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소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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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소세자는 조선 영조의 장손이자 사도세자의 장남으로, 1750년에 태어나 1752년에 요절했다. 영조의 첫 손자이자 적장자였으며, 태어나자마자 원손으로 불리고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나, 3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사후 의소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고종 때 장조의황제로 추존된 아버지 사도세자와 함께 의소세자 또한 의소태자로 격상되었다. 묘는 의령원이며, 현재는 고양시 서삼릉 경내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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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소세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이정 |
작위 | 왕세손 |
휘 | 이정 (李琔) |
생애 | |
출생 | 1750년 9월 27일 |
출생 장소 | 조선 한성부 창덕궁 |
사망 | 1752년 4월 17일 |
사망 장소 | 조선 한성부 창덕궁 |
묘소 | 의소세손 묘 |
가족 관계 | |
왕조 | 전주 이씨 |
왕가 | 이씨 |
아버지 | 사도세자 이선 |
어머니 | 혜경궁 홍씨 |
조부 | 영조 이금 |
백부 | 효장세자 이행 (이복) |
아우 | 정조 이산 |
조카 | 상계군 이담 (이복), 문효세자 이순 (동복) |
기타 정보 | |
능호 | 창흥 (昌興, Changheung) |
2. 생애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이며, 아버지는 사도세자이다. 영조의 첫 적장손으로 1750년 9월 27일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영조는 일찍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 이후 유일한 아들이었던 사도세자에게서 얻은 첫 적장손인 의소세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1751년 5월 13일 영조는 그를 왕세손으로 책봉하며 후계자로 공식화했다. 당시 사도세자는 소론을 지지했고, 영조는 집권 세력이던 노론을 지지하며 정치적 긴장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왕세손 책봉 이듬해인 1752년 4월 17일 3살의 어린 나이로 창경궁 통명전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손자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특별히 국장을 치르도록 명하고[2] '의소(懿昭)'라는 시호를 직접 내렸다.
처음 묘소는 한성부 안현산 남쪽에 마련되었으며[3], 영조는 묘의 이름을 의소묘(懿昭墓)라 하고 직접 묘비명을 지어 세웠다. 사후 아버지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의소세자(懿昭世子), 의소태자(懿昭太子)로 격상되었다. 1870년(고종 7년)에는 묘가 의령원( 懿寧園|의령원한국어 )으로 격상되었고[4], 여러 차례 이장을 거쳐 1949년 고양시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2. 1. 탄생과 왕세손 책봉
1750년 9월 27일(영조 26년 음력 8월 27일)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영조의 장손이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동복동생으로는 훗날 왕위에 오르는 정조 이산이 있고, 친 여동생으로는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있다. 이복 서제로는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 있다. 그는 영조의 여러 후손 중 처음으로 정실에게서 태어난 적장손이었다.그가 태어나기 직전, 영조가 유독 아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난 셋째 딸 화평옹주의 3년상이 끝났다. 영조는 영빈 이씨가 혜경궁 홍씨의 출산을 돕는 것을 보고, 죽은 딸은 벌써 잊고 손자 태어난 것만 좋아하느냐며 서운함을 내비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영조는 어린 손자의 탄생에 큰 기대를 걸었다. 이는 가까운 친척이 드물었던 왕실의 상황(삼종의 혈맥), 첫 아들 효장세자가 일찍 죽어 사도세자 외에는 아들이 없었던 점, 그리고 서자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졌던 영조에게 정실 부인에게서 얻은 첫 적장손이라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영조는 후궁에게서 아들을 더 얻기를 원했지만 계속 딸만 태어났다. 이 때문에 영조는 의소세자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원손(元孫)으로 삼았고,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그의 태(胎)는 같은 해 12월 25일 경상북도 영천군 영천면(현 영주시) 괴정(槐亭) 동편 야산에 봉안되었다. 영조는 직접 손자에게 학문을 가르칠 스승(세손사부)들을 물색하여 임명하는 등 교육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1751년 4월, 의소세자는 부스럼을 앓았다. 4월 12일 영조는 내의원 제조에게 직접 숙직을 명하며 손자의 건강을 염려했고, 다행히 부스럼은 4월 28일에 나았다.
같은 해 6월 6일(영조 27년 음력 5월 13일), 영조는 의소세자를 왕세손으로 책봉하며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공식화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752년 3월 4일, 의소세자는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3살의 어린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1751년 11월 현빈 조씨의 죽음에 이어 어린 손자마저 잃자 영조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영조는 직접 제문을 지어 애통한 마음을 표현했으며, 그해 4월 12일에는 요절한 손자에게 '의소(懿昭)'라는 시호를 직접 내려주었다.[2][3]
2. 2. 이른 죽음과 영조의 애도
1751년 4월에 부스럼을 잠시 앓았으나 같은 달 28일 회복하였다. 이후 1751년 6월 6일(영조 27년 음력 5월 13일)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왕세손으로 정식 책봉되었다.그러나 왕세손 책봉 이듬해인 1752년 3월 4일, 불과 3세의 어린 나이로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갑작스럽게 훙서하였다. 바로 전 해인 1751년 11월에 현빈 조씨가 사망하였는데, 영조는 현빈과 어린 손자의 연이은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깊이 상심하였다. 영조는 손자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직접 제문(祭文)을 지었고, 같은 해 4월 12일에는 '의소(懿昭)'라는 시호를 직접 내려주었다.
손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영조는 특별히 추모사와 비문을 친히 지어 슬픔을 표현했다.
> 지극한 심정으로 잘 자라기를 바랐더니 색동옷 어루만지며 슬픔만을 싸서주고 이름을 높임에는 시호가 있는 법이니 보책을 내려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이전(彛典)을 의식대로 준행하니, 남기고 간 자취가 이에 드러났다.
>
> 오직 너 세손아! 내가 너를 안았을 때 하늘이 이 나라를 도운 것으로 생각하였다. 상서로운 빛 별자리에 뻗치더니 이윽고 네가 태어났으며, 특이한 모습은 해와 달의 표상처럼 빼어났는데 더구나 적전(嫡傳)에 있어서랴? 오직 영특하고 온화한 모습은 자연히 제왕가(帝王家)의 귀상(貴象)이 있었고, 인후(仁厚)하고 자효(慈孝)한 성품은 어린 나이의 양지(良知)가 아님이 없었구나.
>
> 소저(小邸)의 명호를 정함에 이르러서는, 갑절이나 늙으막의 위로가 되었었다. 기질은 겨우 두 서너 살에 엄연히 덕기(德器)를 이루었고, 총명은 60여 자(字)의 예서(隷書)를 능히 분변하였다. 오래 침전(寢殿) 곁에 두고도 때로 자리가 비면 문득 허전하였고, 항상 밥상 곁에 앉아서 먹을 때마다 반드시 권하였는데 심지어는 공교로움을 싫어하고 투박함을 좋아했고 미쁘게도 검약을 품부하여 순박함이 터를 잡았었다. 지극한 사랑으로 어린이를 안고서 오직 열성조의 도우심에 감사하였고, 큰 책임 물려줄 곳이 있으니 거의 종사의 걱정이 없음을 다짐할 수 있었다. 무슨 일로 국운이 침체의 운수를 당하여, 내 손자를 죽게 하였더란 말인가?
>
> 처음에는 예사로운 질병으로 여겨 저절로 좋아지려니 했는데, 훌륭한 자질이 갑자기 거두어 마침내 아득한 곳으로 가버릴 줄 뉘 알았으리? 기왕에 탄생시키고서 왜 또 죽이는지 그 이치 알 수 없고, 비록 명은 하늘에 있다하나 사람에게도 달려 있으니 이 슬픔 끝이 없구나. 한갓 궐초(厥初)의 철명(哲命)만을 기대했는데, 영영 이후(貽後)의 유모(猷謨)를 저버렸구나.
>
> 삼전(三殿)께서는 슬하(膝下)를 잃은 슬픔을 안았으니 노경(老境)을 무엇으로 위로하며, 팔역(八域)에서는 눈을 씻고 기대했던 소망을 잃었으니 여정을 알 수 있구나. 그 모습 생각하면 아련하게 맑은 눈망울 보이는 듯한데 빈실(殯室)만이 고궁에 남았고, 자취를 더듬으며 더욱 노쇠한 이의 눈물 훔치는데 사적은 실록에 실리는구나. 진실로 시호를 내리고 이름을 남김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사후(死後)를 꾸며 길이 전할 것인가? 아름다움[懿]은 바로 덕성을 안으로 쌓아 이미 정숙하고 순수하였으며, 밝음[昭]은 곧 의용이 밖으로 드러나 오직 공손하고 아름다웠구나.
>
> 널리 공론을 수렴하여 조금이나마 나의 슬픔을 풀었노라. 이에 신 의정부 우참찬 홍상한을 보내서 옥책을 받들고 시호를 의소(懿昭)라 내리노라. 강보에서 갑자기 떠나니 비록 오래 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간책(簡冊)에 소상히 실리니 영원히 징신(徵信)은 될 수 있으리라. 다만 바라노니 밝은 혼령아, 거짓없는 이 교유를 받들지어다. 아! 슬프도다.[7]
영조의 슬픔은 매우 깊어서, 의소세손의 3년상을 모두 마친 1756년에도 "지금도 세손을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나온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한편 의소세손이 죽던 해에 그의 친동생인 이산이 태어났지만, 영조는 바로 원손이나 세손으로 책봉하지 않고 책봉을 뒤로 미루었다.
의소세손의 장례는 영조의 특별 지시로 국장을 치렀다.[2] 처음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안현산 남쪽 언덕 해좌사향(亥坐巳向)에 장사지냈으며[3], 영조는 묘의 이름을 '의소묘(懿昭墓)'라 하고 직접 묘비명을 지어 세웠다. 후에 묘는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북아현리(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중앙여고 부지)로 이장되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1899년(광무 2) 고종에 의해 장종(莊宗)으로 추존되자 의소세손도 의소세자(懿昭世子)로 격상되었고, 1901년(광무 4) 장종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다시 추존되자 의소태자(懿昭太子)로 격상되었다.
1870년(고종 7년) 묘호(墓號)가 의소묘(懿昭墓)에서 의령원(懿寧園)으로 격상되었고[4],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묘호(廟號)는 의소묘(懿昭廟)에서 영소묘(永昭廟)로 개칭되었다. 1949년 6월 7일에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당리(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어, 현재는 조카인 문효세자의 묘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6] 과거 묘가 있었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아현역 1번 출구 부근과 중앙여중·고 정문 옆 담장에는 의령원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2. 3. 사후
1752년 4월 17일, 의소세자는 창경궁 동명전에서 훙서하였다. 할아버지 영조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으며, 영조의 특별 지시로 국장을 치렀다.[2]사망 당시 묘호(墓號)는 의소묘(懿昭墓), 사당의 이름인 묘호(廟號)는 의소묘(懿昭廟)였다. 처음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안현산 남쪽 언덕 해좌 사향(亥坐 巳向)에 마련되었다.[3] 영조는 직접 묘비명을 짓고 묘비를 세웠다. 이후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북아현리(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294번지(후일 중앙여고 부지) 해좌사향으로 옮겨졌다.
1949년 6월 7일, 묘소는 다시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당리 산37-1번지(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현재 위치는 조카인 문효세자의 묘(효창원) 뒤편이다.[6]
고종 재위 6년인 1870년, 의소세자의 묘는 원(園)으로 격상되어 의령원( 懿寧園|의령원한국어 )으로 이름이 바뀌었다.[4] 이때 사당의 이름도 의소묘에서 영소묘(永昭廟)로 개칭되었다.
과거 묘소가 있었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2호선 아현역 1번 출구 부근 북아현3동 파출소 앞 오른쪽 골목과 중앙여중·고 정문 옆 오른쪽 담장에는 의령원 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한편, 의소세자의 태실은 2008년 6월 15일 영주시 고현동 산7번지 구릉 정상 부근에서 영주문화유산보존회에 의해 노출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의소세자가 죽은 해에 태어난 그의 친동생 정조 이산은 8년 뒤인 1759년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
3. 가족 관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적장자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영조이다. 동생으로는 훗날 왕위에 오르는 정조와 청연공주, 청선공주가 있다. 이복 동생으로는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 있다.
3. 1. 왕가(전주 이씨)
1750년 9월 27일(음력 8월 27일)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영조에게는 첫 번째 적장손이었다. 정조는 그의 친동생이며, 청연공주와 청선공주는 친여동생이다. 이복동생으로는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 있다.그가 태어나기 직전, 영조가 특별히 아꼈던 딸이자 의소세자의 고모인 화평옹주의 3년상이 끝났다. 영조는 손자가 태어난 것을 기뻐하면서도, 영빈 이씨가 혜경궁 홍씨의 출산을 돕는 것을 보고 죽은 딸은 벌써 잊고 손자만 좋아하는 것이냐며 서운함을 내비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아버지 | 장조 | 1735년 2월 13일 – 1762년 7월 12일 | 영조의 차남, 장조로 추존 |
어머니 | 헌경왕후 홍씨 | 1735년 8월 6일 – 1816년 1월 13일 | 홍봉한의 딸, 헌경왕후로 추존 |
조부 | 영조 | 1694년 10월 31일 – 1776년 4월 22일 | 조선 제21대 국왕 |
조모 | 영빈 이씨 | 1696년 8월 15일 – 1764년 8월 23일 | 영조의 후궁, 사도세자의 생모 |
외조부 | 홍봉한 | 1713년 – 1778년 | |
외조모 | 한산 이씨 | 1713년 – 1755년 | |
동생 | 정조 |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 조선 제22대 국왕 |
여동생 | 청연공주 | 1754년 – 1821년 6월 9일 | 김기성에게 하가 |
여동생 | 청선공주 | 1756년 – 1802년 7월 20일 | 정재화에게 하가 |
이복 동생 | 은언군 이인 | 1754년 – 1801년 | 사도세자의 서자 |
이복 동생 | 은신군 이진 | 1755년 – 1771년 | 사도세자의 서자 |
이복 동생 | 은전군 이찬 | 1759년 – 1778년 | 사도세자의 서자 |
형수 | 효의왕후 | 1754년 1월 5일 – 1821년 4월 10일 | 정조의 정비 |
매제 | 김기성 | ? – 1811년 | 청연공주의 남편 |
매제 | 정재화 | 1754년 – 1790년 | 청선공주의 남편 |
참조
[1]
웹사이트
제--호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 상 (懿昭世孫墓所都監儀軌 上)
http://www.heritage.[...]
2021-06-26
[2]
뉴스
조선왕실 장례 지침서 '국조상례보편' 국역
http://news.naver.co[...]
연합뉴스
2008-10-09
[3]
뉴스
의소세손 의령원 부장품
http://news.naver.co[...]
[4]
웹사이트
의령원 터
https://www.culturec[...]
[5]
문서
덕성(德性)이 순숙(純淑)한 것을 의(懿)라 하고 용의(容儀)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한다. 【영조실록 제76권, 영조 28년 음력 4월12일 1번째기사】
[6]
문서
문효세자묘는 1944년 용산구 효창동에서 서삼릉내 고양군 원당면 원당리로 이장되었다.
[7]
문서
조선왕조실록 영조 28년(1752 임신, 청 건륭(乾隆) 17년) 4월 12일(계묘) 1번째기사
[8]
문서
관찰사 이집(觀察使 李潗, 1670~1727)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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