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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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원대는 사카모토 료마가 이끌었던 일본의 무역, 운송, 개척 등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으로, 1865년 가메야마샤추로 시작하여 1867년 도사번의 지원을 받아 해원대로 개칭되었다. 삿초 동맹 체결을 지원하고, 무역 및 항해 훈련을 실시하는 등 메이지 유신 시기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나, 사카모토 료마 암살 이후 분열되어 해산되었다. 해원대 해산 이후, 그 유산은 미쓰비시 재벌 등 일본 근대 해운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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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대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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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 1865년 |
해산 | 1868년 |
종류 | 상사 겸 정치 조직 |
본부 | 나가사키 현 |
활동 지역 | 일본 |
설립자 | 사카모토 료마 |
주요 인물 | 사카모토 료마 고토 쇼지로 이와사키 야타로 |
역사적 배경 | |
시대적 배경 | 막말 |
설립 목적 | 사쓰마 번의 경제적 지원 및 정치 활동 |
주요 활동 | 해운업 무역 정치 공작 |
조직 구조 | |
주요 구성원 | 사카모토 료마 (대장) 나카오카 신타로 도사 번 출신 인사 다수 |
재정 지원 | 고토 쇼지로를 통한 사쓰마 번의 지원 |
주요 사건 | |
이로하마루 사건 | 해원대의 이로하마루 침몰 사건 연루 |
사카모토 료마 암살 | 사카모토 료마 암살 사건 |
영향 및 유산 | |
후신 | 미쓰비시 상사의 모태 |
현대적 계승 | 소프트뱅크 사명의 유래 (소프트뱅크) |
관련 단체 | 해원대 (음악 그룹)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무쓰 무네미쓰 |
로마자 표기 | Kaientai |
2. 연혁
1865년 막부 기관인 고베 해군훈련소가 해산되자, 사쓰마 번의 원조를 받아 나가사키 가메야마(현재 나가사키시 이라바야시 지구)에 해원대의 전신인 가메야마샤추가 결성되었다. 토머스 블레이크 글러버의 '글로버 상회'와 총기 거래를 시작하여 번에 총기를 도매하고, 물자 수송이나 항해 훈련도 하였다. 1866년 제2차 막부 조슈 전쟁에서는 조슈번 군함에 동승, 6월 시모노세키 해전에 종군했다.
1867년 4월, 사카모토 료마의 탈번 죄가 면제되고 도사번 부속 외곽기관으로 '해원대(海援隊)'로 개칭되었다. 해원대는 이로하마루 침몰 사건(1867년 4월 23일 밤)에 대해 기슈번에 배상금을 청구하였다. 무기와 군함을 사쓰마 번 명의로 조슈에 보내는 등 험악했던 사쓰마와 조슈의 관계 회복을 주선했고, 6월에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기도 다카요시를 대표로 하는 삿초 동맹 체결에 큰 역할을 한다.
사카모토 료마는 조정 복권과 도막 운동에 분주했지만, 내전 회피를 주장하는 사카모토와 무력 도막을 주장하는 사쓰마, 조슈의 의견이 대립하였다. 같은 해 11월 15일, 교토 오미야에서 사카모토가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암살되자 해원대는 구심력을 잃고 분열되었다. 보신 전쟁 발발 이후 나가오카 켄키치 일파는 소도 섬을 점령하고, 스가노 가쿠베이는 사사키 다카유키와 함께 나가사키 부교소를 점령하였다. 나가오카가 도사 번으로부터 해원대 대장으로 임명되었지만, 다음 해 4월 번의 명령으로 해산되었다.
해원대는 고토 쇼지로에 의해 도사 상회로, 이와사키 야타로에 의해 쓰쿠모 상회, 미쓰비시 상회, 우편기선 미쓰비시 회사(후의 일본 유센 주식회사, 미쓰비시 상사) 등으로 이어진다.
사카모토는 에조치(홋카이도) 개발 사업을 계획했으며, 후에 친족 사카모토 나오히로가 유지를 이어 메이지 시대에 홋카이도 소라치 지청 우라우스정으로 이주하였다.
2. 1. 가메야마샤추(亀山社中) 시기 (1865-1867)

1865년 9월, 나가사키시 이라바야시(伊良林) 지구에 있는 가메야마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중심으로 해원대의 전신인 가메야마샤추가 결성되었다. 고베 해군훈련소 해산 이후 사쓰마 번의 원조를 받아 설립되었으며, 토머스 블레이크 글러버의 '글로버 상회'와 협력하여 총기 거래를 시작, 조슈 번에 무기를 공급하는 등 삿초 동맹 체결에 기여했다.[3] 1866년 제2차 막부 조슈 전쟁 당시 조슈 번 군함에 동승하여 시모노세키 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결성 당시 료마의 역할에 대해 이견이 존재한다. 곤도 조지로나 다카마쓰 타로 등이 실질적으로 결성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가메야마샤추'라는 명칭도 당시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 있다.
사쓰마 번의 고마쓰 다테와키는 곤도, 다카마쓰 등과 함께 나가사키에 들어가 가메야마샤추 구성원에게 1인당 3료 2분을 지급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훗날 회상에서 "총을 사는 쪽은 직접 외국인에게 샀다"라고 말했고, 이노우에 가오루는 사쓰마 번과의 접촉에 다카마쓰, 곤도 등의 소개를 거쳤지만 "사쓰마 번" 명의 사용은 고마쓰 다테와키와의 직접 협상에서 허락받았다고 말했다. 이치사카 타로는 가메야마샤추의 거래 관여 정도를 "수수께끼"로 보며, 상사나 주식회사처럼 보는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마치다 아키히로는 가메야마샤추의 실태를 "사쓰마 번 명의로 사들인 군함을, 사쓰마의 지시 하에 운항하던 도사의 탈번 낭인 집단"으로 보고, "해군이나 상사 등으로 하는 것은 사실 오인"이라고 말했다.[4]
1866년 3월, 사이고 다카모리와 기도 다카요시를 대표로 하는 삿초 동맹 체결에 곤도와 다카마쓰 등이 관여했다. 그러나 마치다 아키히로는 이 시기 곤도 등은 사쓰마 번이 고마쓰 다테와키를 통해 비호·활용한 탈번 낭인 집단에 불과하며, 료마의 관여 없이 "이 단계의 사중이 후의 료마의 해원대에 무매개로 연결되었다고 하는 연속성은 난센스"라고 주장했다.
곤도는 조슈 번이 사쓰마 번 명의로 유니언 호를 구입하고 승무원 대부분을 "사중" 멤버로 하며, 조슈 번이 사용하지 않을 때는 사쓰마 번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사쿠라지마 조약"을 이노우에 몬타와 작성하여 사쓰마 번의 이해를 얻었다. 그러나 유니언 호를 조슈 번 용선으로 사용하려는 조슈 번과, 조약을 핑계로 대금 지불 없이는 인도할 수 없다는 곤도가 대립했다(유니언 호 사건). 이 분쟁에서 곤도뿐 아니라 "사중" 멤버가 결속하여 조슈 번 주장에 반대했을 것으로 보이며, "사중의 성립은 유니언 호 귀속을 둘러싸고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평가된다.
2. 2. 해원대(海援隊) 시기 (1867-1868)
1867년 4월, 사카모토 료마의 탈번 죄가 사면되면서 도사번 소속의 외곽 기관으로서 '해원대(海援隊)'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해원대는 도사 번의 원조를 받았지만, 기본적으로는 독립적인 조직이었으며, 탈번 낭인, 무사, 촌장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해원대약규"에는 "본번을 탈하는 자, 및 타번을 탈하는 자, 해외의 뜻이 있는 자, 이 대에 들어갈 것", "운수, 사리, 투기, 개척, 본번의 응원"이라고 명시되어, 이윤 추구가 당당하게 내걸렸다. 해원대는 회사와 해군을 겸한 조직이었으며, 항해술, 정치학, 어학 등을 배우는 학교이기도 했다.해원대는 무역, 운송, 개척 등 상업적 활동과 함께, 항해술, 정치학, 어학 등 교육 기관의 역할도 수행했다. 1867년 이로하마루 침몰 사건(이로하마루와 기슈번의 군함 메이코마루가 충돌한 사건)을 둘러싸고 기슈번에 배상금을 청구하는 등 해상 분쟁에도 관여했다.
1867년 11월 15일, 사카모토 료마가 교토 오미야에서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암살되면서 해원대는 구심력을 잃고 분열되었다. 보신 전쟁 발발 이후, 해원대 대원들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일부는 신정부군에 참여하고, 일부는 흩어졌다. 1868년 4월, 도사 번의 명령으로 해원대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해원대의 해산 이후, 그 유산은 도사 상회, 쓰쿠모 상회, 미쓰비시 상회 등으로 이어져 일본 근대 해운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3. 주요 인물
해원대는 사카모토 료마를 중심으로 결성된 조직으로,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참여했다.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출신 지역 | 이름 | 역할 및 활동 | 해원대 이후 행적 |
---|---|---|---|
도사 번 | 사카모토 료마 | 해원대 대장[1] | 1867년 암살 |
도사 번 | 이와사키 야타로 | 미쓰비시 재벌 창립[1] | |
도사 번 | 사사키 다카유키 | 료마 사후 2대 대장[1] | 보신 전쟁 지휘 |
도사 번 | 나가오카 겐키치 | 해원대 사무 전반 담당[1] | 메이지 유신 후 미카와현 지사 |
도사 번 | 이시다 에이키치 | 여러 현 지사 역임, 무쓰 무네미쓰 보좌 | |
도사 번 | 사카모토 나오 | 료마의 양자[1] | 료마 가문 계승 |
도사 번 | 스가노 가쿠베 | 메이지 유신 후 해군 소좌 | |
도사 번 | 신구 마노스케 | 메이지 유신 후 해군 대위 | |
도사 번 | 노무라 유키아키 | 초대 이바라키현 령, 검사장 역임 | |
도사 번 | 나카지마 노부유키 | 자유민권 운동 지도, 초대 중의원 의장 | |
도사 번 | 곤도 초지로 |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군함 병기 매입에 공헌, 자결 | |
도사 번 | 사카모토 세이지로 | 자유민권 운동 참여 | |
에치젠 번 | 세키 요시오미 | 여러 현 지사, 귀족원 의원 역임 | |
에치젠 번 | 와타나베 고하치 | 홋카이도 개척사 출사, 군장 역임 | |
에치젠 번 | 야마모토 고도 | 오사카 정신병원 원장 역임 | |
에치젠 번 | 사사키 사카에 | ||
에치젠 번 | 고타니 코조 | 이로하마루 선장 | |
에치젠 번 | 고시코시 지로 | ||
에치고 | 시라미네 슌마 | 조선소 경영 | |
에치고 | 하시모토 큐타유 | ||
사누키 | 사야나기 다카지 | 간린마루 승무원 | |
기이 | 무쓰 무네미쓰 | 외무대신, 불평등 조약 개정 | |
시모노세키 | 이토 스케타유 | 해원대 지원 | |
나가사키 | 오소네 에이시로 | 해원대 지원 | |
나가사키 | 오우라 게이 | 해원대 지원 | 일본 차 수출 무역 선구자 |
나가사키 | 나카에 조민 | 료마에 대해 이야기함 |
3. 1. 도사 번 출신
- 사카모토 료마 - 해원대 지휘관[1]
- 이와사키 야타로[1]
- 사와무라 소노조[1]
- 사사키 다카유키 - 료마 사후 해원대의 두 번째 지휘관[1]
- 나가오카 겐키치[1]
- 이시다 에이키치[1]
- 사카모토 나오 - 료마의 양자[1]
- 스가노 가쿠베[1]
- 진구 우마노스케[1]
- 노무라 코레아키[1]
3. 2. 에치젠 번 출신
- '''세키 요시오미''' (야마모토 류지) - 후쿠이번사. 메이지 유신 후 오사카부 권판사, 돗토리현 권령, 대심원 검사, 도쿠시마현 지사, 야마가타현 지사, 귀족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 '''와타나베 고하치''' (오야마 소타로, 오야마 시게) - 후쿠이번사. 보신 전쟁에 참가했고, 메이지 유신 후 홋카이도 개척사에 출사했다. 후에 후쿠이현 요시다군장, 오이군장을 역임했다.
- '''야마모토 고도''' (복보, 고도) - 후쿠이번 의사 야마모토 소헤이의 차남. 마쓰모토 료준 문하. 오사카 정신병원의 원장을 역임했다. 아들 소이치를 이은 친척 아이 유카는 야마모토 병원의 초대 원장이 되었다.
- '''사사키 사카에''' (미카미 에이타로, 미카미 타로) - 후쿠이번사. 오오구미 사무라이 미카미 손다유의 아들.
- '''고타니 코조''' - 이로하마루 선장
- '''고시코시 지로'''
3. 3. 기슈 번 출신
무쓰 무네미쓰는 기슈 번 출신으로, 훗날 외무대신이 되어 불평등 조약 개정에 힘썼다.3. 4. 기타 출신
- 사카모토 료마 - 해원대 대장.
- 사와무라 소노조
- 사사키 다카유키 - 토사번 상사. 보신 전쟁에서 해원대를 지휘했으며, 료마 사후에는 전투 면에서 실질적인 2대 대장이었다.
- 나가오카 겐키치 - 해원대의 사무 전반을 처리했으며, 료마 사후 2대 대장이었다. 토사번 출신의 의사 집안으로 나루타키 학원에서 지볼트에게 의학을 배웠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미카와현 지사를 역임했다.
- 이시다 에이키치 -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오가타 코안에게 의술을 배웠다. 메이지 유신 후 아키타현 령·지바현 지사 등 여러 현 지사를 역임했다. 해원대 시절 동료였던 무쓰 무네미쓰가 농상무 대신이 되었을 때 차관으로 초빙되어 그를 보좌했다. 나가오카와 함께 뛰어난 인재로 평가받아 "이길(二吉)"이라고 칭송받았다.
- 사카모토 나오 (다카마쓰 타로) - 료마의 조카이며, 자식이 없었던 료마의 가문을 이었다.
- 스게노 카쿠베 - 토사에서 촌장 일을 했다. 메이지 유신 후 해군 소좌가 되었으며, 서남 전쟁 때는 사쓰마에 체류했다.
- 신구 마노스케 - 료마의 이웃에서 태어난 소꿉친구. 료마의 누나 오토메에게 보낸 편지에 자주 등장한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해병단에 소속되어 해군 대위를 역임했다.
- 이케우치 조타
- 야스오카 킨마
- 노무라 유키아키 (노무라 신타로) - 토사번 백찰격 출신으로 포술 교수를 했다. 메이지 유신 후 사가현 권참사·참사를 역임한 후 초대 이바라키현 령에 취임했다. 그 후 고소원 검사, 도쿄 고소원 검사장·오사카 고소원 검사장을 역임했다.
- 나카지마 노부유키 (나카지마 사쿠타로) - 토사의 향사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 후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함께 자유민권 운동을 지도했다. 초대 중의원 의장을 역임했다.
- 곤도 초지로 - 생가는 료마의 집 근처에서 만두 가게를 했다. 사초 동맹 때 이토 히로부미·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조슈번의 군함 병기 매입에 큰 공을 세웠다. 조슈번의 권유로 영국 유학을 갈 예정이었지만 다른 동료들로부터 탈퇴를 꾸짖음을 당하고 할복했다.
- 요시이 겐마
- 사카모토 세이지로 (미요시 기요아키) - 료마의 친척. 메이지 유신 후 자유민권 운동에 참여했다.
- 세키 요시오미 (야마모토 류지) - 후쿠이번사. 메이지 유신 후 오사카부 권판사, 돗토리현 권령, 대심원 검사, 도쿠시마현 지사, 야마가타현 지사, 귀족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 와타나베 고하치 (오야마 소타로, 오야마 시게) - 후쿠이번사. 보신 전쟁에 참가했고, 메이지 유신 후 홋카이도 개척사에 출사했다. 이후 후쿠이현 요시다군장, 오이군장을 역임했다.
- 야마모토 고도 (복보, 고도) - 후쿠이번 의사 야마모토 소헤이의 차남. 마쓰모토 료준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오사카 정신병원의 원장을 역임했다. 아들 소이치를 이은 친척 아이 유카는 야마모토 병원의 초대 원장이 되었다.
- 사사키 사카에 (미카미 에이타로, 미카미 타로) - 후쿠이번사. 오오구미 사무라이 미카미 손다유의 아들.
- 고타니 코조 - 이로하마루 선장
- 고시코시 지로
- 시라미네 슌마 - 나가오카번사. 메이지 유신 후 유학하여 조선술을 배웠으며, 귀국 후 조선소를 경영했다.
- 하시모토 큐타유
- 사야나기 다카지 - 간린마루 태평양 횡단 시 승무원.
- 무쓰 무네미쓰 - 기슈번사. 메이지 유신 후 지사·현령 등을 역임했으며, 이후 농상무 대신·외무 대신을 역임했다. 외무 대신으로서 조약 개정·청일 전쟁 강화·삼국 간섭 등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 이토 스케타유 - 시모노세키의 상인으로, 해원대의 활동을 지원했다.
- 오소네 에이시로 - 나가사키의 상인이며, 해원대의 활동을 지원했다. 거상 오소네 겐도의 동생.
- 오우라 게이 - 나가사키의 상인으로 일본 차 수출 무역의 선구자. 해원대의 활동을 지원했다.
- 나카에 조민 - 해원대 대원은 아니었지만 해원대 숙소에서 얹혀살았다. 후년에 당시 료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4. 운영 선박
- 와일 우에후 호
- 유니온 호
- 이로하마루
- 다이쿄쿠마루
5. 평가 및 의의
海援隊|카이엔타이일본어는 1867년 4월 사카모토 료마가 도사번의 외곽기관으로 결성한 조직이다. 삿초 동맹 체결에 큰 역할을 했지만, 료마의 암살로 구심력을 잃고 분열, 1868년 4월 해산되었다. 해원대의 정신은 이와사키 야타로의 미쓰비시 상사 등으로 이어졌으며, 료마의 에조치(홋카이도) 개발 계획은 훗날 친족인 사카모토 나오히로가 홋카이도 소라치 지청 우라우스정으로 이주하여 실현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Origin of Brand Name and Logo
https://group.softba[...]
SoftBank Group Corp.
2018-09-25
[2]
웹사이트
【総合商社の歴史】坂本龍馬から始まった?就活に役立つ総合商社の歴史を解説
https://unistyleinc.[...]
unistyle
2021-02-25
[3]
웹사이트
亀山社中とは
http://www.city.naga[...]
長崎市亀山社中記念館
[4]
뉴스
龍馬と亀山社中、関係薄い? 船中八策は虚構の可能性
https://www.asahi.co[...]
2018-02-26
[5]
간행물
Nagasaki Report
http://dx.doi.org/10[...]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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