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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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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콜리야는 사라유 강에서 히말라야 언덕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했던 고대 부족이다. 그들은 샤카족과 통혼 관계를 맺었으며, 붓다의 어머니인 마야데비는 콜리야 귀족 출신이다. 콜리야족은 가나상가 형태의 정치 체제를 갖춘 공화국으로, 의회와 마하라자(집정관)를 두었다. 붓다의 입멸 후, 코살라 왕 비두다바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정치적 중요성을 잃고 민족 집단으로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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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국명콜리야
종류귀족 공화국
역사
존속 기간기원전 7세기 ~ 기원전 5세기경
멸망 요인비두다바의 코살라 정복
지리
위치마하Janapadas 시대, 샤카의 동쪽
수도라마가마
현재 국가인도
네팔
정치
정치 체제귀족 공화정
의회사바
문화
공용어프라크리트어
산스크리트어
종교역사적 베다 종교
불교
자이나교
기타
통화파나

2. 위치

콜리야족의 영토는 사라유강에서 북쪽의 히말라야 언덕에 이르는 좁고 긴 땅이었다. 서쪽 경계는 로히니강이었으며, 북서쪽으로는 샤카족과 이웃했다. 남서쪽에서는 아노마강 또는 라프티강이 콜리야족과 코살라 왕국을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했다. 동쪽으로는 모리야족과 접했고, 북동쪽으로는 쿠시나가라말라족과 경계를 이루었다.

콜리야족의 수도는 데바다하였으며, 라마그램도 주요 정착지 중 하나였다.

3. 명칭

콜리야족의 이름은 팔리어 형태인 Koliya|콜리야pi로 일관되게 나타난다. 이 이름은 대추나무를 의미하는 kola|콜라sa에서 유래했는데, 콜리야족이 kola|콜라sa 나무가 풍부한 지역에 살았고 이 나무를 부족의 토템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4. 역사

콜리야족의 영토는 사라유강에서 북쪽의 히말라야 언덕까지 뻗어 있는 좁은 지역이었다. 로히니강은 콜리야족의 서쪽 경계를 이루었으며, 북서쪽으로는 샤카족과 이웃했다. 남서쪽으로는 아노마강 또는 라프티강이 콜리야족을 코살라 왕국과 분리시켰고, 동쪽으로는 모리야족, 북동쪽으로는 쿠시나가르의 말라족과 접해 있었다. 콜리야족의 수도는 데바다하였으며, 라마가마는 다른 주요 정착지 중 하나였다.

콜리야족의 초기 역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쪽 이웃인 샤카족과 통혼 관계를 맺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기원전 6세기경, 콜리야족, 샤카족, 모리야족, 말라족은 서쪽의 코살라 왕국과 동쪽의 리차비족 및 비데하족 영토 사이에 위치하여, 밧지족을 코살라 왕국과 분리시키는 역할을 했다.

콜리야 귀족의 딸인 마야 공주는 샤카족의 지배 귀족 과두 정치 구성원 중 한 명인 샤카 rājā|라자pi 슈도다나와 결혼했다. 마야와 슈도다나의 아들이 바로 역사적인 붓다이자 불교의 창시자인 싯다르타 가우타마였다.

붓다의 생애 동안, 샤카족과 콜리야족은 두 국가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로히니강의 물을 농작물 관개에 사용하는 문제를 두고 무력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적대 행위는 붓다의 개입으로 종식되었다.

붓다의 입멸 후, 콜리야족은 쿠시나라의 말라족으로부터 붓다의 유물 일부를 나누어 받아, 그들의 주요 정착지 중 하나인 라마가마에 사리탑을 세웠다.

4. 1. 코살라의 정복

붓다의 입멸 직후, 자신의 아버지 파세나디를 몰아낸 코살라비두다바는 과거 코살라의 일부였던 사캬족과 콜리야족의 공화국을 정복하기 위해 침략했다. 비두다바는 결국 사캬족과 콜리야족을 상대로 승리하여, 양측 모두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은 긴 전쟁 끝에 그들의 국가를 병합했다.

이 전쟁의 세부 사항은 후대의 불교 기록에 의해 과장된 측면이 있다. 해당 기록들은 비두다바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결혼시킨 다사 출신 소녀, 즉 비두다바의 어머니가 된 여성에 대한 보복으로 사캬족을 전멸시켰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비두다바의 사캬 침략은 그의 친척인 마가다 왕 아자타샤트루가 밧지족 연맹을 정복한 것과 비슷한 동기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아자타샤트루는 밧지족 공주의 아들이었기에 어머니의 고향 영토에 관심이 있었던 것처럼, 비두다바 역시 유사한 이유로 침략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코살라의 침략 결과, 사캬족과 콜리야족은 비두다바 왕국에 병합된 후 정치적 중요성을 잃었다. 사캬족은 병합 후 곧 민족 집단으로서 사라졌고, 코살라 인구에 흡수되었으며, 소수의 이주 가족만이 이후 사캬족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콜리야족 역시 병합 직후 정치체로서, 부족으로서 사라졌다.

한편, 코살라는 사캬족과 콜리야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인명 손실로 인해 국력이 상당히 약화되었다. 결국 코살라는 동쪽 이웃인 마가다 왕국에 병합되었고, 비두다바 왕은 마가다 왕 아자타샤트루에게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다. 또는, 콜리야족은 밧지족 연맹이 그랬던 것처럼 마가다와 싸운 후 아자타샤트루에게 직접 정복되었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5. 정치

콜리야족은 가나상가 형태로 조직되었다. 샤카족과 마찬가지로 콜리야족은 크샤트리야 계급이었지만, 고트라는 달랐다. 샤카족이 가우타마와 아디차 고트라에 속했던 것과 달리, 콜리야족은 비야그하파자 고트라에 속했다.

5. 1. 의회

콜리야족은 가나상가(귀족 과두제 공화국) 형태로 조직되었다. 콜리야족의 의회는 '캇티야'와 라자("통치자") 칭호를 가진 크샤트리야 씨족장들의 총회였으며, 규모는 수백 명 정도로 작았다. 라자의 아들들은 '콜리야-쿠마라'("콜리야의 왕자")라는 칭호를 가졌고, '우파라자'(부왕)로서 아버지가 사망하면 그 지위를 세습적으로 물려받았다.

의회는 '마하라자'("위대한 통치자") 또는 '콜리야라자'("콜리야의 군주")라는 칭호를 가진 집정관 라자를 국가 수장으로 선출했으며, 마하라자는 평의회의 도움을 받아 공화국을 관리했다. 콜리야족의 정치 체제는 샤카족과 동일했는데, 다른 가나상가와 마찬가지로 의회는 주로 라마가마에 위치한 산타가라에서 열렸다. 의회의 사법 및 입법 기능은 명확히 분리되지 않았으며, 전쟁, 평화, 동맹과 같은 중요한 공공 문제를 논의하고 심의했다. 의사 결정 시에는 거수 또는 나무 조각을 이용한 간단한 투표 제도를 사용했다.

콜리야 의회는 자주 소집되지 않았고, 대신 '아마카'("평의원")라고 불리는 의원들로 구성된 내부 평의회가 더 자주 모여 마하라자를 보좌하며 공화국의 실질적인 공무를 담당했다.

5. 2. 마하라자 (집정관)

콜리야 의회는 국가의 수장으로 Mahārāja|마하라자pi("위대한 통치자") 또는 Koliya-rāja|콜리야라자pi("콜리야의 군주")라는 칭호를 가진 라자를 선출했다. 선출된 마하라자는 평의회의 도움을 받아 공화국을 관리하는 책임을 졌다.

5. 3. 평의회

콜리야 의회는 거의 열리지 않았고, 대신 더 자주 회의를 여는 내부 평의회가 있었다. 이 평의회는 공화국을 관리하는 마하라자를 돕는 역할을 했다. 콜리야 의회 의원들은 Amacca|아마차pli("평의원")라는 칭호를 가졌다. Amacca|아마차pli들은 공화국의 공공 업무를 직접 담당하는 단체를 구성했다.

6. 사회

콜리야족과 샤카족의 사회는 계층화된 사회였으며, 최소한 귀족, 지주, 수행원, 노동자, 농노 등의 계급이 존재했다.

6. 1. 지주

샤카족과 유사하게, 공화국 영토를 식민지화하는 데 참여한 인도아리아인 출신의 콜리야인들은 토지를 소유할 권리를 가졌다. 이 지주들은 보자카(Bhojaka)라는 칭호를 보유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토지 소유 권리를 지닌) 향유자"를 의미하며 "우두머리" 또는 "족장"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지위는 중세 유럽의 남작과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6. 2. 하인

콜리야족과 샤카족의 사회는 귀족, 지주, 수행원, 노동자 및 농노 계급이 존재하는 계층화된 사회였다. 콜리야 사회의 하층 계급은 농장에서 노동을 수행하는 하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팔리어로 kammakara|캄마카라pli(노동자를 의미) 또는 산스크리트어로 sevaka|세바카san(농노를 의미)라고 불렸다.

6. 3. 경찰

콜리야 의회는 볏처럼 늘어진 깃털 머리 장식을 착용한 경찰 (또는 하인)으로 구성된 조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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