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평 계곡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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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평 계곡 전투는 1950년 8월 18일부터 25일까지 한국 전쟁 중 벌어진 전투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국군과 유엔군이 다부동 일대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미 제25사단 제27연대가 투입되어 한미 연합작전의 효시가 되었으며, 특히 8월 21일 밤에는 '볼링장 전투'로 불리는 한국 전쟁 최초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전투 결과 북한군은 T-34 전차 13대, SU-76 자주포 5대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했으며, 국군은 약 2,3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는 백선엽 장군의 지휘 아래 국군 제1사단의 활약이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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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평 계곡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분쟁 | 천평 계곡 전투 |
전체 | 한국 전쟁 |
날짜 | 1950년 8월 21일 |
장소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천평리 |
결과 | 한미 연합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대한민국 미국 |
교전국 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백선엽 제1사단장 준장 존 H. 마이켈리스 제23연대장 대령 폴 L. 프리먼 주니어 제27연대장 대령 |
지휘관 2 | 최용진 제13사단장 제5연대장 대좌 홍림 박성철 제15사단장 |
병력 | |
병력 1 | 알 수 없음 |
병력 2 | 알 수 없음 |
사상자 | |
사상자 1 | 알 수 없음 |
사상자 2 | 알 수 없음 |
2. 배경
1950년한국어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북한군이 우세하여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2. 1. 병력 배치
1950년 8월 17일,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국군 제1사단의 위급한 상황을 인식하고 미 제25사단 제27연대(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를 제1사단에 증원했다. 같은 날 1개 대대가 감소된 미 제2사단 제23연대(연대장 프리먼 대령)를 1사단 주저항선 바로 뒤에 배치했다.같은 날 육군본부도 제8사단 제10연대를 제1사단에 배속시켜 사단의 전투력이 강화되었다. 당시 제1사단 정면에는 북한군 제3사단, 제13사단, 제15사단 등 3개 사단이 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처럼 많은 증원 부대가 제1사단에 투입되지 않았다면 다부동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특히 신주만에서 다부동으로 이어지는 접근로에는 전차 14대를 재보급 받은 북한군 전차연대가 공격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미 제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은 제1사단 사령부를 방문하여 임무를 설명하고 연합작전에 대해 협조했다. 미 제27연대가 제1사단에 배속되거나 작전통제된 것은 아니지만, 미군이 한국군 사단 방어지역에 투입되어 작전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기에 한미 연합작전의 효시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8월 17일 오후, 미 제27연대장은 진목정-소이리 일대를 직접 답사하며 지형을 정찰하고 연대 전투지휘소를 삼학동에 설치했다. 이때 제11연대 장병들은 미군 연대장이 통신병 1명만 데리고 최전선에서 총탄이 교차하는 지점까지 가서 적정을 살피는 모습에 감격했다.
2. 2. 방어 진지 구축
1950년 8월 17일,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국군 제1사단의 위급한 상황을 인식하고 미 제25사단 제27연대(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를 증원했다. 8월 19일에는 1개 대대가 빠진 미 제2사단 제23연대(연대장 폴 프리먼 대령)를 제1사단 주저항선 바로 뒤에 배치했다.같은 날 육군본부에서도 제8사단 제10연대를 제1사단에 배속시켜 전투력을 강화했다. 당시 제1사단 정면에는 조선인민군 제3사단, 제13사단, 제15사단 등 3개 사단이 공격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증원 부대가 없었다면 다부동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특히 신주만에서 다부동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전차 14대를 보급받은 조선인민군 전차연대가 공격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미 제27연대는 제1사단에 배속되거나 작전통제된 것은 아니었지만, 미군이 한국군 사단 방어지역에 투입되어 작전한 첫 사례로 한미 연합작전의 시작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8월 17일 오후, 마이켈리스 대령은 진목정-소이리 일대를 직접 답사하고 연대 전투지휘소를 삼학동에 설치했다. 제11연대 장병들은 미군 연대장이 통신병 1명만 데리고 최전선에서 적정을 살피는 모습에 감격했다.
다음 날인 8월 18일 13시, 미 제27연대는 소이리 북쪽 400~500m까지 진출하여 5번 도로 좌측에 제1대대, 우측에 제2대대를 배치했다. 제3대대는 예비대로 우계산 466고지를 점령했다. 전차중대는 최전방 도로와 개울가에 2대씩, 후방에 예비로 4대를 배치하고, 3.5인치 로켓포 6문도 도로와 개울가에 사격 진지를 준비하여 대전차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국군 제1사단 11연대 제1대대는 미군에게 신주막-다부동 골짜기(복곡) 방어 진지를 인계하고 위봉 골재에서 북쪽으로 뻗은 400~500m 높이의 능선으로 이동했고, 제15연대 제2대대는 가산의 356고지를 지키고 있었다.
3. 전투 경과
=== 전초전 ===
1950년 8월 18일 저녁, 북한군은 전차 5대를 앞세워 다부동으로 가는 길목에 배치된 미군을 공격했다. 북한군 전차 2대가 미군 제27연대 F중대 방어 진지에 진입했을 때, 3.5인치 로켓포탄에 맞아 한 대가 파괴되었다. 나머지 전차 승무원들은 전차를 버리고 도주했고, 뒤따르던 전차 3대도 미군 포병 사격에 후퇴했다. 2시간 뒤 북한군은 재공격했지만, 미군 집중 사격에 격퇴되었다.
같은 날 새벽, 가산에서 침투한 북한군의 박격포탄이 대구역 부근에 떨어져 대구 시민들이 동요했다. 정부는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내려졌으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경찰과 함께 피난령을 취소하고 민심을 수습했다.
8월 19일은 큰 전투 없이 지나갔고, 8월 20일 낮에는 유엔 공군의 대규모 폭격이 있었다. 그러나 전방항공통제관이 제11연대 예하 대대에는 파견되지 않아 674고지에 있던 아군이 오폭 피해를 입었다. 448고지 일대의 제11연대 제1대대도 진목정으로 철수했다가 저녁에 고지로 복귀했다.
8월 20일 17시경, 북한군 포탄이 다부동 길목에 떨어졌고, 전차와 보병이 은밀히 접근했다. 미군은 북한군이 지뢰밭에 도착해 지뢰를 제거하자 집중 사격으로 격퇴했다. 밤 2시에서 3시 사이,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50미터 앞까지 접근하자, 아군은 기습 사격과 수류탄으로 큰 피해를 입혔다.
=== 볼링장 전투 (Bowling Alley) ===
1950년 8월 21일 밤, 다부동 천평 계곡에서 한국 전쟁 최초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미 제27연대 정면에 야간 역습을 감행했다. 미군은 모든 화력을 집중해 북한군 보병과 전차를 분리했고, 미군 전차는 약 200미터 거리에서 전차포를 발사해 적 전차 1대를 파괴했다. 다른 적 전차 1대는 대전차호에 빠졌다. 좁은 골짜기에서 벌어진 5시간 동안의 전투에서, 양측 전차포에서 발사된 철갑탄은 불꽃을 튀기며 밤하늘을 수놓았다. F중대 장병들은 이 광경을 보고 '볼링앨리(Bowling Alley) 전투'라고 명명했다. 다음날 미군 정찰대는 파괴된 북한군 전차 9대, 자주포 4문, 차량 여러 대와 1,300여 구의 시체를 확인하고 11명을 포로로 잡았다.
3. 1. 전초전
1950년 8월 18일 저녁, 북한군은 전차 5대를 앞세워 보병과 함께 공격해왔다. 북한군은 다부동으로 가는 길에 미군이 배치된 것을 모르고 사격을 가하며 접근했다. 얼마 후, 북한군 전차 2대가 미군 제27연대 F중대의 방어 진지로 들어왔을 때, 그 중 한 대가 3.5인치 로켓포탄에 맞아 불길에 휩싸였다. 다른 전차의 승무원은 전차를 버리고 도망쳤다. 뒤따라오던 북한군 전차 3대도 미군의 강력한 포병 사격을 받고 물러났다. 2시간 뒤 북한군은 다시 공격했지만, 미군의 집중 사격에 막혀 격퇴되었다.8월 18일 새벽, 가산에서 침투한 북한군이 쏜 박격포탄이 대구역 근처에 떨어지면서 대구의 위기감이 커졌다. 이 공격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내려져 대구는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경찰과 함께 거리로 나가 피난령을 취소하고 민심을 겨우 수습하였다.
8월 19일은 큰 전투 없이 지나갔고, 8월 20일 낮에는 유엔 공군의 대규모 항공 폭격이 있었다. 그러나 전투기를 유도하는 전방항공통제관이 제11연대 예하 대대에는 파견되지 않아 674고지에 있던 아군이 오폭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448고지 일대에도 폭격이 가해져 이곳에 배치된 제11연대 제1대대가 진목정으로 철수했다가 이날 저녁에 다시 고지로 이동하였다.
8월 20일 17시경, 북한군의 포탄이 다부동으로 가는 길에 떨어졌고, 이어서 북한군 전차가 보병과 함께 은밀히 접근해왔다. 미군은 조용히 기다리다가 북한군이 지뢰밭에 도착하여 지뢰를 제거하자 집중 사격으로 이들을 격퇴했다. 이날 밤 2시에서 3시 사이,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접근해왔다. 아군은 그들을 50미터 앞까지 바싹 다가오도록 유인한 다음 기습 사격을 가하고 수류탄으로 많은 적을 죽거나 다치게 하여 물리쳤다.
3. 2. 볼링장 전투 (Bowling Alley)
1950년 8월 21일 밤, 다부동 천평 계곡에서 한국 전쟁 최초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미 제27연대 정면으로 대규모 야간 역습을 감행했다.미군은 가용한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북한군 보병과 전차를 분리시켰고, 미군 전차도 약 200미터 거리에서 전차포를 사격하여 적 전차 1대를 파괴했다. 또 다른 적 전차 1대는 진지 앞에 설치된 대전차호에 빠졌다. 이로써 개전 이래 처음으로 전차 대 전차의 사격전이 벌어졌다.
다부동 접근로의 좁은 골짜기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양측 전차포에서 발사된 철갑탄은 5시간 동안 불꽃을 튀기며 밤하늘을 수놓았고, 그 굉음은 산과 들을 진동시켰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F중대 장병들은 전차포의 포탄 덩어리가 교차되는 모습을 보고 볼링이 굴러가는 모양을 연상하여 이날 밤의 전차전을 '볼링앨리(Bowling Alley) 전투'라고 이름 붙였다.
다음날 미군 정찰대는 파괴된 북한군 전차 9대, 자주포 4문, 여러 대의 차량과 1,300여 구의 시체를 확인하고 11명을 포로로 잡았다.
4. 결과
천평 계곡 전투는 8월 18일부터 8월 25일까지 진행되었다. 이 전투에서 확인된 북한군의 손실은 T-34 전차 13대, SU-76 자주포 5대, 트럭 23대였다. 인민군 제13사단은 전투 중 3,000여 명이 사망, 부상, 또는 포로가 되는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재건을 위해 철수했다. 8월 12일부터 25일까지 북한군의 총사상자는 5,690명이었다.
반면, 미군의 손실은 매우 적었다. 이는 당시 다른 유엔군이 공세적 작전에서 북한군에 대해 비슷한 압박을 가할 때 큰 대가를 치르던 것과는 이례적인 결과였다. 미군 보병은 27연대에서 5명 사망, 54명 부상, 23연대에서 3명 사망, 16명 부상을 입어 총 8명이 사망하고 70명이 부상당했다. 한국군은 이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입어 약 2,300명의 군인(2,244명의 병사와 56명의 장교)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자원군들이 한국을 위해 싸우기 위해 주변 시골에서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에 이러한 손실은 심각하지 않았다.
5. 다부동 전투와 관련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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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대한민국 국군
(요약 및 참조할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이전 출력과 동일하게 '천평 계곡 전투' 문서의 '대한민국 국군' 섹션 내용을 빈칸으로 남겨둡니다.)5. 2. 미군
(이전 출력이 비어있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요약 정보가 제공되어야 '천평 계곡 전투' 문서의 '미군' 섹션 내용을 작성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수정 작업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5. 3. 북한군
(이전 출력이 비어있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요약 정보가 제공되어야 출력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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