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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토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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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토 천황(持統天皇)은 덴지 천황의 딸로, 덴무 천황의 아내이자 그의 사후 즉위한 일본의 제41대 천황이다. 그녀의 이름은 우노노사라라 또는 우노였으며, 임신의 난 당시 남편인 덴무 천황을 도왔다. 덴무 천황 사후에는 섭정으로 정무를 수행하며 아들인 구사카베 황자의 즉위를 도왔으나, 그가 요절하자 손자인 가루 황자에게 양위하고 태상천황이 되었다. 지토 천황은 덴무 천황의 정책을 계승하여 아스카기요미하라령을 제정하고 후지와라쿄를 조영했으며, 외교적으로 신라와 교류하고 당나라와는 공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녀의 치세는 강력한 지도력과 정치적 식견을 바탕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수습하고 율령 국가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으며, 오쓰 황자 모반 사건, 임신의 난 배후설 등 다양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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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토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가쓰카와 슌쇼의 지토 천황 초상, 18세기
가쓰카와 슌쇼의 지토 천황 초상, 18세기
우노노사라라 (鸕野讚良)
시호한풍: 지토 (持統)
화풍: 타카마노 하라히로노 히메노 스메라 미코토 (高天原廣野姫天皇)
능호히노쿠마노오우치 능 (檜隈大内陵)
신상 정보
출생645년
사망703년 1월 13일 (향년 57–58세)
사망 장소후지와라쿄, 일본
매장지히노쿠마노오우치 능 (檜隈大内陵) (나라)
재위 정보
직위천황
재위 기간686년 - 697년
즉위 유형일본
이전덴무 천황
이후몬무 천황
배우자덴무 천황
자녀구사카베 친왕
가계 정보
왕가일본 황실
아버지덴지 천황
어머니소가노 오치노이라츠메
배우자 정보
배우자덴무 천황
배우자 임기673년 - 686년
배우자 유형천황 배우자

2. 생애

지토 천황(持統天皇일본어)은 덴지 천황(天智天皇)의 딸로, 어머니는 소가노 야마다노 이시카와 마로(蘇我山田石川麻呂)의 딸인 오치노이라츠메(押坂皇子)였다. 덴무 천황(天武天皇)의 아내였으며, 남편 사후 섭정을 맡았다. 687년 아들 구사카베 친왕의 즉위를 보장하기 위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5]

지토 천황의 이름은 Unonosarara일본어 또는 우노(宇野)였다.[6] 후지와라궁에서 통치하던 중, 689년에는 수고로쿠를 금지했고,[7] 690년 즉위식에서 특별한 의식을 거행한 후 사면을 선포했다. 692년에는 미와노 아소노 타케치마로 장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세로 행차했다.[8]

구사카베 친왕은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요절하였고, 그의 아들 카루노오(훗날 문무 천황)가 후계자로 책봉되었다.[5]

지토 천황은 11년간 재위했다. 이후에도 7명의 여왕이 있었지만, 대부분 부계 황족 남성들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일부 보수적인 학자들은 여성의 통치가 일시적이며 남성 중심의 계승 전통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9] 겐메이 천황이 딸인 겐쇼 천황에게 왕위를 계승한 것은 이러한 주장에 대한 예외적인 사례이다.

697년, 문무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태상천황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퇴위한 황위 계승자들은 모두 같은 칭호를 사용했다.[5] 섭정으로서 권력을 유지한 것은 일본 정치에서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지토 천황을 기리는 기념 신토 신사와 능묘


지토의 묘는 현재 위치가 알려져 있다.[2] 궁내청은 이곳을 지토의 능묘로 지정하고 있으며, 공식 명칭은 ''오치노오카노에노 미사사기''이다.[10]

2. 1. 임신의 난 이전

나카노오에 황자의 딸로, 어머니는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의 딸 오치노이라쓰메(遠智娘)이다. 친언니로 오타노 히메미코가 있었다.[5]

외할아버지 이시카와마로는 다이카 5년(649년) 아버지 나카노오에에게 모함을 받아 공격당해 자결했고, 이시카와마로의 딸이자 나카노오에의 아내였던 미야쓰코히메(造媛)도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얼마 못 가 병사하였다.[16]일본서기》 지토 천황 즉위전기(即位前紀)에 따르면, 우노노사라라 황녀의 어머니 오치노이라쓰메는 미노쓰코노이라쓰메(美濃津子娘)로 되어 있는데, 미노를 당시 미노(三野)로도 적었던 데서 미노의 '미노(みの)'가 '미야(みや)'로 잘못 발음되어 미야쓰코히메(造媛)로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미노쓰코노이라쓰메와 오치노이라쓰메가 동일 인물이라면 우노노사라라 황녀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것이 된다.

사이메이 천황 3년(657년), 13세의 나이로 숙부 오아마 황자(大海人皇子)에게 시집갔다. 오타노 히메미코, 오에노 히메미코(大江皇女), 니타베노 히메미코(新田部皇女) 등 나카노오에 황자의 딸 넷이 모두 오아마 황자에게 시집갔는데, 이는 나카노오에 황자의 뜻이었다. 사이메이 천황 7년(661년), 남편을 따라 천황을 수행하여 규슈까지 갔었다. 덴지 천황 원년(662년) 쓰쿠시 국 나다쓰에서 구사카베 황자(草壁皇子)를 낳았고,[17] 이듬해 친언니 오타노 히메미코는 오쓰 황자(大津皇子)를 낳았다. 덴지 천황 6년(667년) 이전에 오타노 히메미코가 사망하면서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는 오아마 황자의 다른 아내들 가운데서도 가장 신분이 높은 제1부인이 되었다.

「百人一首之内 持統天皇」

2. 2. 임신의 난

671년, 덴지 천황 사후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던 오아마 황자는 정쟁을 피해 요시노로 은거했고, 히메미코(지토 천황)도 아들 구사카베 황자를 데리고 그를 따랐다. 《일본서기》에는 명확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요시노까지 동행한 오아마 황자의 부인은 히메미코 한 명뿐이었다고 알려져 있다.[1]

672년, 오아마 황자는 임신의 난을 일으켰다. 히메미코는 구사카베 황자와 오아마 황자의 다른 아들인 오사카베 황자(자신의 친아들은 아님)를 데리고 남편을 따라 미노로 탈출했다. 이들은 병들고 지쳐 구와나에 당도했는데, 《일본서기》에는 오아마 황자와 "함께 모의를 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히메미코가 임신의 난 계획에 대한 중요한 조언을 했음을 알 수 있다.[2]

한편, 임신의 난 당시 현지 호족 오와리노 오스미가 '천황'에게 사택을 제공했다는 기록이 《속일본기》에 남아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천황'이 덴무 천황(오아마 황자)인지, 아니면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지토 천황)인지는 의견이 갈린다.[3]

2. 3. 덴무 천황의 황후

덴무 천황 2년(673년) 정월, 임신의 난에서 승리한 오아마 황자가 덴무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지토 천황)도 황후가 되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덴무 천황의 재위 기간 동안 황후는 항상 천황 곁에서 정치에 관한 조언을 하며 통치를 보좌했다고 한다.

679년, 덴무 천황과 황후, 여섯 황자는 요시노에서 맹약을 맺었다. 이 여섯 황자는 구사카베 황자, 오쓰 황자(大津皇子), 다케치 황자(高市皇子), 오사카베 황자, 가와시마 황자(川島皇子), 시키 황자(芝基皇子)로서, 덴지 천황의 황자인 가와시마와 시키를 제외하면 모두 덴무 천황의 아들이었다. 덴무 천황은 황자들에게 다투지 말고 협력할 것을 맹세하게 하고 그들을 한데 끌어안았으며, 이어서 황후도 황자들을 끌어안았다고 한다.

황후가 병을 얻었을 때 덴무 천황은 황후의 쾌유를 빌며 야쿠시지를 건립했다. 681년, 천황은 황후와 함께 대극전(大極殿)에 나아가 황자와 여러 왕족, 신료들 앞에서 율령 편찬을 시작하고, 당시 19세였던 구사카베 황자를 황태자로 삼겠다고 밝혔다. 당시 실무 능력이 없던 어린아이를 황태자로 세운 전례가 없었음에도, 황후의 강한 요망으로 이러한 태자 책봉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685년경부터 덴무 천황의 병세가 차츰 진행되어 황후가 대신 통치권자로서 존재감이 높아졌고, 686년 7월에 천황은 "천하의 일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황후 및 황태자에게 보고하라"는 칙을 내리면서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 ・ 구사카베 황자 모자가 공동으로 정무를 맡게 되었다.[5]

2. 4. 오쓰 황자의 모반 사건

덴무 천황이 죽은 바로 다음 달인 10월 2일, 오쓰 황자는 모반 혐의로 자결하였다. 이는 가와시마 왕자의 밀고에 의한 것이었다.[18] 구체적으로 어떤 모반 계획이었는지는 사서에 남아있지 않다. 황위 계승을 실력으로 다투는 것은 이 시대까지는 흔한 일이었고, 오쓰 황자에게 황위를 얻으려는 움직임이나 뭔가 불온한 언동이 있었기에 그것을 알게 된 황후(지토 천황)가 재빨리 손을 써서 황자를 제거했거나, 모반 계획이라는 것도 구체적으로 기록에 밝혀지지 않은 점에서 구사카베 황자의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오쓰 황자를 사전에 미리 역모 혐의를 씌워서 제거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의 오쓰 황자 모반 사건에 대한 신속한 반응에서 그러한 천황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2. 5. 지토 천황의 칭제와 즉위

689년 4월, 구사카베 황자가 병으로 급서하자, 지토 천황은 손자인 가루 황자(훗날 몬무 천황)에게 황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가루 황자가 당시 7세로 너무 어렸기 때문에 황태자로 세우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직접 천황으로 즉위하기로 결정했다.[5]

즉위하기 전 해인 689년, 덴무 천황 때부터 편찬해 온 아스카기요미하라령을 제정, 시행하였다. 같은 해 12월 8일에는 쌍륙을 금지하였다.[18]

690년 지토 천황의 즉위식은 《일본서기》에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토베 마로 아손이 방패와 창을 세운 예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신기관 나카토미 오오시마 아손이 천신의 수사를 낭독하고, 공경이 줄지어 모두 참배하고 손뼉을 치는 것은 처음 등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전대에 보였던 신하들의 협의·추대는 없었다. 새로운 형식을 통해 천황의 권위를 높이려 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즉위 후, 대사면을 실시하고, 대규모 인사 이동을 단행하여 다케치 황자태정대신에, 타지히지마를 우대신에 임명했다. 이로써 단 한 명의 대신도 임명하지 않았던 덴무 천황 시기의 황친 정치는 수정되었다.

2. 6. 지토 천황의 치세

임신의 난에서 승리한 오아마 황자는 덴무 천황으로 즉위했고,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도 황후가 되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덴무 천황 재위 기간에 황후는 항상 덴노 곁에서 정치에 관해 조언했다고 한다.

679년, 덴무 천황과 황후, 여섯 황자는 요시노에서 맹약을 맺었다. 이 여섯 황자는 구사카베 황자, 오쓰 황자, 다케치 황자, 오사카베 황자, 가와시마 황자, 시키 황자였다. 덴지 천황의 황자인 가와시마와 시키를 제외하면 모두 덴무 천황의 아들이었다. 덴무 천황은 황자들에게 다투지 말고 협력할 것을 맹세하게 하고 그들을 끌어안았으며, 이어서 황후도 황자들을 끌어안았다고 한다.

황후가 병을 얻었을 때 덴무 천황이 황후의 쾌유를 빌며 건립한 것이 야쿠시지이다. 681년, 천황은 황후와 함께 대극전에 나아가 황자와 여러 왕족, 신료들 앞에서 율령 편찬을 시작하고, 당시 19세였던 구사카베 황자를 황태자로 삼겠다고 밝혔다. 당시 실무 능력이 없던 어린아이를 황태자로 세운 전례가 없었음에도, 황후의 강한 요망으로 이러한 태자 책봉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685년경부터 덴무 천황은 병세가 차츰 깊어져 황후가 대신 통치권자로서 존재감이 높아졌다. 686년 7월에 천황이 "천하의 일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황후 및 황태자에게 보고하라"는 칙을 내리면서 우노노사라라 히메미코 ・ 구사카베 황자 모자가 공동으로 정무를 맡게 되었다.

덴무 천황이 사망한 다음 날인 10월 2일, 오쓰 황자의 반란이 발각되었고, 다음 날인 3일에 자결했다. 가와시마 왕자의 밀고였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이 있었는지는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황위 계승을 실력으로 다투는 것은 이 시대까지 흔히 있었다.

689년 4월에 구사카베 황자가 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황위 계승 계획을 변경해야만 했다. 우노노사라라는 구사카베 황자의 아들(즉, 우노노사라라의 손자)인 가루 황자(훗날의 문무 천황)에게 황위 계승을 바랐지만, 가루 황자는 어렸기 때문에(당시 7세) 당장 황태자로 세우는 것은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우노노사라라는 스스로 천황에 즉위하기로 결정했다. 즉위 전 해에는, 전대부터 편찬 사업이 계속되던 아스카기요미하라령을 제정, 시행하였다. 같은 해 12월 8일에는 쌍륙을 금지하였다.[18]

690년의 지토 천황 즉위 의식은 《일본서기》에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시카미 마로가 방패와 창을 세운 예는 이전에도 있었고, 신기관 나카토미노 오시마가 천신의 수사를 낭독하고, 공경이 줄지어 모두 참배하고 손뼉을 치는 것은 처음 등장하는 것이다. 또한 전대에 보였던 신하들의 협의·추대는 없었다. 새로운 형식의 등장에 천황의 권위 상승을 보는 학자들이 많다. 즉위 후, 대사면을 실시하고, 천황은 대규모 인사 이동을 단행하여 다카치 황자를 태정대신에, 다지히지마를 우대신에 임명했다.

지토 천황은 잦은 요시노 행차를 했는데, 이는 남편과의 추억이 있는 땅임과 동시에 남편의 권위를 의식해 그 힘을 빌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시노 행차를 제외하면 이세국에 한 번, 기이국에 한 번 행차했고, 《만요슈》의 기록에서 오미국에도 한 번 행차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692년 3월 3일의 이세 행차[19]는 농사에 방해가 된다는 주나곤 미와노 다케치마로의 간언을 듣지 않고 강행한 것이었는데, 이 행차는 새로운 수도가 될 후지와라쿄 건설에 지방 호족층의 협력을 이끌어내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지적된다.

2. 6. 1. 덴무 천황의 정책 계승

지토 천황의 치세는 덴무 천황의 정책을 이어받아 완성한 아스카기요미하라령 제정과 후지와라쿄 건설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관인들에게 무기를 갖추고 무예를 익히도록 장려하여 덴무 천황의 정책을 충실히 계승하였다.[5] 묘기(墓記) 제출을 명한 것도 덴무 천황의 역사 편찬 사업을 계승한 것이다.[5] 민정에서는 경인적(庚寅籍)이라 불리는 호적을 작성하였다.[5] 687년 7월에는 685년 이전의 빚에 대한 이자를 면제하고, 노비 신분을 구분하기 위해 백성과 노비에게 지정된 색의 의복을 입도록 명하였다.[5]

이러한 율령국가 건설 및 정비 정책과 더불어 지토 천황이 고심한 것은,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바탕으로 황족이나 신하를 회유하거나 지지할 필요가 없었던 남편 덴무 천황의 권위를 자신에게 옮겨오는 일이었다.[5] 지토 천황은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에게 천황을 찬양하는 노래를 짓게 하였는데, 히토마로는 낮은 관직에도 불구하고 천황의 비호를 받아 천황이 붕어할 때까지 궁정 시인으로서 천황과 그 힘을 찬양하는 노래를 계속 지었고, 이후 지방 관료로 전직하였다.[5]

새로운 수도 건설은 덴무 천황의 염원이었으며, 덴무 천황 대에 이미 공사가 시작되었다고도 하고, 지토 천황이 처음 시작했다고도 한다.[5] 덴무 천황 말기까지 착수되지 않았다는 설에서는 그 이유를 '백성의 노역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5]

지토 천황은 덴무 천황이 생전에 황후(지토 천황)의 병 쾌유를 기원하며 건립을 발원했던 야마토국야쿠시지를 완성하고, 칙명에 따라 기원사로 삼았다.[5]

2. 6. 2. 외교 정책

덴무 천황 때와 마찬가지로 신라와 교류를 지속했으나, 당나라와는 공식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일본서기 지토 4년(690년)조에는 지토 천황이 지쿠고국 상양미군(上陽咩郡) 주민 오토모베 하카마(大伴部博麻)에게 "백제를 구원하는 전쟁에서 당나라의 억류 포로가 되었으나, 다른 이들이 귀국해 당의 일본 공격 계획을 조정에 알릴 수 있도록 자신을 노예로 팔았다"며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19] 이는 백제 부흥 운동 당시 일본이 당나라에 패배한 후의 상황을 보여준다.

신라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선진 문물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다.[20] 그러나 신라에 대해서는 대등한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신라가 조공하는 관계를 강요하였으나, 신라는 당과의 대항 관계에서 그 조건을 받아들여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2. 7. 양위

697년 2월, 가루 황자가 황태자가 되었다.[20] 그해 8월 1일, 지토 천황은 15세의 가루 황자에게 양위하였다.(몬무 천황) 일본 역사에서 생존 중에 양위한 천황은 고교쿠 천황 이래로 지토 천황이 두 번째였으며, 지토 천황은 이후 복위도 하지 않은 채 최초의 태상천황(太上天皇), 즉 상황이 되었다.[5]

양위한 뒤에도 지토 상황은 몬무 천황과 함께 정무를 보았는데, 몬무조의 최대 업적이라 꼽히는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의 제정과 시행조차도 지토 상황의 의사가 관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임신의 난 공신 출신 대신 후지와라노 후히토 등 중국 문화에 경도된 젊은 인재들이 대두하여, 지토조에서 그림자가 옅었던 오사카베 친왕이 재등장하는 등 변화를 주목한 학자도 있다. 지토 천황은 701년에 잠시 정무에서 물러나 요시노 행차를 단행하는데, 이듬해에는 미카와까지 이르는 긴 여행을 통해 임신의 난에서 공을 세운 지방 호족들을 치하하였다.

2. 8. 붕어

다이호 2년 12월 22일, 지토 천황은 58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10] 유해는 1년여의 기간을 거쳐 화장되어 덴무 천황의 능에 합장되었는데, 이는 천황의 화장 중 최초의 사례였다.[10]

궁내청은 지토 천황의 능묘를 ''오치노오카노에노 미사사기''로 지정하였다.[10]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덴지 천황
어머니소가노 오치노이라쓰메(蘇我遠智娘)
친자매오타노 히메미코(大田皇女), 다케 황자(建皇子)
남편덴무 천황
아들구사카베 황자(草壁皇子)
손자몬무 천황, 겐쇼 천황, 기비 내친왕(吉備內親王)



지토 천황의 아들은 요절한 구사카베 황자 단 한 명뿐이었지만, 손자들은 나라 시대에 걸쳐 문화와 정치를 장악하였다.[5] 그러나 현손인 고켄 · 쇼토쿠 천황 이후 그 계보는 끊어지고, 황위는 덴무계에서 덴지계의 고닌 천황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4. 평가

지토 천황은 덴지 천황(天智天皇)의 딸이자 덴무 천황(天武天皇)의 아내로, 덴무 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5] 『일본서기』는 지토 천황을 “심원하고 도량이 크며”, “예를 좋아하고 검소하며”, “어머니의 덕이 있다”고 묘사한다.

지토 천황은 강력한 지도력과 정치적 식견을 바탕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수습하고 율령 국가의 기틀을 다진 여제로 평가받는다. 또한 아스카 시대의 문화와 예술을 장려했으며, 특히 『만요슈(万葉集)』에는 지토 천황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11]

다음은 『만요슈』에 수록된, 덴무 천황의 서거 후 지어진 시이다.[11]

일본어로마자 표기한국어 번역

}

|

''Yasumishishi waga ōkimi no''

''Yū sareba meshita furashi''

''Akekureba toita furashi''

''Kamuoka no yama no momichi to''

''Kyō mo ka mo toita mawamashi''

''Asu mo ka mo meshita mawamashi''

''Sono yama o furisakemitsutsu''

''Yū sareba aya ni kanashimi''

''Akekureba''

''Urasabikurashi''

''Aratae no''

''Koromo no sode wa''

''Furu toki mo nashi''

|영어

|

아, 가미오카(神岳) 언덕의

가을 단풍이여! [12]

내 좋은 군주이자 통치자는

저녁에는 그것을 보시고

아침에는 그것을 물으시리라.

바로 그 언덕에서 멀리서

나는 바라보며 생각하네

그분이 오늘 그것을 보시는지,

혹은 내일 그것을 물으시는지.

저녁이면 슬픔에 젖고,

아침이면 마음 아파 괴로워하네—

내 거친 베옷 소매는

한순간도 마를 새가 없구나.

|한국어

|}

지토 천황의 시 중 하나는 후지와라노 테이카(藤原定家)가 엮은 시집 『현인일수』(百人一首)에도 실려 있다.

일본어[13]로마자 표기[13]한국어 번역[13]

}

|

''Haru sugite''

''Natsu kinikerashi''

''Shirotae no''

''Koromo hosu chō''

''Ama no Kaguyama''

|영어

|

봄은 지나가고

여름이 다시 왔네

하얀 비단옷을

말리는구나

카구야마(香具山)에

|한국어

|}

백인일수 「봄 지나서」의 노래


만엽집』 제1권 잡가 28번에는 후지와라궁 어우 천황 대(고텐겐 히로노히메 천황 원년 정해 11년 양위 경태자 존호 왈 태상천황) 천황어제가로 지토 천황의 이름이 남아있다.

  • 「봄 지나 여름 오는가 하니 흰 비단옷 말리는 천향구산」

:* 春過而 夏來良之 白妙能 衣乾有 天之香來山|춘과이 하래양지 백묘능 의건유 천지향래산일본어 (정훈)

:* 春過ぎて夏ぞ來ぬらし白妙の衣かはかすあまのかぐ山|춘과기하ぞ래누라시백묘의의かはかすあまのか구산일본어 (『고래풍체초』)

이 노래는 신고금와카슈 제3권 175번에 고쳐진 후 수록되었고, 『고쿠라 백인일수』에도 선정되었다.

  • 「봄 지나 여름이 되었구나 흰 비단옷 말리는 천향구산」

:* 春すきてなつきにけらししろたへの ころもほすてふあまの香具山|춘すきてなつきにけらししろたへの ころもほすてふあまの향구산일본어 (『고쿠라 백인일수』)

5. 논란

지토 천황은 7세기부터 8세기 일본 고대를 특징짓는 여성 천황(女帝) 중 한 명이다. 다른 여제들과 달리 지토 천황은 직접 정책을 추진한 실질적이고 유능한 통치자로 평가받는다. 『일본서기』에는 천무 천황(天武天皇)을 보좌하여 다양한 정치적 조언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21], 『속일본기』에는 문무 천황(文武天皇)과 함께 정무를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토 천황은 천무 천황과 함께 "대군은 신이 되니"라고 노래하며 천황 권력 강화 노선의 최고점에 있었다.

정치가로서 지토 천황의 주요 동기는 자신의 아들 구사카베 황자(草壁皇子)와 손자 가루 황자(軽皇子)에게 황위를 계승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남편 천무 천황에게 간청하여 구사카베 황자를 황태자로 삼았고, 남편 사후에는 오쓰 황자(大津皇子)를 제거했다.

최근에는 우노노사라라 황녀(鸕野讚良皇女)가 처음부터 황위 계승을 위한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었다는 설도 제기된다. 천무 천황이 자신을 한나라 고조(劉邦)에 비유한 것처럼, 지토 천황은 남편 사후 정치 실권을 장악한 려태후(呂太后)를 자신에 비유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22]

5. 1. 오쓰 황자 모반 사건의 진실

오쓰 황자 모반 사건은 덴무 천황이 사망한 직후 발생했다. 황위 계승 후보였던 오쓰 황자가 모반 혐의로 자결한 사건이다. 《일본서기》에는 구체적인 모반 계획이 기록되지 않아, 지토 천황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25]

《일본서기》에 따르면, 오쓰 황자는 학문과 시문에 능하여 덴무 천황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고, 실권자인 황후(우노노사라라 황녀, 훗날의 지토 천황)가 후견인이었던 구사카베 황자에게 밀려 황태자가 되지 못했다. 덴무 천황 사후, 가와시마 황자의 밀고로 오쓰 황자의 모반이 발각되었고, 그는 자결했다.[25]

이 사건에 대해, 오쓰 황자가 실제로 모반을 계획했는지, 아니면 지토 천황의 모함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오쓰 황자에게 황위를 얻으려는 움직임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모반 계획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점, 사건 직후 지토 천황의 신속한 대응 등을 볼 때, 지토 천황이 자신의 아들 구사카베 황자의 황위 계승을 위해 정적을 제거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25]

일부 학자들은 《만엽집》에 실린 노래와 관련하여 오쓰 황자를 감시하는 스파이가 있었고, 지토 천황이 이를 지시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제기하기도 한다.[25]

5. 2. 임신의 난 배후설

671년 덴지 천황 사후, 오토모 황자가 즉위하자 오아마 황자는 정쟁을 피해 요시노로 은거했다. 이때 히메미코(지토 천황)도 아들 구사카베 황자를 데리고 그를 따랐다. 《일본서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오아마 황자의 부인 중 요시노까지 따라간 유일한 인물이었다.[16]

이듬해 오아마 황자는 임신의 난을 일으켰다. 히메미코는 아들 구사카베 황자와 오아마 황자의 아들 오사카베 황자를 데리고 남편을 따라 미노로 탈출, 병으로 구와나에 당도했다. 《일본서기》에는 오아마 황자와 "함께 모의를 정하였다"라고 기록, 히메미코가 임신의 난 계획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임신의 난 당시, 호족 오와리노 오스미가 '천황'에게 사택을 제공했다는 기록이 《속일본기》에 전해진다. 여기서 '천황'이 덴무 천황(오아마 황자)인지, 지토 천황인지는 학설이 나뉜다.

6. 대중문화


  • 리츄 만지코의 만화 《천상의 무지개 지토 천황 이야기》는 지토 천황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 나가오카 요시코의 소설 『고대 환상 로맨스 시리즈・미즈키의 맹세』가 있다.
  • 야마토 카즈키의 만화 『하늘 끝 땅 끝』이 있다.
  • 소니시 켄지의 만화 『냐옹냐옹 일본사 제2권』이 있다.
  • 아후리 치에의 소설 『요의 여제 지토 천황』이 있다.
  • 코이시 마사코의 소설 『철의 여제 지토』가 있다.
  • 콘도 세이이치로의 소설 『백봉의 여제―지토 천황 사전』이 있다.
  • 미타 마사히로의 소설 『염의 여제 지토 천황』이 있다.
  • 반도 마사코의 소설 『주조의 능』이 있다.
  •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 『세이초 통사 5 진신의 난』(고단샤, 1988년)은 1979년 초판 발행 후 문고판으로 수정 발행되었다.

참조

[1] 서적 Heroic with grace : legendary women of Japan M.E. Sharpe 1991
[2] 웹사이트 持統天皇 (41) http://www.kunaicho.[...]
[3]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959
[4]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1834
[5] 서적 Jinnō Shōtōki
[6] 서적 Gukanshō 1979
[7] 문서 Nihon Shoki
[8] 문서 Nihon Shoki
[9] 뉴스 Life in the Cloudy Imperial Fishbowl http://search.japant[...] Japan Times 2007-03-27
[10] 서적
[11] 서적 Nippon Gakujutsu Shinkōkai
[12] 서적 Nippon Gakujutsu Shinkōkai
[13] 웹사이트 University of Virginia, Hyakunin Isshu on-line http://etext.lib.vir[...] Etext.lib.virginia.edu 2012-06-10
[14] 서적 女性天皇 集英社 2004
[15] 논문 名代について https://hdl.handle.n[...] 京都女子大学史学会 2014
[16] 서적 新編古典文学全集『日本書紀』
[17] 문서 日本書紀
[18] 문서 日本書紀
[19] 문서 日本書紀
[20] 서적 懐風藻 岩波書店
[21] 서적 日本書紀 小学館 1998
[22] 서적 日本書紀研究 第1冊 塙書房 1964
[23] 서적 万葉集 岩波文庫
[24] 논문 大津皇子とその政治的背景 1956
[25] 서적 古代国家の成立 中央公論社 1973
[26] 서적 事典陵墓参考地 もうひとつの天皇陵 吉川弘文館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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