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
기원
개념특정 국가나 도시가 고대 로마의 합법적 계승자라는 이념
유래로마 제국의 기독교 공인 이후, 로마의 권위와 기독교의 중심지로서의 역할 강조에서 비롯됨
주요 주장 국가 및 도시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설명: 로마 제국의 직접적인 계승국임을 자처, 로마 황제의 칭호와 제도를 유지
러시아수도: 모스크바
설명:
동로마 제국 멸망 후, 정교회의 중심지로서의 역할 강조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 주장을 통해 러시아 제국의 정통성 확보 시도
기타벨리코 투르노보 (불가리아):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로서 "제3의 로마"를 주장
트레비존드 (트라페준타 제국): 동로마 제국의 망명 정부로서 "제3의 로마"를 주장
예루살렘: 기독교의 성지로서 "제3의 로마"로 여겨지기도 함
역사적 맥락
로마 제국의 분열과 계승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 이후, 각각의 제국이 로마의 정통성을 주장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동로마 제국이 유일한 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인식됨
동로마 제국의 멸망과 러시아의 부상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러시아가 정교회의 보호자 자처
러시아는 스스로를 동로마 제국의 종교적, 문화적 계승자로 여기며 "제3의 로마" 이념을 발전시킴
문화적, 종교적 의미
정교회의 중심지모스크바는 정교회의 중요한 중심지로서, "제3의 로마" 이념은 러시아 정교회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함
문화적 영향"제3의 로마" 이념은 러시아의 문화, 예술, 정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침
현대적 해석
지정학적 의미러시아의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정당화하고, 주변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이데올로기로 해석되기도 함
비판적 시각"제3의 로마" 이념은 역사적 사실과 왜곡된 해석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적 주장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존재함

2.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

러시아 제국의 문장. 동로마 제국의 문장이었던 쌍두 수리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메메트 2세에 의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25] 여러 국가들이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했다. 모스크바은 '제3의 로마', '새 로마'를 주장했고,[25] 오스만 제국콘스탄티노플 점령 후 "카이세리룸(로마 황제)"을 칭했다.[10] 그리스 왕국, 불가리아 제국, 세르비아 제국 등도 동로마 제국의 계승을 주장했다.

2. 1. 러시아 제국의 주장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메메트 2세에 의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모스크바는 스스로 ‘제3의 로마’, ‘새 로마’라고 주장하였다.[25] 이 같은 사상이 나타나게 된 계기는 이반 3세가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 공주와 혼인하면서부터이다.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딸이었으며, 따라서 그녀와 부부 관계를 맺은 이반 3세는 자신이 몰락한 동로마 제국 황제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러시아 제국의 문장 "쌍두 독수리"


"제3의 로마"로 가장 잘 알려진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이다"라는 신학적·정치적 주장은 15세기부터 16세기모스크바 대공국에서 형성되었다. 이 주장이 제기된 이유로는 동방 정교회의 통합을 위한 신학적 필요성과 필연성, 정교와 슬라브 문화로 맺어진 동슬라브인의 결속을 논하는 사회 정치, 모스크바 대공(후에는 차르)의 정교에서의 주도성 주장이 세 가지로 꼽힌다. 이로 인해 일찍부터 대공과 강하게 결합된 교회는 러시아의 전제 정치 성립과 통치에 큰 역할을 했다.

모스크바를 로마의 계승자로 보는 생각은 바실리 3세에 대한 러시아 승려 필로테우스 프스코프스키의 찬사 문장으로 구체화되었다.[7] "두 개의 로마가 함락되었고, 제3의 로마가 흥기했다. 그리고 넷째는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차르를 대체할 수 없다!"라는 주장이었다. 오해하기 쉽지만, 이때 필로테우스는[8] 구체적으로 도시로서의 모스크바보다는 국가로서의 모스크바 대공국, 더 나아가 러시아의 땅을 "제3의 로마"로 의식하고 있다. 덧붙여 모스크바는 로마나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마찬가지로 일곱 개의 언덕 위에 건설되었다.

이러한 이론은 1492년 모스크바 총대주교 조시마의 "파스칼리온에 관하여"(Изложение Пасхалииru)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2. 2. 오스만 제국의 주장

18세기의 모자이크화에 그려진 메흐메트 2세와 콘스탄티노폴 총대주교 겐나디오스 2세


1453년, 오스만 제국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후 "카이세리룸(로마 황제)"을 칭하기 시작했다.[10] 이 주장은 그리스 정교회의 콘스탄티노폴 총대주교에게는 승인받았지만,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측은 부인했다. 메흐메트 2세는 겐나디오스 2세에게 비잔티움의 정교회 권한을 모두 위임했고, 이전부터 동서 교회의 통합에 반대했던 겐나디오스 2세는 그 대가로 메흐메트 2세를 로마의 계승자로 인정했다.[11] 메흐메트 2세의 주장은 330년의 콘스탄티노플 천도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콘스탄티노플이야말로 로마 제국이 존속하는 땅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한 메흐메트는 혈통 면에서도 그의 선조 오르한이 비잔티움 제국의 황녀를 왕비로 맞이한 점(단, 자녀는 태어나지 않음), 자신이 비잔티움 황족 요한 체레페스 콤네노스의 후손임을 주장하여 비잔티움 제국 계승을 정당화했다.[12] 메흐메트 2세는 이탈리아 오트란토를 점령하고(오트란토 전투), 이탈리아 로마를 정복할 계획이었지만, 그의 급사로 인해 이루지 못했다.[13] 메흐메트 2세 사후,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을 계승했다는 설은 공식적으로도 잠재적으로 퍼져나갔다.

2. 3. 그리스 왕국의 주장

요안니스 콜레티스 그리스 왕국 총리는 1844년 헌법 발포 시 "제3의 로마"를 언급했다.[14] 이는 독립 후 1세기에 걸쳐 그리스 국정을 독점한 민족주의자들의 환상이었다. 1844년에 다시 선언된 이념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재건하는 꿈을 꾸어온 그리스인들의 이전부터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5]

이 그리스권을 재통일하려는 메갈리 이데아는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키고, 스트라본이 기록한 그리스의 영역, 즉 서쪽은 이오니아 해, 동쪽은 소아시아나 흑해, 북쪽은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에피루스, 남쪽은 크레타 섬과 키프로스 섬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결집하려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그 신생 국가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하는 "두 개의 대륙과 다섯 개의 바다(이오니아 해, 에게 해, 마르마라 해, 흑해, 리비아 해)에 걸쳐 있는 그리스"가 되어야 했다.

2. 4. 불가리아 제국의 주장

913년,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시메온 1세는 콘스탄티노폴 교외에서 콘스탄티노폴 총대주교에 의해 황제(차르)로 대관했다. 그가 최종적으로 칭한 칭호는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이자 전제군주" (Tsar i samodarzhets na vsichki balgari i gartsi|차르 이 사모더르제츠 나 프시치키 벌가리 이 거르치bg)였다. 이는 그리스인 통치자로서의 지위와 로마 제국의 황제위의 전통을 계승한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이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승인받지 못했다.[1]

이후 불가리아에 대한 우위를 되찾은 비잔티움 제국은 즉시 시메온 1세의 제위 묵인을 취소했다. 914년부터 924년까지 10년간, 이 불가리아 황제의 지위를 둘러싸고 양국은 비참한 전쟁을 벌였다.[1] 비잔티움은 불가리아가 칭하는 "로마인의 황제" (basileus tōn Rōmaiōn|바실레우스 톤 로마이온grc)라는 칭호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최종적으로 924년에 "불가리아인의 황제" (basileus tōn Boulgarōn|바실레우스 톤 불가론grc)를 비잔티움 황제가 인정하는 것으로 결착되었다.[1] 이 결정은 927년 불가리아와 비잔티움이 혼인을 맺을 때도 확인되었다.[1] 불가리아의 제호는 로마 교황에게도 승인되었으며, "차르"라는 칭호는 이후 제2차 불가리아 제국에서도 사용되었고, 오스만 제국에 항복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1] 14세기,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은 수도 트르노보를 로마와 콘스탄티노폴을 계승하는 땅, 즉 "제3의 로마"라고 칭했다.[1]

2. 5. 세르비아 제국의 주장

세르비아 제국의 국기


1345년,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은 스스로를 차르라고 칭하고, 1346년 새로 창설한 세르비아 총대주교와 불가리아 총대주교 아래에서 부활절스코페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1] 그의 제국 호칭은 불가리아 제국을 비롯하여 비잔틴 제국을 제외한 주변 제국에 승인되었다.[1] 정식 칭호는 "세르비아인과 그리스인의 황제" (현대 세르비아어: цар Срба и Грка|차르 스르바 이 그르카sr)였다.[1] 이 칭호는 스테판 우로시 4세와 그의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1371년 사망)만이 사용했다.[1] 스테판 우로시 4세의 이복 동생이자 테살리아의 군주였던 시메온 우로시 팔레올로고스와 그의 아들 요반 우로시는 1373년까지 세르비아 황제의 칭호를 주장했다.[1] 제국 호칭에 포함된 "그리스인"이라는 문구는 그리스인에 대한 지배권 주장과 함께 로마 제국의 전통 계승을 나타낸다.[1]

3. 신성 로마 제국의 계승자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왕국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표방했다. 초기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서로마 제국에서 카롤링거 제국을 거쳐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하며 제국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800년 프랑크 왕 카를 1세는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인의 황제" 칭호를 받았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때인 1157년 "신성"이라는 수식어가 추가되었지만, '신성 로마 황제' 칭호 자체는 카를 1세나 오토 1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6]

1806년 프란츠 2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자,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우고 합스부르크 왕가 아래 독일 통합을 시도하며 신성 로마 제국의 계승국임을 주장했다.[17]

3. 1. 독일 제국의 주장

서유럽을 지배한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연출했다. 초기 독일 민족주의자는 서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연속성을 가진 "카롤링거 제국"이 신성 로마 제국으로 변모했다고 주장하며 제국의 일체성을 주장했다. 800년 프랑크 왕 카를 1세가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대관하여 "로마인의 황제" 칭호를 받았다. "신성"이라는 말이 더해진 것은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치세 1157년이지만, 신성 로마 황제라는 칭호는 카를 1세나 오토 1세까지 거슬러 올라가 사용되기도 한다[16]

신성 로마 제국은 프란츠 2세 시대인 1806년에 해체된다. 그 대신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을 창시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계승국"과 합스부르크 왕가 아래에서 다시 독일을 통합하려 시도했다[17]。 1871년에는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을 창설하여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계승자라고 주장했다[18][19]。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독일 제국에서는 황제의 칭호가 동일하게 카이저 (''Kaiser'', 라틴어의 Caesar의 독일어)였다.

독일 제국은 1871년 건국부터 1918년 해체까지 "제3의 로마"를 주장했지만, 여기에는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독일은 로마 가톨릭과 깊이 결합된 서유럽의 로마 문화와 제권을 계승할 수 없다는 비판도 있다.

4. 프랑스 제국의 주장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독수리


지금까지 서로마 제국의 계보를 주장하는 4개의 제국은 프랑크 봉건 제국에서 로마 제국을 모델로 한 연방 제국으로 형태를 변화해 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샤를마뉴 대제와 같은 로마 황제의 이미지는 시민 혁명에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에서도 이용되었다. 나폴레옹 1세는 황제에 즉위하면서 "프랑스 인민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로마 제국 이래의 제국의 연속성을 부정했지만, 로마 제국의 영향은 대륙군의 군기에 사용된 독수리 도안 등에서 볼 수 있다.

5. 이탈리아 왕국의 주장

1861년에 성립된 이탈리아 왕국1946년에 성립된 현행 이탈리아 공화국에도 "제3의 로마"라는 개념이 연관되어 있다.

5. 1.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주세페 마치니는 '제3의 로마'라는 표현을 대중들에 대한 홍보 수단으로 삼았다.[26] 그는 "황제 시대의 로마와 교황 시대의 로마를 거쳐 국민들의 로마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라고 선전하였다. 아울러 이탈리아의 통일과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를 로마로 세울 것을 역설하였다.[27] 이탈리아 통일 운동(리소르지멘토)의 지도자인 주세페 마치니는 "제3의 로마" 개념을 널리 알렸다. 마치니는 "'황제의 로마', '교황의 로마'가 끝난 후 '인민의 로마'가 올 것이다"라고 말하며, 로마를 수도로 하는 통일 이탈리아 성립을 주장했다.[20] 이탈리아 왕국 아래에서 통일이 이루어진 후, 마치니의 주장은 "제3의 로마"와 연결되어 신생 이탈리아의 정체성이 되었다.[21] 통일 후, 마치니는 "제3의 로마"로서의 이탈리아 제국 구상을 이야기했다.[22] 마치니는 이탈리아가 튀니지를 침략·식민지화하여 "중앙 지중해의 열쇠"가 되어야 하며, 나아가 통일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제국처럼 지중해를 독점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5. 2. 파시즘 제국

이탈리아 민족주의자 주세페 마치니는 '제3의 로마'라는 표현을 대중 홍보 수단으로 삼았다.[26] 그는 "황제 시대의 로마와 교황 시대의 로마를 거쳐 국민들의 로마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라고 선전하였다. 아울러 이탈리아의 통일과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를 로마로 세울 것을 역설하였다.[27]

「파스케스를 움켜쥔 독수리」의 의장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자신의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로마 제국과 교황령의 로마를 계승한 '제3의 로마'라고 연설에서 주장하였다.[28] 제3의 로마는 무솔리니가 로마를 오스티아와 바다까지 확장시키려고 세운 계획의 이름이기도 하다.[23] 유럽 건설은 그 첫걸음이었다.[24]

참조

[1] 서적 Believe, Obey, Fight: Political Socialization of Youth in Fascist Italy, 1922-1943 https://books.google[...] UNC Press Books
[2] 웹사이트 https://www.rbth.com[...]
[3] 서적 An Introduction to Russian Language and Literature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The concept of the Third Rome and its political implications http://www.ksk.edu.e[...]
[5] 서적 The Blackwell Dictionary of Eastern Christianity Blackwell Publishing
[6] 서적 Last Centuries of Byzantium, 126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7] 기타 Moscow is the Third Rome (МОСКВА - ТРЕТІЙ РИМ) http://leksika.com.u[...] Ukrainian Soviet Encyclopedia
[8] 문서 Filofey orthodoxwiki:Philoth[...]
[9] 서적 Joseph II Cambridge
[10] 뉴스 Büyük Constantin ve İstanbul Milliyet 2011-05-28
[11] 서적 Türk-Yunan İmparatorluğu. Arabölge gerçeği ışığında Osmanlı Tarihine bakış İletişim Yayınları
[12] 서적 Byzantium:The Decline and Fall Alfred A. Knopf
[13] 웹사이트 How the 800 Martyrs of Otranto Saved Rome http://www.catholic.[...] 2014-05-30
[14] 웹사이트 History of Greece http://www.britannic[...]
[15] 서적 Turkey And Greece: The Aegean Disputes Routledge Cavendish
[16] 기타 Heiliges Reich Artemis
[17] 서적 The Great German Nation: Origins and Destiny AuthorHouse
[18] 서적 Rome in the East: The Transformation of an Empire Routledge
[19] 서적 The Great German Nation: Origins and Destiny AuthorHouse
[20] 웹사이트 Rome Seminar http://students.wash[...]
[21] 서적 The Force of Destiny: A History of Italy Since 1796 Houghton Mifflin Harcourt
[22] 서적 The Risorgimento Revisited: Nationalism and Culture in Nineteenth-Century Italy
[23] 서적 Mussolini: Profiles in Power Pearson Longman
[24] 웹사이트 Discorso pronunciato in Campidoglio per l'insediamento del primo Governatore di Roma il 31 dicembre 1925 https://web.archive.[...]
[25] 서적 The Blackwell Dictionary of Eastern Christianity Blackwell Publishing 1999
[26] 웹인용 Giuseppe Mazzini http://www.ohiou.edu[...] 2011-09-22
[27] 웹인용 Rome Seminar http://students.wash[...] 2011-09-22
[28] 서적 Mussolini: Profiles in Power Pearson Long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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