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섬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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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랜섬 작전은 1944년 5월, 영국과 미국의 연합군이 인도양의 수라바야를 공격한 해상 작전이다. 이 작전은 콕피트 작전에 이은 두 번째 인도양 급습 작전으로, 태평양 전선에 투입될 전력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극동 지역 영국 해군 항공대의 첫 대규모 공격 작전이기도 했다. 연합군은 수라바야의 군항, 비행장, 정유소를 공격하여 일본군에 피해를 입혔으며, 일본군은 이에 대응하여 인도양 방면의 항공 전력을 후퇴시켰다. 작전 결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연합군은 항공모함 공격 작전에 대한 경험을 쌓고, 일본군의 전력 분산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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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섬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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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개요 | |
명칭 | 트랜섬 작전 |
작전명 (일본어) | トランサム作戦 (Toransamu Sakusen) |
분쟁 | 제2차 세계 대전 / 태평양 전쟁 |
전역 | 동남아시아 전구 |
날짜 | 1944년 5월 17일 |
장소 | 네덜란드령 동인도 수라바야 |
좌표 | 7°12′39.73″S 112°43′48.94″E |
결과 | 연합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연합군 지휘관 | 제임스 서머빌 |
전력 | |
연합군 전력 | 항공기 76대, 항공모함 2척, 전함 3척, 순양전함 1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4척, 잠수함 8척 |
일본군 전력 | 대공포대 |
피해 규모 | |
연합군 피해 | 항공기 3대 격추 |
일본군 피해 | 자료에 따라 다름, 민간인 사상자 수는 미상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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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42년 중반부터 1944년 초까지 인도양에서는 연합군의 해상 작전이 거의 없었다. 영국 동부 함대는 이 지역에서 제해권을 유지했지만, 주력함 간의 전투를 벌일 만큼 충분한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 일본군은 순양함과 잠수함을 동원하여 연합군 상선을 공격하고, 때로는 실론 해전과 같이 대규모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트랜섬 작전은 콕피트 작전에 이어 미영 연합 기동 부대가 인도양 방면에서 수행한 두 번째 급습 작전이었다. 태평양 방면에서의 전투에 대비하여 인도양에서 전력을 정비하고 있던 영국 해군에게 트랜섬 작전은 극동에서 영국 해군 항공대에 의한 최초의 대규모 공격 작전이기도 했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은 "일본에 대한 주요 노력은 태평양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명시하고, 인도양은 부수적인 전장으로 간주했다. 또한, 인도양에서의 모든 공세 작전은 "적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고,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며, 적의 항공 및 해군력과 선박에 최대의 소모를 가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로 결정했다.
1944년 1월, 영국 해군성은 영국 해군을 관리하는 영국 정부 기관으로 동부 함대를 실질적으로 증강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1943년 이탈리아 해군의 항복으로 가능해졌는데, 이로 인해 영국 해군의 주요 적 중 하나가 제거되었고 연합국은 지중해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 결과, 총 146척의 군함이 증원될 예정이었으며, 여기에는 전함 3척, 항공모함 2척, 순양함 14척, 다수의 구축함 및 기타 호위함이 포함되었다. 1월 27일, 항공모함 , 전함 및 , 순양전함 을 포함한 첫 번째 실질적인 증원 병력이 실론의 동부 함대 기지에 도착했다.
1944년 초, 일본군은 주요 해상 공격 부대인 연합 함대를 싱가포르로 이동시켰다. 이는 미국 공격에 취약해진 중부 태평양의 기지에서 함대를 철수시키고, 우수한 해군 수리 시설과 연료 접근성을 갖춘 곳에 집중하기 위한 조치였다. 일본은 인도양으로의 대규모 공격을 계획하지 않았지만, 소머빌은 연합 함대가 인도양에 진입할 경우 자신의 병력이 연합 함대에 대항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실론을 보호하기 위해 더 많은 항공 부대를 파견했다. 미국 해군도 동부 함대를 증강하기 위해 태평양에서 항공모함 와 구축함 3척을 임시로 이동시키기로 합의했다.
이후, ''사라토가''와 호위함은 1944년 3월 27일 동부 함대에 합류했다. ''일러스트리어스''와 ''사라토가''는 동부 함대의 상당 부분과 함께 4월 19일 작전 콕핏의 일환으로 일본이 점령한 사방을 성공적으로 공습했다.
수라바야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부였던 자바 동부에 위치한 도시였다. 19세기 말 아시아의 주요 항구 도시 중 하나가 되었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설탕 수출 산업의 중심지였다. 1920년대에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중요한 상업 도시로 남아 있었다.
일본군은 1941년 12월부터 1942년 3월 사이에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침략하여 정복했다. 수라바야는 이 전역 기간 동안 여러 차례 폭격을 받았으며, 첫 공습은 도시의 항구와 해군 기지를 목표로 했다. 네덜란드 수비대는 3월 8일에 항복했다. 일본 점령 기간 동안 수라바야는 일본 제국 육군에 의해 통치되었다.
수라바야는 점령 기간 동안 중요한 해군 기지이자 산업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수라바야에 주둔한 일본의 대잠수함전 부대는 자바 해에서 작전하는 연합군 잠수함을 추격했다. 도시에 위치한 워노크로모 정유 공장은 자바에서 항공유를 생산하는 유일한 시설이었다. 1943년 7월 22일과 11월 8/9일 밤에 대규모 연합군 항공기가 수라바야를 공격했다. 이 공습 중 첫 번째 공격에서 도시 전체 지역이 폭격을 받았다. 1944년 2월부터 1945년 8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부분의 달에 소규모 공습이 발생했다. 로열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의 컨솔리데이티드 PBY 카탈리나 항공기도 1943년 8월부터 수라바야 항구 입구에 정기적으로 기뢰를 투하했다. 1944년 초부터 항공기에 의해 설치된 기뢰밭으로 인해 수라바야를 오가는 선박의 이동이 상당히 방해받았고 여러 척의 선박이 침몰했다.
2. 1. 인도양 전역
1942년 중반부터 1944년 초까지 인도양에서는 연합군의 해상 작전이 거의 없었다. 영국 동부 함대는 이 지역에서 제해권을 유지했지만, 주력함 간의 전투를 벌일 만큼 충분한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 일본군은 순양함과 잠수함을 동원하여 연합군 상선을 공격하고, 때로는 실론 해전과 같이 대규모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트랜섬 작전은 콕피트 작전에 이어 미영 연합 기동 부대가 인도양 방면에서 수행한 두 번째 급습 작전이었다. 태평양 방면에서의 전투에 대비하여 인도양에서 전력을 정비하고 있던 영국 해군에게 트랜섬 작전은 극동에서 영국 해군 항공대에 의한 최초의 대규모 공격 작전이기도 했다.
2. 2. 연합군과 일본군의 계획
1942년 중반부터 1944년 초까지 연합군은 인도양에서 어떠한 해상 공세 작전도 수행하지 않았다. 이 지역의 주요 해군력은 제임스 소머빌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주도의 동부 함대였으나, 1943년 1월부터 함대에는 항공모함이 전혀 없었고, 그해 후반에는 노후된 전함 세 척마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일본이 1942년 중반 이후 인도양에서 대규모 작전을 시도하지 않아, 동부 함대는 독일과 일본 잠수함을 격퇴하고 자체 잠수함을 이용해 일본 선박을 공격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은 "일본에 대한 주요 노력은 태평양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명시하고, 인도양은 부수적인 전장으로 간주했다. 또한, 인도양에서의 모든 공세 작전은 "적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고,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며, 적의 항공 및 해군력과 선박에 최대의 소모를 가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로 결정했다.
1944년 1월, 영국 해군성은 영국 해군을 관리하는 영국 정부 기관으로 동부 함대를 실질적으로 증강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1943년 이탈리아 해군의 항복으로 가능해졌는데, 이로 인해 영국 해군의 주요 적 중 하나가 제거되었고 연합국은 지중해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 결과, 총 146척의 군함이 증원될 예정이었으며, 여기에는 전함 3척, 항공모함 2척, 순양함 14척, 다수의 구축함 및 기타 호위함이 포함되었다. 1월 27일, 항공모함 , 전함 및 , 순양전함 을 포함한 첫 번째 실질적인 증원 병력이 실론의 동부 함대 기지에 도착했다.
1944년 초, 일본군은 주요 해상 공격 부대인 연합 함대를 싱가포르로 이동시켰다. 이는 미국 공격에 취약해진 중부 태평양의 기지에서 함대를 철수시키고, 우수한 해군 수리 시설과 연료 접근성을 갖춘 곳에 집중하기 위한 조치였다. 일본은 인도양으로의 대규모 공격을 계획하지 않았지만, 소머빌은 연합 함대가 인도양에 진입할 경우 자신의 병력이 연합 함대에 대항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실론을 보호하기 위해 더 많은 항공 부대를 파견했다. 미국 해군도 동부 함대를 증강하기 위해 태평양에서 항공모함 와 구축함 3척을 임시로 이동시키기로 합의했다.
이후, ''사라토가''와 호위함은 1944년 3월 27일 동부 함대에 합류했다. ''일러스트리어스''와 ''사라토가''는 동부 함대의 상당 부분과 함께 4월 19일 작전 콕핏의 일환으로 일본이 점령한 사방을 성공적으로 공습했다.
트랜섬 작전은 미영 연합 기동 부대가 인도양 방면에서 수행한 두 개의 급습 작전 중 콕피트 작전에 이어 실시된 작전이었다. 태평양 방면에서의 전투에 대비하여 인도양에서 그 전력을 정비하고 있던 영국 해군에게 트랜섬 작전은 극동에서 영국 해군 항공대에 의한 최초의 대규모 공격 작전이기도 했다.
2. 3. 수라바야의 전략적 중요성
수라바야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부였던 자바 동부에 위치한 도시였다. 19세기 말 아시아의 주요 항구 도시 중 하나가 되었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설탕 수출 산업의 중심지였다. 1920년대에 경제가 쇠퇴하기 시작했지만, 중요한 상업 도시로 남아 있었다.일본군은 1941년 12월부터 1942년 3월 사이에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침략하여 정복했다. 수라바야는 이 전역 기간 동안 여러 차례 폭격을 받았으며, 첫 공습은 도시의 항구와 해군 기지를 목표로 했다. 네덜란드 수비대는 3월 8일에 항복했다. 일본 점령 기간 동안 수라바야는 일본 제국 육군에 의해 통치되었다.
수라바야는 점령 기간 동안 중요한 해군 기지이자 산업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수라바야에 주둔한 일본의 대잠수함전 부대는 자바 해에서 작전하는 연합군 잠수함을 추격했다. 도시에 위치한 워노크로모 정유 공장은 자바에서 항공유를 생산하는 유일한 시설이었다. 1943년 7월 22일과 11월 8/9일 밤에 대규모 연합군 항공기가 수라바야를 공격했다. 이 공습 중 첫 번째 공격에서 도시 전체 지역이 폭격을 받았다. 1944년 2월부터 1945년 8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부분의 달에 소규모 공습이 발생했다. 로열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의 컨솔리데이티드 PBY 카탈리나 항공기도 1943년 8월부터 수라바야 항구 입구에 정기적으로 기뢰를 투하했다. 1944년 초부터 항공기에 의해 설치된 기뢰밭으로 인해 수라바야를 오가는 선박의 이동이 상당히 방해받았고 여러 척의 선박이 침몰했다.
트랜섬 작전은 미영 연합 기동 부대가 인도양 방면에서 수행한 두 개의 급습 작전 중 콕피트 작전에 이어 실시된 작전이었다. 태평양 방면에서의 전투에 대비하여 인도양에서 그 전력을 정비하고 있던 영국 해군에게 트랜섬 작전은 극동에서 영국 해군 항공대에 의한 최초의 대규모 공격 작전이기도 했다. 따라서 트랜섬 작전에 의한 경험은 그 후 영국 해군의 행동에 도움이 되었다.
3. 작전 준비
Operation Cockpit 작전 이후, ''Saratoga''는 정비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미국 해군 수장인 어니스트 킹 제독은 동남아시아 사령부 사령관 루이 마운트배튼 제독에게 이 항모와 동부 함대의 다른 함정들이 귀항하는 항해에서 수라바야를 공격하라고 제안했다. 킹은 이 공격이 5월 17일에 예정된 뉴기니 해안의 연합군 와크데 섬 상륙 작전 전에 일본군을 분산시키기를 희망했고, 마운트배튼은 이에 동의했다.
소머빌 제독은 Operation Cockpit 작전과 거의 동일한 병력으로 공격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주요 차이점 중 하나는 ''Illustrious''의 페어리 바라쿠다 뇌격기와 급강하 폭격기로 구성된 항공단을 그루먼 어벤저로 대체했다는 점이다. 이는 수라바야의 방어력이 사방보다 강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소머빌은 바라쿠다가 효과적인 사거리 밖인 180mi (290km) 떨어진 곳에서 항공기를 발진시키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실론에서 이동해야 하는 거리와 영국 해군의 항해 중 보급 경험 부족으로 인해, 작전 계획에는 수라바야 공격 전 서호주의 엑스마우스 만에서 동부 함대가 급유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연합군은 수라바야의 일본 시설 위치에 대한 좋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지역의 일본 공군력에 대한 정보는 부족했다. 이에 따라 동부 함대는 지상 목표물 공격보다 공격 부대 호위와 함대 보호를 위해 많은 수의 전투기를 배치해야 했다.
동부 함대는 트랜섬 작전을 위해 3개의 부대로 편성되었다. 제65부대는 ''퀸 엘리자베스'', ''발리언트'', ''리나운'', 프랑스 전함 ''리슐리외'', 순양함 2척, 구축함 8척으로 구성되었다. 제66부대는 ''일러스트리어스'', ''사라토가'', 순양함 2척, 구축함 6척이었다. 제67부대는 보급 부대로, 6척의 유조선, 증류선 및 순양함 2척으로 구성되었다. 소머빌은 ''퀸 엘리자베스''에서 함대를 지휘했다. 이 군함들은 6개 해군에서 차출되었으며, 주력함에는 미국 구축함 3척, 영국 순양함 4척, 구축함 3척, 호주 구축함 4척, 네덜란드 순양함 및 구축함, 뉴질랜드 순양함이 포함되었다. 호주 경순양함 는 엑스마우스 만에 있는 동안 유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서호주의 프리맨틀에서 출항했으며, 이를 통해 호위 순양함 2척이 공격 중에 제66부대를 증원할 수 있었다.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전투기 2개 비행대가 엑스마우스 만으로 다윈의 제1 RAAF 비행단에서 이동하여 동부 함대가 급유하는 동안 동부 함대를 보호했으며, 호주 및 미국 해상 초계기가 해상에서 작전을 수행하도록 배정되었다.
각 항모는 모함 해군의 부대로 구성된 항공단을 보유했다. ''일러스트리어스''는 각각 14대의 보우트 F4U 콜세어 전투기로 장비된 2개 비행대와 9대의 어벤저를 탑재했다. ''사라토가''의 항공단은 26대의 그루먼 F6F 헬캣 전투기, 24대의 더글러스 SBD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18대의 어벤저 뇌격기를 운용하는 비행대와 항공단 지휘관에게 할당된 헬캣 1대로 구성되었다.
미국 육군 항공대의 380 폭격 비행단은 호주 다윈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동부 함대가 철수할 때 일본이 항공기를 파견하여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항모 공습 다음 날 밤 수라바야를 폭격할 예정이었다. 트랜섬 작전 당시 수라바야의 대공 방어에는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승무원이 있는 몇 개의 대공포가 포함되었다. 레이더 기지와 관측소 네트워크도 기뢰 부설 항공기를 탐지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도시에 주둔한 일본군에는 일본 육군의 제28 독립 혼성 여단과 일본 해군의 제2 남방 작전 함대 본부가 포함되었다.
3. 1. 연합군 함대 구성
3. 2. 훈련 및 정보
4. 공격
제67 기동 부대는 4월 30일에 출항하여 동부 함대의 첫 번째 부대가 되었다. 제65 및 제66 기동 부대는 5월 6일에 출항했다. 연합군 함선은 일본 비행장으로부터 최소 600마일(965.6064 킬로미터) 거리를 유지하는 항로로 엑스머스 만으로 이동하여 발견되거나 공격받는 것을 피했다. 항공모함의 항공대는 항해 중 수라바야에서 수행할 공격 훈련을 세 번 했다. 군함은 5월 14일과 15일에 엑스머스 만에 도착했다. 함선에 연료를 보급하는 동안 소머빌은 미국 제7함대 사령관인 토머스 C. 킨케이드 제독, 함대의 잠수함을 지휘하는 랄프 월도 크리스티 제독, 그리고 프리맨틀 주재 해군 장교인 커스버트 포프 준장과 만나 최근 정보를 논의했다.
동부 함대는 5월 15일 오후 엑스머스 만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향했다. 일본군에게 발각되지 않은 채 5월 17일 오전 6시 30분(현지 시간)에 발함 지점에 도착했다. 영국 잠수함 1척과 미국 잠수함 7척은 동부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수라바야, 말라카 해협의 남쪽 입구, 발리, 롬복, 순다 해협 근처에 배치되었다. 잠수함은 격추된 연합군 항공 승무원을 구조하고, 수라바야에서 탈출하려는 선박을 공격하며, 연합군 함대를 공격하려는 일본 군함을 요격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항공기는 두 개의 공격 부대로 편성되었다. A 부대는 ''일러스트리어스''에서 발진한 어벤저 9대,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12대, 커세어 8대의 호위로 구성되었다. A 부대의 어벤저는 브라트 엔지니어링 공장, 돈틀리스는 정유소를 폭격할 예정이었다. B 부대는 수라바야 항구의 선박과 부두 시설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어벤저 21대와 돈틀리스 6대로 구성되었으며 커세어 8대와 헬캣 12대의 호위를 받았다. ''사라토가''의 항공 그룹 사령관인 조셉 C. 클리프턴은 공격 당시 두 항공모함의 항공대를 이끌었다.[1][2] 모든 항공기는 오전 7시 20분까지 발진하여 나머지 부대와 함께 편대 대형을 갖추었다. 영국 어벤저 2대가 이륙 중 추락했고, 승무원은 구조되었다.
수라바야에 대한 공격은 오전 8시 30분에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접근하는 항공기를 감지하지 못했고 기습을 받았다. 두 부대는 잘 조율된 공격을 감행하여, A 부대는 남쪽에서 워노크로모로 접근하고 B 부대는 북쪽에서 항구를 공격했다. 일본 전투기는 한 대도 나타나지 않았고, 대공포는 대체로 무력했다. ''사라토가''의 어벤저 1대가 격추되었고, 승무원 2명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연합군 조종사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고 믿었다. 그들은 함선 10척을 손상시키고, 워노크로모 정유소와 브라트 엔지니어링 공장을 파괴했으며, 비행장에서 항공기 16대와 건물 여러 채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공격 부대가 오전 10시 50분에 항공모함에 착륙한 후, 동부 함대는 엑스머스 만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남서쪽으로 철수했다. 소머빌의 참모는 클리프턴이 귀환했을 때 보고를 요청하지 않았다. 그 결과, ''사라토가''의 사진 정찰기가 오후 3시에 ''퀸 엘리자베스''에 투하한 사진을 통해서야 일본 잠수함을 포함한 많은 가치 있는 목표물이 수라바야 항구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머빌은 나중에 5월 17일 오후에 두 번째 공격을 명령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트랜섬 작전을 지원한 8척의 잠수함은 격추된 비행사를 구출하는 데 필요하지 않았고, 수라바야에서 탈출하는 선박을 격침시키지도 않았다. 는 수라바야 북쪽에 배치되기 위해 이동하던 중 5월 11일 암본 근처에서 일본 호송선단을 공격하여 선박 1척을 격침시키고 여러 척을 손상시켰다. 는 5월 20일 순다 해협에서 화물선을 격침시켰지만, 호위 선박의 반격을 받았다. 잠수함은 오염된 식수나 세척 화학 물질에서 나오는 유독 가스 때문에 승무원이 아파서 다음 날 순찰을 중단해야 했다. 역사학자 클레이 블레어는 잠수함이 정기 순찰을 수행하거나 타위타위에 있는 주요 일본 해군 정박지 근처에 배치되었다면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동부 함대의 철수를 덮기 위해 계획된 수라바야에 대한 중폭격기 공습은 5월 17/18일 밤에 이루어졌다. 일곱 대의 컨솔리데이티드 B-24 리버레이터가 다윈에서 출격하여 서호주 코루나 다운스 비행장에서 연료를 보급받았다. 이후 수라바야로 이동하여 해체 폭탄으로 항구를 공격했다. 이로 인해 추가적인 화재와 피해가 발생했다. 서호주 얌피 사운드에서 비행한 RAAF 카탈리나도 와크데 상륙을 지원하기 위해 5월 중 도시 근처에 기뢰를 부설했다. 5월 20/21일 밤 제11 및 제43 비행대의 카탈리나가 수행한 기뢰 부설 작전은 항공모함 및 중폭격기 공습 이후 여전히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던 일본 방어군으로부터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호주 항공기 1대가 파괴되었다.
4. 1. 공습 개시
1944년 5월 17일 아침, 영국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와 미국 항공모함 사라토가를 주력으로 하는 미영 연합 기동 부대가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연합군 항공기는 수라바야의 군항과 비행장, 정유소 등에 대해 폭격 및 기총 소사를 가했다.일본 측은 기습 공격을 받아 전투기에 의한 요격 등은 할 수 없었다. 2일 전에는 해군의 제21통신대(수라바야 주둔)가 영국 기동 부대가 행동 중이라는 통신 분석 결과를 내놓았지만, 활용되지 못했다.
4. 2. 피해 상황
미영 연합 기동 부대는 1944년 5월 17일 아침, 일러스트리어스와 사라토가에서 발진한 항공기로 수라바야의 군항, 비행장, 정유소 등을 폭격 및 기총 소사했다. 일본 측은 기습 공격을 받아 전투기에 의한 요격 등을 할 수 없었다. 해군의 제21통신대(수라바야 주둔)가 2일 전 영국 기동 부대가 행동 중이라는 통신 분석 결과를 내놓았지만, 활용되지 못했다.4. 3. 연합군 철수 및 지원 작전
1944년 5월 17일 아침, 영국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와 미국 항공모함 사라토가를 주력으로 하는 미영 연합 기동 부대가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연합군 항공기는 수라바야의 군항과 비행장, 정유소 등에 대해 폭격 및 기총 소사를 가했다.일본 측은 기습 공격을 받아 전투기에 의한 요격 등은 할 수 없었다. 2일 전에는 해군의 제21통신대(수라바야 주둔)가 영국 기동 부대가 행동 중이라는 통신 분석 결과를 내놓았지만, 활용되지 못했다.
5. 결과 및 영향
''사라토가''와 이를 호위하는 미국 구축함 3척은 5월 18일 해질 무렵 동부 함대에서 분리되어 프리맨틀로 향했다. 동부 함대의 나머지 함선들은 다음날 아침 엑스마우스 만에 도착하여 다시 급유를 받은 후 해 질 무렵 실론으로 출항했다. ''애들레이드''와 동부 함대에 배속되었던 호주 구축함 한 척은 5월 19일 유조선 그룹이 떠난 후 엑스마우스 만을 출발하여 프리맨틀로 향했다.[6] 동부 함대는 5월 27일 실론으로 돌아왔다.[4] ''사라토가''는 6월 10일 워싱턴주 브레머턴에 도착했고, 정비를 받은 후 1944년 9월에 태평양 함대에 재합류했다.[4]
오퍼레이션 콕핏과 1944년에 동부 함대가 수행한 다른 여러 차례의 항공모함 습격 작전과 마찬가지로 오퍼레이션 트랜섬은 일본의 배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는 연합 함대가 동부 함대를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중앙 태평양에서 예상되는 주요 미국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전력을 보존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 지도부는 5월 27일 뉴기니 북부 해안 인근 비악에서 벌어진 미국의 상륙을 연합군의 주력 작전으로 잘못 해석하여 6월 10일 강력한 병력을 파견하여 오퍼레이션 콘으로 명명된 반격을 가했다. 이 공격은 미국이 중앙 태평양의 마리아나 제도를 침공하려 한다는 것이 명백해지면서 이틀 후에 취소되었고, 연합 함대는 6월 19일과 20일 사이에 벌어진 필리핀 해 해전에서 패배했다.
전투 결과, 육군 말랑 비행장에서는 격납고 1동 파괴 및 항공기 17기 소실[6], 해군 비행장에서는 전투기 2기와 육군 중폭격기 1기가 소실되었다.[5] 정박 중인 함선의 피해도 커서, 「제101호 기뢰해제 특무정」, 「제103호 구축 특무정」, 교통선 1척과 대발동정 2척이 침몰했다. 「제36호 초계정」과 「신령환」이 대파되었으며, 「제108호 구축 특무정」도 침수되었다.[5] 또한, 우오노코로모 제유소도 대파되었다. 사상자는 약 200명이었다.[6]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연합군의 손해는 항공기 3기가 대공포에 격추되었고, 탑승원 약간이 포로가 되었다.[6]
트랜섬 작전에 의한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기동 부대 습격의 우려가 높은 인도양 방면의 항공 부대를 온존하기 위해 후퇴시키기로 했다. 안다만 제도 포트블레어의 육군 전투기(총 7기)는 팔렘방 방위 강화를 위해 철수했다. 해군의 제28항공전대도 제705항공대의 수마트라 섬 코타라자 기지에서의 초계를 축소하고 주력을 사마랑으로 이동시켰다. 인도양 방면은 원래부터 일본군 항공 전력이 적었지만, 결국 얼마 남지 않은 대잠용 수상기만이 남게 되었다.
5. 1. 일본군의 대응
트랜섬 작전으로 일본군은 수라바야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육군 말랑 비행장에서는 격납고 1동이 파괴되고 항공기 17기가 소실되었으며,[6] 해군 비행장에서는 전투기 2기와 육군 중폭격기 1기가 파괴되었다.[5] 항구에서는 「제101호형 기뢰해제 특무정」, 「제103호형 구축 특무정」, 교통선 1척, 대발동정 2척이 침몰했고, 「제36호 초계정」, 「신령환」, 「제103호형 구축 특무정|제108호 구축 특무정」이 크게 파손되었다.[5] 우오노코로모 제유소도 큰 피해를 입었으며, 사상자는 약 200명에 달했다.[6] 일본 측은 연합군 항공기 3기를 격추하고 조종사 일부를 포로로 잡았다고 기록했다.[6]하지만, 콕핏 작전을 비롯한 동부 함대의 다른 항공모함 공격과 마찬가지로, 트랜섬 작전은 일본군의 배치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4] 일본군은 연합 함대를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중앙 태평양에서 예상되는 미군의 주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전력을 보존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트랜섬 작전 이후, 기동부대의 습격 가능성이 높은 인도양 방면의 항공 부대를 보존하기 위해 후퇴시켰다. 안다만 제도 포트블레어의 육군 전투기 7기는 팔렘방 방어를 위해 철수했고, 해군 제28항공전대는 수마트라 섬 코타라자 기지에서의 초계를 축소하고 주력을 사마랑으로 이동시켰다. 이로 인해 인도양 방면에는 대잠용 수상기만이 남게 되었다.
5. 2. 연합군의 평가 및 교훈
트랜섬 작전의 피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스티븐 로스킬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해군의 공식 역사가로, 연합군이 "항구에 정박해 있던 많은 배가 침몰하거나 손상되었고, 석유 정제소와 해군 기지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고 믿었지만, 일본 기록은 "자국 선박이나 해안 시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는 "해안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연합군 항공 승무원들이 "습격 결과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고했다"고 판단했다. G. 허먼 길은 호주 해군의 공식 역사가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으며, 호주 해군 참모총장 가이 로일 제독이 트랜섬 작전은 군사적으로 의심스러운 가치를 지녔다고 언급했음을 지적했다. 에드윈 그레이와 데이비드 K. 브라운도 습격이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반면, 다른 역사학자들은 이 공격을 연합국의 승리로 간주한다. 스탠리 커비는 워노크로모 석유 정제소와 기타 산업 시설에 불이 붙었고, 해군 조선소와 다른 두 개의 부두가 폭격당했으며, 12대의 일본 항공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고 기록했다. H.P. 윌모트는 이 습격으로 워노크로모 석유 정제소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조선소에 피해"를 입혔으며, 기뢰 제거함, 잠수함 추적기 및 해군 화물선이 침몰했다고 언급했다. 위르겐 로흐버는 12대의 일본 항공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작은 화물선 한 척이 침몰했으며, 초계정이 수리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었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홉스는 이 작전이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했는데, 워노크로모 석유 정제소가 "전소"되었고, 해군 조선소 시설이 손상되었으며, 상선이 침몰했기 때문이다. 마커스 포크너는 트랜섬 작전이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고 기록했다.
로스킬과 홉스는 이 공격이 영국 해군에게 항공모함 공격 작전에 대한 중요한 경험과 우수한 미국 항공모함 전술에 대한 노출을 제공했다는 점에 동의한다. 영국 해군은 각 목표에 대해 최소 두 번의 공격을 계획해야 한다는 점과 항공모함에서 비행할 수 있는 사진 정찰기를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 등의 교훈을 얻었다. 그레이는 이 작전을 통해 영국 해군이 해상에서 전함을 보급하는 능력을 개선해야 함을 보여주었다고 언급했다.
전투 결과, 일본군은 육군 말랑 비행장에서 격납고 1동 파괴 및 항공기 17기 소실, 해군 비행장에서 전투기 2기와 육군 중폭격기 1기가 소실되었다.[6] 정박 중인 함선의 피해도 커서, 「제101호 기뢰해제 특무정」, 「제103호 구축 특무정」, 교통선 1척과 대발동정 2척이 침몰했다. 「제36호 초계정」과 「신령환」이 대파되었으며, 「제108호 구축 특무정」도 침수되었다.[5] 또한, 우오노코로모 제유소도 대파되었다. 사상자는 약 200명이었다.[6]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연합군의 손해는 항공기 3기가 대공포에 격추되었고, 탑승원 약간이 포로가 되었다.[6] 트랜섬 작전으로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인도양 방면의 항공 부대를 온존하기 위해 후퇴시켰다.
5. 3. 전후 평가 (한국의 관점)
트랜섬 작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스티븐 로스킬은 연합군이 전쟁 중에는 항구에 정박해 있던 많은 배가 침몰하거나 손상되었고, 석유 정제소와 해군 기지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고 믿었지만, 일본 기록은 자국 선박이나 해안 시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반면, 스탠리 커비는 워노크로모 석유 정제소와 기타 산업 시설에 불이 붙었고, 해군 조선소와 다른 두 개의 부두가 폭격당했으며, 12대의 일본 항공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고 기록했다. 위르겐 로흐버는 12대의 일본 항공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작은 화물선 한 척이 침몰했으며, 초계정이 수리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었다고 언급했다.일본군 측 기록에 따르면, 연합군의 손해는 항공기 3기가 대공포에 격추되었고, 탑승원 약간이 포로가 되었다.
이 작전은 영국 해군에게 항공모함 공격 작전에 대한 중요한 경험과 우수한 미국 항공모함 전술에 대한 노출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티븐 로스킬은 소머빌 제독이 ''사라토가''의 승무원들이 비행 작전을 수행하는 방식을 모방하기로 결정했다고 언급했다.
트랜섬 작전은 일본 제국에 맞선 연합군의 중요한 군사 작전 중 하나로 평가된다. 특히, 이 작전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간주된다.
6. 같이 보기
참조
[1]
뉴스
Joseph C. Clifton, Admiral, 59, dies
https://timesmachine[...]
1967-12-26
[2]
웹사이트
Joseph C. Clifton
https://valor.milita[...]
Sightline Media Group
2021-05-24
[3]
웹사이트
Angler (SS-240)
https://www.history.[...]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2021-06-26
[4]
웹사이트
Saratoga V (CV-3)
https://www.history.[...]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2021-07-25
[5]
서적
南西方面海軍作戦 第二段作戦以降
戦史叢書
[6]
서적
南西方面海軍作戦 第二段作戦以降
戦史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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