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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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니스트 킹은 1878년 오하이오주 로레인에서 태어나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 해군에서 복무한 군인이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해군 십자 훈장, 해군 공로 훈장을 받았으며, 항공모함 렉싱턴의 함장, 해군 항공국장, 대서양 함대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합중국 함대 총사령관 겸 해군 작전부장으로 해군 작전을 총괄하며, 대서양 전선에서 독일 U-보트의 위협을 억제하고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해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1944년 해군 원수로 진급했으며, 전후에는 해군 작전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해군 장관 고문을 지냈다. 그는 상관과 부하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지만, 뛰어난 해군 지휘 능력과 전략적 식견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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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킹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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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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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어니 레이 |
출생일 | 1878년 11월 23일 |
출생지 | 오하이오주 로레인 |
사망일 | 1956년 6월 25일 |
사망지 | 메인주 키터리 |
매장지 | 메릴랜드주 애너폴리스의 미국 해군사관학교 묘지 |
소속 | 미국 해군 |
복무 기간 | 1901년–1956년 |
최종 계급 | 해군 원수 |
지휘 | |
주요 지휘 | 해군 작전 사령관 미국 함대 대서양 함대 항공국 노퍽 해군 기지 해군 대학원 |
참전 | |
주요 전투/전쟁 | 미서전쟁 멕시코 혁명 베라크루스 점령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대서양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대서양 전투 |
훈장 | |
훈장 내역 | 해군 십자 훈장 해군 공로 훈장 (3회) |
기타 이력 | 해군 역사 재단 회장 |
2. 생애
오하이오주 로레인에서 제임스 클라이즈데일 킹과 엘리자베스 킴 킹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킹은 아일랜드계 이민자 출신으로 이리호에서 뱃일과 교량 공사원을 거쳐 철도 수리 공장 직원이었다. 외조부는 영국 플리머스 출신의 선박공으로 미국으로 건너와 정유 회사에서 근무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 대신 직업을 택하려 했으나, 로레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97년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순양함 샌프란시스코 C-5에 승조원으로 참전했다.[3] 1901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졸업 성적은 67명 중 4등이었다.[3] 졸업식 연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부통령이 맡았다.[3] 졸업 후 소위 후보생으로 전함 일리노이 BB-7에 승조원으로 배치되었으나, 부장과의 갈등으로 아시아 함대 소속 순양함 신시내티 C-7로 전속되었다.[3] 1903년, 정식으로 소위로 임관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킹은 헨리 T. 메이요 부제독의 참모로 영국에 건너가 영국 해군 함선에 승선하여 작전에 참관했다.[3] "대서양 함대 참모장으로서 그의 직무상 탁월한 공로"를 인정받아 해군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3] 전쟁이 끝난 후, 킹은 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대학원의 수장이 되었다.
1925년 충돌 사고로 침몰한 잠수함 S-51의 인양 작업을 지휘하여 첫 번째 해군 공로 훈장을 받았다. 1928년에는 잠수함 S-4 인양에 성공하여 두 번째 해군 공로 훈장을 받았다.[35] 48세에 파일럿 자격을 취득한 후 항공모함 렉싱턴의 함장이 되었다. 렉싱턴 함장 근무 후 해군대학교 고급 과정에서 전략을 연구했다.
1933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해군 항공국장에 취임했다. 1938년 항공함대사령관으로 중장으로 진급했다. 1939년 장관회의(General Board) 멤버, 1940년 대서양 함대 사령관에 취임했고, 1941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진주만 공격 직후,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의 지명을 받아 1941년 12월 16일 미합중국 함대 총사령관(COMINCH)에 임명되었다.[39] 1942년 3월 해군 작전부장(CNO) 해럴드 스터크 대장이 경질되자, 이를 겸임하여 해군 작전 지휘를 총괄하게 되었다.[41] 1944년 12월 17일, 전시 특례로 해군 원수로 진급하였다.[46]
1945년 12월 15일, 해군작전부장 자리를 체스터 니미츠에게 넘기고 해군장관의 고문이 되었다. 이후 워싱턴 D.C.에서 은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1947년 뇌출혈을 앓게 되면서 베데스다 해군 병원에 입원했고, 이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18]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9월 29일 행정 명령 9635호를 통해 해군 장관과 해군 작전 참모총장의 우선권을 회복시켰다. 이로 인해 10월 10일 해군 작전 사령관(COMINCH) 직은 폐지되었다.[18]
1956년 6월 26일 키터리에서 77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워싱턴 D.C.로 운구되어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에 있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묘지에 안장되었다.[21]
은퇴 후 킹은 워싱턴 D.C.에서 거주하며 해군 역사 재단 회장(1946~1949년)을 역임했고,[19]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 해군 작전을 다룬 사진 역사서인 ''전투 배치! 행동하는 당신의 해군''의 서문을 쓰고 집필을 도왔다.[20] 또한 월터 뮤어 화이트힐과 함께 자서전 ''해군 원수 킹: 해군 기록''(1952년 출판)을 공동 집필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킹은 1878년 11월 23일 오하이오주 로레인에서 제임스 클라이즈데일 킹과 엘리자베스 킴 킹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계 이민자 출신으로 이리호에서 뱃일과 교량 공사원을 거쳐 철도 수리 공장 직원이었다. 그의 외조부는 영국 플리머스 출신의 선박공으로 미국으로 건너와 정유 회사에서 근무했다.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진학 대신 직업을 택하려 했으나, 결국 로레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97년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해군사관학교 재학 중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순양함 샌프란시스코 C-5에 승조원으로 참전했다.[3] 1901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졸업 성적은 67명 중 4등이었다.[3] 졸업식 연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부통령이 맡았다.[3]
졸업 후 소위 후보생으로 전함 일리노이 BB-7에 승조원으로 배치되었으나, 부장과의 갈등으로 아시아 함대 소속 순양함 신시내티 C-7로 전속되었다.[3]
2. 2. 해군 복무 초기
1901년에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킹은 소위 후보생으로 전함 일리노이에 배속되었으나, 부장과의 갈등으로 인해 곧 아시아 함대 소속 순양함 신시내티로 전속되었다.[34] 킹은 신시내티의 제1분대장으로서 "엄격하지만 공정"을 모토로 부하들을 이끌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제창한 해군 사격 콩쿠르에서 분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신시내티가 일본 우라가에 입항했을 때, 킹은 가마쿠라 대불을 보기 위해 가마쿠라를 방문했다. 그러나 관광 도중 소매치기를 당해 지갑을 잃어버렸다. 가마쿠라역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킹은 역무원에게 자신의 신분과 상황을 설명하고 요코스카행 표를 후불로 구입하려 했으나, 역무원은 현금 지불만을 요구했다. 킹은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역무원은 나를 몹시 수상하게 여겼다. 외국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믿음을 가진 것 같았다. 현금이 없으면 표를 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라고 말했다. 결국 킹은 외투를 전당포에 맡기고 요코스카행 3등석 표를 구입해야 했다.[34]
일주일 후 킹은 돈을 지불하고 외투를 되찾았지만, "매우 불쾌해서 요금만 지불하고 팁은 1센트도 주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이 사건과 러일 전쟁 승리 후 일본인들이 외국인에게 보인 오만한 태도는 킹에게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었다.[34]
1903년, 킹은 정식으로 소위로 임관하였다.
2. 3. 제1차 세계 대전 및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한 후, 킹은 헨리 T. 메이요 부제독의 참모로 영국에 건너가 영국 해군을 자주 방문하고 영국 함선에 승선하여 작전에 참관했다.[3] "대서양 함대 참모장으로서 그의 직무상 탁월한 공로"를 인정받아 해군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3] 전쟁이 끝난 후, 킹은 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대학원의 수장이 되었다.1925년에는 충돌 사고로 침몰한 잠수함 S-51의 인양 작업을 지휘하여 첫 번째 해군 공로 훈장을 받았다. 1928년에는 잠수함 S-4 인양에 성공하여 두 번째 해군 공로 훈장을 받았다.[35]
48세에 파일럿 자격을 취득한 후 항공모함 렉싱턴의 함장이 되었다. 킹의 지휘 아래 렉싱턴의 사기는 크게 향상되었다.[36]
렉싱턴 함장 근무 후 해군대학교 고급 과정에서 전략을 연구했다. 이때 대일 전략 보고서에서 일본의 기습 전략을 예측했다.[37]
1933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해군 항공국장에 취임했다. 1938년에는 항공함대사령관으로 중장으로 진급했다. 1939년에는 장관회의(General Board) 멤버가 되었는데, 평시에는 한직이었으나 칼 빈슨 하원의원의 눈에 띄게 된다. 1940년 양양 함대법 성립 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명으로 대서양 함대 사령관에 취임했고, 1941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2. 4. 제2차 세계 대전
진주만 공격 직후,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의 지명을 받아 1941년 12월 16일 미합중국 함대 총사령관(COMINCH)에 임명되었다.[39] 1942년 3월에는 해군 작전부장(CNO) 해럴드 스터크 대장이 경질되자, 이를 겸임하여 해군 작전 지휘를 총괄하게 되었다.[41] 이는 미 해군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킹은 '유럽 우선주의'에 맞서 태평양 전선에서의 승리에 주력했다. 그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필리핀 공략 우선 전략에 반대하고, 대만 공략을 통해 일본의 보급선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6] 이후 육군과의 협력을 통해 일본 본토 공략 작전에는 찬성했다.
1944년 12월 17일, 전시 특례로 해군 원수로 진급하였다.[46]
2. 5. 전후 및 말년
1945년 12월 15일, 킹은 해군작전부장 자리를 체스터 니미츠에게 넘기고 해군장관의 고문이 되었다. 이후 워싱턴 D.C.에서 은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1947년 뇌출혈을 앓게 되면서 베데스다 해군 병원에 입원했고, 이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18]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9월 29일 행정 명령 9635호를 통해 해군 장관과 해군 작전 참모총장의 우선권을 회복시켰다. 이로 인해 10월 10일 해군 작전 사령관(COMINCH) 직은 폐지되었다.[18] 킹은 니미츠를 후임 해군 작전 참모총장으로 추천했지만, 포레스탈은 에드워즈를 원했다. 킹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이 문제를 해결했고, 결국 니미츠가 임명되었다. 다만, 포레스탈은 니미츠의 임기를 4년이 아닌 2년으로 제한하여 자신의 권한을 행사했다.[49]
1956년 6월 26일 키터리에서 77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워싱턴 D.C.로 운구되어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에 있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묘지에 안장되었다.[21]
은퇴 후 킹은 워싱턴 D.C.에서 거주하며 해군 역사 재단 회장(1946~1949년)을 역임했고,[19]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 해군 작전을 다룬 사진 역사서인 ''전투 배치! 행동하는 당신의 해군''의 서문을 쓰고 집필을 도왔다.[20] 또한 월터 뮤어 화이트힐과 함께 자서전 ''해군 원수 킹: 해군 기록''(1952년 출판)을 공동 집필했다.
패러것급 구축함 5번함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또한 사세보 해군 기지 내의 미국 국방부 교육처 학교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3. 주요 업적 및 평가
어니스트 킹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 해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그의 주요 업적과 평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킹은 유능한 해군 장교였지만, 상사와 부하 모두에게 미움을 받는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능력은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특히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사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의 불화, 제임스 포레스탈 해군 장관과의 갈등으로 인해 2차 대전 승리 후에는 다소 불편한 위치에 놓이기도 했다.
해군 사학자 새뮤얼 엘리엇 모리슨은 킹을 "선원 중의 선원(sailor's sailor)"이라고 평가했다.[55] 킹은 초급 장교 시절부터 부하들을 잘 이끌었으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해군 최고 지휘관(COMINCH) 취임을 요청받았을 때 "문제가 생기면 망할 놈들(sons-of-bitches)을 불러올 것"이라고 언급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또한 "토치 램프로 수염을 깎는다", "방뢰망 커터로 발톱을 깎는다"는 등의 과격한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6]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킹을 해군과의 협력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후 킹이 합리적인 주장에 귀 기울이는 인물임을 깨닫고 "해군에 한 명의 친구를 얻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아이젠하워가 북아프리카 상륙 작전(토치 작전)의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발탁된 것은 킹의 추천 덕분이었다.[57][58]
킹은 개인적으로 일본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국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특히 대전 중 영국의 대미 의존적 태도에 비판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대서양 방면 의사 결정 회의에서 긴장감이 조성되기도 했다.
3. 1. 제2차 세계 대전 지휘
진주만 공격 이후, 허즈번드 킴벨 대장이 해임되자, 1941년 12월 16일 프랭크 녹스 해군장관의 지명으로 킹은 합중국 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2년 3월에는 해군작전부장 해롤드 스터크 대장이 경질되면서, 킹은 해군 역사상 최초로 합중국 함대 사령관과 해군작전부장을 겸임하게 되었다.[22]1944년 12월 17일, 킹은 전시 특례로 원수로 진급했다. 그는 육해군참모장회의에서 "유럽제일주의"에 맞서 태평양 전쟁 승리에 주력했다. 필리핀 공략을 우선시한 더글러스 맥아더의 전략에 반대하며 타이완 공략을 통한 보급선 차단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육군과 협력하여 일본 본토 공략 작전에 찬성했다.[22]
킹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솔로몬 제도에서의 작전을 제안했다. 지휘 체계 논의 후, 과달카날 상륙이 성공했지만, 사보섬 해전에서 연합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 킹은 남태평양 상황 악화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선에 우선순위를 둔 마셜과 아놀드에게 추가 자원을 요청했다. 결국 루스벨트의 명령으로 과달카날을 사수하게 되었고, 1943년 2월까지 전투가 계속되었다.[22]
1943년 9월, 킹은 진주만에서 체스터 니미츠와 만나 타라와 환초와 나우루 점령 작전인 갈바닉 작전을 논의했다. 제5함대 사령관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는 마킨 환초 점령을 제안했고, 킹은 결국 동의했다. 또한, 킹은 마크 14 어뢰의 문제점을 보고받고, 마크 18 어뢰 개발을 촉구했다.[22]
킹은 마리아나 제도 점령을 강력히 주장했는데, 이는 일본 통신망 차단과 B-29 슈퍼포트리스 폭격기의 일본 본토 공습 기지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44년 후반, 루손 공격과 포르모사 공격을 두고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니미츠와 맥아더의 계획대로 루손 점령 후 오키나와를 점령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22]
대서양 전선에서는 카를 되니츠가 지휘하는 독일 유보트(U-boat)의 공격에 맞서, 킹은 해안 호송 시스템을 구축하고 대잠수함 작전을 강화했다. 구축함 호위함 건조와 장거리 해상 초계기 도입을 통해 U-보트 위협을 억제했다. 1943년 5월, 킹은 대잠수함 작전 조정을 위해 제10함대를 창설했다.[22]
3. 2. 해군 항공 발전 기여
킹은 1926년부터 1936년까지 연평균 150시간을 비행했다.[22] 1927년 1월, 펜사콜라 해군 항공 기지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았고, 1927년 5월 26일 해군 조종사 번호 3368번으로 날개를 받았다.[22] 그해 미국 의회는 모든 항공모함, 수상기 수송함, 항공 기지 지휘관이 자격을 갖춘 해군 조종사 또는 해군 비행 관측 장교여야 한다는 법(10 USC Sec. 5942)을 통과시켰다. 1928년에는 렉싱턴 함장을 역임하며 항공모함 운용 방식을 정립하는데 기여했다.
1933년에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항공국장이 되었고,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킹은 항공국장으로서 항공 생도 훈련 프로그램을 설립하여 대학 졸업생을 항공사관으로 모집하는 등 해군 항공력 강화에 힘썼다.
3. 3. 전략적 식견
어니스트 킹은 해군대학교 고급과정에서 전략을 배웠다. 이때 대일전략을 검토하는 과제에서 "적 오렌지(일본)는 미국을 불리한 대외전으로 이끌어서 타격을 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오렌지는 필리핀, 나아가서 하와이를 공격할 가능성도 있으며 미국은 오렌지와의 싸움에서 몹시 불리한 수단과 방법 밖에 주어지지 않은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예측해야한다"라고 작성하였다.[4]그는 "가마쿠라에서의 체험은 내게 일본인의 두 가지 특성을 가르쳐주었다. 하나는 지갑을 뺏는데 폭력보다는 허술한 틈을 노리는 기술을 중시하는 점이고 또 하나는 역무원의 태도에서처럼 상대의 불리함을 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특성이 군사적인 면에서 발휘된다면 일본의 전쟁수행 방식이 기습과 여러 방향에서의 전진기지 추진을 기초로 할 것이라는 걸 쉽게 상상할 수 있을 터이다."라며 일본의 기습전략을 예측했다.[4]
1938년 진주만에 대한 자체적인 성공적인 모의 해상 공습을 실시하여 1932년 전쟁 게임 결과를 입증, 기지가 공중 공격에 위험할 정도로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이 진주만 공격으로 기지를 공격할 때까지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
3. 4. 리더십
킹은 자서전에서 대규모 전쟁에서 부하의 주도성의 필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했지만, CINCLANT(대서양 함대 사령관) 시절에 그 지휘 철학을 명시했다. 1941년 1월 21일 CINCLANT 명령 제53호 "사령부 훈련 - 명령 및 지시에서의 세부 사항 과다"에서는 장성 및 군 지휘관이 부하에게 "무엇을" 할지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명령·지시하는 것이 표준적인 관행이 되었지만, 명령에서 절대 필요한 요소는 "부하의 주도성"이라고 언급했다.[50] 그는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며, 부하의 임무에 대해 "무엇을", "언제", "어디서", "왜" 이상으로 "어떻게"까지 지시할 시간도 기회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부하의 지휘관이 "유능"하지 않다고 판명될 때까지는 "유능"하다는 전제하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명령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부하가 "스스로 선견지명을 발휘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고 했다.킹은 1941년 4월 22일 CINCLANT 명령 제328호 "사령부 훈련 - 주도성의 올바른 사용"에서 제53호의 원칙을 반복하는 동시에 "분업"과 "분권화"를 설파하며, 사령부의 효과적인 훈련에는 힘든 노력이 요구된다고 했다.[51] 킹은 본래 상세한 명령을 내리는 타입이었지만, COMPATFOR, CINCLANT로서 대서양 전역에서 독일 해군과의 "선전포고 없는 전쟁"을 맡게 되자, 모든 것을 직접 지휘하는 것은 불가능해져 스타일 변경을 강요받았다.[52]
전사 연구에 열심인 킹은 대위 시절에 나폴레옹 전쟁을 연구하여, "나폴레옹식 시스템의 큰 약점은 나폴레옹의 세세한 감독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 나폴레옹 전쟁 연구에서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은 정반대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즉 부하들에게 독립적인 행동 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독일은 나폴레옹 전쟁 연구에서 부하들의 주도성 원칙을 발전시켰으며, 그들의 전체 군사 교리는 그것에 기초했다"라고 결론 내렸다.[53] 킹은 CINCLANT 명령을 내린 이유에 대해 "최고 사령관은 불필요한 세부 사항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비로소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달성할 시간을 얻을 수 있다. …… 사령관은 그만이 책임을 져야 하는 미래의 부대 전개 계획과 전체적인 결단에 집중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54]
4. 논란 및 비판
킹은 평소 일본인과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영국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의 미국 의존적인 자세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대서양 방면 의사 결정 회의에 킹이 참석하면 회의장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했다.[17]
킹은 상관과 부하 모두에게 미움을 받는 성격이었지만, 해군 장교로서의 능력은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 막바지에 해군을 편애하던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하고, 후임인 트루먼 대통령은 킹을 싫어했으며, 포레스탈 해군 장관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때문에 킹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17]
1944년 9월 퀘벡에서 열린 옥타곤 회담에서 킹은 일본에 대한 해군 작전은 미국이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태평양에서의 영국 해군력 존재에 반대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킹이 영국 혐오증을 가지고 있었고, 영국이 태평양에서 일본을 격파하는 데 따른 영광을 차지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킹은 영국 해군력을 태평양에서 유지하는 데 따르는 물류적, 기술적 어려움을 언급하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실제로 미국 해군은 영국 해군과 오랫동안 경쟁 관계에 있었다.[17]
킹은 종종 영국 혐오자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자신의 영국계 혈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영국 방문을 즐겼으며, 많은 영국 동료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다. 영국 공군 장교가 킹이 반(反)영국적이라고 불평하자, 존 딜 육군 원수는 킹이 반영국적이라기보다는 친(親)미국적이라고 말했다. 딜이 입원했을 때 킹은 매일 그를 방문하기도 했다.[17]
1944년 10월, 제임스 소머빌 제독이 워싱턴 D.C.에서 영국 해군 대표단을 이끌게 되었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악명 높은 까다롭고 반(反)영국적인 킹과 매우 좋은 관계를 맺었다.[17]
5. 기타
신시내티가 우라가에 입항했을 때 킹은 가마쿠라 대불을 구경하기 위해 가마쿠라로 갔다. 하지만 구경하던 중 소매치기를 당해 지갑을 잃어버렸다. 가마쿠라역에서 역무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후불로 요코스카행 표를 구입하려고 했지만, 역무원은 현금을 요구했다. 킹은 오버코트를 전당포에 잡혀 요코스카행 3등석 표를 샀다.[34]
일주일 후 돈을 주고 오버코트를 찾았지만 팁은 주지 않았다. 이 사건과 러일전쟁 승리의 영향으로 백인에 대해 오만방자한 태도를 취하던 일본인에게 나쁜 인상을 품게 되었다.[34]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함선으로는 유도 미사일 구축함 USS 킹 (DDG-41)과 패러것급 구축함 5번함 USS 킹이 있다.[23] 사세보 해군 시설 내 학교도 킹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http://www.king-hs.pac.dodea.edu/ 공식 사이트]).[24]
5. 1. 일본에서의 경험
신시내티가 우라가에 입항했을 때 킹은 가마쿠라 대불을 구경하기 위해 가마쿠라로 향했다. 하지만 구경하던 중 소매치기를 당해 지갑을 잃어버렸다. 가마쿠라역에 도착해서야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킹은 역무원에게 자신의 신분과 사정을 설명하고 후불로 요코스카행 표를 구입하려고 했지만, 역무원은 끝까지 현금 낼 것을 요구했다. 킹은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역무원은 나를 몹시 수상히 여기고 있었다. 혹은 외국인은 죄다 거짓말쟁이라는 신앙이라도 믿고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다. 어찌 되었든 현금이 없으면 표를 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본관은 오버코트를 전당포에 잡혀서 요코스카행 3등석 표를 샀다."[34]일주일 후 돈을 주고 오버코트를 다시 찾아왔지만 "대단히 불쾌해서 전당포에 요금만 내고 팁은 1센트도 주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이 사건과 러일전쟁 승리의 영향으로 백인에 대해 오만방자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일본인에게 나쁜 인상을 품게 되었다.[34]
5. 2. 명명된 함선 및 시설
유도 미사일 구축함 USS 킹 (DDG-41)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23] 패러것급 구축함 5번함 USS 킹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또한, 사세보 해군 시설 내에 있는 미군 및 군속 자녀들을 위한 학교도 킹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http://www.king-hs.pac.dodea.edu/ 공식 사이트]).[2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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