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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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는 페루의 정치인이자 건축가로, 1912년 리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인민행동당을 창당하여 1963년과 1980년에 페루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두 차례의 임기를 수행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사회 개혁과 국가 발전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으나, 경제난과 테러,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벨라운데는 1968년 군사 쿠데타로 실각한 후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1985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종신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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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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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이름 | 페르난도 벨라운데 테리 |
원어 이름 | Fernando Belaúnde Terry |
출생일 | 1912년 10월 7일 |
출생지 | 페루 리마 |
사망일 | 2002년 6월 4일 |
사망지 | 페루 리마 |
직업 | 건축가 |
학력 | 마이애미 대학교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
정당 | 인민행동당 |
배우자 | 비올레타 코레아 밀러 카롤라 아우브리 브라보 |
자녀 | 3 |
서명 | 서명 |
대통령 재임 (1차) | |
직책 | 제49대 페루 대통령 |
임기 시작 | 1963년 7월 28일 |
임기 종료 | 1968년 10월 3일 |
전임 | 니콜라스 린들레이 로페스 (군사정부 대통령) |
후임 |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군사정부 대통령) |
부통령 | 에드가르도 세오아네 마리오 폴라르 우가르테체 |
총리 | 훌리오 오스카르 트렐레스 몬테스 페르난도 슈발브 다니엘 베세라 데 라 플로르 에드가르도 세오아네 코랄레스 라울 페레로 레바글리아티 오스왈도 에르셀레스 가르시아 미겔 무히카 가요 |
대통령 재임 (2차) | |
직책 | 제52대 페루 대통령 |
임기 시작 | 1980년 7월 28일 |
임기 종료 | 1985년 7월 28일 |
전임 | 프란시스코 모랄레스 베르무데스 (군사정부 대통령) |
후임 | 알란 가르시아 |
부통령 | 페르난도 슈발브 하비에르 알바 오를란디니 |
총리 | 마누엘 우요아 엘리아스 페르난도 슈발브 산드로 마리아테기 키아페 루이스 페르코비치 로카 |
의회 의원 | |
직책 | 종신 상원의원 (전직 대통령 자격) |
임기 시작 | 1985년 7월 26일 |
임기 종료 | 1992년 4월 5일 |
직책 | 하원 의원 |
선거구 | 리마 |
임기 시작 | 1945년 7월 28일 |
임기 종료 | 1948년 10월 29일 |
정당 활동 | |
직책 | 인민행동당 대표 |
임기 시작 | 1956년 7월 7일 |
임기 종료 | 2001년 |
전임 | 당 창립 |
후임 | 발렌틴 파니아과 (당 대표) |
2. 어린 시절과 교육
벨라운데는 1912년 10월 7일 리마에서 교사였던 라파엘 벨라운데 디아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에스파냐, 프랑스, 영국계 혈통을 이어받았다.
벨라운데의 정치 경력은 1944년 호세 부스타만테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페루 민족민주전선의 공동 창립으로 시작되었다. 1948년 마누엘 오드리아 장군의 쿠데타로 민주 선거가 중단될 때까지 페루 의회에서 활동했다.
벨라운데는 정치학을 공부했으나 조각가의 길을 걸었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조각에 관한 내용을 배웠다. 페루로 돌아와서는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1][2] 그는 리마의 사그라도스 코라소네스 레콜레타(Sagrados Corazones Recoleta) 학교에 다녔다.[3]
아우구스토 B. 레기아의 독재 시대 동안, 아버지 라파엘과 삼촌 빅토르 안드레스 베라운데(Víctor Andrés Belaúnde)의 정치 활동이 박해받자, 가족은 1924년 프랑스로 이주했다. 페르난도는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공학 분야의 초기 대학 교육을 받았다.
1930년부터 1935년까지 베라운데는 미국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는데, 처음에는 마이애미 대학교(아버지도 강의했던 곳)에 다녔고, 1935년에는 텍사스 오스틴 대학교로 옮겨 건축학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후 친미적인 인물이 되었고 영어에도 능숙해져서 "프레드 블런디(Fred Blundy)"라고 불리기도 했다.[2]
이후 멕시코로 이주하여 잠시 건축가로 일했지만, 1936년 페루로 돌아와 개인 주택 설계 일을 시작했다. 1937년에는 인테리어 디자인, 일반 도시계획, 그리고 페루가 당면한 주택 문제를 다룬 ''엘 아르키텍토 페루아노(El Arquitecto Peruano)''("페루 건축가")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이는 페루 건축가 협회와 페루 도시계획 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베라운데는 전국과 해외에서 정부의 공공 주택 컨설턴트가 되었다. 1943년, 리마의 에스쿠엘라 나시오날 데 인헤니에로스(Escuela Nacional de Ingenieros)에서 건축학과 도시계획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토목공학 및 건축학과 학장이 되었다. 베라운데는 또한 다른 교수들과 학생들과 함께 1955년 건축학과 건설을 지휘했다.
3. 정치 경력
1956년 오드리아 독재 정권이 선거를 실시하자 벨라운데는 다시 정치 무대로 돌아왔다. 그는 개혁 성향의 대학생들로 구성된 민주 청년 전국 전선의 명단을 이끌었다. 1956년 대선에서 국가 선거 위원회가 그의 입후보 등록을 거부하자,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면서 "망게라소(manguerazo)" (물세례) 사건으로 악명을 얻었다. 경찰의 물대포 진압에 맞서 페루 국기를 들고 최후통첩을 전달하는 그의 모습은 ''카레타스(Caretas)''지에 "리더는 이렇게 탄생한다"라는 기사로 실렸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벨라운데는 독재 정권이 지지한 마누엘 프라도에게 패배했다.
3. 1. 정치 입문
벨라운데의 정치 경력은 1944년 호세 부스타만테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페루 민족민주전선의 공동 창립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1948년 마누엘 오드리아 장군의 쿠데타로 민주 선거가 중단될 때까지 페루 의회에서 활동했다.
벨라운데는 1956년 오드리아 독재 정권이 선거를 실시하자 다시 정치 무대로 돌아왔다. 그는 개혁 성향의 대학생들로 구성된 민주 청년 전국 전선이 제출한 명단을 이끌었는데, 이들 중 일부는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1956년 초 독재 정권에 의해 폐간된 ''라 프렌사'' 신문을 원칙적으로 지지한 것이 민주 청년 전선 지도부로 하여금 그에게 명단을 이끌 것을 제안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3. 2. 인민행동당 창당과 대선 도전
1956년 7월 쿠스코 지역 친체로스에서 중도우파 정당인 인민행동당을 창당했다. 벨라운데는 현대 사회민주주의적 맥락에서 공동체와 협력이라는 원주민 잉카 전통을 되살리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며, 친올리가르키 우익과 좌익 APRA 및 공산당의 급진주의 사이에 정당을 위치시켰다.[1]
그는 전국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인민행동의 이념적 원칙을 구체화하는 동시에 야당을 이끌었다. 이 기간 동안 벨라운데의 전통주의는 극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는데,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공개 서한에서 모욕적인 발언을 철회하지 않은 프라디스타 의원에게 결투를 신청한 것이다. 결투는 실제로 벌어졌고, 양측 모두 경미한 상처만 입었다.[1]
1959년 프라도 정부가 인민행동 연례 총회 허가를 거부하자 또 다른 갈등이 발생했다. 벨라운데는 금지령을 무시하고 총회 개최를 주도했고, 프라도 정부는 그를 체포하여 리마 연안의 알카트라스 같은 섬 감옥인 엘 프론톤에 수감했다. 투옥은 12일 동안 지속되었고, 그 기간 동안 벨라운데는 수영으로 탈출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 프라도 정부는 끊임없는 여론의 압력에 직면하여 그를 석방하고 모든 혐의를 취하해야 했다.[1]
벨라운데는 자신의 정당인 인민행동을 앞세워 1962년 대선에 다시 출마했다. 결과는 매우 접전이었고, 그는 빅토르 라울 아야 데 라 토레 (APRA)에 1만 4천 표 미만의 차이로 2위를 차지했다. 어떤 후보도 헌법상 규정된 최소 득표율(3분의 1)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대통령 선출은 의회로 넘어갔다. 군부와 APRA 사이의 오랜 적대 관계로 인해 아야 데 라 토레는 3위를 차지한 전 독재자 오드리아와 거래를 맺었고, 그 결과 오드리아가 연립 정부에서 대통령이 될 예정이었다.[1]
그러나 광범위한 부정선거 주장이 제기되자 페루 군부는 프라도를 축출하고 리카르도 페레스 고도이가 이끄는 군사 정부를 세웠다. 페레스 고도이는 짧은 과도 정부를 운영하고 1963년 새 선거를 실시했으며, 이 선거에서 벨라운데는 다소 여유 있지만 여전히 근소한 5% 차이로 승리했다.[1]
3. 3. 제1집권기 (1963-1968)
벨라운데는 집권 후 국가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수도 페루의 낡은 모습을 개선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존 계곡 정착을 위한 토지개혁과 도로 건설 계획을 추진했지만, 야당과의 대립으로 인해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그는 "페루인에 의한 페루 정복"이라는 신조 아래, 아마존 열대우림 등 페루 외곽 지역 자원 개발을 추진했다.[4] "내륙으로 시야를 돌리고, 미국이 했던 것처럼 우리의 황야를 정복해야만 남미가 진정한 발전을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2] 이 과정에서 '셀바의 주변 고속도로(Carretera Marginal de la Selva)' 건설을 추진, 태평양 연안 치클라요와 아마소나스, 산마르틴 북부 지역을 연결하고자 했다. 1964년에는 마세족 학살|Genocidio matsées로 불리는 사건이 발생, 벨라운데 정부는 벌목꾼 사망을 이유로 마세족을 공격, 미국산 전투기로 네이팜탄을 투하해 수백 명을 학살했다.[4][5]
또한 산티아고 안투네스 데 마요요와 치라 피우라 관개, 티나호네스, 헤케테페케, 마헤스, 차비모칙, 올모스, 치네카스 수력 발전 등 여러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페루 국립은행(Banco de la Nación) 설립을 감독하고, 빈곤 완화를 위해 리마 등지에 "사회적 이익" 주택 프로그램을 추진, 수만 가구에 혜택을 주었다. 수백 개의 원주민 공동체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6] 병원 네트워크를 미개척 지역으로 확장했으며,[7] 사회 보장 범위를 개선했다.[8] 그러나 경제 정책 실패 비판 속에서 1967년 솔화가 평가절하되었다.
1968년, 벨라운데 정부는 라 브레아와 파리냐스 석유 유전 분쟁을 스탠더드 오일 오브 뉴저지 자회사와 해결했다고 발표했지만, 보상금 지불 결정에 대한 국민적 분노로 내각이 사임했다. 계약서 마지막 페이지(11페이지) 누락 사건은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며, 벨라운데가 약속한 기여금 내용이 담겨있다는 의혹을 증폭시켰다.
당시 군부는 부유한 엘리트 계층과 거리를 두었고, 고등 군사 연구 센터는 마누엘 곤잘레스 프라다와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의 연구를 장려하여 엘리트 계층이 외국 자본과 페루 주권을 맞바꾸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장교들을 배출했다.[9] 결국 벨라운데는 군사 쿠데타로 실각했고, 후안 벨라스코 알바라도 장군이 7년간 페루를 통치했다. 벨라운데는 미국에서 하버드, 존스홉킨스,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강의하며 10년을 보냈다.[10] 한편, 벨라스코 군사 정권은 석유 산업 국유화와 토지 재분배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개혁을 시행했다.
3. 4. 망명과 귀국
벨라운데는 집권 후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페루의 수도가 많이 낡았다고 주장하며 개혁과 발전을 주장했다. 벨라운데는 아마존 계곡에 정착민을 유치하기 위한 토지개혁 계획과 도로건설계획을 세웠지만, 국내 정치 문제에 있어서 야당과의 대립으로 인해 개혁 정책은 지지부진했다. 북부 페루에 위치한 원유 생산지 개발을 둘러싸고 미국 기업인 국제석유회사와 결탁한 사실이 드러나 국민들의 원성을 샀고, 마침내 1968년 군사혁명위원회에 의해 실각당했다.[1] 벨라운데는 실각 이후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70년에 페루에 귀국했지만 얼마 안 가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다.[1] 벨라운데 테리는 페루의 민주화와 자유주의를 주장하며 후안 벨라스코와 대결했다.[1] 1975년 쿠데타로 후안 벨라스코가 실각당하자 벨라운데 테리는 다시 페루로 귀국했으며, 1980년 대통령 선거에 나서서 44%의 득표율로 다시 당선되었다.[1]
3. 5. 제2집권기 (1980-1985)
벨라운데 테리는 페루가 직면한 외채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심각한 인플레이션, 좌익 게릴라 활동, 긴축 정책 시행으로 인기를 잃었다. 결국 그의 정당인 AP는 1985년 선거에서 참패했다. 퇴임 이후 벨라운데 테리는 종신 상원의원으로 재직하였다.[11]
1980년 4월, 페루 경제가 심각한 불황에 직면하자 군사 정부는 선거를 통해 헌정 질서를 회복하도록 허용했다. 벨라운데는 15명의 후보 중 45%의 득표율로 5년 임기를 얻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여러 신문을 소유주에게 반환하여 언론의 자유가 페루 정치에서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했다. 점차 벨라스코 군사 정부의 토지 개혁의 급진적인 결과를 되돌리고, 미국과의 독자적인 관계를 바꾸려 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Guerra de las Malvinases)이 아르헨티나와 영국 사이에서 발발하자, 벨라운데는 페루가 필요한 모든 자원으로 아르헨티나를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여기에는 페루 공군 전투기, 함선, 의료팀이 포함되었다. 벨라운데 정부는 양국 간 평화 협정을 제안했지만,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가 거부하고[12] 영국이 섬에 배치된 아르헨티나군을 공격하면서 무산되었다. 칠레가 영국을 지원하자, 벨라운데는 라틴 아메리카의 단결을 촉구했다.
국내적으로는 그의 가장 중요한 유산으로 여겨지는 '셀바 주변 고속도로'(Carretera Marginal de la Selva) 완공을 포함하여 첫 임기 동안 계획된 많은 프로젝트를 계속했다. 이 도로는 태평양 연안의 치클라요와 당시 고립되었던 아마조나스 북부 및 산마르틴 지역을 연결하는 필수적인 도로였다.
긍정적인 출발에도 불구하고, 벨라운데의 인기는 인플레이션, 주택 전쟁, 경제난, 테러리즘으로 인해 하락했다. 1인당 소득이 감소하고 페루의 외채가 급증했으며, 페루 내전 기간 동안 좌익 반군(특히 센데로 루미노소)의 폭력이 증가했다. 그는 실업률이 50%를 넘고 노숙자 수가 30%를 넘는 잃어버린 10년의 절정기에 대통령이었다.
벨라운데는 센데로 루미노소 문제에 개인적으로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반군 운동은 그의 첫 임기 동안에도 활동했지만 큰 지지 없이 진행되었다. 일부 정부 관리와 반군은 인권 침해 혐의를 받았고, 아야쿠초와 아푸리막 지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군사 정부로부터 이어진 경제 문제는 1982~83년 "엘니뇨" 현상으로 악화되었다. 이 현상은 전국 일부 지역에 광범위한 홍수를, 다른 지역에는 심각한 가뭄을 일으켰고, 주요 자원 중 하나인 해양 어류 개체 수를 급감시켰다.
3. 6. 퇴임 이후
벨라운데 테리는 페루가 직면한 외채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고, 심각한 인플레이션, 좌익 게릴라 준동, 긴축 정책 시행으로 인기를 잃었다. 결국 1985년 선거에서 AP는 참패했다. 퇴임 후 벨라운데 테리는 종신 상원의원으로 재직했다.
1985년 대선에서 벨라운데의 당인 아시온 포풀라르(Acción Popular)는 아프라(APRA) 후보 알란 가르시아에게 패배했다.[1] 1979년 헌법에 따라 벨라운데 테리는 종신 상원의원으로 페루 상원에 진출했으나,[1] 이 특권은 1993년 헌법에 의해 폐지되었다.[1]
4. 비판 및 논란
벨라운데는 첫 임기 동안 "페루인에 의한 페루 정복"이라는 신조 아래 여러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는 아마존 열대우림 등 페루 외곽 지역의 자원 개발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었다.[4] 그는 "내륙으로 시야를 돌리고, 미국이 한 번 했던 것처럼 우리의 황야를 정복해야만 남미가 마침내 진정한 발전을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2]
1964년, 마세족 학살es이라고 불리는 사건에서 벨라운데 정부는 마세족을 표적으로 삼았다. 페루군은 미국산 전투기를 이용하여 원주민들에게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수백 명을 살해했다.[4][5]
1968년, 벨라운데 정부는 라 브레아와 파리냐스 유전에 대한 분쟁을 해결했다고 발표했지만, 스탠더드 오일에 보상금을 지불하기로 한 결정은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다. 벨라운데가 서명한 계약서에 마지막 페이지(11페이지)가 누락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누락된 페이지에는 벨라운데가 지불하기로 약속했던 기여금 내용이 담겨 있었다.
군사 쿠데타로 실각한 벨라운데는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활동했다.[10]
두 번째 임기 동안 벨라운데의 인기는 인플레이션, 경제난, 테러리즘 등으로 인해 하락했다. 페루 내전 기간 동안 좌익 반군, 특히 센데로 루미노소의 폭력이 증가했다. 일부 정부 관리와 반군은 인권 침해 혐의를 받았고, 아야쿠초와 아푸리막 지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벨라운데 집권 시기 페루는 잃어버린 10년의 절정기를 맞이하여 실업률이 50%를 넘고 노숙자 수가 30%를 넘는 등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다.
5. 역대 선거 결과
1962년 선거에서 인민행동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다. 1963년 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1980년 선거에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62년 선거 | 페루의 대통령 | 46대 | 인민행동당 | 32.13% | 544,180표 | 2위 | 낙선 |
1963년 선거 | 페루의 대통령 | 49대 | 인민행동당 | 39.1% | 708,662표 | 1위 | |
1980년 선거 | 페루의 대통령 | 52대 | 인민행동당 | 44.93% | 1,793,190표 | 1위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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