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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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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사자는 후한 말,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장이다. 젊어서 학문을 좋아했고, 동래군 군주조사를 지냈으나, 요동으로 피신했다. 공융을 구원하고 유요를 섬기다 손책과 만나 귀순했으며, 손권 휘하에서 유반을 막고 황조 토벌에 기여했다. 활쏘기 솜씨가 뛰어났으며, 조조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손권에게 충성을 다했다. 206년 남쪽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가 풍토병으로 사망했으며, 진수는 그를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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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태사자 청나라 삽화
태사자 청나라 삽화
이름태사자 (太史慈)
로마자 표기Taishi Ci
자(字)자의 (子義)
출생166년
출생지산둥성 룽커우 시
사망206년 (40세)
자녀태사상
직업장군
관직
건창도위 (建昌都尉)재임 시기 불명
절충중랑장 (折衝中郎將)재임 시기 불명
단양태수 (丹楊太守)자칭, 재임 시기 불명
섬긴 세력
주요 섬김공융 → 유요 → 손책손권

2. 생애

태사자는 젊어서 학문을 좋아했으며, 활쏘기에 능숙하여 백발백중의 명사수였다. 동래군의 관리를 맡아 군과 청주 간의 분쟁에서 기지를 발휘해 군에 유리한 처분을 이끌어냈으나, 이 일로 청주의 미움을 받아 요동으로 피신했다.[29] 공융황건적 잔당 관해에게 공격받자, 태사자는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공융을 구했다.[30]

이후 유요에게 의탁했으나 중용되지 못하고 정찰 임무를 맡았다. 손책과의 전투에서 일기토를 벌이기도 했으며, 유요가 패배한 후에도 저항했으나 결국 손책에게 귀순했다.[31] 손책은 태사자의 능력을 높이 사 그를 중용했고, 태사자는 유반의 침입을 막는 등 공을 세웠다.[33] 조조가 당귀를 보내 회유하려 했으나, 태사자는 손권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28]

206년, 남쪽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가 풍토병으로 4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34] 그는 죽기 직전 "대장부로서 세상에 태어났으니 칠 척 검을 차고 천자의 옥좌에 올라야 할 것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되다니!"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35]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젊어서 학문을 좋아했다. 동래군의 군주조사(郡奏曹史)를 지냈는데, 186년경 동래군과 청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기지를 발휘하여 동래군에 유리한 처분을 이끌어냈다. 이 일로 명성을 얻었으나, 청주의 보복을 두려워해 요동으로 피신했다.[2]

북해상 공융은 태사자의 명성을 듣고 그의 어머니를 잘 보살폈다. 193년, 공융이 황건적 잔당 관해에게 포위되자, 요동에서 돌아온 태사자는 어머니의 권유로 공융을 구원하러 갔다. 태사자는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그는 성에서 나와 활 연습을 하는 기묘한 행동을 반복하여 적을 방심시킨 뒤, 포위망을 뚫고 유비에게 정병 3천 명을 지원받아 공융을 구출했다. 이 일로 공융은 태사자를 더욱 존중하며 "그대는 나의 젊은 벗이오"라고 칭찬했다.[30]

2. 2. 공융과의 인연

공융(孔融)은 북해국(北海國; 현재의 산둥성 웨이팡시)의 재상(相)이었는데, 태사자에 대해 듣고 그를 비범한 인재로 여겼다. 그는 부하들을 여러 차례 태사자의 어머니를 방문하게 하고 그녀에게 많은 선물을 전달했다.[5] 186년 당시 동래군의 군주조사를 지냈으나, 동래군과 청주 사이에 틈이 생기자 수작을 부려 주가 불리한 처분을 받게 했다. 이 일로 명성을 얻었으나 화를 얻을 것을 두려워해 요동으로 달아났다.

193년, 공융이 황건적과 싸우러 도창에서 둔치고 있다가 적장 관해에게 포위되자, 마침 요동에서 돌아온 태사자는 어머니의 권유를 받아 밤을 틈타 홀로 공융 밑으로 달려갔다.[5]

당시 반란군이 아직 도창을 완전히 포위하지 못했기에, 태사자는 밤에 적의 눈을 피해 요새로 들어가 공융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공융에게 군사를 이끌고 밖으로 돌파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공융은 거절하고 증원군을 기다리겠다고 고집했다. 반란군은 날마다 더 가까이 다가왔다. 공융은 평원국의 재상인 유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포위를 뚫고 나갈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태사자는 자원하여 밖으로 돌파하여 유비에게 도움을 청하겠다고 나섰지만, 공융은 "반란군이 요새를 완전히 포위했다. 모두가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네가 아무리 용감해도 뚫고 나가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태사자는 "제가 없을 때, 당신은 제 어머니를 매우 후하게 대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감사의 마음을 느끼시며, 당신을 돕도록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으며,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지금 모두가 뚫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제가 그들에게 동의한다면, 저는 당신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머니께서 저를 이곳으로 보내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매우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공융은 그가 포위를 뚫고 나가도록 동의했다.[6]

태사자는 장비를 챙기고 만찬을 즐겼다. 새벽에 그는 활과 화살통을 가지고 요새 밖으로 나섰다. 두 명의 기수가 그를 따라 나왔는데, 각자 활쏘기 연습을 위한 과녁을 들고 있었다. 반란군이 태사자가 요새에서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즉시 전투를 준비했다. 놀랍게도, 태사자는 두 개의 과녁을 가져다가 요새 주변의 도랑에 설치하고, 그들에게 몇 발의 화살을 쏜 다음 요새로 돌아갔다. 다음 날, 그는 이 과정을 반복했다. 몇몇 반란군은 일어나 전투를 준비했고, 다른 반란군은 그를 무시하고 편안하게 있었다. 사흘째, 태사자가 다시 나오자, 반란군은 그가 다시 활쏘기 연습을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에게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태사자는 기회를 잡아 포위를 뚫고 나갔다. 반란군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을 때, 태사자는 이미 탈출하여 가는 길에 여러 명의 반란군을 죽였다. 그들 중 누구도 그를 추격하지 못했다.[7]

태사자가 평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유비에게 "저는 동래 출신의 평민인 (태사)자입니다. 저는 공융의 친척도 아니고 지인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듣고, 우리는 비슷한 신념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겪었습니다. 지금, 관해와 반란군이 공융을 포위했으며, 그는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당신은 자비, 정의,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기꺼이 돕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융은 당신을 존경하며 당신에게 희망을 걸고 있으며, 저를 포위를 뚫고 나가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도록 보냈습니다. 당신만이 그를 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유비의 표정이 심각해지며 "공융이 세상에 유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군!"이라고 하였다. 그는 3,000명의 군사를 보내 태사자와 함께 도창으로 돌아가게 했다. 반란군은 증원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쳤고, 도창의 포위는 저절로 풀렸다. 공융은 이 사건 이후 태사자를 더욱 높이 평가했다. 그는 태사자에게 "젊은 친구여"라고 말했다. 태사자가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이 일을 말하자, 그녀는 "네가 이런 식으로 공융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어서 매우 기쁘다."라고 말했다.[8]

2. 3. 유요 휘하에서의 활동

공융에게 도움을 준 후, 태사자는 동향 출신인 양주 자사 유요에게 의탁했다. 그러나 유요는 허소의 말을 듣고 태사자를 중용하지 않아 정찰 임무만 맡겼다.[9] 유요에게 태사자를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손책에 대항하게 해야 한다는 진언도 있었지만, 유요는 "자 의(태사자)를 쓰면 허자장이 나를 비웃지 않겠는가"라고 걱정했다.[31]

태사자는 단 한 명의 기병만 데리고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신정(현재 장쑤성 단양시 부근)에서 한당, 송겸, 황개 등 13명의 기병을 거느린 손책과 마주쳤다.[10][31] 태사자는 손책에게 정면으로 덤벼들었다. 손책은 창으로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 태사자가 등에 짊어진 휴대용 ''''을 붙잡았고, 태사자는 손책의 투구를 빼앗았다. 각자의 부하들이 나타나면서 싸움은 중단되었다.[10]

결국 유요는 손책에게 패배했다. 유요가 도주한 후에도 태사자는 스스로 병사들을 모아 단양 태수를 칭하며 저항했지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32][11]

2. 4. 손책과의 만남과 귀순

194년, 태사자는 같은 동래군 사람인 양주자사 유요에게 의탁했다. 그러나 유요는 허소의 말을 듣고 태사자를 중용하지 않고 정찰 임무만 맡겼다.[9] 태사자는 정찰 중 손책과 우연히 마주쳐 일대일 대결을 벌였다. 둘은 뛰어난 무장으로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태사자는 손책의 투구를, 손책은 태사자의 단극을 빼앗았다.[10]

197년, 유요가 손책에게 패배한 후에도 태사자는 이민족을 이끌고 저항했으나 결국 사로잡혔다. 손책은 태사자의 포승을 풀어주고 협력을 제안하며, 흩어진 유요의 병사들을 모아오겠다는 태사자를 믿고 허락했다.[11][12] 손책의 가신들은 태사자가 도망갈 것이라며 만류했지만, 손책은 태사자를 끝까지 신뢰했고, 태사자는 약속대로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32]

《오력(吳歷)》에 따르면, 태사자는 심촌(沈村)에서 손책에게 패하여 사로잡혔다. 손책은 태사자의 결박을 풀어주고 자신의 미래 정벌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태사자는 패잔병을 모아 돌아오겠다고 했고, 손책은 다음 날 정오까지 돌아오라고 약속했다. 손책의 부하들이 의문을 제기했지만, 손책은 태사자가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었다. 다음 날 정오, 태사자는 약속대로 돌아왔고, 손책은 그에게 군사에 대해 자주 자문했다. 배송지(裴松之)는 《오력(吳歷)》의 내용이 《삼국지》 태사자전과 크게 다르다며 오류를 의심했다.

2. 5. 손권 휘하에서의 활약

197년, 유요가 손책에게 패배한 후에도 태사자는 이민족을 이끌고 저항했지만 결국 붙잡혔다. 손책은 태사자의 포승을 풀어주고 협력을 구했고, 태사자는 흩어진 유요의 병사들을 모아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손책의 가신들은 태사자가 도망갈 것이라 만류했지만, 손책은 태사자를 믿었고, 태사자는 약속대로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15][16][17]

손책은 오군(현재 장쑤성 쑤저우)으로 돌아온 후 태사자를 파랑중랑장(折衝中郎將)으로 임명했다. 손책은 태사자에게 유요의 옛 부하들을 설득하여 항복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태사자는 60일 안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손책의 측근들은 그제야 태사자를 믿게 되었다. 태사자는 손책에게 화흠은 덕이 있지만 재능 있는 지도자는 아니며, 현상 유지에만 힘쓸 뿐이라고 보고했다. 또한, 해혼(海昏)의 지역 호족들이 군의 통제를 거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후 손책은 예장군을 평정하고 화흠을 항복시켰다.[18]

이후 유반이 애, 서안 일대를 침략하자, 손권은 건창도위를 새로 만들고 태사자에게 맡겨 유반을 저지하도록 했다. 이후 유반은 쳐들어오지 않았다.[19]

태사자는 활쏘기 솜씨가 뛰어났는데, 손책을 따라 마바오(麻保)의 반란군을 공격했을 때 성문 위 전망대에서 손책에게 욕설을 퍼붓던 반란군 지도자의 손을 화살로 꿰뚫은 일화가 있다. 조조는 태사자의 명성을 듣고 당귀를 보내 그를 회유하려 했으나, 태사자는 손권에 대한 충의를 지켰다.[20]

200년 손책이 사망하고 손권이 뒤를 이었을 때, 손권은 태사자의 능력을 인정하여 해혼현 주변 지역의 안보를 계속 그에게 맡겼다.[21] 유표 군의 유반의 침공을 막고, 황조 토벌 등에 공을 세운 태사자는 손책과 손권에게 중용되었다.[33] 조조는 당귀라는 약초를 보내 태사자를 유혹했지만, 태사자는 이를 거절하고 손권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고 한다.[28]

2. 6. 최후

206년, 남쪽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하러 갔다가 풍토병에 걸려 41세의 나이로 죽었다.[22] 손권은 태사자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23] 정사에서는 적벽 대전 이전인 건안 11년(206년)에 사망했다.[34] 배송지의 주에 인용된 《오서(위소 저)》에 따르면, "대장부로서 세상에 태어났으니 칠 척 검을 차고 천자의 옥좌에 올라야 할 것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되다니!"라는 말을 죽기 직전에 했다고 한다.[35]

죽기 전 그는 탄식하며 "세상에 사는 사람은 일곱 자(七尺) 길이의 칼을 차고 천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소망해야 한다. 지금 나는 아직 내 포부를 이루지 못했는데, 곧 죽게 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라고 말했다.

한편, 태사자의 묘는 나라 동치 11년(1872년)에 장쑤성 전장부 단도현 베이구산에서 발견되었다.

3. 특징

태사자는 키가 7척 7촌(약 177cm)으로, 아름다운 수염을 가졌으며, 원숭이처럼 긴 팔로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조조도 그 명성을 듣고는 당귀를 선물로 보낼 정도였다.[1]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무예에 뛰어났다. 활을 다루면 백발백중의 명사수였고, 후에 손책과 함께 산적 토벌을 했을 때 멀리 보이는 요새 위에서 욕설을 퍼붓던 한 산적이 손에 나무를 쥐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나무와 함께 손을 꿰뚫었다는 일화도 있다.[1]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삼국지연의》에서 태사자는 관해로부터 공융을 구출하기 위해 유비관우, 장비와 함께 태사자를 부하로 삼아 북해로 쳐들어가 황건적을 공격하여 공융을 구출하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 후 유요의 수하로 들어가서 손책과 겨루고 손책을 섬긴다. 적벽대전에 주유의 호위무장으로 참전하고 합비 전투에서 장료에게 계략을 간파당하여 중상을 입고 이로 인해 죽는 것으로 처리하였다.[36]

태사자의 죽음은 소설 53장에서 합비 전투의 내용을 각색하면서 극적인 효과를 위해 과장되었다. 소설에서 태사자는 합비 전투에서 장료와 일기토를 벌여 무승부를 기록한다. 그 후 부하 과정을 잠입시켜 위군의 혼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오히려 장료의 계략에 빠져 유인당해 화살에 맞는다. 육손, 동습에게 구출되어 간신히 철수하지만, 그 화살 상처가 원인이 되어 사망한다. 이때, 주군 손권이 위문으로 파견한 장소 앞에서 오서에 기록된 것과 동일한 말을 외치며 사망한다.[37]

5. 평가

진수삼국지에서 태사자는 충성스럽고 의로우며, 신뢰할 수 있고 정직했으며 옛 현인들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평가했다.[26]

6. 가계

태사자는 아들 태사향(太史享)을 두었는데, 자는 원복(元復)이었다. 태사향은 동오(東吳)에서 벼슬하여 월기교위(越騎校尉), 상서를 역임했으며, 오군 태수를 지냈다.[24][25]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웹사이트 三國志/卷49#太史慈
[28] 웹사이트 三國志/卷49#太史慈
[29] 웹사이트 三國志/卷49#太史慈
[30] 웹사이트 三國志/卷49#太史慈
[31] 웹사이트 三國志/卷49#太史慈
[32] 웹사이트 三國志/卷49#太史慈
[33] 웹사이트 三國志/卷49#太史慈
[34] 웹사이트 三國志/卷49#太史慈
[35] 웹사이트 三國志/卷49#太史慈
[36] Wikisource 三國演義/第050回
[37] Wikisource 三國演義/第053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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