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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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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항 전투는 1950년 8월 한국 전쟁 초기, 북한군과 유엔군 및 대한민국 국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북한군의 부산 교두보 점령 시도를 저지하기 위한 일련의 전투 중 하나로, 북한군은 포항을 점령하여 영일 비행장을 위협하고 경주로 진격하려 했다. 전투 과정에서 대한민국 육군과 학도병들이 헌신적으로 저항했고, 유엔군의 공중 지원과 해상 포격이 더해져 북한군의 보급망이 붕괴되었다. 결국 유엔군과 국군이 승리하여,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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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포항동 전투
부분전낙동강 방어선 전투
시기1950년 8월 5일 ~ 1950년 8월 20일
장소경상북도 포항시 영일군
결과유엔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유엔군
미국 (1912년)}}
[[대한민국
교전국 2북한
지휘관
지휘관 1더글러스 맥아더
월턴 워커
조지프 S. 브래들리
김재규
유원식
지휘관 2최용건
김책
마상철
최인두
오진우
병력 규모
병력 1약 58,000명
병력 2약 21,500명
피해 규모
피해 2약 3,800명 전사
181명 포로
관련 정보
한국군이 부산으로 진군하는 모습
한국군이 부산 전선으로 진군하는 모습
포항동 전투 지도
포항동 전투 지도

2. 배경

포항은 동해안 남부의 요충지로, 이곳을 점령하면 영일 비행장을 위협하고 경주로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곳이었다.[48]

1950년 7월 17일부터 대한민국 육군 제3사단(사단장: 이준식 준장)은 포항 북방의 영덕에서 조선인민군 제5사단(사단장: 김창덕 소장)과 전투를 벌였지만, 8월 8일 밤 국군은 영덕을 잃었고, 8월 11일에는 제3사단의 퇴로가 막혔다.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제3사단에 인민군을 저지하라고 명령했고, 미군 제2사단에 영일 비행장 경비를 지시했다.[49] 미군 제2사단 부사단장 브래들리(Joseph S. Bradley영어) 준장은 제9연대 제3대대를 중심으로 브래들리 지대를 편성하여 영일 비행장 방어를 맡았다.[49]

8월 초, 제3사단은 포항여자중학교에 후방 지휘소(사령관: 김재규 소령)를 설치했다.[48] 그러나 병력 부족으로 후방 지휘소에 병력을 배치할 여력이 없었다.[48] 8월 8일, 김석원 준장이 부임하는 길에 후방 지휘소에 들러 군수 참모 유원식 소령을 포항 지구 방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48] 당시 후방 지휘소 병력은 사령부 행정 요원, 군악대, 각지에서 피난 온 경찰 약 4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48] 무기는 학도병 360명이 올 예정으로 미군에게서 소총을 지급받았다.[48] 8월 9일, 학도병 360명 중 71명만이 무장 없이 도착하여, 이들에게 소총을 지급하고 지휘소 경호에 투입했다.[48]

8월 11일, 제766연대(연대장: 오진우 대좌)의 일부가 포항으로 진입하여, 새벽 4시경 포항 뒷산에서 신호탄과 함께 총성이 울렸다.[48][49] 학도병들은 즉시 사령부 외곽에 배치되어 인민군과 8시간 동안 교전하며 후방 지휘소의 철수와 군수 물자 운반을 엄호했고, 이 과정에서 47명이 전사했다.[49][50] 후방 지휘소는 군수품을 구룡포로 후송한 뒤, 형산교에서 후퇴하는 부대를 수용했다.[49]

포항은 인민군에게 점령당했고, 유엔 공군기와 함대는 포항 일대에 포격을 집중했다.[51] 워커 중장은 제9연대 1개 전차 소대를 영일 비행장에 파견하여 브래들리 지대를 증강했다.[51] 8월 13일, 미군 제40전투비행대대와 지원 부대는 지상군과 사전 협의 없이 일본으로 철수했다.[52]

8월 15일, 대한민국 육군본부는 민기식 대령의 민 지대에게 포항 탈환을 명령했다.[53] 8월 16일 형산강 남쪽에 진출하여 공격 준비를 한 민 지대는 다음날 피난민으로 위장한 정찰대 14명을 파견, 포항이 함포 사격과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고 인민군은 외곽으로 철수했음을 확인했다.[53] 8월 18일, 민 지대는 포항을 무혈 탈환하고 브래들리 지대의 전차 부대 지원을 받으며 인민군을 소탕, 포항 북쪽 2km까지 진출했다.[53] 민 지대는 포로 180명, 야포 및 박격포 53문, 기관총 160정, 소총 940정을 노획했다.[54]

8월 19일 밤, 민 지대는 제3사단과 교대하여 대구 북쪽으로 이동했다.[55] 제3사단은 흥해 평야에 공격을 시작, 8월 22일 천마산(93고지)을 탈환하여 흥해 평야를 조망하는 요지에 진출했다.[55] 잠시 소강상태 후, 8월 24일부터 제5사단이 공세를 시작하면서 포항 북방의 전선은 격화되었다.[55]

2. 1. 전쟁 발발과 UN군의 참전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1][2]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하고 대한민국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지상군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그러나 당시 미군의 극동 주둔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꾸준히 감소해 왔으며, 가장 가까운 병력은 연합군 점령하 일본에 사령부를 둔 미 제24보병사단이었다.[1][2]

한국 기차역에서 기차에서 가방을 내리는 군인들
스미스 특임대가 대한민국에 도착하다.


제24보병사단의 선발대는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북한군과 첫 교전을 벌였으나 크게 패배했다.[3] 이후 한 달 동안, 제24보병사단은 조치원 전투, 천안 전투, 평택 전투 등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남쪽으로 후퇴했다.[4][5] 대전 전투에서 최후의 저항을 했지만, 거의 전멸했고 7월 20일까지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데 그쳤다.[6] 그 무렵, 매일 새로운 UN 부대가 도착하면서 제8군의 전투 병력은 이 지역을 공격하는 북한군 병력과 거의 동등한 수준이 되었다.[7]

2. 2. 북한군의 진격과 한국군의 저항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국제 연합은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고, 미국은 지상군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그러나 미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극동 주둔군을 꾸준히 감축해왔기 때문에 초기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가장 가까운 병력은 연합군 점령하 일본에 주둔한 미 제24보병사단이었다.[1][2]

제24사단의 선발대는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크게 패했고,[3] 이후 한 달 동안 조치원 전투, 천안 전투, 평택 전투 등에서 연이어 패하며 남쪽으로 후퇴했다.[4][5] 대전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7월 20일까지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데 기여했다.[6]

육지 동남쪽 끝의 교두보 지도
1950년 8월 부산 교두보의 전술 지도. 포항 전투는 북한군과 한국군 사이의 북동쪽 전선에서 벌어졌다


미군이 서부 전선에서 고전하는 동안, 동부 전선에서는 북한군 제5사단과 제12사단이 빠르게 진격했다.[8] 89,000명의 북한군은 6개 제대로 남한을 공격하여 한국군을 압도했다. 한국군은 조직력과 장비 부족으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후퇴했다.[9]

대전이 함락된 후, 북한군은 부산 교두보를 포위하려 했다. 북한군 제4사단과 제6사단은 남쪽으로 진격하며 유엔군 좌익을 포위하려 했고,[12] 동시에 제5사단과 제12사단은 한국군을 압박했다.[11] 북한군은 우세한 병력과 장비를 바탕으로 유엔군을 격파하며 남진했다.[12] 7월 21일, 북한군 제2군단은 제12사단에 7월 26일까지 포항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13]

한국군은 영덕안동 전투에서 완강히 저항하며 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려 노력했다.[14][15] 이러한 저항으로 북한군 제12사단은 8월 초까지 포항 공격을 연기해야 했다. 한국군은 전력을 재편하고 신병을 충원하여 7월 26일까지 85,871명의 병력을 확보했다.[16]

2. 3. 동부 회랑의 지형적 특징

대한민국 방어선 전선, 즉 동부 회랑을 따라 지형은 이동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다. 주요 도로는 대구에서 동쪽으로 50마일(80 km) 떨어진 대한민국 동해안의 포항까지 뻗어 있었다. 이 선과 교차하는 유일한 주요 남북 도로는 안동에서 영천을 거쳐 대구와 포항 중간 지점까지 남쪽으로 뻗어 있었다.[17]

이 선을 통과하는 유일한 자연적인 입구는 포항에서 서쪽으로 12마일(19 km) 떨어진 안강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은 주요 철도 허브인 경주로 이어지는 자연적인 험준한 지형의 계곡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고, 경주는 대구로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집결지였다.[17] 미국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은 이 지역을 대대적으로 증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그는 지형 때문에 실질적인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수송로에서 오는 증원 병력과 포항 남쪽에 위치한 연일 비행장의 공중 지원을 통해 공격에 대응하는 것을 선호했다.[18]

대구와 포항 사이의 계곡을 제외하고, 이 선을 따라 지형은 대한민국 동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 있는 태백산맥 덕분에 극도로 험하고 산악 지형이었다. 포항 북동쪽의 대한민국 방어선 지형은 특히 험난하여 이 지역에서의 이동이 극도로 어려웠다. 따라서 유엔군은 자연 방어선으로 지형을 이용하여 부산 교두보의 북쪽 방어선을 구축했다.[19] 그러나 험준한 지형은 특히 대한민국군에게 통신을 어렵게 만들었다.[20]

3. 전투 전 상황

기계화된 합동 군사 부대인 조선인민군은 7월에 약 9만 명의 숙련된 정예 병력과 수백 대의 T-34 탱크를 보유하고 있었다.[28] 그러나 유엔군의 방어 작전으로 인해 조선인민군의 한국 침략이 지연되었고, 58,000명의 사상자와 다수의 탱크 파괴라는 손실을 입었다.[29] 이러한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북한군은 경험이 부족한 대체 병력과 징집병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들 중 다수는 한국의 점령 지역에서 징발된 사람들이었다.[30] 조선인민군은 병력과 장비 부족에 시달렸으며, 각 사단의 병력은 정족수에 훨씬 못 미쳤다.[25][31]

3. 1. UN군과 한국군의 전력

A large ship with a flight deck containing aircraft at sea
항공모함 는 한국 전쟁 중에 있었다.


대한민국 육군은 58,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21] 두 개의 군단과 5개의 사단으로 나뉘어 전선에 배치되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제1군단은 제8보병사단과 수도사단을 통제했고, 제2군단제1사단제6사단을 통제했다. 재편성된 제3사단은 대한민국 육군 직할로 배치되었다.[19][22] UN 부대의 사기는 전쟁 당시 수많은 패배로 인해 저조했다.[2][23] 대한민국 육군은 그 시점까지 약 7만 명의 병력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24][25]

동시에 미 제5공군의 병력은 45대의 P-51 무스탕 전투기를 투입하여 연일 비행장에서 지원을 제공했고, 미 해군은 여러 척의 함선을 동원하여 해상 지원을 제공했다.[26] 부상병과 포위된 병력의 후송은 항공모함 와 에 의해 수행되었다. 중순양함 와 또한 시가지에서 작전 중인 병력에게 화력 지원을 제공했다.[27]

3. 2. 북한군의 전력

조선인민군은 10개의 사단으로 구성되었고, 초기에는 약 9만 명의 정예 병력과 수백 대의 T-34 탱크를 보유하고 있었다.[28] 그러나 유엔군의 방어 작전으로 인해 58,000명의 사상자와 다수의 탱크 손실을 입었다.[29] 이러한 손실을 메우기 위해 북한은 경험이 부족한 대체 병력과 징집병에 의존해야 했으며, 이들 중 다수는 한국의 점령 지역에서 징발된 사람들이었다.[30]

조선인민군은 병력과 장비 부족에 시달렸으며, 각 사단의 병력은 정족수에 훨씬 못 미쳤다.[25][31] 대한민국 육군에 맞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제8사단, 제12사단, 제5사단, 그리고 제766독립보병연대가 배치되었다.[20] 8월 5일, 이들 부대의 총 병력은 최소 21,500명으로 추정되었다.[31]

부대병력 (8월 5일 기준)
제8사단8,000명
제12사단6,000명
제5사단6,000명
제766독립보병연대1,500명


4. 전투 경과

8월 초, 조선인민군 3개 사단은 대한민국 국군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3개 지점에서 공세를 시작했다. 제8사단은 영천을, 제12사단은 포항을, 제5사단은 제766독립보병연대와 함께 기계안강리를 공격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훈련과 장비 부족으로 부산 교두보 방어선에서 가장 취약했기 때문에, 북한군은 이 점을 노려 공격을 집중했다.[32]

남쪽으로 진격하는 적군 대열을 통과하는 세 개의 대규모 부대 진격도
북한군은 1950년 8월 10일 유엔군 방어선으로 진격했다.

4. 1. 북한군의 공세

8월 초, 조선인민군 3개 사단은 대한민국 국군 방어선을 통과하는 3개의 고개를 공격했다. 제8사단은 영천을, 제12사단은 포항을, 제5사단은 제766독립보병연대와 함께 기계안강리(포항 북쪽 6km)를 공격했다.[17]

제8사단은 의성에서 영천으로 진격했지만, 대한민국 제8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큰 피해를 입고 진격이 저지되었다. 제3연대는 거의 전멸당했고, 제2연대는 이를 구출하려다 최소 7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또한 최소 6대의 전차가 미 공군의 F-51 무스탕과 지뢰에 의해 파괴되었다.[33] 제8사단은 증원군을 기다리기 위해 두 번이나 멈춰야 했다.[33]

반면, 제12사단은 안동에서 낙동강을 건너 포항 방면으로 진격했다. 병력이 크게 부족했고, 최소 한 포병대는 포탄이 없어 대포를 북쪽으로 돌려보내야 할 정도였다.[33]

제5사단과 제766독립연대는 영덕을 놓고 대한민국 제3사단과 치열하게 교전했다. 8월 5일, 조선인민군은 영덕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진격했다. 미군의 항공기와 함선의 지원을 받은 대한민국군은 영덕을 탈환했지만, 제5사단은 흥해에서 영덕 남쪽 해안 도로에 침투하여 제3사단을 포위하고 포항 위쪽 몇 마일 지점에 가두었다.[35] 제766독립연대는 제3사단을 우회하여 포항 주변 지역을 점령했다.[39]

4. 2. 포항여중 전투 (8월 11일)

8월 11일, 심각한 병력 부족으로 인해 대한민국 사령관은 조선인민군의 시내 진격을 늦추기 위해 학도병으로 구성된 중대를 포항여자중학교에 배치하여 방어하도록 했다. 이들은 진지를 사수하며 조선인민군과 대치했다. 11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71명의 학도병 중 48명이 전사했다.[36] 이 전투는 영화 ''71: 포화 속으로''에 묘사되어 있다.[36]

4. 3. UN군의 반격

8월 10일, 제8군대한민국 육군 제17, 25, 26연대, 제1대 게릴라 대대, 해병대 대대, 그리고 미 제18 야전 포병대대 1개 포대로 구성된 ''포항 기동부대''를 편성했다.[37] 이 부대는 산악 지역의 조선인민군(KPA) 부대를 소탕하는 임무를 맡았다.[37] 동시에 제8군은 조지프 S. 브래들리 준장 지휘 하에 제8 보병 연대와 제2 보병 사단의 일부로 구성된 ''브래들리 기동부대''를 편성했다.[38] ''브래들리 기동부대''는 제766 독립 연대로부터 포항을 방어하는 임무를 받았다.[39]

8월 11일, ''브래들리 기동부대''는 연일 비행장에서 출격하여 포항 주변의 조선인민군을 반격했고, ''포항 기동부대''는 안강리 지역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두 부대는 즉시 조선인민군 부대의 저항에 직면했다. 그 무렵 조선인민군은 포항을 점령했다.[40] 이후 미국 공군의 지원을 받은 대한민국 육군 부대가 주변에서 작전하는 조선인민군 부대와 교전하면서 포항과 안강리 주변의 넓은 지역에서 복잡한 전투가 벌어졌다.[40]

조선인민군 제12사단은 포항 서쪽 계곡에서 작전하며 ''포항 기동부대''와 대한민국 육군 수도사단을 밀어냈다. 동시에 조선인민군 제766 보병 연대와 조선인민군 제5사단의 일부는 포항과 그 남쪽에서 ''브래들리 기동부대''와 교전했다. 미국 해군의 함포 사격으로 조선인민군 병력을 마을에서 몰아낼 수 있었지만, 전투가 마을 주변의 언덕으로 이동하면서 치열한 무인지대가 되었다.[40]

4. 4. UN군의 후퇴와 재정비

8월 13일, 미 공군은 연일 비행장에 있던 P-51 45대를 일본 규슈 섬의 쓰이키로 대피시켰다.[41][42][43] 이는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으나, 비행장은 유엔군 지상군의 보호를 받고 있어 직접적인 공격은 없었다.[41]

대한민국 육군 제3사단은 조선인민군 제5사단의 계속되는 압박으로 방어선이 무너져 장사동으로 후퇴했다.[27][43] 8월 16일 밤, 미 해군은 LSTDUKW를 동원해 제3사단을 해상으로 철수시키는 작전을 지원했다.[27][43] 이 작전에는 제3사단 병력 9,000명, 국립 경찰 1,200명, 노동자 1,000명이 참여했다.[26] 철수한 제3사단은 연일만에서 다른 유엔군과 합류하여 조선인민군 격퇴를 위한 합동 공격을 준비할 예정이었다.[26][42]

4. 5. 북한군의 패배

8월 14일까지 조선인민군 제5사단과 제12사단, 그리고 제766독립연대는 포항동 점령에 집중했지만, 미국의 제공권 장악과 해상 포격으로 인해 실패했다.[26] 더욱이 보급망 붕괴로 식량, 탄약, 기타 보급품 조달이 불가능해졌다. 포로로 잡힌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8월 12일 이후 식량을 전혀 공급받지 못해 전투 불능 상태였다고 진술했다.[2][44]

유엔군은 8월 15일, 마지막 반격 작전을 시작했다. 포항동 주변에서 며칠 동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양측 모두 큰 피해를 보았다.[45] 8월 17일, 유엔군은 경주 회랑과 안강리에서 조선인민군을 몰아내고 대구로 가는 보급로의 위협을 제거했다. 병력이 1,500명으로 줄어든 조선인민군 제766독립연대는 포위를 피하기 위해 북쪽으로 철수해야 했다.

조선인민군 제12사단 역시 병력이 1,500명으로 감소한 후, 큰 피해를 보고 포항동에서 철수했다.[27] 이 두 부대는 합쳐져 보충병을 받았고, 제12사단은 5,000명으로 재편성되었다. 8월 19일, 조선인민군은 완전히 후퇴했다.[42][43] 대한민국 육군 수도사단 병력은 기계 북쪽 약 3.22km까지 진격했으며, 대한민국 육군 제3사단은 포항동을 탈환하고 다음 날 포항동 북쪽으로 진격했다.[46] 국군 방어선은 수 마일 후퇴했지만, 조선인민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43]

5. 결과 및 영향

미국의 제공권 장악과 해상 포격으로 인해 조선인민군 제5사단, 제12사단, 제766독립연대는 포항동 점령에 실패했다.[26] 특히, 이들의 보급망은 완전히 붕괴되어 식량, 탄약, 기타 보급품을 구할 수 없었다.[2][44] 포로로 잡힌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8월 12일 이후 식량 공급을 받지 못해 전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쳤다고 진술했다.[2][44]

8월 15일, 유엔군은 마지막 반격 작전을 시작했다. 며칠 동안 포항동 주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45] 8월 17일까지 유엔군은 조선인민군을 경주 회랑과 안강리에서 몰아내어 대구로 가는 보급로의 직접적인 위험을 제거했다. 조선인민군 제766독립연대(병력 1,500명으로 감소)는 포위를 피하기 위해 북쪽으로 철수했다. 병력이 1,500명으로 줄어든 조선인민군 제12사단도 큰 피해를 입고 포항동에서 철수했다.[27] 이 두 부대는 합쳐져 보충병을 받았고, 제12사단은 5,000명으로 재편성되었다. 8월 19일까지 조선인민군은 완전히 후퇴했다.[42][43] 대한민국 육군 수도사단은 기계 북쪽 약 3.22km까지 진격했고, 제3사단은 포항동을 탈환하고 다음 날 포항동 북쪽으로 진격했다.[46]

포항동 전투는 조선인민군의 보급선 붕괴와 미국의 제공권 장악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전투의 흐름을 바꾸었다.[43][44]

조선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 부대 모두 열악한 조직력으로 인해 양측의 총 사상자 수를 추정하기는 어렵다.[31] 대한민국 국군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8월 17일 이후 포항 지역에서 조선인민군 3,800명이 사망하고 181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44] 그러나 실제 사상자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민군 제12사단만 해도 8월 5일 6,000명[31]에서 8월 17일 1,500명으로 보고된 것을 감안하면, 최소 4,5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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