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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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치훈은 대한민국 출신의 일본 바둑 기사로, 1962년 일본으로 건너가 프로 바둑 기사가 되었다. 1968년 11세의 나이로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 기록을 세웠으며, 1980년 명인위를 시작으로 명예 명인 자격을 얻었다. 대삼관과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1989년부터 10년간 본인방을 지냈다. 이후에도 여러 기전에서 우승하며 통산 76개의 타이틀을 획득했고, 2017년에는 공식전 통산 1500승을 달성했다. 국제 기전에서는 1991년 후지쯔배, 2003년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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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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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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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치훈 |
한자 표기 | 趙治勳 |
가나 표기 | ちょう ちくん |
로마자 표기 | Jo Chi-hun |
출생일 | 1956년 6월 20일 () |
출생지 |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
거주지 | 일본 지바현 지바시 |
국적 | 대한민국 |
소속 | 일본기원 도쿄 본원 |
스승 | 기타니 미노루 |
형제 | 조상연(친형) |
제자 | 김수준 마쓰모토 다케히사 쓰루야마 아쓰시 |
프로 입단 | 1968년 2월 (11세 9개월) |
단 | 9단 |
명예 칭호 | 명예 명인, 25세 본인방 |
타이틀 정보 | |
타이틀 합계 | 76회 (역대 2위) |
7대 타이틀 합계 | 42회 (역대 2위) |
기성 | 8기 (1983-85, 94, 96-99) |
명인 | 9기 (1980-84, 96-99) |
본인방 | 12기 (1981-82, 89-98) |
천원 | 2기 (1987-88) |
왕좌 | 3기 (1976, 94, 2001) |
碁聖 (고세이) | 2기 (1979, 86) |
십단 | 6기 (1982, 88-89, 2005-07) |
국제 기전 | |
후지쯔배 | 우승 (1991) |
삼성화재배 | 우승 (2003) |
2. 약력
- 1962년 (6세) 일본으로 건너옴. 기타니 미노루(木谷 實) 문하로 입문.[93]
- 1968년 (12세) 프로 시험 합격. 입단 (당시 입단 최연소 기록). 2단.[93]
- 1969년 (13세) 3단.
- 1970년 (14세) 4단.
- 1971년 (15세) 5단.
- 1973년 (17세) 신예 토너먼트전 우승, 첫 타이틀 획득. 6단.
- 1974년 (18세) 기곡 도장에서 독립.
- 1975년 (19세) 프로십걸전 우승. 첫 공식 타이틀 획득 (당시 최연소 기록).
- 1976년 (20세) 왕좌 획득 (당시 7대 타이틀 획득 최연소 기록). 명인 리그 진입.
- 1977년 (21세) 결혼.
- 1978년 (22세) 8단.
- 1979년 (23세) 본인방 리그 진입.
- 1980년 (24세) 명인위를 획득. 대한민국에서 은관 문화 훈장을 수훈.
- 1981년 (25세) 9단. 사상 4번째 '''명인본인방'''.
- 1982년 (26세) 학성, 십단, 본인방, 명인의 4관왕.
- 1983년 (27세) 기성위 획득. '''대삼관'''. 지바시로 이주.
- 1984년 (28세) 명인위 5연패. 사상 최초의 '''명예 명인'''. 상금 랭킹 1위.
- 1986년 (30세) 교통사고로 전치 3개월. 기성위.
- 1987년 (31세) 천원위를 획득하여 사상 최초의 '''그랜드슬램'''을 달성.
- 1988년 (32세) 십단 탈환, 천원 방어.
- 1989년 (33세) 본인방위를 탈환. 십단 방어.
- 1991년 (35세) 세계 바둑 선수권 후지쯔배 우승.
- 1993년 (37세) 본인방위 5연패, '''25세 본인방'''.
- 1994년 (38세) 기성위를 탈환. 상금 랭킹에서 10년 만에 1위 달성.
- 1995년 (39세) 상금 랭킹 1위
- 1996년 (40세) 상금 랭킹 1위.
- 1997년 (41세) 11년 만에 명인 탈환 (이후 4연패), 두 번째 대삼관 달성. 상금 랭킹 1위.
- 1998년 (42세) 본인방위 '''10연패'''. 상금 랭킹 1위.
- 1999년 (43세) 상금 랭킹 6년 연속 1위[58]。
- 2000년 (44세) NEC배 우승.
- 2001년 (45세) 왕위 획득. NEC배, 속기 선수권전 우승.
- 2002년 (46세) 명인전 도전. 속기 선수권전, 아함·동산배 우승. 타이틀 획득 65개로 타이틀 획득 수 '''사상 1위'''.
- 2003년 (47세) 삼성화재배 세계 오픈전 우승.
- 2005년 (49세) 48세 7개월 (사상 최연소), 입단부터 36년 9개월 (사상 최속) 만에 사상 3번째 통산 1200승을 달성. 십단위.
- 2006년 (50세) 십단위 방어.
- 2007년 NHK배 바둑 토너먼트에서 11년 만에 우승. 십단위를 방어. 아함·동산배 준우승.
- 2008년 (52세) 51세 11개월 (사상 최연소), 입단부터 40년 2개월 (사상 최속) 만에 사상 2번째 통산 1300승 달성.[93] 기성전 도전. NHK배 준우승.
- 2010년 (54세) 입단부터 공식전 통산 1364승 (729패 3무승부 4무승)을 기록, 린하이펑을 제치고 승수 사상 1위가 됨[68]。아함·동산배 준우승.
- 2011년 (55세) 바둑 마스터스 컵 우승.[93] 타이틀 획득 수 72.
- 2012년 (56세) NEC배 준우승. 바둑 마스터스 컵 준우승. 사상 최초의 공식전 통산 '''1400승'''을 달성.[93]
- 2014년 (58세) 바둑 마스터스 컵 우승.[93] 타이틀 획득 수 73.
- 2015년 (59세) 바둑 마스터스 컵 우승.[93] 타이틀 획득 수 74.
- 2016년 (60세) 만 60세로 명예 명인을 칭함. 11월, 인공지능의 「DeepZenGo」와 대결. 제1국·제3국에서 승리. 5년 만에 상금 랭킹 10위 이내 (8위).
- 2017년 (61세) 사상 최초의 공식전 통산 '''1500승'''을 달성[70]。한국기원 총재배 시니어 바둑 리그에서 MVP[64]。
- 2019년 (63세) 자수포장 수훈. 바둑 마스터스 컵 우승. 타이틀 획득 수 75.
- 2023년 (66세) 사상 최초의 공식전 통산 '''1600승'''을 달성[71][72]。제2회 테이케이배 레전드전 우승. 타이틀 획득 수 76.
2. 1. 주요 경력
1962년 6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木谷 實) 9단 문하로 입문했다.[93] 1968년 프로에 입단(만 11세 8개월)하여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2단이 되었다.[93] 1975년 제12기 프로십걸전에서 우승하며 첫 빅 타이틀을 획득했다.1980년 명인전에서 우승한 후, 5연패를 달성하며 최초의 명예명인(名譽名人) 자격을 얻었다. 1981년 4월 9단으로 승단했다. 1983년 기성전, 명인전, 혼인보전에서 모두 우승하여 최초의 대삼관(大三冠)을 달성했다. 1987년 천원전 우승으로 최초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1989년 혼인보를 탈환하고 1998년까지 10연패하여 제25대 명예 혼인보(혼인보 치훈) 자격을 획득했다. 1991년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1997년 두 번째 대삼관을 달성했다.
2003년 제8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에 후원사 시드(와일드카드)로 출전하여 우승했다. 2005년 일본기원 사상 세 번째로 통산 1200승을 달성했는데, 48세 7개월, 승단 후 36년 9개월 만의 기록으로 일본기원 사상 최단기 기록이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십단전 3연패를 달성했다. 2007년 NHK배에서 우승하며 통산 70회 우승을 기록했다.
2008년 일본기원 사상 두 번째로 통산 1300승을 달성(51세 11개월, 승단 후 40년 2개월)했고, 이는 일본기원 사상 최단기 기록이었다.[93] 같은 해 8월 11일 일본기원 사상 두 번째로 통산 2천국 대국을 기록했다. 2010년 12월 일본 최다승(1364승)을 경신했고,[93] 제17기 아함동산배에서 준우승했다. 2011년 제1회 일본 바둑 마스터즈에서 우승하며, 9월 현재 일본 최다 통산 타이틀 획득(72회) 기록을 세웠다.[93]
2012년 9월 27일 일본기원 사상 최초로 통산 1400승을 달성했다.(56세 3개월)[93] 2014년 일본 통산 최다 타이틀 획득(73회) 기록을 세웠고, 제4회 일본 바둑 마스터즈에서 우승했다.[93] 2015년 제5회 일본 바둑 마스터즈에서 우승하며 2연패를 달성했다.[93]
2016년 제23기 일본 아함동산배에서 준우승했다.[93] 2017년 4월 27일 일본기원 사상 최초로 통산 1500승을 달성(60세 10개월)했고,[93] 제7회 일본 바둑 마스터즈에서 준우승했다.[93] 2019년 제9회 일본 바둑 마스터즈에서 우승하며, 일본 통산 최다 타이틀 획득(75회) 기록을 경신했다.[93]
조치훈은 자신만의 도장을 운영하며 많은 아마추어 바둑 애호가들을 위한 바둑 클럽 역할도 했다.[32] 그의 도장은 엄격한 스케줄로 유명하며,[32] 도장 내 리그를 통해 제자들의 기력을 향상시켰다.[32] 리그는 레이팅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며, 랭크 차이에 따라 시간이나 덤을 조절하는 규칙을 적용했다.[32]
조치훈은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했는데, 그 중에는 일본에서 7단이며 제30기 신진왕전 우승자인 김수준이 있다.[33] 마쓰모토 다케히사와 쓰루야마 아쓰시도 조치훈의 제자이다.[7][34] 미타니 테쓰야는 조치훈의 제자였다가 안도 다케오 문하로 옮겼다.[35] 세계 최고의 아마추어 기사 중 한 명인 드라고스 바제나루도 그의 제자였다.[36]
조치훈은 일본에서 획득한 총 타이틀 수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 | ||
---|---|---|
타이틀 | 우승 | 준우승 |
기성 | 8 (1983–1985, 1994, 1996–1999) | 4 (1986, 1995, 2000, 2008) |
명인 | 9 (1980–1984, 1996–1999) | 3 (1985, 2000, 2002) |
본인방 | 12 (1981, 1982, 1989–1998) | 2 (1983, 1999) |
십단 | 6 (1982, 1988, 1989, 2005–2007) | 4 (1983, 1990, 1991, 2008) |
천원 | 2 (1987, 1988) | 1 (1989) |
왕좌 | 2 (1994, 2001) | 6 (1977, 1987, 1995, 1999, 2000, 2002) |
고세이 | 2 (1979, 1986) | 3 (1980, 1982, 1987) |
아곤배 | 1 (2002) | 5 (1994, 1998, 2000, 2010, 2016) |
용성 | 2 (1991, 1993) | 3 (1992, 1998, 2015) |
NHK배 | 4 (1983, 1992, 1996, 2007) | 4 (1980, 2001, 2004, 2008) |
NEC배 | 4 (1984, 1985, 2000, 2001) | 5 (1988, 1994, 1995, 1998, 2012) |
다이와컵 | 1 (2012) | |
일본기원 선수권 | 1 (1975) | |
각성 | 2 (1982, 1985) | 2 (1994, 1995) |
신예 | 3 (1973, 1974, 1977) | 1 (1972) |
하야고 선수권 | 7 (1985, 1990–1992, 1996, 2001, 2002) | 1 (1986) |
아사히 프로 십걸 | 1 (1975) | |
아사히 8걸 | 1 (1976) | |
총리대신배 | 1 (1972) | |
JAL 슈퍼 하야고 선수권 | 1 (2004) | |
바둑 마스터스컵 | 4 (2011, 2014, 2015, 2019) | 1 (2012) |
합계 | 71 | 47 |
대륙별 | ||
중일 천원전 | 2 (1988, 1989) | |
중일 아곤배 | 1 (2003) | |
합계 | 3 | 0 |
국제 | ||
삼성화재배 | 1 (2003) | |
후지쯔배 | 1 (1991) | |
동양증권배 | 1 (1993) | |
합계 | 2 | 1 |
통산 | ||
합계 | 76 | 49 |
2. 2. 승단 기록
1962년 6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木谷 實) 9단 문하로 입문하였다.[93] 1968년 프로 입단(만 11세 8개월)하여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 기록을 세웠다.[93] 같은 해 2단으로 승단하였다.[93] 1980년 명인전 우승을 시작으로 명인전을 5연패하여 최초의 명예명인(名譽名人) 자격을 획득했다.[93] 1981년 4월 9단으로 승단하였다.[93]1983년 기성전, 명인전, 혼인보전에 우승하여 최초의 대삼관(大三冠)을 달성했다.[93] 1987년 천원전에 우승하여 최초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고,[93] 1989년 혼인보를 탈환한 이후 1998년까지 10연패하여 제25대 명예 혼인보(혼인보 치훈) 자격을 획득했다.[93] 1997년에는 두 번째 대삼관을 달성했다.[93]
2012년 9월 27일 일본기원 사상 최초로 통산 1천400승을 달성 (56세 3개월)했고,[93] 2017년 4월 27일에는 일본기원 사상 최초로 통산 1천500승(60세 10개월)을 달성했다.[93]
3. 생애
1962년 6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木谷 實) 9단 문하로 입문하였다.[43]
1968년 프로 입단(만 11세 8개월로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 기록)했다.[6] 같은 해 2단으로 승단했다.
1975년 제12기 프로십걸전 우승. 최초의 빅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0년 명인전 우승. 이후 명인전을 5연패하여 최초의 명예명인(名譽名人) 자격 획득했다.
1981년 4월 9단으로 승단했다.
1983년 기성전, 명인전, 혼인보전에 우승하여 최초의 대삼관(大三冠) 달성했다.
1987년 천원전에 우승하여 최초의 그랜드슬램 달성했다.
1989년 혼인보 탈환. 이후 1998년까지 10연패하여 제25대 명예 혼인보(혼인보 치훈) 자격 획득했다.
1991년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우승.
1997년 두 번째 대삼관(大三冠) 달성.
2003년 제8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에 후원사 시드(와일드카드)를 받아 출전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2005년 일본기원 사상 세 번째 통산 1천200승 달성.(48세 7개월.승단 후 36년9개월만에 거둔 1천200승은 일본기원 사상 최단기)했다.
2005년-2007년 십단전 3연패 달성.
2007년 NHK배 우승. (통산 70회 우승)
2008년 일본기원 사상 두 번째 통산 1천300승 달성(51세 11개월. 승단 후 40년 2개월만에 거둔 1천300승은 일본기원 사상 최단기),제32기 일본 기성전 준우승했다.
2008년 8월11일 일본기원 사상 두 번째 통산 2천국 대국.
2010년 12월 일본 최다승 경신.(1364승),제17기 아함동산배 준우승했다.
2011년 제1회 일본 바둑 마스터즈 우승,9월 현재 일본 최다 통산 타이틀 획득(72회) 기록.
2012년 9월 27일 일본기원 사상 최초 통산 1천400승 달성 (56세 3개월.)[93]
2014년 현재 일본 통산 최다 타이틀 획득(73회) 기록. 제4회 일본 바둑 마스터즈 우승했다.
2015년 제5회 일본 바둑 마스터즈 우승(2연패)했다.
2016년 제23기 일본 아함동산배 준우승했다.
2017년 4월 27일 일본기원 사상 최초 통산 1천500승 달성(60세 10개월), 제7회 일본 바둑 마스터즈 준우승했다.
2019년 제9회 일본 바둑 마스터즈 우승, 일본 통산 최다 타이틀 획득(75회) 기록했다.
3. 1. 어린 시절(1962–1967)
1956년 6월, 대한민국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쪽 조부는 지방 은행 지점장으로 상당한 자산가였고, 어머니 쪽 조부는 지방 재벌로 관리들이 드나드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 후, 치훈의 부모는 무일푼이 되었다. 형이 3명, 누나가 3명 있었으며, 치훈은 7남매의 막내였다.[40]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풍연(豊衍, 한국어 발음은 푼용)"이었지만, 1세나 2세 쯤에 집 밖에서 스님이 지나가다 "이름을 바꾸면 이 아이는 장래에 반드시 크게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인해 치훈으로 개명했다[40]. 그의 할아버지는 어릴 때 조치훈에게 바둑을 가르쳤다.[5] 조치훈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본 그의 아버지는 1962년 그를 일본으로 보냈다.[5]
1962년 6세때 일본으로 건너가[5] 기타니 미노루(木谷 實) 9단 문하로 입문하였다.[43] 일본에 온 날부터 기곡의 내제자로서 요츠야 도장에 기거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도장에는 10명 정도의 내제자와 그와 비슷한 수의 통이 제자가 있었다. 문하생이 된 다음 날 기곡 일문 백 단 돌파 축하회가 열렸고, 그 어트랙션 중 하나로 당시 6단이었던 린하이펑(현 명예 천원)에게 5점 놓고 두게 되었다. 118수 만에 중반 승리했다.[43] 일본어에 능숙했던 아버지와 달리, 조치훈은 일본에 오기 전까지 일본어를 몰랐다. 그러나 일본에 온 후 금방 익혀서 술술 말하게 되었고, 말도 많고 수다스러운 아이가 되었다. 또한 여러 가지 장난을 쳤다.[44]
7살 때 일본기원에 인세이로 입단했다.[45] 그때까지 입단 최연소 기록은 린하이펑의 13세였지만, 조치훈은 일본에 오기 전후부터 10세까지 입단해서 신기록을 세울 것이라고 예상되는 등 큰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10세까지의 조치훈은 게으름뱅이였고 수행에 집중하지 않았다. 기곡 도장의 방침도 강제적으로 공부시키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공부를 하지 않았다.[46] 그래서 매번 입단 수졸(입단 수졸)의 예선 단계에서 떨어졌다. 주변의 실망은 컸고 조치훈은 벌써 평범한 사람인가 하는 비판이 퍼졌다.[47]
학교는 동경한국학원이라는 재일 한국인 자녀들을 위한 교육 시설에 다녔다. 입학하자마자 전형적인 문제아가 되어 초등학교 1학년부터 등교 거부를 했다. 도장에서 나오면 형인 상연이 사는 아파트에서 시간을 보냈다. 토요일만은 수업이 반나절이었기 때문에 계속 무지각·무결석을 했다. 그러나 학교 교사들에게서도 외면당했고, 운동회에도 소풍에도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에도 1, 2개월 재학했지만 퇴학했다.[48]
입단에 계속 실패하던 어느 날, 두 번째 누나에게 불려가서 "치훈아, 어떻게 할래? 아무리 해도 매년 입단이 안 되면, 그건 어쩔 수 없으니 누나랑 같이 한국으로 돌아가자. 언제까지 일본에 있어도 소용없잖아"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걸 본 조치훈은 너무 슬퍼졌고, 또 누나를 슬프게 한 자신이 너무 화가 났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내년에 입단하지 못하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이때 만약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꼴사나움 때문에 죽음을 각오했다고 한다. 그 후로 열심히 공부했다.[49]
3. 2. 프로 입단과 첫 타이틀 (1968–1972)
1962년 6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 9단 문하로 입문하였다.[6][50] 1968년 5월 아즈마 미치히코를 꺾고 초단에 올랐으며, 11세 8개월의 나이로 현대 바둑 역사상 가장 어린 프로 기사 중 한 명이 되었다.[6] 같은 해 2단으로 승단하였고,[6][50] 1969년 3단[50], 1970년 4단으로 승단하였다.[50]13세 때, 형제 제자인 이시다 요시오(현·24세 혼인보 슈호)가 22세의 사상 최연소로 혼인보위를 획득하였는데, 이때 이시다에게 잇달아 몇 국을 미리 두게 했던 경험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51]
1971년, 15세에 5단으로 승단하였다.[6] 1972년 바둑 평론지 및 기원 연감에 조치훈에 대한 정보가 실렸으며, 운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널리 알려진 이름이 되었다.[6] 이 해에 30승 6패라는 훌륭한 기록을 세웠지만, 주요 토너먼트에서 라이벌 고바야시 고이치에게 두 번 패했다.[6] 불안한 시작 이후 조치훈은 기세를 올려 세 명의 톱 기사를 꺾었지만, 당시 명인이었던 린하이펑에게 제9회 아사히 프로 최고 기사 결정전에서 패했다.[6]
3. 3. 초기 활동 (1973–1979)
1962년 6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木谷 實) 9단 문하로 입문하였다.[93] 1968년 프로 바둑에 입단하여, 당시 만 11세 8개월로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 기록을 세웠으며, 같은 해 2단으로 승단했다.1973년, 조치훈은 8단이었던 하네 야스마사를 꺾고 제5기 신예를 획득했다. 5단 이상 오테아이에서 83.75%의 승률을 기록하여 2등 상을 받았다. 이후 제11회 아사히 프로 베스트 텐에서 10위를 차지하고, 30승 11패의 좋은 성적으로 6단으로 승단했다.[7]
1974년, 제22기 일본 기원 선수권에 출전하여 소메타니 가즈오, 가토 마사오, 이시다 요시오, 린 카이호를 꺾었다. 특히 이시다를 상대로 한 승리는 이시다가 명인-혼인보를 달성한 지 일주일 만에 이루어졌다. 제6기 신예에서 고바야시를 꺾고, 33승 9패를 기록하여 기원 잡지로부터 특별 공로상을 받았다.
1975년에는 제12회 아사히 프로 베스트 텐에서 무패로 우승하며 일본 역대 최연소 타이틀 보유자가 되었다.[7] 그해 10월 말에 7단으로 승단했지만, 한 달 뒤 스승인 기타니가 사망하면서 좌절을 겪기도 했다. 연간 기록은 39승 16패였다.
1976년, 스승의 죽음을 극복하고 제1회 아사히 톱 8 선수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 제26기 오자 결승에서 오타케 히데오를 2-1로 꺾고 생애 첫 오자 타이틀을 획득했다. 최고 승수(46승)와 최고의 기술을 인정받아 기원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1977년은 좋지 않은 해였다. 제2기 명인 리그, 제15기 십단, 제16기 십단 예선에서 패하고, 11월에는 유일한 타이틀인 오자를 잃었다. 제8기 신예에서 우승했지만, 라이벌 고바야시에게 제2회 신예전 결승에서 다시 패했다.[7]
1978년, 제3기 기성 7단부에서 우승하고 여름에 8단으로 승단했다. 명인 리그에서 3위를 차지했지만, 제33기 혼인보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1979년, 제34기 혼인보 결승에 진출하고, 제16기 십단 및 제3기 천원 리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8월에는 제4기 고세이 리그와 타이틀을 차지했고, 연말에 올해 최고의 오테아이 점수를 얻었다.[6]
3. 4. 대삼관 및 그랜드슬램 (1980–1988)
1980년, 조치훈은 제5기 명인전에서 오타케 히데오 명인을 4-1(1 무승부)로 꺾고 명인위를 획득했다.[54] 같은 해, 그는 오타케 히데오를 상대로 명인 타이틀을 획득하며,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던 맹세를 지키고 24세의 나이로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한국 챔피언 조훈현과의 두 차례 대국에서 모두 승리하며 한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후 1981년부터 2003년까지 조훈현은 조치훈과의 모든 대국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1981년 4월, 9단으로 승단한 조치훈은[8] 제36기 본인방전에서 다케미야 마사키 본인방을 4-2로 꺾고 본인방위를 획득, 사상 4번째 '''명인 본인방'''이 되었다. 같은 해, 제6기 명인전에서 가토 마사오 9단을 4-0으로 꺾고 명인위를 방어했다.[55]
1982년에는 제7기 명인전에서 오타케 히데오 9단을 4-1로 꺾고 타이틀을 방어했고, 제37기 본인방전에서는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을 4-2로 꺾고 본인방을 방어했다. 제20기 십단전에서는 오타케 히데오 9단을 3-1로 꺾고 십단위를 획득, 학성전, 십단, 본인방, 명인의 4관왕을 달성했다.
1983년, 조치훈은 제7기 기성전에서 후지사와 히데유키에게 3연패 후 4연승이라는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기성위를 획득, '''대삼관'''을 달성했다. 이후 기성전 3연패를 달성했다. 같은 해, 제8기 명인전에서 오타케 히데오 9단을 4-1로 꺾고 명인을 방어했으며, 제30회 NHK배에서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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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기성 5국에서 후지사와 히데유키를 꺾는 조치훈 (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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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제9기 명인전에서 오타케 히데오 도전자에게 3연패 후 4연승으로 꺾고 명인을 방어하며,[56] 명인전 5연패 및 명인전 사상 최초의 '''명예 명인''' 자격을 얻었다. 같은 해 상금 랭킹 1위, 제3기 NEC배 우승, 제8기 기성전에서 하야시 하이호 9단을 4-2로 꺾고 기성을 방어했다.
1985년에는 제9기 기성전에서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을 4-3으로 꺾고 기성을 방어했다. 이 기성전에서는 다케미야 마사키가 120점이나 되는 거대한 세력을 구축했으나, 조치훈이 귀와 변의 세력을 바탕으로 1.5집 승리했다. 같은 해 제4기 NEC배에서 우승했다. 그러나 5년간 지켜왔던 명인 타이틀을 고바야시 사토루에게 빼앗겼다.[12]
1986년 1월 6일, 조치훈은 교통사고로 전치 3개월의 중상을 입었다. 휠체어를 타고 대국한 기성전에서 고바야시 고이치에게 기성위를 빼앗겨 무관이 되었지만, 8월의 제11기 기성전에서 오타케 히데오 9단을 3-0으로 꺾고 기성위를 획득했다.
1987년, 제13기 천원전에서 고바야시 고이치 천원을 3-2로 꺾고 천원위를 획득, 사상 최초의 '''그랜드슬램''' (생애 7대 타이틀 제패)을 달성했다.
1988년, 제14기 천원전에서 소노다 유이치 9단을 3-2로 꺾고 천원을 방어했다. 제26기 십단전에서 가토 마사오 9단을 3-2로 꺾고 십단위를 획득했다.
3. 5. 본인보 10연패 (1989–1998)
조치훈은 1989년 제44기 본인방전에서 다케미야 마사키를 꺾고 본인보 타이틀을 획득한 후, 1998년까지 10연패를 달성하여 명예 본인보 자격을 얻었다.[13][57] 1991년에는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는 상대였던 첸위핑이 건강 문제로 결승에 불참했기 때문이었다.[13]1990년과 1991년, 1992년 본인보전에서 고바야시 고이치를 상대로 연달아 승리하며 타이틀을 방어했다.[13] 특히 1992년에는 0:3으로 뒤진 상황에서 4연승을 거두는 저력을 보였다.[13] 1993년에는 본인보 5연패를 달성하며 25세 본인보 자격을 획득했다.
1994년에는 기성전에서 고바야시 고이치에게서 기성위를 탈환했고, 1996년에 다시 탈환하여 4연패를 기록했다. 1994년에는 왕좌전에서 가토 마사오를 꺾고 왕좌위를 차지하며 10년 만에 상금 랭킹 1위에 올랐다. 1996년에는 명인전에서 다케미야 마사키를 꺾고 명인위를 탈환하며 두 번째 대삼관을 달성했고, 이듬해에도 유지했다.[57]
3. 6. 최다 기록 경신 (1999–2017)
조치훈은 1999년 제24기 명인전에서 이야다 노리모토 9단을 4-1로 꺾고 명인위 4연패를 달성했다.[58] 같은 해 제23기 기성전에서 고바야시 코이치 9단을 4-2로 꺾고 방어하며, 6년 연속 상금 랭킹 1위를 기록했다.[58] 1991년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14]2000년 제19기 NEC배에서 우승했다.[58] 2001년에는 제49기 왕좌전에서 왕리청 9단을 3-0으로 꺾고 왕좌위를 획득했으며, 제20기 NEC배와 속기 선수권전에서 우승했다.[59] 2002년에는 명인전에 도전했고, 제35회 속기 선수권전과 제9기 아함 · 기리야마배에서 우승하며[59] 타이틀 획득수 65개로 사카타 에이오를 넘어 타이틀 획득 수 사상 1위가 되었다.
2003년에는 대한민국의 박영훈 9단을 2-1로 꺾고 제8회 삼성화재배에서 우승하며 12년 만에 국제 기전 우승을 차지했다.[60] 2004년에는 제2회 JAL 슈퍼 속기에서 우승했다.[18][19][20]
2005년에는 48세 7개월(최연소), 입단 후 36년 9개월(최단기)로 사상 세 번째 통산 1200승을 달성했다. 같은 해 제43기 십단전에서 4연패 중이던 왕리청으로부터 십단위를 탈환했다. 2006년 제44기 십단전에서 야마시타 케이고 기성을 상대로 십단위를 방어했다.[16]
2007년 NHK배에서 11년 만에 우승하며 통산 70번째 타이틀을 획득했다. 같은 해 4월 제45기 십단전에서 야마시타 케이고 기성 왕좌를 3-2로 꺾고 방어하며 3연패를 달성, 타이틀 획득 수를 71개로 갱신했다. 아함 · 기리야마배에서는 준우승했다.
2008년에는 51세 11개월(최연소), 입단 후 40년 2개월(최단기)로 사상 두 번째 통산 1300승을 달성했다. 제32기 기성전에 도전했고, NHK배에서는 준우승했다.
2010년 왕좌전 예선 A에서 린한제에게 승리하여 입단 후 공식전 통산 1364승(729패 3무승부 4무승부)을 거두어, 린 하이펑을 넘어 승수 사상 1위가 되었다. 아함 · 기리야마배에서는 준우승했다.
2011년 제1회 바둑 마스터스컵 결승에서 고바야시 코이치 9단에게 승리하여 우승하며[61] 타이틀 획득 수 72개를 기록했다. 2012년에는 NEC배 준우승, 바둑 마스터스컵 준우승을 기록했고, 9월 27일 사상 처음으로 공식전 통산 1400승을 달성했다.[93]
2014년 제4회 바둑 마스터스컵 결승에서 고바야시 사토루 9단에게 승리하여 우승하며[62] 타이틀 획득 수 73개를 기록했다. 2015년 제5회 바둑 마스터스컵 결승에서 다케미야 마사키 9단에게 승리하여 우승하며[63] 타이틀 획득 수 74개를 기록했다.
2016년 6월 20일, 만 60세 생일을 맞아 '''명예 명인''' 칭호를 받았다. 11월에는 인공지능 'DeepZenGo'와 대결하여 1, 3국에서 승리했다. 5년 만에 상금 랭킹 10위 이내(8위)에 들었다.
2017년 4월 27일, 사상 최초로 공식전 통산 1500승을 달성했다. 11월 20일, 한국기원 총재배 시니어 바둑 리그에서 MVP를 수상했다.
3. 7. 최근 활동 (2018–현재)
2018년, 제5기 대주배 프로 시니어 최강자전에서 우승했다. 한편, 이 해의 공식전 성적은 14승 16패로, 입단 51년 만에 처음으로 패배가 더 많아졌다.2019년 5월 20일, 자수포장을 수훈했다. 같은 해, 제9회 일본 바둑 마스터즈에서 우승하며 일본 통산 최다 타이틀 획득(75회) 기록을 경신했다.
2023년, 제2회 테이케이배 레전드전에서 우승했다. 이로써 타이틀 획득 수는 76개가 되었다.
4. 국제 기전 성적
조치훈은 국제 기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19] 1991년 후지쯔배에서 상대였던 천야오핑이 병으로 기권하면서 우승한 것이 국제 기전 첫 우승이었다.[19]
2003년 삼성화재배에서 3년 만에 국제 기전에서 우승하며 통산 두 번째 국제 타이틀을 획득하였다.[20] 제8회 삼성화재배 8강에서 1981년 이후 처음으로 조훈현을 꺾었고,[19] 4강에서 후야오위를 반 집 차로 이겼다. 결승에서는 박영훈을 상대로 첫 대국은 4집 반으로 졌지만, 이후 두 대국을 연달아 이겨 우승을 차지했다. 마지막 대국에서 박영훈이 180수에서 실수를 저질러 조치훈이 승리했다.[20]
기전 | 1988 | 1989 | 1990 | 1991 | 1992 | 1993 | 1994 | 1995 | 1996 | 1997 | 1998 | 1999 | 2000 | 2001 | 2002 | 2003 | 2004 |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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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씨배 | 8강 | - | 4강 | - | 4강 | - | 16강 | - | × | - | 8강 | - | 8강 | ||||||||||||
후지쯔배 | 8강 | 16강 | 16강 | 우승 | 8강 | 8강 | 3위 | 4강 | 16강 | 8강 | 16강 | 4강 | 16강 | 8강 | × | 32강 | × | × | 16강 | × | × | × | × | 16강 | 중지 |
동양증권배 | × | × | 4강 | - | 준우승 | 8강 | 16강 | 4강 | - | 8강 | 8강 | 중지 | - | ||||||||||||
삼성화재배 | - | 16강 | 32강 | 4강 | 32강 | 32강 | 32강 | × | 우승 | 16강 | 32강 | 32강 | 32강 | × | × | × | × | × | |||||||
LG배 | - | 16강 | 16강 | 8강 | 16강 | 16강 | 16강 | 16강 | 16강 | × | × | 32강 | 16강 | 16강 | 32강 | × | × | × | |||||||
춘란배 | - | × | × | × | - | 16강 | - | 16강 | - | 16강 | - | × | - | 8강 | - | 16강 | |||||||||
도요타배 | - | 32강 | - | × | - | × | - | × | 중지 | - | |||||||||||||||
BC카드배 | - | 64강 | × | 64강 | × | ||||||||||||||||||||
중환배 | - | 16강 | 16강 | - | 16강 | 중지 | - | ||||||||||||||||||
TV아시아 | - | × | × | × | 1회전 | × | × | × | 1회전 | × | × | × | × | 4강 | × | × | 4강 | × | × | 1회전 | 1회전 | × | × | × | × |
농심배 | - | × | × | × | × | × | 1:1 | × | × | × | × | × | × | × | × | ||||||||||
5. 수상
조치훈은 1999년에 통산 1000승, 2005년에 1200승, 2008년에 1300승을 달성했다.[3] 기도의 최우수 선수상을 9회 수상했으며,[3] 수사이 상도 9회 수상했다.[3] 1986년에는 기자 클럽 상을,[3] 1996년에는 지바시 명예 시민상을 받았다.[3] 자수포장(자수포장)을 수여받았다.
최우수 기사상은 1980년, 1981년, 1982년, 1984년, 1994년,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까지 총 9회 수상하여 역대 2위를 기록했다. 최다승 기사상은 1975년, 1976년, 1979년, 1980년, 1987년까지 총 5회 수상했다. 수훈상은 1972년, 1974년, 1975년, 1979년에 총 4회 수상했다. 그 외 기술상(1976년), 연승상(1976년), 국제상(2003년), 특별상(2004년), 신인상(1971년)을 1회 수상했다.
수사이 상은 1980년, 1981년, 1982년, 1984년, 1994년,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에 총 9회 수상했다. 일본기원기자클럽상(1986년)과 지바 시민 영예상(1996년)을 수상했고, 2019년에는 자수포장을 수여받았다.
6. 기풍
초반에는 철저하게 실리를 챙기고, 이후 상대의 세력에 들어가 시노기 승부에 돌입하는 실리파이다. 수읽기의 예리함은 으뜸이며, 보통은 침투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상대 세력에서 시노기에 성공하거나, 도저히 공격 대상이 되지 않는 돌의 벽을 뺏는 등, 중요한 대국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극도로 승부에 집착하는 성격으로, 항상 최강의 수를 두려고 한다. 매우 장고파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빠른 바둑에서도 많은 우승 경력을 가지고 있다.
7. 기타
조치훈은 경상남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6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현재까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다. 만 11년 8개월의 나이로 일본기원 최연소 입단 기록을 세웠으며, 2011년 9월 기준으로 일본 최다 통산 타이틀 획득(72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의 기풍은 승부에 집착하여 항상 최선의 수를 찾기 위해 장고하는 스타일이지만, 속기의 명수로도 알려져 있다.
어릴 적 이름은 항렬자를 따른 조풍연(趙豊衍)이었으나, 스님의 권유로 조치훈(趙治勳)으로 개명하였다. 일본 언론에서는 '25세 본인방 치쿤'(二十五世本因坊治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배우자 조 교코(趙 京子)는 2015년 8월 7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4세에 바둑을 배우기 시작하여 1년 만에 아마추어 고단자 수준이 되었다.
대국 중 자주 투덜거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카타 에이오, 오히라 슈조와 함께 "3대 투덜이"로 불리기도 했다. 고바야시 코이치는 이를 사고의 리듬을 잡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과거에는 부채를 깨물거나 성냥개비를 부러뜨리는 버릇이 있었으나,[75] 현재는 건강 기구나 손수건을 쥐고 대국한다.[75]
1980년에는 지진으로 인해 대국 시간에 늦어 부전패를 당한 적이 있으며,[76] 1980년 제5기 명인전 제4국에서는 기록 담당의 실수로 반칙패가 될 뻔했으나 무승부로 처리된 사건도 있었다. 판면에 집중하여 남은 시간을 빨리 소모하는 경향이 있으며, 초읽기 직전에 두는 경우가 많다. 1996년 NHK배에서는 초반에 고의로 시간을 다 써버리는 배수진 전략으로 승리한 적도 있고, 2002년 왕좌전에서는 착각으로 시간패를 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2014년 NHK배에서는 대국 중 의식이 몽롱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바둑에 대한 엄격함과 집념을 보여주는 일화도 많은데, 대국 중 자신의 악수에 화가 나 협탁을 던지거나,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버릇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2009년10월 8일에는 태풍 18호의 영향으로 교통이 마비된 상황에서도 대국장에 59분 늦게 도착하여, 남은 시간 페널티를 받고도 승리한 적이 있다.[77] 타이틀 매치 7번 승부에서는 29승 9패(2010년 기준)의 높은 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쇼기가 취미이며, 인터넷 쇼기에서는 "하브타니"라는 핸들 네임을 사용한다. 2020년8월 26일에는 와타나베 아키라 명인과 바둑・쇼기 2면 지시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78] 골프를 매우 좋아하며,[79] 유머 있는 해설로도 유명하다.[80] 1991년 세계 바둑 선수권 후지쓰배 결승에서는 부전승으로 우승한 후, 팬들을 위해 공개 대국을 하기도 했다.
"입문자・초심자는 적은 수의 바둑판으로 배우자"는 생각으로 3로 바둑, 4로 바둑, 5로 바둑을 해설하기도 했다. "NHK 바둑 강좌"에서는 "25세 본인방 조치훈의 약간 좋은 바둑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대국 날에는 아침 식사와 점심 식사 중 하나만 하는 루틴을 가지고 있다.[81]
라이벌 고바야시 코이치와는 129전을 치러 66승 63패로 호각을 이루지만, 타이틀전에서는 조치훈이 많이 이겼다.[82] 젊은 시절에는 이시다 요시오, 가토 마사오, 타케미야 마사키의 "황금 트리오"에 대항하여 "실버 콤비"로 불리기도 했다.[82] 교통사고 직후 고바야시의 솔직한 대응에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83]
가토 마사오나 타케미야 마사키는 조치훈을 어려워했다. 이시다 요시오를 칭찬하면서도, 그의 악수를 지적하는 등 솔직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사카타 에이오에게는 연패를 당하며 쓴 경험을 했지만, 그의 바둑에 큰 영향을 받아 "평생의 보물"이라고 언급하며 존경심을 표했다.[85] 하야시 게이호와는 6세에 첫 대국을 하여 승리한 인연이 있으며,[86] 1983년 혼인보 방어전에서는 대역전패를 당하기도 했다.
장쉬에게는 27전 6승 21패(2012년 초 기준)로 크게 져 천적 관계이며, 타카오 신지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인다. 야마시타 케이고에게는 처음에는 졌지만, 최근에는 이기고 있다고 농담 섞인 어조로 말하기도 했다.[87] 이야마 유타에 대해서는 최연장 기록을 갱신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며, 그의 기록 경신에 대해 유머러스하게 언급하기도 했다.
숙부는 한국 바둑계의 톱 기사였던 조남철()이며, 친형은 은퇴한 바둑 기사 조상연() 7단이다. 문하에는 김수준(), 마츠모토 타케히사, 츠루야마 아츠시가 있다. 고등학생 시절 사카이 슈시의 바둑에 대해 엄격하게 평가한 적이 있으나,[91] 후에 사카이는 프로가 되어 기성 타이틀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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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hi.com(朝日新聞社):1000勝に迫る結城 囲碁、最年少・最速・最高勝率の記録達成へ - 囲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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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特別採用枠では藤沢里菜が11歳6か月で入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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病欠による不戦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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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式戦のみ。女流棋戦・地方棋戦(王冠戦・関西棋院第一位決定戦など)は除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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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因坊400年・手談見聞録:/41 治勲時代の幕開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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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囲碁・将棋ジャーナル」で武宮正樹が証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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渡辺明名人、囲碁・名人戦の控室に現れ趙治勲名誉名人・二十五世本因坊と二面指し対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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囲碁将棋レジェンド対局加藤一二三九段vs25世本因坊治勲@ニコニコ超会議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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棋士の勝負めし 「将棋のほうが囲碁より食べる」と観戦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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坂田栄男さん:お別れの会に囲碁ファンら300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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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治勲九段「20連覇ぐらい、はるかかなたへ」本因坊11連覇祝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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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34期名人戦挑戦者決定リーグ戦第11局観戦記 坂井秀至七段対趙治勲二十五世本因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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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イナビ出版から「過去の名著、名作を文庫として残し著者、出版社、囲碁ファン三者の利益となることを目的として企画」と題し、「ひと目の詰碁」のタイトルでシリーズの抜粋および電子書籍版が2003年に発行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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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훈, 일본 최초로 1400승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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