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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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부동 전투는 1950년 8월, 한국 전쟁 중 대구 함락을 목표로 북한군이 대규모 공세를 펼치자,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다부동 일대에서 25일간 방어전을 펼친 전투이다.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으며, 북한군의 전력 소모와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에 기여했다. 이 전투는 국군에게 낙동강 전선 사수의 자신감을 심어주었으며, 이후 전개된 반격 작전의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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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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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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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950년 9월 1일 - 15일 |
장소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 |
좌표 | 36.047433 |
결과 | 국제 연합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유엔군 | |
지휘관 | |
유엔군 | 호바트 R. 게이 백선엽 김점곤 |
조선인민군 | 이 용호 |
부대 | |
유엔군 | 미국 1 기병 사단 대한민국 1 보병 사단 |
조선인민군 | 조선인민군 3 사단 |
병력 규모 | |
유엔군 | 14,703명 |
조선인민군 | 7,000명 |
사상자 규모 | |
유엔군 | 전사: 600명 부상: 2,000명 |
조선인민군 | 전사, 포로, 탈영: 5,000명 |
2. 배경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북한은 우세한 전력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국군을 연파하고 3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 이후에도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오산 전투에서 미군마저 격파하고 대전, 목포, 진주, 김천, 포항 등을 차례로 점령했다.[1]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교착 상태에 빠졌다. 8월 3일, 유엔군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북한군은 부산과 대구를 점령하기 위해 총공세를 펼쳤다. 특히 대구에는 5개 사단을 투입하여 대구를 점령하려 했다. 8월 말, 미군 제1기병사단은 한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준장)으로부터 방어선을 인계받았다. 제1기병사단은 서쪽부터 제5기병연대, 제7기병연대, 제8기병연대를 배치했으며, 각 연대는 3개 대대로 증강되어 전력이 강화되었다.[48][49]
인민군은 8월 20일, 현풍에서 왜관에 이르는 낙동강 동안을 견제함과 동시에, 서쪽과 북쪽에서 공격하여 대구, 영천 구역에서 유엔군을 포위 섬멸하는 제5차 작전을 준비했다.[50] 제1기병사단의 담당 정면에서는 인민군 제2군단의 제1사단, 제3사단, 제13사단, 제17기갑여단으로 구성된 제3공격집단이 다부동 – 효령 정면을 돌파하여 대구를 점령할 계획이었다.[51]
부대 | 지휘관 | 비고 |
---|---|---|
제2군단 | 무정 중장 | |
제1사단 | 최광 소장 | |
제3사단 | 리영호 소장 | |
제13사단 | 최용진 소장 | |
제17기갑여단 |
2. 1. 북한군의 전략
북한군조선인민군한국어은 남쪽으로 향하는 모든 길에서 유엔군을 공격하고, 정면 공격과 함께 양 측면을 이중 포위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 전술은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8월에 유엔군이 부산 교두보를 구축하면서 더 이상 측면 공격이 어려워졌다.[4] 또한, 유엔군의 뛰어난 군수 체계로 인해 북한군의 수적 우위도 점차 감소했다.[4]8월 5일, 북한군은 부산 교두보로 들어가는 네 개의 주요 접근로에서 정면 공격을 시도했다. 8월 내내 북한군 제6사단과 제7사단은 마산 전투에서 미군 제25보병사단과 교전했고, 고마암 전투[5]와 배틀 마운틴 전투에서 반격했다.[6] 북쪽에서는 북한군 제4사단과 미군 제24보병사단이 낙동강 방어선 지역에서 격돌, 낙동강 돌출부 전투에서 북한군 사단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8][9] 대구 지역에서는 다섯 개의 북한군 사단이 대구 전투에서 유엔군에 의해 격퇴되었고,[10][11] 특히 볼링 앨리 전투에서 북한군 제13사단이 큰 타격을 입었다.[12] 동해안에서는 북한군 세 개 사단이 포항 전투에서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포항동에서 격퇴되었다.[13]
북한군 사령부는 유엔군의 해군 지원으로 인해 측면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12] 전선을 돌파하는 정면 공격을 선택했다.[4] 소련의 정보를 통해 북한군은 유엔군이 부산 교두보를 강화하고 곧 공세를 펼칠 것을 알게 되었고,[15] 대구를 포위하여 유엔군을 파괴하고 대구로 가는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을 부차적인 목표로 설정했다.[16][17]
8월 20일, 북한군은 예하 부대에 작전 명령을 하달,[15] 유엔군 전선에 대한 5개 방향 동시 공격을 계획했다.[18] 이 중 중앙 공격은 북한군 제3사단, 제13사단, 제1사단이 미군 제1기병사단과 대한민국 제1사단을 돌파하여 대구로 진격하는 것이었다.[19]
2. 2. 낙동강 방어선

한국 전쟁 초기,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에 비해 병력과 장비 면에서 우세했다.[1] 이들은 정면 공격과 함께 양 측면을 이중 포위하는 전략으로 유엔군을 압박했다.[2] 초기에는 이 전략이 효과를 발휘했지만,[3] 8월에 부산 교두보가 구축되면서 유엔군은 방어선을 형성했고, 조선인민군의 측면 공격은 어려워졌다. 또한, 유엔군의 우수한 군수 체계로 인해 조선인민군의 수적 우위는 점차 약화되었다.[4]
8월 5일, 조선인민군은 부산 교두보로 진입하는 네 곳에서 정면 공격을 시도했다. 마산 전투에서는 조선인민군 제6사단과 제7사단이 미 제25보병사단과 교전하여 고마암 전투[5]와 배틀 마운틴 전투에서 격전을 벌였다.[6] 그러나 유엔군의 반격으로 공격은 둔화되었다.[7]
낙동강 방어선 지역에서는 조선인민군 제4사단과 미 제24보병사단이 낙동강 돌출부 전투를 벌였다. 조선인민군 제4사단은 교두보 확보에 실패하고 8월 19일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8][9]
대구 지역에서는 조선인민군 5개 사단이 대구 전투에서 유엔군 3개 사단에 의해 격퇴되었다.[10][11] 특히 볼링 앨리 전투에서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은 큰 타격을 입었다.[12] 동해안에서는 조선인민군 3개 사단이 포항 전투에서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포항동에서 저지되었다.[13] 이처럼 조선인민군은 전반적으로 패배를 겪으며 전략이 한계에 부딪혔다.[14]
북한군 사령부는 소련의 정보를 통해 유엔군이 부산 교두보를 강화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전면 공격을 통해 전선을 돌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15] 부차적인 목표는 대구를 포위하여 유엔군을 격멸하고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이었다.[16][17]
8월 20일, 북한군 사령부는 5개 방향에서 동시 공격을 개시하는 작전 명령을 하달했다.[15][18] 이 중 중앙 공격은 조선인민군 제3사단, 제13사단, 제1사단이 미 제1기병사단과 대한민국 제1사단을 돌파하여 대구로 진격하는 것이었다.[19]
조선인민군 제2군단 4개 사단은 포항동, 경주, 영천 지역으로 남진하고, 나머지 3개 사단(제3, 제13, 제1사단)은 왜관과 상주-대구 도로를 따라 대구 북쪽과 북서쪽을 공격하는 계획이었다.[20][21]
대구를 방어하는 미 제1기병사단은 약 56km의 방어선을 담당했다. 사단장 호바트 R. 게이 소장은 주요 진입로에 초소를 설치하고 3개 연대를 집중 배치했다.[20] 미 제5기병연대는 왜관 부근 낙동강과 서울-대구 고속도로를, 미 제7기병연대는 고속도로와 상주 도로 사이의 산악 지역을, 미 제8기병연대는 상주 도로와 인접한 언덕을 방어했다.[21]
부대 | 지휘관 | 비고 |
---|---|---|
제2군단 | 무정 중장 | |
제1사단 | 최광 소장 | |
제3사단 | 리영호 소장 | |
제13사단 | 최용진 소장 | |
제17기갑여단 |
북한은 1950년 8월, 임시 수도 부산과 대구로 통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대구 공격에 5개 사단을 투입했다. 이에 맞서 국군은 왜관에서 낙성리까지 제1사단, 낙성리에서 의성까지 제6사단, 현풍에서 왜관까지 미 제1기병사단 등 3개 사단을 배치했다.[12] 북한군의 주 공격 축선은 대구 북방의 1사단 정면으로, 북한군 제13사단, 제15사단, 제105전차사단, 그리고 제1사단 일부가 공격해왔다.
3. 전투 전개
제1사단은 8월 1일 미군 제25사단으로부터 책임 구역을 이어받아 9일 동안 낙동강 연안에서 전투를 벌였다.[12] 8월 11일, 육군은 왜관 북방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으로 이동하여 북한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은 8월 12일 야간에 새로운 다부동 전선으로 이동했다.
북한군 사령부는 소련의 정보를 통해 유엔군이 부산 교두보를 따라 전력을 증강하고 있으며, 곧 공세를 펼쳐야만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5] 북한군은 대구를 포위하여 유엔군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16][17] 8월 20일, 북한군은 유엔군 전선에 대한 5개 방향의 동시 공격을 계획했고, 중앙 공격은 북한군 제3사단, 제13사단, 그리고 제1사단이 미 제1기병사단과 대한민국 제1사단을 돌파하여 대구로 진격하는 것이었다.[19]
조선인민군 제2군단 4개 사단이 포항동, 경주 및 영천 지역으로 남쪽으로 공격하는 동안, 군단의 나머지 3개 사단은 북쪽과 북서쪽에서 대구를 향해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20] 조선인민군 제3사단은 대구 북서쪽 왜관 지역을, 제13사단은 상주-대구 도로를 따라 대구 북쪽 산등성이를, 제1사단은 도로 바로 동쪽에 있는 높은 산등성이를 따라 공격할 예정이었다.[21]
대구를 방어하는 미 제1기병사단은 약 약 56.33km의 전선을 담당했다. 사단장 호바트 R. 게이(소장)은 자신의 구역으로 들어오는 주요 진입로에 초소를 설치하고, 3개 연대를 초소 뒤에 집중시켰다.[20] 9월 5일 영국 제27연대가 한국 전쟁에 처음 투입되어 제1기병사단에 배속되었다. 미 제5기병연대는 왜관 부근 낙동강 및 대구까지 이어지는 주요 서울 고속도로를, 미 제7기병연대는 고속도로와 상주 도로에 접한 언덕 사이의 산악 지역을, 제8기병연대는 그 도로와 인접한 언덕에 위치했다.[21]
미국 육군 제8군 사령관 중장 월턴 워커는 9월 1일, 제1 기병사단에게 북쪽으로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22] 게이 사단장은 518고지(수암산)를 공격할 것을 결정했는데, 이 고지는 북한군의 집결지로 여겨졌다. 제1 기병사단은 7기병대 구역에서 공격을 준비했으며, 8기병대 제3대대 2개 중대가 7기병대 우측 측면을 공격하는 기만 작전을 펼쳤다.[21]
북한군 제13사단 제19연대 소령 김성준의 귀순으로 북한군의 공격 계획이 알려지자, 게이 사단장과 백선엽 준장은 모든 최전선 부대에 공격에 대비할 것을 경고했다.[21]
9월 2일, 미군은 518고지와 346고지에 공습과 포격을 가한 후, 7기병대 제1대대가 518고지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24] 이후 9월 4일까지 계속된 공격에도 518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26] 9월 4일, 제5기병연대는 303고지를 점령했지만, 반격을 막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6] 9월 5일, 제7기병연대는 518고지 점령을 포기하고 철수했다.[26] 결국, 제1기병사단은 전선을 단축하고 더 나은 방어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철수를 결정했다.[22]
1950년 8월 말, 미 제1기병사단은 한국군 제1사단으로부터 방어선을 인계받아 제5기병연대, 제7기병연대, 제8기병연대를 배치했다. 8월 26일, 각 연대는 3개 대대의 완전 편성을 갖추었고, 포병 증강으로 전력이 1.5배 강화되었다.[49]
인민군은 8월 20일, 대구, 영천 구역에서 유엔군을 포위 섬멸하는 제5차 작전을 준비했다.[50] 제1기병사단 정면에서는 인민군 제2군단의 제1사단, 제3사단, 제13사단, 제17기갑여단으로 구성된 제3공격집단이 다부동 – 효령(효령) 정면을 돌파하여 대구를 점령할 계획이었다.[51]
3. 1. 왜관 폭격
1950년 8월 16일 11시 58분부터 12시 24분까지 유엔군 사령관의 명령으로 B-29 폭격기 98대가 왜관 서북쪽 낙동강변 일대 5.6 × 12 km 지역에 960ton의 폭탄을 투하하였다.[1]
그러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8월 16일에는 가산으로 침투하려는 북한군이 741고지에서 다부동 바로 서측 466고지를 공격해옴으로써 국군 제1사단은 돌파되느냐 고수하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1]
3. 2. 국군 제1사단의 위기
북한군 제13사단, 제15사단, 제105전차사단, 그리고 제1사단 일부가 대구 북방의 국군 제1사단 정면을 공격하여, 국군 제1사단은 돌파 위기에 놓였다.[27] 8월 16일, 북한군이 가산으로 침투하여 741고지에서 다부동 서측 466고지를 공격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29]
이에 미 제8군은 8월 17일, 미 제25사단 제27연대를 다부동에 투입하여 국군 제1사단을 지원했다.[29] 8월 18일 새벽, 가산에서 침투한 북한군의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면서 대구의 위기가 고조되었고,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내려지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30] 그러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직접 나서 피난령을 취소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질서를 회복했다.[30]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군 제1사단은 8월 18일 미 제27연대와 함께 적진돌파작전을 전개했다.[30] 미 제27연대는 다부동-돌머리 축선에서 전차중대를 도로상에, 보병 2개 대대를 그 좌우 낮은 능선에 배치하여 공격을 주도했고, 국군 제1사단은 좌우 고지에서 미군과 협력하여 공격했다.
3. 3. 북한군의 공격력 약화
8월 20일 이후, 북한군은 다부동 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주력 부대인 제15사단을 의성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이로 인해 수암산 일대에는 제3사단 일부, 유학산 우측면에는 제13사단이 담당하게 되어 공격력이 크게 약화되었다.[30]
이는 국군 제1사단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여, 8월 21일부터 전황이 점차 호전되기 시작했다. 같은 날 밤, 다부동 계곡에서는 한국 전쟁 최초로 전차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제11연대와 미 제27연대를 공격했다. 미 제27연대는 가용한 모든 포를 집중하여 적 전차와 보병을 분리하고, 아군 전차를 투입하여 대응했다. 5시간 동안 이어진 전차전에서 양측은 철갑탄을 주고받으며 격렬하게 싸웠다. 미 제27연대 장병들은 이 전투를 "볼링장(Bowling Alley) 전투"라고 불렀다.[30]
3. 4. 국군의 반격과 탈환
8월 21일 오전에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의 정봉욱 중좌가 국군 제11연대 지역으로 작전지도를 가지고 귀순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인민군의 전투 의지는 크게 떨어졌다. 정봉욱 중좌의 진술을 바탕으로 유엔 전폭기 편대가 대거 출격하여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의 포진지와 집결지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122mm 곡사포 7문과 76mm 곡사포 13문 등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의 화력 지원이 무력화되었다.[31]
국군 제12연대는 8차례의 공격 끝에 이날 밤 최초로 야간 기습을 시도하여 유학산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국군 제1사단은 주 저항선을 안정시키고 작전의 주도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군 제27연대는 증원 임무에서 해제되어 마산의 원래 부대로 복귀하였다.
조선인민군은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어 거의 접촉을 단절하였다.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은 유학산에서만 1,500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했고, 총 3,000명의 손실을 입었다. 8월 26일부터 국군 제1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방어 진지를 미군에게 인계할 준비를 하면서 수색 정찰을 강화하였다.
8월 28일에는 수암산을 빼앗긴 지 10일 만에 다시 되찾았다. 결국 국군 제1사단은 8월 12일에 점령했어야 할 방어선을 16일이나 지나서야 점령하게 된 것이다. 국군 제1사단은 방어선에서 가장 중요한 지형인 유학산을 조선인민군에게 먼저 빼앗겨 그동안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다부동 전선을 방어해야 했다.
4. 주요 전투
B-29 폭격기 98대가 1950년 8월 16일 11시 58분부터 12시 24분까지 왜관 서북쪽 낙동강변 일대 5.6×12 km 지역에 960t의 폭탄을 투하하는 왜관 전면 융단폭격작전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가산으로 침투하여 741고지에서 다부동 서측 466고지를 공격했다.
8월 17일, 미 제8군은 미 제25사단 제27연대를 다부동에 투입하여 국군 제1사단을 지원했다. 8월 18일 새벽, 가산에서 침투한 북한군의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자 정부는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내려졌으나, 조병옥 내무부 장관이 민심을 수습하여 질서를 회복했다.
8월 21일 야간에는 다부동 계곡에서 한국 전쟁 최초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미 제27연대는 가용포를 총집중하고 아군 전차를 동원하여 북한군의 야간 역습에 대응했다. 이 전투는 "볼링 앨리(Bowling Alley)" 전투라고 불렸다.[20]
이외에도 303 고지 전투, 518 고지 전투, 가산산성 전투 등이 다부동 전투의 주요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4. 1. 다부동 전투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의 핵심 지역인 다부동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를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막아냈다. 25일간의 교전 끝에 북한군의 8월 공세를 저지하고 대구 방어에 성공했다.[19]1950년 8월, 북한은 임시 수도 부산과 대구로 통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대구 공격에 5개 사단을 투입했다. 이에 국군은 왜관에서 낙성리까지 국군 제1사단, 낙성리에서 의성까지 제6사단, 현풍에서 왜관까지 미 제1기병사단 등 3개 사단을 배치했다.[20] 그중 주공축선은 북한군 제13사단, 제15사단, 제105전차사단, 그리고 1사단 일부가 공격한 대구 북방의 1사단 정면이었다.
제1사단은 8월 1일 미군 제25사단으로부터 책임 구역을 이어받아 9일 동안 낙동강 연안에서 전투를 벌여 6867명을 사살하고 각종 포 23문과 탱크 10대를 파괴했다. 8월 11일, 육군은 왜관 북방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으로 이동하여 북한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은 강변 전투를 종결하고 8월 12일 야간에 새로운 다부동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고 계획된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해 국군 제1사단은 8월 18일에 지원된 미 제27연대와 협동으로 적진돌파작전을 전개하였다. 미 제27연대는 다부동-돌머리 축선에서 전차중대를 도로상에, 보병 2개 대대를 그 좌우 낮은 능선에 전개하여 보전협동으로 공격을 주도하고, 그 좌우 고지에서는 제1사단이 미군 부대와 협조된 공격을 실시하였다.
국군 제1사단 정면의 적도 전차를 새로이 보충받아 보·전협동으로 전면적인 야간공격을 개시함으로써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제27연대는 천평 전방에서 3.5 로켓포로 적 전차 2대를 파괴하였으나 적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적은 도로상의 지뢰로 인해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제15연대는 328고지에서 적과 수차례의 수류탄 공방전을 전개하면서 쟁탈전을 거듭하였고, 제12연대는 쌍방 간에 많은 손실을 낸 채 8월 19일 수암산을 재차 피탈당하고 유학산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반복하였으나 대체로 적의 돌파 확대를 저지하고 있었다.
이날 제8군 명령에 따라 미 제2사단 제23연대를 후방인 두전동에 배치하여 방어 종심을 증가시켰다. 육군본부에서도 제8사단 제10연대를 제1사단에 배속시켜 가산 일대에 배치하였다. 이와 같이 다부동의 전황은 국군 1개 연대와 미군 2개 연대가 지원될 만큼 위급하였다.

8월 21일 오전, 북한 제13사단의 정봉욱 중좌가 제11연대 지역으로 작전지도를 갖고 귀순함으로써 적의 전투 의지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그의 진술에 따라 유엔 전폭기 편대가 대거 출격하여 122mm 곡사포 7문과 76mm 곡사포 13문이 은폐되어 있는 적의 포진지와 집결지를 강타함으로써 적 제13사단의 화력 지원을 무력화시켰다.
제12연대는 그동안 8차례의 공격 끝에 이날 밤 최초로 야간 기습을 시도하여 마침내 유학산 탈환에 성공하였다. 제1사단은 마침내 주 저항선을 안정시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 제27연대는 증원 임무에서 해제되어 마산의 모체 부대로 복귀하였다.
적은 전투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거의 접촉을 단절하였으며, 북한 인민군 제13사단은 유학산에서만 1,500명이 전사상되고 총 3,000명의 손실을 입고 있었다. 8월 26일부터 제1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방어 진지를 미군에게 인계할 준비를 갖추면서 수색 정찰을 강화하였다. 8월 28일에는 수암산을 피탈 10일 만에 탈환하였다. 결국 제1사단은 8월 12일에 점령하게 되어 있던 방어선을 16일 후에야 점령한 결과가 되었다. 제1사단은 방어선상의 가장 중요한 지형인 유학산을 적에게 선점당하여 그간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다부동 전선을 방어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제1사단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하여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 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여 북한군의 8월 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신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제1기병사단은 영산을 방어하는 미국 제2사단의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9월 2일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오전 11시, 중앙의 제7기병연대가 수암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잠시 후 제13사단 제19연대 작전 주임 김성준 소령이 제8기병연대에 투항하여, 같은 날 저녁에 총공격이 시작된다는 정보를 가져왔다.[52]
같은 날 밤, 인민군은 공격을 시작했다.[52] 제3사단의 일부는 제5기병연대 제2대대를 격파하고 303고지를 점령했으며, 주력은 제7기병연대의 좌측 배후에 해당하는 464고지를 점령했다.[53] 제13사단은 제8기병연대 제2대대를 격파하고 448고지를 점령했다.[53] 제1사단은 대한민국 육군 제11연대 제2대대(대대장: 차갑준 소령)가 배치된 558고지의 서쪽을 우회하여, 가산 산성을 방어 중인 제8기병연대 수색소대와 칠곡 경찰대를 격퇴하고, 다음 날 다부동으로 진출했다.[54]
제1기병사단은 각 연대에 반격을 명령했지만, 인민군의 완강한 저항과 후방 침투 때문에 반격은 진전되지 못하고, 반대로 부대가 각지에서 고립되었다.[54] 혼전 상태가 지속되어 제1기병사단의 반격은 실패했다.[54] 제1기병사단은 다부동 일대의 주 저항선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9월 5일 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후퇴를 시작했다.[54] 제1기병사단은 다부동 후방 8km 지점인 동명 부근에서 인민군을 저지했다. 제1기병사단은 좌익의 금호강 하구 일대에 제8공병대대, 중앙의 188고지 - 174고지에 제5기병연대, 우익의 180고지 일대에 제8기병연대를 배치하고, 제7기병연대를 사단 예비대로 두었다.[55]
9월 11일, 대구 북방 12km 지점에 있는 314고지에 1개 대대 규모의 인민군이 침투해 들어와 대구의 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55] 9월 12일, 제7기병연대 제3대대가 314고지를 탈환하여, 대구 북방의 전황은 다소 안정되었다.[55]
제8군은 9월 8일부터 시작된 제8기병연대의 570고지 - 가산 산성에 대한 반격이 실패하자,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군단장: 유재흥 준장)에게 제1사단으로 하여금 가산 산성을 공격하도록 요구했다.[56] 이에 따라 대한민국 육군 제11연대 제1대대(대대장: 김소위 대위)는 9월 13일 756고지를 탈환하고, 다음 날에는 산성 성벽의 일부를 점령했다.[56] 한편, 제8기병연대 제3대대도 14일에 570고지를 되찾았다.[56]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이 시작되어, 제8군도 다음 날인 16일에 반격을 시작했다.[57] 그러나 쏟아지는 폭우로 인해 항공기나 포병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공격이 진전되지 못했다.[57] 이 날, 돌파의 주공을 맡은 제1기병사단은, 동 사단에 배속된 제5연대 전투단을 동원하여 금무봉과 왜관을, 제5기병연대를 동원하여 203고지 - 147고지 - 357고지를, 제8기병연대를 동원하여 다부동을 목표로 공격했으나 진전되지 못하고, 오히려 현 방어 진지를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58]
9월 17일, 제1기병사단은 예비대인 제7기병연대를 제5기병연대 지역에 투입했고, 다음 날인 18일에는 B-29 폭격기 42대가 왜관을 폭격했지만 진전은 없었다.[58] 9월 18일, 우 인접 부대인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 제12연대(연대장: 김점곤 중령)가 진출하여, 가산 산성 - 다부동 - 558고지 일대에 배치된 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했다.[59] 이 날부터 제5연대 전투단의 공격이 진전되어 왜관을 탈환하고, 20일에는 금무봉 - 303고지 - 328고지를 탈환했다.[60]
그러나 제8기병연대의 공격은 진전되지 못하고, 인민군의 저항으로 인해, 한 번에 전차 7대를 격파당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60] 이에 게이 사단장은 제7기병연대에 왜관 - 다부동(997번 도로)을 따라 돌진하라고 명령했다.[60] 그러나 제7기병연대는 20일 저녁, 303고지 서쪽으로 우회하여 도개동으로 진출했으나, 그 곳에서 진격을 멈추고 야영해 버렸다.[60] 이에 격노한 게이 사단장은 연대장을 교체하고, 동 연대의 직사 포병 대대장이었던 해리스 중령을 연대장으로 임명했다.[60] 제7기병연대는 다음 날인 21일 997번 도로를 돌진하여 다부동으로 진출한 후, 남하하여 삼학동에서 제8기병연대와 협력했다.[61]
다부동 일대의 인민군을 섬멸한 제1기병사단은, 제7기병연대를 기간으로 777지대를 편성하여 추격을 준비했다.[61] 9월 21일 아침, 인민군 제13사단 참모장 이학구 총좌가 제8기병연대에 투항했다.[61] 다음 날인 22일, 다부동 북방에서 소탕 작전을 벌이던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과 협력했다. 같은 날, 제8군은 낙동강 전역에서 전황이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판단하여, 작전 명령 A101호에 의해 각 부대에 추격을 시작하도록 했다.[62]
4. 2. 볼링 앨리 전투
8월 21일 야간에 다부동 계곡에서 한국 전쟁 최초의 전차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워 미 제27연대 정면으로 대규모 야간 역습을 감행했다. 이에 미 제27연대는 가용포를 총집중하고 아군 전차를 추진하여 대응했다. 5시간 동안 다부동 계곡에서는 양측 전차포에서 발사된 철갑탄이 교차하며 불꽃을 튀겼다.[20]이 광경을 지켜보던 미 제27연대 장병들은, 불덩이 같은 철갑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 도로를 따라 메아리치며 상대 전차를 파괴하기 위해 날아가는 모습이 마치 볼링 공이 핀을 향해 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것 같다고 하여 이 전투를 "볼링 앨리(Bowling Alley)" 전투라고 불렀다.[20]
4. 3. 303 고지 전투
조선인민군 제2군단 4개 사단이 포항동, 경주 및 영천 지역으로 남쪽으로 공격하는 동안, 군단 나머지 3개 사단(제3, 제13, 제1사단)은 대구를 향해 북쪽과 북서쪽에서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20] 이 중 조선인민군 제3사단은 왜관 지역(대구 북서쪽)을 공격했다.[21]미 제1기병사단은 대략 약 56.33km의 전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장 호바트 R. 게이 소장은 자신의 구역으로 들어오는 주요 진입로에 초소를 설치하고, 3개 연대를 초소 뒤에 집중시켰다.[20] 미 제5기병연대는 왜관 부근 낙동강을 따라, 그리고 그곳에서 대구까지 이어지는 주요 서울 고속도로를 방어했다.[21]
4. 4. 518 고지 (수암산) 전투
왜관 북동쪽에 위치한 수암산(518고지)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미국 육군 제7기병연대는 1950년 9월 2일, 518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공습과 포격 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개시했다.[24] 그러나 북한군 제13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25] 북한군은 518고지에 1,200여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박격포와 충분한 탄약을 보유하고 있었다.[26]
미군은 9월 3일과 4일에도 공격을 계속했지만, 북한군의 완강한 방어에 막혀 고지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26] 9월 4일에는 제5기병연대 제2대대가 303고지를 점령했지만, 다음 날 북한군의 반격을 막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6]
9월 5일, 제7기병연대는 518고지 점령을 포기하고 제한적인 철수를 실시했다.[26] 당시 북한군은 제7기병연대 후방의 464고지에 더 많은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고, 왜관-다부동 도로를 차단하여 연대의 통신이 서쪽으로만 가능하게 되었다.[25]
결국 미군은 518고지 점령에 실패하고 철수했다.
4. 5. 가산산성 전투
북한군 제2군단 4개 사단이 포항 동쪽, 경주 및 영천 지역으로 남쪽으로 공격하는 동안, 군단의 나머지 3개 사단(제3, 제13, 제1사단)은 북쪽과 북서쪽에서 대구를 향해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20] 조선인민군 제3사단은 대구 북서쪽 왜관 지역을, 제13사단은 상주-대구 도로를 따라 대구 북쪽 산등성이를 따라 공격했으며, 제1사단은 도로 바로 동쪽에 있는 높은 산등성이를 따라 공격할 예정이었다.[21]대구를 방어하는 미 제1기병사단은 약 의 전선을 가지고 있었다. 사단장 호바트 R. 게이(소장)은 자신의 구역으로 들어오는 주요 진입로에 초소를 설치하고, 3개 연대를 초소 뒤에 집중시켰다.[20] 동쪽으로, 미 제8기병연대는 그 도로와 인접한 언덕에 위치했다.[21]
5. 결과 및 영향
다부동 전투는 국군 제1사단이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서 조선인민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 교전하여 북한군의 8월 공세를 저지한 전투이다. 이후 국군은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신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1]
인천상륙작전으로 미군이 대대적으로 반격하면서, 국군은 이 지역에서 조선인민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의 공세를 막아냄으로써, 조선인민군은 낙동강 전선 돌파에 실패하였고, 결과적으로 공격 의도가 좌절되었다. 조선인민군은 이 전투에서 전력을 크게 소진하여 이후 전투에 큰 영향을 받았다. 반면, 대한민국 국군에게는 낙동강 전선을 지켜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1]
조선인민군 제3사단은 이 전투에서 거의 궤멸되었다. 9월 1일 공세 시작 당시 7,000명이던 병력 중, 10월까지 북한으로 후퇴한 병력은 1,000명에서 1,800명뿐이었다. 대부분의 병력은 사망, 포로, 탈영 등으로 손실되었다.[40] 조선인민군 제2군단 전체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지쳐있었고 인천 상륙 작전 이후 고립된 조선인민군은 패배 직전에 놓였다.[41]
미국 제1기병사단은 부산 교두보 전투 기간 동안 770명이 사망하고 2,61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62명이 포로로 잡혔다. 여기에는 지난 달 대구 전투에서 발생한 약 600명의 사상자(약 200명 전사)도 포함된다.[42][43] 미군은 계속 격퇴되었지만, 조선인민군이 부산 교두보를 돌파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9월 1일 14,703명이었던 사단은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공격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다.[44] 한국군 사상자는 예측하기 어려웠지만, 매우 심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청동 성훈을 받은 호 청크족 인디언인 존 레이몬드 라이스 상사는 1950년 9월 6일, 제8기병연대 A중대 소대를 지휘하다가 다부동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아이오와주 수시티로 반환되었으나 묘지에서 매장을 거부당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직접 개입하여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군사적 예우를 갖춰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이후 미국 연방 대법원 판례는 1954년에 공공 묘지에서의 인종 차별 격리가 합법이라고 결정했다.[45][46][47]
5. 1. 전술적, 전략적 영향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서 북한군 3개 사단과 25일 동안 교전을 벌여 북한군의 8월 공세를 저지했다. 이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신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1]인천상륙작전을 통해 투입된 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이 지역에서 북한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냄으로써,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 돌파에 실패하였고, 결과적으로 북한군의 공격 의도를 좌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전력을 상당히 소진하여 이후 전투에 큰 영향을 받았다. 대한민국 국군에게는 낙동강 전선을 지켜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결정적인 전투였다.[1]
5. 2. 대한민국에 대한 영향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투입된 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대한민국 국군은 이 지역에서 북한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냄으로써,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는 데 실패하였고, 결과적으로 북한군의 공격 의도를 좌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전력을 상당히 소진해야 했고, 이는 이후 전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대한민국 국군에게는 낙동강 전선을 고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하게 해준 결정적인 전투이기도 하였다.[18]조선인민군 제3사단은 전투에서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9월 1일 공세 시작 당시 7,000명이었던 병력 중, 10월까지 북한으로 후퇴할 수 있었던 병력은 1,000명에서 1,800명뿐이었다. 사단 병력 대다수는 사망하거나 포로가 되거나 탈영했다.[40] 조선인민군 제2군단 전체가 비슷한 상황이었으며, 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지쳐있었고 인천 상륙 작전 이후 고립된 조선인민군은 패배 직전에 놓여 있었다.[41]
미국 제1기병사단은 부산 교두보 전투 기간 동안 770명이 사망하고 2,61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62명이 포로로 잡혔다.[42] 여기에는 지난 달 대구 전투에서 이미 발생한 약 600명의 사상자(약 200명 전사)가 포함되었다. 미군은 계속 격퇴되었지만, 조선인민군이 부산 교두보를 돌파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43] 9월 1일 14,703명이었던 사단은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공격하기에 훌륭한 위치에 있었다.[44] 전투에서 한국군 사상자는 예측하기 어려웠지만, 또한 심각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청동 성훈을 받은 호 청크족 인디언인 존 레이몬드 라이스 상사는 1950년 9월 6일, 제8기병연대 A중대 소대를 지휘하다가 다부동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가 아이오와주 수시티로 반환되었으나 묘지에서 매장을 거부당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직접 개입하여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군사적 예우를 갖춰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그 후 미국 연방 대법원 판례는 1954년에 공공 묘지에서의 인종 차별 격리가 합법이라고 결정했다.[45][46][47]
6. 관련 작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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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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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戦争・多富洞の戦い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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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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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戦争・多富洞の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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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朝鮮戦争・多富洞の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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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戦争・多富洞の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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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戦争・多富洞の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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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朝鮮戦争・多富洞の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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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戦争・多富洞の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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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戦争・多富洞の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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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戦争・多富洞の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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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朝鮮戦争・多富洞の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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